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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3장 다치지 않도록, 닫히지 않도록

LNCK 2025. 2. 20. 19:5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사랑

다치지 않도록, 닫히지 않도록 -  Youtube

다치지 않도록, 닫히지 않도록         요일3:13~18, 눅10:31~33         2025.02.16.

'돌봄'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돌보는 일은, 기본적으로 기쁘고,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겁습니다. 돌봄은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제대로 돌보는 것도, 대단히 힘들고 지칩니다. 

'끝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까지 해야 되나?' 내 힘은 한계가 있고, 돌보아야 할 사람은 많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돌보자. 약한 사람들을 돕자' 할 때,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세상에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다 도울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컵으로 바닷물을 퍼내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배고픈 사람도 많고, 외로운 사람도 많습니다. 

병원비, 학비 때문에 쩔쩔 매는 사람도 많고요. 
그래서 '어떡하나.. 어떡하나?' 하다가, 결국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돌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랑의 실천'은 어디까지 해야 하나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질문을 가진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지침을 줍니다.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그 큰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참 은혜롭고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쉽게 '아멘!' 할 수 없는, 
생각해 보면, 쉽게 넘길 수 없는, (목에) 걸리는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알기는 알아요. 예수님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 알고요. 
'그래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고요? 그거는 힘들겠는데요...' 

물론 비슷하게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오지에 나가서 평생을 바치신 분들이 있고, 
그 중에는 순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 많이 있습니다. 
맞아요. 그래야 되지요. 우리도 같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야 마땅한데... 그래도 나는 아직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내 목숨을 버립니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은... 우리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해서, 
그 다음 17절은 대단히 현실적인 지침을 주십니다. 

◑요일3:17 '누가 이 세상의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이 구절은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을 때, 나에게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두 번째, 형제의 궁핍함을 보게 될 때, 
세 번째, 도와줄 마음이 내 마음에서 생길 때, 그때 그 마음을 막지 마라 라는 것입니다. 

16절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에 비해서, 대단히 현실적인 지침이죠. 

▲여러분, 성경은, 근본적인 진리를 선포하면서, 우리 존재의 기반을 흔들어 놓지만, 
그 실천의 요구에 있어서는 대단히 실제적입니다. 

근본적이어서 급진적이지만, 실제적이어서 소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말씀을 들으면, 오늘 내가 행할 수 있는 작은 실천.. 그게 생기는 거예요

기억하십니까? 이사야 6장 설교에서 근본적인 도전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인간의 가장 실존적인 고백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맞추어서, 실제적인 권면은 
'오늘 만나는 사람 가운데서, 말을 조심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래요. 16절에는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셨고, 
다음 구절인 17절에서는 그것을 최소한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지침을 주십니다. 

요일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제가 목회하고 설교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이것입니다. 
성경적이면서 실제적인 설교!  Biblical & practical sermon

성경적이기만 하면, 그냥 뭐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아요.
실제적이기만 하면, 그냥 '생활의 지혜'쯤 되는 거지, 그게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공자 맹자와 비슷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설교는, 성경적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이어야 됩니다.  둘 다 있어야 됩니다.
어떤 말은, 듣기에는 너무 좋아요. 너무 아름답고 멋있는데, 
그래서 그 말씀이.. 지금 내 삶과, 오늘 내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적이지 않아요...  

그렇지만 여러분, 성경은 본래 실제적인 책입니다. 
그래서 17절, 이런 것이 가능한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어려움 당하는 모든 사람을 전부 다 찾아다니면서 도와라'
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모든 배고픈 사람들을 다 먹일 프로그램, 그런 경제 구조를 확립하고, 
세상에 모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에 17절에, '도움과 돌봄'에 있어서 실제적인 원리로써, 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즉 능력이 되면, 여유가 되면 하라는 거예요. 
없으면 안 해도 됩니다. 가진게 적으면 적게 하면 됩니다. 

고후8: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예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없는 것 도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없는 것 드리라, 나누라고 하지 않습니다. 

할 마음이 중요하고, 작게 있으면 작게 하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만큼만 하면 됩니다. 

내가 재물을 가지고 있을 때에, 
나에게 어떤 시간이 있을 때에, 
나에게 지식이 있고, 도울 능력이 있을 때에... 하라(도우라)는 거죠. 

여러분 사람은요, 내가 혹시 무엇이라도, 
시간이든, 재능이든, 지식이든, 재물이든,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것이 있다면 
'야, 이것은 하나님이 나누라고 나에게 맡기신 것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요. 가정도 그렇고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건강한 교회는, 복음적인 교회는, 
늘 이웃을 위해, 남을 위해 애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규모가 비교적 큰 교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더욱더..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을 위해서 쌓기보다, 
이웃을 돕고 최대치로 나누는 교회가 
좋은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2.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서'  :17

내가 삶을 살아갈 때에, 내 인생의 여정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상황을 말합니다. 
물론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세계를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 해도 괜찮아요. 

그냥 내가 일주일 살면서, 하루 하루 살면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아, 이 사람을 도와줘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때 회피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면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우리가 잘 알잖아요. *눅10장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갔습니다. 
레위인도 '보았지만' 피하여 갔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에 이르러, 그를 불쌍히 여겨' 10:33 
여러분 착한 일을 하려고 세상을 다니는 거 아니에요. 선교 여행 간 거 아니에요.
자선사업 하려고 일부러 그곳을 찾아간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 볼 일을 보러 가는 가운데, 우연히 그를 만난 거예요.
그때 어떤 마음이 들었던 거예요.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불쌍히 여기는 자기 마음을 따라서 행한 거예요.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 인이라고 말하는데 
언제부터 이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습니까?
이 사건 이후부터죠.

동시에 제사장, 레위인은, 이 사건 이후로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들은 '선한'과 반대적인 '냉담한, 무관심한, 선하지 못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눅 10장의 이런 상황이나 사건을 맞딱뜨리기 이전에는, 이 만남 이전에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친절하다. 냉담하다. 그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우리가 특정 상황을 고의로 피하게 될 때,
반대로 적극 만나서 대처하게 될 때,
우리는 '선한 기독교인'도 될 수 있고, '냉담하고 무정한 기독교인'도 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냉담하고 무정한 마음으로 살 수도 있고요. 
반대로 선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양쪽 가능성이 다 있는데, 
오늘 내가 맞딱뜨리는 구체적인 어떤 현장에서, 어떤 만남을 통해서, 
그 가능성이 한쪽으로 쏠려서 내가 규정되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길을 가면서 만난 어떤 상황에서, 
그때 나의 선택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나눠지고, 정의와 불의가 나눠지고, 담대함과 비겁함이 나눠지고요. 
선인과 악인으로 나눠지는 거예요. 나는 어느 편으로 살아왔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의 여정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사람을 만나는 순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내가 어떤 길을 갈 것인가?' 하는 것은, 
그때 그 반응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3. 도와줄 마음이 생길 때, 마음을 닫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7 

도와줄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을 내가 셧 다운해 버린다는 거죠. 
도와줄 마음이 생겼는데, 약 2~3초 후에 그 마음의 셔터를 내려버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고 사도요한은 강하게 질문하십니다. 

도와줄 마음이 없으면 괜찮은데... 
조금이라도 내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이 그런 부담을 주시는데, 
그 마음을 shut down, 닫아버리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저 분을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저분 참 외로워 보이는데... 
내가 전화라도 한 통 걸어드려야 되나?' 

여러분, 그런 마음이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일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 마음을 닫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좋은 일 하려고 막 찾아다니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살다 보면 만난다는 거죠.

여러분, 제가 예언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설교를 들으셨기 때문에, 앞으로 며칠 내에
적어도 한 두 번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내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겁니다. 
도와줄 마음이 생길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 부담이 생길 겁니다. 
그때 여러분이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마음을 닫아버리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따라서, 작은 사랑의 실천을 할 때, 
우리는 점점 더 큰 사랑의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행사와 사역은 이것이 목표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 설립 1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돌봄 행사를 많이 하잖아요. 
헌금도 여러분이 열심히 하셨고요. 

지난 주에도 다비다 선교회가 반찬을 만들어서 
정월 대보름을 아주 특별히 잘 섬기셨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서... 행사로만 끝나는게 아니라, 
누군가를 도우면서, 내 안에 '돌봄의 민감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 나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구나... 이게 복되고 귀한 삶이구나...'
이런 것을 배워가는 거예요. 행사를 통해서 사람(나)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적용
오늘 주보에 나온 기도 제목이 이겁니다. 다 같이 읽으면서 기도합니다. 
「교회 창립 120주년을 맞아, 여러 가지 돌봄 사역을 기획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다양한 사역들과 행사들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돌봄이 필요한 상황에 눈 뜨고 

다른 이를 돌볼 수 있는 나의 잠재력을 알아가게 하옵소서. 
행사를 통해 사람이 (내가) 만들어지는 은혜를 맛보게 하옵소서. 아멘」 

교회에 많은 돌봄 행사를 통해서, 사람이 (내 신앙 인격이) 만들어져야 돼요. 
'아 세상에 이렇게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동시에 나도 누군가를 도우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거를 알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교회가 헌금을 전달해서 '어디 도왔습니다. 어디에 전달했습니다'
이렇게 교회소식 시간에 다함게 사진 보여주고, 박수 치고... 

그것도 해야 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몸으로 하는 겁니다. 내가 그 현장에 가는 겁니다. 

아픈 사람들 손 잡아주고요. 내가 그 느낌... 
나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전달되는 것을 느끼는 
그 느낌을 가지면서... 우리가 '돌봄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올해, 많은 섬김의 기회들을 일부러 마련하려고 합니다. 
성도님께 권유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를 먼저 소개하면, 

<러빙 핸즈>라고 하는 운동이 있습니다. 
이거는 '한 부모 가정'의 청소년, 소년 소년 가장들, 
혹은 '조손 가정'이라 그러죠. 즉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우는 아동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엄마 아빠 또래의, 삼촌 이모 또래의 어른들이 가정에 없으면,
이게 뭔가 삶의 빈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른 친구'가 되어 주는 거예요. 

한 달에 두 번 만나는게 기본입니다. 
그냥 저녁 같이 먹고, 잠시 얘기하고 그냥 헤어지면 됩니다. 

무슨 물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뭐 공부를 가르쳐 주거나... 그런 게 아니고요.
그야말로 정서적인 친구가 되어 주는 거예요. 

근데 이게 아주 많은 변화와 따뜻한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소위 멘토링 인데,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주로 한 4년에서 11년까지 계속됩니다. 

여러분 이거 자체가, 이 운동이 얼마나 내실 있고, 좋은 운동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보통 멘토링 해봐야, 뭐 한두 번 만나고, 2, 3년 가야 오래 가는 건데,

이건 4년에서 11년까지 지속하는 거거든요. 
세계 최장기 멘토링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자주 매일 만나는게 아니고요. 한 달에 한두 번씩 이렇게 꾸준히 만나는 거죠. 

물론 여러분, 아이들이 어른 만나는 걸 좋아할까요? 
그러나 여러분, 그 벽을 넘어서는 거예요. 

물론 이제 멘토링을 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배우는 게 대단히 많습니다. 

청소년의 건강한 자화상 확립에 도움이 되고요. 위기 상황 예방, 
지속적인 신뢰관계를 형성해서, 청소년들의 안전망을 형성하는 겁니다.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교회가 이미 잘 하고 있습니다. '하은회'라고 하는 모임에서요. 

여러분이 관심 가지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좀 더 확장하고 심화해서 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교육도 받으면서요... 

'아이들을 좀 어떻게 만나야 되는가?' 
그럴 때에 이 맨티들, 즉 돌봄을 받는 청소년들에게도 굉장한 복이 되지만, 
사실은 돌보는 어른, 그래서 아이들 만나는 어른, 
힘든 아이들 만나서 친구가 되어주는 연습을 하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이 바뀌는지요.

생각이 바뀌고, 감각이 바뀌고, 체질이 바뀌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가 '돌봄의 민감성'을 개발해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 돌보고 싶어도, 몰라서 못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누가 언제 돌봄을 필요.로 하는가? 
그걸 잘 몰라서 못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돌봄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교회 안에 '돌봄의 문화'가 생기면, 이 문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겁니다.
이 문화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돌봄의 민감성'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여러분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어떤 기준으로 심판하실까요? 
마태복음 25장에 아주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마25:42~44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예수님이 최후 심판 자리에서 '너희들이 나를 돌보지 아니하였다' 하시니,
염소 편에 속한 사람들이 하는 대답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님을 돌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주님이 그렇게 돌봄을 필요로 하시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친 적이 언제였습니까?' 
그들은 깜짝 놀라서 의외라고 반문하고, 항의하는 거예요.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돌봄을 필요한 상황이 있었으면, 
내가 당연히 돌보았을 거라는 거죠. 그렇지만 그런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에요? 이 사람들이 '염소'로 분류되어서 멸망하는 거는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자기들의 머리로는 다 알아요. 
예수님 섬기고, 연약한 사람이 있으면 돌봐야 된다는 건 다 아는데, 
언제 예수님이 그랬냐는 거죠.

그때 예수님은 '어린 소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25:45 

호세아서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4:6
좀 더 좁혀서 말하면 '내 백성이 민감하지 못하여 망한다'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해요. 
하나님 뜻대로 이웃을 돌보겠다는 생각은 충분해요. 그런데 민감하지 못 해요... 

▲정리하면, 여러분, 왜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감지하지 못합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사랑을 베풀어야지, 섬겨야지,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이 생길 때,

이렇게 내 마음에서 뭐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닫아 버린다는 거예요. 요일3:17

왜 그냥 지나가요? 
-어떤 사람은 바빠서 
-어떤 사람은 어색해서 
-어떤 사람은 자신감이 없어서 
-어떤 사람은 '뭐 나 같은 사람이 도와준다 그래서 오히려 폐만 끼치지 뭐'
-어떤 사람은 '뭘 고마워나 할까?'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나 이유가 있어서, 
'도와줘야지..' 하는 부담이 생기고, 그런 마음이 생기는데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거예요. 

성경은, 그럴 때, 그 마음을 닫아버린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요일3:17 

여러분, 마음을 닫으면요. 나중에는 완전히 닫힙니다. 
사람의 감각은, 안 쓰면 둔해집니다. 

하나님이 '네 지갑을 열라' 하실 때에,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네라' 하실 때에, 
'잠시 찾아가서 그와 함께 시간을 좀 보내 줘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에, 

그것이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음성일 때에, 
그것을 한두 번 무시하면... 계속 순종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성령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요. 성령이 그런 사람에게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냉담한 사람이 되고 마는 거예요.

중략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무슨 뜻인가요? 이 말씀에 아주 좋은 해설이 있습니다. 

약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배고픈 사람에게 '배부르게 하라' 말로만 그렇게 도와주는 거죠. 
그런 사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잘못 읽으면, 믿음이 아니라, 마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여러분 구원 얻는 믿음 진정한 믿음은,
사랑이, 행함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면, 우리가 사랑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사도바울과 야고보가 똑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믿음은 뭔가 하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갈5:6
믿음이 있으면 사랑으로 반드시 드러나고, 믿음이 사랑의 일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선행이 구원의 조건입니까? 
아닙니다. 구원은 오로지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행동은 돌봄은,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사람은 사랑을 실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늘가는데 실이 따라가듯이, 반드시 '사랑의 실천'이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사랑의 돌봄을 통해서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확신 가운데 살 수 있는 거예요. 

요일3:14절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즉 구원 받은 줄을 
'내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알게 된다'는 겁니다. 

나의 사랑의 실천으로,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의 실천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여러분,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내 사랑은 약해요. 내 사랑은 부족해요. 
별로 나를 구원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힘껏 사랑한다 그래도 우리는 바뀌잖아요. 
우리 사랑은 때로는 변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랑의 행함, 실천, 그것이 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사랑한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 은혜로 구원해 주신 줄 믿습니다. 

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자격 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다음에,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면, 사랑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는' 거예요. :17

▲구원의 확신, 여러분 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립니까? 
첫째로는 성경을 잘못 배워서 그래요. 

그런데 또박또박 또렷하게 잘 교육받고 배워도,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계신지 안 계신지... 뭐 그냥 오락가락 할 때가 있어요. 

지식이 없어서?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하는 아주 유명한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무소부재 omni-presence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걸 잘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어디에나 계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신데요. 
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고 살 가는 사람은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누구입니까? 「사랑에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할렐루야! 

사랑의 나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예요.
우리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먹이는 거예요. 도와주는 거예요.
외로운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거예요. 

내가 꼭 큰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함께 삶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나누고, 
형제가 눈물 흘릴 때에, 아파서 나도 기도해주고, 나도 부족하지만 위해서 눈물 흘려주고... 

여러분, 그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생생하게 현존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사랑방(구역모임)이 그거 하는 거예요. 
서로 아픔을 나누잖아요. 삶을 나누잖아요. 기도 제목을 나누잖아요. 
그럴 때에, 구원의 확신, 하나님이 내 삶에 함께 계신다는 생생한 확신 가운데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4세기 때 로마시대 때, 십대 중반의 군인 마르티누스 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주1) 
평소에 늘 다니던 길인데, 어떤 추운 날에 나미엔 에서 성문을 나오는데요. 

그날 따라 거지가 한 사람 보이는데, 이렇게 추운 날씨에 
'어휴 저 사람 얼마나 추울까?' 헐벗었어요.  

그래서 뭔가를 주고 싶은데, 가진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칼로 반으로 잘라서, 그 반을 입혀주고 떠났습니다. 

근데이 어린 소년이 그날 밤에 꿈에 예수님을 봐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데, 
'자 보아라. 지금 마르티누스가 아직 세례도 안 받은 예비 신자인데, 
나에게 이것을 입혀 주었다.' 
그런데 자기가 잘라준 그 옷을 예수님이 입고 계신 거예요. 

이 경험을 하고 나서, 그는 세례교육을 받고, 18세에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군 생활을 하는데, 로마시대 군 생활이 자기하고 너무 안 맞아요. 
그냥 의미 없는 전쟁, 살육 전쟁을 계속하는데... 

또 전쟁을 앞두고, 줄리안 황제가 병사들을 모아서 봉급을 주면서 싸움을 독려합니다. 
'저는 이거 안 받고 제대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그 자리에서 제대를 신청합니다. 

황제가 거절하죠. 그래서 제대를 못 하고, 
그 다음 날 갑옷 안 입고, 창도 안 들고, 십자가 하나 들고 적진으로 나아갑니다. 

근데 정말 놀랍게도, 그때 적군의 사신이, 줄리안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가지고
평화 제의를 합니다. 그때 그 지역에서 전쟁이 없어졌어요. 

그게 그 후에 굉장히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중요한 축일이 되었습니다. 
그날이 그 다음에 이제 시골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요. 
그리고 묵상하는 삶을 숨어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은혜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자꾸 그 시골로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같이 살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공동체가 생기고, 그것이 지금 프랑스의 처음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너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니까 사람들이 주교로 선임하려고
아무리 부탁해도 한사코 거절라고 도망다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꾀를 내 가지고요. 
'우리 성읍 뚜르에 심각한 병자들이 있는데, 와서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불렀어요. 

이분이 와서 딱 보니까, 주교 취임식을 다 준비해 놓은 거예요. 
'어이쿠, 아닙니다'하고 도망갔어요. 도망가서 헛간에 숨었는데 
그 헛간에서 거위들이 꽥꽥 울어가지고 들켰어요. 

그래서 억지로 끌려 나가서 뚜르의 주교의 자리에 앉습니다.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앙의 어른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모두 어디서 시작됐습니까? 
어느 날 밤에 그 추운 겨울 날, 지나가는 걸인을 보고 
'내가 뭐 좀 도와줘야 되지 않을까?' 

큰 거 한 거 아니잖아요. 자기 옷을 잘라서 주었던 그날 밤, 
그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럴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기 시작하면, 
결코 그냥 있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자라나고, 주님의 새로운 초청과, 새로운 도전을 주십니다. 
그 (도우라는) 음성을 따라서 계속 사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사랑의 기회'가 있어도 
그걸 외면하고, 그 외면을 반복하면 
점점 더 사람이 차가워지고, 냉담해지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17

예수 믿는다고 했는데.. 세례도 받았는데... 
구원의 확신마저도 흔들리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작은 사랑을 실천하라고 도전을 주실 때에 
내 마음을 닫지 말고, 그 음성을 따라 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생생히 거하시고, 점점 더 자라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 사랑의 크기 만큼.. 우리는 큰 사람, 세상에 복이 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복되고 의미 있는 사람으로 세움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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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마르티누스 
https://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saint&ctxtSaintId=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