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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5장 성령님과 친해지려면

LNCK 2025. 2. 27. 11:2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임재, 교제, 친밀

[주일예배] 성령님과 친해지려면 / 에베소서 5:10 - YouTube

 

성령님과 친해지려면           엡5:10                  2025.02.02.  

◑도입

2025년 들어서 "성령 안에서" 시리즈로 계속해서 성령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님과 친해지려면" 이런 제목입니다. 

지난주 설교 제목은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라' 
그래서 지난주에는 초점과 집중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우리가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되는가요? 
그 이유는 오늘 설교 제목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성령님께 초점을 맞춰야 되는 거죠. 

동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먼저 친해져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렇죠.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해도, 한 번쯤은 같이 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여행에 동행하려고 하면, 친밀함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아요.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가운데 성령님과의 친밀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우리들이 성령님을 기뻐해야, 
성령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수 있어야,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겠죠.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는 그런 강력한 내적 음성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인데 
우리들의 삶에, 우리들의 신앙에 성령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적어도 우리가 '나는 성령님과 이만큼 친밀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우리들에게 있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함께 
말씀을 듣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오늘 본문 말씀이 짧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엡5:10

 

새번역은 '시험하여 보라' 대신에 '분별하십시오', 현대인은 '살펴보십시오'

여기 '시험'이라는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죠. 
'시험'하면, temptation 유혹이나, 혹은 test .. 그런 시험을 생각하지만 
오늘 여기 나오는 시험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NIV 영어성경에 보면 여기 '시험하여 보라'라고 하는 말을 
'find out, 찾아보라, 분별해봐라, 자세히 알아보라'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1)

여러분, '주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성령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생각하고 행하십시오'  *메시지성경

사실 오늘 설교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요. 
이거 하나면 돼요! 그렇지만 조금만 더 설명을 할게요. 

 

성경의 '생각하라, 분별해라, 살펴보라'고 하는 말을,

제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를 해봤는데  
'믿음이 없는 생각은 불신이고, 생각이 없는 믿음은 맹신이다.' 

우리들이 믿음 없이 생각하면, 그것은 불신이 되고요. 
생각 없이 믿으면, 그것은 맹신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데 '생각해 보라'고 하는 거예요.  *엡5:10 '시험하여 보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생각하여) 보라'  엡5:10
'너희들의 믿음이 어떠한지 생각해 보라' 

요즘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는 걸, 별로 좋아하는 거 같지는 않아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그런 기대를 할지 몰라요. 
오늘 말씀을 듣고, 오늘 제가 하는 설교 가운데 
우리들의 삶의 지침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그대로 따라하면 좋겠다... 

근데 저는 제가 목회자로서 여기에 있어서 설교할 때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능력으로 여러분들에게 답을 주겠습니까? 
단지 저는 여러분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근데 그 인도하는 역할이 뭐냐면, 여러분들로 하여금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씀에 반응할 수 있도록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제가 한다는 생각을 해요. 

생각하는 건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죠. 

▲옥한흠 목사님이 '성령'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이어령 교수님의 책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수염을 길게 기르는 할아버지가 있었대요. 
30년을 수염을 기른 분인데,

어느 날 동네 아이가, 그 할아버지에게 와서 물었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에 넣고 주무세요, 빼고 주무세요?'

할아버지가 그 얘기를 듣고 보니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아 오늘 내가 가서 집에 가서 자보고, 내일 얘기해 주마' 

그리고 할아버지가 집에 가서 이렇게 잠을 자는데, 
수염을 이렇게 이불 속에 넣어 놓으니까 너무 답답하고, 
수염을 빼놓으니까 뭔가 좀 이상하고... 

내가 수염을 넣고 잤는지, 빼고 잤는지... 생각이 잘 안 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걸 생각하는 순간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거죠.」 

우리가 생각하기 전에는, 불편함이 없었던 일들인데, 
생각해보면, 우리들에게 불편한 일들이 있습니다. 

즉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근데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불편하다고 불행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불행한 것이, 우리를 올바로 인도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또 우리는,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그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경험들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친한 목사님 부부가 있어서, 한번은 그분들을 위해서 
제가 알고 있는 영화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있었고, 시사회를 해서, 
그 목사님 부부를 초청을 했어요. 

뭐 굉장히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라서, 그 분이 좋아할 줄 알았어요. 
근데 문제는 그 영화가 조금 무서운 스릴러 영화인데, 
그 사모님은 그런 공포 영화나 스릴러를 못 보는 분이에요. 

결국 영화가 끝나고 나서 식사를 했는데, 사모님이 체해 가지고 며칠 동안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깨닫게 된 거죠. 
'아 저 목사님과 사모님은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걸 알게 된 거죠.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게 되고,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들이 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성령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할 때,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원하는 것에 하나님이 나를 좀 맞춰 주세요' 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우리들이 맞춰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려면 
'성령님, 나와 함께가 주세요. 내 뜻대로 가 주세요'가 아니라 
'성령님이 가시는 길에, 우리들이 동행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성령님과 친밀해 질 수 있는 거예요. 

성령님을 알아갈수록 커지는 기쁨을, 우리들이 경험하고 살아가는가요? 

제가 요즘은, 과거에 불렀던 찬송과 찬양 중에도, 
'이전에는 그 의미를 잘 모르고 불렀는데, 이제 보니 참 좋다... 
이렇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어요.'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죠. 

「주와 같이 길가는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 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430장」

너무 좋잖아요.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그럼 제가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주와 함께 길 가는 것이 좋으세요? 너무 기쁘세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행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도 바울이 왜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에게, 왜 이 편지를 썼을까요? 
'여러분,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엡5:10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왜 이런 편지를 쓰고 있는가?' 
사도 바울이 있었던 그 시대에, 에베소 교회에는 성경이 없었어요. 

우리들은 지금 많은 것들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이런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구나'
 
근데 그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여러분,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삶으로) 시험해보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한번 살아 보십시오!' 

그럼 여러분들의 삶에서 인격적으로, 구체적으로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주고 싶은 도전이에요.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면서, 
그 기쁨을 우리들이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가요?  *주제 

우리들이 성령님의 임재,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나, 여러 것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우리들이 그 말씀 위에 서 있는가? 

우리들이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령님과 동행하는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들이 알고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은 성령님과 친해지고 싶으세요? 
그러면 성령님과 친해지기 위해서,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요? 

지난 몇 주 동안, 제가 요셉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했습니다. 
명절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왔던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루 길쯤 갔는데, 보니까 일행 중에 예수님이 안 계셨어요.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가, 어떻게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고, 
거기에서 예수님을 데리고 함께 동행하게 되는 거예요. 

아주 쉬운 이야기인데, 중요한 진리를 하나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에 성령님이, 우리들과 동행하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성령님이 계시는 곳에 우리들이 가야 되는 거예요. 

이 '와이파이' 라고 하는게 참 좋은 예를 보여주는 거 같아요. 
저는 설교를 하다 '성령님의 임재 범위' 라고 하는 표현을 썼는데, 
우리들이 성령님의 임재 범위 안에 있을 때, 우리들이 성령님과 동행해요. 
마치 와이파이 존이 있는데, 이게 잡히는데 있어야, 인터넷이 가능한 거죠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성령님의 임재범위 안에 있는가요?' 

이것이 물리적인 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예배하고, 말씀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는데, 
성령님과 친밀해지기 위한, 성령님의 임재의 범위 안에 있는가를 
우리들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길을 바꿔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방향에, 우리들이 서 있을 때, 
우리들이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왜 우리들이 성령님께 맞추어야 될까요? 

성령님이 우리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들이 성령님께 맞추어야 될까요? 

▲1. 우리들이 성령님과 친밀해지면, 성령님께 우리들을 맞추면,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이 '당신 뭐 하는 겁니까?' 라고 하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5:17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곳에 동참할 때, 아버지의 성품이 나타나는 거예요.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에 우리들이 동참할 때, 
성령님과 친밀함,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성령님께 순종할 때, 
성령님의 성품이, 주님의 성품이, 우리들에게 나타나요. 

그런데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종한다' 하는 말은 언제 적용이 되는지 아세요? 
그냥 우리들이 옳은 길을 가고 있을 때, 
그런 때는 별로 순종이 우리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고민하는 순간이 있어요. 
내가 가는 길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이게 옳은 길인지를 고민할 때, 
그때 순종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거죠.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들이 명확하게 옳은 길을 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들의 길이 모호해서, 성령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할 때, 
그때 우리들에게 순종이 필요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들이 여행을 하는데, 
제가 젊은 시절에는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대잖아요. 

제가 미국에서 살 때, 여행을 하려고 하면, 지도를 사서
지도를 보면서 이렇게 여행을 했던 기억이 나요.

길을 가다가 길을 잃으면, 우리들이 지도를 봐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혹 누가 길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봐야 되는 거예요. 

물어볼 사람도 없고, 지도를 봐도 모르겠다면, 
그 길을 아는 사람이 있을 때까지, 때로는 우리들이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우리들이 성령님께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성령님을 기다리는 거고, 그것이 이제 순종할 때가 되는 거죠.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길을 가르쳐 주는 지도와 같은 거예요. 
우리들에게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성경을 허락해 주셨어요. 분별하도록!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이 성경을 보면서,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들이 깨달아 살아가고 있는가요? 

저는 우리 교회가, 우리 성도들에게, 큰 축복으로 함께 하고 있는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뭐예요?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거예요. 

제가 왜 자꾸 여러분들에게 묵상을 강조하는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 성경 말씀을 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을 온전하게 인도해 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들이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교만이거나, 자기 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령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들이 찾아봐야 돼요. 
생각해 봐야 되는 거예요.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삼하6장에, 다윗이 왕국을 통일하고 난 후에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고 난 이후에, 첫 번째로 한 일이 뭐냐면 
법궤를 찾아오는 일이었어요. 여러분들 그 이야기 아시죠?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거기 유명한 사건이 하나 일어나요. 
수레에 법궤를 실어서 가지고 오는데, 소가 이렇게 뛰자 
웃사 라는 사람이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댔는데 죽잖아요.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법궤를 옮기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순조롭지 않았어요. 

역대상 15:13절에 보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다윗이 깨닫게 된게 있어요.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내가 행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일이 순조롭게 되어지지 않았어요. 

여러분,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실 수 있다.' 
그렇게 오만하지 말라는 거예요. 
끊임없이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묻지 않으면, 우리들이 순종할 수 없는 거예요. 

△가끔 건축하는 교회에, 어떤 문제들이 생기기도 해요. 
아니 건축하겠다고 하는 선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왜 시험에 들고 문제가 될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거죠. 

제가 요번 주간에 '아 참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서울의 어떤 지역에 재건축을 하려고 조합을 만들고, 
사람들이 전부 이제 싸인을 받는데, 100% 싸인을 받아야 재건축이 된다 그래요. 

그래서 조합원들이 이렇게 싸인을 받고 있는데, 
몇 년 동안 딱 한 곳에서 도장을 안 찍어 주는 거예요. 
그 마을 입구에 있는 교회에서 도장을 안 찍어 주는 거예요. 

뭐 그냥 실제 액수까지 말 해서 죄송하지만, 
그 조그만 교회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액수가 한 25억쯤 되는데, 
거기 있는 목사님이 100억을 달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2년 3년 지나면서 일이 진행이 되지 않는 거예요. 

100억을 받아야 되는 이유는, 그 보상을 받아서 교회를 새로 짓기 원하는 거예요.
결국은 협상을 해도 안 돼서, 제 친구 목사님이 중간에서 중재를 하게 되었고, 
100억 보다는 조금 못 미치는 그런 액수로 협상이 타결돼서 
재건축 공사에 들어가게 된다는 거예요. 

중재한 그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렇게 해서 교회를 지으면, 영혼을 잃어버릴 텐데...' 
'그 돈으로 아름답게 교회를 지어도, 그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을 텐데... 
그가 번듯한 교회를 짓는다고 해도, 그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그게 제대로 된 일인가?'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라고 하는 말 가운데, 
우리들의 신앙의 정도를 따라, 우리들이 올바로 한다고 행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우리들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일이 풀리지 않거나,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어느 날 우리들에게 근심이 찾아왔다면,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이 시27:4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이게 성전 건물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죠. 

다윗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어요? 
그 위대한 다윗이 하나님을 벗어나서 범죄할 수 있었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일을 했었던 그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제가 성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그거 제가 한 가지 구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성령님과 친밀해져야, 우리들의 삶에서 예수님을 닮은 성품이 나타나는 거죠.
제가 이렇게 만나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하면서 
저 스스로 고민되는 때가 참 많아요. 

교인들한테 '믿으라..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 이런 얘기를 참 많이 하는데 
제 눈에 보기에, 예수를 믿고, 예수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이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증거가 
내 속에서 '나 구원받았어!' 라고 하는 외침이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가, 성령님과 친밀해져서, 
우리들의 삶에 예수님 닮은 성품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하는 고민/생각을 해 봅니다. 

▲2. 두 번째 성령님과 친해지려고 할 때 
우리 안에 죄의 인식이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많다' 그랬어요. 

롬5: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의 인식과, 죄를 짓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제가 성령님의 특성 가운데 '센서티비티' 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민감성!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임해서 우리들이 성령님과 친밀해질 때 
우리 안에 죄에 인식이 깊어져요. 

죄의 인식이 깊어질 때, 우리는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요.
이런 비유가 좋을 것 같아요. 

여러분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때때로 앞치마를 착용할 때가 있죠.
까만색 옷을 입고 가면, 앞치마를 굳이 안 해도 돼요. 
근데 흰 옷을 입고 가면, 앞치마가 필요한게... 이게 sensibility 예요.
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 때, 우리들이 순결해요. 우리들이 성령님을 닮아가게 돼요. 

근데 만일 내가 도덕적인 철저한 기준을 가지고 착한 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성령님과 친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내 속에 죄성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성령님과 친해지기 시작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니까 두려웠잖아요. 
그때 베드로가 뭐라 그래요? '주여 나는 죄인으로서이다. 나를 떠나소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떠나시지 않았어요. 
주님 앞에 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베드로가 죄의 인식이 깊어졌는데 
주님이 베드로를 불러서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신기한 일입니다. 
죄의 인식이 깊어지는데, 성령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거예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께 부름(사명)을 받는 장면이 나와요. 
이사야가 두려웠어요.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주님, 제가 제 입술은 부정해서 제가 주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했더니 
하나님께서 부젓가락으로 제단 숯불을 가져와서 
그의 입술을 지져서 그를 사용하세요. 

참 신기하죠. 우리에 대한 '죄의 인식'이 깊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가장 친밀하게 역사하세요

아니,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우리들이 바로 거쳐 가야 되는 과정, 통로가 있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민감한 인식이에요. 

죄에 대한 인식은, 우리들이 죄를 경험하고, 죄를 짓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우리들은 죄를 짓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걸 죄라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과 친밀해지면,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죄의 인식'(민감성)을 주시는데 
그게 뭐냐면 '네가 지금 생각하는 것,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성령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들이 죄를 짓기 전에,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우리들에게 미리 알려 주셔서 
우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세요

제가 이런 표현도 종종 하죠.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참 신기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몰라요. 
왜요?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우리들이 감지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불편해지고, 성령님의 불편함을 우리들이 감지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죄로 나아가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고통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의 '죄에 대한 인식'이 깊어져서 
성령님이 근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5:20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런 도전을 좀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나가서 살아가는 동안 
'성령님, 제가 성령님과 더욱 친밀해지고 싶습니다' 라고 할 때 
여러분들에게 깊어지는 죄의 인식, 

'야 이거 내가 참 마음이 불편하다.' 
성령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시는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3. 세 번째로 성령님과 친해지고자 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더 큰 기름부음에 대한 열망이 생깁니다. 

제가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성령님과 친해지려고 할 때, 우리들 속에 성령의 기름부음의 열망이 생긴다!'

이 열망은, 어떤 이기적이고 자기 욕망적인 것하고는 다른 차원이에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우리들이 열망하기 시작할 때, 
우리들 속에서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요? 

더 큰 기름부음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성령님의 임재 앞에서 내 삶의 패턴을 바꾸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요. 

성령님의 임재에 대한 큰 갈망이 우리 가운데 생길 때 
'성령님, 성령님의 임재를 내가 환영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요. 

△제가 어떤 집에 갔어요. 갔는데 그 집주인이 저에게 
'목사님 오셨어요? 너무너무 환영해요!' 이러는 것과, 
그저 떨떠름하게 '목사님, 어쩐 일로 오셨나요?' 이런 것은 다르지 않겠어요?

저는, 성령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게, 그런 인격적인 차원이라고 생각해요. 
'성령님, 제가 너무너무 환영해요. 성령님, 내 안에 오세요!' 
그때 성령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거죠.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이 있을 때 
우리들의 삶의 패턴이 바뀌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갈망함으로 성령님의 환영함을 우리들이 표현할 때, 성령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진부한 우리들의 삶에 습관이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를 기뻐할 때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바꾸는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부채의식이나 의무감 같은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우리들이 표현하는 것, 
그것이 성령님과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표시입니다. 

△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자비와 은혜에 대한 차이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냥 내가 한 일에 대하여 너를 벌하지 않겠다.. 라고 하시는게 
아닙니다. 그건 자비지요. 

그분은 극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것을 주십니다. 
완전한 용서와 완전한 삶을 순전한 선물로 주십니다. 

그건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를 부모가 그냥 봐주는 정도가 아니라 
한없이 사랑하기에 아이스크림까지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이 아니라  *자비
우리들이 기대할 수 없는 것을 주시는 것에 대한 기쁨, *은혜

성령님께서 우리들과 동행하실 때, 우리들이 성령님과 친밀해질 때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우리들이 의무와 부담감으로 우리들의 죄를 사해준 그 차원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주신 은혜로 인한 기쁨을 우리들이 누리는 것, ... 이것이 은혜죠.

제가 이런 표현을 자주 쓰잖아요. 
'예수 믿는 우리가 행복하고 기뻤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하나님의 시선 QT>에서 거룩함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기억나세요?
거기서 '거룩함'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거룩하라고 우리를 부르신게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룩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우리들이 거룩하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잘못 이해하면 큰일나요. 
거룩함은.. 우리들이 거룩함을 이루기 위한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다 보면, 거룩함에 대한 결과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거룩하기 위해서, 부담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우리들의 삶이 거룩해지는 결과를 맞이하는 것이죠.
그것이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친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게, 거룩함을 만들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데 주와 함께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며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해주세요. 저와 동행해 주세요.' 
이렇게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은 완전함을 의미하는게 아니에요. 
만약에 완전함을 이야기한다면, 저는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거룩함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에 대한, 기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완전하라 '의 의미 https://rfcdrfcd.tistory.com/15976649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의 죄의 크기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아요. 참 복음이에요. 
우리들이 지금 어떤 모습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 모두에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금년 8월에 '이열치열 부흥회'의 강사로 오실 목사님인데, 
연초에 저하고 잠깐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목사님이 올 초에 교회에서 신년 집회를 했던 모양이에요. 

교인들에게 미션을 줬습니다. 이번 집회 기간 동안 여러분들 시편 119편을 필사하세요. 
시편 119편이 무지하게 길어요. 

근데 그걸 쓰는데, 문제는 교인들에게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만약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쓰게 했어요.
그래서 시편 필사를 이번 집회 기간 중에 하세요. 

단순히 노동을 시킨게 아니라, 한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성스럽게 대하며 시작하라는 미션이었고, 
그리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신년집회를 매일 출석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겠다고...

그래서 필사한 사람과, 그리고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을 준비하고 
어느 날 저녁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시더래요. 
'다 줘라. 나오는 사람에게 상을 다 줘라'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마지막 날 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줬대요.   ▣은혜

근데 성도님들이 기뻐하지 않더래요. 
시편 119편을 완전히 필사한 사람과, 
신년 집회를 하루도 빠지지 않은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때 이 목사님에게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생각났대요. 
우리가 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인데, 
'내가 누구보다 일찍 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지 못하는 (옹졸함)...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쌓아온 업적, 
우리들이 무언가를 했던 노력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주시는게 아니에요. 

성령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셔서, 하나님과 우리들이 동행할 때 
죄에 대한 인식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들에게 주시는 기쁨, 그게 은혜입니다. 

△성령님과 동행은, 진정으로 기뻐하는 마음, 
우리들의 노력과, 우리들의 어떤 업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주실 수 있는 
그 기쁨이 무엇인가요? 

성령님과 친해지려면, 성령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우리들이 성령님을 기뻐하시게 한다는 것은, 
나의 업적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우리들의 삶이, 우리 교회가, 우리들의 신앙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성령님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다스림 가운데 우리들이 들어가기 시작할 때, 
저는 성령님과 친해지려고 하는데, 
저는 우리들의 자격이 그렇게 필요한 거 같지 않아요. 

단지 성령님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겠다... 

우리들이 실수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성령님이 우리를 가르쳐 주실 거예요. 
'그래, 네가 나를 기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구나.. 그런데 내가 (너를) 기쁘하지 않아.. 
내 마음이 불편해져' 

그때 나는 '하나님 이거 기뻐하시지 않는구나' 내가 알아가게 되는 거예요. 
회개하고 고치게 되는 거죠.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가르쳐 주실 거예요. 
성령님과 친해지려고 하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여 주실 거예요. 

▲마치는 말
오늘 여러분들에게 딱 하나!
여러분이 일주일을 살아가는 동안 이런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더 큰 기름 부으심에 대한 열망!' 
그래서 성령님을 바라보며 '성령님! 제가 성령님을 환영합니다.' 

'제 삶 한 가운데서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성령님을 환영하는 역사가 여러분들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일주일 동안, 성령님과 친밀해서 동행하는 것 때문에 
그 기쁨으로 인하여, 정말 보름달 같은 모습으로, 
여기 교회에 기쁨으로 우리 성도들이 모이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성령님과 동행하는 기쁨과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 성령님 우리들이 7주에 걸쳐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민하고,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 고민하며 (찾으며) 살아갑니다. 엡5:10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인하여,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들이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완전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공동기도문'으로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함께 우리의 결단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성령님, 저희 마음에 성령님과 동행을 향한 깊은 갈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무가 아니라, 기쁨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길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죄를 떠나기를 결단합니다. 말씀을 기준 삼아 죄를 인식하고 
주님과 친밀함에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게 하소서. 

때로 확신없이 길을 걸을 때, 말씀과 기도로 방향을 찾고, 
순종함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소서. 

주님 이제 저희가 더 큰 기름부음을 갈망합니다. 
욕망이나 업적을 위한 것이 아닌, 오직 성령님의 기쁨 되기 원합니다. 

이제 한 주간 동안, 내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하소서.
성령의 통제 속에 나를 자발적으로 맡겨, 
하늘의 평안과 임재의 기쁨을 누리는 한 주가 되게 하소서. 

노력으로 이루어내는 억지 동행이 아니라 
은혜의 기쁨이 넘치는 동행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주1) '시험하여 보라' 엡5:10
헬, 도키마조 to test, examine, prove, scrutinise
 (to see whether a thing is genuine or not), 
to recognise as genuine after examination

같은 단어가 쓰인 다른 용례

눅12: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 discern 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 discern 하지 못하느냐'               

눅14: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 prove 하러 가니'  *도키마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