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위 동영상 36:50초부터 보세요. 팩트-해석-감정 에 대해서 꼭 참조하세요!
아래 녹취록으로는 시103:6~7절 단락입니다. ///////////////////// 로 표시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103:1~22 2024.12.28.
▲도입
사실 본문 시103편은 '감사'가 주제인데,
'감사'에 대한 메세지를 가지고 오늘 좀 나누고, 또 기도하고, 예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로 마음이 하여간 복잡하더라고요.
요즘 나라가 하도 어수선 하다 보니까요.
또 대통령 대행을 하던 총리를 탄핵을 했습니다. 2024.12.27.
뭐 탄핵이 정당 하냐, 정당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떠나서,
나라가 굉장히 어려워지는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국가 신용도라든지 경제라든지... 더 어렵게 될 전망입니다.
그래서 이제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대행직까지 감당해야 되는데,
대통령 역할 하면서, 총리 역할 하면서, 경제 수장 역할까지 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러니까 많은 점에서 아마 어려움이 클 것입니다.
또 국가적으로 대외 신뢰도도 떨어질 거고, 그러면 당연히 환율도 올라갈 거고,
또 주가는 떨어질 거고... 하여간 그 피해는 이제 국민들한테 고스란히 오겠죠.
그래서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하여간 지금 굉장히 심란한 때 인것은 분명합니다.
굉장히 심란한 때고요.
이런 심란한 때, '감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는 게 과연 맞는가?
제가 망설여지는데,
그 전부터 하나님이 제게 '감사에 대한 메시지'를 주셔서
이번 주일에 여러분과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설교하러 올라가려고 그러는데, 제 마음에 이게 감사가 잘 안 되는 거예요.
'아휴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씨름을 좀 하면서 올라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건 감사인 줄 믿습니다.
감사는 여러분, 감사할 만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의지적으로 하는 거예요.
왜요?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좋은 걸 주시는 거거든요.
우리가 지금 몰라서 그런 거지, 항상 좋은 거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은 좋아 보이지 않고, 지금은 뭔가 좀 이해 안 되는 것도 있고,
뭔가 어떤 건 좀 서운한 것도 있고... 하나님 앞에 그럴지라도,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이 옳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 때를 되돌아보면 다 좋은 거 주시는 거예요.
다 좋은 거 주셨다고 우리가 고백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금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옳은 줄로 믿습니다.
본문 시편 103편 말씀으로, 오늘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려고 합니다.
(설교하면서, 중간 중간에, 찬양과 기도를 같이 하겠습니다.)
◑시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오늘 설교 제목이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인데요. :2
시103편을 나누면서, 2024년 한 해를,
감사와 송축의 기도를 드리며 마무리하기를 원합니다.
마음이 힘들고, 좀 흔들리고, 또 어떤 분들은 마음이 불안하고,
또 어떤 분들은 불평이 있고, 원망이 있고, 뭐 그럴지라도
그런 마음들을 오늘 좀 차분하게 성령님 앞에 내려 놓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감사의 마음을 충만하게 넣어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맞아요. 우리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뭐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또 때로는 상황이 불리해 보이고, 뭐 이럴 지라도
항상 마음 가운데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 돼요.
이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어떻게 되느냐 하면,
혈과 육으로 살게 됩니다.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혈과 육으로 살게 돼요. 즉 감정을 따라 사는 거예요.
분노의 감정으로 살고, 미워하는 감정으로 살고,
그렇게 되면 그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공간이 없어져요.
우리 안에 모든 이런 잡다한, 부산한 감정들을 좀 차분하게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감사의 마음으로, 감사의 영으로 충만하게 우리 영이 채워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이 생겨요.
그래야 우리가 영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혈과 육으로 살게 돼요.
그래서 2024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안에 감사의 마음이 충만하기를
다시 한 번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1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열쇠가 있는데, 그건 감사와 찬양입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100:4
그 문으로 들어가는데, 어떻게 들어간대요? 감사함으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 문은, 여호와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죠.
즉,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문인 겁니다.
이때는 물론, 이 시편이 지어지고 불려질 당시에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뜻하지만,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여호와의 궁전'입니다.
그래서 주의 임재로 들어가는 문에 '열쇠'가 있는데, 바로 '감사함'으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감사함이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들어가야, 거기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우리가 영으로 반응하고, 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반대로, 하나님이 계신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냥 혈과 육으로 살겠죠.
즉 내 감정 따라서, 내 분노 따라서... 그렇게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열쇠가 있는데, 그것은 '감사' 입니다.
'항상 감사' 이에요.
그래서 모든 예배는 감사로 시작해야 돼요.
예배의 핵심은 감사입니다. 감사가 없다면 당연히 예배도 없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예배자의 태도일 뿐 아니라, 예배의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는 열쇠가 뭐라고요? 감사함으로 나아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예배는 감사함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니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예배로 들어갈 수가 있지,
이 감사의 마음을 놓쳐 버리면, 예배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은 이 예배에,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감정들을 가지고 나오셨을 거예요.
저도 예배 직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막 볶이고 참 쉽지 않더라고요.
근데 이런 번잡한 마음으로 나오면, 예배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우리 안에 감사함이 있어야, 예배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에 아무리 흉흉하고, 뭐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고,
뭐 아무리 내가 기도 응답이 안 되고, 아무리 내가 질병 때문에 고통스럽고 할지라도
여전히 예배로 들어가는 자는... 감사함을 가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예배에는 여러 요소가 있습니다.
찬송도 있고, 회개도 있고, 중보도 있고, 헌신도 있어요.
그런데 이 모든 예배의 요소들은 일단 감사로 시작해야 돼요.
그래야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니까요.
◑103: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의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감사하는데 팁이 있습니다. 노하우가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그의 은택을 잊지 않는' 거예요.
'은택'이란, 히브리어로 '괴물'인데, גְּמוּל
'행하신 일, 보상,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선물' 이런 뜻입니다. *his benefits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잊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좋은 일들' ... 이게 은택인데, 그걸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2024년을 돌아보면서, 그 은택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024년 마지막 철야
그래서 이 시간 우리가 받은 은택 benefits 을 하나씩 좀 떠올려 봅시다.
곰곰이 여러분, 한 해를 좀 돌아보세요...
이 시간에, 우리 다 일어나서 예배할까요?
(주님이 베푸신 은택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시간 약 4분간 가짐)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편 기자는 감사의 제목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데요.,
먼저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신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질병을 고칩니다.
'죄악을 사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법적으로 우리에게 무죄를 선언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의인이 되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죄에는 여러분, 결과가 있어요. 죄는 반드시 결과가 있는데, 뭐냐 하면 파멸입니다.
죄의 결과는 파멸이고, 고통이고, 저주예요.
롬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현실에서 사망의 고통이 주어지는 거죠.
자 그런데 4절에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즉 파멸에서 구원 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창조주의 질서가 있는데, 이 질서를 벗어나는 게 죄지요.
그런데 창조주의 질서를 벗어나게 되면, 반드시 파멸이 따라오게 됩니다.
창조주의 질서를 그대로 순종하면서 따라가게 되면,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어요.
그런데 반대로 창조주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되면, 거기에는 저주가 있고 파멸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치러야 될 모든 생명의 파멸을 하나님께서 속량(대신 값을 지불)하셨다는 거예요. :4
우리는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금요일이니까 와서 예배하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사실은 여러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이 있지 않으세요?
2024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이 살아오시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이 있지 않으세요?
창조주의 질서에서 벗어난 순간들이 있지 않으셨어요?
아마 한두 번이 아니라, 매일 몇 개씩 있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 죄에 대한 파멸의 대가를 내가 다 치렀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요?
내가 이 곳에 앉아 있는 게, 절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파멸에서부터 우리를 속량(대신 값 치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곳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숨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예요.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가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주님은 우리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이세요. :3
우리 몸의 질병, 영혼의 질병, 마음의 질병들을, 하나님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이십니까?
지난 2024년도에 여러분 치유를 경험하신 게 있으세요? 그럼 감사하십시오.
아직 치유를 경험하지 못 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입니다. 왜 성경에 약속 하셨잖아요?
'내가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 결국 고치실 거라는 거예요. :3
특별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을 때, 질병도 함께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먹는 약과, 우리가 받는 수술도... 효과가 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기도할 때, 결국 질병에서 하나님이 고치실 거예요.
2025 년도는 치유가 임하는 해가 될 줄 믿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총과 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이 함께 임할 줄 믿습니다.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 다같이 치유기도 하겠습니다.
치유가 필요하신 분들은, 이 시간 손을 들어주시면,
주변 분들이 다가가서 함께 기도해 주시고요.
만약 주변에 손 드신 분이 없으면, 자기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또는 가족들과 셀의 지체들의 건강을 위해서,
시103:3절 말씀의 약속을 붙들고, 우리 이 시간 통성으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약 10분간 다같이 통성으로 신유기도 가짐)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자, 이것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은택입니다. 좋은 것으로 우리 소원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2024년을 뒤돌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어떤 좋은 것을 주셨는지?
아까 많이들 카톡으로 올려주셨는데, 맞아요.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는 것을, 문자 그대로, 히브리어 그대로 해석을 하면,
'좋은 것을 우리 입에 주셨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 보면 thy mouth 라고 되어있습니다.
'Who satisfieth thy mouth with good things'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무슨 뜻이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 이런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인식을 잘 못해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아까 저녁 먹으실 때, 여러분은 감격하시면서 드셨어요?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항상 좋은 것으로, 우리 입을 채워주신, 우리에게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말씀은 아마 이사야40장 말씀과 결이 같습니다.
사40:29~31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2025년이 이런 해가 되기를 주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힘이 빠졌던 분이 있다면,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한 해가 되고,
또 지치고 낙심하는 분이 있다면, 새로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임하는 한 해가 되고,
그래서 정말 이 독수리가 날개 쳐서 올라갈 때 보면, 굉장히 이게 다이내믹 하거든요.
이렇게 큰 날개를 펄럭 펄럭 하면서 위로 올라가잖아요.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 올라가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하 36:50초부터 녹취 //////////////////////////////////////////////
◑103:6~7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2025년에도 우리는 공의를 행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실 뿐만 아니라, 공의를 드러내시는(알리시는) 분이십니다.
새해 2025년도에도, 공의가 드러나는...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시고, 그 공의가 드러나는 그런 한 해가 될 것을 믿습니다.
요즘 나라가 굉장히 시끄럽습니다. *12.3비상계엄과 탄핵사태
그래서 우리가 이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붙잡고,
이 시간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공의를 대하는 크리스천의 태도>에 대한 얘기를 잠깐 나누고, 이어서 기도하겠습니다.
공의에는 크리스천의 책임이 있습니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시끄럽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분별도 참 어렵죠.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뭐 이게 진리라고 그러고, 저게 진리라고 그러고...
뭐 세상에서 그러는 거는, '그러는 가보다...' 할 텐데
문제는 크리스천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게 진리라고 하고,
그러니까 저 사람은 저게 공의라고 하고... 이게 참 어려워요.
자,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명확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일단은 우리가 '공의'라 얘기를 하기 전에, 어떤 사건에 대해서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를 해야 됩니다.
-하나는 팩트가 있고요.
-두 번째는 그 팩트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감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기 이마트에 가면 오늘 사과를 세일해서 팔아' 그건 팩트예요.
그런데 그 팩트를 해석하는 의견은 다양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와 정말 싸다' 그런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에 '에이 세일해도 여전히 비싸'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죠.
그러니까 그거는 그냥 해석이에요. 의견이죠.
그러니까 팩트하고 해석은 구분을 해야 돼요.
팩트는 뭐예요? '사과를 세일해서 팔고 있다'가 팩트예요.
그리고 '그 사과가 싸, 아니면 비싸, 그 사과가 맛있어, 아니야 맛이 없어' 하는 건,
해석이고 의견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이 따라오면 이제 감정이 따라 오죠.
'이마트 사과는 싸고 맛있어' 하는 사람은 행복한 감정이 따라올 것이고,
'그 가게 사과는 비싸고, 맛도 별로야' 그런 사람은 실망의 감정이 따라 오겠죠.
이 세 가지를 크리스천은 구분해서 볼 줄 알아야 돼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3가지가 막 뒤섞여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분별이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이게 막 섞여 있어서 그래요.
이게 팩트 인지, 해석 인지, 감정 인지 구분이 안 돼요. 그냥 막 뒤죽박죽 섞여 있습니다.
지금은 감정을 가지고 모든 것들을 해석을 해요. (팩트로 판단해야 됩니다)
감정 가지고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결정을 하려고 해요.
이거는 안 됩니다. 크리스천은 절대 그렇게 휘둘리면 안 되고,
감정은 철저하게 배제해야 됩니다.
감정에 의해서 분별해도 안 되고, 판단해도 안되고, 결정하면 더더군다나 안 됩니다.
감정이라고 하는 건, 팩트에서부터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감정은 해석에서부터 나와요.
근데 해석은 그야말로 해석이고, 의견이지요.
그래서 그 해석이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고, 주관적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거 가지고서, 거기서 막 분노가 올라온다고,
분노를 가지고 막 결정하고, 일을 조속히 처리해 버리고 이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절대로 서두르면 안 돼요.
서두르면 반드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죄를 짓게 돼 있습니다.
역사의 주관 자는 누구세요? 하나님이세요.
그러니까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행하실 거를 믿어야 돼요.
조금 느리고 더디게 보여도 '하나님께서 행 하실 거야' 이걸 믿어야 돼요.
'어휴, 지금 이거 빨리 결정, 처리 안 하면 큰일 날 것 같아!' 이게 아니라,
'아니야, 하나님이 행하실 거야!' 이게 믿음이지요.
왜 하나님보다 앞서 가려고 하십니까? (*팩트를 정확히 살피는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뜻인듯)
그러니까 크리스천은 절대로 감정에 의해서 서두르면 안 돼요.
여러분의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보더라도, 감정에 휘둘려 가지고 서둘러서 (욱해서)
좋은 열매에 나왔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없었을 거예요.
제 인생을 돌아봐도, 제가 감정이 휘둘려서 서둘렀던 것들은
다 관계도 망치고, 일도 망치고... 후회만 남아요.
'아휴 그때 조금만 인내했으면... 그때 조금만 인내 했으면...'
여러분, 신앙의 99%는 인내 거든요.
근데 뭐에 대한 인내입니까? 하나님이 행하실 거에 대한 인내 예요.
그러니까 서둘러서 한다고 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기 감정에 휘둘려서 서둘러서 무슨 결정을 한다?
이거는 인간의 육신의 일이고, 죄악이 끼어있는 거지,
절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은 아니에요.
('분노할 때 결정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이 있죠)
그러니까 크리스천은 거기에 휘둘리면 안 돼요.
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특별히 하나님께서 명확히 성경을 통해서 하라고 그러신
어떤 그런 특별한 이슈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서두르는 것은, 크리스천의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일단은 감정을 배제해야 돼요. 그 다음에 이제 남는 게 뭐죠?
팩트가 남고, 해석이 남죠.
해석에 대해서는 크리스천은 정죄하면 안 돼요.
해석에 대해서는 용납하는 태도를 가져야 돼요.
'아,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돼요.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면서 상대방 의견을 들으려고 해야 되고요.
그런 생각들에 대한 것들을, 이렇게 수용하려고 해야 되고,
내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저 사람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왜요?
결국 심판자는 하나님이시거든요. 우리가 심판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해석에 대해서는 정죄하면 안 돼요. 그건 선을 넘어가는 거예요.
해석에 대해서는 포용적인 자세를 가져야 돼요.
'아, 그냥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잖아요.
같은 가게에서 사과를 사서 먹었어요. 그러면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맛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난 너무 맛있었어요. 근데 저 사람은 맛이 없대요.
그러면 '에이, 맛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야' 이렇게 할 수는 없죠.
그 사람 기준으로는 맛이 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나와 반대되는 해석에 대해서는, 그걸 이제 포용적이고,
그냥 이해하는 태도를 가져야 되는 거죠.
내가 그의 해석에 동의를 안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의 해석에 대해서는 뭐를 해야 되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그냥 의지해야 돼요.
'어느 해석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분별 하실 거야'
그 선을 넘어가면 안 돼요.
내가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 되어지는 일 들에 대해서, 극우니, 극좌니 하면서
(프레임을 씌우는 말은) 그런 얘기들은 굉장히 무례한 얘기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거기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죠.
특별히 같은 크리스천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 저 사람은 극우야, 극좌야'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요.
'그냥 그 사람의 의견인가 보다..' 하고 존중의 태도가 있어야 돼요.
이게 쉽지 않습니다. 이거 정말 쉽지 않아요.
나하고 다른 의견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고
'저 바보 같은 놈들' 뭐 그런 생각이 올라오지, 이게 그렇게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켜야 될 선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막 극우로 몰아가고, 극좌로 몰아가고,
또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음모론이라고 몰아가고...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거는 상대를 굉장히 비하하고, 무시하고 그런 태도이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상대를 이렇게 음모론자, 세뇌당한 자.. 이렇게 몰고가면 안 돼요.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 보다..' 하면서 일단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존중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뭐냐면 팩트예요.
팩트는 '사과를 파느냐, 안 파느냐?'
이마트에서 사과를 파는데, 어떤 사람은 안 판다고 그래요.
이건 이제 거짓말이죠.
그래서 의견(해석)에 대해서는 우리가 존중을 해야 되지만,
팩트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게 아니에요. 팩트에 대해서는 명확해야 돼요. 명확해야 돼요.
그래서 이 팩트를 거짓으로 속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포용해야 됩니다' 이런 얘기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해야 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틀렸다'고 말해야 되는 거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팩트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가지고도
'아, 크리스천이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아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예, 맞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건 크리스천이 아니지요.
거짓이면 '아, 그건 거짓 입니다. 나는 거짓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게 크리스천의 올바른 태도죠.
그래서 팩트에 대해서는, 뭐 수용하고 포용하고...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팩트는, 사실이면 사실이고, 거짓말이면 거짓말인 거예요.
그래서 사실인 거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실로 인정을 하는 것이고,
거짓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No 라고 얘기해야 돼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라고 얘기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왜요? 거짓이니까!
거짓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고,
그 거짓이 우리 삶을 휘두르면 안 되는 거죠.
거짓 유포는 마귀가 하는 일이죠.
거짓에 기초해서 뭔가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거는 우리가 대적해야 돼요.
해석과 의견은 포용해야 돼요. 그것은 내가 동의가 안 되더라도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그리고 기도해야 되는 거죠. '아 저 사람이 정말 심각하게 극단적이구나'
그러나 팩트에 대해서는 대적해야 되는 거예요.
만약 팩트가 거짓이면, 이건 대적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어떤 분별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건 뭐냐면,
팩트 체크 입니다.
이거를 하지 않고 그냥 해석과 감정으로 바로 넘어가 버린다?
그건 굉장히 무책임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팩트 체크가 안 된 것에 대해서는
항상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그래요.
그게 저는 정직한 태도라고 믿습니다.
근데 팩트 체크가 된 거에 대해서는 타협 없습니다.
팩트 체크를 했더니 거짓이에요... 그러면 그거는
제 신앙 양심을 걸고, 목사의 양심과 목사 직을 걸고 '아니다' 라고 얘기해야 되는 거죠.
'그거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거는 팩트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걸 가지고 여러분들이 카톡으로 시비를 건다든지..
그럼 그건 저한테 배교하라는 거랑 같은 뜻이죠.
그건 타협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팩트입니다.
근데 이게 문제가 뭐냐면, 오늘날은 팩트도 확인이 어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서두르면 안 된다는 거예요. 팩트도 확인이 너무 어려워요.
'이 사람은 이렇다고 그러고, 저 사람은 저렇다고 그러니까요'
지금도 얼마나 많은 얘기들이 왔다 갔다 합니까?
제가 한 일주일 동안 신문을 봤더니, 같은 언론사에서 이렇다고 했다가
그 다음 날에는 다른 얘기하고... 수시로 바뀌어요.
그러니까 아직 팩트가 뭔지를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이런 상태에서 크리스천이 섣불리 판단하는 거 아닙니다.
확실히 거짓인 것에 대해서만 No 라고 얘기해야죠.
이 시대에 여러분 흔들리지 마세요. 여론에 흔들리지 마세요.
사람이 뭐라고 그러든지 간에,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 앞에 줏대가 있어야죠.
팩트가 아니면 아닌 거고, 맞으면 맞는 거고...
그걸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한덕수 총리를 이제 탄핵 했잖아요.
뭐 설교시간에 정치 얘기하는 게 조금 부담 되긴 하는데,
하여간 그 탄핵에 대해서 우리가 뭘 봐야 되는 거예요?
'합법적인가, 탄핵 사유가 맞는 건가?'
'법률적으로 탄핵할 만한 사유가 있는 건가?'
(*민주당 내에서도 총리 탄핵에 반대한 소장파들이 있었다고 하죠.
탄핵남발로 지지율 하락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또는 그게 탄핵하면서 정족수 가지고도 이제 말들이 많았죠.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봐야 되는 건가? 이런 팩트 체크를 해보셔야 돼요.
그리고 만약에 (탄핵가결) 정족수가 픽스 되어 있지 않다면,
지금 탄핵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거를 명확하게 헌법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의논을 해서
정확하게 하고, 그러고 넘어가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거에 우리가 휘둘리면 안 된다는 거죠.
저는 그냥 막 여론으로, 감정으로 몰고 가는 사태에 대해서는 반대입니다.
뭐 '내란동조 죄' 거론하면서 탄핵하는데... 혹시 감정에 치우친 게 아닌가? 우려하는 거죠.
(*물론 계엄으로 자신들을 체포해서 어디 벙커에 가두려고 했다면,
피해 당사자는 감정이 욱 해질 수는 있겠지요... 일반 사람들과는 온도 차이가 나겠지요)
이런 시기에 우리 크리스천은 항상 이렇게 치우치면 안 돼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런 혼란 가운데서도 뭘 봐야 되는가? 딱 가운데 서서 팩트를 봐야 되는 거예요.
이게 정말 팩트냐?
팩트가 아니면, 여러 사람들의 해석과 의견을 가지고 이쪽 저쪽으로 흔들리면 안 돼요.
정확하게 팩트를 가지고 판단하고,
만약 팩트가 검증이 안 됐다 그러면.. 그냥 유보하셔야 돼요.
'나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팩트가 명확해 질 때까지는 나는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셔야 돼요.
공의가 드러나도록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명확하게 기도해야 될 건 뭐냐 하면
'이 땅에 거짓이 없도록' 기도해야 돼요. (*특히 가짜 뉴스들)
거짓이 다 분쇄되도록 기도해야 돼요. 거짓은 다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되고,
거짓을 일부러 조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거짓에 기초한 것은 다 무너지게 해 주십시오.
거짓을 확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이 다 무너지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기도해야 됩니다.
이 시간 그래서 우리 다시 한 번 기도합시다.
일어나서 기도 하실 때, 특별히 이 나라 가운데 공의가 시행되도록 기도합시다.
공의와 하나님의 판단이 집행되도록 기도합시다.
(다같이 통성기도...)
....................................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겁니다. (*같은 내용, 다른 설교에서 스크랩)
외부로 드러나는 모습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그 아래 있는 진실이 뭔지, 진리가 뭔지, 사실이 뭔지를.. 정확하게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판단은 팩트에 기초해야 된다는 거예요.
자, 이것이 오늘날 참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죠.
왜냐면 점점 팩트가 사라지는 세상이 돼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와 SNS를 통한 1인 미디어 시대가 합쳐지면서
팩트가 중요하지 않은 이상한 시대가 돼 버렸습니다.
특별히 SNS 를 중심으로 한 1인 미디어는, 진짜 팩트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과거에는 미디어라고 하는 게 정해져 있었어요. 신문사, 방송사 등
때문에 하여간 어떻게든지 팩트 체크를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게 공영방송, 공공성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이게 잘못된 게 방송으로 나가면 심각하거든요.
그래서 뉴스가 잘못된 게 나갔으면, 그러면 이게 심각한 문제가 되니까
그 다음 날 당장 뉴스에 '정정 보도'를 했습니다.
오늘날은 이제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뭐 유튜브라든지 이런 미디어는 '믿거나 말거나' 아무말 대잔치를 합니다.
아무런 책임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검증 시스템도 없어요.
그냥 '카더라' 하는 것을 무분별하게 막 내 보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뭐 그런 시대가 되어 가잖아요.
그러니까 이 팩트, 사실에 대한 중요성들이 점점점 희석 되어가는 거죠.
거기에 대한 책임감도 없어지고... 뭐 이렇게 되어 갑니다.
또 퍼스트 모더니즘은 더욱더 그렇죠.
포스트 모더니즘은, 사실이 뭔지, 팩트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느끼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내 느낌이 중요하다... 이게 이제 포스트 모더니즘 입니다.
뭐 이런 시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정치라든지, 미디어라든지, 기업들은
이런 현상을 아주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사실이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약을 팝니다. 그러면 약이 얼마나 효능이 있는지,
실제로 그것의 팩트는 뭔지.. 이런 건 중요하지 않고요.
그냥 '이 약은 잘 들을 것 같아' 하는 느낌만, 광고로 주면 된다는 거죠.
뭐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실제로 도둑질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이런 거는 상관없어요.
'저 사람은 도둑놈이야' 라는 이미지만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면 성공입니다.
이걸 '프레임 씌운다' 라고 하죠.
대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사실 확인, 굳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이미지를 소비할 뿐입니다.
왜요? 남 욕하는 게 재밌거든요.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뭔 줄 아세요?
영화, 드라마가 아니에요. 남 욕하는 거예요.
야, 이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정말 시간 가는 지 몰라요.
그러니까 특별히 그 사람 없는데서 뒷담화 하는 거,
비겁하게 앞에서는 얘기 못 하고 뒤에서...
이게 여러분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사람들도 굳이 뭐 사실 체크, 팩트 체크... 이런 거 귀찮고요.
그냥 그 이미지를, 내 감정(기분)을 위해서 소비하는 것 뿐이에요.
왜요? 남 욕 하면 재밌잖아요.
그 다음에 내가 의로워지잖아요.
그 사람은 도둑놈이고, 그럼 난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의 의로움을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또 상대방에게 각인시키고,
그러면서 '저 놈은 나쁜 놈'을 만드는 거죠.
이게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일이거든요. 죄인들이 하는 게 이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진짜 도둑놈 인지, 나쁜 놈인지...
이런 거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냥 그 사람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 뿐입니다.
'저놈이 도둑놈이다' ... 그러면 난 재밌어요. 나는 의로워요. 뭐 그겁니다.
사실이 뭔지, 진실이 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게 아닙니까?
진짜 사실이 뭔지, 그 사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알아보지 않고, 그저 외부로 보여지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아니, 보여지는 것도 아니에요. 만들어(조작)지는 것으로 그렇게 판단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진실이 뭔지, 팩트가 뭔지, 사실이 뭔지 정확하게 그것에 기초해서
그 다음 뭔가를 하라는 거예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 입니다.
이게 뭐예요? '사람을 공의로 대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실 확인을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그리고 사실 확인, 팩트 체크가 안 되면
'모르겠다' 하고 남겨두는 겸손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냥 사실 확인도 안 된 걸 가지고 '글쎄 이렇데.. 글쎄 저렇데..'
이러면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공의로 대하라고 얘기해요.
공평하고 의롭게 대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웃을 향한 우리의 판단은 항상 공정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확인이 안 된 건 어떻게 말해야 됩니까?
그냥 모르는 것으로 놔둬야 돼요. '무죄 추정 원칙'은 성경적입니다.
신17:4 '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서' 17:4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그 범죄가 확실하게 드러났어요.
그러면 이제 형벌을 내리려고 할 때 조차도, 마지막에 뭐 하라는 거예요?
한 명의 증인만 가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적어도 두 세 사람이 증언을 하면, 그래서 그게 진짜로 확실하면, 17:6
증언한 사람의 그 증언이 사실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증언한 자가 먼저 손을 대라(돌로 쳐라)'는 거죠. 17:7
모든 판결은 공의에 기초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태도는 항상 공의에 기초해야 됩니다.
추측에 기초하지 마십시오.
확인 안 된 것은, 그냥 겸손하게 '나는 잘 모르겠다' 라고 놔 두셔야 돼요.
이게 참 어려워요. 이거 잘 하셔야 돼요.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지키는 원칙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정보를 받아들이는 원칙이 있어요.
제가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건데, '저는 1차정보만 믿겠습니다.'
그러니까 1차 정보란 뭐냐면,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이든지
-아니면 직접 본인한테 직접 들은 말, 그것만 믿겠습니다.
2차정보는 안 믿겠다는 거죠. 2차정보가 뭐죠?
'아휴 내가 들었는데... 카더라' 하는 거죠.
누가 받아서 전해주는 얘기들... 그건 제가 안 믿어요!
그건 벌써 한 사람 거쳐오면서, 뭐가 어떻게 왜곡 됐을런지 몰라요.
혹시 제가 그런 들은 말을 누군가에 꼭 해야 될 때는
'잘 모르겠습니다'를 항상 덧붙여야 돼요.
'그렇게 제가 듣긴 했는데, 그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걸 항상 덧붙여야 돼요.
그래서 저는 1차정보만 믿습니다.
-제가 직접 직접 보고 경험한 거든지,
-아니면 그에게서 직접 들은 건지 (이거는 또 발설하면 안 되는 비밀인 경우가 많죠)
교회 내에서는 이런 문화가 있어야 돼요.
마치 모르는 것을, 뭐 어디서 주워들은 것을, 즉 2차정보, 3차정보를 가지고 와서
교회에 퍼트리면 안 됩니다.
이게 여러분, 교회를 무너뜨리는 거예요. 사람들을 상처주고 억울하게 하는 거예요.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말을 옮기지 마십시오. '의롭게 재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