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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간의 레슨

LNCK 2025. 1. 27. 11:2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죄, 복된 회개

3일간의 레슨 | 요나 1:17 |  월특새 | 25.1.6 - YouTube

 

삼일간의 레슨              욘1:17            

◑다시스 행의 종착지는.. 낙원이 아니라.. 죽음이었습니다

요나 라는 한 인물을 우리가 계속 이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요나가 탄 배는, 다시스로 가는 배는, 하나님께서 풍랑을 일으키셔서 
결국은 요나가 바다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나죠. 

요나도 풍랑이 거세지고, '이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깨닫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이제 요나가 망망대해 풍랑속에서 
바다로 던져집니다. 자,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죠. 
상황 끝!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요나를 바다에 던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입니다. 
'요나는 이제 끝났다!'

요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풍랑이 거센 바다에 던져졌는데, 뭐 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죠. 
뭐 수영장에 빠진 것도 아니고, 잔잔한 호수에 빠진 것도 아니고,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그 바다 한가운데 빠졌었는데, 어떻게 살 생각을 했겠습니까? 
죽은 거죠. 

여러분, 다시스 행의 끝 지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절망과 파멸 속으로 던져지는 거예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순간부터,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다시스 행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아마 이것은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미리 보겠죠. 
'아, 다시스로 가면 죽는다. 실패다. 안 된다' 
영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미래가 보이죠. '이 길로 가면 안 된다'
그래서 아예 가지 말았어야 되죠. 

근데 우리 대부분은, 안 보인다는 거예요. 
다시스 행의 끝이, 바다로 던져진다... 는 것이 안 보인다는 게 문제입니다.
신앙이 성숙되고, 깊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바다에 던져 질 수 밖에 없는 그 길... 

안타깝게도 오늘 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시스 행의 배를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이 바다 속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음에도, 그걸 미리 못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려서, 
결국은 바다 한 가운데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자, 요나는 비로소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지라고 외칩니다. 
자기의 길을 포기하고, 자기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죽음입니다. 더 이상 살고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항상 위험한 게 뭐냐면 '집착'입니다. 집착! 
망할 때도 끝까지 움켜쥡니다. 
'이건 내가 놓을 수 없어, 포기할 수 없어!' 
근데 하나님은 흔드십니다. 

이 풍랑이 뭡니까? 흔드는 겁니다. 계속 흔드시는 겁니다. 
포기 안 하니까, 더 흔드시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드는 것입니다. 
붙잡고 있는 걸 다 내려놓게 하는 거죠.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다. 내 목숨까지도!' 이 수준까지 가야 되죠. 

▲돌이켜 보면 우리의 삶의 '내 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걸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내 몸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욥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볼까요.
욥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요나는 자신의 삶을 고집하고, 또 자기만의 삶을, 
자기만의 만족과 자기 성취를 위해서 좇아갑니다. 

하나님이 '너의 삶은 너의 인생이 아니고, 너의 몸도 너의 것이 아니다' 
요나가 이제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몸을 이제 던집니다. 
강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뛰어내리면 어떻게 되죠? 바로 익사합니다. 
생존율 제로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1:17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22장의 여호와이레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창22:13~14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모리아 산에서 그 아들을 바칩니다. 
이삭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이 개입하시죠. 

근데 사실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이삭을 받으신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창22:16, 롬8:32
이게 나중에는 하나님이 아들을 갈보리 십자가에 매다신 것을 연상하게 하죠. 

그러니까 늘 우리의 삶에서 놓치는 것은, 하나님 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자꾸 작아지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커지고... (크게 보이고)
이삭이 우상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 하나님이 '그걸 내어 놓으라' 
아브라함은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요나는 다시스 행 배를 타고, 그것도 전세내어 탔다고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화창한 밝은 미래, 자기 왕국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나는, 죽음의 길을 선택한 거죠. 
'내가 죽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렇게 하고 던져진 것입니다. 

요나는 죽고자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추격하시는 하나님

그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로, 숫양을 준비해주시고, 아들은 살려 주셨죠.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얻고,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 마10:39

그래서 어떻게 살아나죠? 하나님이 물고기를 준비시켜 놓으시고, 
요나가 던져지는 그 순간에, 정확하게 그 물고기가 요나를 집어삼키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추격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존 스토트가 <천국의 사냥개 HOUND OF HEAVEN>라는 책을 써서
'추격하시는 하나님' 개념을 유행시켰습니다)

이 '추격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요나는 죽었어요. 
우리는 '추격하시는 하나님'이 좀 귀찮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아, 좀 그만 따라오시지...'
너무 사사건건 다 개입 하시는 하나님은 좀 피곤해 합니다. 
'저를 좀 가만 놔두시면 안 됩니까?' 

근데 이 장면을 보면, 우리 마음이 좀 달라집니다. 
만약 추격하시는 그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요나는 끝났습니다. 
바다에 빠지는 순간, 그것으로 끝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참고 또 참고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 우리를 귀찮게 하시고, 우리를 괴롭히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고를 치고, 하나님은 늘 뒷수습을 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이 일을, 누가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습니까? 
니느웨로 가라면, 니느웨로 갔으면 간단합니다. 

근데 요나 한 사람이 불순종하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됩니까? 
무대 세팅도 얼마나 복잡합니까? 바람도 일으켜야 되지.. 풍랑도 일으켜야 되지...
큰 물고기도 준비해야 되지... 그 물고기도 요나 사이즈에 맞게 준비하셔야 했습니다.

또 타이밍도 중요하고... 물고기가 조금만 늦게 도착해도 안 되잖아요. 
큰 물고기가 계속 그 배를 따라다닌 거예요. 언제 뛰어내릴지 모르니까!
요나 한 사람 살리려고, 복잡한 과정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 사고를 치는 사람이 어디 요나 한 사람 뿐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고를 칩니까? 그것도 매일! 
하나님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셔야 될까요!

▲우리가 질문이 생기죠. '하나님은 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도록 하셨는가?' 
바다에 던져지기 전에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다면, 
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아닐까요? 
왜 굳이 요나를 바다에 빠뜨리게 하셨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 하시고 불을 내리시는 분! 
약간만 실수를 해도, 하나님이 나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시는 하나님!'  

구약을 보면, 약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좀 무서우신 하나님! 
죄에 대해서 엄격하시고, 인간의 죄에 대해서 용납치 않고, 철저히 보복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숨도 못 쉴것 같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벌을 주시는 하나님... 

여러분, 하나님이 불순종한 요나를 벌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보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만약 우리의 죄에 따라 처벌하셨다면, 여기 남아있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남아 있는 정도가 아니고, 죽어도 백 번 죽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은 죄에 따라 하나님이 처벌하셨다면, 
우리가 성한 곳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날이 별로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벌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벌은 지은 죄에 대한 충분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공의 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공의로운, 공의를 행해야 된다...'
그런데 사실 '공의'가 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펼쳐지면,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의로 대하셨으면, 세상이 사라져도 백번 더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누구도.. 인류의 역사의 어떤 인간도.. 
행위로는 그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매다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만족시키신 거예요

이 공의 안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이 있는 거죠. 십자가에서! 
이게 복음입니다. 

광풍이 불고, 바다 속에 던져 지게 하시는 것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불순종에 대한 처벌이기 보다는, 
그를 이끌어 내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거예요. 

추격하시는 하나님은, 벌을 주기 위해 따라다니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눈물겹도록 요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의 추격자 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큰 물고기를 준비시켜 놓으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는 사랑의 집념을 봅니다. 

아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그 하나님의 사랑의 추격, 
그 무서우리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 그 사랑의 집념을 보게 되는 거죠. 

 

◑다시스 행은, 길이 막히는게 은혜입니다

욘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반전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으로써 스토리는 끝나야 되죠. 
거기서 무슨 기대나 소망의 흔적을 볼 수 있겠습니까? 

바다 속에 던져진 요나는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즉시 성난 그 바다는, 거짓말 같이 조용해 졌습니다. 

그런데 본문 1:17절은 '여호와께서'로 시작합니다.
여러분, 요나서에서 '여호와' 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세어본 분이 계십니까? 
아주 많이 나옵니다. 25번 나옵니다. 

'여호와' 라는 단어는 '언약'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그 백성들과의 언약!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게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구약, 신약, 약속... 

'여호와께서' 라는 이 단어는, 결국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님이 끌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아직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거죠.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모든 게 다 끝이 난 것 같아도, 
주어가 '여호와께서' 가 나오면,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난 겁니다. 

당장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요나는 바다로 던져지는 순간, 하나님을 찾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아니하십니까?' 
물 속에 깊이 빠지면서 요나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해 놓으셨어요. 
'이미' 라는 단어를 여러분들이 놓치지 말아야 되죠. 

'이미' 라는 말은 뭘까요?  '우연히' 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 완벽한 디자인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요나를 발견하고 삼킨 게 아닙니다. 
그곳에 떼를 지어다니던 우연한 물고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큰 물고기입니다. 
하나님은 그 큰 물고기를,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 대기시켜 놓으셨습니다. 
그게 '이미'라는 단어 속에 담긴 뜻입니다.    *히. '마나' 영어성경엔 Now, And, But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큰 물고기를 준비해 놓으셨는데 
이 물고기를 그냥 준비해 놓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큰 물고기가, 이미 다른 데서 많이 먹고 배가 불러 있으면, 요나를 못 먹습니다. 
또 너무 위장이 비어 있어도 큰일 납니다. 너무 식욕이 왕성해서 
요나를 당장 소회시켜 버리면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준비해 놓으셨어요.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곳곳에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것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풍랑도 이미 준비해 놓으셨던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 도구로 사용하실 수가 있습니다. 
바닷속 물고기들도 얼마든지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을 때에, 까마귀를 사용하며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먹성 많은 까마귀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위트! 

눅5장에도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물고기들이 동원 되죠.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할 때, 그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두 배에 가득 채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건 뭐예요? 

밤새도록 잡아도 안 잡혔어요. 근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그 갈릴리 바다에 있는 물고기들을, 그 순간에 다 그물속으로 모이게 한 거예요. 

여러분 이 물고기들은 무엇이죠? 하나님의 교육 자료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동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자연계를 사용하시기도 하고요. 때로는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하고요. 
때로는 왕들을 사용하시기도 하고요. 하나님은 무엇이든 동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계속 도망을 가도록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다시스 행의 배를 한 번 타면,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시스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버립니다. 홀린 듯이 그 곳으로 갑니다. 
자발적인 하차는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특별 조치가 필요한 것이죠. 

왜요? 그대로 두면 더 큰 사고가 나니까! 응급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더 큰 불상사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처방! 
위험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작전을 수행하신다는 거예요. 

가끔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에, 이의를 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마치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일어납니다. 

자녀들 입장에서는, 부모의 징계를 힘들어 합니다. 
'꼭 나를 벌 주어야 되나? 왜 나를 벌주시는 거예요?'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나?' 

근데 부모의 입장은 다릅니다. '너가 내 자식이라서 벌 준다.
내 아들이 아니라면, 내가 너를 왜 징계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여러분,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을 때리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알고, 시간마다 두들겨 패는 부모는 없습니다. 
대게는 부모들이 혼을 내고 싶지만, 참고 또 참고, 참습니다. 
참고 참다가 한 번 혼을 냅니다. '이제 알겠지?'

▲요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혹하게 다룬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요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크십니다. 시103:8절에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여러분, 성경 전체에 걸쳐 보면, 하나님의 인내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인내하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심판하셨다면, 우리는 이미 끝입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또 인내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시는 방식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요나가 지금 풍랑 이는 바다에 들어간 것만 보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심 이었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속을 썩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건만 보지만, 이 모든 여정 속에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 속속들이 내용은, 성경이 다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실 때는, 인내 시간이 꽉 찬 때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인내가, 더 이상 그 당사자에게 유익하지 않을 때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더 인내해서는, 요나에게 이게 더 유익하게 않아요. 
그래서 지금 이 선상에서 그를 바다에 빠뜨릴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요나가 배교자라면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내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근데 요나는 그렇지 않아요. 요나는 배교자는 아닙니다. 불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는 연약한 선지자일 뿐입니다. 연약할수록 하나님의 손길이 더 많이 갑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것은 버림받음 입니다. 유기, 내버려두심 입니다.
버림을 받은 자는 간섭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버려 두는 거예요. 

그러나 연약한 신자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더 섬세하게 돌보십니다. 더 섬세함으로!
오래 참으십니다. 살살 달래가면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말 안 듣는 요나는 그냥 아웃이에요. 
새로운 멤버로 교체해 버려요.

근데 하나님은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난 사람인데 끝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하나님의 인사 정책은 우리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적절한 방식으로 우리가 가는 길을 막으십니다. 
막으시는 게 은혜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다 응답하지 않는 것이 은혜입니다. 
일이 잘 안 되는 것이, 은혜 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실패가 은혜 입니다. 

승승장구 성공이, 축복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다시스 항해 길에 풍랑이 일지 않고, 그가 다시스에 도착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갈 데까지 갔겠죠. (*12.3 계엄 때도 승승장구 승진하던 장군들이 결국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마음 먹은 대로 돌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일입니다. 
하는 일마다 성공한다면, 내가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은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자기 능력에 도취되어 자화자찬 하며 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자아성취, 자아만족, 순탄한 다시스 행이 바로 그거입니다. 

하나님이 종종 우리가 가는 길을 막으시는 이유가 그거입니다. 
더 큰 재난을 막기 위하여! 

계획대로라면, 분명히 일이 잘 돌아가야 됩니다.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계획대로 안 돼요. 이유는 알 수 없어요.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습니다. 
주변의 상황도 다 내 편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이 꼬여요. 한 순간의 모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갑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막으시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됩니다. 
안 될 때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안 되게 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그때는 안 되는 게, 은혜요 축복입니다.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어렵죠. 실패를 받아들이는 거, 무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나고 나면 그런 경험을 하죠. 
여러분, 하나님이 그때 내가 가는 그 길을 막지 않으셨다면, 오늘 내가 어디에 있었을까? 

다시스로 가는 길은 막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길이, 막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확인해 보세요. '나는 지금 혹시 다시스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나님의 추격은.. 사랑 때문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요나를 살려주시겠다는 겁니다. 끝을 내고자 하셨다면 벌써 끝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지금 이 자리에, 2025년을 맞이해서
이렇게 특별새벽기도회에 나와 있는데... 이것은 기적입니다. 

여러분 내가 죽었다면, 벌써 몇 번 더 죽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인생의 여정에 

여러분,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몇 번의 죽음의 위기가 있었을 거예요. 
저도 있었어요. 물에 빠져 죽을 뻔 하기도 했고, 
연탄 가스에 취해가지고 죽을 뻔도 했고, 
운전을 하는 가운데 아슬아슬한 장면들,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와 부딪힌 적도 있었어요.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여러 번입니다. 그때 살아난 게 기적이죠. 

그러면 여러분, 내가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이 살려 주신 것은 얼마나 될까요? 
셀 수 없습니다. 사는 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죽이고자 했다면, 요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탄 배도 벌써 침몰했을 것입니다. 그 거대한 광풍에, 한 방이면 끝납니다. 

하나님이 '너 끝이야!' 그러면 끝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것 같아도, 인간의 생명은, 호흡은 그냥 연기 같습니다.  시102:3

단 한 번입니다. 한 순간이면 갑니다. 
아침에 눈을 뜬 것은 은혜입니다. 
하루의 일을 일과를 끝나고, 저녁 침상에 안전하게 눕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단번에 끝장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끝난 것 같은데, 끝난 게 아니에요. 왜요? 
그 풍랑 위에서 선원들이 요나를 던져리리는 순간 다 끝난 것 같은데 
끝나지 않았어요. 왜요? 하나님이 끝내지 않으셨으니까!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 같죠?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끝내기는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포기해도, 내가 포기한다고 끝이 나는 가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포기하셔야 끝이 나지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신 이유는 뭘까요? 
도망치는 요나를 생포하시는 방식이에요. 

자기 마음대로 활보하는 요나의 활동반경을 확 좁히셨습니다. 
제 마음대로 다시스로 가니까, 제 마음대로 할부 하니까 
하나님이 굉장히 활동 반경을 좁혀 버렸어요. 큰 물고기 뱃속! 그게 크면 얼마나 크겠습니까?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요나를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이 큰 물고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 사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그를 살려놓으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일을 물고기 배 속에 있으니라' 1:17
이 일을 누가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물고기가 삼킨 게 아니고, 하나님이 물로기로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니 
다시스로 향해 가던 그가 도착한 곳은 어디에요? 물고기 배 속입니다. 

그가 꿈꾸고 있던 곳은, 에메랄드 빛 바다와 해변이었습니다. *스페인 남부 바다색
그가 동경하고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현실은 좁디 좁은 공간에 갇혔습니다. 
그는 물고기 배 속에 감금 되었습니다.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더 이상 도망을 시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삼켜졌다' 라는 말의 의미가 뭘까요? :17
한 마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통과를 의미하는 거죠. 

여러분 '물을 통과 한다'는 것은, 죽음을 건너는 것입니다. 
지금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거죠. 

물에서 건짐을 받는 게 구원입니다. 
모세가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떠내려갔습니다. 
'모세' 라는 이름이 '물에서 건져냄'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왔습니다. 거의 자살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근데 요나가 제물이 되어 던져졌고, 이제 요나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요. 
이미 죽은 몸과 같아요. 

근데 하나님의 임재가 그를 살려 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새로운 삶이 비로소 시작되는 경험입니다. 

요나는 이제 물에 빠져,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지금 뱃속에서 하고 있는 것이에요. 
요나는 죽어야 합니다. 죽은 척으로는 안 돼요.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옛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가 죽어야 비로소 새 일이 시작됩니다. 
물고기 뱃속의 '삼일 삼야' 라는 의미는, 그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17

이스라엘의 홍해를 건넌 사건은, 죽음을 통과한 사건에 대한 상징성, 
그는 바다의 깊음 속에 잠겼습니다. 
요나는 '나를 바다에 던져라' 그는 바다에 던져져야 했고, 
그의 옛 사람은 죽었다는 의미가, 이 물고기 뱃속에서의 삼일삼야 이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죽어야 새 일이 시작됩니다. 새해가 되었다고 새 일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인 내가 완전히 죽어야,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갈2:20절을 암송하셔야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요나는 밤낮 삼일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게 됩니다. 3일 간의 레슨이에요. *설교제목
중요한 것은 레슨 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레슨(교훈,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기질이나, 우리의 성향이나, 우리의 우리의 죄성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부적절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고 싶어하고, 우리의 욕망 대로, 우리의 고집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들이 
우리의 몸의 뼈 속까지 배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해요?
레슨이 필요해요. 이 레슨을 누가 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거예요. 

교회에서 제자 훈련으로 다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집적 내 인생 가운데 레슨(가르침)을 하시는 거예요.

이 3일 간은, 요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에요. 
이 배 속에서의 3일이 필요하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죠. 
그 시간을 정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수업 일시, 수업 장소는 모두 하나님이 정하셨어요. 수업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캄캄하고, 답답하고, 냄새나고, 끈적거리는 괴이한 현실 

하나님의 특훈 시간입니다. 불순종하고 떠난 그에게 필수 코스! 
이 3일 간의 집중 훈련,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몰입도 백 프로! 이런 교육 환경은 세상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팅하신 특수 장치들!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는 깊이 잠이라도 잤습니다. 근데 여기서는 취침금지!
자고 싶어도 잘 수 없어요. 요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일시적으로 포박했습니다. 발을 묶으셨습니다.
요나의 도주극이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 훈련을 시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를 사용하시기 위하여, 
그를 다시 사용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집념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관계를 끊으시면 됩니다. '너하고는 도무지 못 하겠다. 그냥 끝내자!'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그를, 당신의 나라의 도구로 데리고 사용하시고자 하십니다. 

그 과정은 우리가 보기에도 아슬아슬 합니다. 
끊임없는 도망, 끊임없는 추격! 

근데 하나님은 정성을 다 하십니다. 별로 예쁜 짓도 하지 않은 요나 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돌보십니다. 

물고기 안으로 들어간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셔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욘3장에 넘어가면 제가 할 말이 많습니다. 기대하십시오.
오죽하면 요나를 훈련하기 위해, 물고기 배속을 선택하셨을 까요? 오죽하면...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란 얘기죠.

▲요나는 수중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주간반, 야간반 다 거쳤했습니다. 삼일 삼야!
3일 만에 수료증을 받고 세상으로 나와, 니느웨로 파송 됩니다. 

누구의 공입니까? 요나 입니까? 아니에요. 모든 건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억지로 시키신 거예요.

여러분 왜 3일 간 입니까? 물론 상징성을 가진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무덤
저는 이 3일 간을,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3일이라는 시간에서 저는 하나님의 긍휼을 느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훈련할 때, 삼 년을 했습니다. 
근데 이 요나는, 성질도 안 좋고, 불순종으로 똘똘 뭉쳐있고, 고집 불통의 요나라면,
6년은 훈련해야 됩니다. 

물고기 배 속이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한 석 달은 집어 넣어 있어야 돼요. 
하다 못해 한 달이라도... 근데 고작 3일입니다. 

하나님이 더 길게 못하십니다. 
요나가 힘든 것보다, 하나님이 더 힘들어 하십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를 향하는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 열심은 설명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하심의 손길이 안 미치는 곳이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안 변하는구나.. 안 변하는 거지..' 
'그렇게 말을 못 알아 먹냐? 이젠 끝내야겠다...' 우리는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은 우리를 품으십니다. 그래도 그래도 데리고 가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래도 데려고 가십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3장에 가서 요나의 돌출 행동들이, 참 실망스럽고 
'이게 뭐 수중 신학교 출신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보이신 모습은, 절절마다 사랑으로 꽉 차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시는 거죠. 
여러분, 성경의 얘기가 다 그런 얘기들 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보듯이요.

그래서 팀 켈러 목사님은 그 아버지를 '탕부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실성한 아버지, crazy love' 남들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을 베푸신 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를  데리고 다니는데 얼마나 힘들어요? 얼마나 사고를 쳐요? 
아마 우리 같으면 '야, 이제는 끝을 내자' 

우리는 일찍 소망을 접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대하십니다. 
모두가 다 포기했는데,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어요. 
'너는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포기를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장 잘 드러내 준 사건이 뭐죠? 바로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뭐죠? 
난 널 절대로 포기 못 해!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밀려오는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추격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너를 죽이겠다'고 추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일으켜 세워 주시고, 다시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시고, 
다시 이 길을 가자고 격려하시는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소망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요나서를 들여다 보면서, 아무리 봐도 나에게서 소망을 찾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늘 어그러진 길로 가고.. 늘 우리는 반대(다시스) 편을 가는 쪽을 선택하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놓아 버린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손을 놓아 버리셨다면, 
우리의 삶은 천 길 만 길로, 벼랑 끝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다로 던져진 요나의 스토리는, 그것으로 끝나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오늘도 우리의 삶을 추격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도망을 멈추시고, 그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절한 훈련을 시키실 때, 그 레슨을 받아들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