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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2장 사람은 제 갈길로 가도, 주의 뜻은 이루어진다

LNCK 2025. 2. 19. 19:2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크리스천 리빙

 

※4:08초부터 본론입니다 (화면 맨 아래 음성 파일 있음)

 

◈사람은 제 갈길로 가도, 주의 뜻은 이루어진다        요12:44~50      2025.02.16.   

 

요12장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죠? 나사로의 누이였던 마리아가    -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자, 그들에 대해서 화가 난 가룟 유다가 
'왜 이것을 낭비하느냐, 가난한 자에게 주면 더 좋지 않겠느냐?' 했죠. 

 

그리고 12장 중반부에 가면 예수님께서 드디어 이제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크게 외쳤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기적            주1)

 

◑본론 /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기적들을 행하시고, 나귀타고 입성하시고, 또 향유의 부음을 받으시고 하는 
그 사건들 가운데 네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나사로와 그의 가족들, 특히 향유를 부어 섬긴 마리아
-12 제자들  
-호산나 소리를 질렀던 무리들,

-예수를 죽이려고 살해 음모를 꾸몄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의 의도와 행동들을 살펴보면서 
이 본문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1. 첫 번째,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마리아

요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리아는 어떤 의도로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죠? 
자기 오라버니를 살렸으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그 감사한 마음, 또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헌신의 마음을 담아서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쏟았습니다. 

향유를 부을 때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는 정말 귀한 손님, 귀한 사람에게 이 향유를 붓는 것, 이게 첫 번째고요. 
감사와 헌신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감사 표시를 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이 오래되면 부패하니까 냄새가 날 거 아니에요. 
그 시신의 썩은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해서, 몸에 향유를 바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곱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 무덤으로 갑니다. 향유를 바르러 간 거죠. 

막16:1~2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그런데 여러분 마리아는, 지금 감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발랐는데, 
예수님은 그걸 뭘로 받아들였어요? 감사와 헌신의 의미로만 받은 게 아니고 
'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마리아가 지금 바른 거다' 말씀하셨어요. 요12:7

▲2. 제자들의 모습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께서 나사로 죽음 소식을 듣고 '유대로 가자' 했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죠? 가지 말자고 그랬어요. 

왜? 지난 번에 예루살렘에서 그 위험을 당하시고, 또 가서 험한 꼴을 당하시겠습니까? 
하고 말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잔다' 그러니까 뭐라고 얘기해요? 
'아이고 자면 잘 됐습니다. 자면 일어날 거 아닙니까? 그냥 둡시다.' 

그런데 그게 자는 게 아니고, 친절하게 해설을 해주셨죠. 
'자는 게 아니고 죽은 것을 의미했다'고 친절하게 해설을 해 주십니다. 

지금 제자들의 의도와 예수님의 의도가 다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안 가고 싶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가셔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건, 향유를 부었을 때 가룟 유다가 뭐라고 그래요? 
요12:5~6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말은 그럴싸하게 했지만, 지금 가룻유다의 마음은 뭐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돈궤를 맡았으니까, 그걸 팔아가지고 자기가 꿀꺽하고 싶었던 거예요. 

지금 가룟유다의 마음속에는 점점 마귀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하죠? 
예수님을 은삼십에 팔아 넘깁니다. 

또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보세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장면이에요.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가실 때, 
요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가시는데, 내심 기대하는 게 있었고 
그 기대하는 모습으로 가는 데에는, 예수님이 나귀 새끼가 아니고, 
멋있는 백마를 타고 아주 멋있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생각했을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이유를,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야, 이 사건을 깨달았다고요.
그래서 요한이, 성경에 해설을 넣어줍니다. 요12:16

 

이 말씀은 스가랴서 9장에 있는 말씀인데, 나중에야 요한은 
예수님의 '나귀 타고 입성하신 이유와 의미'를 깨닫고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요한이 나중에야, 슥9:9절을 깨닫고,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요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그러니까 슥9:9절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 메시아는 
백마가 아니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라는 것을 늦게서야 깨달은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갖고 있었던 인간적인 기대, 의도... 이런 것들이 있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사역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예루살렘의 무리들, 군중들
그 다.음 한번 보시죠. 그 다.음은 무리들이죠. 포산나 시작! 

요12:12~13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호산나는 무슨 뜻이죠?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정치적 메시아,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식민 통치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정치적 메시아, 정치적 지도자로 
예수님을 생각하며 '호산나' 하고 소리지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치적 지도자로서. 군주로서의 구원자로 오셨나요? 아니죠. 
무리들은 그런 의도로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Save us' 하고 불렀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뭐하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거예요? 

자신의 희생의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 입니다. 
이들의 의도와, 실제 예수님의 의도는 판이하게 달랐던 거예요. 

▲4.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님 이해

 

요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무슨 뜻이냐면 '이 예수 한 사람 죽여서, 우리 민족이 사는 게 낫지...'
'예수를 죽여야 돼, 그래야 우리 나라가 살아!' 이런 뜻입니다. 

가야바가 한 말은 맞는 거예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낫다' :50

얼핏 보면,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언하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의도에서 '예수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얘기한 겁니다.           주2)

그러나 신기하게도, 우연의 일치로,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언한 셈이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독자들이 오해가 있을까봐, 요한이 또 해설을 붙입니다. 그게 이어지는 구절이죠.

요11:51~52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어요.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죽으신 거예요. 
왜요? 민족과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51~52

그러니까 대제사장 가야바의 의도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죽으셨고, 
그 의도와 전혀 다른 쪽의 의미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셨다' 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중간 정리를 한번 해봅시다. 
보세요. 예수님 주변에 4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 마리아는 향유를 부었어요. 
사랑과 헌신의 의미로 드렸지만, 
그것은 (자기는 몰랐지만)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각자 제 길로 가는데, 주의 뜻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2) 제자들을 보세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의아했지만, 

뭐가 뭔지 전혀 모르고, 속으로 '이래서는 안 되는데.. 백마를 타셔야지..'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예언이 성취된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돼요. 
사람은 각자 제 길로 가는데, 주의 뜻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3) 무리들은 '호산나!' 하고 예수님을 환영했어요. 
로마의 식민 통치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할 정치 지도자로서 예수님을 환호했지만, 
그러나 어때요?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고요. 

사람은 각자 제 길로 가는데, 주의 뜻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4)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여서 자기 민족을 살리려 했지만, 
결국 그 말이 중의(이중)적인 의미가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 
그 민족 뿐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 제 길로 가는데, 주의 뜻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위 네 부류의 사람들이, 한 부류도 표적을 적중하지는 못했어요. 구원사역을 이해 못 했어요.
다 제각각의 생각이 있었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해와 목적도 제 각각 다 달랐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위 네 부류의 사람들의 의중과는 관계 없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한 치도 오차 없이 착착착 다 이루어져 갔습니다.

사람은 각자 제 길로 가는데, 주의 뜻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제


▲본문 말씀을 읽고 정리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일로 인해서 일희일비합니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죠.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죠? 
'이 일을 통해서 내 인생은 대박이 났구나.. 야, 너무 좋다' 
뭔가 앞으로 크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떻습니까? 
그 일로 인해서 내 인생이 큰일 날 것처럼, 망할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나를 향한, 또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은 어때요? 
그 뜻대로 그냥 계속 흘러갑니다. 계속 진행됩니다. 내 실패와 성공에 관련 없이요...

아무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뜻대로,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내 처지와 상관없이, 내 행/불행과 상관없이...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만이 오롯이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게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지면, 
나는 뭐하러 노력하고, 뭐하러 수고하고, 내가 무슨 인생의 의미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 영화 평론가가 방송에 나와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진행자가 '당신의 인생의 좌우명이 뭡니까?' 그랬더니, 그가 하는 얘기가 

'내 인생에 하루하루는 치열하게 성실하게 살지만 
내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살자' ... 이게 자기 인생의 좌우명이래요. 

하루하루는 치열하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산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산다' 무슨 뜻이에요? 

언뜻 보면 '그냥 되는대로 살겠다' 라는 뜻이 아니고, 무슨 뜻이죠? 
그러니까 좀 기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이 말씀을 재해석하면 뭡니까? 

'내 하루하루를,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과 은혜를 가지고 
성실하게, 즐겁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요. 

그러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큰 뜻은, 
내가 뭘 계획하고, 뭘 열심히 하고, 내가 뭘 좀 못하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즉 하나님 인도하시는 대로 산다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거죠. 그게 '되는 대로'라는 말의 의미죠.  
그 얘기가 참 은혜가 되더라고요. 

'이게 내 인생의 좌우명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가 바로 <Let Them Theory>
라는 책입니다. 

Let them go .. 무슨 뜻이죠? 
'걔네들 그냥 알아서 하게 해, 걔네들 마음대로 하게 해!' 이런 뜻입니다. 

Let them theory 이게 뭐냐 하면,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내 속에 막 파고드는 이유가 뭐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내가 자꾸 통제하려고 드니까, 
부정적인 생각, 불안한 생각, 염려, 걱정... 이런 게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게 어떤 거죠? 
나의 미래는 내가 통제할 수 없고,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내가 1년 뒤에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미래의 일을, 내가 통제하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될까요? 
내가 불안해지고, 염려하게 되고, 부정적이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 저자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저자 Mel Robbins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Let them! 해야 된다. 그냥 놔둬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게, '미래'만 있는 게 아니에요. 뭣도 통제할 수 없느냐?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다른 사람의 말이나, 다른 사람의 행동도 내가 통제할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대부분 어떻게 하죠? 남의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뭐가 생겨요? 
부정적인 감정과, 미움과, 염려, 불안감 ... 이런 게 생기는 거예요

이런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

내가 뭔가를 잘했습니다. 그러면 뭘 기대하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를 기대합니다. 
'내가 잘했으니까, 당연히 나에게 박수쳐 줘야지!' 

그런데 나는 잘했는데, 당연히 박수 받을 만한 일을 했는데, 
상대방이 내게 박수를 안 쳐줘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가정이나 교회에서, 내가 무슨 특단의 비상 조치를 선포해야 되는 것입니까?
내가 그 사람들에게 큰 불이익을 줘야 되는 겁니까?

그 불만스런 상황을, 내 구미에 맞게, 내가 통제하려고 하면, 
우리 가정이나 교회에서 계엄 같은 비상조치를 선포하는 거예요. 
그거(남의 마음, 감정, 생각)는 통제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죠? 

이 저자가 이런 얘기를 해요. 
자기가 어느 날 SNS, 페이스북, 이런 걸 보는데 
자기만 빼놓고 친구들이 다 같이 함께 여행을 가는 거예요. 그러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다같이 모이는 모임인데, 나만 빼놓고, 내게는 아무 연락도 안 하고, 
나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여행 가서, 같이 사진 찍고는, 막 SNS에 올리는 거예요.

저자는 기분이 되게 나빴나 봐요. 당연하겠죠.
그래가지고 그는 그 날부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면, 그 친구들 SNS 계정에 다 들어가 가지고, 
그 올린 사진들 밑에 무슨 댓글을 썼는지까지 자세히 읽어보면서 
'이것들이... 이것들이...' 하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기를 빼놓고 그들이 여행을 간 거는, 누구의 마음이며, 누구의 생각이에요? 
그 친구들의 마음과, 그 친구들의 생각이에요. 
지금 자기만 빼놓고 간 것은, 그들의 선택과,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행동이에요.

그걸 통제를 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건 이미 지나간 것이고, 그들이 그들끼리 여행을 떠난 것을, 내가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죠? 그 상황을 자꾸 통제하려고 해요. 
그럼 어떻게 해요? 
예를 들면, 만약 통제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전화를 걸어가지고 '야, 너는 나를 빼놓고 갔어? 니가 그럴 수 있어?' 하고
시비를 걸거나 따질 수는 있겠죠. 

그러면 나아지는 게 있어요.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더 관계만 악화되는 거예요. 자기만 더 힘들어지는 거죠.

그래서 너무너무 힘들어 하다가 결국 어떻게 하기로 결정을 했느냐? 
Let them~ 하기로 결정했대요. 뭘 Let them~ 합니까? 

그들이 한 선택에 대해서,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Let them~ 그렇게 하도록 놔두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을 인정한 것이죠. 
그러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한 게 뭐냐? Let them~ 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 이론에는 또 반대 개념이 있어요. Let me~ 가 있습니다. 
Let me~ 는 내가 하는 판단, 생각, 행동이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최근에 친구들 사이에서 너무 잘나가고 바쁘니까, 
자기가 친구들에게 연락을 자주 못하는 거예요. 

'왜 나를 빼놓고 갔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나는 당연히 의례히 바쁘니 못 참석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서 
그들 친구들끼리 뭉쳐서 갔구나... 그걸 깨닫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건 내 책임이다' 그때부터 Let me~ 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요? 
내가 그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안부를 전하고 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훨씬 더 상황이 좋아졌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이 있을 때, 
내가 통제 못하는 어떤 감정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요? 
Let them~ 하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요? 
Let me~ 하는 겁니다. 

◑적용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적용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새로 나왔습니다. 내가 그에게 잘 해줬어요. 정성을 다해 그를 섬겼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교회를 안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내가 잘 해줬는데, 어느 날부터 나한테 연락을 안 해? 교회를 안 나와?' 

그러면 그 사람은, 내 눈에 어떤 사람으로 비춰지죠? 배신자! 
그렇죠. 내게 배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배신당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 경우에 Let them~과 Let me~는 뭘까요? 
내 안에 배신감이 드는 그 마음과, 감정은 Let them~ 해야 됩니다. 
내가 그를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그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가 그런 선택을 한 것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너 왜 배신했어?' 할 수 없잖아요. 
그 사람의 그 선택과 생각과 감정을 그냥 Let them~ 하는 겁니다. '지가 알아서 하도록 놔 둬!'

그리고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Let me~ 는 뭘까요? 
내가 잘해준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은 은혜로 갚지 않았어요. 

그랬지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미래에 어느 시점에 바꾸셔서, 
그리고 나에게 배신한 그 순간까지 소환하셔서, 
그를 진정한 회개와 변화로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이끌어주실지는... 

내 몫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 마음을 가지고, 그를 위해서 축복하면서 기도해주면 그만입니다. 
그게 Let me~ 입니다. 그렇죠? 

오늘 당장 내가 그에게 잘해줬는데, 우리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해서 
배신감 느낄 필요가 없어요. '나는 그럴 축복하고 위해서 기도해 줄 거야!'

△조지 뮬러가 자기 친구를 위해서 50년을 기도했는데 
그 친구가 조지 밀러 죽을 때까지 교회를 안 나왔어요. 근데 언제 나왔어요? 
조지 뮬러가 죽고 나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우리는 끊임없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 인생에 개입해 주실 것만 기도하면 됩니다. 그게 Let me~ 이에요.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영화 평론가가 했던 이야기, 하루하루는 어떻게 살아요? 
하루하루는 하나님 뜻이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충실하게, 
누구 칭찬, 누구 비난 생각할 것 없이, 하루하루 내가 순간순간 순종하면서 살고, 

내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다시 말하면,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하나님 계획하신대로, 하나님 때에 하나님 방법대로! 
우리가 그런 신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요즘 여러분 속에 정말 응어리진 그런 마음,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통제하려고 했던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해요? 
Let them~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순간에 나로 하여금 Let me~ 하게 하시는 게 무엇인지, 
그것만 성실하게 오늘 하루하루 분별해서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합력해서 선이 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본문 말씀을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 갖고 계셨던 계획과 뜻은 뭐였습니까? 
최종 목표는 뭐였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희생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죠. 
희생 제물이 되시려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희생 제물로 죽으셔야 부활하고, 부활해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나사로 집의 마리아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떻게 됐죠? 죽으셨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 
베드로와 같은 배신자, 
유대 종교 가야바 같은 대제사장들의 계획, 살해 음모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 갖고 계신 뜻은, 
옆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지시고 볶고 무슨 난리를 쳐도,
결국은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진 겁니다. 그 뜻이 뭐예요? 죽음과 부활!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 갖고 계신 뜻이 그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뜻도 어떨까요? 다를까요?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양이, 별의별 모습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종착역은 어디죠? 종착역은 다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크루즈 배를 타고 가는데, 
어떤 사람은 특실에 있고, 어떤 사람은 일반실에 있고, 어떤 사람은 화물칸에 타고 갑니다.
목적지가 같아요, 틀려요? 
목적지는 같아요. 종착역은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하고 있는 거주의 형편이나 상황은, 다를 수 있는 거죠. 
배 안에 아픈 사람도 있고, 건강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아픈 사람은 남미로 가고, 건강한 사람은 북미로 가고 그럴까요? 
아닙니다. 종착역은 같습니다. 

그 배 안에는 권력자도 있고, 비천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종착역은 같습니다. 
그 배 안에는 자식이 잘 된 사람도 있고, 못 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종착역은 같습니다. 
원대한 꿈을 갖고 산 사람이나, 그것을 이룬 사람이나, 
사소한 꿈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나... 종착역은 같습니다. 

100세까지 산 사람이나, 70세까지만 산 사람이나... 종착역은 같습니다... 

▲여러분, 대통령이 탄핵이 되건/ 안 되건, 
계엄을 성공을 했건/ 실패를 했건, 
이후에 누가 대통령이 됐건/ 안 됐건...  (결국은 하나님 주권 대로 결판납니다) 

트럼프가 북한하고 관계를 잘해서 노벨상을 타건/ 안 타건, 
여러분, 우리 모두의 인생의 종착역은 같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주권 대로 결판납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나름대로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속에, 교회를 다니는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오해하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기도 하고, 
나한테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고, 나한테 배신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감싸주는 사람도 있고, 나를 죽이려고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상 가운데 좋은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그런데 인생의 모양, 사람들의 모양은 다 여러 가지이지만 
결국 우리의 인생의 열차의 종착역은 어디예요?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갑니다. 똑같아요.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히9:27
우리는 다 죽음이라고 하는 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의 종착역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한 두 정거장 밖에 안 남았는데, 
거기서 옆사람이 나한테 기분 나쁜 소리 한다고 
멱살 잡을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종착역이 두 정거장 남았는데, 나한테 무슨 소리 한다고 멱살 잡을 이유가 없습니다.

종착역이 가까웠는데, 저 사람 자리는 '창가'고. 
내 자리는 '복도' 라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종착역이 가까울수록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이나 이런 것들은 Let them~ 하고요. 
그리고 뭐 해야 됩니까? 
그 종착역에서 심판하실 주님 앞에서,  
나는 얼마나 기억될 일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Let me~ 하는 편이 훨씬 더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후략 

기도 / 진리와 생명되신 하나님 
오늘도 어둠 속에서 헤매던 저희들에게 우리 인생에 가야할 종착지인 
죽음과 또 영생의 출구를 명확하게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보았사오니 
세상의 일시적인 것과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들뜨거나 괴로워하지 않게 하시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 잃을 것이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하신 말씀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묵묵히 걸어가는
저희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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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우리가 지난 주에는 요한복음 11장과 12장의 말씀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서론 격이고, 
2장부터 11장까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일곱 가지의 기적이 있는데요. 
1) 첫 기적인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부터 시작해서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4장
3)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5장
4) 오병이어 사건, 6장
5) 물 위를 걸으신 사건, 7장 
6) 날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고치시는 사건, 9장 
7)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입니다. 11장

이 많은 사건들 가운데, 기적들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기적은 '죽은 자를 살렸다'는 의미에서 가장 큰 기적이겠죠. 
나사로 사건이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이 예수님의 죽으신과 부활을 미리 예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2)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요11:50

가야바는 다른 뜻으로 이런 말을 했지만, 
우연으로, 가야바의 이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용(다르게 사용)되어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유대의 마지막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속죄 고난에 대하여 
공직자(公職者)의 처지에서 예언한 것은 중대하다(49-52). 

이것이 마치,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고(민 24:17), 
다윗의 원수 사울이 다윗의 일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다(삼상 26:25)

요11:51~52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그런 큰 예언을 하였다. 
그의 본의는 예수님을 해하려는 악심으로 말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언으로 이용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