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8일 "다락방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 YouTube
4분40초~
◈다락방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행10:44~48 2025.01.08.
*성령님은 예루살렘 다락방 뿐만 아니라, 뜻밖의 장소인 가이사랴에,
의외의 사람인 이방인 고넬료에게도 부어지셨으며,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주제!
결국 교회와 성도 개개인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님을 지향하며 살아야 합니다...
..........................
사실 저는 어려서부터... 7~8살 철부지 였을 때,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를 때, 사람들이 '너는 커서 뭐가 될 거냐?' 그러면,
어른들한테 많이 세뇌를 당해서 그런지 '저는 목사가 될래요' 하고 큰 소리를 쳤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너는 꼭 목사 돼라. 너는 생긴 것도 목사 같이 생겼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이 먹으면서는, 제가 목사 되는 게 참 싫었습니다.
그래서 목사 되지 않고 다른 거 해보려고
나름대로 이런저런 노력을 제법 많이 했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원하는 거는, '목사가 안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어르고 달래고, 야단도 치시고,
여러 가지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이제 목사가 되도록 이끄신 건데,
그러면 제가 원하는 건 '목사가 안 되는' 거였는데,
목사가 됐으니까 '아, 내가 원하는 복을 못 받았구나...' 그건 아니죠.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복을, 제가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림을 받는 인생' ... 그게 정말로 복된 거죠.
◑도입 / 세상과 충돌하며 살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어려움
그래서 세상에 모든 것 하고,
그 속에 섞여 살면서 우리가 가지는 모든 생각과 판단들..
이런 것들 하고 막 뒤섞이면서
우리가 그 속에서 혼란을 겪을 때가 많이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이끄심, 하나님의 원리',
이제 그런 목표들을 향해서 살아가는 거죠.
여러분, 그런 삶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영적인 삶"이라고 부릅니다.
A W 토저 목사님이 여러 가지 책들을 쓰고, 이 시대의 예언자 라고 불리는 분인데,
우리 말로 번역된 책 가운데 <세상과 충돌하라> 그런 책이 있어요.
책 제목이 좀 도전적이지 않습니까? *원제목 TOZER SPEAKS TO STUDENTS
벌써 제목 속에 '세상과 충돌한다'는 것은, 세상과 잘 못 지내는 걸 말하는 거예요.
세상과 잘 지내는 사람, 세상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충돌 안 하죠.
충돌하지 않고, 아주 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텐데,
이 분은 '세상과 충돌하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 A W 토저 설교 모음
여러분! 세상과 충돌하는 이유는 뭘까요?
세상이 추구하는 어떤 가치관 하고,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가치관이 이게 방향이 다르다 보니까,
자꾸 부딪히고 충돌하는 겁니다.
근데 전혀 충돌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과 내 생각이 아주 잘 어울린다...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 이거는 완전히 세속화 된 걸 말하는 거죠.
완전히 세속화 된 사람은,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 거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다니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짐승이 너무 수가 많아져서
목초지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되니까, 서로 좀 떨어지게 됐잖아요.
그래서 롯이 택한 지역이 요단- 소돔 아닙니까?
소돔 성은 죄악의 상징인데, 롯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조카인데,
그러면 롯이 소돔 성에 들어가서 살 때, 굉장히 불편을 느껴야 되는 거죠.
'도저히 여기서 못 살겠다...' 그래서 거기서 뛰쳐 나오든지 그랬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롯은 소돔 성 사람들과 잘 어울린 것 같아요.
그래서 소돔 성문 곁에 롯이 앉아 있었어요.
고대 사회에 있어서 '성문'이라고 하는 곳은,
그 성의 유지들, 힘 있는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고,
그 성의 대소사를 거기서 다 결정하는 곳인데,
'롯이 성 문 (어귀)에 앉는 사람이 됐다'는 것은, 창19:1
롯이 그 성에 뿌리를 깊이 내렸고, 그 성에서 자리가 잡힌 인생을 살면서,
상당히 영향력을 미치는, 행세를 하는 사람이 됐다는 뜻인데,
롯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소돔 화'가 진행된 것을 말하는 거죠.
소돔은 세상의 상징이고, 롯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때,
거기서 불편을 느껴야 되는데... 롯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 속에서 그저 잘 어울리고, 또 딸 두 명을 이제 시집 보내기 위해서 예비 사위를
두 사람 정했는데, 이 예비 사위들도 소돔의 가치관이 꽉 차 있는 사람들이었죠.
천사(하나님의 사자) 들이 '이 성이 곧 유황불로 멸망 당할 것이다' 라고 했을 때,
롯도 사실은 심각하게 듣질 않은 것 같아요.
왜냐면 '하나님의 유황 불이 곧 임한다' 하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가족들과 함께 급히 탈출을 해야 되는데,
롯과 그의 가족들은 미적 미적 대고 있었어요. 시간을 끌면서...
워낙 다급하니까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들의 손목을 잡고 막 끌어내야 *창19:16
소돔 성을 떠나갈 정도로... 그렇게 그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어요.
롯이 그 예비 사위들을 만나서 '이 성이 곧 멸망한다' 라고 했을 때,
그 사위들도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그랬어요. *창19:14
그러니까 벌써 그 사위도 그런 사람들이고, 롯도 미적 미적 대면서
그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상당히 그 소돔에 오염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세상과 충돌하는 환경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힘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데서 옵니다!
자, 그런데 A W 토저 목사님은 '그렇게 살면 안 되고, 세상과 충돌해야 된다고'
그래서 그 책에서 '세상과 동행할 것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이제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하나 더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령님과 동행할 것인가?'
이렇게 물음표 두 개를 붙이고 있는 거죠.
'세상과 동행할 것인가, 아니면 성령님과 동행할 것인가?'
여러분, 세상과 동행하는 사람은 세상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잘 지냅니다.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의 타락한 문화 속에서 만족을 느끼고, 그 속에 어울리면서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세상과 충돌하게 돼 있어요.
세상이 여러 면에서 다 불편하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가치하고,
세상의 가치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기가 어려운 이유는,
몸이 아프고, 뭐 가난하고, 하는 일이 뜻대로 안 되고... 그런 이유들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얘기해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하고는 맞질 않는 거예요.
캐미가 안 맞는 것입니다.
맞지 않는 세상에 살려다 보니까, 이게 영적으로 고단한 수 밖에 없어요.
다 거짓을 남발하면서 사는데, 나는 정직하게 살아야 되니까, 그 자체가 괴로운 겁니다.
모두가 다 육체적인 쾌락을 따라 세상을 추구하는데,
나는 경건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니까, 그게 참 힘든 겁니다. 그 자체가!
그래서 여러분, 그리스도 인의 실존이라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거예요. 어려워요.
우리에게 천국이 소중하고 복된 것은, 단순히 천국은 죽음이 없는 곳이기 때문인 것만 아니라,
천국은 이 땅에서 존재하면서, 안과 밖에서 겪는 그런 실존적인 고통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즉 천국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정직하게 살려고 이 땅에서는 괴로움을 당하지만,
천국에서 그런 고통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그런 갈등과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는 참 자유가 있는 곳이고, 완전한 평화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을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우리가 이 땅에 머물러 사는 동안에는
그런 갈등을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저와 우리 성도님들은,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세상과 충돌하는 고통을 겪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자리매김하고,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걸 견뎌내는 게 사실은 기쁨이어야 돼요.
그게 괴로우면.. 우리에게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게 괴롭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거니까요.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도 괴롭지 않을 텐데,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괴로움도 기쁨이 되는 거예요.
'아, 내 속에 그런 갈등과 고통이 있는 걸 보니,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그래서 거기서 만족을 느끼고, 거기서 기쁨을 누리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그 성령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얻지 못하면, 이런 삶을 견뎌낼 수가 없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견딜 수가 없어요.
사실 1년 52주일, 그 외에도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이런 여러 모임에,
내 마음이 움직여서, '하나님의 집에 가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우리 속에서 우러나고,
또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곳에서도, 우리 마음이 부패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깊이 기도하면서, 성실한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우리 결심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비로소 그게 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 인은, 반드시 '성령의 사람' 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조선 시대 사람들은 영적 갈증을, 무속 신앙으로 해결했습니다
여러분 이조 5백 년 동안에는 유교사회 였어요.
유교는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윤리 체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가 생각할 때, 유교는 '종교'라고 말하기가 사실은 어려운 면이 많아요.
그냥 '인간 관계의 도리'를 가르치고. 여러 가지 질서, 국가 질서, 또 가정의 질서...
그런 것들을 많이 가르치긴 하지만, 거기에 어떤 영적인 그런 것들이 결여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이조 5백 년 동안에 그 유교를 신봉하고 있었던 조선 백성들 속에는
어떤 영적 갈망이 굉장히 많이 있었어요.
그럼 우리 조선 백성들의 그 영적 갈망을 뭐가 채워 줬습니까?
소위 전통적인 무속 신앙, 샤머니즘 이었어요.
무속 신앙은 뭐 굿도 하고, 점도 치고, 뭐 이렇게 신내림을 받았다 그러고,
그런 어떤 영적 세계에 이렇게 접함으로써, 그거를 채워 보려고 노력했던 게 우리 조상들이었죠.
가는 데마다 뭐 서낭당도 있고, 삼신 할매도 있고, 뭐 이런 게 다 있어서,
가서 빌고 했었죠.
근데 그게 이제 소위 말하는 '귀신 놀음'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이 있었어요.
어둠의 영에 지배 당하고요.
그래서 그게 기복심리와 연결되면서,
그렇게 뭘 갖다 바치고, 빌고 안 하면.. 큰 벌을 받고... 뭐 이런 식의 두려움,
그런 것들이 얼마나 우리 속에 많이 팽배해 있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가끔 텔레비전에 보면, 요즘은 그런 거 잘 안 하는데,
옛날에 우리나라 TV에서 많이 했던 게 '전설의 고향, 전설 따라...' 뭐 이런 거였어요.
거기 보면, 머리 풀은 여자가 하얀 옷 입고 나타나고...
그렇듯이 우리나라 민간 전례, 민속 문화, 그런 것 속에는
정말 귀신 놀음 그런 게 많이 있었어요. 그게 우리를 지배했던 거죠.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처음 오셔서 가만히 보니까
이 백성들 중에 좀 배웠다는 사람들은, 어떤 유교적인 교만에 사로잡혀서
그 어떤 통치 체계, 또 가정의 위계 질서, 그런 게 너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걸 보게 되었고,
일반 백성들은 얼마나 그 샤머니즘, 무속 신앙, 전례적인 애미니즘 같은
그런 이상한 미신에 쩔어서 살고 있는지...
그러면서 영적인 것에 짓눌려 있는지...
그러면서 현실 생활은, 돈 좀 있는 사람은 다 축첩하고, 도박하고,
그리고 뭐 술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이런 걸 보면서,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받았던 문화충격 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선교사님들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 편지 속에 적나라하게 많이 남아 있어요.
구한 말에 우리 조선 백성들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그래서 그분들은 '생활 개선 운동'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첩을 두면 안 된다.
도박을 하면 안 된다.
술을 마시지 말아야 된다.
담배를 피워가지고 아까운 돈을 그 담배값에 다 쓰면 안 되고,
몸을 해롭게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생활 개선 운동도 많이 했지만,
선교사님들이 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영적 해방 이었어요.
눌려 있는 영혼을 풀어주는 것이었어요.
그 영적인 흑암의 권세 아래 짓눌려 있던 그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
영적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것... 그게 복음 이었어요. 복음 외에는 없어요.
왜냐하면 복음은 예수님 이시고,
예수님은 만 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세를 무장 하면, 그 어떤 귀신도 꼼짝할 수 없는 거예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
이 영권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런 미신으로부터 다 자유를 얻는 거예요.
▲요즘은 그런 게 많이 없어졌지만, 제가 과거에 부산에 처음 목회하러 내려가니까
나이도 젊은 목사인데, 그때만 해도 부산 영도에는, 바닷가라서 그런지
하여튼 그런 귀신놀음 하는 게 많더라고요.
바닷가에 나가면, 뭐 용왕님에게 음식을 바치고...
근데 바친답시고 접시에 담아서 갖다 놓은 음식을 보니까
'내가 용왕이라도 화가 나지...' 그런 거 먹고 복을 줄 것 같지 않더라고요.
그런 형편 없는 걸 차려놓고, 막 북이나 징을 두들기고 하는데
하여튼 한 2백 미터, 2백 미터마다 하나씩 차려 놓고,
바닷가에 나가면 그런 사람들이 수두룩 했어요. 연초나 보름이 되면...
또 그걸 집에서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영도 산비탈은 길이 너무 좁고 가팔라서 차도 못 들어가고,
골목 골목 사이로 사람들이 간신히 걸어다니는데,
그런데 가보면, 대문 앞에다가, 접시에 뭐 생선 머리 이런 거 담아서 내어놓는데,
'귀신 보고 와서 먹고 가라' 그러는 거예요.
'우리 집에 들어와서 해 끼치지 말고, 문간에서 그거 먹고 가라'
하여튼 그런 미신이 많았어요.
그 다음에 또 거기서 목회하다 보니까, 종종 있었던 게 뭐냐 하면,
'목사님 아무개가 예수를 믿겠다고 해요.
근데 마음에 깨림칙한 게 있는데, 그걸 겁이 나서 못 버린다고 합니다'
뭐 이렇게 집에 모셔 놓은 게 많거든요. 신주 단지 같은 거.
그러면 제가 그 집에 가는 거죠.
그래서 신주 단지 같은 거 끄집어내서 깨뜨리고, 버리고...
(아마 부산이 일본과 가까워서, 일본 영향을 받아서 그런 민속 신앙이 생겼나 봐요.)
이제 그 다음 주부터는 그 집 식구들이 교회에 나오는데,
뭐 겁에 질려가지고 '아, 목사님 이렇게 다 버려도 우리가 괜찮겠느냐고'
'당연히 괜찮지요!'
하여튼 거기에 이렇게 짓눌려 사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냥 우리 몸이 교회에 오는 게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사탄의 영으로 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근데 그거는 어떻게 가능하냐 하면,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성령님 안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나는 꼭 방언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나는 그냥 조용히 예배드리고 가는...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고 싶어요.' 이런 사람도 다 성령의 사람이 돼야 되는 거예요.
무슨 광신적인 사람만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역사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고,
어둠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 해야 되는 것이에요.
◑본론 / 성령님이 의외의 장소인 가이사랴에,
의외의 인물인 이방인 고넬료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유대인이 언제나 주인공' 이라는 공식이 깨졌습니다)
여기 지금 본문에,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가셔서 말씀을 전하는데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행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세요. 고넬료는 원래 경건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도 많이 하고,
또 그가 기도도 드리는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셔서, 그에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대해라'
그래서 지금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청해 온 거 아닙니까.
이렇게 고넬료는 상당히 마음이 열린 사람이에요. 그 베드로를 초청해 왔어요.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더니
자기 친지 친구들을 다 모아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집에 척 들어오니까, 그 앞에 엎드려가지고 절을 했어요.
'하나님이 당신을 초청 하라고 해서 초청했는데, 참 잘 오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당신이 전해주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모여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그것만 해도 고넬료는 이미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베드로가 이제 쭉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걸 내가 알았다.
그리고 나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가라고 그래서 내가 왔다.
사실 우리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당신도 알지 않느냐? 근데 하나님께서 나를 가라고 하셔서 내가 지금 이렇게 왔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쭉 했어요. 특별히 십자가-부활 복음을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임하셨다는 거예요. 행10:44 ↑
우리가 생각할 때, 지금 베드로 사도가 오셔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하면,
그것만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렇게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성령님이 여기 고넬료의 집에 왜 임하시는 것일까요?
'뭐 꼭 성령님이 임하셔야 되나?'
'베드로가 와서 말씀을 전해 주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
굳이 뭐 성령님이 임하셔야만 했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걸 들을 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이때 여기에 성령님이 임하신 의미는 뭘까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죠.
1)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그 복음을 이해하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거는 굉장한 축복입니다.
우리가 모임 때마다 말씀을 전하고/ 듣고 할 때
그게 깨달아져서 여러분의 마음에 이해가 되시고
어떤 땐 감동돼서 나도 모르게 '아멘!' 할 때... 그게 굉장한 축복이에요.
지금 우리가 여기서 나누고 있는 이 이야기를,
저 명동 길바닥에 가서 한다 그러면, 누가 이해 하겠어요?
그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모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전혀 모르는 거를, 우리는 오늘 저녁에 교회에 앉아서
귀를 열어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묵상도 하고, 잘 듣고 있으면,
내게 이 말씀이 이해가 돼서, 내 마음 속에 정리가 되고 있잖아요.
이게 굉장한 복입니다. 이걸 어떻게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냐 하면,
성령님을 통해서 지금 깨닥게 해주시는 거예요. 성령님은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2) 두 번째로, 성령님은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시는 것만 아니라,
확신 가운데 믿게 해주시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해하는 것과 믿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해를 했어도, 믿지는 못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인 다운 능력 있는 신앙 생활은,
복음과 성경말씀을 이해만 해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그게 믿어져야 되는 거예요.
확실히 믿어 질 때, 거기서 능력 있는 신앙생활이 가능해요.
성령님은, 그걸 믿게 해주시는 영이에요.
그래서 고넬료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내리신 거예요.
마르틴 루터는, '성도의 마음 속에 믿음이 어떻게 생기느냐?' 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믿음이 생긴다... 이렇게 말했어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 성령님의 역사 ... 그러면 믿음이 생긴다...고 했어요.
지금 여기 본문에, 베드로를 통해 말씀이 전해지고 있어요.
근데 거기에 성령님이 임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고넬료와 그 가족들의 마음 속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에요.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3) 세 번째로,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로 하여금
'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하는 그들의 정체성을
그들이 확신하도록 만들어주는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행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지금 누가 방언을 말합니까?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여 있는 이방인들이.. 방언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와 같이 온 사람들이 깜짝 놀랐어요.
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욥바에서부터 베드로를 따라 온 유대인 신자들이,
그 현상을 보고 깜짝 놀란 거예요.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아니, 이 사람들은 로마 사람들인데, 로마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시는구나!'
하며 깜짝 놀랐는데, 거기에다 더 놀란 것은,
이방 사람들이 방언을 말한다는 거예요.
행2장에 보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실 때,
거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다 있었잖아요. 120명이 모여 있었는데,
그때 불같이 바람 같이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을 때 나타난
첫 번째 현상이 뭐였냐면... 방언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순절에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했잖아요. 설교 하기 전에, 제자들이 방언하는 걸 보고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 했을 때,
베드로는 '우리가 술 취한 게 아닙니다. 요엘서에 예언 된 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한 겁니다.' 그러면서 설교를 시작했잖아요.
그건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원래부터 따라다녔던 사람들이니까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아니 여기 로마사람들은, 언제 예수님을 보길 했어요? 뭐 예수님을 알기나 해요?
그런데도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에게, 성령님이 임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방언을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거예요.
그럼 여러분, 놀라기는 베드로를 따라온 사람들만 놀랐을까요?
베드로도 놀랐고, 베드로를 따라온 사람들도 놀랐고...
아마 가장 놀란 건 고넬료와 그 로마 사람들이었을 것 같아요.
갑자기 자기들의 입에서 방언이 쏟아져 나왔을 때,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아니, 우리가 지금 왜 이렇게 됐을까?'
'도대체 지금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당사자들은 더 놀랐을 거예요.
근데 그 성령님의 역사를 통한, 그런 방언 같은 은사가 그들에게 임한 것은,
그들에게 뭘 심어주는 겁니까?
'아, 오늘부터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사람이 됐구나!
그동안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나도 흠모해서, 기도도 했었고, 그리고 구제도 했었고,
그리고 또 베드로를 초청해 오라는 말씀을 듣고, 초청도 했는데,
우리에게도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다니...
하나님께서 저 유대인들의 하나님만 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시는구나!
나 고넬료도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러니니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어떤 상황, 어디에 가 있어도
'나는 하나님의 사람 임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것이에요.
'성령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어느 상황에서나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가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여러분, 이 성령의 임하시는 그 모습이 어떠했느냐 하면,
우리들은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물 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 성령이 임하신다...
이렇게 순서를 정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성령님의 역사는 그런 게 아니에요.
성령님은 자유하시는 영이세요. 이 사람들이 뭐 세례 받았나요?
세례 같은 거 아직 안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는 순간, 성령님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난 다음에, 가서 물 세례를 주는 거예요.
10: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성령의 역사를 먼저 경험하고 나서, 그 다음에 물 세례를 받은 거예요.
이건 정해진 공식이 없어요.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오래 다니고, 이미 유아세례 받고, 또 입교도 하고,
뭐 교회에서 자라나도...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를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어요.
그러다가 뒤늦게 주님을, 소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표현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기 본문의 이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자마자, 성령님께 사로잡혔고, 그리고는 세례를 받은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 각자를 다루시는 패턴은,
어떤 틀에, 공식에 갇혀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은 자유하는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지 알 수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에요. *주제
성령의 사람이 되는 방식, 패턴, 공식, 경로 ... 이런 것은 천차만별 각자가 달라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반드시 성령을 받은 '성령의 사람'이 돼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럼 '성령의 사람'이 몇 월 며칠 몇 시에서부터 됐는지 알 수 있나요?
아는 사람도 있죠. 아주 어떤 특별한 싸인과 더불어서 성령님께 사로잡히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가 믿어지면서 고백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을, 뒤늦게 느끼는 사람도 있어요.
'아, 내가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는구나'
뭐 그런 게, 다른 사람처럼 극적 이지 않다고 해서, 불안해 하거나 그럴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있는 것만 해도
이미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이에요.
이미 우리 속에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에요.
그러나 하여튼 중요한 것은, '성령의 사람'이 돼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럼 여러분, 만약에 이렇게 물어본다고 합시다.
그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데
그 2장 전에, 예수님이 승천하고 나서, 아직 성령님이 임하시기 전에
이런 상상을 한번 해봅시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어 보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야, 이제 너희들이 따르던 예수님도 하늘로 승천했단다.
그리고 너희들만 남았는데, 내가 이제 너희에게 큰 선물을 주려고 한다.'
'그 선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얘기하지 않았니?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니?
그래서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건데,
성령님을 보내주면, 어디다 보내주는 게 좋겠어?
네가 원하는 장소에, 내가 보내줄 게!'
만약에 하나님이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그럼 베드로가 제자들하고 모여가지고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하는데, 어디로 보내달라고 할까?'
그들이 의견을 모았다고 하면, 어디가 떠올랐을까요?
몇 군데 후보지가 있었을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이 좋겠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부활의 현장.. 거기가 좋겠어 라든지
-팔복을 말씀하신 갈릴리 그 동산이 좋겠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도 있겠고, 그 중에 하나가 다락방 이겠죠.
'다락 방이 좋겠어.. 다락방에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우리에게 만찬을 나눠주지 않았느냐? 그 날 밤에 우리가 거기 있었는데
얼마나 그 밤이 잊을 수 없는 밤이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 발을 씻겨 주셨잖아!'
그래서 다들 '다락방이 좋겠어!' 이렇게 의견이 수렴되어서,
베드로가 하나님께 '하나님, 우리가 의견을 모았는데요. 다락방이 좋겠습니다'
그래가지고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셨나요? 그런 게 아니죠.
그런데도 여러분, 그 다락방에 대한.. 뭐라 그럴까요? 로망이라고 할까? 그런 게 있어요.
이스라엘에 성지순례 다녀오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는데,
과거에 이스라엘에 가 보면, 꼭 가는 코스가
소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알려진 거기를 꼭 가 보거든요.
근데 거기가 정말 역사적인 장소인 '마가의 다락방'인지, 그거는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도 하여튼 가이드가 '여기가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면서 설명하면,
벌써 같이 간 성도들의 얼굴에 숙연한 느낌이 들고, 뭔가 좀 달라지는 것 같이 느껴져요.
거기서 기도회를 하면 '야~ 여기가 성만찬을 하신 자리이고,
여기에 성령님이 바로 임하셨구나! 베드로가 여기에 앉았을까?'
뭐 이러면서 뭔가 거기 그 방에 들어간 성도들의 얼굴이 평소와 달라요.
그러면 성령님이 거기만 임하셨습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오늘 설교 제목을 "다락방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마가요한의 다락방에만 임하시는 게 아니에요.
가이사랴의 이방인의 집 고넬료의 집에도 임하시는 거예요.
나아가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모든 곳에, 이미 임하여 계시고
그속에서도 역사 하시고, 함께 하시는 거예요.
오늘 예배를 마치시고 돌아가는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영은 이미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내가 내일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내가 있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영혼 역사 하십니다.
관건은 뭐냐 하면, 아직까지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는데
'빨리 내게 좀 오시라고 해야 되겠다' 그런 개념이 아니고,
이미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성령님이 임하셔서,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데,
내가 그걸 자각하고, 성령님의 임재를 깨닫고,
성령님께 나를 의탁하고, 성령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면서,
그 성령님의 모든 인도에 나를 맡길 수 있는지... 그게 문제일 뿐이지,
이미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걸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하면서,
바꾸어 말하면, 성령님께 나를 더 온전히 드리기 기도하면서
성령님께서 감동하시는 대로,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고,
A W 토저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세상과 충돌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성령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된다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심으로써,
고넬료의 식구들이 복음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성령님의 오심을 통해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죠.
'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이런 충만한 그리스도 인의 정체성, 이게 그들 속에 생기게 된 것이죠.
그 다음부터 고넬료는, 로마인 백부장 으로서의 정체성 보다,
'하나님의 사람, 구원받은 성도,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 인' 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더 강했을 것입니다 .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 저런 신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 모든 신분 이전에, 가장 근원적인 신분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에요.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걸어가고 있는 것이고,
성령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어려운 시험을 당했을 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래서 세상에 더럽고 타락한 가치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으로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가치관 속에서, 아버지 역할 잘하고, 어머니 역할 잘하고,
남편, 아내로서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대한민국 국민 중에 한 사람으로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나 이 땅의 모든 신분, 이 땅의 소유, 이 땅의 삶, 이거는 다 제한(유한)된 것이고,
우리의 영원한 나라는, 저 하늘에 있는 천국 임을 기억하면서,
이 땅을 나그네처럼 걸어서, 마치 집에 돌아가는 사람처럼
우리는 순례자로 살다가, 주님의 품에 안기 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이,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으실 때, 예배할 때, 기도할 때, 친구를 만날 때, 회사 업무를 할 때,
무슨 일을 하던지... 성령님 안에 거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가정에 임하셔서 역사하신 성령님이
우리 교회 가운데도 임하시는 줄 믿고
우리 성도 한 분, 한 분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실 때,
우리 모두 승리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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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호를 수신하는 5가지 채널 (펀 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대화하는 채널은 5가지이다.
1) 마음의 채널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주님 앞에 내 마음을 열면, 그 분은 내 마음의 생각을 다스려주신다.
오늘 아침도, 내 마음을 누가 움직이는지
‘내 자아’가 그것을 지배하는지, 아니면 ‘주님’이 그것을 다스리시는지
우리는 세밀하게 분변해야 한다.
종종 낙심, 한숨, 불만, 부정적 생각이 내 마음에 가득할 때는
‘내 자아, 옛 사람’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지지직거리는 채널을 속히 다시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시도록...
‘주님의 생각’을 내 마음에 넣어주시고,
‘주님의 눈’으로 내가 타인과 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내 자존심이 건드려질 때,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지 않도록,
내 마음이 혼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아침마다 나는 <마음의 채널>을 잘 조정해야 한다.
2) 의지의 채널
하나님은 나의 의지에도 영향을 미치신다.
내 의지가 약하다는 것은,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사실이다.
지금까지 내가 사명자의 길을 계속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주님이 나의 의지를 도와주셔야만 했었다.
오늘 하루도 내 의지가 약하여, 유혹에 쉽게 굴복하지 않도록
내 의지로 인해 실패하지 않도록,
주님이 내 의지를 굳게 붙들어 주셔서,
주님이 시키신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오늘 아침 나는, 내 의지를 주께 의탁하는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주님이 내 의지를 다스려 주시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성령과 은혜가 내 의지에 공급되어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가 되기를!
3) 감정의 채널
하나님은 나의 감정을 움직이신다. *로봇이라는 뜻은 아님, 신호를 주신다는 뜻
그런데 나는 너무 ‘무감각’할 때가 많다.
세상의 필요에 대해, 내 이웃의 필요에 대해
내 표정, 내 말투, 내 몸짓이 ‘무관심’으로 습관화되어 버렸다.
‘슬픈 감정’이 습관화되어버릴 수도 있고,
‘분노, 미움의 감정’이 습관화되어버릴 수도 있다.
주님께서 내 감정을 잘 만져주셔서
오늘도 ‘평안’의 감정을 내게 주시도록 기도드린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만나도, 덩달아 흥분하지 아니하고,
차분히 ‘평안한 감정’으로 대처하게 되기를!
4) 내적 음성의 채널 inner voice
사실 우리는 ‘내적 음성’과 ‘자기 상상력’을 잘 구분해야 하는데,
때때로 헛다리짚을 때도 있지만,
주님은 ‘내적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사도행전에 특히 ‘성령이 지시하셨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는데, 행8:29등
‘직접 음성’보다는 ‘내적 음성’으로 지시하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내적 음성을 듣고, 거기에 순종해서 실행에 옮길 때,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빼는 것이 좋다.
그냥 내적 음성을 듣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셨습니다!’ 말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다가는
‘광신자’소리를 듣게 되고, 덕도 못 세운다. 또한 '자기 상상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암시’나 ‘자기 상상력’의 위험 때문에
‘내적 음성’까지 몽땅 도매금으로 폐기처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내적 음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어쨌든 자기의 ‘내적 음성’에 민감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 예민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은 성경을 읽거나 개인기도시간에 주로 ‘내적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기도는 ‘쌍방 대화’이지, ‘일방적 독백’이 아니지 않는가!
출근 길, 집을 걸어 나오면서
내가 서울 화곡동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천국의 뜨락을 걷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발밑에서 천국의 향내가 피어올랐다.
내 안에 주님 계시니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것은 천국이 아닌가!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예수를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5) 기억력의 채널
하나님은 나의 기억력에 영향을 미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과거에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내게 보여주신 은혜, 사랑, 선하심, 축복 등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기억을 못하면... 현실에 쉽게 좌절하거나 불평하게 된다.
또한 과거의 실수나 잘못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그 잘못을 다시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기억력의 채널이 살아있을 때 가능하다.
이상 5개의 안테나, 혹은 채널에 먼지가 깨끗이 닦여 있어서,
위로부터 오는 메시지와 성령을 잘 수신할 수 있어야 하겠다.
위 나의 다섯 영역을 주님이 다스려 주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 옛사람이 나를 다스리도록 하면... 내 삶에 혼란만 가중된다.
< J. 포웰「마음의 계절」pp.171~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