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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1장 그 날이 오면

LNCK 2025. 2. 25. 11:4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종말, 내세, 심판

2025년 2월 2일 "그날이 오면(누가복음 21:34~38)"  - YouTube

 

그 날이 오면                눅21:34~38             2025.02.02.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21장 끝자락에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1:1절은,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얼마나 가난한지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두 렙돈, 동전 두 개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최고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예물의 양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아니시죠. 
그 여인이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사랑의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난한 과부는, 그 예물을 어디서 드렸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 이방인의 뜰 바로 안쪽에 있는 '여인들의 뜰'
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원통형으로 나팔처럼 생긴 13개의 연보궤가 있었다고 알려지는데, 
이 여인도 그 중에 하나에서 예물을 드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 성전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이었는가? ... 이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성전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희망이었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하지만 
세상에서는 괄시당하고 무시당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찾아오는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그보다 더 거룩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였습니다. 모두가 흠모하고 사모하는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외국에까지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평생에 한 번이라도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것이 소원이 될 만큼 
성전은 그들에게 지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눅21장의 시작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21:1절~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 다음 절부터 보면, 우리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러냐면,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소중하고 또 소중한 '성전이 다 무너질 것이라'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눅21:5~6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어떤 사람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그 위용과 규모와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예수님, 이 성전이 굉장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감탄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본문이 기록하고 있진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당시 제자들이 느꼈을 충격은, 아마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놀란 그들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질문하였습니다. 

눅21: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 질문은 상당히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어떤 큰 일이 다가올 때, 미리 판단해서 대비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 징조를 질문하게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받으신 이후에, 
여러 가지 간접적인 징조들에 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습니다. 

눅21:10~13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여러 자연재해를 비롯한 갈등과 대결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때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붙들려가고 핍박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거라는 말씀을 하시죠. 
21:24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성경을 읽노라면,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면, 
점점 밝아지는 낙관적 미래를 말씀하신 게 아니라 
점점 어두워지고, 갈등이 깊어지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런 세상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여러 가지 재앙의 파도가 일어나가지고, 그것이 중첩되면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게 다가오는 그런 상황을 느끼게 해줍니다. 

여러분 바라보기에 따라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지구촌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자연재해를 다 이루 말할 수 없죠. 
또한 사회적으로도 곳곳에 대결 구도가 심화돼서 전쟁들이 여러 군데서 이루어지고 있죠. 

그러면서 사람들의 악은 기승을 부리고 있고, 희망적인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점점 어두워지는 세상이죠. 

그럼 희망이 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그런 어둠 속에도 예수님께서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죠. 

눅21:17~19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캄캄한 세상이 온다고 할지라도,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그것은 그 와중에도 구원 얻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내의 믿음을 가진 이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이 구원에 동참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구원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이런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으니까 
그것을 잘 포착하고 판단해서, 미리 대비하는 것, 이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데 있어서 
직접적인 징조도 말씀하셨죠. 

20절을 보시면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 쌓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눅21:20

여러분, 내가 지금 성 안에 있는데, 적이 쳐들어와서 성벽을 뺑 둘러 에워싼다는 건
뭘 뜻합니까? 곧 성이 함락된다 하는 걸 뜻하는 거죠. 
그런 일이 벌어지거든, 빨리 알아차려서 대응책을 가져야 된다는 걸 말씀하신 겁니다. 

 

여러분, 이 두려운 이야기가 예수님의 입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졌는데, 
실제로 나중에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으신지 약 40여 년 후에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인 플로루스라는 사람이 강압 정책을 편 끝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여러 사람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것이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납니다. AD 66

그런데 예루살렘의 유대인 수비대가, 놀랍게도 로마군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자 로마의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안 장군을 파병하게 되죠. 

베스파시안 장군은 엄청난 대군을 몰고 와서, 67년에 갈릴리 지역을 쓸어버립니다. 
그리고는 68년 예루살렘을 겹겹이 에워쌌습니다. 
적이 포위하는 그런 형세가 이루어진 것이죠. 

그런데 그때 마침 네로가 죽음으로써, 로마 정정이 불안해지고, 내전이 발발하게 되자 
베스파시안 장군은 군대를 돌려서 로마로 돌아갔고, 스스로 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안은 네로 황제가 지은 정원을 허물고, 그곳에 콜로세움을 건축함)

그리고 티투스라는 자신의 아들을, 자기 대신 예루살렘으로 보내게 됩니다. 
이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은 70년입니다. 

70년 초에 성이 포위되었고, 성 안에 양식이 점점 떨어져 가면서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고, 그리고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그해 9월 달쯤 예루살렘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그때 예루살렘 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로마인들의 칼에 죽은 사람이 110만 명이나 된다고 하고 
무려 9만 7천 명이 노예로 끌려갔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일부는 그 옆에 있는 마사다로 넘어가서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최후의 항전을 펼쳤지만, 
73년이 되었을 때,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다 자결함으로써 
한 명도 남지 않고 멸망했다... 이게 바로 비극적인 유대-로마 전쟁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거죠. 성전은 어떻게 됐을까요? 
성전은 그 전쟁 통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화로 인해서 다 불타고, 
예수님 말씀 대로 '돌 위에 돌 하나가 놓이지 않을' 만큼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혼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동전 렙돈 두닢을 헌금드리고,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그 과부가,
40년 후에, 만약에 나이 많도록 장수해서, 
자기가 그렇게 사모하던 성전이 무너져 내리는 걸 육안으로 봤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여러분 그게 종말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충격 아니겠어요? 

◑자, 그러면 본문 눅21장에 나와 있는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이 이야기가, 
그 일이 있고 나서 2000여 년이나 지난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건 옛날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이후의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그 이야기 속에서 세상 모든 것의 종말, 
그리고 우리 개인의 종말,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눅21:29~31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여러분, 지혜로운 성도라면, 예루살렘의 함락을 말씀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세상의 종말을 미리 보여주고 계시다는 걸, 깨달아야만 될 것입니다. 

삼라만상이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지만, 
언젠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 이전에, 우리는 정해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개인의 차원에서도 종말은 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종말이나 개인종말이나 그 의미는 실질적으로 똑같다는 뜻)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고 한다면, 
이 종말에 관한 생각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대망하는 마음으로 살아야만 될 것입니다

문제가 뭘까요? 문제는 이런 징조들이 계속 일어나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그래서 아무 대비도 없이 현실에 도취되어서 살다가, 갑자기 멸망하는 것!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쭉 하시다가, 오늘 읽은 본문에 도달하면 
'스스로 조심해서 깨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눅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당시 예루살렘 성에 머무르던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종말이 아니라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즉 종말은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성도가 받아야 될 교훈이 어떤 것일까요? 

▲1. 첫째로 우리 모두는 욕망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방탕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 라는 것은 욕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4

어느 멸망의 현장이든지, 그 현장에는 
멸망이 다가오는 줄 모르고, 욕망에 도취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노아 홍수 때도 마찬가지죠. 마24:38~39절을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이건 자신의 삶에 도취되어 있었던 걸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들은 종말이 다가오는 걸 알지 못했어요. 홍수가 다가오는 걸 알지 못했어요. 
그냥 그렇게 자기 삶에 도취돼 있다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39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노아 홍수 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소돔성의 하나님의 유황 불이 쏟아질 때도, 
소돔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다 멸망당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욕망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2. 두 번째로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은 '스스로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죠. 

여러분, 남이 누군가를 깨워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조심하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각성해서 정신을 차려야 된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돕기도 하고, 일을 대신해 주기도 하고, 사랑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도울 수도, 대신해 줄 수도 없는 유일한 것은... 이 '구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 형제 가족이라 할지라도, 이것만은 대신해 줄 수가 없는 거죠. 
하나님 앞에 지극히 고독한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가 서는 겁니다.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말이 있죠. *키에르케고르
그러니 스스로 조심해서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죠. 

▲3. 세 번째로는 항상 기도해야 되는데,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날에 설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36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장차 올 악한 모든 일에서 살아남아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기 위한 기도, 
이 기도를 드려야 된다는 겁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36

여러분 기도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기도 중에는 더러운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드리는, 주술로 전락해 버린 
기도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도가 드려야 될 마땅한 기도는 '그날에 우리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한 기도, 이런 기도를 드려야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기도의 목록을 점검해 보고, 
자기 욕망을 위한 기도는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서기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성도의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적용

여러분, 이런 주제를 우리가 이렇게 묵상해 가노라면 
우리의 마음에 담아 두어야 될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바로 그날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4b 

그 날은 어느 날 갑자기 덫에 채이듯이,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다는 것을 말씀하는 거죠. 

또 35절은 그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외가 될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모두에게 임하는데, 
도적같이, 갑자기 들이닥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오늘은 내가 지금 고생을 많이 하고 있어.. 정말 힘든 하루하루야... 
그렇지만은 앞으로 한 5년, 10년 지나면, 오늘 내가 뿌린 씨가 싹이 나서 결실하게 
되는 날, 내 인생은 활짝 펴지고, 행복해질 거야...' 

이렇게 여러분이 미래를 밝게 예측하면서,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용기를 가지는 것... 이거는 참 귀한 겁니다. 
이런 걸 꿈꾸며 사는 건 귀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언제나 장밋빛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가 미래를 아름답게 꿈꾸며 산다 할지라도, 
그 끝에는 '그 (심판과 종말의) 날'에 대한 생각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내 인생이 오늘날 화려하게 펼쳐진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날이 갑자기 올 거야, 나는 그날에 대한 준비가 있나?' 
이것을 꼭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하는 이유 중 하나죠.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는 그날, 그날에 대한 숙고가 
우리 성도님들 속에서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대로 
더 간절하게 가까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이라는 유대인 랍비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통찰력을 줍니다. 

그의 명저인 <안식일>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가 주는 통찰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공간보다 시간에 관심이 있으시다' 
하는 통찰입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려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어디에 사느냐? .. 하는 공간의 문제, 
언제 얼마나 사느냐? .. 이건 시간의 문제죠. 
그런데 공간과 시간 중에서, 하나님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간에, 또 그 공간에 가득 쌓여있는 어떤 물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시고, 시간의 찰나에 나타나신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들이 공간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더 큰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하나님은 공간의 크기에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에 
'안식일'이라고 하는 시간에 복을 주셨다」 고 말씀하는 거죠. 

그래서 진정한 평안과 자유와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공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시간에 대한 경각심과 사랑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을 얘기할 때 
'저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그분이 계신다고' ... 이건 공간으로 말하는 거죠. 

혹은 '하나님은 여기 계시다. 저기 계시다' 이런 공간적 개념으로 
하나님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충만하게 계신 분이고,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성도는 공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시간에 대한 집착 애정을 가진 사람으로 옮겨 가야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공간에 매달려 평생을 살아요. 
더 좋은 공간, 더 안락한 공간, 더 큰 공간... 이게 우리의 꿈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좀 비슷한 개념으로 말씀드린다면 
단칸방에 살던 사람은 공간을 늘려서 방 두 개에 살고, 
방 두 칸에 살고 있는 사람은, 방이 한 서너 개 되는 집에 살고 싶고... 
이렇게 '공간의 확장'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 되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공간을 아무리 확장하고, 거기 가득가득 물건을 쌓아놓았다 할지라도 
시간이 뚫고 들어오면, 모든 게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이 끝이라고 하는 그날이 오는 순간, 즉 '그 날'이 닥치면, 
아무리 대단한 공간을 내가 확보했어도, 그 모든 건 소용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간 앞에서, 공간은 종말을 구하는 것이죠. 
공간에 매달려 살면 안식이 없죠. 

방 두 칸에 살면, 세 칸에 살고 싶고, 계속 아쉬운 생각만 들고, 
물건을 쌓아놓아도, 더 많이 쌓은 사람을 보면 풀이 죽고, 
만족도 기쁨도 없기 때문에, 거기는 감사도, 자유도, 영혼의 안식도 없는 것입니다. 

저명한 랍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통찰력과 관련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가 금방 떠오르잖아요. 

눅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이 부자가 한 해에 농사를 잘 지었는데요. 곡식이 엄청나게 많이 추수가 됐어요. 
공간이 문제가 생겼어요. 곳간이 너무 작아서 이 곡식을 쌓을 데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이 생각한 것은, 공간의 확장입니다. 혼자 생각하는 겁니다. 
'곳간을 헐고 아주 큰 곳간을 새로 지어야 되겠어.. 
그래서 곡식을 가득히 쌓아놓고, 또 그거 말고도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가득 구비해 놓아야 되겠어.. 그러면 내가 여러 해 동안 편안히 먹고 살 수 있을 거야...' 

생각만 해도 기쁨이 막 우러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어리석고 허망한 기쁨이죠. 

눅12:19절에, 그가 홀로 기뻐하는 모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이렇게 상상만 해도 행복한 거죠.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가 딱 임하는 겁니다. 
그 다음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오늘 밤이 바로 '그 날'이라는 거예요. 
이 부자의 '그 날'이 한 몇십 년 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늘 밤이 바로 '그 날'이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지금 지구촌에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이 
무려 80억이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8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심판과 종말의) 날'을 생각하며 살기는 하는 것인지...  No

다들 10년 후, 20년 후, 50년 후를 꿈꾸며 사는데 
이 80억 중에도 상당한 숫자는 바로 오늘 2025년 2월 2일 
오늘이 그날이 될 사람들도 이 지구촌에는 많이 있습니다. 

(*2024년에 전 세계엔 1억32백만이 태어났고, 6천2백만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하루에 17만명 꼴로 사망하는 거죠. 매2초마다 세상에 누군가는 죽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국은 하루에 약 1천명이 사망하며, 1년에 약 35만명이 사망합니다)

우리라고 해서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장담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모두가 다 '그 날'을 대비하는 믿음으로 
깨어있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 위에 돌 하나가 놓이지 않을 만큼 무너질 것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을 때, 
당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반드시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성전이 함락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를 위해 준비하자'

그래서 그들은 은밀히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때를 대비해서 옮겨 갈 처소를 준비했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AD 66년에 유대-로마 전쟁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그들은 미리 준비했던 곳으로 교회와 성도들이 옮겨 갔다는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데가볼리, 또는 베뢰아의 '펠라'라는 곳으로 옮겨 갔는데, 
예루살렘에서 약 80KM 떨어진 곳이죠.

실제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펠라에는 아주 늦게까지 
교회 공동체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펠라로 옮겨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아서, 
믿음을 간직하고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는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예수님의 그 경고를 마음에 담고 준비했던 사람들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날'을 준비하며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 날을 대비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 중에 하나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탐심을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목회자이면서 청교도 신앙의 대부로 불리는 
리차드 백스터 목사님의 <탐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가운데서 "생이 짧음을 기억하라" 라고 하는 챕터의 일부를 
제가 여러분들에게 발췌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아셔야 합니다. 
이 세상은 단지 여관이나 객선(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십시오. 
육신이 썩어갈 그 좁은 무덤에, 여러분의 그 많은 부를 모두 담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늘에 쌓아두어야 함을 아십시오. 

얼마나 짧은 인생인가,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인생입니까! 
여러분은 이미 죽은 것과도 같을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세상 어디에 있게 될는지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몇 번 숨을 더 쉬면, 목숨은 사라질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1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아멘」 


마치는 말
우리 모두가 그날을 마음에 품고, 그날을 위해 준비하는 성도로 
주님 앞에 서기 위한 기도를 깨워서 드리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공간에 집착하면서, '더 넓은 공간에 더 많은 물건을 쌓으리라...'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말하겠지만 
고대 광실 좋은 집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거기가 바로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막살이 작은 집이라 할지라도, 깨어있는 성도가 주님과 함께 있다면, 
거기가 천국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날이 오면, 불행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그날이 오면 오히려 복된 구원을 얻고, 천국 문앞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는 
축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시선을 그렇게 옮기면, 오늘 현실에서 벌어지는 기쁜 일, 슬픈 일, 
우리로 하여금 흥분하게 만드는 일, 분노하게 만드는 일 
혹은 또 행복을 느끼게 하는 여러가지 희노애락의 문제들을 
우리는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고, 

이 땅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를 누리면서 
언제나 초연하고 담담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낼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 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공간의 욕망을 부리치지 못하고 살아왔던.. 
거기에 일생을 바쳐왔던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옵시고 
이제는 '그 날'을 대비하여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주님 앞에 서기 위한 기도를 드리며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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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하우스 철거현장을 보고서 

 

마포 로터리를 지나다가 모델하우스를 철거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곳은 벌써 몇 번째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분양광고를 했다가

그 일이 다 끝나면 철거하고 또 새로운 아파트 회사가 다른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똑같은 광고를 하는 것이다.

 

잘 지어놓은 모델하우스가 하루아침에 철거되는 광경을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허무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돈을 들여서 멋지게 꾸몄던 것들이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사람들이 모여서 아파트 내부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도 했겠고,

이런 집에서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거닐었을 그 공간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린 것을 보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델하우스가 아깝다고 그것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모델하우스를 짓고 철거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그 장소에 맡겨진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대사회의 일상사의 한 부분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주변에 있는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보았다.

조금 옆에 ‘아크로타워’ 라는 건물을 짓고 있다.

그 건물들은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곳이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변에 있는 건물은 모델하우스처럼 자주 허물고 짓고 하지는 않지만

그 건물들의 자리에서도 지난 수백 년간 역사를 통해서 수도 없이

여러 건물이 지어졌고 또 철거되었을 것이다.

지금 서 있는 건물도 언젠가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서게 될 것이다.

 

지금은 멋진 실내 장식이 있고, 그 안을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고 있고,

일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그 건물도 수명이 다해서 철거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멋진 실내 장식들이 다 쓰레기가 되고

사람들이 왕래하던 그곳이 폐허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지금은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건물이 또 지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기간이 좀 길기는 하지만

모델하우스의 변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서 있는 건물도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이며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곳이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전체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영원히 이렇게 살게 될 것처럼 여기고 살고 있다.

 

그러나 모델하우스의 사용기간이 있듯이,

건물들이 사용되는 기간이 있듯이 사용기간이 있다.

 

언젠가는 철거가 되고 새로 지어질 것이다.

그 기간이 좀 길어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벧후3:4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개인의 생애가 끝나기 전에 그날이 오지 않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지금 세상이 철거되고 새로운 세상이 세워질 때가 있다고 한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2-13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의 진리이다.

 

하루아침에 다 허물어진 모델하우스를 보면서

나는 어느 회사가 또 멋진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짓게 될 것을 예상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도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가 시작되고 있다.

 

그 허허벌판이 된 공사장을 보면서도

나는 ‘아크로타워’라는 이름의 멋진 건물이 세워질 것을 예상한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무너져버리고

하나님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을 예상한다.

그곳에 입주할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