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9새벽-삶의 중요성-예레미야 32장1~15절- - YouTube
◈삶의 중요성 렘32:1~15 2018.10.29. 위 설교 정리
본문 렘32장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숙부 하나멜의 땅을 매입한 스토리를 통해, 예언의 메시지가 전개됩니다. -교정 예정-
◑도입
예레미야서에는,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선포하는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러나 예레미야의 삶 속에 일어났던 실제적인 일들,
그의 삶 속에 나타났던 일들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선포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다...라고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야가이 시대에 이렇게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레미야가 이렇게 주목이 되고, 예레미야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레미야 당시처럼) 이 시대가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혼란스러운 시기이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아주 중요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런 시대 속에서, 그런 혼란 속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라는 통로를 통하여서, 당신의 뜻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 유일한 하나님의 통로는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요긴하게 쓰시는 소수의 통로 중에 하나였고,
그래서 이 혼란스러운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그런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42년 가까이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6대 왕이었던 요시야 때부터 시작해서
여호와아스, 여호야김, 여호야김, 그리고 마지막 왕 시드기아까지
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왕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겼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에, 그에게 요구되어지는 삶이 있었다
그는, 그 혼란스러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중요하였고,
그리하여 그에게 요구되어지는 삶이 있었다.. 라는 것은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통해서 선포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사용하고 계신, 당신의 뜻을 보여주는 수단인 예레미야에게
또 한 가지를 더 요구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바로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요구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렘32:1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그래서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패할 것이다, 시드기야가 끌려갈 것이다.. 예언하죠. :3
32:3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그 와중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지시하십니다.
32:6~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이제 그 말씀에 합당한 어떤 삶이 또한 요구되어지는데요.
모든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선포를 시작할 때, 예언활동을 시작할 때에,
그 시대는 정말 좋은 시대였어요.
요시야가 종교개혁하고, 하나님께 사람들이 돌아가는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신앙회복이 이어지고 있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셔서
'남유다, 너희가 망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평안하다'고 말하는 그 상황에서 *6:14
모든 사람들이 다 희망에 차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요시야의 종교개혁 직후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고 '너희는 바벨론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선포해야 했던 사람이 예레미야 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만 선포하라 하지 않고,
오늘 본문은 '시드기야 왕 열째 해'지만 32:1
시드기야 왕이 왕으로 등극했을 때, 그 원년에는
하나님께서 멸망을 선포하시면서
'너희가 망할 것이다. 바벨론의 멍에를 지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가 실제로 멍에를 메고 다녔어요. 27:1~6
자기가 선포하는 말씀에 따르는 삶을, 예레미야는 직접 살아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서 지우시는 바벨론의 멍에를 져야 된다..
라고 예언을 선포함과 동시에,
예언자의 삶은 그것을 보여주도록, 멍에를 직접 짊어지면서 살았던 것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선포하는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앞서 렘27장이었고, 오늘 본문 32장은 두 번째 '삶(퍼포먼스)'을 보여줍니다.
그건 바로 '밭을 사는' 삶이었습니다.
지금 시드기야 왕 10년 째 되던 해입니다. 32:1
(그들에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라서 확실히 몰랐겠지만) 이제 약 1년만 지나면,
시드기야 재위 11년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이미 포위 상태에 있어요. 왕하25:1~2절에 2년을 포위했다고 했죠.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약 2년간 포위해서, 성 안에 든 사람들을 굶겨죽이고 있었죠.
(지금 포위한지 약 1년이 경과한 시점입니다)
벌써 2차 포로들이 다 잡혀갔어요. BC 597
그리고 바벨론 바벨론 군대가 성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망하는데,
하나님은 여기서 또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거예요.
'너희가 돌아올 것이다' 라는 것을 선포하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 스토리인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퍼포먼스 였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명하신 이유는,
'너희가 돌아올 것이다' 라는 것을 선포하심이, 그 속에 담겨있는 거예요.
예레미야는 입술로 예언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삶으로 거기에 상응하며 살아야 했던 거죠.
그래서 (살 필요도 없는 )밭을 실제로 산 것입니다.
▲근데 이게 상당히 '비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제 곧 내일 모레 휴지조각이 될 것과 다름 없는, 망하는 회사 주식을 매입하는
그런 일에 비유될 수 있는 거죠.
반면에 그에게 자기 밭을 판 숙부 하나멜은, 아주 영악하다 할 수 있죠.
이제 바벨론이 완전히 남유다를 패망시키면,
땅과 집을 다 빼앗길 게 분명하고 명약관화 한데,
그걸 조카 예레미야에게 팔아먹는 거죠.
이런 어리석은 거래를, 예레미야가 그것도 지금 '시위대 뜰'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무슨 부동산 거래를 하기에도, 쉽지 않은 상태에서,
바보처럼 숙부의 땅을, 은 17세겔을 주고 산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죠.
하나님이 시키시니까, 그 지시에 순종해서, 숙부의 땅을 산 것입니다. :7
그렇게 땅을 매입함을 통해서 주는 메시지가 뭐라고요?
'하나님이 남유다를 다시 회복시키신다', 즉 '땅이 다시 쓸모 있어진다'는 거죠.
일제 36년 시기에, 일제가 우리나라에 철도를 건설했는데, 경부선, 경원선 등
거기에 필요한 토지는 전부 무상으로 헌납받았다고 합니다. 강제로 뺏은 거죠.
토지 보상비를 한 푼도 주지 않았다고 해요.
그리고 공사에 필요한 노역은, 아주 싸게 임금을 주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
땅이고 뭐고... 다 바벨론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레미야가 은 17세겔을 주고 숙부의 땅을 샀는데,
그걸 예레미야가 사용하지도 못했어요.
그 후 약 50년 후에, 바사 왕 고레스 때 포로귀환이 있었거든요. BC 538~537
그러니 그 사이에 '희년'이 끼어있어서, 땅주인에게 땅을 돌려줘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완전히 바보짓을 한 것이죠.
말도 안 되는 토지 매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돈 문제를 따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주된 목적이었죠. 그 '땅 매입을 통해서!'
그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회복된다, 그래서 땅을 다시 쓸 날이 온다' 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너희가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걸, 지금 예레미야는 선포하는 거죠.
이렇게 예레미야는 물론, 다른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잘 되고 있다고 말할 때는.. 멸망을 선포하고, 멍에를 메게 된다 하더니,
이제 모든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서 '아 나라가 망했구나' 라고 결론을 짓고 있는데,
거기에서 '너희는 망하지 않는다. 너희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 예언하면서,
'밭을 사라. 희망을 가져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절망 가운데서는, 항상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인 거죠!
하나님이 그들을 망하게 하시는 것은, 진짜 완전히 패망시키는 게 아니고,
그들을 회개, 정결, 연단시켜서, 다시 쓰시고자 하기 위함 때문인 거였죠!
그래서 예레미야는, 멸망을 코 앞에 앞둔 시점에서 '희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두고서 '청개구리 기질이 있다' 그러는데, 사실입니다.
모든 예언자와 그들의 예언이 그런 성격이 있습니다)
▲이런 본문 상황에서, 제(설교자)가 한 가지 착안하는 것은
'하나님은, 예언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그 선포된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요구하셨고,
예레미야는 그래서 멸망이 초읽기를 읽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합니까?
밭을 사고 있는 거예요. 즉 자기가 선포하는 말씀과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참고로, 여기서 예레미야는 밭 값으로 은 17 세겔을 달아 주었는데요. 주1)
▲그런데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는 '포로에서 돌아온다'는 예언을 선포하면서,
남들이 다 땅을 파는 시기에 (숙부 하나멜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팔았을 거예요)
오히려 그는 땅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 설교자에게 삶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 설명을 잘 하면, 정보가 잘 전달될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이 있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통계적으로 보니까,
우리가 말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정보를 전달할 때,
그것은 상대방에게 7% 정도만 전달된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있잖아요. 말을 통해서 설교하고 있는데,
이 말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제일 효과가 좋으면 7% 정도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언어적 수단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7%,
그러면 나머지 93%는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서 전달된다는 것이죠.
표정, 몸짓, 그 외에도 화자의 삶!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었겠지만, 큰 효과는 없었을 것입니다.
일단 예레미야 라는 사람 자체를, 크게 신뢰하지 못하니까요.
그가 뭐 공식 직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큰 공동체를 이끄는 것도 아니고,
그의 집안도 뭐 유력한 가문도 아니고.... '몰락한 시골 제사장 가문'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던 거죠.
더욱이 '사람들은 자기가 듣기 원하는 말만 골라서 듣는다' 라고 하는데,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 같이
'듣기 싫어하는, 듣기에 난감한, 듣기에 끔찍한' 비호감의 전형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나라가 망한다, 차라리 항복해라, 포로로 잡혀간다...'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시위대 뜰'에 잡혀있는데, 시위대 뜰은 보통 잡범을 가두는 곳이 아니죠.
한 마디로 국사범,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을 가두는 곳입니다.
왕에게 반역한 사람들을, 특별히 잡아서 가두고, 지키는 곳입니다.
그런 예레미야의 말을 누가 귀담아 듣기나 하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레미야가 그 말한 대로, 그 예언의 말과 일치하는 삶을 살게 하시면서,
어떻게 보면, 그의 삶(퍼포먼스)을 통해서, 계속해서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셨던 거죠.
본문 렘32장의 주된 메시지는 '회복'이 그 주제입니다. ☞ <회복>관련글 모음
그렇지만 이 시간에는, 그 주제와 약간 각도를 달리 해서
'메신저의 삶의 중요성' 관점에서 저는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 그 말의 내용도 중요해요.
그러나 그것을 정말 전달하고 싶다면, 그 말과 일치하는 삶을
메신저가 계속해서 살아나가야지만... 그것이 제대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을 선포할뿐만 아니라, 그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예를 살펴보았죠?
27장에서, 자기 어깨에 멍에를 멘 것과,
본문 32장에, 남들이 땅을 다 파는 시기에, 반대로 땅을 매입한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삶이 그렇게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보여줄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어진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32:7~9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고엘)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고엘)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예레미야가 그 밭을 사는 것은, 그냥 이 땅이 회복될 것이니까 밭 사놔라,
그러면 너희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땅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이것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특별히 이 밭을 사는 것은 '기업을 무르는 행위' 였습니다.
즉 '고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고엘은 히브리어, 영어로 Redeem
지금 하나멜이라는 자기의 친족의 밭을 사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기업의 상속권이 내게 있으니까, 기업 무를 내게 (예레미야에게) 있으니까,
내가 친척의 기업을 무를 자로서, 그 의무를 다해서, 그 밭을 샀던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멜은 율법에 입각하여, *레25:8-55
다른 사람에게 밭을 팔기 이전에 사촌간인 예레미야에게 선매권(先賣權)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엘'이 무엇입니까? 고엘은 기업을 무를 권리가 있는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의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이 사람의 이름으로 되찾아주는 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그 숙부의 밭을 사지만,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니예요.
희년이 되면, 돌려줘야 되는 밭이고,
예레미야가 원하기만 하면, 내년이라도 돌려줄 수 있는 땅이죠.
그러니 땅이 꼭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니라,
친척 (여기서는 숙부) 을 구제하기 위해서, 구제를 목적으로 땅을 사 주는 거죠.
가까운 시기에 되돌려줄 것을 예상하면서, 숙부의 땅을 샀던 것입니다.
부동산을 매입했다기 보다는, 그냥 구제한 거예요. 거기에 더 근본 목적이 있었죠.
그러니까 '고엘'(기업 무르기) 라는 것은
이 사람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내가 다 '회복'시켜 주는 제도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으로 인한 멸망에서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자신의 전부인 아들을 주셨어요. 뭐로? 고엘로 주신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 우리가 짐진 죄짐들,
그런데 나를 대신해서, 나의 모든 죄의 값을 감당하기 위해서
나의 고엘로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주신 거예요. 그래서 '회복'시켜 주셨어요.
그 귀한 피값을 지불하시고,
내 모든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다 찾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구속받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신부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지금 이 밭을 사는 것은,
단순한 포로 귀환의 소망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게 바로 '구속', 즉 '회복'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가 친척의 밭을 산 것은, '구속'을 예표하는
아주 중요한 행위였다 라는 것입니다. '회복'을 예표하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그 말씀을 명확하게 선포해서 보여 줄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고엘의 삶이,
결국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보여주는 삶이 되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삶이, 신약의 예수님의 삶을 예표해서 보여준다는 해석인데,
이렇게 보는 이유는, 본문에 '고엘'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32:7에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고엘)가 네게 있느니라'
32:8에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고엘)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여기서 '고엘' 즉 '구속'이란 말은,
당시로서는 가난한 친척을 도와준다는 의미로 쓰였지만,
넓게 보면, '신약 성도의 구속, 속량, 회복'을 예언한 것이다... 라고 보는 거죠.
그러니 예레미야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락의 요지는, '예언자와 그의 삶을 중요하다' 입니다.
예레미야가, 자기 삶을 통해서, 장차 있을 그리스도 구속을 그림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 다윗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누가 떠오릅니까?
그는 애매하게 고난을 받습니다.
그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광야를 전전하고, 굴 속에 있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 이런 자들을 통해서
그의 나라를 시작하고 있는 이 모습을 통해,
그러면서도 그가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게 되는 거예요.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받는 고난 속에서,
정말 죽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 고통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는 그의 삶!
나중에 1천년 후에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1천년 전에 다윗이 했던 그 고백을 그대로 인용하셔서
십자가 위에서 그 말씀을 하심으로써
사실 1천년 전 다윗이 살았던 삶은,
1천년 후 예수가 살고 있는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샘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예레미야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거예요.
혼탁한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와닿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난 이후에,
선지자가, 설교자가..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삶이,
결국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보여줄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밭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로서는 미래에 있을 포로 귀환을 예언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앞으로 신약시대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고엘)의 은혜'를 예언하고, 예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용하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왜 소중할까요?
마치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처럼, 이제 우리도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잘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들, 우리는 멸망을 보고 있어요.
그러나 또 하나, 우리는 이 멸망 속에서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오늘 이 예레미야는 소망을 전하고 있어요.
예레미야 삶이 소중한 이유는, 우리의 삶이 소중한 이유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 시대의 예레미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메시지와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 부끄러운 순간이 있었는데, 예수 믿지 않은 사람에게,
저는 웬만하면 만나면 복음을 잘 안 전합니다.
속으로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전하라'는 감동을 주실 때만, 제가 복음을 전합니다.
저는 증인이니까, 하나님이 저를 증인이라고 얘기하셨으니까,
증인은, 자기가 증거하고 싶다고 툭툭 튀어나와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재판관이 '나가서 증언해라' 라고 할 때가 있어요. 그걸 잘 분별해야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옛날 지인 A를 만났어요.
저는 속으로 '복음을 전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A는 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면 딱 알잖아요. 제가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를...
그러니까 A가 먼저 얘기를 꺼내요.
'나는 예수 안 믿을랍니다. 교회 안 갈 거예요.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이런 얘기를 딱 하는 거예요. 근데 기독교 신앙에 대해 아주 진지했습니다.
그래서 A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A는, 자기 주위에 신자가 있어서,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서 종종 얘기를 듣는데요.
자기 친구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이 말이 자기 마음에 확 새겨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다 지켜보고 계신다'
자기 친구 교인이 하는 이 말도, 자기는 믿는다는 거예요.
근데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서 반감이 확 생겼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에게 그렇게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서 종종 말해주는 그A의 친구가
평소 삶에서, 마치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더라는 거예요.
교회에 다닌다는 자기 친구, 자기에게 종종 신앙을 권하는 그 친구가
법도 쉽게 어기고.. 거짓말도 쉽게 하고..
이렇게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A는, 자기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가, *최대 7%의 효과
자기에게 전도하는 그 친구의 삶을 보면서 *언어 이외의 요소는 93%라 그러죠
'아 하나님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천국이 있다면서요? 우리가 이 땅에 살다가.. 그게 끝이 아니고,
천국이 있다면서요? 근데 거기는 억수로 좋은 곳이라면서요?
근데 나는 천국이 없다는 걸, 확실히 그 친구를 통해서 알았다'는 거예요.
자기 친구는.. 아니 천국이 그래서 좋다는데, 천국을 안 가려고
그렇게 악착같이 애쓰는 사람처럼 보이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너무 세상에, 이 땅의 것들에 집착해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다는 거죠.
덩달아 천국이 믿어지지 않더라고... 말하더라고요.
물론 그렇게 말하는 A가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통해, 평소에 전도가 될 수도 있고,
평소에 전도의 문을 막을 수도 있다는 거죠. 주2) '존재론적인 전도'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친구가 자기에게, 그렇게 교회 사람들을 욕한다는 거예요.
청소년 자녀들이 전도가 잘 안 되는 이유가,
부모들이 집에서 '교회 욕'을 종종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인 거죠. 욕하는 사람은 카타르시스를 잠시 느낄지는 모르나,
자기도 못 들어가고, 또 들어가는 사람도 막는 꼴이 되는 거죠.
마치는 말
우리의 삶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우리의 삶은,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하나 우리 삶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시대에 왜 사람들이 왜 더 강팍해졌고, 왜 하나님을 더 거부하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더 똑똑해지고, 과학이 발달하고, 더 지식이 높아졌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줘야 될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은 이유는 3%의 소금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3%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은 듯 하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메시지만 전해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언어로 전달은 최대 7%
하나님은 더 많은 93%로, 삶을 살라고, 삶을 보여주라고 요구하신다 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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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예레미야가 지불한 17세겔의 가치
요즘도 이스라엘 화폐 단위가 '세겔'이죠.
이 금액이, 하나멜이 판 밭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에
비싼 값인지, 싼 값인지 우리가 알 수 없고, 그 땅의 크기가 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1세겔은 약 11.4g 정도 되는 무게인데, 그렇다면 17세겔은 약 194g 이죠.
참고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은시세가 금시세보다 2.5배 높았다고 합니다.
주2) 존재론적 선교, 존재론적 전도
어제 우리교회 집사님으로부터 이런 감동적인 간증을 들었어요.
정말 자기와 친한 친군데 독실한 크리스천이에요.
근데 이분이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서 일하다가
자녀들 때문에 다 정리해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근데 여러분, 미국 이민 생활이라는 게,
겉은 화려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지만, 정말 맨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한국에서 뭐 영어 난다 긴다 해봐야, 미국 가면 하나도 안 통해요.
기본적인 대화부터 안 통하는 경우가 많아요. 발음이나 액센트가 틀리니까요.
이제 허드레 일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그것도 외진 시골에
허름한 수퍼마켓 하나를 꾸렸어요.
그 동네가 이제 멕시칸도 살고 흑인들도 있다 보니까
주인이 뻔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들어와서 물건을 집어 간대요.
근데 그걸 또 강력하게 맞대응하면, 자칫 잘못하면 사고가 나죠.
이 분이 신앙인이다 보니까, 뭐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서,
동네 수퍼 그 가게에, 하루 종일 CCM (복음성가) 을 틀어 놨대요.
'그 CCM 이 무슨 영향력을 끼치기나 할까?' 처음에 그렇게 생각을 했겠죠.
근데 일부 주민들이 계속 도둑질을 해가는 겁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이라면, 미치는 일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늘 사고 위험을 안고 사니까 아슬아슬 하죠.
일부 동네 사람들이 와서 돈도 안 되고 막 물건을 집어 가고...
그렇지만 절대 그 사람들과 안 싸웠대요.
그리고 계속 CCM 만 틀어놨대요.
그의 속은 몇 년 동안 얼마나 많이 무너졌는지요...
그런데 차츰 차츰 마을에 이상한 기운이 도는 거예요.
이 동네 사람들이 아프면, 찾아와가지고 기도 좀 해달라고 그러고,
그래서 장사하다가 잠시 기도도 해주고...
자기가 한 번도 예수 믿으라고 전도지 한 장 준 적이 없는데...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예요.
자기들도 이게 나쁜 짓이며 '저 사람 참 대단하다' 그거 다 알아요.
그가 딱 하나 한 거는, CCM 틀어 놓은 거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들과 다투지 않았다는 것!
이제 동네 사람들이 점점 그 마켓에 와서 자기들 속을 풀어놓는 거예요.
또 그 마켓에 와서 기도도 받고 가고... 기도해 달라고 기도도 요청하고...
그래서 점점점 그 마을이, 이 조그만 마켓 때문에 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소위 '존재론적 선교'입니다.
자기가 그 위치에서, 어떤 존재로 이웃에 대해서 서 있느냐?
세상과 싸우려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하게 만들고
그러려면 내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는가?
그걸 명확히 알고 있는 분이니까, 손해가 나도.. 사고 위험이 있어도... 안 싸우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알아 듣던, 못 알아 듣던
그 은혜스러운 CCM을 꾸준히 틀어놓는 가운데
그 음악이 마을 사람들 귀에 계속 쌓이고 남았겠죠.
그러고 그 마을이 변해 버렸어요.
이것이 우리가 꾸준히 그동안 주창해 왔던 '선교적 교회'의 샘플 입니다.
여러분 또 한 주간도, 뭐 대단하 거 하려고 하지 마세요.
'어떻게 사랑을 할까, 내 옷을 벗어 줄까?' 그러지 마세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오늘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로써 승부를 거는 한 주 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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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그래서 숙부의 아들이 시위대 뜰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찾아왔는데, 32:8
예레미야는 이 문제로 예루살렘을 떠나 아나돗으로, 땅을 인수하러 가는 도중에
체포되었다고 말합니다. 37:11~14
당국자들은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러 하는 줄로 오해했던 거죠.
그러니 시위대 뜰에 잡혀있다가, 잠시 풀려났다가, 다시 붙잡힌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