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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소서, 그 전에

LNCK 2025. 2. 5. 11:1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명>  

나를 보내소서, 그 전에 - YouTube

나를 보내소서, 그 전에           사6:1~13             2025.02.02.  

◑1. 웃시야 왕이 죽어야, 하나님이 새롭게 보인다

이사야 6장 오늘 본문 말씀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라고   사6:1
시대를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말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우리 시대라면 어떤 사건에 비길 수 있을까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기억나는 분들 계십니까? 
당시 저는 중학생이었습니다. 27일 아침에 모르고 학교에 갔는데 
저쪽에서 친구가 이렇게 걸어오면서, 아주 묘한,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짓는 거예요.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신 거 아느야? 이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는 거야?' 하면서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거예요.

당시 18년 동안 한 사람이 대통령이었습니다. 
중학생 어린 우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대통령을 본 적이 없어요. 

아마 대부분 그때 보통 시민들은, '박정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있는 한국'을, 
그런 세상을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박대통령은 18년 집권했는데요. 오늘 나오는 웃시야 왕은 52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러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 이거는 백성들에게 메가톤 급의 충격이었던 것이죠.

그는 16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처음부터 대단히 유능한 탁월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치세 내내 경제가 안정되었고, 나라가 차츰 부강해졌습니다. 

솔로몬 왕 때만큼 영토가 확장되었고, 당시 세계 정세는 안 좋았어요. 
앗수르 라는 강대국이 세계를 휩쓸고 지나갈 때였는데,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그들에게서 수탈당하고 침탈당했는데 
웃시야의 유다는, 국방을 잘 유지해서, 굳건하게 서서 나라를 잘 지켰습니다. 
그 왕이 죽었습니다. 

지난 12월 3일 갑작스러운 계엄 이후에, 우리나라가 겪는 혼란은.. 큰 것이지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와 비교하면, 12.3은 비교도 안 될 엄청난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각 나라들마다 크고 작은 위기를 만납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1929년 증권시장이 하루아침에 폭락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던 때를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IMF 때나, 혹은 평온하던 어느 주일 아침에, 
북한의 탱크가 삼팔선을 넘어오면서 전쟁이 시작된 1950년 정도를 
급변의 시기로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웃시야 왕이 죽던 해'는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때입니다. 

요즘 나라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가슴에 내려앉는 새파랗게 질린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좋은 회사의 취직했으니, 이 기업을 통해서 내 꿈을 키워 가면 되겠다... 
내 삶을 일구어가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너무도 든든하고 다들 부러워하는 회사이고, 직장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문을 닫게 된 경우라면,  

뭐 태산같이 믿던 남편이, 또는 태산같은 아빠가 세상을 떠난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 웃시야의 죽음의 경험!

▲이 사람이 어떤 왕이었는지 역대하 16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대하16:3~5 '웃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16세라 예루살렘에서 52년 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웃시야는 능력이 탁월했을뿐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고요. 
당시에 또 감사하게도 스가랴 라는,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주의 종이 있었고, 
그를 통해서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모든 일에 그를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웃시야 왕이 스가랴 선지자의 말을 잘 들었나 봅니다.  대하16:4

그런데 16절에 보면, 그가 강성하여 지매, 잘 나갈 때에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향단에 분향할 수 있는데 
'내가 하겠다' 한 겁니다. 교만해서 선을 넘은 거죠.

이 일로 벌을 받아서, 그는 나병 환자가 됩니다. 
그래서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고 별궁에 격리되어서, 
대단히 비참한 말년을 보낸 웃시야! 

▲여러분, 이 사건을 한마디로 말하면, (웃시야 같은) '사람을 믿지 말라' 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희망을 걸고, 사람을 의지하고, 
그 사람이 우리나라를, 내 삶을 지켜 줄 것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실망하는 날이 옵니다. 

우리는 그렇게 대통령을 뽑고, 위대한 지도자 사람을 기대합니다. 
몇 년 후에 '속았다. 그럴 줄 몰랐다. 후회한다' 그러지만, 
또 비슷한 사람을 뽑습니다. 또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가운데도, 역사를 길게 보면 
한국 역사가 정말 질곡의 역사인 것 같은데, 
길게 보면 또 '한 단계 전진했다' 할 때가 있습니다. 
(위기가 닥치지만, 그 위기를 극복할 때입니다)

여러분, 웃시야는 죽었지만, 유다의 미래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질곡의 삶은 계속될 것이고,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그들 가운데 계실 줄 믿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웃시야가 죽어야 하나님이 보인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걸 떠나 보낼 때, 내가 그렇게 신뢰하던 것(사람)이 무너질 때, 
내 삶의 토대라고 생각하는 것이 흔들릴 때, 
대단히 아프고 당황스러운 경험이지만, 
그때 이사야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거예요.  

◑2.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뵈옵고, 회개에 이른 이사야

사6:1~3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위의 체험은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스랍'만 하더라도, 이걸 설명하려면 굉장히 길고 복잡한데, 
간단하게 쉽게 '천사'라 생각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호위 천사

천사가 발과 얼굴을 '가리었다'라는 말은, 스스로 부적격하다는 뜻이죠. 
천사라 하더라도... 여러분 우리는 천사는, 선하고 착한 존재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도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에는, 부적격한 거예요.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렸다는 말은, 사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가려야 되는데,
이 존재 전체가 하나님 앞에 서기는 부끄러운데, 
다 가릴 수 없으니까 머리와 발만 겨우 가린 거예요. 

(*사람이 하나님을 뵈면 바로 죽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찬란하고 영광스러워서
천사도 차마 눈을 떠서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 얼굴을 가렸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며 찬양합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라는 말은
서로 인간끼리 '철수야 영희야' 이렇게 서로 불렀다는 말이 아니고, 
교창 交唱 했다는 뜻입니다. 양쪽이 서로 교대로 찬양했다는 거죠.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3
여러분 지금 백성들은, 온 땅에 두려움이 충만해요. 
웃시야 왕이 죽었다고 불안이 가득해요. 벌벌 떨어요. 탄식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믿음의 눈이 열리니까,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함을 볼 수 있는 거예요

6: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이게 어떤 느낌인지 아십니까? 우리 같이 포항에 사는 분들은 아마 아실 거예요. 
지진을 경험해 보았으니까요. 

'문지방이 흔들린다' 이거는
내 삶이 기반하고 있는 토대, '이것이 있으면 든든하겠구나. 절대로 흔들리지 않겠구나' 하던,
즉 내가 의지하던 모든 것이 흔들린다는 겁니다. 

폴 틸리히 라는 신학자가 '쉐이킹 파운데이션스' 이런 말을 했는데, 
여러분! 웃시야 왕이 죽은 것이 지진의 경험과 같았다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훨씬 더 큰 흔들림 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웃시야 왕만 잘 붙들고 있으면, 왕만 건재하면... 우리는 문제없어!' 

여러분, 이사야서를 읽어 보면, 예언자인데 왕궁에 자주 출입했습니다. 
왕의 얼굴을 수시로 뵙는 굉장한 특권층에 속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청와대에 자주 들어가서 설교하는 목사였죠. 쉽지 않은 특권이죠. 
학자들은 이사야가 최상류층의 귀족이었다. 
왕족이었고, 웃시야 왕의 사촌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라고 합니다.   주1)

어쨌거나 금수저로 태어났고, 거기에다가 웃시야 왕의 총애를 받았어요. 
그런데 믿고 의지하던 웃시야가 죽었어요. 
'큰일났다. 이제 어떻게 사나?' 하는 위기감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할 것 같아요? '살았다. 이제 나는 살았다. 이제 됐다.' 라고 말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입니다.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살았다, 이제 됐다' 말할 것 같은 그 대목에서 정반대로 
'나는 이제 죽었다. 큰일났다'고 합니다. 
왜요?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본 것 자체는 엄청난 영광이지만, 은혜이지만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뵈올 때는... 두려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라는 것은, 지식을 배워서 얻는게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부르심을 이렇게 말해요.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암3:8
여러분 사자가 무서운 걸, 배워서 합니까? 

 

아니잖아요. 아무리 바보라도 아무리 아기라도, 사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사자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뵙는데... 사람은 죽을 듯이 두려워하며, 
실제로 죄인들은 죽습니다. 즉사합니다.

어두운 죄가운데 사는 사람이 그런대로 잘난 척하고 살아가더라도,
빛을 비추면, 그 먼지와 더러움이 드러나요. 
여러분, 사람들끼리도, 아주 권위 있는 사람 앞에 서면, 내가 기가 죽지 않습니까? 
정말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 앞에 서면, 내 말과 행동을 돌아보게 되는게 정상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5
죄인된 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사야는, 무슨 죄가 먼저 생각났는가요? 
자기 입술로, 말로 범한 죄들이 제일 먼저 생각났습니다.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여러분, 내가 죄인인데, 내 존재 전체가 죄인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 덩어리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다 죄인인데, 

마치 '내가 범한 죄는, 말로, 입술로 범한 것 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입니다.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 가운데 거합니다' 라고 고백했어요.

여러분, 입술로 지은 죄, 말로 지은 죄가 그만큼 인간에게 치명적이라는 겁니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니까 

예전에는 몰랐는데, 진리를 배우고 은혜를 받으니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로 상처 준 일이, 그런 말들이... 낱낱이 생각나는 거예요. 

이사야가 그냥 '내가 뭐 입술이 부정하다...' 일반적인 말이 아니고요. 
구체적인 케이스가 생각나요. 그게 '회개'입니다. 

'아 그때 그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무심코 말했는데...' 
내가 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진게 생각이 나고요... 
실망하고 등을 돌리던 모습이 자꾸 떠오르고요.... 

'아! 내가 했던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집에 가면서 울었겠구나, 
그 사람이 그 밤에 한숨도 못 잤겠구나... 평생 가슴에 맺혔을 수도 있겠구나...' 
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뵌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우리 회사 직원일 수도 있고요. 우리 교우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내 자녀,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회개합니다. 두 가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이건 개인의 죄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이건 사회의 죄입니다.  
이사야는 함께 회개해요. 

우리가 '이 세상은 정말 문제다. 한국 사회, 한국 사람들은 정말 너무너무 심각해!'
라는 말은 많이 하면서, 내 죄를 회개할 줄 몰라요.
이 사회와 공동체의 죄를 회개할 줄은, 더더군다나 모릅니다.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자들 중에 거하면서' ... 라면서 사회적 죄를 놓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고백합니다. 

여러분, 회개는... 개인의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게 하는 것이고, 
그러나 개인의 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모세, 다윗, 다니엘, 느헤미야의 기도를 보십시오. 
개인의 죄를 통렬하게 자복하면서도, 민족 공동체, 이 사회의 죄를 
자기가 끌어안고 회개하는 거예요

◑3. 회개한 후에.. 사명을 받는다   *주제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그리고 나서, 이 회개 후에,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할 때 
이사야가 대답하죠. '나를 보내소서' 

그래서 이 장면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을 ... 소명 calling,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을 ... 사명 mission 이라고 하죠.

소명 과 사명이 비슷하게 쓰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떤 사명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죠. 
소명 안에 사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가 비슷한 말로 쓰이는데, 
사실은 미세하게 구분이 되죠. 

'나를 보내소서'라고 할 때, 이게 미션이라는 말인데요. *라틴어 mitto (보낸다)에서 나온 말
어디로 보냅니까? 

나를 옮겨서 해외 선교지로 보내거나, 저기 시골 낙도로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 삶의 현장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단계로 구분해서 설명드리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그 소명은 '분리'를 전제합니다. 
세상에서 불러내시는 거죠. 분리되어 새롭게 소속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세상으로 보내실 때, 예배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인하고 
다시 세상으로 파송을 받을 때에, 
이제는 내가 그냥 어떤 동네 사람으로서 가는게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보냄을 받는 겁니다. 그게 선교입니다. 

그리고 그 선교의 현장에서, 우리가 돌봄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선교가 돌봄'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돌보라고.. 우리 주위 사람들을 돌보라고 우리가 보냄 받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기 전에, 
하나님이 이 돌봄의 사명을 나에게 주시기 전에, 반드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먼저 네 자신을 돌보라'고 하는 거죠. 
여러분 나를 잘 돌보려면, 뭘 알아야 되는가 하면, 나를 알아야 돼요. 
무엇보다도 내 약점을 잘 알아야 됩니다. 

보편적으로, 영적으로, 우리가 다 약한 대목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리가 특별히 마음 써서 돌봐야 될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말, 입술' 입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봄의 사람'으로 서기 위해서, 
말의 훈련을 먼저 받아야 했습니다. 

사40장에 가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40:1
이것도 말이죠. 말로 위로하는 거죠. 돌보는 거죠. 

여러분 사39장까지는, 이사야가 대부분 심판의 선포를 합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요. 

사40장부터는 위로의 말입니다. 듣고 싶은 말이에요. 너무 좋아요. 
그런데 듣고 싶어 하는데, 누가 말할 때에 진정한 위로가 안 돼요. 

여러분, 어려움 당한 사람한테 다가가서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힘내!' 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근데 그렇게 말한다고 위로가 됩니까? 누가 위로할 수 있습니까? 
누가 위로해야 위로가 되겠습니까? 누가 위로할 권위를 가졌습니까? 
위로의 품격을 갖추었습니까? 

위로가 될만큼 넉넉한 마음, 안아주는 마음, 영적인 힘을 가졌습니까? 
우리는 누군가를 돌볼 때에, 돌보는게 쉽지 않잖아요. 
돌보는 건 사랑인데, 희생이고 헌신인데, 
'돌본다'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받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말로써!

일례로, 여러분 집에 아픈 가족이 있으면, 돌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체력의 한계를 넘을 때도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 정말 힘들게 돌보고 희생하는 거예요. 돌보는 사람은 모두가! 

근데 그 체력의 한계보다,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게 ... 마음의 한계예요. 
대부분 그래요. 그렇게 힘들게 보살피고, 어른(부모)들을 섬기고 하면서도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 한두 마디 하지 말아야 될 말 했을 때는... 상처로 남게 됩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고도... 그렇게 고생했는데,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한다면, 
오히려 섭섭하고 원망의 대상으로 기억된다면...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는 거예요. 이 입술 때문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사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절망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 후에 돌봄의 자리로 보내십니다 *주제  

자기 자신을 먼저 알고, (죽을 죄인 임을 알고) 
자신에 대해서 절망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게 먼저 되어야... 보냄을 받습니다.

여러분, 돌봅의 사역은, 절대로 자신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성찰이 없는 시대인식, 사회비판, 선교의 소명은 공허합니다. 
자기 성찰이 없으니까 공허한 거예요... 내가 나를 (얼마나 화인 맞았는지) 모르니까!

그리고 진정한 자기 성찰은, 자기 돌봄으로 이어집니다. 
성찰해야 돌볼 수 있습니다. 

◑적용

▲자녀에게 언어, 예절 교육을 어려서부터 시키십시오
여러분, 자녀를 잘 돌보시는 분들, 정말 희생적으로 헌신하시는 분들 많잖아요. 
자녀 돌봄의 끝판왕이 뭔가 하면,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망했어요. 
빚진 아들, 그러니 가정도 위태위태하고요... 

그 아들이 너무 불쌍해서, 부모가 평생 저축 다 털어서 갚아 줘요. 
노후자금 다 깨서 아들 빚 갚아 주는 분들을 보면 '야 참 대단한 희생이다'는 생각이 들죠.

근데 아들이 왜 망했는지 이유를 살펴보니까, 
투자를 받아가지고 잘 나가다가, 투자자하고 틀어졌어요. 
왜 틀어졌냐? 말 한마디 때문에... 

쓸데없이 자존심이 세우다가 투자자와 틀어지고 깨진 거예요.

주위에서 다들 그래요. '참 능력 있는 친군데... 그 성질만 좀 죽이면 될 텐데... 
말만 좀 조심하면 될 텐데...' 
그래서 무슨 말이 있습니까?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그래서 여러분, 자녀가 사업하다가 잘못되서, 빚을 몇 번 갚아주는 것보다,
어쩌면 '자녀에게 말을 잘 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게 훨씬 더 값진 유산이 됩니다. 

여러분, 자녀를 돌본다는게 뭡니까? 
그냥 맛있는 거 사주고, 좋은 옷 사 입히고, 재미있는데 데려가고... 그것 만이 아니죠. 

자녀가 인생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바른 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을 많이 경험해보거나, 젊은 사람들을 채용해서 함께 많이 씨름해 본 분들, 
다수의 어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재란, 특별한 능력이 아닌, 특별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젊은이들을 만나 보세요. 능력이 있다 그래도.. 거기서 거기예요. 
결국에는 '특별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 인재'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린 자녀들 때부터, '아이가 어디 가서 인사만 잘해도 예쁨 받잖아요.' 
그렇죠. 인사만 잘해도 예쁨 받아요. 칭찬 받아요.

애가 너무 귀여워서 버릇없이 구는 것을 부모가 참아주면, 
금방은 좋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커서, 그게 버릇이 되어서, 밖에 나가서 예쁨 못 받습니다. 
여러분 커서도, 인정 못 받습니다. 능력 있고 공부 잘해도 별 소용없어요. 
마침내 부모 자식 사이도 벌어집니다. 그 성질머리 때문에!

그래서 자녀를 사랑한다면, 어려서부터 예의를 가르치고, 배려를 익히게 해 주셔야 됩니다. 

그게 자녀 돌봄이에요. 

돌보다 보면 때로는 따끔한 거예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 중에, 신뢰를 얻는 사람은 없고, 
신뢰를 얻지 못하면, 인생을 행복하게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제대로 된 '언어 교육'만 시킬 수 있다면, 
자녀의 삶에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주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합니까? 단순히 '나쁜 말 하지 마, 예쁜 말 해' 라고 말로 잔소리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첫째로, 환경입니다. 맹모삼천지교 아시죠? 
장터에 가서 키우니까, 전부 장터의 언어를 배우고요. 
장례식장 근처에 가니까, 막 '아이고 아이고' 하는 것만 자녀가 입에 담아요. 

그러나 여러분, 자녀양육의 가장 중요한 환경은, 부모예요
아무리 좋은 동네에 가서 살아도, 부모의 입에서 늘 야비한 말, 상스러운 말,
거짓만 나온다면... 아무 소용없어요. 
여러분, 꼭 이사 안 가도 됩니다. 부모의 언어가 바뀌면 되는 줄 믿습니다. 

2) 그 다음으로, 자라면서 좋은 책을 많이 읽게 해야 됩니다. 
책은 언어로 되어 있잖아요. 말로 되어 있잖아요.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그 세계를 맛보게 되는 거고, 그 어휘들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책 읽는 사람으로, 책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는게 
진짜 소중한 돌봄입니다. 

「좋은 말이 마음에 많은 사람은, 
좋은 선물을 서랍에 넣어 두고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과 같다」 

멋진 말이죠. 제가 어제 생각해 낸 말입니다. 
여러분 집에 놔두고, 집에 오는 사람들마다 멋진 선물을 하나씩 나눠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죠? 

좋은 말이 마음에 많으면, 좋은 말이 나가는 거예요. 
책을 읽어야 됩니다.

우리 교회 도서관,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교육부가 '아이들 책 읽기' 도우려고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을 읽는 거예요. 
성경에 읽는 구원의 도리와, 복음뿐 아니라, 
성경에 있는 그 상상력, 성경에 있는 단어, 언어, 세계관 자체가 
여러분 이게 '말'을 통해서 우리한테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우리 마음의 자리 잡을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녀 돌봄'과, '자기 돌봄'의 원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나를 돌본다' 그러면, 우리가 전부 다 소프트한 것만 생각해요. 

'어디 가서 쉬어라.. 천천히 해라.. 괜찮아 괜찮아' 물론 그것도 필요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도전 하십니다. 

「말을 가려 하라는 것은, 남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태도이기 이전에 
자기 돌봄의 시작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가능성을, 말로 다 깎아 먹습니까? 
뿐만 아니라 욱하는 험한 말을 하고 살면, 내 마음도 거칠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각도 둔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돌보기 위해서, 내 말을 먼저 제어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사야가 제단 숯불로 입술이 지져진 것처럼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사야를 사랑하세요.
이사야를 소중하게 쓰기를 원하세요. 

근데 먼저, 이사야 자신을 알게 하시잖아요. 자신을 직면하게 하시잖아요. 
하나님을 보게 하고,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하잖아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여러분, 이같이 자신을 직면하는 순간을 허락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이사야를 돌보시는 방법이에요. 
우리의 인생에, 이런 자신을 직면하는 순간이 있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4. 이사야로 회개케 하시는 은혜

'웃시야가 죽어야 하나님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웃시야가 안 죽어도 돼요. 
웃시야를 의지하는 마음이 죽어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철들기 위해서 
꼭 뭐 집안에 어려움이 있거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꼭 그래야 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사람이 정신 차리고 믿음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뭐 나라가 망하든지, 사업이 망하든지, 뭐 큰 병에 걸렸다가 병이 낫든지... 
꼭 그래야 되는 거는 아니라는 거죠. 

물론 그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만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고생 자체가 하나님 만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에요. 
고생만 하다가 (회개도 못하고, 하나님도 못 만나고) 끝나는 사람도 많잖아요. 
고생해서 사람이 더 망가져요. 
결국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슨 은혜인가요? 

6:6~7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스랍 천사가 부젓가락을 가지고 화로에 있는 숯을 집어서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얼마나 뜨거울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근데 여러분, 이것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 죽음과 같은 고통과 절망에 비하면,
사실은 별것 아니라는 걸 알아야 돼요. 

여러분 숯불을 내 입술에 대는 이 경험은, 내 죄의 무게에 비하면 가벼운 거예요. 
진짜 우리가 죗값을, 나의 죄인됨에 상응하는 벌을 받으려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는 게 맞아요. 

신4:24 '네 하나님이 여호와는 소멸하는 분이시요...' 
영원한 멸망.. 그게 맞는 겁니다. 

그러니까 숯을 부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술에 댄다는 것은,
영원한 심판을 살짝 맛만 보는 거예요.

진짜 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심판이죠. 진짜 불태우는 거죠. 
여러분, 이사야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앞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그게 '소멸하는 불'의 심판입니다. 

그때 성전이 불탑니다. 약탈 당하죠. 가족들이 흉악한 칼에 죽고요. 
장애인이 되고요.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쇠사슬에 묶여서 노예로 끌려가는 그거죠. 
그게 진짜 심판이고, 그 심판에 비하면... 숯불로 입술을 지지시는 것은, 너무도 약한 거예요. 
너무도 약한 거예요... 

하나님이 이사야를 사랑하셔서, 이 경험을 미리 살짝이라도 경험해 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부모의 돌봄도 때로는 따끔해야 됩니다.
그 따끔함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제단 숯불을 그 입술에 대시는... 그래서 자신의 죄인됨을 알게 하시는... 
그래서 그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찾아오셔서 돌보시는 역사의 시작인 줄 믿습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십니다. 
내 입술로 지은 죄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시는가요? 
이사야서 성경은, 본래 대단히 본질적이고 근원적이면서 
또 동시에 굉장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말을 조심하면서 예언하는 거죠. 그게 이사야서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에, 이 말씀 듣고 어떻게 실천할까? 주보에 실어 놓았습니다. 
집에 가서 주보를 들여다 보시고, 한 주 동안 말씀을 실천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오셔서 나를 성찰하게 하시는,
나를 알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러잖아요. 
그 예수님 안에 모든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서만 따로 읽으면 '야~ 부럽다. 하나님의 영광,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았구나' 라고 하는데요. 
여러분, 너무 부러워할 거 없습니다. 

이사야는 겨우 하나님의 옷자락의 밑단만 보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알잖아요. 할렐루야! 
그 하나님의 성품, 그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소중한 핵심과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우리를 부러워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맞아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할렐루야! 
예수를 바라볼 때에 나를 알게 되는 거예요. 
내 약점도 알게 되고, 그래서 내가 나를 정말로 돌볼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겁니다. 
그러한 성장 가운데서 우리가 손을 잡아주고, 돌봐주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복된 인생으로 세움 받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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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1:1절에 보니까 이사야의 아버지가 아모스예요.
아모스는 아마샤 라는 왕의 형제 였어요. 

그러니까 이사야는 아마샤 왕의 조카였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이사야는 소위 로얄 아카데미, 왕립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를 한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왕족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