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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단 왕상18:30~40 2012.03.04.
교회를 정의하고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요즘 현대교회에 들어와서 점점 더 잊히고 있는,
아니 아예 도외시될 뿐 아니라 혐오까지 당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전투하는 지상교회'입니다. *ecclesia militans, 조직신학용어
오직 '사랑, 자비, 화목, 평화' - 이런 것들만 있어야 하는 교회에
어떻게 '전투, 싸움'이라는 개념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 라는 사고방식이
대부분의 목사들과 교인들의 의식 속에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엘리야 선지자가 쌓았던 저 유명한 '갈멜산의 제단'은
문자 그대로 '전투의 제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북이스라엘에 있어서 실로 어려운 때였습니다.
아합과 이세벨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으며,
그 결과 북이스라엘의 영계(靈界)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의 압도적인 조류에
완전히 휩쓸려 있었습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이 절대 다수의 우상 선지자들의 박해로 인하여 참된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면 숨어 살고 있었고 엘리야 역시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무려 1대 850, 간단히 말해서 전력상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 선지자는 사태를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절대 불리한 처지에 있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작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압도적으로 중과부적의 상황이었지만
엘리야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참된 제단'을 가지고 결판을 내겠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참된 제단 하나만 쌓아 놓으면, 하나님의 택자들은 그 제단을 중심으로 모일 것이고,
가짜 선지자들은 백일하에 들통이 날 것이라고
엘리야 선지자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제단 쌓기 전쟁',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단을 쌓아 놓고
불을 응답받는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초전에서 바알의 제단은 완전히 죽을 썼습니다.
(*신약적으로 ‘성령의 불’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온종일 온갖 난리굿을 쳤지만,
불씨 비슷한 것조차 받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엘리야 선지자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시선이 엘리야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춤추고 자해까지 하면서
자기네 제단 주위를 '뛰놀았던' 우상 선지자 850명도
'이제 엘리야 저 녀석은 어떻게 하나 보자. 너라고 별 수 있겠나?'하는 심정으로
그를 주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엘리야는 어떤 제단을 쌓았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영적 전투가 사실상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이 말세에
설사 단 하나만 남는다 하더라도 모든 우상종교들과 이단들을 용감히 대항하고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교회란 과연 어떤 교회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구속역사' 위에 기초하여 세워진 교회만이 우상종교와 싸울 수 있습니다.
본문 왕상18:30~32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여기 "무너진 여호와의 단"이란 것은 당시 나라가 나뉜 후 남조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수가 없었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위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했던 제단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세벨은 바로 그런 제단까지도 다 헐어버렸고,
그 결과 여호와의 단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그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우면서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여" 쌓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조금 의외의 행동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고, 그렇다면 북열 지파의 숫자를 따라 돌 열 개만 취하여
제단을 쌓았을 법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한 이유는, 남조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야곱을 통하여
'언약의 백성'으로 인쳐 주신 '같은 선민'인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남북으로 나누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따라 선택하신 자기 민족을
바로 그 언약을 기억하며 세워진 이 제단을 중심으로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그는 '열두 돌'을 취하여 제단을 쌓았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자기 교회와 교단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택적 구속 역사'를 중심으로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전체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라는 사실에
철저히 입각한 교회만이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세계사의 중심은 구속사이다. 구속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케리그마 운동을 통해 성취된다."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항상 외치시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교회야말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를 이끌어 가고 있는,
이 세계 역사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이유 그 자체다.
세계는 이 교회 앞에서 별 것 아닌 존재에 불과하다."
이것이 성경 창세기~계시록까지 반복해서 보여주는 주제입니다!
- 정말 너무나 멋진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가장 큰 역사,
즉 '구속사'의 무대에 있어서 주역이라는 이 확신, 이 긍지!
그래서 무너진 제단(예배의 장소)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
그 제단에 하나님의 불이 임해야 한다는 것!
- 바로 이것이야말로 목사를 진짜 목사답게 만드는 데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이며 참된 교회를 세우는 필수불가결의 기초입니다.
이런 구속역사관이 없는 목사는 자기가 교회를 세우고 섬기면서도
그 교회란 것이 얼마나 지고한 것인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파하고 그 택자를 모으는 구령 공동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목사는 결국 뭔가 다른 '흥미로운 프로그램'으로
사람의 구미를 당기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에도 갓 이민을 온 교포들에게
미국 영주권을 얻게 해 준다고 약속한다든지, 주일마다 예배 후에 소풍을 나간다든지,
심지어는 성경공부 시간에 가라오케까지 하면서
교인을 끌어 모으려 하는 목사들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택자 구원'이라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구원 신앙'이 없는 교회는 정말이지 있으나마나 한 교회이며
오히려 참된 교회를 퇴색시키는 교회입니다.
'십자가 대속'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는 사실상 없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 위에 기초하고 있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그 어떤 이유도, 가치도 전무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세워진, 청와대나 대기업보다도
훨씬 더 권위 있고 귀중한 구령단체이다.'라는 확신을 굳게 지킴으로써
이 교회를 중심으로 '전투하는 지상교회'로서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함께 다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cclesia militans, militant church
◑2. '세속과 구별된 거룩성'을 지키는 교회가 다수의 우상종교와 대항할 수 있습니다.
왕상18:32~35절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엘리야의 제단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초하여 세워진
동시에 또한 '완벽하게 성별된' 제단이었습니다.
열두 돌을 수축하여 제단을 쌓은 엘리야는 또 한 가지 특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는 제단 주위를 돌아가면서 깊은 도랑을 팠습니다.
그리고는 제단 위에 제물을 놓고 그 위에 물을 길어다 부었습니다.
네 통씩 세 번, 즉 도합 열두 통의 물을 부은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제물은 물론이고 제물을 태울 나무까지 물이 흠뻑 적셔졌고
단 주위의 도랑에도 물이 넘치도록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지금 하늘에서 불을 받아 제물을 태워야 할 상황에서, 그처럼 제단을
미리 물을 적셔 놓은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분명히 일을 더 어렵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성경에서 가르치는 제사법에도
이런 순서를 명령한 구절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이런 특별한 행동을 취한 이유는
그 제단 속에 미리 무슨 불씨 따위가 숨겨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명백히 보여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우상 선지자들은 제단 밑 지하에, 미리 땅굴을 파서 사람을 숨겨 놓고
그 밑에서 불을 당기는 사기극을 벌이다가
그 속에 있던 사람이 질식해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불이 붙으면 주위의 산소가 사라지게 되어서 질식하게 된다는 과학상식을 몰랐던 시대
였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단은 바로 그런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모든 인위적인 속임수, 인간적인 수단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된
완전 성별된 제단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세상과 성별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 속에 섞어 버리려 하는 목사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들은 교회에 세상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로 가나 모로 가나 많이 모여들면... ‘꿩 잡는 게 매’ 라는 식이지요.
그 결과 교회와 세상 사이에 경계선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영적 공동체와 일반 사회단체 사이에
서로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도 아무 차이나는 것이 없어지고,
상대방의 신앙과 상대방의 무신론을 피차 인정하고 존중해 줄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되어 갑니다.
'예수와 불타와의 대화'라는 따위의 책들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할 정도니,
매도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입니다.
어디가 전선(戰線)인지 모르는 군대가 전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가 적지인지 아군 진지인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앞에 나타난 사람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도 없고 당연히 총을 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바로 그 경계선, '영적 전선'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구약 선지서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음란한 백성' 혹은 '음란한 여인의 자식'이라고
낯을 찡그리며 혐오하시는 무리가 바로 그처럼
우상 숭배자와 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까?
정말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는 교회 본래의 색깔인 '거룩성',
즉 다른 불순물과 섞이지 않는 그 '영적 순수성'을 목숨처럼 지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다운 영적 순결을,
그 정절을 진정 목숨을 바쳐 순교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제단 주위에 성별의 도랑을 깊이 파고
세속화의 물결과 인본주의의 조류로부터 “(물을 부어) 차단하고” 깨끗하게 지켜냄으로써,
실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아끼시는 교회, 불순한 이단과 악한 우상 종교들로부터
거룩하게 구별된 교회를 함께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도 응답의 능력'을 체험할 줄 아는 교회가
결국 우상혼합종교를 이길 수 있습니다.
왕상18:36~38절에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고 그것을 성별시킨 후 엘리야 선지자가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제 그 제단 위에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잘 준비되고 성별된 제단이라 해도 정작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지 않으면
그야말로 헛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성령의 불’입니다. 우리 각자 마음 속의 제단(성전)을 태우는 성령의 불!
하지만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는 그냥 단순히 '불을 내려 주옵소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의 요지는 "주께서 알게 하옵소서"였습니다.
참 기가 막힌 기도가 아니었습니까?
엘리야는 "주께서 하나님 되심을, 내가 주의 종이 됨을,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렇게 하는 것을
지금 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당신께서 알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36
간단히 말해서 '저를 위해 불을 내려 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이름에 손해가 가지 않게 하나님께서 알아서 불을 내려 주옵소서’
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제단은 엘리야가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열두 돌'을 수축하고 '성별의 물'을 부어 자기가 할 것은 다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자신은 그 제단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이제 하나님께서
그 제단을 위해 친히 역사하실 것을 확실히 믿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제단을 가만 내버려 두실 분은 결코 아니셨습니다.
그 제단에 지금 불을 내려 주지 않으시면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과
여호와는 그 백성의 마음을 회개시키려는 하나님이신 것을 이 백성들이 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당신의 종이 간절히 기도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손해를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바에야
어찌 그런 제단 위에 스스로 불로 역사하지 않으실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오냐, 여기 불 내려 간다."하고 마치 기다리셨다는 듯이, 엘리야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당장 불을 내려 그 제단을 활활 타오르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목사가 잔재주를 부리는 곳도 아니며 사람들이 모여 중지를 모아
뭔가를 해내는 곳도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뜻에 맞도록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결코 당신의 이름에 손해가 가지 않도록,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할 일을 친히 역사해 나가는 곳일 뿐인 것입니다.
오직 기도할 줄 아는 교회만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친히 체험하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친히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줄 모르는 교인, 기도할 줄 모르는 교회가 점점 더 늘어 갑니다.
회의 시간에 발언은 잘하면서도 기도는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전도회 회장이니 총무니 하는 자리들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온갖 불만의 소리는 크게 내고
무분별한 비판의 글들은 틈만 나면 SNS에다 올리면서도
정작 교회와 성도를 위해 뜨거운 기도의 눈물은 한 방울도 흘려 보지 못한 교인들이
소위 '민주주의식 교회 운영' 운운하면서 떠들고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기도할 줄 모른다는 것은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에게 기도하는 소리가 무슨 알아듣기 어려운 방언처럼 들리고,
예수님과 사귀고 있다는 사람이 자기 입을 열어 통성기도하는 것을
무슨 어려운 외국어를 말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 하는 '기도 울렁증'에 걸려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실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밀접하고도 원할해야 합니다.
오직 기도만이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금방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차리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구하면 주실 줄로'
확실히 믿는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그 '하늘의 뜻'이 교회와 성도의 삶을 통하여
반드시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실로
'하나님의 불이 우리 교회에 떨어지는' 승리의 역사를 함께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그런 제단을 쌓았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18:39~40절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그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의 제단 앞에서 당장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그것은 참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하지 못하고 있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지만 참된 제단 하나가 세워지고 거기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친히 역사하실 때,
거기에 있던 모든 백성들, 조금 전까지 머뭇거리던 백성들이
한 순간에 하나님 앞으로 몽땅 돌아왔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그런 신앙고백을 듣자마자 엘리야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당장 우상 선지자들을 체포하도록 명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도 아니었고 즉흥적으로 실행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우상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모으라고
도전장을 던졌을 때부터 그의 심중에 미리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백성들이 우상을 떠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저 우상 선지자 850명을 일거에 처치해야 할 텐데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곰곰이 궁리를 했을 것입니다.
물론 자기 혼자의 힘만 가지고 850명을 하나하나
일일이 상대해서는 도무지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그래, 제단에 승부를 걸자. 참된 제단을 하나 세우고
그것을 통해 백성들이 은혜를 받기만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850명의 우상 선지자들을
몽땅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실로 치밀하고도 기가 막힌 작전을 짰던 것이었습니다.
그 엘리야의 갈멜산 작전은 멋들어지게 맞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 앞에 둘러선 백성들의 입에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는
신앙고백이 떨어지자마자, 엘리야는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우상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다 잡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시간 아깝게 기다릴 것 없이 당장 주의 일에 써 먹어야 한다고
엘리야는 아예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의 예상대로 백성들은 즉시
엘리야와 손발을 맞추어 가장 시급한 우상 선지자 제거 운동부터 당장 해치웠습니다.
바로 세워진 '참된 제단 하나'는 그처럼 절대적 열세의 소수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개혁주의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소수에 몰리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끼리 제휴를 하고 연대 관계를 맺음으로써 더 많은 다수,
더 큰 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으며, 이단과 자유주의의 연합 세력
즉 오늘의 '금송아지 운동'도 갈수록 더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자연히 참된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교회는 더욱 수적으로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엘리야의 '갈멜산 제단', 그가 수축했던 '여호와의 단'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가 아니겠습니까?
이 노도와 같은 대세의 조류를 당당히 거슬러 막아 설
참된 교회 운동이 더욱 필요한 때가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교회가 이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실로 감동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교회 간판을 달고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구원 신앙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교회,
그리스도에 대한 거룩한 정절을 지키는 교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 구한대로 주님께서 시행하시는 기적들이 벌어지는 교회
– 이런 교회만이 개혁주의 신앙전선에서 끝까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관 위에 철저히 기초한 교회, 성별의 도랑을 파서 세상과 구별된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스스로 보여 주시는 불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교회
- 바로 이런 '여호와의 단'을 세워 '승리하는 전투교회'의 영광에 함께 참예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교회에 불이 임한 예 (펀 글)
제가 온누리교회에서 25년간 사역을 했는데,
서빙고 회에서 차세대 사역, 성인 사역하다가,
그 당시에 이제 토요일 오후 5시에 예배를 드리는 <요셉 청년부>를 담당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예배가 결코 쉬운 예배는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주 6일째 였거든요.
그래서 토요일날 낮 12시, 오후 2시까지 직장에서 일들을 했어요.
그리고 나서 뭐 결혼식이 있으면 또 결혼식에 갔다가...
그러니까 토요일 날 오후 5시에 청년들이 오면,
아무리 젊은 친구들이라도 다 지쳐서 오는 거예요.
제가 그때 예배 담당하시는 목사님하고, 같이 기도하고, 비전을 나누고, 의기 투합해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예배를 드리자'
그래서 <요셉 청년부> 예배가, 정말 강력하고 뜨거운 예배가 됐어요.
그래서 6백 명이 모이던 예배가, 칠백 명, 팔백 명, 나중에 1천 명이 넘었어요.
이 청년들이 본당이 들어오면서부터, 벌써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거예요.
두 시간 동안 축제 같은 예배를 드리고 끝나고 나면,
다같이 셀레브레이션을 하는데, 온누리 본당에서 막 다 뛰는 거예요.
저희끼리는 좋았는데, 그 다음부터 '서빙고 온누리 본당에서 뛰지 마라'
이런 내규가 생겼어요. 왜냐면 똑같이 1천 명이이 뛰니까, 건물이 위험한 거죠...
♣교회에 기도 응답(불)이 임한 예 (펀 글)
OOO교회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지 두 달쯤 되던 때입니다. 한 30명 모였을 때입니다.
한 성도의 가정에서 외국에 공부하러 갔던 딸이 심한 우울증을 갖고 와서
며칠 있다가 음독자살을 했습니다.
교인 30명 밖에 안 되는데 한 가정이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니까
당시 온 교회 성도의 2/3가 한양대학 병원에 가서 병상을 지켰습니다.
나중에 한양대학병원 부원장이었던 그 아이의 작은 아버지가 형님에게
"형님, 끝났습니다. 산소 호흡기 뗍니다." 말합니다. 산소호흡기를 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님은 양보할 수 없다고, 숨이 넘어가도 오늘 밤만이라도 곁에 있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저희들은 밤이 늦어 나와서 교회로 모두 모였습니다.
안 나왔던 성도들에게까지 나오라고 전화해서 모두 밤새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새벽 4시쯤 이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개인에게 불이 임한 예 (펀 글)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이 계신데, 그 장로님과 한 번 식사하며 교제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서리집사, 안수집사, 장로로 지내오면서
교회를 몇 군데 옮겼습니다만, 교회에서 받는 전도 훈련은 다 수료했습니다.
무슨 전도법, 전도 폭발.. 그래가지고 자기가 전도훈련 과정은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되고 난 다음에, 다른 교인들과 함께 전도를 나갈 때
자기는 마음이 참 무거워진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믿으면 천당..' 그런 얘기를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는데,
자기는 전도지를 들고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하려고 하면
어떤 질문이 머릿속에 자꾸 떠오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자연인으로 잘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거 또 한 사람 교회를 끌어들였다가
혹시 나처럼 고민 많은 사람 만들면 어떻게 하나?
아마 장로님은 교회를 몇 군데 옮기면서, 싸움을 많이 경험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전도했다가, 괜히 이 사람을 싸움쟁이로 만들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전도에 자신이 없대요... 괜히 나름 잘 살고 있는 사람을...
그런데 자기에게 상당한 변화가 왔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 삶에 변화가 왔는데, 지금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제게는 더 명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발을 들여 넣고, 꾸준히 그 나라 가운데서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살아가는데,
그 자유함, 그 기쁨, 그리고 생의 역경을 주님과 함께 풀어가는 그 스릴,
물론 고난과 역경이 있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돈 주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 얘기가
'이제부터 복음 들고, 가장 가까운 내 친구부터 찾아갑니다.
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보게, 이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가 진짜가 아니네,
참 진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그 하나님 나라가 있네!
나는 그걸 소유했네, 아 그걸 소유하고 나니까
이 현실세계가 전부 이전과 다르게 해석이 되네!
그리고 그 나라를 소유하고 나서, 이 현실세계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안목이 트이기 시작하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점점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내 삶의 궤도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네!'
아, 장로님이 이런 얘기를 하는데
'야, 이분에게 구원이 임했구나,
이 분에게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싹 트기 시작하는구나!'
그렇게 제가 감동적으로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