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들은 이토록 진지한가(사도행전 10:24~33)"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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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2. 깨진 교회를 되살리고 부흥시킨 목사님의 진지한 자세>는 필독을 권합니다!
◈왜 이들은 이토록 진지한가 행10:24~33 2024.12.18.
◑1. 장례식에 가서 받은 은혜
제가 담임 목회를 하기 전에는, 부목사로 또 전도사로 그 전에 사역을 했었는데,
그때 제가 집례해서, 교회 남자 집사님의 장례식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교회에서 섬길 때였는데, 온 교우들이 아이들까지 다 함께
경기도 모 처에, 여름수련회를 갔었습니다. 근데 때마침 장례식이 생기게 된 거죠.
담임 목사님이 수련회 인도 관계로 도저히 가실 수가 없어서,
부목사였던 제가 대신 가서, 장례식을 집례하게 되었는데요.
제가 왜 이 얘기를 하느냐 하면, 그 장례식에 가서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거든요.
그 돌아가신 집사님이, 제게 참 많은 교훈을 남기셨어요.
그 집사님은 남대문 시장 입구에 있는 수입 상가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가게 하나가 한 두 평 남짓 되는 작은 가게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는 곳이죠.
온갖 수입 제품이 하여튼 거기에 촘촘하게 진열 돼가지고 있는 그런 상가가 있거든요.
근데 이 집사님은 두 내외 간에, 거기서 오래동안 장사하신 분이세요.
아내 집사님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은 지가 오래 됐습니다.
근데 그 남편 집사님은 오래 신앙 생활을 안 하다가,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시고, 집사님이 되신 분이세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집사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제가 이제 그 장례를 집례하면서 은혜를 받았다는 건 이겁니다.
그 돌아가신 남편 집사님에 관련된 얘기를 식구들이나 주변인들로부터 듣게 되었는데,
'야 이렇게 정말 하나님께 지극 정성을 다 하신 분이 있을까?'
그런 감탄을 할 정도로 정성을 다 하셨어요.
그분은 새벽에 일어나면, 찬송가를 혼자서 몇 장 부르시고,
그리고 성경 말씀을 꼭 읽고, 기도하고, 그리고 이제 그 상가로 출근하는데,
아침 7시 전에 사업장에 도착을 하신대요.
그러니 새벽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가지고, 출근을 하시는 거죠.
아침 7시까지 출근하려면, 아주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되는 거죠.
그런데 조금 늦게 일어난 날이 있으면,
아침 식사는 걸러도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 말씀을 정한 만큼 읽고,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것도 참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남자 집사님은,
새벽에 일어나면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그리고 속옷부터 다 갈아 입고
그리고는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자켓 걸치고, 새벽에 어디 굉장한 데라도 가는 것처럼 완벽하게 복장을 갖추고,
비로소 건넌 방으로 가서 딱 무릎 꿇고 앉아가지고,
찬송가 부르고, 성경 말씀 읽고, 기도하고, 그리고 출근하셨다는 거예요.
그 부인 집사님 말씀이, '우리 남편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이후로
하늘나라 가는 그 날까지, 그걸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새벽에 자다가 깨서 게슴츠레 한 눈으로 '주여!' 하고 부르며 기도한 게 아니라,
샤워해서 몸을 다 씻고, 옷 다 갈아입고, 자켓 걸치고, 그리고 무릎 꿇고 앉아서
그렇게 경건의 시간을 가지셨다는 겁니다.
혹시 늦게 일어나는 날은, 비록 아침식사는 드시지 못해도,
그렇게 개인 경건의 시간은 꼭 가지셨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제가 장례를 진행하면서, 그 가족들에게도 듣고,
또 돌아가신 집사님을 아는 구역식구 들에게도 듣고...
여러 교우님들의 증언이 일치했습니다.
근데 그 장례식이 오래된 일인데, 지금까지도 그 얘기가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정말 정성을 다하셨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죠.
좀 삐딱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 요즘 같은 세상에,
뭐 그렇게 율법 주의 식으로 그렇게 하느냐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해도 다 아신다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떤가?' ... 하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우리 교우들이 주일 날 예배하러 나오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정성을 다해서 나오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뭐 대충 이렇게 하겠죠.
그냥 아무 거나 입던 대로 옷을 입은 채,
그냥 갑자기 막 부리나케 달려왔다가 돌아가는 분도 있을 거고,
어떤 분은 토요일부터 몸과 마음을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 정성을 다 하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니겠어요?
◑2. 깨진 교회를 되살리고 부흥시킨 목사님의 '진지한 자세'
울산에 어떤 훌륭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한 몇백 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는데,
내부적으로 분규가 일어나서 오랫동안 싸웠어요.
성도들이 뿔뿔이 다 흩어지고, 성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그리고 인근에서는 '싸우는 교회'로 소문이 난 그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서울에서 목사님 한 분이, 그 교회에 부임을 하게 되었어요.
근데 새로 부임하신 그 목사님은, 제가 한 다리 건너서 아는 분이고,
그 분의 누님도 제가 아는 분인데, (그래서 상당히 신빙성 있는 얘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울산에 내려와 가지고 뭐부터 시작 했느냐 하면,
기도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예배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뭐 싸우는 교회에 부임해 왔으니까, 쉽지 않았겠죠.
그런데 목사님의 관심은 '왜 싸우는지, 이 싸움을 어떻게 그칠 것인지,
내가 어떻게 이 싸움을 멈춰서 교회를 새롭게 할 것인지...' 그런데 관심이 없었어요.
이 목사님은 싸우는 거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그래요.
'당신들이 싸우는지 말든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하나님 앞에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로 왔으니까, 예배에 집중하겠다'
그런 마음으로 목회했다는 거예요.
그 목사님은, 처음에는 토요일에 목사님이 먼저 시작했다고 합니다.
토요일 오후에 예배당이 텅 비어 있잖아요.
목사님은 거기에 들어오셔서, 기도하고는,
강대상 위에 올라와서 목사님이, 준비된 설교원고를 펼쳐놓고, 설교를 하는 거죠.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그래서 5번도 하고, 10번도 설교를 반복해서 하면서
본인이 하는 설교가 스스로 '이만하면 준비가 된 것 같아' 라는 만족감이 들 때까지,
그 텅빈 예배당에서 계속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주보를 펼쳐가지고, 다음 날 예배 때 성도들이 부를 찬송가를
혼자서 1절부터 4절까지 다 불러보고,
교독문도 다 혼자서 읽어보고,
그리고는 이제 마지막에 기도드리고... 그리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곤 했대요.
주일예배에 정성을 다 하기 위해서, 예행 연습을 그렇게 정성드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님이 그렇게 한다는 게 교인들에게 알려 지니까,
이제 교인들이 그 목사님이 토요일 날 나와서 준비하는 그 시간에
한 두 명씩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됐냐 하면, 주일 예배와 관련된 사람은 다 오게 됐대요.
그래서 그 본당이 거의 절반 이상은 가득히 찰 만큼,
그 다음 날 주일예배와 관련된 사람들이, 다 토요일에 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찬양 대원이 다 와서 앉아 있고, 1부 찬양대, 2부 찬양대,
그래서 찬양대가 한 번 불러보는 거예요. 예행 연습을 하는 거죠.
그래서 목사님이 '그 정도면 됐습니다' 그러면, 준비가 다 된 거고,
'이따 가서 연습 더 하세요' 그러면, 토요일 오후에 연습을 더 했다는 거죠.
교회 학교 교사들도, 그 다음 날 아이들한테 가르칠 공과 준비가 됐는지
다 이렇게 예행연습을 하면서 확인을 하고,
또 기도를 맡은 대표 지도자는, 그 기도문을 다 준비해가지고 와서,
거기서 또 한 번 대표기도를 해 보고,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을 하고,
그리고는 다같이 뜨겁게 준비기도회를 하고, 그리고 성도들은 다 돌아가시고,
그리고 이제 목사님 혼자 남아서, 또 설교 원고를 펴놓고 또 설교를 해봤다는 겁니다.
그 목사님이 하는데 저한테 직접 얘기하기를
'어떤 날은 만족감이 없어서, 밤 12시 넘는 때까지 설교를 연습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이 목사님이 설교가 만족될 때까지 반복하신 후에는,
강단에서 내려가셔서 그 장의자를 하나씩 하나씩 다 붙들고 기도를 했대요.
'하나님, 시끄럽고 싸우는 교회이지만, 내일 이 의자에 와서 앉을 성도들에게 복을 주십시오!'
그렇게 장의자 하나씩 다 만지면서... 2층 의자까지 그렇게 기도하셨대요.
여러분 그 교회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싸움은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졌고,
그 교회가 막 기초부터 새로 다져지기 시작했는데,
우선 예배부터 다져지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 교회는 대충 와서 예배 드리는 사람 없다.
우선 예배위원 부터가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다 한다'
그 교단도 다른 그 교회에, 제가 설교를 한 4번쯤 갔었나요?
그 교회 가면서 정말 저도 많이 배웠어요.
▲그 목사님이 저랑 나이가 같아요. *1957년생
그런데 그 교회에 가면, 바깥에 나가서 저녁을 사 먹는 게 아니고,
아주 소찬으로, 그렇지만 깔끔하게 딱 준비를 해 갖고,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이렇게 준비해가지고, 목사님이랑 저랑 둘이만 먹어요.
다른 사람이 같이 먹지도 않아요.
그래서 제가 '누구 다른 분들이 같이 드셔도 되는데요' 그랬더니,
그 목사님과 제가, 이렇게 둘만 먹는 게 이유가 있더라고요.
뭔가 대화를 하고 싶어서, 둘만 먹는 겁니다.
다른 교우들이 옆에 있으면, 목사끼리 하는 그 깊은 대화를 못 하니까...
근데 대화라는 게 딴 게 아니에요.
그 밥상 옆에 수첩이 하나 펼쳐 있고, 목사님은 제게 꼭 물어봐요.
'김목사님, 김목사님께서 설교자로 추천하고 싶은 좋은 강사 목사님이 있으시면
좀 추천해 주세요.'
그러면 이제 제가 'OOO 목사님이 좋습니다'
그러면 이 분이, OOO 목사님이 했던 설교를 찾아서, 먼저 다 들어봐요.
그리고는 OOO 목사님을 당신 교회 외부강사로 초청하는 거예요.
그냥 아무나 초청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알아보고... 본인이 그 설교를 다 들어보고
'이 분이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그런 확신이 들면, 비로소 모시는 거예요.
그리고 꼭 물어보는 게 '김목사님이 읽으시고 도움 됐던 책 세 권만 추천해 주세요'
근데 제가 그 교회를 네 번쯤 설교 하러 갔는데, 갈 때마다 큰 부담이 됐습니다.
왜냐면 책 세 권을 추천해야 되니까요.
지난번에도 물어보셨는데, 그 다음에 가면 똑같은 질문을 또 해요.
'추천할 만한 강사가 있으면 추천해 주시고, 또 좋은 책이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그래서 추천받은 책을 또 본인이 다 읽는 거예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읽기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누군가가 읽고 은혜 받았다는 좋은 책,
읽고 유익이 됐다는 좋은 책을 선별해 가지고 읽고,
그런 목사님을 모셔서 집회를 하고...
여러분, 그렇게 하니까 그 교회가 부흥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죠.
그렇게 오랫동안 싸웠고, 악명 높은 교회라고 소문이 났고,
한 3백명까지 교회가 줄어들었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울산에서 가장 왕성한 교회로, 아마 지금 성도가 한 2~3천 명은 모일 거예요.
그 목사님이 저(김운성 목사)랑 나이가 같으니까,
그 교회에 부임해 온 지가, 벌써 이제 제법 오래 됐죠.
한 30대 중후반 쯤 오셨으니까요.
물론 그 목사님은 건강이 좋지는 않아요. 여러 가지 건강의 어려움도 좀 있고 그렇지만,
정말 일편단심,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목양일념으로 집중해 가지고 최선을 다 하세요.
▲저는 그 목사님하고, 이제 뭐 이렇게 개인적으로도 조금 알고 그래서
옆에서 이렇게 바라보면, 그 자체가 설교예요.
'아, 목사님은 저래야 된다' 그럼 왜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뭐 열심히 한다고 해서, 뭐 생기는 게 있나요? 아무것도 없죠.
그런데 왜 그렇게 하냐 하면, 이유가 딱 하나예요. 하나님께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께 지극 정성을 다 하는 거예요.
다른 목사님 들을 부끄럽게 하는 목사님이죠.
'야, 정말 굉장하다...'
저도 그 목사님 교회에 여러 번 가면서, 옆에서 보면,
참 감탄하고 또 감탄하고...
'이 시대에 이런 목사님이 계시구나' 하는 게 큰 감동이 됐어요.
▲그 후에 이제 이렇게 늘상 보면, 목회나 사역을 쉽게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쉽게 이렇게 대충하면 되겠지...'
설교준비도 쉽게 하고... 목회도 그냥 쉽게 하고...
'뭐 이렇게 쉽게 해도 되겠지' 하지만, 쉽게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목사의 눈으로 이렇게 보면, 다 똑같은 게 아닙니다.
어떤 분은 정말 목회에 마음을 쏟아서 하는 분이 있고... 그게 느껴져요.
또 어떤 분은 좀 건성으로 하는 거다... 판이하게 다른 거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다 되는 거야'
물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다 되죠.
그러나 그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얘기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는 그건 별개의 얘기죠.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 정말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거리도 먼데 사시는데,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오시는 분들이 계셔요. 정말 참 대단하세요.
또 찬양대를 하던지, 다른 봉사를 할 때, 1~2년 하시는 게 아니라,
수십 년을 계속 봉사 하시는 분들도 많으시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이제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게 진심이 되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게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도 정성을 다 해야 되는 거죠.
◑3. 본문 설명
오늘 본문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런 말씀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성을 다하는 게 나와 있어요. 그것도 로마사람 고넬료입니다.
고넬료는 지배하는 사람 아닙니까. 베드로는 지배받는 식민지 백성이잖아요.
그럼 누가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야 될까요?
당연히 베드로가 고넬료 앞에 이렇게 고개를 숙여야 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에요.
고넬료가 베드로를 얼마나 정성껏 맞이 하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예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이 고넬료는 자기 혼자 베드로를 맞이한 게 아닙니다.
자기 친구들, 친척들까지 다 초대 했어요.
주변에 사람들을 보내가지고 '우리 집에 정말 귀한 분이 오신다'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했겠죠. 로마인 백부장이 사람들을 그렇게 정성껏 초대하는 걸 보고,
'뭐 총독이라도 오시나?'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요.
근데 그게 아니고, 오는 손님이라는 그 사람이,
로마에 지배받는 식민지 백성, 그것도 어부 출신의 식민지 백성이 온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 고넬료를 놀렸을 거예요. '자네의 제 정신이 아니구만...'
근데 하여튼 정성껏 친구들을 다 불러 모으고, 친척들까지 불러 모았어요.
행10: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이게 벌써 준비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근데 제가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받은 구절은 25절입니다.
10: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이거는 상상을 못하는 얘기예요.
베드로가 그의 집에 들어올 때, 고넬료가 두 팔을 벌리면서 나가서 '어서 오세요' 라고
영접만 해도 이건 굉장한 거죠.
로마 사람 백부장이, 그 보잘 것 없는 식민지 백성 하나를 맞이하는데
그 정도로만 영접해도 굉장한 거 아닙니까?
근데 고넬료는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서 절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거 쉽게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웬만한 사람은 못할 겁니다.
근데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그렇게까지 한 거예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마음을 기울이고, 왜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행동하고 있을까요?
그게 우리에게 질문으로 다가오는 거죠.
고넬료는 고넬료대로 그렇게 하고,
또 베드로는 베드로 대로 굉장히 진지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베드로는 '이방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의식이 굉장히 강한 유대인 아닙니까?
당시에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거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이방인은 짐승과 같고, '내가 그런 사람하고 상종만 해도 내가 더럽혀진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던 시대였는데,
베드로는 그 모든 관념을 다 버리고, 기꺼이 고넬료의 집에 발을 들여 놓은 거예요.
그러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뭡니까? 내가 여기에 올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당신이 로마인 백부장이라고, 내가 두려워서 온 것도 아니고,
당신한테 뭘 좀 얻어 볼까 기대해서 온 것도 아니고,
'나 베드로는 당신의 집에 올 이유가 요만큼도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오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왜 왔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해서 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앞서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환상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온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서 온 겁니다.
반대로,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맞이하는 것도, 그 이유도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청해서 말씀을 들으라'고 해서, 베드로를 청한 겁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을 몰라도, 고넬료는 로마군대 장교로서 잘 살 수 있었어요.
두 사람의 동기가 똑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순종한 거예요.
그 모든 일에 진지하게 마음을 쏟고, 그렇게 정성을 쏟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했던 거예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교회에서 부흥회 같은 집회가 열리기 전에,
주일 날 하던지, 월요일 날 새벽에, 이 본문을 꼭 설교했어요.
'여러분, 고넬료는 그렇게 베드로를 정성껏 맞이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생각해서, 그리고 말씀을 듣고자...'
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야, 이 말은 정말 대단한 말이에요.
'잘 오셨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들었는데
우리에게 들려주실 말씀이 있으시죠? 말씀하세요. 우리가 경청 하겠습니다.'
이 정도만 말해도 굉장한 건데, 고넬료는 뭐라고 말하냐면
'우리가 다 앞에 있다' 라는 거예요.
마치 베드로가 하나님의 대리자요, 어쩌면 하나님이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말하면서, 말씀을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죠.
제가 이제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늘 저녁부터 강사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할 때
아이 뭐 강사가 저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 입니다.
그러니까 그 강사를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내가 있다. 하나님의 사자 앞에 내가 있는 거다.
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전달해 주는 사자 messenger 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경청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가 이제 교회 생활을 하던지 이렇게 할 때
습관에 따라서... 또 오래 하다. 보니까 익숙해서...
뭐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어요. 마음에 없이도 잘 할 수 있어요. 워낙 많이 해봤으니까!
그러나 마음을 기울여서 하는 거랑은 다르잖아요.
우리가 앞으로도 신앙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될 텐데,
예배도 드릴 것이고, 또 봉사도 하고, 뭐 여러 가지 할 텐데,
그냥 오래 했기 때문에... 당연히 잘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성을 다 하는 거예요.
얼마나 지극한 정성입니까?
고넬료는 고넬료대로 정성을 다 하고..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정성을 다 해서 가서 간절하게 말씀을 전하고...
그러니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기에 강력하게 임하셨잖아요.
'아 이 두 사람은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적용
근데 제가 부산의 (땅끝)교회에 담임목사 부임했을 때, 제가 32세에 갔었는데,
가서 보니까 장로님들은 다 60세가 넘은 분들이 많으셨어요.
또 선임 장로님은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건어물 도매상을 크게 하시는
평안북도에서 피난 내려 오신 장로님이셨는데,
굉장히 유순하시고, 말씀도 많지 않으시고 점잖으신 분이셨어요.
저는 32세였으니까, 그 장로님의 자녀들이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어요.
그러니 그 장로님이 보니까,
뭐 동생도 아니고 아들도 한참 밑에 아들 같은 담임 목사가 왔잖아요.
근데도 그 장로님은 당회를 하던지, 뭐 이렇게 모여 앉으면
얼마나 서른 둘 밖에 안 된 목사에게 깎듯이 대하셨는지 몰라요.
늘 존대 하시고... 제가 그냥 황송해 가지고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그렇게 하셨어요.
근데 이유가 하나예요.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이지 않습니까?'
나이 같은 걸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이로 따지면 뭐 내 막내 아들보다 나이가 더 적을 수도 있지만,
장로님은 그런 생각을 안 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 교회 목사님이시다' 이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야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또 그 다음 순서되신 장로님이, 평양에서 내려오신 장로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성격이 괄괄하셨습니다. 굉장히 열심이 많으시고, 목소리도 크고...
그런데도 당회를 하면 달라요.
그 장로님이 이제 적극적이면서, 성격이 괄괄하고 성격도 좀 급하고 그렇기 때문에,
장로교 통합측 부산노회에 가서도, 뭐 노회를 이렇게 쥐락 펴락 할 만큼 대단하신 분이거든요.
그럼 제가 이제 새파란 목사로 노회에 가서, 이렇게 뒷자리에 앉아 있으면,
다른 교회 목사님들이 저한테 여러 번 물어봤어요.
'아니, 김 목사는 그 (땅끝) 교회 좀 알고 왔냐고?'
'뭘요?'
'아니 그 OOO 장로가 있는 교회에, 거기에 왜 왔느냐고?
그 OOO 장로가 노회에서 얼마나 목소리가 크고... 그런 거 아느냐고?'
'저는 잘 모르는데요?'
앞으로 고생 문이 훤하게 열릴 거라는 거예요.
'그 장로님이 노회에서 하는 거 보면, 김목사는 앞으로 목회도 제대로 못하고
그 교회에서 고생 죽도록 할 거라고...'
그러면서 저를 불쌍하다는 듯이, 목사님들이 그렇게 저를 쳐다보셨어요.
근데 그 장로님은, 한 번도 저를 괴롭힌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장로님 덕분에 제가 목회를 할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건어물 장사하는 장로님, 또 이 분,
그때 장로님이 처음에 몇 분 없었어요.
근데 당회라고 이렇게 모여 앉으면, 그 목소리 큰 그 장로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아이고 목사님 우리가 뭐 알겠느냐고...
우린 그냥 평신도이고, 목사님이 전문가인데, 목사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늘 그렇게 말했어요.
그 분이 성격도 불같고, 괄괄하고 성격도 급한데
그 분이 '목사님 원하는 대로 하자'고 그러는데
감히 다른 장로님이 딴 소리를 어떻게 하겠어요? 그 분이 다 진압해 주시는 거죠.
그래가지고 아무 어려운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교회 바깥에서는 저보고 '어떻게 목회 하냐고? 그 교회에서 잘 있느냐?'고 그러는데,
이 두 어른은 얼마나 새파란 목사인 저를 위해 주는지...
늘 거기는 교회가 당시에 작았으니까, 교인이 그때 조금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수시로 자주 자주 만났어요. 점심도 얼마나 많이 같이 먹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모여가지고 이렇게 있으면, 여러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 교회는 봉고차도 하나 없는 교회였기 때문에,
그 분들이 당신네 차로 우리 애들도 많이 태워주고, 뭐 어디 데려가 주고 그렇게 했는데,
한 번은 제가 물어봤어요.
'아니, 장로님들은 저한테 왜 그렇게 잘 해 주십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목사를!'
그랬더니 대답이 똑 같았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보낸 종이지 않습니까?'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냥 그거였어요. 그러니까 그 두 어른이, 젊은 목사를 위해 주는 이유가,
그냥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즉 그 분들이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목사를 그렇게 위해 준 거예요.
그래서 그 교회가 안정 됐어요.
그냥 뭐 그렇게 크지 않은 작은 교회였지만 평안했어요.
그리고 이제 이런저런 일을 천천히 할 수 있었고,
꾸준히 교회가 이렇게 새 사람들이 들어오고,
몇 년 지나니까 부흥하기 시작해서
그래서 이제 나중에는 부산에서 제법 중심되는 교회로 발돋움 하게 됐는데,
그 초석이 됐던 그 장로님들을, 제가 잊을 수가 없어요.
요즘도 가끔씩 그 장로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껄껄껄 웃던 얼굴도 떠오르고...
▲여러분 저 같은 목사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너는 왜 목회 하냐?' 이렇게 물어보면, 제가 뭐라고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해서' 목회하는 거죠. 하나님을 생각해서!
베드로가 '하나님을 생각해서' 고넬료의 집으로 갔고,
고넬료가 '하나님을 생각해서' 베드로를 극진히 맞이했고,
그 장로님들이 '하나님을 생각해서' 당시 젊은 목사인 저를, 잘 대우해 주셨던 거죠.
'너는 왜 그렇게 열심히 목회나 봉사하냐?' 누가 그렇게 물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다' 라고 속으로 대답하는 거죠.
그 속에 어떤 인간적 동기... 그걸 통해 가지고 뭐 자기 성취를 하고...
그런 건 없어져야 되는 거죠. 그런 것은 오래가지도 못 합니다.
'왜 그렇게 마음을 쓰느냐?' 누가 이렇게 물어보면
우리 성도님들의 답은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교사도 열심히 하고,
구역장도 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도 열심히 하고...
그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이에요.
▲여러분 아까 불렀던 찬송가 217장에 보면 가사가 이래요.
「1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맘을 나에게 바치어라
너 어디 있든지 날 섬기며 기쁘게 날 항상 의지하라
후렴: 바치어라 네 마음을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네
캄캄한 죄에서 불러내신 주께서 늘 인도하시리라
2 구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맘을 나에게 다 바치고
사악한 죄에서 벗어나면 나 어찌 널 구원 않겠느냐」
이러면서 마음을 바치라고 하세요.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바치고 있나?' 하는 반성을 하게 돼요.
목회를 오래 하다 보면, 모든 게 좀 익숙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익숙한 대신, 마음 정성이 안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마음이 안 들어가도.. 잘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교만하지 말고, 정말 마음을 기울여야 되는 것이죠.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사람 눈을 의식하지 않으시길 바래요.
'사람들이 보는데... 그래도 내가 좀 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되지 않겠나?'
이런 거는 도리어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 눈 앞에서 책 잡히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는,
내 인격을 내 스스로가 우스운 존재로 만드는 거잖아요.
'남이 보든지, 안 보든지... 나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진지하게 내 마음을 다해서 섬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셨거든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정성을 다 하셨나 하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할 정도로.. 우리에게 다 하셨는데,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해야 되는 거죠.
▲우리가 예물을 바치는 마음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뭐 똑같이 만 원을 드려도, 어떤 사람은 먼저 만 원을 헌금으로 빼놓고
나머지를 자기가 쓰는 사람이 있을 거고,
또 어떤 사람은 쓰다가 남는 돈 중에서 그냥 쓱 만 원을 바칠 수도 있겠죠.
그 액수는 똑같아요. 그러나 마음의 크기는 천양지차로 다른 거예요.
요즘은 다 월급을 그냥 계좌이체로 받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월급봉투에 받았잖아요.
그러면 가장 깨끗한 돈을 구별해 가지고,
먼저 하얀 봉투에 '이건 하나님께 바칠 거야' 해서 빼놓고
살림을 사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다른 거 아닙니다. 정성이 들어있는 거죠.
요즘은 우리 교회도, 계좌로 헌금하는 분이 많은데, 제가 아쉬운 건 그거예요.
계좌이체로 헌금 하니까, 그냥 뭐 이렇게 버튼 몇 번 누르면, 헌금이 되는데
정성이 들어가는 것 같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똑같은 헌금이지만, 옛날에는 봉투에다가 이렇게 준비해가지고 드리면,
거기에 마음이 들어가고, 시간과 정성이 들어갔는데
'아, 요즘은 그런 게 좀 아쉽다'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옛날 아날로그 방식으로 할 때가 훨씬 더 정성을 당한 게 아닌가?'
요즘에 예배도 그렇죠. 먼 데서부터 와서 땀을 닦아 내면서 드리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냥 뭐 평상복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아, 예배시간 됐네, 벌써 시작했네?'
그러면서 '빨리 TV 켜라' 이래가지고 보니까, 벌써 찬양대도 절반이나 했고...
그렇게 드리는 예배가 같 같겠죠? 다르죠!
저는 성경을 통독 할 때마다, 이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에 늘 감탄하고 또 감탄 합니다.
'어쩌면 두 사람이 다 이렇게 정성을 다 쏟았나?'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해서 했던 거예요.?
여러분, 앞으로 우리 신앙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 생각하면서 합시다.
하나님께 하듯 하는 거예요.
'내가 저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 물론 할 필요가 없죠.
그 사람에게 내가 빚진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왜 그렇게 하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에게 하는 거예요. 이유는 딱 하나, 하나님 때문에!
저는 오늘 저녁에,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지함이 잘 표현되는 신앙 생활,
그 다음에 하나님에 대한 진지함으로, 다른 이에게 진지하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일상에서 하는 일에 다 연장선 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생각해서 하도록' 저희를 도와 주시길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하나님께 하는 마음으로 어떤 이에게도 하고,
맡겨 준 일에도 정성을 다 하고,
하나님 때문에 진지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길 원합니다.
특별히 예배하고 섬기고 하는 신앙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도록...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도록
저희 마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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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매여' 보다는 '심령에 매여' (펀 글)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성령의 매여'
이 말의 원문은 '영에 매여' 입니다.
성 Holy 라는 말이 안 나와요. I go bound in the spirit
그래서 이게 '성령' 일수도 있지만, '나의 영' 그냥 '나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옛날 개역성경에는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라고 했죠.
이건 '내 마음'이라는 거죠. 제 생각에는 이 번역이 맞습니다.
'성령에 매인'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매인' 거예요.
여러분, 성령은 우리를 묶으시는, 결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풀어 주시는 분이세요.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무슨 말입니까? 억지로 순교의 길을 가라는 게 아니고, '안 가도 된다'는 말이에요.
꼭 가고 싶으면 가도 되지만, 안 가도 된다.. 라는 말을, 성령님이 하신 겁니다.
바울은 자기 결정으로 가는 거예요. '심령에 매여' .
부모들 중에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야, 너 왜 공부 안 해? 맨날 TV에 앞에 앉아 있고...' 그런 부모가 있죠.
또 '야, 공부 좀 쉬엄 쉬엄 해. 그만 해도 돼!' 라는 그런 부모도 있죠.
목회자들도 그런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도들이 작정하고, 가정에서 헌금을 가지고 오는데,
교회를 위해서 감사함으로 받기도 하지만,
'꼭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가정의 형편을 알기에, 돌려 보내든지
'일부만 받겠습니다'.. 할 때가 있습니다.
일단 돌려보냈다가, 기도하고 다시 가지고 오면 그때 받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성령님과 바울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내 마음에 매임(결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결박'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결박당했을 때, 바로 그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죠.
여러분, 이삭이 결박당할 때 억지로 했을까요?
아니면 자발적으로 순순히 했을까요?
아마도 백 세가 훨씬 넘은 노인 아브라함이
젊은 이삭을 힘으로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이 결박당함 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그 말의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정체성의 핵심에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결박 당한 민족이다.'
그 안에서 엄청난 고난을 해석하고 이겨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사랑은, 본질적으로 결박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묶는 것입니다.
결혼이 뭐예요? 이 세상에 수많은 이성들이 있지만
'지금부터는 나는 당신만 사랑 하겠습니다. 당신만 바라 보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묶어 버리는 거예요.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결혼 풍습에 이런 게 있어요.
결혼식 중에 신랑 신부의 손을 함께 묶습니다.
이거를 가족들이 묶어주기도 하고요. 친지, 동생, 친구들이 묶어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혼이 무엇인가? 묶이는 것이다.
힘이 없어서 묶이는 게 아니죠. 자발적으로 묶이는 겁니다.
부모의 사랑도, 그야말로 묶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자식 일이라면 달려 가잖아요. 그게 사랑에 묶여있는 거예요.
자녀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자녀가 죄 지으면 나도 죄인이 되어서 고개를 못 드는 거예요.
꼼짝 못합니다. 묶여 있는 거예요. 풀 수가 없어요. 결박당하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본질은 '자유'예요.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잖아요.
그게 스스로 묶이신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Without God, we cannot
Without us, God will not
'하나님 없이,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없이, 하나님은 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니어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니어도 교회를 세우실 거예요.
나 아니어도, 자신의 사익을 이끌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없어도, 멀리 가실 수 있어요. 멋지게 가실 수 있어요. 빨리 가실 수 있어요.
우리가 미적대고 못 따라가니까... 그게 문제죠.
근데 하나님은, 우리 없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혼자서 천국에 계실 수 있지만, 우리 없이 있고 싶어하지 않으셔서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God will not without us.
이게 스스로 묶인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심령에(마음에) 스스로 묶인 것입니다.
▲두렵지만, 옳은 길이니까 간다!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굉장히 감동적인 대목인데, 근데 생각보다
이 대목에서 바울이 감정의 언어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두렵지 않다' 든지... 뭐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라는 말은
냉철한 이성적 판단의 언어입니다.
바울이 지금 나는 두렵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두렵지만, 이 길이 가치 있는 길임을 안다'는 말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여러분 두려움, 불안이라는 거는, 본래 왔다 갔다 해요.
'믿습니다' 해놓고도 다시 불안해서 떠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큰 병에 걸려서 투병해 보신 분들 아시죠?
목사님들이 오전에 심방 가서 같이 예배드리면, 너무 평화로워 보여요.
'아멘!' 하고 믿습니다. 큰 병을 잘 이겨 나가는 것 같아 보여요.
그런데 오후에 전화해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굉장히 힘들어 하시고 흔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잘 왔다 갔다 합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거예요.
바울은 예외 이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나는 전혀 두렵지 않다'가 아니라,
'나는 두려워도 옳은 일은 여전히 옳은 일입니다.
나는 낙심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나는 시시때때로 불안해 하지만, 나에게 그 불안을 맡길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선택할 때, 그 길을 감당할 힘도 용기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