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내비게이션 3 믿고 따르기 욥23:8~14 2025.01.19.
'내가 결코 주님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그게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바다 끝에 가서 거하더라도, 주님은 나를 놓치지 않고 보고 계십니다'
그게 복음인 거예요... - 아래 녹취록 중에서
그리고 마더 테레사의 조언도 심오한 깊이가 있습니다. (밑줄로 12줄)
◑도입
우리가 낯선 곳에 여행을 갈 때는, 미리 일정표를 짭니다.
내가 잘 모르면, 여행사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단체 여행을 계획할 때에, 여행사에서 일정을 짜서 보내오면 들여다 보는데
물론 제대로 안 보는 사람도 많고요.
그런데 들여다봐도 사실은 잘 모릅니다.
한 번도 안 가본 나라라면, '가봐야 여기구나' 하고 알지,
이게 일정이 잘 짜여졌는지, 못 짜여졌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잘 모르면서 가는 거예요.
여러분 5박 6일 간단한 여행의 로드맵도, 우리 머릿속에 한 눈에 딱 들어오기가 힘든데,
우리 인생길 전체는 어떨까요? 이걸 다 보여줄 수도 없고,
하나님이 우리 인생길을 다 알려주신다 해도, 우리는 그 의미를 제대로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1997년 여름에 결혼하고, 바로 미국으로 유학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을부터 막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IMF 사태 ...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결혼하고 유학갈 엄두를 못 냈을 거예요.
모르니까 갔지요.
물론 믿음으로 유학 갔습니다. 기도하고 갔습니다. '하나님 의지합니다' 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IMF 어려운 일이 닥치니까 '하나님 이거는 감당 못하겠습니다'
하는 곡소리가 연신 나오더라고요.
베드로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믿습니다. 내가 그렇게 해 주시옵소서.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그럴 때에 이렇게 당당하게 갔잖아요. 근데 몇 발자국 가다가 겁이 나는 거예요.
거친 파도에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해요?
뒤로 돌아가려고 해도, 배로 다시 돌아가려고 해도 너무 멀어요.
저 역시 미국까지 왔는데, 되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가기도 힘들고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몇 년 지나면서 좀 안정이 되었을 때에
시카고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 자신이 있었어요. 제가 교회를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고요. 사역하면서도 나름대로 열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근데 막상 교회를 개척해서 담임목사가 되고 나니까
'내가 교회가 뭔지도 모르고 개척했구나.. 알았으면 안 했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개척이 이럴 줄은 몰랐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부모도 태어난다!'
아기가 응애하고 태어날 때도, 그 순간에 아무 것도 모르는 베이비 같은 부모도
같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엄마들 많이 계시잖아요. 엄마의 엄마도 계시잖아요.
여러분 맨 처음에 엄마 되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엄마가 뭔지 알았습니까?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알았습니까?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르고 가는 거예요. 인생 경험이 많아도, 당황스런 일이 많습니다.
현직에서 잘 일하시고 은퇴하신 분들도 그렇습니다.
'은퇴하면 이럴 거야...' 이렇게 계획해도, 대부분 이렇게 말하십니다.
'막상 은퇴를 해보니까, 은퇴 전에 예상한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거예요.
사실 모든 게 그래요.
-결혼하는 게 그렇고
-가장이 되는 게 그렇고
-어른이 되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
-이혼하신 분들도 마찬가지죠.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이혼한다' 그러면, 얼마나 많이 기도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이 생각해보고 준비했겠습니까?
'이렇게 (혼자) 살면 되겠구나' 했는데, 막상 이혼해 보면 너무 달라요.
그러는 분들 많이 계십니다.
우리가 아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당황스러운 거예요.
▲제가 미국 시카고에서 차를 몰고, 콜로라도에 간 적이 있습니다. 로키산맥 아십니까?
차를 몰고 지도를 보고 가는데요. 지도를 딱 보니까 두 시간이면 가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출발했는데, 운전한 지 5시간이 지나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게 웬일인가?' 당황했어요. 그 이유는,
시카고는 전부 평지거든요. 가도 가도 그냥 편평한 땅입니다. 그러니 길이 직선이에요.
그런데 로키산맥 험산준령을 넘어가니까, 지도에서는 아주 가까운 것 같은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예요. 차도 속력을 못 내고요. 운전을 조심해야 되고요.
큰일 날 뻔했습니다. (지도에 대충 그어진 길이, 실제로는 꼬불꼬불한 대관령 같은 길의 연속이었죠)
그러니까 평지에 살던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이 공식,
그것이 이 험산준령 지역에 가면 안 통하는 거예요.
◑욥이 당한 딜레마, 하나님이 안 보임
우리가 오늘 욥기를 읽었습니다. 욥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모범적으로 살았습니다.
성공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요.
고민이 있으면 욥에게 찾아와 조언을 구했습니다.
욥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잘 조언해 줄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성실히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자기 나름의 공식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의 감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열심히 하면 된다. 힘들어도 이 고개만 넘어서면 할만할 거다.
아파도 조금 참으면 괜찮아질 거다. 사람들이 오해해도 진실하게 노력하면 풀릴 것이다...'
이렇게 나름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어떤 순간에 이런 공식이 안 통하는 거예요.
내 머리 속에 있는 그 공식, 내가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 방식이,
지금 현실과 너무 다를 때에... 우리는 좌절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감각, 즉 사람이 몸으로 익힌 감이 있잖아요. 그게 안 통할 때입니다.
프로 운동선수들, 특히 골프나 야구 같은 종목이 그렇습니다.
중요한 경기에서 한두 번 실수를 하면, 이게 감각이 헝클어져 버립니다.
내 감각을 신뢰할 수 없는 거예요. 전에 하던 감각대로 했는데... 그게 안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없어지고 슬럼프에 빠집니다.
그 슬럼프가 오래 가는 경우도 많고요. 심한 경우에 그 길로
아주 유망하던 선수들이 회복하지 못하고, 은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술가들, 영화감독들도 그렇고요. 가수들, 작곡가들도 그렇습니다.
요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사업도 그렇죠. 자신 있게 앞서 나가던 때,
여러분 이 사업가가 자기의 센스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데이터만 갖고, 여러분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감각이 있어야 되는데,
여러분 패기만만하던 사업가가 몇 번 실패하고 나면,
가장 큰 위기는, 내 감(각)을 내 스스로 못 믿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될지... 아무것도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면 웬만큼 풀렸는데... 오해만 더 쌓일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혼란에, 근본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욥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하나님, 어디 계세요?'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내 느낌이 없다는 거예요.
예배를 드려도, 그렇게 사모하던 예배가... 은혜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메마를 때가 있는 거죠.
기도를 해도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기도를 하는데, 내 기도가 천장에서 튕겨져 내려오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하나님 실종신고를 해야 하나?'
'하나님은 우리 시야에 안 들어오실 정도로 크십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하나님이 안 보이시는 거죠!
여러분 이거는요. 내 시야에 하나님이 안 들어온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은,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세계에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눈에, 그 창에, 하나님이 안 들어오고 있는 겁니다.
과학자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우리 인간이 아는 것은 정말 작구나' 그걸 깨닫고 겸손하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요즘에 적외선 망원경,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이런 것 때문에
우주의 비밀을 캘 수 있다 라는 기대가 굉장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허블 망원경 이라고 들어보셨죠? 굉장한 고성능인데
여러분 허불 망원경이 처음 나왔을 때, 어떤 과학자가 이런 제안을 합니다.
처음에는 약간 장난스러운 제안이었다고 해요.
'이 우주의 넓은 공간에 별이 없는 곳, 별이 가장 드물게 있는 곳을 찾아서 촬영을 해보자.
그러면 굉장히 멀리까지, 거기에 뭐가 있는지,
우리가 촬영하고 우주의 비밀을 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제안을 했는데,
그 제안이 마침내 받아들어져서, 한 번 그렇게 해 보게 됩니다.
1995년 성탄절 앞뒤로 10일 동안 촬영을 하는데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시커먼) 공간을 발견해서 망원경을 비추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열흘 동안 사진을 찍는데, 허블 망원경은 조금만 각도를 바꾸어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대요. 하루에 10억, 열흘 동안이니 100억이 새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342장의 사진을 찍어서, 다 결합해서 한 장의 사진을 만들었습니다.
우주를 굉장히 깊이 찍었다 해서 그걸 '허벌 딥 필드'라고 불렀습니다. Hubble Deep Field
여러분, 그 이름은 몰라도 여기저기서 많이 소개되어서 다 그 사진을 보셨을 거예요.
그 100억자리 사진을 보면, 약 3000개의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점 하나가 별이 아니고요. 하나의 은하 라는 사실이 밝혀 졌습니다.
하나의 은하! Galaxy
하나의 은하, 또는 은하계에는, 그 안에 수천억 개의 별이 있잖아요.
그게 그 사진 안에 3천 개의 은하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 사진 한 장이, 우주에 대한 인류의 지식을 획기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이 넓은 우주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우주가 이렇게 넓구나'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위키백과에 찾아보시면 사진이 나옵니다. 이 점 한개가 *은하계
이게 전체 우주에서 보면 100M 거리에서 테니스 공 하나 정도 우리가 보는 거라는 거예요.
이게 감이 잘 안 잡히면, 어떤 과학자가 이렇게 설명을 해요.
바늘 있잖아요. 바늘을 손에 잡고 팔을 쫙 뻗어서 보면
바늘 귀로 보이는 풍경이 있을 거 아니에요.
허블 망원경은 그 만큼을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주를 전부 다 촬영하려면
이런 사진을 2,200만 장을 찍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볼 수 있는 창, 그 렌즈가 작은 거예요.
'오른쪽을 보아도 왼쪽을 보아도 하나님 안 계신다' 이거는요.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의 문제라는 겁니다.
▲욥기 맨 마지막에 보면 그런 말을 합니다. 굉장히 우주론적인 논쟁을 하나님이 하세요.
욥38:4~6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38:18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39:31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32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33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여러분 이 수많은 별들을 다 펼친 분이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 일부분의 일부분도 모르는데
'내가 보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 것 같아' ... 그건 내 시야가 좁은 거죠.
내가 찾을 능력이 없는 거죠.
우리는 그렇잖아요. 집안에서 TV 리모컨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잖아요.
핸드폰도 어디에 두고서 몰라서 막 찾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내가 다 찾아봤는데, 없는 게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의 시야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지식에 의해서 한정이 됩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내가 볼 수 있고, 지식으로 아는 세계라 하더라도,
내 감정에 의해서 더 좁아지는 거예요.
내 주위에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어도, 내가 화가 나면, 그게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렇죠? 또 불안하면, 있는 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정말 화가 날 때는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러잖아요.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예요. 감정에 따라서 우리의 시야가 제한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인식 능력이 작기도 하지만,
우리의 감정에 우리의 신앙이 기초할 때,
우리의 예배가 메마르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다는 느낌,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이 좌우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욥23:8절에 보면 '내가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하나님이 안 보이신다.
왼쪽에, 오른쪽에서 계시지만 나는 뵈올 수가 없다' 했는데,
그러나 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여러분 이게 믿음이고, 이게 복음이에요.
'하나님의 길을 내가 안다. 파악했다. 알고 있다' 그게 아니고요.
'나는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길을 아십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제
여러분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 아빠가 있어요.
아이들도 엄마 아빠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뭐예요? 아이가 엄마를 보는 것보다,
엄마가 아기를 놓치지 않고 보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거예요.
요즘 여러분, '애착관계, 분리불안' 이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엄마가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굉장히 불안합니다.
엄마가 옆에 있어도 불안해요. 안 떨어지려고 그래요.
그런데 '엄마가 나와 함께 있고,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점점 자신감이 생기고, 용기를 얻습니다.
엄마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 놓고 친구들하고 놀고 집중하고
그렇게 신뢰하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은, '내가 늘 하나님을 보고 있고, 하나님을 시야에서 놓친 적이 없다.
내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 그게 아니고,
'나는 혹시 놓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게 믿음인 거예요.
시139:2~3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시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결코 주님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그게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바다 끝에 가서 거하더라도 나를 놓치지 않고 보고 계십니다'
그게 복음인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가 뭡니까?
계속해서 양들을 쳐다보며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시편이 이렇게 마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누가 누구를 따릅니까?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따르시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따를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보시고, 따르시는 줄 믿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할 때, '믿으라'가 신뢰하라 .. 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신뢰'는 믿음이 구체화된 겁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을 우리 삶에 잘 적용하면, 신뢰가 됩니다.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하는 찬송이 있잖아요. 그 다음에 뭐예요?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신뢰하며 걸으면 소망이 생기는 거예요.
그 소망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판단력과, 잃어버렸던 감각도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현실이 바뀌었다면, 감각이 리셑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 힘을 가지고, 그 지혜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의 판단력이, 또는 감각이 흐려지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수할까 봐... 또 잘못될까 봐...
그 두려움을 넘어서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의 건강한 판단력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인생길 내비게이션을 따라갈 수 있는 겁니다.
▲존 케버너 라는 아주 탁월한 윤리학자가 있습니다.
목회자이기도 하고요. 미국 세인트 루이스 대학에서 가르쳤던 분입니다.
이분이 '자기 인생에 고민이 많아서 어떻게 해결해볼까?' 해서 인도로 갑니다.
켈커타에 마더 테레사가 운영하는 <죽어가는 자들을 위한 집>에 3개월이나 가서
먹고 자고 하면서, 거기서 봉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게 뭘까?' 하는 고민을 계속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봉사하면서 마더 테레사와 개인적으로 면담을 요청해가지고, 기도 부탁을 합니다.
마더 테레사가 '뭐라고 기도해드릴까요?'
이분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기도 제목을 내어놓습니다.
'제가 확실한 답을 얻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때 마더 테레사가 이렇게 말해요.
'확실한 답이야말로, 우리가 붙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놓아야 됩니다.
확실한 답이 내게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늘 내게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뢰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하나님을 끝없이 신뢰하도록 기도해드리겠습니다.'
교수는 '아니 수녀님은, 늘 확실한 답을 갖고 계신 것처럼 보였는데요?'
마더 테레사는 '아니에요. 내 인생에 확실한 답이란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늘 갖고 싶었던 것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그 신뢰를 선물로 제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하나님을 신뢰 trust 하도록 제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할 때, 좀 싫었던 찬송이 있습니다.
뭔가 하면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저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증거를 좀 팍팍 보여주시고,
확실하게 그냥 인도해 가시면 좋을 텐데...' 생각했지요.
이 눈에, 내 생각 속에, 하나님을 포착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 들어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만은 가지고서 늘 걸으면'
그 믿음이 바로 신뢰인 거예요. 그게 트러스트인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가요? 세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1. 첫째, 기도 혹은 불평입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평도 해요.
여러분, 하나님께 불평해도 될까요?
'불평하지 말라'는 말을 우리가 워낙 많이 들어가지고, 불평하기를 우리가 많이 꺼려하죠.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하지 마십시오. Do not complain about God.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평하십시오 Complain to God.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엄청나게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about God 불평은, 신뢰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품, 선하심과 인자하심,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라 그랬는데
거기에 의심이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래서 내가 하면 더 잘하겠다'는 거예요.
가이드가 길을 안내하는데 '아니야, 이 길이 좋은 것 같아. 여기로 갈래!'
하나님을 내 인생의 운전대에서 내리시라 그러고, 내가 운전대를 붙잡겠다는 거죠.
'내가 하면 더 잘할 텐데...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드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라는 불평이 있습니다.
그것과 달리 Complain to God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감정을 솔직히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하는 거예요.
여러분 내 마음에 어려움이 있을 때, 그걸 그냥 누르면 안 됩니다.
누르면 그게 화병이 되는 거예요. 속에서 이렇게 썩어가는 거예요.
하나님께 솔직히 우리는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하나님의 성품, 내가 지금까지 가져온 인생의 공식이 있고,
지금 내가 경험하는 현실이 차이가 나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는 '하나님은 분명히 이런 분인데, 왜 나에게,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생기나?' 하는 내가 경험하는 현실에 대한 차이... 둘 다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지키려고 현실을 무시해버립니다.
'괜찮아, 금방 잘 될 거야' ... 그러나 금방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현실에 묶여서, 하나님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둘 다를 함께 붙잡는 거예요.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과,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너무도 이 아픈 현실의 그 차이...
'괜찮을 거야'가 아니라,
'하나님 도대체 왜 이렇습니까?' 고민하고 아파하고 항변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불평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서 하나님께 질문하는 거예요.
다윗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22:1
이게 바로 하나님께 불평하는 거죠. Complain to God 인 거죠.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 인생에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 가정의 기도 제목들을 보면
모두가 다. 슬프고 힘들지만, 특별히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참 귀하다. 너무 착하다. 참 예쁘다' 하는 이런 가정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또 하나는 '안 그래도 힘든데, 지금도 겨우 대롱대롱 매달려서 살아가고 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나?' 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게 욥기 아닙니까?
다윗도 그랬어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도 그러신 거예요.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 다윗의 기도를 그대로 가져와서, 이 기도에 동참하신 거예요.
우리의 모든 불평에, 예수님도 동참하신 거예요.
우리의 그 항변에, 저항에, 예수님도 함께하신 겁니다.
△여러분 성경에 수많은 '하나님께 하는 불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 불평들을 다루실 수 있다는 거예요.
학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다 질문해라' 그래서 학생들의 무슨 질문이든지 다 받으면,
실력 있는 교수예요. 그 질문을 다 다룰 수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 특히 시편에 이런 불평이 많이 나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아픈 마음을, 이 아픈 현실을 다루실 수 있다는 말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다루실 의향이 있으신 거예요.
신실하고 진지하게 간절하게 답을 구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만나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불평하십시오. Complain to God!
욥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예요.
속으로 누르고 괜찮은 척, 믿음 있는 척 하지 말라는 거죠. 강한 척 하지 말라는 겁니다.
▲2. 둘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욥23:12절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정한 음식'이란, 일정한 음식입니다.
내 감정에 따라 먹고 싶을 때 먹는 게 아니고,
일정하게 먹어야 건강한 거예요.
예배 드리고 싶을 때 예배 드리는 게 아니고,
성경 읽고 싶을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성경 읽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일정하게 가까이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작년 한 해도, 우리 교회에 참 아프신 분들 많았습니다.
어르신들이 많이 아프셨는데, 회복되신 분도 계시고요.
'굉장히 많이 아프시다' 그랬는데
이렇게 교회에서 만나서 보면, 식사 잘 하시는 거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제 됐구나.. 이제 사시겠구나.. 건강해지셨구나' 할렐루야!
여러분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사하시는 거 보면, 건강을 알 수 있어요.
영적 건강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의 말씀 듣는 거 보면,
말씀 붙들고 읽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살겠구나!' 할렐루야
'어려움이 있지만 버텨내겠구나..' 욥이 그랬죠. 결국에는 이겼잖아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일정한 음식보다... 혹 밥은 못 먹어도, 주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긴 사람입니다.
▲3. 셋째, 십자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신뢰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니까 요14:4
도마가 아주 돌직구 질문을 합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14:5
이때 예수님 뭐라 그러십니까?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하나님의 가시는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는 도마에게
'이런 이런 길로 이렇게 가서 좌회전 우회전해서 갈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지 않고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거예요.
그것이 진리였고,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헤아릴 수 없고, 우리의 좁은 시야에 다 담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들은 몰라, 설명해줘도 몰라, 알아서 그냥 믿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우리의 이 좁은 생각의 시야에,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마음의 핵심 중에 핵심을 보여주신 거예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모든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수용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요.
하나님이 보여주신다 한들, 우리가 다 이해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길 여정에서 만나는 일들 중에, 해석 불가능한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5박 6일 해외여행을 가도, 그 로드맵 다 보여줘도, 우리가 보고서도 모르는데,
여러분의 인생의 길을,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 만은 꼭 알아라'고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 영원한 진리가 있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고,
우리가 당하는 인생의 모든 경험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가시는 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핵심에 그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향한 것이며,
그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에 미국 뉴저지에서 목회하시는 H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제 은퇴하셨어요. 그 전에 굉장히 큰 욥의 시련을 겪으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2015년 어느 날에, 사랑하는 딸이,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16살 동네 남자아이가, 모르는 아이예요, 그가 휘두르는 칼에 찔립니다.
병원으로 옮겼는데 50분 후에 숨집니다. 딸은 23살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 다음 주일에 주보에 글을 쓰셨어요.
「나는 지난 주간에 딸을 잃었습니다.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그럴듯한 수사가 아닙니다.
정말 가슴 한켠에 묵직한 것이 들어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딸아이 생각... 혼자 있으나 함께 있으나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도 눈물이 흐르고,
식탁에서 기도를 하다가도 울고,
이래서 울컥, 저래서 울컥합니다.
일을 당하고 하루.. 이거 쉽지 않겠구나... 퍽 오래 가겠구나 싶었던 데 비하면,
이제는 그런 마음이 많이 가셨습니다.
어차피 한두 해에 청산될 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이 힘든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툭 털어버리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신학자 한스 큉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해가는 길은 알지 못하지만,
고난을 헤쳐나가는 길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만하면 다행이지 않은가요.
나는 이제 아들을 잃으신 적이 있는, 같은 처지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하나님이나 나나" 입니다.
십자가에서 외동 아들을 잃으신 하나님,
그럴 필요 없었는데,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그 엄청난 고통을 친히 감당하신 하나님,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모든 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뢰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인생길, 참으로 힘든 인생길이지만,
신뢰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정리합니다. 기도, 혹은 불평... 불평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불평하십시오. 그게 성경이 권하는 바입니다.
둘째, 하나님 말씀, 그 말씀의 핵심에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의 예수님이 있는 거예요.
그 예수님 사랑 안에서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주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