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에서 자유인으로 | 요 8:31-36 | 25.1.19 - YouTube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요8:31-36 2025.01.19.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는 단계는,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분의 제자가 되는 거예요.
두 번째는 말씀을 경험하는 단계,
세 번째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온전히 맺는 삶을 살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안에 붙들려 있을 때,
그리스도가 누리는 자유를 우리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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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 자유가 넘치는 것같지만,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날 우리는 자유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참 자유로운 것 같아요. 자유가 넘쳐납니다.
어느 시대 보다 우리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뭘 하는데 그렇게 큰 제한이 없습니다.
마음껏 소비하고, 또 마음껏 또 욕구를 분출하기도 합니다.
자, 그런데 어느 시대 보다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나는 진정한 자유인 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죠.
이 자유를 빼앗기면 노예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자유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요8: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우리가 노예가 된 적이 없다... 그랬는데, 사실 이 말은 틀렸어요.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노예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애굽에 종살이를 했고요. 또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70년 동안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도,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노예가 돼 있죠.
근데 사실 주님은, 지금 '정치적으로 의미에서의 노예'를 말씀하신 게 아니고,
'죄의 관점에서 노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너희들이 어떻게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느냐?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굉장히 도전적으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유'라는 말은 어디에서나 우리가 사용하죠.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성경에서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늘 벌어지는 풍경은 '권력 투쟁'입니다.
권력 투쟁은 뭐 국가 안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매일 가정에서, 또 학교에서, 직장에서, 어디에든 이 권력 투쟁이 일어납니다.
힘의 대결이죠.
힘 겨루기, 힘을 더 많이 확보 하겠다는 이 싸움, 이 게임은, 어디에나 벌어지는 것입니다.
힘에 밀리면 지배를 받는 것이고, 국가 간에도 그렇고, 또 정치인들도 마찬가지고,
또 우리의 좁은 사회, 공동체 안에서도, 이 힘의 역학 구도가 늘 작동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력은 결국은 상대를 억압하고, 나의 자유를 더 확대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권력 투쟁은, 대개 이전투구로 변하기 쉽습니다. *진흙밭의 개싸움
여러분, 인간의 삶의 가장 큰 권력은 무엇일까요? 바로 죄입니다.
죄의 힘은 막강하죠. 죄의 지배를 받는 순간, 인간은 죄의 종이 됩니다.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죄의 힘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당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자신들을 의롭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은 죄의 종이다!' 이렇게 지적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에서 자유의 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분의 제자가 될 때... 자유하게 됩니다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를 얻으려고 하면 내 제자가 돼야 된다..'고 하셨어요.
주님은 자유인 이셨죠. 주님은 어떤 것에도 메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르신 분입니다.
당연히 그 분을 따르면, 그 분이 누리는 자유를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너희가 내 제자가 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제재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죠?
오늘 이 말씀처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1
여러분, 제자는 누구입니까?
제자는, 그 말의 뜻은, 문자적으로 배우는 사람입니다. 학습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무엇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말씀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1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모르고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능해야 합니다.
제자는 자기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어야 되는 거죠.
골로새서 3: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랬어요.
'우리 안에 무엇으로 채워지느냐?' 의 싸움입니다. 큰 싸움이죠.
결국은 '나를 지배하는 원리가 뭐냐?'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자유가 결정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냐, 세상의 철학이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수록, 세상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속에 채우려고 하면,
결국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말씀이 그냥 안 채워지잖아요. 계속 채우는 작업을 해야 되는데,
채워야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나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말씀에 소극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면,
다른 것들이 우리의 의식을 가득 채워서, 다른 이론들이 나를 끌고 갈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 채워진 게 뭐냐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이라는 말은 :31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있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우리가 배워야 되느냐?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러분, 말씀을 채우려고 하면, 딴 게 없어요. 우선 읽어야 합니다.
열심히 성경을 읽으셔야 됩니다.
연초부터 성경통독을 시작하셨으면, 계속 성경을 읽으십시오. 읽되 많이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일평생 한 1백 독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애초에 1독이라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성경을 많이 읽으셔야 돼요.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자와..' 계1:3
들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는 것입니다.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들음에서 믿음이 나죠. 롬10:17
이 '듣는다'는 게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게 더 대세 입니다.
소위 말하면 '영상 시대'가 열렸습니다.
과거엔 오래도록 '문자 시대'였죠.
문자 중심의 시대가 수천 년의 역사를 내려왔는데,
최근에 이 문자 중심에서, 영상 중심으로 바뀌었어요.
이제 자라나는 세대들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영상 세대'입니다.
이것은 거대한 변화입니다. 뇌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믿음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관건은,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걸 통하여
성경의 무지해서 벗어나야 된다는 거죠.
문맹은 삶을 불편하게 하죠.
또 어떻게 해서든 글을 깨치는 이유가, 문맹은 너무 불편하잖아요.
내가 글을 모르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런데 글자의 문맹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적 문맹자가 되는 겁니다.
영적 문명은 문자 문맹 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자신이 판단할 절대적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말씀을 모르면, 길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논리에 생포를 당하게 됩니다.
이상한 논리와 철학의 노예가 됩니다.
말씀에 무지하면,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면 세상을 따라가요.
세상의 논리에 설득을 당하게 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거짓된 이론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그걸 저항할 수 없다는 거예요.
타인의 논리에 얼마든지 끌려 다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력은 요즘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붙잡고 삽니다. 일심동체입니다.
뉴스를 보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각종 정보를 거기서 얻습니다.
많은 시간을 핸드폰에 빼앗깁니다.
알고리즘과 연결되면, 시간이 무한정 소비가 됩니다. 끊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시간만이 아닙니다. 내가 보는 것에 몰입이 되고,
몰입이 되면, 나는 거기에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고 울고 웃다가, 뉴스를 보다가 분노하고, 개인 컨텐츠를 보다가 잠이 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내가 사고하는 게 아닙니다. 사고를 당하는 겁니다.
거기에 무슨 사색이나 묵상의 세계가 없습니다.
이런 문화에서 심각한 것은 뭘까요?
결국은 말씀으로 부터 멀어져가고, 진리로 부터 멀어져 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을 대하는 태도와, 핸드폰 알고리즘에 몰입되는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내 영혼을 어디에 내어 놓을 것인가요?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말씀에 무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에 무지하면, 그 다음은 삶에 성경적 기준이 없어져요.
'내 마음대로 산다'가 되겠죠.
여러분 내 마음대로 사는 게 자유 입니까? 아니죠.
내 마음대로 살아보면, 반드시 삶이 꼬이게 돼 있습니다. 자유로부터 멀어집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자유가 오죠.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유가 옵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대가는 큰 것입니다. 무지하면 자유를 빼앗깁니다.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고, 삶은 힘들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31
즉 '너희가 내 말에 거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교회는 다니지만, 세상의 제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논리의 아류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될 수가 없어요.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31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들어 가십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시죠.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어마어마한 말씀이죠.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32
여러분, 진리를 알기 전까지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뭘까요?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예요.
그러니까 진리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근데 이 진리는, 곧 그리스도란 말이죠.
그래서 말씀의 초점은 언제나 그리스도 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리딩 지저스> '그리스도를 읽어라'
즉 '그리스도를 묵상하라, 그리스도를 찾아라,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묵상하라'는 거죠.
◑2. 말씀을 경험하는 단계가 될 때... 자유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안다'는 것은 뭘까요?
여기서 '안다'라는 헬라어 원문에 의미는
머리로 아는 knowledge, 지식적인 앎을 말하지 않아요.
경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으로 설교를 많이 들어요. 근데 듣는 것은 그냥 지식이에요.
청취자이죠. 청치로 끝나는 겁니다.
많이 들었다고 결코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진리를 안다'라는 말의 진의는, 진리를 경험하는 것이거든요. *기노스코
구체적으로 경험을 해봐야 결국 알게 된다는 거예요.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실제로 삶에 적용해 볼 때
그 말씀이 순종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말씀의 비경이 열리는 것이죠.
삶에 적용해 보지 않으면, 그 말씀은 머리에만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만 점점점 커지는 거죠.
머리에만 쌓여있는 말씀은, 요8: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가 아니라 '모를지니'입니다.
'용서하라' 는 말씀을 실천해 보기 전에는, 그 말씀의 의미가 뭔지를 몰라요.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 했을 때만, 우리게 주어지는 그 풍성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돼죠.
'아~ 용서를 실천해 보았더니, 주님이 왜 용서하라고 하셨는지 이제 알 것 같아!'
그 용서를 실천 했을 때, 그 용서의 지평이 열리면서
내가 그 땅을 딛기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세계가 열리는 거죠.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이런 말씀은
마치 에베레스트에 높은 정상처럼 보여요. 쉬운 일이 아니죠.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는 것!
그래서 대개는 멀리서 보고 '아, 높은 산이구나' 그리고 끝나버려요.
근데 그 산의 정상에 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힘들지만 그 길을 가는 거예요. 가보니 그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있는 거죠. 정상에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요. 이게 말씀의 경험이에요.
여러분, 히말라야 산맥의 최고봉은 에베레스트 입니다.
근데 히말라야 산맥에, 해발 8천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14좌가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도전을 하는 거죠.
여러분 성경에도 굉장히 높은 산들이 있어요.
그러나 어떤 것은 우리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오를 수 있는, 쉬운 산들도 있어요.
그런 하나님의 말씀들을 하나하나 경험해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호하지 않고,
하나의 지식의 덩어리가 아니고, 정보의 덩어리가 아니고
그 말씀이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경험해 가는 것,
이걸 주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게 하리라' 라고요! :32
▲성경이 주어진 목적은, 단순히 교리적 이해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교리는 너무 중요해요. 근데 교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신앙적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그 말씀, 구체적으로,
그게 성경의 문자가 아니고, 문자를 넘어 생명력이 있는, 운동력이 있는 말씀으로
오늘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이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라는 걸 경험할 때,
그 말씀에 내 삶을 걸 수가 있는 거죠.
여러분, 단순히 말씀을 알고 있다, 이해하고 있다, 깨달았다... 정도가 아니고,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동력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진리를 알 때, 어때요?
진리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는 거예요.
확신이 되니까, 어떻게 순종 안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말씀에 대한 확신이 크면 클수록, 순종하기가 쉬워집니다.
갈수록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내가 그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지킬수록, 말씀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나를 사로잡는 말씀이, 나를 지켜 줍니다.
그때 무엇이 오는 줄 아십니까? 자유가 오는 거예요.
진리의 힘이, 나를 자유의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시도하려고 하면, 두려움이 와요.
두려움이 자꾸 커지면, 순종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진리를 경험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순종해 나가려고 할 때, 두려움이 찾아오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거예요.
왜요? 그 말씀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쉽게 휘둘립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나 행동을 하려고 해도
주위 사람들의 그 시선과, 평가와, 말에 내가 휘둘리면서... 내 행동을 주저하게 됩니다.
여러분, 진리를 알고, 진리를 깊이 경험하지 않으면, 사람이 자꾸 소심해져요.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 여러분 남들이 뭐라고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리가 뭐냐?'가 중요한 거예요.
누가 한 마디 하는데 영향을 받으면, 나는 그 사람의 말에 끌려다니게 되는 거잖아요.
'누가 내 욕이나 하지 않을까?' 이렇게 진리의 기준이 없으면, 흔들리는 갈대가 되는 거예요.
우유부단해 지고, 늘 방어적이게 돼요. 디펜스 한다고 바쁜 거죠.
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자유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나의 삶을 결정하는 거예요. 주위 사람들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붙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론, 평가, 어떤 주장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냥 하면 되는 거죠.
내가 알고 있는 그 진리가, 나를 견고하게 (자유하게) 해준다는 겁니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행함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진리의 힘이, 나로 거침 없이 행동하게 하고,
그 진리를 따라 행할 때, 그 진리가 비로소 나를 승리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사신 분이에요.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리라 하시니'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의 힘이 떡의 힘보다 더 크게 작용했다'는 거잖아요.
주님은 '마귀가 던지는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붙들려 있었다'는 거예요.
육신의 유혹보다 영의 힘이 강하면.. 이기는 거예요.
내가 뭐 이기려고 해서 이기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있으니까, 유혹이 나를 넘어뜨리지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유혹이 강해서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약하면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언제 말씀의 힘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가요?
평소에 말씀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일상이 있어야 됩니다.
평소에, 일상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죠.
예수님은 단순히 성경 암송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암송하는 이유는 뭘까요?
암송하고 있다 보면, 그 말씀을 적용할 순간이 나타납니다.
그때 그 말씀이 무기가 되는 거죠. 좌우에 날선 검같은!
여러분, 우리가 죄의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죄의 힘을 밀어낼 만큼, 말씀의 힘이 강해야 한다는 거죠.
매일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묵상, 밥은 매일 먹는 거잖아요. 가끔 먹는 게 아니잖아요.
밥을 매일 먹듯이, 일상적 습관이 중요한 겁니다.
밥을 먹어야 되듯이, 말씀을 먹어야 됩니다. 겔3:1
밥을 잘 그린 그림을 감상하는 것으로는, 밥의 맛을 알 수가 없어요. 배가 부르지 않아요.
아무리 밥 그림을 쳐다봐도 별 소용 없어요. 밥을 먹어야 돼요.
먹어도 가끔 먹으면 안 돼요. 매일 먹어야 돼요.
예수님의 말씀이 그거예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이 말은,
떡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위에 있다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밥을 챙겨 먹는 것보다, 말씀을 챙겨먹는 게 더 우선이라는 거예요.
말씀을 읽는 시늉만으로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한 해를 살아갈 때, 이 말씀을,
매일 밥은 혹시 안 드시더라도, 말씀을 반드시 드시길 바랍니다.
아멘! 여러분이 금방 아멘! 하셨습니다.
밥을 아무리 먹어도, 말씀(영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내가 내가 아니에요.
(죄의) 포로가 되는 거예요. 자유인이 될 수가 없어요.
▲요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으면, 내가 주인이 아니에요.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내가 어떻게 주인입니까?
여러분, 무엇이 우리에게 자유를 뺏앗아가는 것입니까? 죄입니다.
죄를 다루지 않으면 자유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직접 죄를 다루면 져요. 왜요? 죄의 힘이 크니까!
인류 역사가 그걸 증명합니다.
죄와 직접 싸움우면, 우리는 진다는 거죠.
죄는 매우 교모하게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중독자들이 많아요. 중독이란 뭘까요? 자유를 빼앗긴 삶입니다.
술에 중독된 사람은 뭐예요? 술에 포로가 되어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에요.
내가 주인이 아닌 거죠. 술에 완전한 노예 상태입니다.
여러분, 요즘은 갈수록 중독이 늘어납니다. 마치 '중독 사회'처럼 보여요.
여러분 중독이 왜 무서운 겁니까? 종이 되는 겁니다.
한 번 종이 되면, 한없이 끌려 다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독에 한 번 걸려 들면, 아까운 인생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한 영혼을 철저히 파괴해 버립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독에 빠지면, 뭐 사람이 흐물흐물 해져요.
그냥 시들시들 해져요. 맛이 가 버려요.
한 때는 열심히 괜찮은 일꾼이었는데, 이 중독에 한 번 딱 잡히면
사람이 이상해져 버려요. 눈동자가 풀려 보여요.
아까운 삶의 에너지가 엉뚱한 것에, 무한 방출 돼 버리는 거요.
중독에 의해 쓰러집니다. 아까운 청춘이 중독의 늪에 허우적 거립니다.
여러분 이 중독이, 지금은 점점 영토를 넓혀 가요. 어마어마하게!
젊은 세대만 아닙니다. 모든 세대입니다.
여러분, 중독자가 되는 과정은 서서히 일어나잖아요.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중독까지 될 줄은, 본인이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가 중독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중독이 그렇게 세죠.
▲사사기에 보면, 삼손은 힘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너무 많은 사람이 삼손 입니다. 그런 축복된 인생이었습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한 순간이 아닙니다. 서서히 입니다.
나중에는 그 엄청난 삼손이, 자기 힘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노예가 됩니다.
블레셋을 자기 혼자서 그냥 무찔렀던 용사가, 꼼짝없이 블레셋의 노예가 됩니다.
두 눈 뽑히고, 맷돌 돌리고, 블레셋의 놀이감이 됩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나면 어떻게 되죠? 노예처럼 질질 끌려 다닙니다. 비참합니다.
삼손의 삶을 보면, 얼마나 비참하게 끝납니까? (마지막에 반전을 일으키기는 했죠)
어느 순간까지는 나에게 결정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독이 깊어지면, 나의 결정권이 줄어듭니다.
나의 결정권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노예가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끌려다니는 거예요.
여러분, 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가려 하는 인간은,
그때부터 자기 공허한 내면을, 무엇인가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두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터진 웅덩이에요.
그것을 채우려고 하다가, 채우지 못하고, 노예적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자유케 되는 길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줄로 믿습니다. :32
◑3. 그리스도와 관계를 온전히 맺는 삶을 살 때.. 자유하게 됩니다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여기서 '아들'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왜 '아들'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아들과 종의 신분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하는 중이니까요.
아들은 자유가 있어요. 아들은 하고 싶은 걸 다 합니다.
아들은, 집 안에서 냉장고 아무 때나 열고, 뭐 자기가 라면 끓어 먹고 다 해요.
그러나 종은 그런 자유가 없습니다.
아들의 권세는 놀랍습니다. 노예는 권리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근데 오늘 이 자유를 누리는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도 아들이 누리는 동등한 자유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에요. 8;35~36
우리도 이 아들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계속적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를 따라가면, 참된 자유가 그리스도로 부터 온다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특권을 얻게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분의 제자가 되는 거예요.
두 번째는 말씀을 경험하는 단계,
세 번째는 그리스도 와의 관계를 온전히 맺는 삶을 살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안에 붙들려 있을 때,
그리스도가 누리는 자유를 우리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그리스도를 계속 바라봐야 돼요.
우리의 믿음의 모든 초점은, 그리스도 입니다.
여러분, 예수는 종교를 만든 창시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를 믿고 따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을 보여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방식을 다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나를 따르라' 그랬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어떻게 보면 심플 합니다. 뭐예요?
그리스도만 따라가면 돼요.
왜 우리 삶이 복잡해지고, 꼬이고, 어렵고, 엉키죠?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자유가 와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따라간다는 게, 쉬운 거는 아니에요.
왜냐면 두려움이 오는 거잖아요.
오, 주님을 따라 가고자 하는 신뢰가 생기지 않으면, 따라가지 못하죠.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우리에게 '네가 붙들고 있는 걸 내려놓아라'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거죠.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종교 생활과 다른 것입니다.
종교는 엄밀히 말하면 우리에게 자유를 빼앗아 가요.
겉으로는 자유를 줄 것 같아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종교가 나를 속박해요.
고등종교가 어느정도 사람들에게, 보호막이 되죠.
그러나 그 종교는 끝내는 사람들을 억압합니다.
여러분, 종교가 어디로부터 출발된 거 아시죠? 두려움이에요.
종교는 자유와 멀어지게 합니다. 맹목적 순종을 하게 합니다. 더 계율에 매이게 합니다.
나중에는 자기 생각을 못 하게 해요. 두려움을 주어 복종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을 어떤 틀 안에 만들어 집어 넣습니다.
규칙을 지키도록 하고, 그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여러분, 종교는 좀 무거워요. 기쁨이 없어요.
이 종교 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꾸 의존심을 키웁니다. 스스로 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나쁜 종교는, 인간의 자율성을 빼앗아 갑니다.
어떤 틀(율례, 규례) 안에 집어 넣고, 규격을 만들어 따라오게 합니다.
사람들을 도리어 허약하고 만듭니다.
그래서 종교 생활을 하면 할수록 복잡해져요. 왜요? 규율이 많아져요. 엄격해 져요.
결국 어떻게 되죠? 삶이 축소됩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 안에 갇혀 버립니다. 자유가 사라지게 돼죠.
이단 들을 보세요. 추종하는 교주의 조종을 받으며
그 집단 안에, 공동체 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합니다. 자유의 상실 이에요.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게 아니고, 이상한 이론을 추종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도 유대교가 마찬가지였어요.
율법의 채찍들로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어요.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관한 무거운 규칙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막 억압했어요.
율법사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한 한 계명에, 세부 규칙을 수 십~ 수백 개 만들었어요.
안식일에 본래 정신은, 그야말로 '안식'이에요.
근데 종교는, 안식이라는 계명으로 사람들을 얽어맸어요.
안식일 때문에 더 숨이 막혀요.
그러니까 안식이 아니라, '안 쉴'이 돼요.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와 전혀 다른 접근을 하셨어요.
안식일이란 율법을 제정하신 것은, 율법적 의무를 지우기 위해서 만드신 게 아니고,
일을 그침으로써 해방감을 만끽하도록 주신 겁니다.
스트레스를 주려고 이 안식일의 계명을 만드신 게, 그 원래 목적이 아닙니다.
'너희를 일의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주었다'
이렇게 여러분,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무엇인가 자꾸 무거워지고, 힘들어지고, 복잡해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잘못 믿고 있는 거예요. 무엇인가 잘못돼 있어요. 핵심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이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되면, 갈수록 자유로워 져요.
갈수록 기쁨이 넘치게 되어있어요. 억지로 하는 게 없어야 돼요.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 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근데 그렇게 되려면, 핵심은 뭐예요? 죄의 문제라는 거예요. 죄의 문제!
죄는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근데 우리의 힘으로는 이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실패하는 거예요.
근데 이 죄로부터의 구속이 없으면, 자유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죄로부터의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주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져야 합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며 진리를 따르는 것이고,
그 진리를 따를 때, 우리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삶이 더 심플해 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초점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에 두어야 될 것입니다.
내가 진리 안에 거할 때, 가장 안정감을 얻을 수 있어요.
내가 세상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거예요.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들의 신경을 막 건드립니까? 왜 민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없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겉으로는 자유가 넘쳐나는 세상에,
어느 때보다도 갇힌 자, 포로 된 자들이 너무 많아요. 어디엔가 숙박이 돼 있는 거예요.
돈의 노예가 되어있고, 돈의 포로가 되어 있어요.
도박에 한 번 빠지면, 뭐 꼼짝 못하고 포로가 되어서, 도박장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술이나 약물 중독, 명성과 권력에 집착, 일 중독, 쇼핑 중독, 종교 중독,
성 중독, 음란물 중독, 게임 중독, 주식 중독, 코인 중독, 핸드폰 중독....
현대인들이 거기에 다 통제를 당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주인이 아니에요. 이미 주권이 넘어가 버렸어요.
그것이 나를 콘트롤 해요. 내 모든 신경 조직, 마음, 생각, 사고 방식, 세계관이
거기에 다 올인되어 버렸어요. 숙박을 당하고, 통제를 당하고 있는 거예요.
권력 이양이 돼 버렸어요. 나는 없어요.
그 모든 것의 횡포에 내가 시달리고 있고, 질질 끌려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는 노예적 삶, 얼마나 불행해요?
여러분 신앙의 핵심은 자유예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입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이 자유를 엉뚱한 것에, 너무 하찮은 것들에 내가 빼앗겨 버리면 안 됩니다.
축복 중에 축복은 자유입니다.
신앙연조가 깊어질수록, 자유가 더 커져 가면... 그게 정상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그 자유를 주신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게 되고,
그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가 자유케 된다'는 것입니다. 요8:31~32
내 말이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경험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내 삶이 자유로울 수가 있어요?
진리를 알아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진리이신 예수님과 깊이 동행할 때(진리를 알 때, 예수님을 알 때), 자유로워진다는 거예요.
▲마치는 말
우리는 이제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알아가는 일에 힘쓰십시오.
그 말씀을 내 안에 채우십시오.
잡다한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었어, 내 삶을 엉뚱한 데로 끌고갑니다.
그걸 저항 하십시오.
진리를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삶으로 경험해 가십시오.
알고 경험한 그 진리가, 여러분들의 삶을 자유롭게 할 줄로 믿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매이면
다른 것들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될 줄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속박으로 더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중독 되면, 모든 중독으로 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진정한 자유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