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 삼상9:15~27 2025.01.19.
사무엘상 14번째 시간입니다. 드디어 청년 사울이 선지자 사무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삼상9:15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사울을 만나기 딱 하루 전 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을 만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21세기는 정보화 시대, 정보전의 시대입니다.
대학 입시도 전형이 얼마나 다양해 졌는지,
좋은 정보, 정확한 정보, 이걸 알아내기 위해서 학부모들마다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챗GPT가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정보 지배화의 AI 인공 지능이 언어 기능까지 탑재를 해서
사람들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또 미국의 AI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가, 지금 전 세계 주식 시장에서 최고를 찍고 있죠.
정보에 뒤지면 인생이 뒤쳐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시대로 가고 있어요.
자 그런데 이런 정보전은, 현대사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에도 여전히 적용됐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왕들과 지도자들은, 지략가들과 지식인들을
자신의 참모로 두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나 우리가 영적 관점에서 놓고 보면, 하나님은 모든 정보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데 그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정보와 사회로 가는 이 시대가, 가장 큰 리스크가 뭔줄 아세요?
정보에는 윤리 도덕이 없다는 거예요.
누가 그 정보를 갖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굉장히 위태로워 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정보를 갖고 계신 그 분이, 궁극적인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삼상9:15절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물질 세계에서 정보가 중요하다면, 영적인 세계에서 정보는 얼마나 더 중요하겠는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요?
▲조이 도우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라는 책을 썼어요.
이 분야의 매뉴얼이 될 만한 책입니다.
그녀는 평생에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했고, 전 세계를 다니며 강의를 하시는 분이에요.
그 책의 챕터 원에 보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해 주시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제가 다 순종하겠습니다.'
그 날로부터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첫 시작이 굉장히 재밌는 얘기인데,
여러분, 우리는 뭐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하면, 굉장히 큰 것만 생각하잖아요.
하루는 그녀가 아끼던 만년필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온 집안을 샅샅이 다 뒤진 거예요. 이 방 저 방 뒤져 보고, 거실도 찾아보았는데
만년필은 아무데도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이제 거실 한 가운데 서서
'하나님, 제 만년필이 어디 있나요?'
그랬더니 '화장실' 이라는 내적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어, 화장실에 내가 만년필을 둘 리가 없는데...'
그렇지만 화장실에 가 봤더니,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예요.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제 인생의 최저 점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확신하게 됐고,
그리고 인생이 중요한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제게 알려주셨어요.
그러다가 조이 도우슨의 책을 읽게 됐고, 30대 초반에 온누리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였는데
한 해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12월 달에, 그 이듬해 내년 계획을 하기위해서
내년 기획을 담당하는 네 명의 목사님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월요일이어서 아무도 출근을 안 하고, 저희끼리 이제 방에서 회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목사님이 지나가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셨어요. "뭐 해?"
"아, 저희가 내년 기획안 짜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으시면서 "그럼, 내가 전에 나눠줬던 매트릭스 문건을 갖고 와 봐!"
매트릭스에 관해 설명한 문건이 있었거든요.
근데 온누리교회는 온난리교회 라는 별명이 있어요.
그냥 하루에도 뭐 기획서가 굉장히 많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한 달 전에 주셨던 문서가 있을 리가 만무하죠.
그 4명 중에 제일 나이가 어린 저한테 비서실에 가서, 문건을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제가 비서실에 들어가서, 비서 네 명의 책상을 다 뒤졌는데, 문건이 없어요.
(월요일이라서 비서들 출근 안 함) 한 달 전 문건인데 없죠.
그래서 비서실을 나오면서 이제 '목사님, 찾아봤는데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겠다..'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만년필'이 생각난 거예요. *조이 도우슨의 책 내용
그래서 순간적으로 제가 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 매트릭스 문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제 마음에 내적음성으로 '프린터' 그러시더라고요.
육성으로 들린 게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상하다. 비서실 프린터는 이면지를 사용하지 않는데?'
그러면서 돌아서서 레이저 프린터기가 있는 곳으로 갔어요.
그 프린터가 바로 벽에 붙어 있는데, 벽과 사이가 한 2~3센티 벌어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거기에 문서들이 껴 있더라고요.
꺼내 보니까 전부 매트릭스 문건이에요.
제가 프린트기에 가보지 않았다면, 그걸 못 찾았겠죠.
저는 이제 그 얘기는 자세히 하지 않고, 갖다 드리기만 했죠.
▲여러분이, 인생의 큰 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매우 세밀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1) 첫 번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아니, 말씀을 읽지, 말씀을 듣는 것이냐?'
설교를 들으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성경 말씀을 읽는 적극적 행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수동적 행위로 전환을 하시라는 거예요.
'주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래서 성경을 나는 눈으로 읽고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내 속에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체험!
이것은 마치 내가 수영을 할 때, 내가 내 몸을 띄우는 게 아니잖아요.
물이 나를 띄워주는 거잖아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리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2) 두 번째,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내 기도 제목만 막 그냥 쏟아 놓고,
하나님 음성을 듣는 시간 없이, 기도 끝마치고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저도 예전에 그렇게 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 '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구나' 그걸를 알게 되면서,
기도하고서 그 자리에서 기다려 봤더니,
대부분의 기도를 그 자리에서 응답 하시더라고요.
가령 이런 겁니다. '하나님, 그 친구가 저를 너무 괴롭히고 막 어렵게 해갖고
너무 너무 믿습니다. 제가 어렵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전에는 이렇게 막 하소연만 하고 나왔는데, 가만히 있어 봤어요.
'어떻게 할까요?' 하고 기다려 봤어요.
'원수를 사랑해라!'
성경에 다 써 있잖아요. 말씀 따로, 하나님 음성 따로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나에게 들리는 거예요.
'네, 하나님, 순종하겠습니다.'
몇 달씩 끌 필요도 없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해결되는 거예요.
내 마음에서 그 사람을 놓아 주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자유해지고, 편안해지는 거예요.
3) 세 번째, 일상 중에도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거시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의 작은 부분에도
선하신 뜻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무엘은 그것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9:16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사울 왕에게 우리는, 그의 인생 전체를 부정적으로 이제 바라보는 관점이 큰데,
그에게도 긍정적인 측면들이 있었어요.
- 백성들이 그토록 바라던 이상적인 형태의 왕이었죠.
-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낸 왕이었죠.
제가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 '왜 교회는, 저런 사람들을 쓰실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굉장히 좁은 식견이었죠.
여러분, 우리가 완벽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나요?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뭔가 불완전해 보이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 쓰임 받는다'는 생각이 될 때는
먼저 자신을 성찰하세요. '그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나는 어떤가?'
하나님은 사울도 들어서 쓰십니다.
하나님은 삼손같은 사람도 들어서 쓰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도 들어서 쓰십니다.
다만 그가 쓰임 받을 때, 겸비하여서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 갈 것이냐?
아니면 교만하고 안일해져서 변질될 것이냐? ... 이 차이가 있을 뿐인 거예요.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하나님께서 그 사울을 왕으로 앉으시는 게 아니라
'지도자'라는 사명과 역할을 주기 원하셨어요.
'지도자, 리더'라는 것은, 리딩을 해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공동체를, 시대를, 하나님의 비전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에요.
백성들은 '왕'이라는 자리를 원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지도자'라는 역할과 사명을 감당할 사람이 필요하셨던 거예요.
이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굉장히 큰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자리'에 연련하는 경향이 커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명을 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부모'라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내 자녀를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리딩'해 주는,
그 인생을 이끌어 가 주는 역할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회사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상사입니까?
아니면 여러분과 함께 한 팀이 된 사람들은, 적어도 여러분의 '리딩'을 통해서 성장하고,
그 조직이 비전을 이루어 가는 그런 리더 역할을 하십니까?
제가 목사라는 '자리'에만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이 꿈꾸시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비저너리 visionary'가 되기를 원합니다.
◑9:17~18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사울이 성문 안 사무엘에게 나아가 이르되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청하건대 내게 가르치소서 하니'
자, 이 장면을 잘 보세요. 사무엘은 성 안에 자기 집에서 산당으로 가는 길이고,
지금 사울은 성문으로 들어가서 가다가, 사무엘과 서로 마주 다가오면서 만나는 장면이에요.
근데 사무엘이 다가오는 사울을 쳐다보고 있는데
'바로 저 사람이다' 하고, 하나님이 지금 알려주시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반대편에서 오는 사울은
사무엘이 누군지를 모르니까
'선견자의 집이 어디 있는지 좀 알려주시겠어요?' 이런 장면입니다.
사무엘에게는 보였고, 사울은 안 보였어요.
사울은 정보를 계속 찾아 다녔잖아요.
사울은 그래도 계획성 있게 움직이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사무엘은 무슨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에요.
사무엘은 무슨 정보를 취득하려고 애를 쓴 것도 아니에요.
근데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은 평범해 보여도, 이 사람은 선견자 Seer, 미래를 보는 사람이잖아요.
근데 사울은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한 사람이지만, 영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평범한 사람인 거예요.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보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장 높이 날 수 있는 새일지라도
창공을 날지 않으면 안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이게 돼 있어요.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영적 시야가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세상이 주는 모이만 먹고 있는
땅바닥에 앉아 있는 새와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이곳에서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딱 거기까지 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기도 가운데, 말씀을 묵상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창공을 비상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적 시야를 넓혀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고, 기도의 능력인 거예요.
사울과 사무엘의 인생을 비교해 보면, 사울은 아버지에게 충성을 다 하고 싶었고,
아들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싶었잖아요. 그런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노력은 하는데, 산지를 빙글빙글 돌고, 이제 제자리 걸음을 하는 인생일 뿐인 거죠.
그러나 사무엘의 인생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가다 보니까,
인생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다 알려주시는 거예요.
'어디로 가야 되는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누구를 만나야 되는지...'
여러분, 사무엘은 차원이 다른 인생이었어요.
▲물론 사울 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사무엘과 같은 멘토를 만난다면 이게 해결이 되는 거죠.
보이는 사람을 만났으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탁월한 책사를 두고 싶어 하는 거예요.
저는 오늘 이 장면이, 사울의 인생에서 '그래서 참 중요한 장면이다' 라고 봅니다.
여러분! 그런데 내가 어떤 지략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게 막 정치 판도도 보이고,
막 사업의 판도도 보이고
경제가 흘러갈 트렌드도 보이고...
만약 이렇다면 내 인생이 다 잘 풀릴까요?
제가 어제 온갖 역사의 지략가들과, 모사들과, 막 이런 걸 다 찾아보고 성경도 연구해 봤는데
다윗 시대에 '그 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삼하16:23
이런 최고의 모략가가 있었어요. 바로 아히도벨 이었어요.
그런데 그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란 모의에 가담했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너무나 똑똑 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어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람이 누구였을 것 같아요? 가룟 유다죠.
나머지는 예수님이 '얘들아, 내가 십자가를 지러간다' 알려줘도 몰랐잖아요.
유일하게 알아듣고 예수님 팔아 넘길 모의를 한 사람,
모략가 중에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너무 똑똑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에요.
인간의 정보, 인간의 지략, 인간의 지식에 한계가 있나요, 없나요? 있어요!
여러분 그래서 수많은 지략가들이 자신의 지략이 통하지 않을 때
비극적인 결말을 스스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게 뭐하고 똑같냐 하면, 자수성가 해서 막 사업을 일으키는 노력형 사업가들이 있잖아요.
'내게 불가능은 없다'고 그러고 막 밀어 붙였는데, 갑자기 부도가 나는 순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업가들이 있더라고요.
왜요? 자기가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없었는데, 어느 날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럴 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노력, 인간의 지략... 이곳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9:19~20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선견자이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하는지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내가 선견자다. 오늘 산당에 올라가서 같이 식사 하자.
내일 아침에 다 알려 주겠다. 암나귀들은 걱정하지 마라.
온 이스라엘이 너와 네 집을 사모한다' 이렇게 얘기를 해줬어요.
사울의 인생을 묵상해 보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왕으로 즉위하는 순간이 아니라, 저는 이 순간이라고 봅니다.
전도 유망한 청년이, 그 시대의 영적 멘토인 사무엘을 딱 만난 순간,
그때 이 두 사람의 가능성이 딱 만나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장면이에요.
여러분, 2025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자녀들에게 만남의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고, 좋은 목회자를 만나시기를 바라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이 좋은 스승, 좋은 친구들을 만나시기를 바라고,
좋은 배우자, 좋은 동역자들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처럼 좋은 만남은, 우리의 인생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거든요.
역사적으로 몇 가지 예를 들면,
삼국 시대 촉나라의 유비는, 제갈공명 이라는 지략가를 얻었기 때문에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대를 이긴 거죠.
그리스 이타카의 오디세이 잘 아시죠?
멘토 라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트로이 원정 길에 오를 때
자신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맡길 수가 있었죠.
헬라 제국의 전설적인 위대한 정복자로 여겨지는 알렉산더,
그에게는 뛰어난 스승이 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였어요.
그래서 단순히 땅을 차지하는 정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헬라 문명과 사상을 온 세상에 널리 퍼트리는, 문명의 전달자가 되었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게는,
오늘 이 장면을 보면, 대선지자 사무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돼요.
여러분, 이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니잖아요.
이 기회는 정말 놀라운 기회였다고요.
다만 이 만남의 복이 여기서 끝나면 안 되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최고의 블레싱을 내가 받을 수 있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에요.
여러분, 선지자 사무엘을 만났어요.
앞이 보이지 않던 사람(사울)이, 이제 앞이 보이게 됐어요.
그러면 놀라운 축복이지만, 그것으로 끝날 게 아니라
그 사무엘의 하나님을 만났어야 되는 거예요.
사무엘을 만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의 하나님을 만났어야 되는 거예요.
근데 안타깝게도 사울은, 거기까지 가지를 못했죠.
◑9:21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사울이 굉장히 겸손하게 '나는 제일 작은 지파, 제일 미약한 가족이다'
그러면 사울이 왜 이렇게 대답을 했을까요?
1) 베냐민은 가장 작은 지파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죠.
여러분 사람이 교만하거나 절망하면, 인지의 왜곡 현상이 나타나요.
적어도 이때는 정상이었던 거죠.
2) 당시에 처음 시작할 때 사울은, 적어도 겸손의 미덕이 있었어요.
이어지는 내용은 제가 짧게 설명을 드릴게요.
◑9:22 '사무엘이 사울과 그의 사환을 인도하여 객실로 들어가서
청한 자 중 상석에 앉게 하였는데 객은 삼십 명 가량이었더라'
사무엘이 사울을 데리고 산당에 올라가서 함께 식사를 합니다.
사무엘이 초청한 사람이 한 30명 정도 되는데, 젊은 사울을 제일 상석에 앉혔어요.
◑9:23 '사무엘이 요리인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주며 네게 두라고 말한 그 부분을 가져오라'
그리고 요리사를 불렀어요.
아마도 여기의 요리인은 희생 제물을 처리 하던 레위인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9:24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고 이 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
이것은 사무엘이 그의 예언자적 선견지명으로 이미 요리인에게 간직해 두라고 지시했던
희생 제물로서, 곧 사울과의 화목 잔치용 음식물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넓적다리'가 제사장 몫인 우측 넓적다리 였을 것입니다. 레7:32-34
사무엘은 선지자이기 이전에, 원래 레위지파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넓적다리를 가질 수 있었죠.
(그래서 그가 어려서부터 실로의 성막에서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면 불가능했죠)
'그것에 붙은 것'은
제단에서 화제로 드려지지 않은, 제사장 몫의 넓적다리 고기에 붙은 기름 fat을 가리킵니다.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대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을 상석 자리에 앉히고, 또한 가장 귀한 음식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가, 그에게 준 것은 분명 그를 왕적 지위로 예우했음을 뜻합니다.
◑9:25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읍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26 그들이 일찍이 일어날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27 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에게 우리를 앞서게 하라 하니라
사환이 앞서가므로 또 이르되 너는 이제 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더라'
자 오늘 본문에서 사람 이름 말고,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뭔지 아세요?
아마 찾기 쉽지 않을 거예요. '함께' 라는 단어에요.
함께 식사하고,
함께 밤새 쏟아지는 별빛 달에서 지붕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여러분, 이 두 사람이 함께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교제의 식탁이 중요하잖아요.
세계 최고의 투자가 라고 여겨지는 워렌 버핏과의 런치 타임,
2000년도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더라고요.
2000년에는 2만5천 달러 였는데, 한 끼 식사비가요.
2022년에는 경매로 나와서 246억 원에 낙찰이 됐더라고요. 왜 이렇게까지 할까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이 이걸 아는 거예요.
나무는 열매로 알아보는 법이고, 인생은 그 친구로 알아보는 법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인생의 길을 가고 있는가요?
여러분이 가장 많이 함께 식사를 하고, 가장 많이 대화하고,
여러분이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그는 누구인가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의 미래를 함께 꿈꾸고, 이야기하고 나누는 그는 누구인가요?
저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 전도 유망한 청년이, 사무엘을 딱 만나잖아요.
이 장면이 마치 사울의 인생에 봄날의 감미로운 미풍이 불어오는 것 같아요.
'와 참 좋은 때다...'
사울의 가능성을 격려해주고, 사울의 집안을 축복해 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젊은 사울을 가장 높은 자리에 존귀하게 세워주고,
그를 격려해 주고, 그를 지지해 주잖아요. 멘토의 중요성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들려 주잖아요.
이보다 좋은 일,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적용
그런데 결국에는 우리가 이 이야기의 엔딩을 알지만, 사무엘이 사울을 떠나게 돼요.
(나중에 왕이 된 후에)
사무엘이 사울을 떠난 이유는 뭐 였나요?
사울이 잘못을 많이 해서가 아니에요.
잘못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결정적인 이유는, 사울이 사무엘의 조언을 더 이상 듣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사무엘을, 사울의 조언자로 옆에 두셨잖아요.
근데 사무엘이 조언을 했는데, 사울 왕이 조언을 안 들어요.
조언자의 역할과 의미와 사명이 무의미해 지잖아요.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을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 사울은 사무엘의 존재가 그저 봄날의 단비 정도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떠나고 나서야, 그가 생명수 라는 것을 알게 되죠.
떠나고 나서 생명수가 사울 자신에게 차단 되고, 끊겨 버린 거예요.
여러분 인생도, 관계의 이별을 통해서 이런 걸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때론 내게 빛이 되어 주던 어떤 사람이 떠난 뒤에,
어둠 가운데 그냥 확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제야 그 사람의 존재감이 촛불 하나 정도가 아니라 '아, 빛의 원천이었구나'
이거를 뒤늦게 깨닫는 거예요.
때로 내게 무게 중심을 잡아 주던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내가 그 공동체를 떠나고 난 뒤에, 하염없이 흔들리는 분들이 계세요.
'아, 그 공동체가 내게 그냥 무게감만 주었던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근간이었구나'
이걸 뒤늦게 깨닫는 거예요.
▲제가 2005년도에 처음 벤쿠버에 갔을 때, 하루는 혼자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어요.
근데 아주머니 한 분이 열심히 서빙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주머니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이 분이 한국에서는 한 중형교회에서 전도왕을 하셨더라고요.
전도를 정말 많이 하신 분이더라고요.
근데 벤쿠버에 와서는 교회를 안 다니고 있었습니다.
벤쿠버에 온 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혀 신앙생활을 안 하고 계시더라고요.
여러분, 너무 급격한 쇠락 아닌가요?
내가 좋은 교회들, 이름 난 교회들을 다니다 보면,
내 신앙이 덩달아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사실은 묻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과연 나홀로 떨어져 나와 있어도, 여전히 나는 성령 충만 할 수 있는가?
내가 광야 한가운데 들어가도,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여전히 은혜 충만 할 수 있는가?
내게 빛이 되어 주던 사람, 내게 힘이 되어 주던 공동체,
여러분이 만나고 나면, 물론 봄날의 햇살이 내려쬐는 것 같고, 봄날에 미풍이 부는 것 같지 만
그걸로 만족하시면 안 돼요. 거기서 본질을 찾으셔야 돼요.
그래야만 내 인생이 홀로 되었을 때, 비로소 건강하게 홀로서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게 안 됐던 거예요.
사울이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을 잃게 되자, 그는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사울은, 하나님과 아무런 개인적 친밀감이 없었던 사람이에요.
사무엘이 사울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사무엘이 하나님과 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을 했던 거예요.
근데 사무엘이 사라지니까, 사울은 하나님과 아무런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사무엘이 사울을 떠나니까, 하나님도 사울을 떠나버리신 거예요.
세월이 갈수록, 사울은 사무엘의 조언을 듣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인생의 멘토가 있으신가요? 꼭 필요합니다.
나를 위기에서 건져 주고, 내가 실패하고 절망 했을 때 나를 세워주고,
나를 새로운 도전 앞에서 격려해 주는... 그런 사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제게는 저희 어머님이 그런 분이었고,
그리고 온누리교회에 있을 때 하용조 목사님이 그런 분이셨고,
지금도 몇몇 선배 목사님들과, 제 인생에 조언을 해주시는 성도님들이 계세요.
세월이 갈수록, 목회 여정이 지나갈수록, 주위 사람들은 다 제게 박수만 쳐주거든요.
근데 저에게 애정의 쓴 소리를 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되거든요.
제가 온누리에 25년을 있었으니까, 사역팀에 담당 교역자가 교체될 때,
이취임식을 제가 가서 많이 치렀어요.
근데 한 번은, 제가 이취임식에 갔는데,
이임교역자는 떠나니까, 성도들 하고 막 인사하고 있고,
이제 새로 취임하는 교역자하고 제가 대기실에 앉아 있었어요.
좀 있으면 이취임 예배가 시작하는 거예요.
근데 이 취임자가 저한테 '목사님, 제가 중책을 맡게 됐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될지
좀 저에게 조언을 해주세요.'
제가 '목사님은 워낙 잘 하시잖아요. 잘하실 거예요.'
근데 이분이 재차 '아, 그래도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저에게 좀 조언을 해주세요.'
제가 '목사님, 이 분야는 목사님이 더 전문가니까, 훨씬 잘 하실 겁니다.'
또 조언을 해 달라고 세 번째 요청을 하길래, 제가 조언을 해 드렸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 대답을 안 하시는 거예요.
그 분이, 제 조언을 따를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제게 조언을 구하길래, 제가 정말 중요한 한 마디를 드렸거든요.
그런데 제 조언을 따를 생각이 없었나 봐요.
새로 취임하는 그 분 얼굴이, 순간적으로 약간 굳어져 버렸어요.
이제 이취임식이 시작되고, 제가 설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떠나시는 선배 목사님은 너무 훌륭하셨고,
새로 임명 받은 후임자가 아무리 열심히 한 들, 거기에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근데 놀랍게도, 이 목사님을 지지하는 성도들 그룹이, 설교 시간에
'감히 우리 목사님한테 그런 얘기를 해?' 이런 분위기를 딱 보이더라고요.
제가 깜짝놀랐어요. 제가 속으로 생각했죠.
'이 목사님도, 또한 이분을 따라가는 분들도 위태롭겠구나...'
얼마 안 지나서, 그 목사님은, 그 새로운 임지에서 떠나시게 되었어요.
문제들이 생겨서...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멘토가 있는가요?
그리고 그 멘토의 조언을 신실하게 잘 듣는가요?
전혀 모르는 길, 새로운 길, 먼 길을 운전해 가면서,
만약 네비게이션이 없다면, 어떻게 길을 찾아 가겠어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간다는 게, 그런 거잖아요.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고 해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역술인들을 찾아가는 거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영적 지도자들과, 성경과, 기도의 자리와, 예배의 자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무엘과 같은 좋은 영적 지도자들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만났을 때, '와~ 이제 내 인생에 이제부터는 햇빛이 비치는구나'
이러고 끝나면 안 되고,
'사무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시오!' 그 하나님을 만나야 돼요.
제가 평생에 저희 어머님을 제일 존경했던 것은,
저희 어머님 만큼 하나님과 친한 분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근데 그 어머님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실 걸 제가 알았기 때문에,
제 마음 가운데 항상 기도 제목은
'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시오' 룻1:16
'어머니를 통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도 좋지만, 저를 직접 만나 주십시오'
▲여러분, 한국교회가 부흥의 시기를 이제는 다 지나가고 있잖아요.
좋은 예배, 좋은 교회... 여러분 언제까지 그냥 우리가 누리고만 있겠는가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게 좀 엉뚱한 예일지 모르지만, 최근에 '뉴럴 링크' 라는 거 여러분 들어보신 분들이 있을 거예요.
일론 머스크가 사람의 뇌에 전자칩을 이식해서,
세 번째 사람을 성공시켰어요.
이제 뭐 '사이보그 인간' 이런 게 나오는 거예요.
물론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위해서 시작된 거지만
만약 이게 보편화 되면, 인류 문명이 완전히 뒤집어질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뇌 안에 전자 칩을 이식을 해서,
기계를 조작하지 않아도,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다 조작하고,
인간의 뇌가 갖고 있는 포텐셜이 엄청나니까,
인간의 뇌의 전기장을 잘 활용하면, 화력 발전소 두 개를 가동 할 수 있대요.
근데 이걸로 끝나지 않고, 이제는 AI 가 집약 된 정보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AI 하고 상대를 하려면, 그 AI 가 갖고 있는 집약된 정보를
내 뇌에 다시 '보조 기억장치'로 입력을 시켜야 되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는 AI 의 정보 지배력을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이 오고 있어요.
▲오늘 날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정보 제공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잖아요.
이제 알고리즘에 의해서.
그러니까 우리들은 생각 없이 AI 의 정보 제공에 의존해서 살다 보면,
인간성의 기본 요소를 상실해 가는 거예요.
자, 최근에 제가 결단하고 몇 달 동안 하고 있는 게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초기화로 설정했어요.
이게 뭐냐면 더 이상 저한테 '너는 주로 이런 컨텐츠를 보잖아'
이렇게 제안해 주는 걸 멈춰 버렸어요.
이제 유튜브를 딱 클릭하면 아무것도 안 떠요.
제가 원하는 걸 쳐야지 뜨게 만들어 놨어요.
기계가 저보다 똑똑한 게, 저는 싫어요.
물론 기계의 도움을 많이 받죠. 그렇지만 기계에 내가 종속되어 가는 것이 싫어요.
제가 이 얘기를 왜 할까요?
여러분! 우리 세대 사람들, 21세기 지금 초반에 살고 있는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AI 인공 지능에 의해서 지배 되는 세상, 본격적인 세상의 그 직전 세대의 사람들'이라고
아마 역사가 기록할 것 같아요.
이제 다 뇌전자 칩을 이식을 해야지,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어요.
여러분 우리는 이 시대에, 어떤 인간으로서 인생 고백을 할 것인가요?
'예배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기도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몸부림 치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렇게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그러나 오늘 날 기계 문명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기계에 접속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어요.
오늘날, 기계에 접속하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졌어요.
MZ 세대들은 와이파이에 안 터지면 막 손을 벌벌 떱니다.
'왜 와이파이가 안 터지죠? 왜 스마트 기기에 밧데리가 나갔지?'
그러다가 기기에 연결되면 '아~ 이제 살 것 같아!'
기계에 접속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라면,
고로 나는 존재하는 인생이라면... 기계에 종속되어 있는 거잖아요.
무속인을 만나고 나서야 '어휴 이제 살 것 같다. 앞날이 안 보였는데 이제 앞에 좀 보이네'
한다면, 그 무속인에게 종속 돼서 살아가는 거잖아요.
내가 학업을 하든, 사업을 하든, 내가 고급 정보, 좋은 정보를 취득 해야만
'이제 내 인생에 좀 창창한 길이 열리겠구나'
그러면 정보에 종속 돼서 사는 거잖아요.
여러분, 모든 존재의 위기에서,
여러분이 최상위에 계시는 궁극적 존재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을 때,
'아, 비로소 내가 살아있구나' 이거를 느끼는 사람이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이 시대가 어떤 시대로 갈 것인가, 누구를 의지하고 인생을 살 것인가?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깨어서 살아가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