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4일 신년 새벽기도회 넷째날 - YouTube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단3:13~23 2024.01.04.
◑본문 설명
오늘은 다니엘서 3장입니다. 본문 단3장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죠.
잠시라도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쇠달구는 용광로)에서 구원받은 이야기입니다.
사건의 발달은 이렇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제 큰 신상을 세웠습니다.
단3:1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오늘날 미터로 환산하면, 너비가 2,7미터, 높이가 27미터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아파트 10층 높이에 해당합니다. 그 시대에 굉장히 높은 거 아닙니까?
그 당시에 '롯데 타워' 같은 건축물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신상에 금을 입혔습니다. 코팅을 한 거죠.
온통 금으로 뒤덮힌 이 신상, 뭐가 떠오르니까?
단2장에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그 신상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 신상을 보고 이제 카피한 겁니다.
그때 꿈에서 본 그 신상은 머리만 금으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느부갓네살이 만든 신상은, 전부가 다 금으로 입혔습니다.
그런데 이 신상이 세워진 지역이 어디입니까?
3:1절에 보면 이제 바벨론 지방에 두라 평지입니다.
이 지역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업적을 기념하는 신상이 세워 졌습니다.
그리고 이 신상의 낙성식을 계획했습니다.
이를 위해, 제국 내의 모든 귀족과 또 지방의 관료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3:2
자, 이때 이제 왕이 명령한 게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면, 그 신호에 따라
모인 사람들 모두가 신상 앞에 절해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3:5
만일 이 명령을 어긴다면, 이 플무불에 던져지는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낙성식의 분위기를 깨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자 여기서, 이제 궁금한 게 있는데요. 다니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때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는가요? 오늘 세 친구의 이야기만 나오거든요.
다니엘의 행방이 궁금합니다.
아마도 다니엘은 왕의 궁전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낙성식을 위해서, 왕과 관료들이 다 자리를 비우지 않았습니까?
그들을 대신해서, 누군가가 왕궁에 남아서, 국사를 처리해야 했을 겁니다.
그 역할을 이 다니엘이 맡았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제외한 세 친구들만, 이 낙성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이 울려도, 그들은 금 신상에 절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이제 한 번 더 우상에게 절할 기회를 줬습니다. 3:15
그러나 또 다시 세 친구는 완강히 거부합니다.
결국 그들은 왕의 명령대로 풀무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자,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놀랍게도 세 친구들은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3: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느부갓네살의 눈 앞에서 희한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 청년을 죽이려고 이제 풀무불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불에 타지 않고, 그 안에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풀무불 속에 던진 사람은 세 명이었죠.
그런데 뜨거운 불길 속에서 서성이는 사람의 숫자는 네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넷 다 아무런 화상도 입지 않은 채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이 네 번째의 사람은 '신의 아들과 같아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 네 번째 사람은 예수님 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에, 구약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자 하나님이, 이제 불 가운데서 세 친구 사이에 서시고, 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느부갓네살 왕은, 이제 풀무 입구로 가서, 불 속에 있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3: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느부갓네살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결국 느부갓네살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하나님을 거슬러 말하지 않도록, 바벨론 제국에 조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을 더욱 높였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이 스토리의 핵심은 '풀무불에서 건져졌다'가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이 풀무불 속에서도 건져내 주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 친구처럼 헌신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전보다 높이시고,
하나님의 이름도 더 존귀하게 높아지신다' ...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볼 게 있는데요.
만일 그런 이야기라면, 교회 역사 속에서 화형장에서 사라져 버린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교회사 속에서, 오늘 본문과 다른 결말들을 보게 됩니다.
일례로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신상 앞에서 절하기를 거부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다른 결말이 무수히 일어났습니다.
신앙을 지키다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구해주시지 않고) 순교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로마 황제의 네로가 기독교를 핍박 할 때,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무에 달려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게 매일같이 일어났었죠.
그러니까 본문 단3장은 "풀무불에서 건짐 받았다"가 핵심 주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세 친구들의 참된 믿음입니다.
이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자 이 세 친구의 고백이, 단3장 전체의 주제입니다.
이 고백은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1. 첫째,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능력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7
여러분, 이 세 친구의 대답을, 앞에 느부갓네살의 질문과 비교해서 보십시오.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5
이 질문에 대한 세 청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풀무불에서부터, 또 왕의 손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실 줄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17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오늘 느부갓네살과 같이, 세상이 우리를 협박할 때, 이런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교수님 조교를 했습니다.
그때 모셨던 이제 교수님이, 사회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셨던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처음부터 이제 교수로 시작한 분이 아니십니다.
공직 생활을 하시다가 교수로 오셨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엄청난 인맥과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내로라 하는 거물급 정치인들과 왕래를 하던 분이셨습니다.
그 당시에, 차기 어느 부서에 장관으로도 물망에 올랐던 분입니다.
그 분이 교수로 오셨는데, 서열이 총장 다음이었습니다. 막강했던 거죠.
그때 그 교수님이 조교인 제게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첫날 교수님과 이제 교수님 실에서 대면을 했는데요. 저에게 딱 그러시더라고요.
그 분은 저를 '미스터 리'라고 부르셨는데요.
'미스터 리, 내 밑에서 2년만 종처럼 일 해.
그러면 네가 졸업하고 먹고 살 길을 내가 책임져 줄게!
대신 내 말은 무조건 순종해!'
여러분,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 분 밑에서 조교를 했던 선배 분이, 졸업 후에 다 좋은 기업에 취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요. 교수님, 저는 교수님이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교수님이 저에 대한 결제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생각이, 순간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떠올랐습니다.
제 자존심이 아니라, 순간적인 제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순간 그런 믿음을, 저에게 주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이 참 좋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오늘도, 세상에 가졌다고 말하는 권력과, 힘과, 물질을 가지고
우리를 협박 합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는 국물도 없어, 너는 살아남을 수도 없어!
그러니 내가 요구하는 것들을, 너는 따라야만 해,
너는 내 앞에서 절해야만 해!'
세상은 오늘도 그저 조금이라도 뭔가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저울질하고 협박합니다.
심지어는 맹렬히 불타는 풀무불을 앞에 두고, 우리의 믿음을 협박합니다.
자, 그때 여러분은 이 17절의 믿음이 있습니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7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살아있는 신뢰와 능력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 믿음 때문에 신앙의 분명한 선을 긋고, 뜻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서, 또 세상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선명하게 회복되고 묻어나와야 합니다.
자,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능력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2. 두 번째 참된 믿음의 요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18
쉽게 말하면 어떻게 행하실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18절에 나오는,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의 고백입니다.
세 친구들은, 풀무불과 왕의 손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기들의 바램대로,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주권 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18
내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뜻과 기대와는 다르게,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아니하실 수도 있는'
주권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권자 (엿장수) 마음이라는 거죠.
(*옛날에 아이들이 고물을 가져다 주면, 엿장수가 엿을 길게 잘라주든지, 짧게 잘라주든지,
그건 엿장수 마음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소원대로 하실 수도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렇게 아니 하셔도, 그 분이 하시는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나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이 믿음의 요소가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게 바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고백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두 번째 믿음의 고백이 있습니까?
우리가 제일 안 되는 부분이, 사실 이거 아닙니까?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 가 아니라
'그렇게 해 주셔야만' 이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여주셔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샤머니즘에 불과합니다.
샤머니즘은, 신도 내가 조정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신도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을 믿을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내 뜻과 다를 지라도,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것이 다 선하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주권과 다스림(통치)을 인정하는 믿음, 이것이 두 번째 믿음의 요소입니다.
▲3.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 믿음의 요소는, 이것이 믿음의 핵심인데요.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 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 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고백입니다.
지금 이들은,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는 행위는, 십계명의 첫 번째의 계명과 두 번째의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이것은, 고민해보고, 또 생각해보고, 검토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매우 선명하게 금하신 죄입니다.
자,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아니하실 지라도
금신상에게 절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아니하실 지라도,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구해주지 아니하실지라도)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믿음인가, 샤머니즘인가? 그 차이
우리는 <믿음의 세 가지 요소>를 살펴봤습니다.
첫 번째 믿음의 요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고, 또 왕의 손에서 건져내실 수 있다고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고백이 너무나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여러분 만약 18절의 고백이 없으면, 그 신앙고백은 완전한 게 아닙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제대로 된 믿음의 정의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18절의 고백이 있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18
이 고백이 있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말씀을 드렸듯이, 이 18절의 고백이,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믿음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세상의 종교들은, 자기 중심성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와야지,
말씀대로 사는 것에 기쁨과 의미를 찾습니다.
'기도해서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내가 왜 그 길을 가야 하나?' 그렇게 묻습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결과가 좋은 것을 전제해서 충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샤머니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가 아니라
'그렇게 해 주셔야지'가 늘 전제 되기 때문에
늘 끝없이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기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여러분 사실 누구를 믿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자기 중심성', 이 샤머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신상 앞에 절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말씀대로 살았는데 별것 없더라' 그러면서,
교회를 다니지만 세상에 타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결과가 좋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 지라도, 그게 살아계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이 세 친구들처럼, '내가 불에 타고, 왕의 손에 죽을지라도,
금신상에게 절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니... 나는 절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우리 신앙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 자리까지 가는 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의 자리인 거죠.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실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분명히 그걸 믿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이 내 생각과 바램대로 행하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라면,
나는 그 길로 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포기하고 거절하겠습니다...
이게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 지라도, 그 하나님께 여전히 순종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고
그게 나의 만족입니다... 라고 따를 수 있는 게,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전도사 때, 첫 달 사역하고 첫 사례비를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정말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반대해서, 하나도 지원을 받지 못해서, 정말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때 이제 첫 사역을 하고, 첫 사례비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쓸 데가 많았겠습니까?
얼마 안 되나 적은 돈이었지만 '아,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첫 열매'를, 제가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는 '첫 열매'가 없습니다. '첫 열매'는 이 구약의 개념이죠.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림이었죠.
그러나 그냥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제 마음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부르셔서, 제가 목회의 길로 어렵게 들어온 거 아닙니까!
그 과정이 (부모의 반대로) 저는 순탄치 않았지만,
나를 부르시고 나를 믿게 하신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받게 된 첫 사례비이니까요.
그래서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다 드렸습니다. 그때 저는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세 친구들처럼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물질도 다스리고 계시니까, 하나님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는 그렇게 아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채워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대원 최초로, 다음 학기 등록금을 할부로 내게 되었습니다.
(사례비를 다 드리고 나서) 더 거지처럼 살게 된 거죠.
자, 그 다음부터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어봐야 별 소용 없네... 하나님께 드려도 나만 손해보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것을, 제 것으로 사용을 했겠습니까?
그 다음부터는 십일조를 안 했겠습니까?
아니겠죠. 그렇게 아니하실 지라도, 제가 그때는 참 기뻤습니다.
'내가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받는구나...'
'그 전에는, 돈 때문에 고난 받은 적은 없었는데,
나도 하나님을 위해 이제는 물질의 고난을 받는구나'
제가 믿음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게, 하나님 앞에서 너무 기뻤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고난이니까요.
그리고 그 다음 부터도, 하나님의 것을 떼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제게 갚아주셔서가 아니라 '그렇게 아니하실 지라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이니까요.
그렇다고 여러분, 저는 그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아니하셔서' 시험이 든 적도 많습니다.
지금도 그런 연약한 모습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아니야 하실 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보여야 할 믿음의 모습인 줄 알고,
그렇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어떤 사태, 사건이) 해석될 수 있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게 어떻게 믿음일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해석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하나님이 주셨다면, 그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하나님이
내 삶에 어떤 결정을 내리셨다면... '나는 순종하겠습니다!'
그게 믿음의 중요한 요소 아닙니까!
언제까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셔야만 내 자리에 머무른다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언제 자라겠습니까?
본문의 이 세 친구의 고백처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 지라도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것이
가장 좋고 편하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올 한 해 우리가 구해야 할 믿음의 모습 아닙니까!
자, 그래서 이번 신년특새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다스리는 하나님!"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에 맞는 순종을 하며 살아가는 믿음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오늘 본문 3장에서 기적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풀무불 속에서 살아남았다'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불 속에 던져져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세 친구들의 모습이
여러분 진짜 기적 중에 기적 아닙니까!
세상에 그 누구도 굴복시킬 수 없는 믿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에요.
세상이 감당할 수 없고, 세상이 이길 수 없는, 그 누구도 굴복시킬 수 없는 진짜 믿음이에요.
여러분 이게 진짜 기적 중에 기적 아닙니까!
진짜 하나님이 기대하는 기적은, '그렇게 아니하실 지라도' 순종하는 믿음 아닙니까?
하나님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이 믿음을 또 다시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 하실 지라도 순종하는 믿음!' 말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순종하는 믿음이에요.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도 버리시고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도 그저 말 없이 순종하는 믿음이에요.
우리가 한 해를 시작하면서 구해야 할 기도의 제목들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어쩌면 '달라는 믿음' 보다,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는 믿음 보다,
'순종하는 믿음'을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믿음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 이 믿음을 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아니하실 지라도' 순종하는 믿음을 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하실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렇게 아니하실 지라도, 저는 세상 앞에 절 하지 않겠습니다!'
그 참된 믿음의 고백이, 금년 한 해 나로부터
듬뿍 묻어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