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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과 말씀

LNCK 2025. 2. 9.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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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7] 안식과 말씀 (히4:9-4:11)│2025.1.26  - YouTube

안식과 말씀 (히브리서 17)           히4:9~11          2025.01.26.     교정예정

히브리서 4:9~11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에 중간중간에 경고의 메시지들이 5번 삽입되어 있습니다.    주1)
그 중에 첫 번째 경고가, 우리가 지난 살펴봤던 '흘러 떠내러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2:1

오늘 본문이 두 번째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까 조심해라'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는 것이 두 번째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지난 시간 복습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봤죠. 세 가지 말씀을 통해서 안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는 창세기 기록되어 있는 안식의 원형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여호수어서에 기록되어 있는 안식의 예표에 대한 것이고, 
-세 번째는 시95편에 기록된 안식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1.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안식의 원형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제7일째는 안식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7일에 아무것도 안 하셨다는 의미보다는 
'안식이 무엇인지를 창조하셨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입니다. 

이 안식의 원형은 뭐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래서 더 이상 뺄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다... 
그렇게 완전하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쉬셨다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샤밧' 입니다. 
'샤밧'은 뭐냐 하면 '멈추다' 이런 뜻이거든요. 일을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의 안식은 여기에 기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 
그 인식에 동의하는 것이, 우리의 안식의 근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그래서 더 뺄 것도, 더 할 것도 없어' 
그러면 우리도 거기에 동의하는 거예요. 
'맞습니다. 아멘. 우리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쉬는 거예요. 
일을 멈추는 것이 안식이라는 거예요. 

반대로 하나님의 인식에 동의하지 못하면, 우리는 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남자로 만드셨는데, 내가 동의가 안 돼요. 

하나님께서는 '네가 남자인 게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동의가 안 됩니다. 그래서 여자로... 트랜스젠더를 한다든지... 뭐 쉬지 못하는 거죠. 
뭔가를 계속하는 거죠. 

또 하나님께서 내 코를 이렇게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셨는데, 
나는 보기에 안 좋아요. 조금 더 높아야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이제 쉬지 못하고, 돈을 쓰고, 코에 칼을 대고...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일을 멈춘다'고 하는 건 뭐냐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한 것에 
그냥 '아멘!' 하고 그 인식을 동의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멈출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의 원형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일을 안 하는 것'을 안식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지요.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왜 안식일을 범합니까? (일합니까?)' 
그랬더니 예수께서는 뭐라고 그러세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까 나도 일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안식은 뭐냐 하면, 단순히 일을 멈추는 게 안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멈추시면 나도 멈추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면 나도 일하시고...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럼 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거예요. 
그게 안식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요.' 
38년이나 병자로 누워있는 게 좋지 않아요. 

그러면 단순히 일을 멈추고 있는 게 안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을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도록 하는 게 (병을 고쳐주는 게)  안식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안식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럼 나도 아멘! 
'좋지 않았더라' 그러면 좋게 될 때까지 일하는 것이고, 그것이 안식입니다. 

▲2. 둘째, 여호수와의 안식은, 안식에는 장소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각 사람을 위해서 준비하신 안식의 땅, 안식의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야 안식이 있다는 거예요. 

아무데서나 안식을 달란다고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안식을 달라고 해도, 
광야에 있는 한 안식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머물 집도 없고, 마실 물도 없고... 그런데 무슨 안식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광야에 있으면, 아무리 안식을 구해도 안식이 주어지지 않고요.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야, 거기서 안식이 주어지는 거죠. 

그래서 '안식은 정해놓은 땅이 있다'는 거예요. 그 땅은 각 사람마다 다르죠.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그 사람을 위해서 준비해놓으신 땅이 있어요. 

'얘는 여기서 이런 일을 하면서 살도록 내가 디자인해 놓았다' 하는 계획이 있으시다는 거에요. 
데스티니죠. 

그러면 거기에 가야 안식이 있는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 창조주가 여기 살도록 만들어놨는데, 
저기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거기 안식이 있겠습니까? 없죠.

창조주가 디자인해 놓으신 곳에 가야, 거기에 안식이 있는 거죠. 
그래서 안식은 포터블이 아닙니다. 정해진 안식의 땅이 있어요. 
약속의 자리가 있단 말이에요. 

그것이 직분이 될 수도 있고, 사명이 될 수도 있고, 정말 물리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지만, 
하여간 거기 가야 샬롬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는 안식의 완성이에요. 
이 땅에서 우리가 안식을 누리긴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완전한 안식은 이 땅에서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갈 때, 본향에 들어갈 때 천국이 있죠. 
천국에 마련해 놓으신 완전한 안식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소망할 때, 우리가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 천국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교회에서 천국을 강조하면, 현실 도피적인 신앙이 되지 않습니까?' 라고 오해하는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천국을 강조하지 않았을 때,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했고요. 
천국을 강조하지 않으면, 교회가 돈 때문에 부패하고, 권력 때문에 타락하고 이랬고요. 
천국을 강조했을 때, 오히려 이 땅의 모든 유혹과 모든 역경을 이기면서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이것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강조는, 우리를 끝까지 가게 해주는 힘이고 동력이 되지, 
우리를 현실 도피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끝까지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까지 '복습'이었고요.

오늘은  안식에 대한 몇 가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3장과 4장에서 그 세 가지를 중심으로 얘기하면서 
중간중간 안식에 대한 몇 가지를 첨부합니다. 

세 가지 정도를 첨부하는데, 이 세 가지 첨부된 메시지를 오늘 살펴보면서 
안식에 대한 이야기를 종합하면서 완성해 보려고 합니다. 

◑1. 첫째는 '안식의 장소'에 대한 것입니다. 

안식이 주어진 장소가 있다고 했죠. 안식의 땅이 있다고 했습니다. 
태초부터 나를 계획하신 곳, 약속의 자리, 사명의 자리가 있는데, 
그곳이 안식의 땅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곳이 안식의 땅인 이유는, 예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안식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곳에 가야, 우리가 안식을 누리는가? 
예수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를 만날 장소를 미리 지정해 놓으셨어요. 
'이곳에서 내가 그를 만나야지...'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디자인하고 계획을 해놓으셨는데, 
거기 벗어나서 내가 저기 멀리 엉뚱한데 가 있으면,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겠어요? 
상식적으로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원래 디자인하시고 원하신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에요. 
그런데 거기서 멀리 떨어져서 딴짓하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그건 뭔가 엇박자요, 
자기 데스티니를 벗어나서 난리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장소는 정해져 있어요. 
그곳에서 주님은 태초부터 우리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의 장소, 약속의 장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로 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곳이 안식의 장소인 이유는, 예수께서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안식의 땅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예수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찬송과 가사에도 있죠.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본질은 뭐냐 하면, 
이게 본향이고 안식을 의미하는 건데, 
예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곳이라는 거예요. 그곳이 안식의 장소라는 거예요. 
나의 데스티니가 되는 곳이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죠. 예수께로 오라고 그러셨어요. 왜요? 
'내 Jesus 가 안식의 장소니까, 내게로 오면, 내 안에서 쉴 거야' 이 얘기를 하시는 거죠. 아멘! 
그렇기에 우리가 '안식의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께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예수께 오라고 했어요. 

 

여러분, 인생에는 여러분, 수고가 있습니다. 
땀 흘리고 수고하지 않으면, 인생은 유지되지가 않아요. 
이게 참 슬프지만 죄의 결과입니다. 

죄를 짓고 나니까 아담한테 뭐라고 했냐면 '땀 흘리고 수고해야 먹고 살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땀 흘리고 수고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유지되지 않아요. 

금수저로 태어나거나, 재벌 2세로 태어난 사람들은 수고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안 그래요.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재벌 2세들은 더 근심이 많고, 더 수고를 많이 합니다. 왜요? 유지를 해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은 뭔가 수고가 계속 들어가야 돼요. 
정말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것' 히2:15 
그게 우리 인생이라는 거예요. 하기 싫어도 해야 되고... 그게 종이죠. 

그런 우리 인생을 향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니까 인생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를,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 이 말씀을 피부로 경험하는 날, 삶으로 체험하는 날이 오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추건합니다. 

또한 인생에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어떤 짐은 너무 무거워서, 일어설 수도 없는 그런 짐이 있어요. 

제가 아주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느 장로님이 계셨는데, 
이 장로님은 큰 따님이 중증 정신지체 장애를 안고 태어나셨어요. 
아마 제가 본 사람 중에는 가장 중증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도 한 마디도 못하고, 걸어 다니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장로님 내외 두 분이, 자신의 인생을 모두 포기하고, 
그 딸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십니다. 
따님이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병원에서 그랬는데, 50세 넘게 사셨어요. 

따님이 저하고 동갑인데, 50세 넘게 사셨어요. 
그러니까 이 장로님 내외는, 당신의 인생의 50년 이상을 
그 따님한테 그냥 고스란히 드린 거죠. 무거운 인생의 짐이죠... 
아마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었을 것입니다. 도무지 정상적인 생활이 안 되는 거죠. 

잠시라도 가만 놔두면, 그 따님이 혼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24시간을 붙어 있어야 되는데, 그거를 50년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인생이 송두리째 없어진 거죠. 
그 인생이 송두리째 없어진... 정말 무거운 짐이었어요. 

그럼에도 장로님 내외분들의 영혼이 무너지지 않고, 
더욱더 그 영혼이 영롱하게 빛났던 것은...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안에 안식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이분들은 정말 놀라운 인생을 사셨습니다. 
지금은 소천하셨는데, 생전에 정말 놀라운 인생을 사셨어요. 
낙심하고, 무너지고, 지치고... 한 번도 그런 거 발견한 적이 없고요. 

그냥 날마다...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셨어요.
나중에 노쇠하셔서 거동이 불편해지셨어도, 
그 영혼은 그냥 또릿또릿 영롱하게 빛나시면서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무너진 걸 본 적이 없어요. 장로님도 그렇고 권사님도 그렇고... 

맞아요. 모든 인생에는 무거운 짐이 있어요. 
하지만 예수께서는 뭐라고 그러셨냐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다 내게로 오라. 내 안에 안식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안식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무거운 짐이 있어도, 그 안에서 무너지지 않고 영롱하게 살 수 있는... 
이게 여러분, 예수 안에 있는 능력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이 '예수 안에' 모든 안식의 축복들을 다 마련해 놓으셨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짓자들은 누구든지 오라는 거에요. 
그럼 그 안에서 쉬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마련해 놓으신 안식의 축복들이 무엇인지, 성경을 좀 찾아 봅시다. 
예수 안에 죄사함과 해방을 마련해 놓으셨어요.

또한 예수 안에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이 있습니다....     주2) 

 

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는 치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세요. 

다음 날 고치거나, 그 전날 고쳐도 되는데, 굳이 안식일 날 고치십니다. 
왜냐하면 안식이 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거죠.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행하셨던 사역의 많은 부분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거였어요. 치유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문등병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치유하십니다. 혈류증을 고치시고, 중풍병과 손마른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 안에는 항상 치유가 있었어요. 

왜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안식은,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게 아니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거라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병 때문에 아픈데, 안식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겠습니까? 
재정 때문에 지금 너무너무 쫓겨 다니고 있는데, 빚쟁이들이 쫓아다니는데 
안식을 누릴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안식은, 그냥 말로만 주시는 안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안식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실질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안에 있는 이 실질적인 안식들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에 고통이 있으십니까? 예수께로 나가십시오. 
긍휼하심을 입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여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십시오. 
예수 안에 있는 안식, 그 치유와 회복이 여러분 것이 될 거예요. 할렐루야! 

◑2. 안식에 관한 두 번째 메시지는 "믿음"에 대한 거예요. 

이것은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인데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맞아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위해서, 예수 안에 안식을 준비해 놓으셨어요. 
그런데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 

3: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그러니까 '안식'에 못 들어올 사람들이 있는데, 누가 못 들어오냐면 
결론적으로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은 들어올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뭐냐면, 지금 여호수아 때 안식에 대한 걸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여호수와 때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잖아요. 

또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호렙산의 불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그런데 왜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 실패했습니까?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게 문제였다는 거예요. 말씀을 듣기는 다 들었어요.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에요. 
말씀을 잘 알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로 얘기하면, 크리스찬이었고,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고, 
말씀도 잘 알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얘기하냐면 
'들은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못 들어갔다는 거예요. 

여러분, 심각하게 들어야 될 메시지입니다. 심각하게 들어야 될 메시지! 
여기 정확히 뭐라고 했냐면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래요. 
불신자들한테 하는 얘기가 아닌 거죠. 그들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래요. 

저나 여러분이 어떤 사람입니까?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정확히 우리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기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 얘기가 아니라요. 

여호수아 때 사람들 그들도, 우리처럼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인데 
'들은 바 그 복음의 말씀이 유익하지 못했대요.' 

그러니까 말씀이 하나도 그들에게 유익함을 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뭐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두 번째 대지의 '안식'은 뭐냐 하면, 
마지막에 들어갈 안식, 그러니까 본향, 천국을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구원받는 것에, 
아주 쉽게 얘기하면 천국 돌아가는 것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러냐면 '듣는 자가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래요. 4:2
이건 여러분, 무겁게 들어야 될 말씀 아닙니까? 아주 무겁게 들어야 될 말씀입니다.

말씀은, 안식의 땅이 어딘지를 알려주는 지도 같고, 매뉴얼 같아요. 
그런데 예를 들면, 
요리 매뉴얼이 있다고 해서, 요리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매뉴얼(요리책) 갖고 있다고 해서, 여러분 요리를 해서 바로 먹을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매뉴얼대로 요리를 만들어야죠. 그래야 요리를 먹게 되는 거죠. 

지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가 있으면 어디로 가야 된다고 알려주긴 해요. 
그런데 그렇다고 저절로 거기에 가 있는 건 아니에요. 
지도대로 따라서 움직여야, 거기에 가 있는 거죠. 

말씀이 정확히 그렇다는 거예요. 
말씀은 우리를 안식으로 인도하는 지도이고, 요리할 때 매뉴얼이에요. 

말씀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으로, 
영원한 천국으로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도이고, 매뉴얼이지만, 
그거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집에 성경책 다 가지고 있잖아요)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매뉴얼이 있어도, 
요리하지 않으면.. 요리는 생기지 않는 거고요. 

아무리 지도가 있어도, 걸어서 가지 않으면, 거리로 못 들어가는 것처럼, 
말씀을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알고 있어도, 
그것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즉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사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이고 당연한 얘기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우리가 듣고, 알고, 믿는다고 얘기를 해도 
그것이 믿음과 결부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의 안식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이건 아주 무서운 경고입니다. 아주 무서운 경고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순종을 의미합니다. 말씀대로 따라서 순종한다는 거예요.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오히려 여러분, 남의 이야기로 들으시면 안 됩니다. 
복음을 들은 우리 얘기거든요.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4:2

'너희가 두려워해야 되는데,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지만, 
너희 중에 못 들어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라는 거예요. 

불신자들 얘기가 아니에요. 복음을 들은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을 향해서 지금 하는 얘기입니다. 

안식의 약속이 남아있고, 너희 구원의 약속이 남아있고, 천국의 약속이 남아있지만.. 
(*입학은 했는데, 아직 졸업은 안 한 상태)
너희는 두려워할지니 '너희 중에 못 들어갈 사람도 있을 거야'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입학은 했는데, 졸업을 못 할 사람도 있다는 거죠. 중퇴, 중도탈락)

구원에 대해서 여러분, 성경은 그렇게 쉽게 얘기하지 않아요. 
생각보다 어렵게 얘기해요. 

'아니 목사님, 그래도 바울의 복음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입학은 쉬워요. 누구에게나 넓게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졸업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의 복음도 쉽지 않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했냐면, 로마서 7장에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리오?' 

바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정말 노력하고 노력하고, 힘쓰고 힘썼는데 
안되더라는 얘기잖아요. 
정말 순종하려고 애를 쓰고 애를 썼는데, 너무너무 안되니까 
'미치겠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그래서 '죽겠습니다. 내가 이거 안 되는군요'
그런데 보니까 뭐가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는 거죠. 

그래서 이 때 '주여, 은혜로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라고 얘기했을 때,  롬10:17
그 부르는 거는 '예수님 믿습니다' 하는 부름이 아니에요. 

정말 죽을똥 살똥 고민하고 고민하고, 힘쓰고 애쓰며 
'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막 그러다가 
'주여, (제 힘으로는 안 되는군요) 은혜로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게 '부르는' 거예요.

바울도 구원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거예요. 

본문에서 구원에 대한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뭐라고 얘기하냐면, 
'들은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기 때문'이래요. 4:2
결국 들은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위 구절은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것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거고요. 
'순종하지 않은 것을 보니까.. 믿지 않았기 때문'이래요. 
(*생각으로는 믿었는데, 진짜 믿지는 않았던 거죠)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게 뭐라는 거예요? 순종이라는 거죠. 
그래서 믿음, 순종, 안식에 들어가는 구원, 
이것을 다 같은 단어로 취급합니다. 이게 상당히 무거운 말씀이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을 살리라' 롬1:17
그래서 우리가 '아멘!' 그러고 믿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이 믿음이,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가벼운 믿음이 아닌 거예요. 

우리는 '믿음'이라는 걸, 쉽게 '지적인 동의'로 생각을 해요. 
'나는 창조론을 믿어, 나는 예수이 하나님이신 것은 믿어, 난 구원에 이르렀네...' 
이렇게 쉽게 생각을 하는데, 

지금 히브리서 성경을 깊게 읽어보면, 이 '믿음'의 무게가 좀 달라요. 생각보다 무거워요.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건 맞아요.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순종하지 않은 것을 보니까 믿지 않았대요. 
그러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뭐를 전제로 한다는 거예요? 
순종을 전제로 한다.는 거예요. 
  *지(지적 동의), 정(뜨거움), 의(순종)의 영역을 모두 포함하는 집합체가 '믿음'인 거죠.

우리가 믿음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진짜 믿으면 움직인다는 거예요. *순종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저기 앞에 이마트가 있어요. 거기서 정말 파격적인 97% 세일을 해요. 
이걸 정말 믿으면, 쇼핑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당연히 가죠. 정말 믿으면, 액션이 따라가게끔 되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쓸모 없는 물건이 아니고, 최신 500만 원짜리 냉장고를 
95% 세일을 해서 25만 원에 판대요. 그러면 여러분은 장보러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대부분 갈 거예요. 믿으니까요!

그러니까 '믿는다'고 하는 건 뭐냐면, 행동, 액션이 따라오게 돼 있다는 거예요. 
진짜로 믿는데 안 갈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고 했어요. 
정말 믿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순종하지 않는 걸 보니까 믿음이 없는 거네'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3:18~19

'진짜 믿는다는데 어떻게 순종을 안 하지?' 
히브리서 기자는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4:2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의 행위들이 같이 따라온다는 거예요. 

4:2절을 다시 봅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여기서 이제 결부시키다.의 한라어를 보면 '신케라너미' 라는데 
이게 '섞다., 결합하다, mix, unite'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믿음과 결합시킨다'고 하는 건 뭐냐?
'말씀을 삶하고 섞는다'는 거예요. 

말씀과 삶이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은 말씀이고, 내가 사는 건 삶이고... 이게 아니라 
말씀과 삶을 섞어서 비빔밥을 만드는 거예요. 
(*신앙은 신앙이고, 사업은 사업이다 ... 이런 게 아니라는 거죠)

그게 믿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을 들으셨잖아요. 
'끼니'(큐티교재 인듯)를 통해서 말씀을 읽기도 하고, 설교를 듣기도 하고... 

그러면 그 다음에 고민하셔야 될 것은 
'이 말씀을 내 삶과 어떻게 섞을까?, 내가 어떻게 비빔밥을 만들까?' 
이것을 고민하셔야 돼요. 

그러니까 말씀이 삶과 섞일 때만 유익이 있어요. 
말씀이 삶과 섞일 때만 유익이 있고요. 그게 믿음이에요. 

말씀과 믿음이 결부될 때, 4:2
즉 말씀과 삶이 섞일 때,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안식(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거예요. 4:1 

여러분,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도 말이에요., 
여러분이 성경말씀만 전해가지고 ... 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요. 
우리 삶과 섞인 말씀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알게 됩니다. 

세상에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의 맛을 보는가?  (하나님을 아는가?) 
매뉴얼(성경)만 가지고 맛보는 게 아니에요. 

성경은 매뉴얼이라고 그랬죠. 그냥 매뉴얼 들이댄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매뉴얼을 제시하되, 그 매뉴얼대로 사는 우리 삶을 동시에 보여줘야 된다는 거죠.
'아~ 저 사람을 보니까, 나도 하나님을 알고 싶어, 믿고 싶어!' 한다는 거죠.

말로만 전도해서는 안 되고, 삶으로 전도해야 된다는 거죠.
이런 것을 '존재론적인 전도(혹은 선교)'라고 합니다.
우리 각자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거죠. 삶으로 전도하는 거에요.

성경을 가지고, 우리 삶과 섞어가지고 비빔밥을 만들어야 돼요. 
그래서 그걸 내줬을 때, 딱 먹어보고, '아 복음이 이런 맛이구나, 
아 하나님이 이런 맛이구나!' 그래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거죠. 

세상에 맨날 뭐하고 있냐면, 매뉴얼만 들이대고 있는 거예요. 
'이거 맛있어요...' 

아니, 매뉴얼만 보고, 그 음식이 맛있는지 안 맛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몰라요)
그게 진짜 맛있는 것을 알려주려면, 요리를 해서 전해줘야지요... 안 그래요? 

제가 라자냐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러면 라자니아에 대한 매뉴얼이 있다고 해서, 
라자냐 맛이 납니까? 당연히 안 나지요. 

아무리 멋진 요리책 보여주면서 '이 라자냐 엄청 맛있어요. 당신도 한번 드셔보세요!'
그리고 매뉴얼을 펴서 보여 줘요. 그럼 그 맛을 알겠냐고요? No 

라자냐를 만들어서 줘야 될 거 아니에요. 
삶과 결합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삶과 섞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줘야 '이거 정말 맛있네요. 나도 먹어보고 싶네요.' 이렇게 반응이 나오는 거죠. 
오늘날 여러분 복음이 힘을 잃어가는 이유는, 비빔밥을 안 만드는 거예요. 
그냥 매뉴얼만 갖다 전달해 주고, '전도'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건 맛이 안 납니다. 그건 맛이 안 나요. 
그거 보고 '맛있다' 이러는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아니, 요리를 해서 갖다 줘야지... 말씀과 삶을 섞으라는 거예요. 
비빔밥을 만드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삶이 섞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활력있는 날선 검이 된대요.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그런데 이 살아있고 운동력 있고 날선 검이 되는 말씀은.
말씀이 믿음과 결부될 때 이렇게 되는 것이지, 
말씀과 삶이 분리되어 있을 때는... 그냥 글자일 뿐이에요. 

말씀이 삶과 섞이지 않았을 땐, 그냥 글자일 뿐이고, 날선검이 아니에요. 
그냥 이 빠진 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무딘 검이 되고 말아요.

여러분, 이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셨습니까? 
폭풍 속에서도 안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환부를 수술해내는 하나님의 날선 검, 이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셨어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 말씀의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말씀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고요.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실패와 좌절 속에 낙심하여 있던 중에 
말씀을 통해 새 힘을 얻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됐고요. 말씀을 통해 소망을 붙잡게 됐고 
말씀을 통해 믿음에 이르게 됐고, 말씀을 통해 치유를 경험했고, 
말씀을 통해 변화된 삶을 살게 됐고, 말씀을 통해 잿더미에서 일어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고, 말씀을 통해 공허와 허물을 벗어나 진리에 이르게 됐습니다. 

이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여러분도 경험하고 있습니까? 
만약 이것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이유는 딱 하나예요. 
말씀을 믿음과 결부 mix 시키지 안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맞아요. 말씀은 놀라운 능력이고 날카로운 검이지만 
믿음과 결부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글자일 뿐이라는 거예요. 

말씀이 삶과 섞이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고 
아무리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놀라운 인생을 살게 했던 진짜 능력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어요. 말씀은 믿음과 결부되고, 삶과 섞여야 됩니다. 
그럴 때만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삶과 말씀을 부지런히 섞으십시오. 많은 말씀 알지 못하더라도, 
한 구절 들었더라도, 그 말씀 가지고, '오늘 내가 어떻게 삶과 섞을까?' 
'이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어떻게 요리해낼까?' 이거 가지고 고민하셔야 하고요. 
씨름하셔야 하고, 여러분 요리를 만들어내셔야 해요. 아멘 

관련 예화      주3)

◑3. 세 번째,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결산이 있다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리라'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마지막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결산이 있다는 거예요. 
이 결산을 통과한 자들만이 안식에 들어갑니다. 

여기서는 '마지막 안식'에 대한 얘기하고 있거든요. 
쉽게 얘기하면 천국을 얘기하는 거예요. 

마지막에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그 앞에 결산이 있는데,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내놓고, 하나님께서 카운트 하신대요. 
이거 보면 확실히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구원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대학에 입학은 쉬우나, 졸업은 아주 어렵습니다)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이거 깊게 읽지 않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위 구절을 깊게 읽으면, 굉장히 무거운 말씀 아닙니까? 

우리 가운데 어떤 게 있냐면, 말씀을 너무 심플리파이 해서, 
교리로 만들어서 알고 있어요. 대표적인 게 사영리 4 spiritual law 같은 건데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딱 한 문장으로 성경을 정리해버렸거든요. 
그래서 그냥 그게 우리한테 너무 큰 선입관으로 남아있어요. 
'말씀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도 확증 편향성이 작동합니다. 이건 확실해요. 
성경을 볼 때 확증 편향성이 확실히 작동해요. 

제가 한 때 성경을 많이 읽었죠. 대학교 때 성경을 많이 읽으면서 은혜 받으면 
형광펜으로 줄을 긋지 않습니까? 형광펜으로 줄을 쫙쫙 그어가면서 읽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26~27살쯤 됐을 때 '어, 선교를 말씀하시네?' 
그래서 선교에 대한 눈이 뜨여지기 시작했어요. 

'아 선교가 중요.한 거였네' 그 전에 한 번도 생각을 못하다가 
그러고 성경을 다시 보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성경에서 전혀 다른 글자들, 내용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전혀 다른 성경의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정말 놀랐던 건 뭐냐면, 
안 중요한 데만 형광펜이 다 그어져 있는 거예요. 
중요한 말씀은 하나도 안 그어져 있더라고요. 

성경을 수십 번을 읽었을 때인데, 수십 번 읽으면서, 
밑줄 친 곳만 계속 치고요, 그냥 비어있는 데는 계속 비어있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해요? '확증 편향성' 

그래서 성경 읽을 때도, 자기가 믿고 있는 걸 강화시키는 말씀만 계속 읽지, 
자기가 믿고 있는 거랑 조금 불편하거나, 상대적인 말씀은, 안 읽고 그냥 넘어가요. 

그래서 성경 읽을 때, 은혜되는 말씀 한 구절만 뽑고, 
나머지 15구절은 퉁치고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계속 뭐가 와요? 
확증 편향성이 오는 거예요. 맨날 그 단어, 그 내용.. 그것만 가지고 있어요. 
모든 구절 하나하나를 다 가지고 씨름해 보세요. 
그러면 구원에 대해서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정말 구원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돼요. 

'아니 이래서 구원받을 사람이 있을까?' 
구약 말고 신약을 읽어도 그래요. '이래서 구원받을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구원에 대해서 무겁게(어렵게) 얘기합니다.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즉 순종하지 않으면,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눈을 가지고 바울서신을 다시 읽어보면, 
바울의 막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요. 
'이게 그냥 가볍게 쓴 글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게 다 무슨 얘기예요? 고민이 해결이 안 된다는 뜻이잖아요. 
바울의 막 부르짖는 소리거든요. 

그런 갈등, 고민가운데 비로소 '아 하나님의 은혜구나!' 하는 걸 붙잡게 되는 거지... 
우리는 그냥 너무 쉽게 '누구든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 할렐루야 땡!' 
이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진짜로 깊게 읽기 시작하면, 그렇게 쉽게 안 넘어갑니다. 
정말 고민에 고민을 하고, 씨름에 씨름을 하게 됩니다. 
'과연 구원이라는 게 뭘까?.. 내가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의 고백에 다다르게 되더라고요. 
'와,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가 없구나.. (구원이 어렵구나)' 
그때 거기 뭐가 임하는 거냐면, 성령님의 은혜가 임하는 거예요. 
그때 성령님의 은혜가 임하는 거예요. 

'그래, 넌 원래 구원받을 수 없는 자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구원하는 거야' 
여기서부터 이제 구원에 대한 감격과 환희가 확 터져나오는 건데, 
이런 과정이 없으니까, 구원의 감격도 없고, 맹숭맹숭하고, 
그냥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끝, 땡!' .. 이건 지적동의죠.

그리고 성경도 맨날 그런 구절만 확증 편향해서 읽어요. 
그러니까 반대적 측면의 말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서 구절들은 
'말씀이 어렵도다' 하면서, 밀쳐내게 되는 거죠. 요6:60

어렵긴 뭐가 어려워요?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데, 내가 동의가 안 되는 거죠. 
어려운 게 아니죠. 

여러분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말씀들이 있죠? 
그 말씀이 어렵지 않습니다. 동의가 안 되는 거예요. 
동의가 안 되니까 '어렵도다. 말씀이여' 그러고 넘어가는 거지요. 

그래서 동의 안 되는 건, 그냥 건너 뛰고, 넘어가고, 
맨날 동의되는 말씀 한 구절만 붙잡고 있으니까, '그렇지 믿음으로, 그렇지 은혜로...' 
뭐 이러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믿음이 성장이 안 되는 거죠. 10년 믿어도 그 수준 그대로예요.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읽지 마십시오. 
성경의 모든 구절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셔야죠. 아멘! 

4: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여기 보면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런데 '순종하지 않아서 
안식(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거예요. 사실은 고민을 하셔야 됩니다. 
'그럼 순종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 
'그러면 도대체 어느 정도 순종해야 들어가는 건가?' 

'100% 순종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하고 고민을 하셔야 돼요. 
고민하셔서 답을 얻으셔야 돼요. 
저는 답이 있지만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스스로 고민을 해보라고... 

그러고 넘어가자 하니까 목사의 책임감이 느껴져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하나도 죄를 짓지 않고, 100% 순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이 마지막에 결산할 때 뭘 보시겠어요?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거라고 그랬잖아요. 
지금은 감춰져 있다는 거잖아요. 4:13

그게 마음에 대한 얘기죠. 우리 마음에 있는 걸 드러내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결산하시는 건 뭐냐? 우리 마음의 동기를 결산하세요. 

여러분, 그런 거 있잖아요. 여러분 수능 시험 다 보셨죠? 
수능 볼 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다 똑같은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내가 다 맞출 거야, 내가 거의 다 맞출 거야' 이런 마음으로 들어가지, 
'가서 두 문제 풀고 나올 거야' 이렇게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사람 없어요. 

아무리 준비를 안 했어도 들어갈 때 마음은 '그의 다 맞출 거야' 이러고 들어가지, 
'아휴 뭐 대충 서너 문제만 쓰고 나올 거야' 이러고 시험 보는 사람은 없단 말이에요. 

순종이 그런 거예요. 어차피 다 맞추는 사람은 없어요. 
어차피 만점 맞는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그 문제 앞에 섰을 때, 
'만점 맞겠다. 거의 만점 받겠다'는 자세로 들어가지, 
'그냥 대충 하다 나오겠다' 이런 마음으로 들어가지는 않잖아요. 
하나님이 보시는 건, 그거 보신다는 거예요. 

맞아요. 우리가 100% 순종은 없어요. 
그러나 순종하고 싶은 전투 의지는 있어야지요. 그건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말씀을 다 순종할 거야' 이 전투 의지는 있어야지요.
'내가 말씀을 거의 다 불순종 할 거야' 이런 전투력 상실 의지가 있으면 안 돼죠.
'나는 실패할 거야... 나는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야...' 이러면 안 돼죠.

고등학생이 성적이 좀 낮아도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지' 각오로 공부해야지, 
'난 어차피 대학 못 들어가... 나는 공부 해도 안 돼!' 이런 자세로 학교 다니면 안 되죠.

그런데 '순종'에 있어서, 우리가 그런 패배 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거죠. 

순종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어차피 난 만점을 못 받아. 그러니 나는 시도도 안 할 거야' 
그렇지만 자포자기 하는 게 답이 아니고, 
마치 만점을 받겠다는 듯이, 만점을 바라보며 달려드는 것,
이걸 하나님께서 '순종'으로 보시는 거예요. 은혜로 봐 주시는 거죠.

그러다가 과정에서 우리가 실패하죠. 틀리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하지만 이 태도(실패하더라도 끝까지 순종하겠다는 태도)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쓰러지고 나면 굉장히 아쉬워하고 '아이고 하나님, 또 쓰러졌네요' 
하고 애석해하며, 다시 시도합니다. 이게 옳은 반응이죠.

반대로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당연한 결과지..
어차피 은혜로 가는 건데... 다음 번에 실패해도 하나님이 용서해 줄 텐데...' 
이거는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돼요. 
그게 과연 '말씀이 믿음과 결부된 건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돼요. 

맞아요. 죄 지을 수 있어요. 그리고 죄 짓는다고 하나님 우리를 지옥 보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결산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거예요. 

내가 그 한 문제 틀렸을 때, '아, 내가 맞을 수도 있었는데, 틀렸네...' 하며 아쉬워하고, 
'다음부터는 이 문제 나오면 나는 다시는 안 틀려!' 이렇게 결단할 때,
이게 '순종하는 믿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결산하신다'는 거예요. 
벌거듯은 듯이, 우리 모든 것이 심판대 앞에서 다 드러난다는 거예요.         ☞ <심판>

이게 (심판, 결산을 대비하는 신앙) 없는 것은, 여러분 그건 진짜 심각한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결산이 있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자기 마음을 미리 돌아보시지 않으시면, 
마지막 결산할 때 당황스러워 할 겁니다. 마지막 결산할 때 크게 당황스러워 할 거예요. 
그때 당황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황하는 게 나아요. 
그때 당황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황하는 게 나아요. 

지금이라도 여러분 마음가운데 그게 (결산 의식이) 없다면, 
여러분이 심각하게 하나님 앞에 씨름하셔야 됩니다. 
'나는 과연 구원받은 자인가? 나의 믿음은 뭔가? 
내 믿음이 과연 진짜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가?' 

오늘 고민하시는 게 낫지, 마지막 결산 때는요. It's too late 당황스러워 할 거예요. 
그때 여러분들이 바울서신 중에 '쉬운 구원'을 얘기하는 한 두 구절을 인용하더라도,
소용없을 거예요. (*그건 입학에 필요한 구절이고, 졸업은 아니죠)

'아니, 분명히 히브리서에 이렇게 말씀했는데, 그건 왜 안 봤어?' 
이렇게 물으실 거예요. 확증 편향성에 기울지 마십시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믿음을 결부시키십시오. 말씀을 순종의 삶으로 살아내셔야 돼요. 

 

마치는 말
많은 성도들이 주일 외에는 성경을 잘 펼치지 않아요. 
요즘은 주일 날도 잘 안 펼치는 것 같아요. 
스마트폰 가지고 다니니까, 성경책 펼칠 일이 없어요. 

성도가 여러분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안 읽는 거죠.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요? 말이 안 되죠.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것도 말이 안 되죠. 

하나님이 준비하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시작하는 거예요. 

안식의 본질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인식에 동의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동의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안식이 없는 거죠. 

안식은, 여러분 말씀에서부터 옵니다. 저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순간들, 
두려웠던 순간들, 불안했던 순간들 다 있죠. 
그럴 때마다. 저에게 안식을 줬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딱 무릎 꿇고 하나님 옆에 나가서 말씀을 펼쳐서 읽을 때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아 그렇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동의가 되는 거예요. 믿음이 생기는 거죠.

그때 설명할 수 없는 하늘의 안식이 제 삶을 뒤덮고,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이 내 삶을 휘감기 시작합니다. 
'맞아, 하나님께서 나하고 함께하셔!'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하고... 이게 안식이었어요. 

저에게 안식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안식은 여러분 철저하게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을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이 말씀에 동의할 때, 
거기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나오는 거고,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어' 그 말씀에 동의할 때 
거기서 내 안에 평강이 나오는 거고... 

안식은, 철저히 어디서부터 나와요?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부터 나와요. 
그러려면 말씀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아니 말씀을 펼쳐있지 않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동의할 것이며, 
동의가 안 되는데, 어떻게 안식을 누리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얘기예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안식의 매뉴얼'입니다. 
이걸 펼쳐 읽지 않으면, 안식에 이를 수가 없어요. 
그러나 동시에 매뉴얼이라고 하는 말을 잊지 마십시오. 
그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요리는 만들어지지 않아요. 
그 매뉴얼을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않으면, 맛있는 요리는 나오지 않아요. 

말씀을 삶과 결부시키셔야 돼요. 믿음과 결부시키셔야 돼요. 
그럴 때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놀라운 안식, 말씀의 능력, 
살아있고 운동력 있고 좌우에 날선 검 같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우리 삶을 지배하기 시작할 거예요. 이런 인생들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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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히브리서의 5가지 경고

1.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고 경고 히2:1~4
2. 안식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 수 있음을 경고  3:11~4:13
3. 하늘의 은혜와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할 수 없음을 경고 5:11~6:12
4.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죄를 짓게 된다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그를 태워버릴 맹렬한 불(지옥불)만 
  있을 것이라고 경고 히10:26~31
5. 자기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행하지 못해 죄에 빠지게 되면 
그는 더러운 자가 되어 결국 주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 12:1~29

 

주2) 예수 안에 있는 안식의 복들

 

예수 안에 죄사함과 해방을 마련해 놓으셨어요.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또한 예수 안에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있습니다. 
고전1:30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으니' 

예수 안에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이 있습니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또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예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후5:17 '그런 중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수 안에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예수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 안에 영광이 있습니다. 
엡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웅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와 이 예수 안에 약속해 놓은 것들이 보이세요? 
누구든지 예수 안에 오는 사람들은, 이 모든 약속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부활과, 영광과, 풍성함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과, 이 모든 축복들을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된다는 거예요. 

 

 

주3) 관련 예화
미국의 어느 교육청에서 한 번은 연구를 했었는데 
<학생들에게 보충수업을 시키는 제도에 대한 연구>를 한 거죠. 

보충수업은 학업이 떨어지는 애들을 모아서, 보충수업을 하는데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왜냐면 보충수업 대상자로 분류되는 순간,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나는 실패자다. 나는 탈락자다'
그런 자의식 속에서 학생들에게 학습 효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죠.

근데 예외가 한 명 있었습니다.
한 여학생은 보충수업의 효과로 성적이 향상되었는데, 
그래서 그 학생에게 연구의 초점이 맞춰진 거죠.

'도대체 모든 학생들에게는 보충수업에 전혀 효과가 없는데 
왜 이 학생에게만 효과가 나타난 것일까요?'

그 여학생은 육상선수 였다는 거예요.
그 여학생의 보충수업을 지도한 교사는, 이렇게 증언했죠.

'제가 여학생에게 말한 것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게 아니라,
그 학생이 운동할 때, 육상경기 할 때, 힘껏 열심히 응원해 주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찾았다는 거죠.
그 운동 잘 하는 학생의 운동을 격려해주고, 응원해주고, 지지해 주니까

그를 응원해 준 그 힘이 
그 여학생에게 변화를 일으켜
열심히 공부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를 응원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부어질 때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우리 가운데 부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그래서 죄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죠. 그 교사와 여학생처럼)

하나님을, 자기가 잘못하면 책망하고 진노만 하는 그런 분으로만 알면 
우리는 점점 자기를 보호하게 되고, 겉으로만 율법을 행하는 척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용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지, 격려, 응원을 경험한 성도는
즉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자기 내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