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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LNCK 2025. 1. 17. 12:0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주 되심 Lordship>       ▣복음 관련

사도행전 강해 (11) /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 YouTube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행2:22~36      2021.12.26.   

※행2장의 베드로의 설교를, 같은 본문의 수많은 설교들 중에 
'가장 쉽고 명확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내용 파악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냥 성경만 읽으면, 베드로 사도가 무슨 설교를 하는지.. 감이 안 잡히거든요...

◑도입

지난 시간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 보았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21

이때 '주'의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죠?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베드로의 설교가 뭐 당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뭐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청중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이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이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는 누구이죠?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한낱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설교에 결론이 무엇이었죠? 
그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행2:21

그러니까 당연히 이들에게 이러한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아니, 도대체 예수가 누구인가? 우리가 다 알지 않는가?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 당한 죄수가 아닌가? 
자, 그런데 어떻게 그런 자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아마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눈빛으로 이 질문을 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들의 질문에 답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가 누구인가요? 
이제부터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들에게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 설교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행2:22~36

▲자,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흐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설교가 4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 첫 번째 파트는 2:22절인데,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설명합니다. 
2) 두 번째 파트는 23절인데,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설교이고요. 
3) 세 번째 파트는 24~32절까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설교이고요. 
4) 네 번째 파트는 32~35절까지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설교입니다. 

흐름이 보이시죠? 
예수님의 사역, 죽으심, 부활, 승천... 이게 복음의 골자죠.
그리고 설교의 결론이 본문의 마지막 36절입니다. 
'이 예수가 바로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설교문이,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길지가 않습니다. 
전문을 다 읽어보는데 1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총15절이에요.

아마 베드로는 이것보다 훨씬 더 길게 설교했을 것입니다. 
요즘 설교 하면 보통 30~40분 설교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더 길게 설교를 했겠죠.
그런데 누가가 긴 베드로의 설교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지금 여기에 기록해 놓았을 것입니다. 

자 이런 이해를 가지고,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씩 파트별로 살펴볼 텐지만, 흐름을 연결해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Part1. 예수님의 지상 사역 (에 대한 설교)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2절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3년이라는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베드로는 3년이라는 시간을 한 줄로 압축해서 설명합니다. 핵심이 무엇이죠?
예수님은 이 땅에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이죠.. 

물론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길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단 한 절로 간단하게,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숨어 있는데요. 
22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그러니까 이 당시 설교를 듣는 1차 청중 들도, 예수님의 사역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눈 앞에서 보았습니다. 
또 누군가의 입소문을 통해,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듣고 들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 당시 널리 퍼졌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대다수는,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온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먼 곳에서 이미 다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꿈꾸는 메시아는, 성경이 가리킨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죄로 부터 구원할 메시아가 아니라, 정치적 메시아였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그래서 다윗 왕국을 회복시켜 주고, 이스라엘이 세계를 정복하게 만드는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벤저스와 같은 힘이 센 초능력자를 원했던 거죠.
이것이 모든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갈망한 메시아 였습니다. 

자, 그런데 어느 날, 혜성같이 이스라엘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지도 못한 수많은 권능과 이적을 행합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자, 그러니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린 메시아, 나사렛 예수에 쏠렸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살고있던 유대인들에게까지도 
이 예수님의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하나 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린 그 메시아가 아닐까?' 
'이 사람이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이 보내시기로 한 그 메시아가 아닐까?' 

그만큼 예수님은, 그 당시 인싸 중의 인싸 였습니다. 
자, 그러나 결국에는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좋은 선지자' 라고 생각한 유대인들도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순간에, 
예수님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부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구약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신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달린 자'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누구예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도저히 좋게 볼 수가 없는 거죠.

물론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들이 다 봤거든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절대로 그들에게, 메시아가 될 수는 없는 거죠.
왜냐하면 결국에는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니까요.
절대로 예수가 메시아일 수는 없다는 것이죠.

자, 그러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일어나 백성들 앞에 서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당시 설교를 듣는 모든 청중들은, 하나 같이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다. 예수님이 큰 기적과 권능을 행한 것을 우리도 다 안다.
우리도 다 들은 게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느냐? 
그러면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은 것 아니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면, 우리가 기다린 메시아가 아니라, 
그냥 사이비 아니냐, 이단 아니냐?'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 그래서 베드로가 계속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설교한 것입니다.

◑Part2. 예수님의 죽으심 (에 대한 설교)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무슨 얘기죠? 
'맞다. 너희들이 아는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계획이 무엇이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려는 계획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죽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죽음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달려 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던 것이죠.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정하신 그분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대로,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신 그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맞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아를, 너희들이 못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결정적인 펀치를 날립니다. 
'너희들이 말한 대로, 예수님이 죽기는 죽었는데, 너희들이 모르는 게 있다.
바로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저주 받아 죽은 게 아니라는 거죠.  

그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거죠. 
너희들이 모르는.. 그 분의 죽음 뒤에,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합니다.

물론, 이 당시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도 많이 퍼지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부활에 대한 거짓 루머도 함께 퍼졌습니다.  
대표적인 거짓 뉴스가 '시체 도적설'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도둑질 했다는 거죠.. 
그래놓고,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고 제자들이 뻥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자, 이런 거짓 뉴스가 당시 대제사장들로부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부정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반신반의 했습니다. 
한 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제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동시에 또 한 편에서는 '아니야 제자들이 시체를 숨겨 놓고 제자들이 뻥친 거래' 
이런 소문이 들립니다. 그러니까 온갖 유언비어가 동시에 돌았던 거죠.

자, 그래서 사람들이 헷갈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부활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24~32절까지의 설교인데요. 총 8절에 걸쳐서 부활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Part3. 예수님의 부활 (에 대한 설교)

그러니까 본문의 베드로는, 지금 설교의 대부분을, 어디에 쏟아붓고 있는 거죠? 
예수님의 "부활"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정당성'에 관한, 하나님의 옹호 vindication 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인용합니다. 
특별히 구약에서 다윗이 쓴 시편의 이야기를 가져오는데요. 
그것이 본문 25~31절까지의 인용입니다. 

자 이 부분은, 다윗이 쓴 시편 16편의 인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위 본문을 눈으로 한 번 살펴보십시오.
전부 주어가 '나'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누구이죠? 
우리가 생각 없이 읽으면, 다윗이 썼으니까, '나'는 다윗이겠죠. 
실제로 이 시편을 읽었던 당시 유대인들은, 이 내용을 다윗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 그런데 다윗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이 쓴 건 맞는데  *시16편, 행2:25~31
이 내용이 다윗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27절을 한 번 보십시오.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자 '내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만약 다윗 자신의 얘기였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렇죠? 

여러분, 다윗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어서 그의 시체는 이미 무덤에 있고요. 
무덤에서 썩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다윗의 묘가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지나가는 예루살렘 길에, 다윗의 무덤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오늘날 우리 가운데 있는 선릉이나 정릉과 같은 거죠.
다윗 왕의 묘도 예루살렘 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모든 유대인들도, 다윗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만약 다윗 자신의 얘기라면 맞지가 않는 거죠.
다윗의 시신은 무덤에 갇혀 지금 썩음을 당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베드로가 29절에서, 이 시 16편의 예언을 이렇게 풀어주는 것입니다.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베드로는, 시16편의 이 예언을 말씀을, 눈을 크게 뜨고 읽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다윗은 썩음을 당해서, 지금 무덤에 묻혀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나'라는 사람이 다윗 자신이 아니라는 거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입니다. 

왜냐면 30절에 보면, 다윗이 당시 (일시적으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부활을, 지금 구약 시16편에서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이 부활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 베드로의 설교의 요지가 무엇이죠? 
예수님이 바로 다윗이 예언한 그 메시아 라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을 하셨으니, 그분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 메시아 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청중들의 입장에선 또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네, 그분이 부활 했다면 진짜 메시아 일 수 있겠네. 
그분이 다윗이 시편에서 예언한 그 메시아가 맞을 수 있겠네' 

자 그런데 동시에 이런 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 부활이 맞다고 하자. 그러면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예수가 다시 살아 났다고 하는데, 그 분은 지금 없지 않느냐? 

그 분이 부활 했다면, 우리 가운데에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 분은 어디로 가고, 그분의 부활의 증인들만 이렇게 우리 앞에 있느냐?'
 
자, 이런 반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베드로가 이어서 또 설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전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에 없는 이유가, 
그 분은 승천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Part4. 예수님의 승천  (에 대한 설교)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여기 보면, 번역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마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오른손으로 번쩍 든 것 같은 뉘앙스를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어 그대로 번역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높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즉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또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승천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서 직접 확인할 수도 없지 않느냐?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 분이 지금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는지,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지 않느냐?' 

그래서 베드로가 이어서 이렇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3 

그러니까 지금 너희들이 보았던 이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승천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에 성령을 보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증거라는 거죠.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우리가, 그 증거로, 
지금 너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너희들의 난곳 방언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보고 있는 이 장면이, 바로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앉다'는 다스린다는 뜻

그러니 부활하신 그 분은 사라지신 게 아니라, 
승천하셔서 지금도 성령을 통해,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주님의 승천 또한 구약의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자신의 '뇌피셜'이 아니라는 거죠. *개인적 확신

구약에 이미 약속되어 있는 '메시아 예언의 성취' 라고 말합니다. 
구약 어디의 예언이죠? 
바로 시편 110편 말씀입니다. 

시110 편도,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은 이 시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예언하는데요. 
베드로가 이 다윗의 시를 지금 인용하고 있습니다.  ↙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여기 보면 다윗이 그리스도의 승천을 예언하는데요.
'나' '너' 막 인칭의 표현이 좀 헷갈립니다. 
그래서 제가 이해하기 쉽게 인칭을 풀이해서 다시 읽어볼게요.

35 '내 God가 네 Jesus 원수로 네  Jesus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Jesus  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4 '주 God 께서 내 주 Jesus 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 God 가 네 Jesus 원수로 네 Jesus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 Jesus 는 내 God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한 마디로 구약의 다윗이 예언하기를, (시16편에서 예언하기를) 
이 예언 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베드로의 설교에 기승전결의 흐름이 보이시나요? 
생애 - 죽으심 - 부활 - 승천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왜 그래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의 설교는 연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게 맞다. 
그러나 그 죽음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이었다. 
여러분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래서 그 분의 죽음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이르는 너희들을 위한 구원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죽은 죽음이니, 그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맞다. 

그런데 그런 메시아를 너희들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모르는 그 분의 죽음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 분은 죽음에서 부활 했다는 사실이다. 부활 했는데 어디에 계시냐고? 
왜 지금 우리 앞에 보이지 않느냐고? 

부활하신 그 분은, 하늘로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승천하신 그 분은,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지는 어떻게 아느냐고? 
우리가 지금 하나 같이 (하늘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들의 난 곳 언어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똑같은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 졌던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는 놀라운 반전의 일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하늘에 오르 신 그 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승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온 우주의 왕으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죄인 이라 치부한 그 나사렛 사람 예수가 
바로 구약에 다윗이 예언한 그 부활이요, 승천하신 그리스도 메시아가 맞다

자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의 결론이 36절에서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러분, 이것이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전한, 첫 번째 복음 설교의 핵심입니다. 
'너희들이 죽인 그 예수가, 바로 주와 그리스도가 맞다' 라는 것입니다

◑주와 그리스도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순서가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의 못 박은 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 라고 말합니다. :36

그런데 순서를 한 번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주'가 아닙니다. 
순서가 '주와 그리스도' 이십니다. 어떠한 의미죠? 

여기서 '주 Lord' 라는 호칭이 먼저 나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의 못 박은 예수는, 너희들의 주인이고 너희들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순서가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그리스도'가 먼저  나와야 맞을 것 같습니다. 

'예수는 너희들의 구원자시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너희의 주인이시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연결 돼야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전한 사도행전의 첫 번째 복음설교의 핵심이 무엇이죠?
'그리스도는 먼저 너희들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우리는 누구죠? 그 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것이, 베드로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놀랍게도 첫 번째 복음' 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주인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당시에 자기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을 향해 
'너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실이 지금 맞는 설교 입니까? 
이들 종 상당수는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습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누구죠? 
이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 들이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지금 잠깐 들어와 있는 거죠.. 

그러니 이들 종 상당수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못 박아 죽이는데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는 뭐라고 말하죠?
'너희들이 그 예수를 그 자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죠? 
그들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죄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좋은 구원의 소식이죠. 틀림 없는 구원의 복음 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구원자'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자' 보다 더 앞에, 무엇이 붙어 있죠?  '주'가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서도, 
예수를 구원 자로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막상 그분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삶의 주인으로, 모든 영역의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주 분명하고 조심스럽게, 베드로는, 우리에게 선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에게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구원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의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안에는 
'그분을 구원자 뿐만이 아니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한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님, 나를 온전히 다스려 달라'는 의미이고,
'나는 그분의 다스림를 받기를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종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것 없이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점점 이 복음의 핵심이 무뎌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푸는 구원과, 축복과, 위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누구나 다 크게 들으면 '아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 
'주인이신 그 분을 위해 우리의 것을 버려야 한다는 메시지' 
이런 메시지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참 우리가 불편해 하는 메시지입니다. 

자,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찾아보기 힘들고요. 
이런 메시지의 칼 끝이 오늘날 점점 무뎌지고 있습니다. 
'예수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그 분을 구주로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서도, 수 년 동안 '주님'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건 반쪽 자리 믿음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얻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을 본 회퍼는 '값싼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더 실감나게 번역하면 '싸구려 은혜' 이고요. 노골적으로 말하며 '가짜 은혜' 입니다. 

본 회퍼는 <나를 따르라>는 책에서, 이 '값싼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철천지 원수이다. 
오늘날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값싼 은혜를 얻는 데 달려 있는 것 같다. 

'값싼 은혜'란 회개가 없는 용서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참회가 없는 사죄이다. 
값싼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없는 은혜이다. 

이에 비해서 '값비싼 은혜' 란,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 
이를 발견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기쁨으로 이를 산다. '값비싼 은혜'란 값비싼 보석과 같다. 
이를 본 상인은, 모든 물건을 주고 이를 얻는다. 

값비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은혜이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죄를 짓게 하는 눈을 뽑아 버린다.」 

왜 그렇죠? 더 이상 죄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죠..
죄가 아니라 예수가 주인으로 바뀌었으니까요. 

「값비싼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부름이며 
이를 위해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그 분을 따른다. 
이 값비싼 은혜만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은혜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는,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걸게 만드는,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은혜는, 우리의 주인을 통채로 순식간에 바꾸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은혜를 받은 자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 바뀝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사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은혜 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진짜로 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나의 삶 가운데 정말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분이 가라고 하면 가게 되고, 그분이 멈추면 자기도 멈춥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거죠.. 

물론 그분의 뜻을 거절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때로는 내 뜻대로 한 번이라도 마음껏 결정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분 앞에 엎드려, 어느 날 한 번이라도 하나님 앞에 내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때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다시금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즉시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주인이신 주님의 뜻에 맡깁니다. 
그리고 그 분의 다스림 안에 살아가는 결단을, 신자는 날마다 반복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걸만한, 아니 내 모든 것을 바꾸어도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값비싼 은혜,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는 것을, 구원을 받은 자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그 값비싼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은혜가 정말 참된 은혜라면, 
그 은혜는 여러분들의 삶의 주인을 바꿔 놓는 자리로, 언제나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을 위해 다 드리고 싶다고, 반드시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이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시니까요!' 

저는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으로 바뀌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걸 원합니다. 
그리고 설교듣기를 즐거워하기를 기도하고요. 교회에 잘 정착해서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원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나누는 '다락 모임'에 기쁨으로 참여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것은 언제까지나 은혜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제가 정말 기도하는 은혜는, 여러분들의 삶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는 은혜입니다. 
더 이상 여러분의 주인이, 세상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시는 삶으로 바뀌는 은혜 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주인이신 그 분을 친정으로 사랑하며, 
그 분만을 신실하게 따르는 은혜 입니다. 

왜냐면 그 은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참된 구원의 은혜 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 우리를 구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내 삶에 주인 되고 싶어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굴복시키셔서 

이 세상에서 누가 여러분들을 봐도, 
'저 사람의 주인은 세상도 아니고, 저 사람 본인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다'
라고 생각하게 될 만큼, 여러분들의 삶을 바꾸는 은혜 입니다. 

오늘 우리가 간절히 간구하고 것은, 이 은혜가 여러분과 제 안에 충만하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모든 우주를 다스리는 동시에, 진짜로 나를 다스리는 주인되심을 참되게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찾아야 하는 진짜 은혜 입니다. 

이 은혜야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되고 거룩한 은혜이고요. 
바로 구원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