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 길 인생 | 요나 1:13-16 | 금특새 | 25.1.3 - YouTube
◈내리막 길 인생 욘1:13~16
▲도입
요나서가 우리가 말씀을 받기에는 쉽지 않은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연초에 우리의 신앙의 정 방향, 우리의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는...
우리가 가야 될 길을 찾아내는 그런 작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늘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우리의 가슴에 잘 새기고,
또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길이 있습니다. 길이 열립니다.
연말 연초에 계속 우리가 아침 특새에도 오고, 송구영신도 하고, 또 철야기도회도 하고,
그러니까 이 말씀이 어마어마하게 여러분들에게 쏟아지는데
'이걸 어떻게 여러분이 다 감당하시나?' 이게 제가 걱정이 되긴 합니다.
하여튼 설교도 한 번 더 들어보시고, 또 새겨 보시고,
자기에게 계속 이 말씀이 내재화 되기 바랍니다.
자기에게 이 말씀이 잘 숙성되고, 이렇게 '자기화' 되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말씀을 받고 특별히 기도하시는 시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말씀이 더 깊이 내 영혼이 새겨지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요나 이후에 수 세기 후에, 바울 사도와 요나의 이 사건이 겹치는 부분이
사도행전 27장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아요. 근데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요나가 탄 배는, 요나 때문에 다 죽을 뻔 했고,
또 바울이 탄 배는 바울 때문에 모두가 살았어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요나는 배 안에서 잠에 깊이 빠져 있는데 반해서,
바울은 배 안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또 요나는 사람들에게 책망을 받고 있죠.
근데 바울은, 배 안에서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나는 바다 한 가운데서 하선을 해야 됐죠.
근데 바울은 목적지 로마에 까지 도착합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요나를 바다 한 가운데에서 내리게 하시고,
바울은 그 광풍 속에서도 로마에 도착을 하게 하시는 거죠.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도대체 뭘까?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인생을 사느냐? 이거를 우리가 봐야 되죠.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던 요나
자,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크게 우리가 보면
오르막이냐, 내리막이냐
점점 상승 기류를 타느냐, 아니면 하향 곡선을 타고 있느냐 ... 두 길입니다.
문제는, 요나의 인생이 계속 내려가고 있다는 거예요. 내리막 길이에요.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불순종의 길은 내리막 입니다.
내려가는 그 길은 결국은 파멸이죠.
오늘 이제 이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계속 내려가고 있습니다.
지리 적으로도 내려가지만, 영적인 의미도 있는 거죠.
▲요나의 인생이 어떻게 내리막을 걷고 있습니까?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욥바는 해안이라서 고도가 낮죠. 그래서 산지에서 지리적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지리적 의미만 있는 게 아니고, 영적인 의미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욥바로 내려갈 때, 이미 그는 다시스를 꿈꾸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근데 '우연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 마음이 다시스를 향해 있었어요.
그러니까 다시스 행을 쉽게 결정한 거죠. 다시스 외에도 갈 곳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마음이 다시스로 기울어 있었는데, 마침 배가 이렇게 눈에 들어온 거죠.
다시스로 가면 쉽게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근데 이 다시스가 어디냐? 자기의 욕망입니다.
요나의 마음 속에 있는... 그가 그 꿈꾸던 세상이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따라가는 길,
사명이 아니라,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는 길,
그게 다시스로 가는 길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시스로 가는 길은, 겉으로 보면 오르막길 처럼 보입니다.
남들이 보기는 다 잘 나가고, 세상적으로도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도 잘 벌고...
그러나 여러분, 자세히 보면, 그게 올라가는 게 아니죠.
여러분 성공도 그렇잖아요.
그 성공에 집착하면, 그게 노예가 되는... 막 올라가는 거죠.
막 사다리를 타고 막 열심히 올라가는 거죠.
근데 올라가는 게 아니죠. 실상은 떨어지는 거죠.
돈을 추구하면, 돈이 우상이 되죠.
그 우상은 나를 지배하는 거고, 결국은 돈의 노예가 되고,
성공의 노예가 되고, 세상의 노예가 되고, 나중에 끌려다니는 거죠.
알고 보면 다시스는 노예선과 같아요.
다시스로 가는 길은, 내리막 길이었습니다. 불순종의 길이 오르막길 일 수는 없습니다.
또 내려가는 걸 보죠.
▲요나는 배를 타고서 배 밑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건 스스로 내려간 거죠.
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배를 타고도 배 밑으로, 배 밑층으로, 제일 밑으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잠을 잤다는 거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영적인 수면을 의미합니다.
이거는 지금 요나가 잠만 깊이 잤다는 게 아니에요.
벌써 그는 이미 영적으로도 깊은 수면 상태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잠을 자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죠.
근데 결국은 내리막 길이에요. 영적인 추락입니다.
▲그 다음에 또 어디로 내려갑니까?
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요나를 바다에 던지잖아요. 그가 바다로 떨어진 거예요. 내리막이잖아요.
요즘 말로 '인생 밑바닥 밑에 지하실에 있다' 그러듯이
요나는 바다도 해발 0 미터인데, 그 아래로 더 내려갔어요. 바닷속으로 내려간거죠.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어디 바다에 떨어졌는데, 더 아래로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간 거죠.
그러면 수중 밑으로 들어가겠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습니다.
자, 여러분, 이렇게 그가 계속 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우리가 추격해야 하는 것은, '언제부터 내리막길이 시작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니느웨에서 다시스로 방향이 틀어지는 순간, 내리막이 시작이 됩니다. 출발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뭐 중요하죠? 방향이 문제라는 거예요.
니느웨냐, 다시스냐?
열심히 사는 데, 초점이 어디 있느냐는 거죠.
여러분, 연초가 되면 우리가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자.. 이렇게 다짐 하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죠. 그러나 방향이 어디에 있느냐는 거죠.
항상 잘못된 방향은 최악의 결과를 낳습니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 방향이 틀어지면서, 이미 요나는 내리막이 결정되는 겁니다.
연초에 우리가 우리 인생의 방향을 잘 잡아야 되고,
인생 전체에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길인가?'
힘이 들어도 맞는 (의로운) 길로 가야 돼요.
편하자고 방향을 틀면 안 된다는 거죠.
자, 그리고 이 내려가는 길은 서서히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시스로 가는 요나은 별로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여요.
왜 다시스 행을 선택했는지는 요나 이외에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이 말씀은, 요나만 들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가 다시스로 왜 가는지, 다른 사람은 관심도 없고, 이유도 모릅니다.
요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지금 다시스로 가긴 하지만, 다시스에서 거기서도 하나님의 일이 뭐 없겠어요?
다시스에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면 되죠.
'꼭 니느웨가 아니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자기 나름대로 명분을 만들면 됩니다.
인간은 합리화의 명수입니다. 자기 합리화, 그럴 듯하게 포장을 하면 되는 거죠.
자기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둔 비밀은, 요나 자신만 아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내가 결정할 때부터, 이제 문제가 시작이 되는 거죠.
여러분, 내가 가는 길을 내가 결정할 때부터, 이미 내가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도 조심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다가
어느 순간 내가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복종하는 자가 아니고,
자기 중심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거죠.
이 변질이 서서히 시작되는 겁니다.
오늘은, 우리의 내면을 계속 들여다 보는 설교 입니다.
요나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 봐야 돼요.
특히 이 소명의 문제는 숨겨지기가 쉽습니다.
전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명은, 내가 숨겨버리면, 내가 무시해 버리면 끝나는 거죠.
근데 문제는, 하나님이 그 모든 걸 알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을 죽인 살인죄, 강도죄... 이런 것은 선명하죠.
당사자도 그걸 부인하기 어렵고, 물증과 증인이 나타나면 꼼짝 못합니다.
▲여러분 다윗의 밧세바 사건을 우리가 잘 알고 있죠.
아주 은밀한, 그리고 왕권을 동원한 완전 범죄 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완전 범죄는 불가능했어요. 왜냐면 주변의 목격자가 많습니다.
다윗만 모르고 있었지, 왕실 안의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죠. 다윗의 범죄를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실토를 합니다.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어요.
한 1년 동안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묻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람을 죽인 사건이고,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범한...부정할 수 없는 거죠.
나단 선지자가 와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니까 실토를 하는 겁니다.
나단 선지자가 없었으면, 숨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죄로 드러나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항상 숨겨진 죄가 위험한 겁니다.
그건 폭탄이에요. 폭탄, 폭발물을 안고 사는 겁니다.
여러분, 숨겨진 죄가 무엇입니까? 당사자가 인정하기 전에는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불순종의 죄는 지금 감춰져 있습니다.
'왜 너가 다시스로 가느냐?' 아무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하나님과 요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만 알고 계시고, 그리고 요나만 알고 있는 겁니다.
그가 왜, 무엇을 불순종했는지, 누가 입증할 수 있습니까?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이건 누구도 묻지 않습니다. 물을 수도 없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소명은 요나만 압니다. 요나가 말하지 않으면 끝이죠.
문제는 요나입니다. 요나가 합리화 하면, 그 일은 감춰지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요?
요나는 처음부터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이 싫었습니다.
'내가 꼭 니느웨에 가야 하나? 다시스는 왜 안 되는가?'
'내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하고 싶은 곳에서 즐겁게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내가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겠다는 게 아니다.
내 나름대로 할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요나의 내면 속에 어마어마한 것들이 일어났을 거예요.
자기를 설득하고,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기를 합리화 하고...
여러분 요나는 막 나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요나를 너무 과소평가 하면 안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선지자 입니다.
누구도 그를 폄하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여러분, 이 요나는, 오늘 우리로 적용하면, 교회의 중직자, 교역자 일 수도 있습니다.
다 존경하고 인정하는 중직자, 교역자 일 수도 있습니다.
목회를 잘 하고 있는 목회자 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해외 오지에서, 정말 열심히 선교하는 선교사 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내리막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이 다시스로 가는 일은 아주 은밀하게 진행이 됩니다.
하나님과 나만 압니다.
여러분, 우리의 내면의 진단은, 참 어렵고 오래 걸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체도 그렇지 않나요? 외과적인 것은 진단이 쉽습니다.
눈으로 보면 금방 병명이 나오잖아요.
근데 내과적인 것은 좀 더 많은 검사가 필요하죠.
정신과는 더욱 그렇습니다.
뭐 며칠을 의사를 만나서 아무리 얘기해도, 원인을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영적인 일은 어떨까요? 영적인 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모릅니다.
그 열심의 출처가 어딘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할 때, 얼마나 거금을 들고 왔습니까?
그러면 대단한 믿음인 겁니다. 근데 성령이 아시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헌신이, 그 열정이,
신앙심인지, 자기 열심인지,
자기 성취인지, 개인적인 욕망인지...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목회자,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열심이 인간적 공명심인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지만, 이 설교가 가장 세속적인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목회를 세속적인 도구로, 얼마든지 변질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보는 것들입니다.
자, 이런 것들은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누가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겠습니까?
아주 은밀하게, 아주 서서히, 그러니까 정기적으로 철저하게 점검하지 않으면,
변질을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다 순수합니다. 요나가 처음부터 그랬겠습니까?
변질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몰라요.
사고가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거죠.
요나가 내려가는 길이, 언제 어디 쯤에서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결국 내려가는 인생은, 계속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고도의 속임수가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속이는 거죠? 하나님을 속이기는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수 밖에 없어요.
자기가 속이려고 해서 속이는 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내면에서 그렇게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무슨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자신을 속이기 쉬운 영역이 영적인 세계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일은, 우리는 매우 서툽니다. 스스로 미혹받는 거죠.
교회에서도 잘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는 더더욱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열심히 하면,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열심히 하니까요!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어느 날 큰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붕붕 뛰워는 줬는데, 그가 내려올 때, 추락할 때는 안 받아주니까요.
여러분 우리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그 욕망은, 웬만한 내시경으로는 안 보입니다.
너무 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거든요. 뭐 탐색이 어려워요.
각자 스스로 고려하고 애를 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죽는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그동안 외적인 성장을 집중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 후유증을 지금 우리가 많이 앓고 있습니다.
성장을 위해서 열심히 필요하죠. 그래서 열심을 내도록 자극하는 목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열심이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인 면이 있죠.
그러나 그 이면에 야기된 그런 후유증을 다루지 않았다는 거죠.
교회 일에는 열심이었으나, 하나님과의 정직한 대면이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외적 성장은 있었는데, 수적 성장은 있었는데,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화가 없었다는 거죠. 그게 오늘 우리의 딜레마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배를 타고 있는 이 요나가,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책망을 받고, 조롱을 받고...
그 요나 때문에 그냥 막 다 힘들어 하는 거예요.
한국 교회가 1천만, 1천2백만 성도를 자랑할 때가 있었어요.
숫자를 자꾸 많이 얘기하는 건 위험한 겁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가 뒤집어지고도 남죠. 근데 아니잖아요.
여러분 신앙의 세계에서 늘 '성화' 라는 거,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 성화 Sanctification 의 문제,
이 성화가 계속 일어나지 않으면, 결국은 영적인 타락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 성화에 이르는 길은 쉽지가 않습니다.
성화가 아니면, 영적으로 내리막 길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그의 연약함이 자주 드러나잖아요.
선지자로서 턱 없이 부족한 모습, 이제 앞으로도 우리가 다루고 살펴볼 텐데요...
겉으로는 내려가지 않아 보이는 거예요.
니느웨보다 다시스로 가는 요나는 더 의기양양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이렇게 의기양양 했을 거예요.
어쩌면 배 밑층에 들어가서 그렇게 깊히... 그냥 풍랑이 이는 데도 숙면을 취한 걸 보면
그는 마음이 편안한 거예요.
실제로는 내리막 인데, 겉으로는 올라가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전보다 더 멋지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자리는 언제나 위험합니다.
겉으로는 올라가고 있지만, 사실은 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니느웨로 가는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 니느웨는 희생이 필요하고,
어쩌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일 수 있습니다. 고난의 길이예요.
요나는 왜 여호와의 낯을 피했을까요?
그 니느웨로 가라는 소명은 너무 힘들어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내리막 길은 여호와로부터 임한 말씀을 거부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거부할 때, 내리막 길을 내려갑니다.
스스로 자기의 영광을 추구할 때, 그 길은 내리막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내리막의 끝은 추락이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뱃사람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의 손에 의에 붙들려서, 이제 바다에 던져지기 직전의 요나를 상상해 보십시오.
바다에는 거친 풍랑이 막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손에 들려져 있는 그 요나,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여러분, 끔찍한 순간이죠. 남의 얘기니까 '뭐 던져지는 가보다...' 그러겠지만
이 짧은 시간 속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을 거예요.
'이게 무슨 일인가?'
여러분 처음 다시스 행을, 이 배를 탈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얼마 전만 해도 자유의 몸이었습니다. 다시스에 가서 자신의 꿈을 펼쳐 보고 싶었습니다.
근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거죠.
그는 다시스로 가고 싶었지, 큰 풍랑 이는 바닷물 속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운명의 시간이 다가 온 거죠.
▲여러분들, 인생 가운데 풍랑 속으로 던져진 적이 혹시 있었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참담한 순간, 내 인생이 이런 나락으로 떨어져 본 경험이 있었습니까?
'어쩌다가 내 인생이 이 지경까지 몰리게 되었는가?
왜 내 인생이 이토록 내리막을 맞게 되었을까?'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그 직전까지는, 그냥 노도 광풍이었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기 전까지는, 풍랑이 그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은 참 집요하십니다. 그래서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정말 집요하십니다.
그리고 그 풍랑은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풍랑에 던져지면 어떻게 됩니까? 물결에 집어 삼켜지죠.
마침내 물 속에 잠겨 버립니다.
제 힘으로 살겠다는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이란 그렇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가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자유를 원할 수록, 자유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한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쉽게 속습니다. 말씀을 속박으로 여깁니다.
'순종' 이라는 단어를 매우 거북하게 여깁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싶은 욕망은, 쉽게 성취되지 않습니다.
성취된다 해도, 내가 원하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요나는 바다로 던져져야 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꿈도, 그의 계획도, 그의 소망도
다 물거품이 됩니다. 모든 것이 날아가는 순간이 옵니다.
내리막 길의 끝에서 모든 것이 날아갑니다.
이방 사람 손에 붙들려 던져지고 있는 모습,
그들의 손에 맡겨진 요나의 운명이 얼마나 초라해 보입니까?
더 이상 내가 나를 주장할 수 없고, 내 인생을 누군가(이방인)에게 맡겨져 있는 상태,
하나님의 낯을 거부하고, 불순종의 그 대가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이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멸 입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시지 않으면, 여기에서 요나의 이야기는 끝나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이야기들 입니다.
내려가고 내려가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하면, 내려가는 길만 남습니다. 그 끝은 불행이고 비극입니다.
그리고 냉혹한 현실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는데, 어떻게 인생이 잘 될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는데, 무슨 재주로 문제가 풀리겠습니까?
근데 인간은 미련합니다. 하나님을 따돌린다고, 따돌릴 수 있는가요?
반대죠. 하나님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합니다. 이제 요나에게 남은 것은 수장(바다 장례) 입니다.
▲그러나 본래 요나가 꿈꾼 것은 오르막 이었습니다.
그는 성공을 꿈꿨습니다. 다시스 행은 세속적 성공을 꿈꾸는 길이었습니다.
그의 플랜 A에는 내리막 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습니다.
일종의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선원들이 격랑으로 인한 파선의 위험에, 짐들을 바다에 던지는 모습,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했어요.
그것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요나의 몸이었습니다.
자, 내리막의 끝에서,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죽기로 결단하죠.
이제 그의 몸부림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마지막 인간이 살고자 하는 그 욕망을 포기한 것입니다.
자,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신기합니다. 너무도 뚜렷합니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풍랑이 그친지라!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순간, 거짓말 같이 바다는 평온해 졌습니다.
요나가 말한 것이 맞습니다.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은 나 때문이라'
요나가 배 안에 있는 동안 풍랑은 불가피합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원인 제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즉각 조치가 일어난 거죠.
폭풍이 일어날 때, 우리가 기도로 무조건 폭풍을 없애 달라는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폭풍의 원인 제거를 해야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에 처리되지 않은 문제들이 없는지를 살펴보는 거예요.
숨겨 놓은 불순종은 없는지...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보다 우리가 숨겨 놓은 것들이 많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숨겨 두는 일은 위험한 것입니다. '무엇을 내던져야 하는가?'
어떤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전체!
배에서 짐들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요나를 던져야 했습니다.
내가 던져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내가 포기해야 될 것들이 뭐냐는 거죠.
내가 바다에 던져 버려야 될 게 뭐냐는 거예요. 그 이전에는 풍랑이 잠들지 않아요.
근데 요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요나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했어요.
그 요나의 존재 자체!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삶의 많은 것들을 던져야 되죠.
근데 어쩌면 나라는 존재, 이 자아의 왕국, 나를 포기해야 됩니다.
추격 하시는 하나님은, 풍랑을 잠잠하게 할 준비는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내 문제가 빨리 풀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던지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순발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이번 특새를 통하여 그걸 찾아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내던져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바다에 내 던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끝까지 버티면 풍랑은 더 길어집니다.
광풍은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 내 인생의 광풍이 일어날까요?
그 원인은 아무도 모릅니다. 무엇 때문인지 나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풍랑이 거세지면 정신이 없습니다.
풍랑에 시달리다가 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그는 사람들에게 이끌려나가 책망을 받고,
제비뽑기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뒤늦게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자기 죄를 인정하게 만드시는 데,
이 많은 방법들을 동원하셔야 했어요.
그래서 요나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하도록 이끄는 거죠?
내가 아무리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고, 아무리 내가 도망을 쳐도,
하나님은 요나가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다윗도 나단선지자를 통해 지적을 받고서 인정을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많은 경우에는 풍랑에 시달리다가 뒤늦게 인정을 합니다.
여러분 요나서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추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놓치지 않습니다.
▲추락하는 순간은 끝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다에 던져지는 순간, 하나님은 그를 받아 주시죠.
추락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냥 자비로우신 분이 아니라, 자비가 크신 분이십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순간,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쳤습니다. 기적입니다.
추격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은혜이죠.
추격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요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요나가 바닷속에 던져지는 것은 은혜였습니다.
▲1:16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 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여러분,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한 비그리스도인들, 불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신자, 불신자가 다 같이 한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요나와 다른 사람들이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서에 나오는 인물들이 여럿 있는데요.
요나를 빼고는 다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몰아치는 폭풍 가운데, 혹독하게 시달렸다면, 사람들이 불만을 가질 만도 합니다.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이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의 소행'으로 그렇게 자기들이 고생했다면
거칠게 요나에게 불만을 늘어 놓을만 합니다.
그러나 요나가 자신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인정하자, 조용히 일단락이 났습니다.
바다가 잠잠하게 된 것을 통하여,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서원까지 합니다.
뱃사람들이 얼마나 진지합니까? 요나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요나가 영적인 우월감을 가질 여지가 없습니다.
요나때문에 고통을 당했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전혀 없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경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요나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 속에 개입하시고, 개입하시되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요나를 최종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실 겁니다.
우리는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봅니다.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추격 하시다가 지쳐서 물러나시는 분이 아니에요.
만약 하나님의 추격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추격이 중단되었다면,
나의 인생은 바다에 떨어지는 것으로 끝났겠지요.
그러나 추격하시는 하나님은, 요나가 물속에 들어가도 포기하지 않고,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추격하시는 하나님이 없었다면,
우리도 오늘 여기에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그 찬양처럼
여러분 그 주님의 추격하심이 없었다면, 여기에 앉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론가 가 있었을 거예요. 엉뚱한 길로 빠져 있었을 거예요.
우리가 엉뚱한 길로 빠질 때마다, 곁길로 빠질 때마다, 불신의 길을 걸을 때마다,
내버려 뒀다면 우리는 끝났을 것입니다.
근데 오늘 주님의 은혜, 그 끝없는.. 우리를 추격 하시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일편단심 한 눈 팔지 않고 올곧게 걸어 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뒤돌아보면 우리의 중심이, 흔들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의 위기를, 얼마나 많이 만났습니까?
우리의 결심은 자주 넘어지고 깨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좇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바람이 나는 겨와 같이, 우리는 스스로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마치는 말
신앙의 겉모양이 아니라, 우리의 속마음을 한 번 살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이제껏 살아왔지 않느냐는 거예요.
내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 살았는가?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거죠.
내 야망을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얼마나 내가 끌어 당겼습니까?
필요하면 하나님을 부르고, 필요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버리고,
여러분 내가 가는 길에 하나님을 불러 들이지 말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셔야 돼요.
하나님이 내 삶의 부분일 뿐이지, 내 삶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우리가 찬양을 할 때는, 주님은 내 삶의 전부라고 말하자면,
그러나 현실에서는 하나님이 내 삶의 일부일 뿐이지, 전부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면밀하게 들여다 보면,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지 않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갈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요나는 어느 날 갑자기 내리막 길을 걷게 된 게 아니에요.
우리의 일상의 순간 순간, 작은 결정을 할 때부터 우리의 영혼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과의 관계에, 틈새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게 되죠.
우리는, 어느 날 고개를 확 돌리지 않아요. 여러분, 조금씩 돌리는 거예요.
조금씩 멀어지는 거예요.
우리의 관심이 '나'에만 집중하고, '나'라는 왕국을 날마다 키워가는 거예요.
그럴수록 하나님의 왕국은 점점 작아지고,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고,
신앙 생활은 좀 식상해져 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은 점점 사라지는 거죠.
조금씩 조금씩 내리막 길을 걷는 거예요. 다시스는 하루 아침에 다가온 배가 아니에요.
요나의 마음 속에 서서히 서서히 키워져 온 배입니다.
결국 조금씩 조금씩 내리막 길을 걷다 보면,
마침내 바다에 던져지는 상황에까지 도달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말미에 나오는 사도바울을 보게 됩니다.
그는 풍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바울은 '바다에 나를 던지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사람을 살려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풍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해 중입니다.
중요한 것은 풍랑이 아닙니다. '내가 왜 그 배를 타고 있는가?'
'나의 최종적인 목적지는 어디인가?'
'나는 지금 영적으로 오르막 인가? 아니면 내리막 인가?'
여러분, 내리막 길로 가는 걸 막아야 돼요. 왜요? 그 길은 파멸이니까.
그러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소명의 길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 갈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그 길, 그 부르심!
그것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복음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왕국을 위한 하나님의 종들로,
우리의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우리가 가다듬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내 내면에서 끊임없이 미묘하게 찾아오는 유혹들, 무너지는 그 영적 세계들이
나도 모르게 깊은 침륜(구덩이)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 이 신년 특새 기간 동안에,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깊은 탐조등을 켜서
내 마음 속 깊은 수심에 무엇이 있는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인정을 받고 있는 '나'가 아니라
내 내면의 깊숙한 곳에,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그 세계를 정작히게 들여다보고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영혼이 온전히 하나님 만을 향하고
그분이 부르신 그 부름을 향하여 내가 달려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가 영적 상승 기류를 타고, 주의 말씀을 따라
받은 소명을 다시 한번 회복하는, 소명의 회복의 역사가 여러분들에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