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기도 | 요나 2:1-4 | 화특새 | 25.1.7 - YouTube
23:50초~
◈요나의 수중 기도 욘2:1-4 2025.01.07.
◑도입
요나는 물고기 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죽음을 의미합니다.
'삼일삼야'(1:17)는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죠. 그는 징계를 받습니다.
지옥 같은 경험, 버림받은 자가 되죠. 영원한 버림받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일시적인 버림받음이죠.
그는 죽음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죽어야 산다는 거죠.
죽고자 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예수님도 죽음의 자리까지 가셨습니다. 비참한 상태에 빠지셨죠.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분노하신다'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물고기 배 속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2:2절을 보면 '스올의 뱃속'이라고 그래요.
스올, 지옥 또는 무덤까지 내려가는 거예요.
요나는 사실은 내려갈 때까지 내려간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갈 때는, 내려갈 때까지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됩니다.
내려갈 때 내려가지 않으려고 하면, 더 비참해집니다.
내려갈 때 제대로 내려가야, 다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게 '죽어야 산다'는 십자가의 원리죠.
우리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죠.
그러나 하나님은 일으켜 세워주시고, 또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시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한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늘 넘어짐의 연속입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깨지고, 실패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우리의 순종 여부에 달려있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의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리막 길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요나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돌이키기 시작한 것이죠. 이렇게 돌이키는데 요나는 3일 3야가 필요했습니다. 욘1:17
물고기 배 속에서의 3일 3야, 여러분 요나에게는 3일입니다.
근데 사람에 따라 조정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3일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1주일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4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물고기 배 속에 사람을 집어넣으신 하나님은,
얼마 동안에 물고기 배 속에 넣어두실 건가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삼켜졌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새벽에 나오신 분들 가운데, 물고기 배 속에 계신 분들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물고기 배 속은 어떤 곳입니까? 전혀 기쁨이 없는 곳입니다. 기쁨이 전혀 없어요.
아마 항상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것입니다.
한 번도 활짝 웃어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런 적이 너무 오래됐어요.
삶이 어둡고 칙칙합니다. 모든 게 사방으로 막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일어나서 숨을 쉬기도 어려워요. 가슴이 답답하여 호흡조차도 어려워요.
그게 바로 물고기 배 속입니다. (한글을 붙여 쓰면 '뱃속')
물고기 배 속은 오래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가두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이 물고기 배 속은 통과해야 될 곳이지, 정착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빨리 구출해 주시기를 응원하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는 기도합니다. 아니, 비로소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는 놀랍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무엇이 먼저 떠올랐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여' 그랬습니다.
요나는 그동안 여우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과 마주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하나님으로 더 멀어지고자 다시스 행 배를 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얽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 요나에게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의 모습이 다 섞여 있습니다.
-집을 떠난 탕자의 이미지가, 요나에게 선명하게 들어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거부합니다. 가능한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복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둘째 아들이 선택한 그 타국은, 요나에게는 다시스였어요.
자신의 꿈을 성취해 줄 미지의 세계 다시스!
-큰아들 역시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함에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명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둘째 아들인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열어주고 기뻐하는 모습에
그는 화가 잔뜩 났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될 나라였습니다.
◑기도를 회복하는 요나
'요나가... 그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2:1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합니다.
돌고 돌아 이제 아버지 곁으로 온 것이죠.
탕자의 아버지가 늘 그 자리에 계신 것처럼, 하나님은 이 요나를 받아 주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로 얼굴을 들면 됩니다.
내 얼굴을 여호와께로 향하면 됩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려워요. 죄인은 한사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약간만 돌리면 됩니다. 조금만 돌리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십니다.
근데 목이 곧은 백성은, 얼굴을 돌리지 않습니다. 돌리면 목뼈가 부러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불순종의 백성들은, 죽어도 고개를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리고, 30년이 걸리고, 40년이 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갑니다. 하나님이 살 길을 주셨습니다.
장대에 높이 놋뱀을 걸어놓고, 그것을 한번 쳐다보기만 해도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안 쳐다봅니다. 고집을 피우다가 죽어가는 것이죠.
여러분 기도가 어려운 것입니까? 기도는 쉬운 것입니다.
'기도는 모국어와 같다'고 그러죠. 모국어!
우리가 한글을 말하는 게 어렵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는 쉬운 것입니다.
기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는 얼굴을 여호와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시선을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거예요.
왜 그분에게로 향해야 합니까? 우리의 도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한사코 땅만 쳐다봅니다.
기도할 시간에, 더 열심히 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주식 투자 공부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립니다.
◑기도의 타이밍이 늦으면 안 됩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였어요. 거의 끝 지점에서 비로소 기도를 합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 속에서라도 기도했다면,
그 배를 타고 갈 때, 바다 위에서라도 기도했다면, 문제는 이렇게까지 복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도 늦었지만, 완전히 벼랑 아래로 떨어지진 않았으니까요.
그는 풍랑이 이는 데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배가 흔들어 대는데도, 그냥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원들이 '너의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지만, 그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여러분 기도에는 타이밍이 있습니다. 대개는 기도할 타이밍을 놓쳐버립니다.
여러분 언제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는 평안할 때 해야 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은 그때, 기도해야 합니다.
왜 대개의 사람들이, 고난 중에 기도합니까?
기도할 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안할 때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도할 때를 놓친 거죠.
그런데 여러분, 평안할 때 기도는 힘듭니다.
아무 어려움이 없는데 기도하는 것은 힘듭니다.
인간은 평안할 때, 영혼의 잠을 잡니다.
미련함이란 무엇일까요?
평안할 때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그래서 영적인 나태가 찾아오는 거죠.
그때는 기도를 한다고 해도, 기도가 나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기도 생활에 무기력증이 찾아옵니다.
자기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평안할 때 깨어있는 기도가 진짜입니다.
평안한데 '깨어 기도한다?' 그게 진짜입니다. 영적으로 성숙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건 쉬운 게 아닙니다. 문제가 없어도 여전히 깨어있는 기도를 한다면,
그는 영적인 고수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
평안할 때 기도를 한다면, 쓸데없는 고난은 당하지 않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기도는 우선순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박자 느립니다.
기도가 수습책이 됩니다.
이미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면, 그걸 끄기 위한 기도는 늘 힘들고, 진화가 쉽지 않습니다.
▲수세에 몰린 기도는 늘 다급해집니다.
2:1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서는 첫 단어가 '여호와께서' 1:1
그리고 '요나가' 2:1
이렇게 두 주어가 요나서를 읽어보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긋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요나는 딴청을 피우고...
자기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니느웨'를 외치는데,
요나는 자기의 길을 갑니다.
그래서 늘 어긋났어요. 서로 각자 다른 것을 바라본 거죠.
그런데 지금 드디어 처음으로 마주칩니다. 2:1절에서요.
'요나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합니다. 요나가 어디에서 기도합니까?
물고기 배 속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보면, 보이는 게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보면, 미래가 보입니다.
기도가 영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의 영적 건강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삶은 기도의 확장입니다.
삶이 있고, 기도가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있어야, 삶이 따라갑니다.
기도 안에 모든 게 들어있습니다. 기도가 없다면 삶은 공허해집니다.
기도를 보면, 그 안에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
요나는 비로소 정면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합니다. 골방 기도의 원조입니다.
최상의 기도처이비다. 그러나 환경적, 상황적으로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불편합니다.
편안한 환경이 아닙니다. 감옥의 독방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곳이 기도하기에는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푹신한 가족 소파에 앉아서, 방금 드립한 커피를 마시면서 기도를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본래 낮은 곳에서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소망이 없는 절망적 상태에 있는 것처럼 기도합니다.
들어 누워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나 진짜 기도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기도는 더 이상 붙들 것이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과 독대를 합니다. 그는 절박합니다. 시선을 다른데 둘 곳이 없습니다.
그의 편을 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지금 답답하십니까? 물고기 배 속만큼 답답하십니까?
답답한 환경으로 몰아 넣으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물고기 배 속에 넣으셔야 했나요? 그렇습니다.
요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최상의 기도원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경주 수양관이 아니고, 물고기 배 속 수양관입니다.
왜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합니까?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미루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도하라는 사인을 주십니다.
반드시 주십니다. 광풍이 몰아칠 때, 기도하라는 거죠.
그때라도 기도했다면, 바다에 던져지는 일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늦었다고 할지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궁지에 몰리고 몰려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궁지에 몰려도 기도 안 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줄까요?
요나는 언제부터인가 기도가 끊겨 있었습니다. 기도가 오래전에 끊겨 있었습니다.
기도가 오래전에 끊겨 있었던 사람은, 문제가 터져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불순종과 기도 없는 삶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내십니다.
◑고난은 최고의 기도 학교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그랬어요.
고난 중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기도의 자리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에서 기도를 배웁니다.
여러분, 기도는, 기도 학교나 세미나를 통하여 배우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강의실이나 책에서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배우다가는...대개 기도학교의 중퇴자들이 됩니다.
기도를 배우다가 중단한 것이죠.
기도하는 습관이 잡혀져 있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교회에 다닌다'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다.
기도를 배우지 않은 신자들이 의외로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최고의 기도학교입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기도하고 싶어서 기도한 게 아닙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어서 기도합니다.
고난 중에 기도를 배운 사람은 축복입니다.
여러분 요나의 이 기도를 보면 (내일 살펴보겠지만)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막 기도가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기도를 합니다. 정교한 틀을 가지고 있고요.
이 요나의 기도는 시편을 다 가지고 옵니다. 깊은 기도로 나갑니다.
고난을 당했다고, 모두가 기도를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는 고난이 오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분노합니다. 누군가를 탓합니다.
고난을 부정하기 바쁩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를 배웠다면, 고난의 수혜자입니다.
◑요나의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내가 스올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
그의 기도는 간절합니다. 여러분 부르짖는 기도가 진짜입니다.
마음을 토해내는... 여기는 가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진실된 기도입니다.
여러분, 부르짓는 기도는 가벼운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도망하던 그가, 이제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언제 부르짖죠? 역시 환란 중에 부르짖습니다.
시18:6절에 '내가 환란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되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시며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요나는 지금 일상적인 기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언제 하죠?
비상의 상황인 것입니다. 살려달라는 거죠.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위기 중에 위기입니다.
여러분 부르짖는 기도를, 하고 싶다고 부르짖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자 우리 한번 부르짖으며 기도합시다'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평소에는 소리가 잘 안 나와요.
근데 어떤 때는, 그렇게 얌전하던 분이,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부르짖는 거예요.
사람들이 놀래요. 조용히 하라고 해도 안 돼요.
왜요? 그가 너무너무 절박하기 때문에!
여러분, 부르짖는 기도! 이게 위력이 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셨도다'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러분,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해야, 죽을 일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죽을 일이 있는데도 기도를 하지 않는데, 부르짖지 않는데,
어떻게 그 죽을 일에서 건져냄을 받겠어요?
아무리 죽을 일이 있어도, 죽을 힘을 다해 부르짖으면,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세요.
죽을 힘을 다해 기도했느냐는 거예요.
그때는 뭐예요. 여러분? '하나님 없으면 난 지금 이제 끝입니다. 죽습니다'
그야말로 죽을 일과 마주치는 거예요. 그때 부르짖는 거잖아요.
그래서 위기를 당했을 때 살 길은, 하나님을 죽도록 찾는 겁니다. 찾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아십니다. 기도 소리 들으면 금방 아십니다.
'너 아직 안 답답하네... 너 소리 들어보니까 딴 생각 하네... 너 아직 덜 급하네...'
여러분, 목소리를 들으면 모르겠습니까?
아이들도 떼를 쓸 때, 딱 엄마는 다 압니다.
'네가 진짜 나를 찾는구나.. 너 진짜 나를 찾네...'
여러분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부르짖는 기도를 할 줄 압니다.
기도 소리가 다릅니다. 그 기도 안에 뭐가 있습니다.
밑바닥에서, 그 스올의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그 밑바닥에서 배운 기도, 그 절망의 끝에서 배운 기도...
여러분, 시편의 탄식의 기도가 그런 기도들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위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부르짖는 기도가 많이 사라졌어요.
한국교회 전통은 '주여 삼창' 이 부르짖는 기도 아니에요?
요즘 우리 철야 때, 기도가 청년들이 너무 뜨거워요.
우리 청년들이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는지 참 감사해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금요철야기도에 안 와보신 분들은 한번 와보세요.
이 금요철야기도회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냥 부르짖는데, 어떤 자매 한 명이 독특한 소리가 나요.
그 자매 소리가 늘 귀에 쟁쟁합니다. '주여~~~'
전사적인 기도죠. 생명을 건 기도!
▲여러분 이 부르짖는 기도가 대한민국을 살려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의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1950.06.25 동란 이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초토화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다시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시 민족의 비운이 찾아오고, 세계사에 알려진 이 전쟁은
우리 한국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모든 게 쓰러져 버렸습니다.
불과 70여년 전 일입니다. 여러분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소망이 없던 민족, 기도외에는 답이 없었어요.
우리는 그때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냥 기본이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그냥 누가 부르짖으라 하지도 않았어요. 통성기도를 하면 불이었습니다.
그게 한국교회의 축복이었습니다.
한국교회 하면, 세계사에 알려진 게 '기도'입니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산기도는 기본이었습니다.
한때 기도원마다 사람들이 넘쳐 흘렀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시절에, 그때 그 시절을 지냈습니다.
방학이면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고, 산기도 가고...
여러분, 부산 금정산 해발 802M 정도 됩니다. 김해 무척산이 702M 됩니다.
금정산에도 그냥 그 밤에 랜턴을 켜고, 그 어린 나이에 그 산에 올라가서 기도했는데,
올라가 보면 '70인 바위'가 있습니다.
거기 올라가면 이미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요.
그들이 다 우리 민족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무척산은 김해에 있는데, 거기는 올라가는 데도 힘듭니다.
거의 정상에 있는 기도원까지 올라가는 길이 얼마나 가파른지요.
그 기도원에서 거기서 엎드려 기도하고, 산기도 하고...
당시에 철야기도 하지 않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철야기도 하는 교회도 많지 않습니다. 많지 않아요.
해도 그냥 간단하게 하고 마칩니다.
새벽기도도 지금 여러분 대한민국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도가 밀려도 한참 밀렸습니다. 기도의 불이 꺼졌습니다.
기도의 열기가 사라지면서, 한국교회는 힘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난 중에서 기도를 배웠습니다.
왜 그렇게 우리가 절절히 기도했느냐? 고난 중에 있었으니까요.
근데 그 고난 중에 배운 기도가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축복되게 했습니다.
근데 지금 우리의 기도가 아주 약해졌습니다. 다시 기도가 일어나야 돼요.
의미 없는 중언부언, 핏기 없는 기도가 아니라
부르짖는 기도... 이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습관적인 기도 생활, 형식적인 기도 생활이 아니고
기도 안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는 거죠.
기도가 어디로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요?
여러분 진짜 부르짖는 기도를 언제 해보셨습니까?
여러분 부르짖는 기도는 원초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에는 묵상적 기도, 때로는 사귐의 기도, 침묵의 기도... 다 필요하죠.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기도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부르지는 기도는 진실합니다. 감상적이나 낭만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매우 현실적입니다.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부르짖으시기를 바랍니다.
울기를 바랍니다.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 '내 일상속에 세밀히 관여하시는 하나님'
일상에서 기도가 밀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문제가 터져요.
삶이 뒤죽박죽 쫓기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밀리면, 삶이 떠밀려 다니게 됩니다.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기도를 더 못합니다. 그때부터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상황에 대처하기 바쁩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과 멀어져 있고, 어느 순간 삶이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삶이 바닥을 칠 때는, 이미 기도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계속 기도하라는 싸인을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도하라는 싸인을 주실 때, 기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가능하면 특별한 싸인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인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싸인을 알아차리는 법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게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일상 속에서 영적 민감성을 가지셔야 합니다.
▲재정의 문제가 계속 내 삶에 일어난다... 재정이 자꾸 어려워진다... 압박감이 생긴다...
무조건 이 재정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왜 이런 일이 내 삶에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께 물으셔야 합니다.
왜 재정적인 압박이 이렇게 계속 되는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기를 원하시는 게 있을 거라고요.
무조건 취직하게 해달라.. 무조건 물질의 문제를 해결해달라.. 그렇게 하지 말고,
내가 지금까지 재정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며 살아왔는지...
물질에 대한 나의 청지기적인 태도는 바른지...
헌금생활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그 물질을 어느 부분에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나에게 물질을 주시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여러분, 돈이 많으면 다 좋은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오히려 재정적인 어려움이, 내 영혼에 더 복될 수가 있어요.
의외로 내가 돈 문제에 준비가 안 돼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돈을 많이 주시면 어떡해요? 큰일 나지요.
여러분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르시고, 첫 번째 가게 하신 곳이 그릿 시냇가였어요.
가자마자 시냇가가 바짝 말라 버립니다.
'생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게 엘리야가 받은 첫 번째 수업입니다. 어떻게 해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공급받는 훈련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는 훈련!
왜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에 관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별의 별 일들에 다 관여하십니다.
하나님은 일상에 전혀 무관심하게 계시다가, 갑자기 한 번씩 끼어드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다가오시고, 관여하시고, 개입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요나서를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열(여러가지) 일을 다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신앙이 사변화된 교인들의 특징이 있어요. 기도의 세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신앙이 사변화되어 있는 거예요. 신앙이 그저 논쟁적이에요.
'요나가 들어간 물고기가 무엇인가를 밝혀내느라' 시간을 다 보내버립니다.
'요나를 물고기 속에 집어넣으시고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은 놓쳐버립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고, 행동하려고 해보세요.
훨씬 빨리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도를 배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관여하시는지를
매 순간 경험하게 됩니다.
요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자신이 바다에 던져진 일, 큰 물들이 나를 두른 일...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파도와 큰 물결이,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일으키신 일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죠.
'주께서' 자기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뭘 말하는 겁니까?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 아래서
자기의 모든 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권능을, 그 주권을 이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그는 이제야 인정을 합니다.
그동안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눈을 충분히 가리고,
하나님의 추격을 얼마든지 자기가 따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을 만만하게 생각한 대가는 큽니다.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그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 쉽게 불순종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걸 우리가 온몸으로 느끼셔야 돼요.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한, 경청의 태도를 가져야 돼요.
언제나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문제를 키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잘 모르는 거예요. 이게 화근이에요.
호세아서를 보면 그게 화근이에요.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요.' 호4:6 등
그러니까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볼 뿐이 아닙니다.
여러분, 요나가 하나님을 너무 쉽게 보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일어나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는 말씀을, 요나는 가볍게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심인가를 몰랐습니다.
'가라' 이건 어명입니다. 그분은 왕 중에 왕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그의 발 아래에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이미 광풍이 일어났잖아요.
바람과 파도들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잖아요.
여러분, 어디에서부터 사고가 나는가를 잘 보셔야 합니다.
사고의 진원지, 사고 다발 구간이 어디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 데서, 사고가 터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 곳, 그곳에서부터 사고가 다 터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태도가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할 때,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경청해야 합니다. 경청해야 합니다.
다른 이야기는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건 보통 큰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잘 안 들으니까, 하나님이 크게 말씀하실 때가
바로 그게 우리의 삶의 고난인 것입니다.
그 고난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거예요. '이래도 안 들을래?'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구원과 연결된 말씀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니느웨로 가라. 거기서 외치라'
이거는 니느웨 백성들의 구원이 달려있는 문제예요. 특급 명령입니다.
'복음 전파, 영혼 구원' 이것은 특급 명령이에요.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어요.
영혼이 달려있고, 영원이 달려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을 살려내시려는 하나님의 특급 명령입니다.
여러분 소포나 편지를 보낼 때 특급 Express 이 있잖아요.
이거는 반드시 전달되어야 되는 것! 요나가 받은 명령이 Express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그 명령의 중대성, 또 그게 얼마나 시급한지 몰랐어요.
그 경청하지 못한 대가가... 물고기 배 속이잖아요.
◑돌이켜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 본 요나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돌아갈 곳이죠. 주의 성전!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곳,
하나님을 덩치고 도망쳤던 그가,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격려를 다시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지점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돌아갈 곳은 하나님입니다.
요나는 '이제 나를 쫓아내지 마십시오. 나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애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에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받아들여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그 아버지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우리의 손을 그분은 잡아주십니다.
자격 없고 흠을 많고 실수투성이인 요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의 기도했던 그 부르짖는 요나의 기도를 응답하셨던 그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이 부르짖는 기도, 이 물고기 뱃속에서의 그 기도,
사방이 다 막혀 있고 하나님밖에 답이 없음을 알고
우리의 인생의 여호와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오늘 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를 배운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또 여러분 우리의 기도를 주님이 들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위기의 한국을 위해서도 여러분들 기도해 주시고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며 기도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울며 기도하시고
부르짖는 기도가 회복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 우리 함께 기도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