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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멀리 가 본 여행자 - YouTube
◈가장 멀리 가 본 여행자 욥28:1~20 2025.02.23.
※깊이가 있는 내용입니다. 그 깊이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중후반부)
◑욥기서의 주제는 지혜,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고난도 되지만, 지혜!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은 사람입니다.
착하고 의롭게 살았는데 고난이 닥칩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나는 하나님과 호흡이 잘 맞는다.
하나님이 척하면 척이야, 내 마음하고 똑같아!'
어떤 사람은 말해도 모르는데,
말을 안 해도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심전심이라 그러죠.
하나님과 마음이 잘 통하고, 사람끼리도 마음이 잘 통하면...
그것이 얼마나 멋지고 짜릿한 경험인지 모릅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한두 명 있으면 신납니다.
스포츠가 그렇죠. 여러분 축구 경기 가끔씩 보면요.
메시처럼 혼자 멋지게 드리볼을 해가는 사람도 멋지지만,
선수들 두세 명이 발을 맞추어서, 어떻게 저기로 패스할 줄 알고,
딱 그 자리에 가있는 선수가 있어요,
특별히 탁구 복식하는 거 보면, 두 사람이 한 몸 같아요.
그렇게 욥이 하나님과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합이 틀어지는 때도있습니다.
운동 선수들가운데, 서로 손발이 안 맞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운동 선수 자신이나, 관중들이나 모두 안타깝게 되죠. 발을 동동 구르게 됩니다.
▲지금 욥이 그런 상황이 됐습니다. 하나님과 합이 잘 맞지 않게 되었어요.
이때 욥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본래 욥은, 사람들 중에서 지혜롭기로 으뜸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29:7~10 '그 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
(새번역) '그 때에는 내가 성문 회관에 나가거나 광장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젊은이들은 나를 보고 비켜 서고, 노인들은 일어나서 내게 인사하였건만.
원로들도 하던 말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가렸으며,
귀족들도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기나 한 것처럼 말소리를 죽였건만.'
'그들의 혀가, 내 앞에서, 입천장에 딱 붙어서 한마디도 못했다'
욥이 말하면 그냥 결론이 되는 거예요. 굉장한 권위입니다.
29:21~22 '무리는 내 말을 듣고 희망을 걸었으며 내가 가르칠 때에 잠잠하였노라
내가 말한 후에는 그들이 말을 거듭하지 못하였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스며들었음이라'
욥은 모든 토론의 종결자였습니다. 이 분(욥)이 말하면 끝나는 거예요.
29:23 '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으며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렸느니라'
사람들은 욥에게 '뭔가 한마디 가르침 주세요'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려서, 욥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지금은 그 권위가 전부 다 무너졌습니다.
다들 오히려 욥을 비웃고, 무시하고, 충고하려 합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그래서 욥기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뼈아픈 질문은, '지혜는 어디에 있을까?' 입니다.
욥28:1~3 '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
사람은 땅속 깊이 어둠을 뚫고, 귀금속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
(광부들이 현실적으로 목숨까지 걸고 간다는 거죠. 금광석 찾으러)
28:4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갱도를 깊이 뚫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이 없는 곳에 매달려 흔들리느니라'
광부들이, 위험하지만 줄을 달고 매달려서 흔들리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뭔가를 캐내서 가져올 정도로 열심을 낸다는 거죠.
(욥이, 사람이 지혜를 구하는 일에, 목숨 걸고 채굴하는 광부처럼 열심내야 함을 비유로 설명함)
여러분 너무 생생한 표현이에요.
우리 교회 목사님들과 함께 성경공부하다가 이런 질문이 나왔어요.
'욥이 이런 광부에 관한 지식까지.. 이걸 어떻게 알았지?
직업이 혹시 광부였나? 아버지가 광부였나?' 그런 것 같지는 않고요.
아마 간접 경험이 있었을 거예요.
▲욥은 대단한 부자였고,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31:32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여러분, 욥은 소문날만한 부자인데, 나그네들마다 찾아오는 대로 다 문을 열어주면,
그 집에 사람이 꽤 많았을 것 같아요. 나그네는 늘 많지 않습니까?
이게 아브라함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멀리서 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우리 집에 쉬어가시죠' 하면서 대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굉장히 중요한 환대 hospitality 의 전통이죠.
그때 욥의 집이 어떤 분위기였을까요? 나그네들로 북적였겠죠.
옛날 조선시대에도 '과객'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인심 좋은 대갓집에는, 지나가던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그냥 묻지 않고 채워주고 먹여줍니다.
과객을 잘 대접하기로 가장 유명했던 가문이, 경주에 있는 최부자집 이었습니다.
'과객을 잘 대접하라'는 게, 그 집의 가훈 중에 하나였습니다.
3천석 농사를 지었는데, 천석은 우리가 먹고, 천석은 동네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세 번째 천석은 과객에게 주도록 저장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100명이 넘는 과객이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고요.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욥의 집에는 과객(나그네)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조선시대 과객들이야 거의 조선 팔도 안에서 왔지만
성경의 땅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지중해의 많은 섬들이 교차하는 지역입니다.
한 마디로 교차로죠. 그래서 굉장히 많은 여행자들이 지나가던 길목이었습니다.
동시에 세계 각지의 경험들이 모여지고 유통되던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책이 귀하던 시대에는, 사람이 곧 책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배웁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은, 마치 도서관과 같았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과객들이 집에 둘러앉아서 이렇게 얘기를 나눕니다.
페르시아의 마술, 점성술 이런 이야기...
인도 겐지즈 강의 어부들 이야기...
아프리카의 코끼리와 타조 이야기...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야기...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 '광부의 이야기'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게 아마 욥의 뇌리에 깊게 새겨졌던 것 같아요.
이렇게 욥기에 생생하게 표현한 거 보니까.
욥은 많은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이 많이 듣는다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반드시 지혜로워지는 건 아니지만,
그 많은 정보들을 잘 소화하고, 체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지혜가 아주 성장할 수 있죠.
솔로몬도 본래 지혜로웠지만,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왔고,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더 지혜로워졌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욥의 이 지혜가 벽에 부딪힌 것입니다.
깊은 갱도를 파고 매달려 흔들리며, 정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가까이 가서라도
금을 캐려고 노력하는 광부처럼...
그러다가 사고가 나서 실종된 사람도 있을 거예요.
자기 목숨 걸고, 사람이 가기 힘든 그 지점까지 가서라도 금을 캐오는 사람은 있지만
'은이 여기 있더라' 하는 사람은 있지만, 그러면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28:12~13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찾을 수 없구나'
바로 이것이 욥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28:20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
마치 지혜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의인화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혜는 내 주머니에 넣어 놓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 금고에 확보해 놓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한때 굉장히 똑똑하다, 현명하다' 했던 사람들이
조금 시간이 지나면 형편없이 어리석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는 젊을 때부터 너무 지혜로웠어요. 글도 잘 쓰고 말도 잘 했는데,
나이 들고 나서, 그 사람이 계속해서 사회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면,
영 아니올시다 .. 하는, 소음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 그때 젊을 때 그 자리에, 자기가 있던 그 특정한 자리에,
지혜가 머물렀던 거예요.
여러분,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특정한 때, 특정한 장소, 환경에 제한되어 있는 겁니다.
그때 얻은 지식이 다른데, (오늘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지혜는 어떤 소유가 아니라, 타자他者 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왔다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말 있잖아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다'
그거를 모르면, 내가 꼰대가 되는 겁니다.
▲저는 욥기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그렇게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모든 것을 다 잃고,
몸도 아파서 누워서 가누기도 힘든 이 사람이... 끊임없이 말을 한다는 거예요.
말을 친구 3명 플러스 1명 (엘리후)이 와가지고 계속해서 뭐라고 말하고,
거기에 대해 또 욥이 진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같으면 그렇게 몸이 아프고 힘들면, 입 다물 것 같아요.
경상도 말로 '너는 시부리라, 나는 말할 힘도 없다' 할텐데,
그런데 욥은.. 계속 말해요. 계속 말해요.
욥과 세 친구, 네 명이 돌아가면서 말하는 거예요. 욥이 다 대답하는 거예요.
그 친구들보다 더 길게 말해요.
정말 특이한 사람이고, 특이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 긴 말을, 한마디 한마디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건
더 특이합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던 말들이잖아요. 그래서 성경 욥기가 이렇게 긴 겁니다.
우리가 주로 기억하는 욥의 이야기는 '고난당했다, 믿음지켰다, 회복되었다'
그것만 아는데, 그거는 한두 장이면 끝나요.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대단히 신기하고,
그 친구들과의 대화를 성경이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욥기의 주제는 고난이다' ... 그게 아니에요.
욥기에서 '고난'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주제는 '지혜'입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인생이란 무엇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욥기는 '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잠언, 전도서, 욥기를 우리가 '지혜문학'이라고 하잖아요.
욥기 전체가 '지혜'에 대한 말씀이에요.
▲여러분,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육체의 아픔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하나님께 벌받는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라는 인식이예요.
그러면 미래도 없거든요. '내가 뭘 잘못해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 질문과 씨름하는 게 그만큼 힘든 거예요.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정죄했다. 그들이 잘못됐다' 물론 맞는 해석인데,
그런데 사실은, 친구들이 정죄 안 해도, 세상 사람들이 다, 말은 안 해도 속으로 정죄해요.
또 세상 사람들 정죄하는 소리가 안 들려도,
내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질문이기도 해요. 스스로 정죄하는 거죠.
세 친구들 하는 질문과 똑같아요.
'야, 네가 하나님을 잘못 믿어서 그런 거 아니야?'
내 속에서 일어나는 질문이에요.
그래서 욥기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혜로운 욥이 바보가 되는 과정.
그런데 사실은, 지혜로웠던 욥이 더 지혜로워지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지혜로워진다는 게 뭡니까? 그 첫 단계가 뭔가 하면, 소크라테스가 그랬죠.
'너 자신을 알라'
나의 무지, 내 지혜의 한계, 지식의 한계를 아는 게.. 지혜입니다.
그전에는 사람 중에서는 욥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욥이 나타나면.. 사람들의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었을 정도인데, 29:10
그 지혜로웠던 욥도, 사실은 아는 게 너무 작았던 것입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너무 조금밖에 안 되는구나'
이 넓은 우주에서, 이 복잡한 인생사에서,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지혜의 한계는 너무 확실한 겁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걸 아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크심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야, 내가 아무것도 몰랐구나'
그 지혜를 가르쳐주는 게 <욥기>인데, 언제 욥이 그런 마음을 가집니까?
고난당했을 때, 아팠을 때... *주제
◑적용 / 아픈 사람이 인생을 더욱 깊이 깨닫는다
<아픈 몸을 살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 아서 프랭크는 예일대학교 사회학 박사를 했고요. 캘거리 대학에 가서 교수를
사회학자로서 지내고 있는데, 39세에 심장마비가 오고,
겨우 나았는데 40세에 암을 앓게 됩니다. 그 질병과의 투쟁을 그린 책인데,
그 책의 표지 그림을 보면, 벌거벗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맨몸의 남자가
어떤 큰 덩치 큰 존재와 싸우고 있습니다. 저 존재가 뭘까요?
주위에는 의사들이 있죠. 그리고 가족들, 친지들, 그냥 아는 지인들이 둘러서서 있는데
가까이는 가지 못해요. 도와는 주지만, 빌어는 주지만,
(질병은) 자기가 혼자 싸워야 되는 싸움을 말하는 것 같아요.
이 그림을 보고 생각나는 그림이, 고갱의 그림입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구경하고, 야곱을 응원하기도 하고, 야곱을 위해 손모아 기도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얍복강의) 싸움은 내가 싸워야 됩니다.
그 책표지의 그림에서 나오는 '저 큰 덩치'가 뭘까?
병마일까? 나의 운명일까? 하나님일까? 나 자신일까? 잘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치열한 싸움을 싸우면서 성찰했던 기록을, 책으로 굉장히 잘 쓰고 있습니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느 날 몸이 고장났다. 공포와 절망 속에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리가 아플 때 묻게 되는 질문이다.
이때 문제는, 몸이 정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고 질문을 던지자마자,
의사들이 대답한다. '무슨 무슨 병입니다. 이 정도 진행됐습니다'
의사들은 그 질환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답한다.
이들의 답은, 의술을 펼치는 데는 유용하지만, 한계도 있다.」
'이게 뭐지?' 했는데, 병명을 듣고 나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다는 거죠.
의사가 진단하고 '이게 무슨 병입니다' 하는 것은,
우리가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질문을 다 대답해 주지는 못한다는 거죠.
그렇죠. 'What happened to me' 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주지 못합니다.
몸이 고장나면 삶도 고장납니다.
그렇죠. 사람의 생각도 바뀌고요.
몸만 바뀌는 게 아니에요. 기분도 바뀌고요. 인간관계의 틀도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삶이 뭐 이전에는 몰라도,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 같아요.
삶 전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게 어디서 어떻게 회복되어야 되는지...
'회복 후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알기는 힘들다는 거예요.
▲'암 환자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좋습니까? 적당한 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면
이 책에서 그렇게 대답합니다. "없다!
왜냐하면 모든 환자가 각자 다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분, 각 환자가 증세도 다르고, 마음의 상태도 다르고,
투병하는 환경도 전부 다 다르고, 관계도 다 다릅니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가 많이 아팠죠. 이분도 고생 많이 했던 분인데,
'아프다'는 것에 대하여 책을 쓰면서, 그 첫 마디를
"건강의 빛이 사그라질 때야 드러나는 미지의 영토" 그랬습니다.
한 번도 안 가본 어떤 미지의 영역에, 사람이 들어서게 된다는 거죠.
「심각한 질병은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본다.」
생의 경계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여기서 '조망한다'는 말은, 저 멀리 가서 삶을 바라본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병이 어드벤티지를 준다는 말인데
쉽게 말하면, 높은 망루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멀리 보이잖아요.
병을 통해서, 인생을 더 멀리, 더 광범위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장점이 있다는 거죠.
그것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 본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여러분,
'가장 큰 아픔을 겪은 사람은, 가장 멀리까지 여행해 본 사람'입니다.
(병들어서) 높은 망대 같은 곳에 올라가서 삶을 바라보면,
새로운 넓은 시각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인다는 거예요. *욥처럼
그런데 우리가 그냥 고만고만하게 건강한 사람들은, 아직 못 보는 겁니다.
그 정도 고난 안 당해봤으면, 저 위에서 보는 그런 시각이 없는 거죠.
그래서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정하고, 아픈 사람한테 충고도 하는 거죠.
그게 욥의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남에게 닥친 불행을, 자꾸 설명하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어떤 인과관계 속에서, 병을 파악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스트레스가 많아서 암에 걸렸지' 이게 왜 그런가 하면,
'나는 스트레스 잘 관리해서 암을 피해야지'라는 생각이, 그 기저에 깔려있는 거예요.
'저 사람은 이런 습관이 있어서, 이런 중병에 걸렸지'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가장 고약한 것은, 신앙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은 기도 안 하니까 저렇게 우울증에 걸렸지'
'그래서 나는 열심히 기도해야지...' 이게 잘못된 생각이죠. 욥의 친구들의 이야기죠.
왜 우리는 이렇게, 남들의 병이나 환난을 볼 때,
이런 인과관계 속에서 파악하려는 질문을 갖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지요.
이게 통제력의 문제입니다.
내가 아는 내 지식 속에서, 이게 원인과 결과가 파악이 되어야,
나는 그런 고통이나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 통제력의 환상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역을 무시하는 거죠.
믿음은.. 내 의지로, 내 노력으로, 나의 통제력을 키우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는,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
심지어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그런 일조차도 하나님의 손 안에,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다는 고백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자라는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게 있는데,
'내가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는 거예요.
그게 더 높은 차원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시면, 병 걸리면 다 힘들지만,
평소에 건강했던 사람들일수록,
'나는 입원 한 번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하는 사람들,
혹은 자기 관리 잘 한 사람일수록... 병에 걸리면 더 힘들어합니다.
돈 많고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때까지 살면서 마음 먹기만 하면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없었던 사람일수록,
삶의 고난이 닥치면, 더욱 힘들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삶의)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전에 자기는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살아왔던 거죠.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이 좁은 세계 안에서,
원인과 결과가 다 설명이 되어야.. 안심이 되는 우리의 습성이 있죠.
그걸 깨트리는 게 고난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난도, 타인의 아픔도..
우리에게 그런 지혜가 있다면,
즉 '저 친구는, 그 병을 통해, 내가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본 사람이구나'
'저 환자는 나보다 멀리 여행한 분이구나' 하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겪으라면 차라리 안 살고 만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거죠.
'하지만 겪고 나서 보니까, 지금의 내가 예전에 나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질병은 위험하지만, 또한 새롭게 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분도 마흔 살에 암이 걸렸으니까,
어떤 다른 관점에서 인생을 보게 되었다는 거죠.
여러분, 목회자들은 늘 심방하고 상담하기 때문에
삶의 위기를 만난 분들을 종종 만나기 때문에 ... 간접 경험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아플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름의 통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방가서 성경을 말하고, 기도하고 축복하고 위로하고 권면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지금 이분이 나보다 훨씬 멀리 가 있구나 (성숙했구나)
이분이 나보다 훨씬 더 깊은 무엇을 알고 계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내가 가보지 않는 고통의 자리에 가 보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만나 주시는...
이전과는 다른 경험이 있는 거예요.
▲지난주 수요일 저녁에, 상담 전문하시는 강사님을 모셔서
아주 은혜롭게 우리가 집회를 했습니다.
아주 엄청나게 큰 학회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고요.
사회에서는 꽤 성공한 분인데,
들어보니까 참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더라고요.
대학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너무 가난해서 치료받을 돈이 없어서 돌아가셨어요.
(장례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서울에 차가운 자취방에서,
집주인이 방값 내라고 독촉했고, 열흘 후에 쫓겨나게 생겼어요.
불도 안 들어오고, 전기도 없고, 돈은 딱 3천 원뿐인...
너무 춥고, 먹을 음식도 없고요.
도저히 살아갈 용기가 없어서 '내가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천국 가자.
거기에 가면 하나님이 그래 잘 왔다 그러실 것 같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수면제를 소주와 함께 마시면 세상을 떠날 수 있다' 하던 말이
생각이 나서 그렇게 먹었대요. 그리고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까,
본래 자기 방에 창문이 저 위에 있었대요. 아마 반지하 방이었겠죠.
그런데 방에 빛이 들어오는데요. 저 위에 있지 않고, 옆에서 보이더라는 거예요.
보니까 자기가 (영혼이) 거의 천장 가까이에 떠 있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까, 자기가 방바닥에 누워있는 거예요.
'죽어있는 23살의 여대생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이고 어떡해? 큰일 났다! 이대로 끝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래서 그냥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세요!' 목소리가 안 나와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내가 이거 잘못했어요. 잘못 생각했어요. 그거 아니에요.
한 번만 살려주시면, 내 평생을 나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제가 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느 순간에, 정말 0.1초 만에,
자기 영혼이 자기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경험을 했다고 해요.
몸이 굉장히 뜨거워졌다고 해요.
그래서 깨어서 일어나 보니까 3일이 지났대요.
그 후로 이제 공부해서 교수도 되고, 상담을 하는데
이분이 15년 동안 교도소, 소년원을 찾아가서, 매일 찾아가서 사람들 만나고 강의를 합니다.
여러분, 대학 교수가 15년 동안 교도소 봉사 가는 거 쉽지 않습니다.
일단 그렇게 시간 내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가도 거기 사람들이 반기지 않습니다.
교수가 오면 한두 번은 강의 듣겠지만,
그렇게 반겨주고 계속 이어질 수가 없어요. 서로가.
그런데 이분은 이상하게 사람들이 막지 않더라는 거예요.
교도소, 소년원, 자살 시도했던 청소년들이 계속 마음을 열더라는 거예요.
변화가 일어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왜 그런가? 자기 스스로 설명해요.
'내 스펙은, 내가 그렇게 고생한 게 최고의 스펙입니다!'
그 이야기하면 소년원 아이들이 '나보다 더 힘들었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살 언저리에 가봤던 사람, 혹은 자살을 실제로 시도해봤던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강사가 됩니다.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는 이분이 그런 말을 하셨어요.
'그러한 경험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앞으로 어떻게 쓰실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왜냐면 남들이 안 가본 데 가봤기 때문이죠.
상처입은 치유자가 가장 좋은 치유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치유자가 되기 위해서, 일부러 고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어요.
잘 돌보기 위해서, 일부러 아픔을 선택할 필요는 없어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직접 경험이 없어도, 좋은 돌봄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출발이 뭔가 하면, 존중해 주는 거예요. 존중!
'그냥 이 사람의 경험을 들어준다'가 아니라,
'이 아픈 분에게, 이 상처받은 아이에게
내가 모르는, 어른인 내가, 건강한 내가, 목회자인 내가 모르는
어떤 지혜와, 아픔과, 위로와, 아름다움과, 하나님을 경험함이 있을 수 있겠구나'
(나보다 더 대가구나)
여러분 그 생각을 하면, 그를 존중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충분히 존중해 주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거 쉽지 않습니다. (상담이) 쉬워 보일 뿐입니다.
그 분은, 그 과정을, 나보다 더 잘 통과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심방 받는 성도님이, 심방 간 분들보다 훨씬 더 성숙해져 있을 수 있습니다)
환자뿐 아니라, 돌보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자의 가족들도, 영적으로 매우 성숙된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경우에 여러분, 아픈 사람 못지않게,
아픈 사람 돌보는 분들(가족)의 고통과 불안이 굉장히 심각한 경우가 많죠.
돌보는 분들이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장애인들의 가정을 보면요.
장애인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적응해서 행복하게 사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돌보는 부모님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한계를 경험하잖아요.
육체의 한계, 수면 부족 포함해서요.
그리고 마음의 한계, 내 사랑이 바닥나는 경험,
'내 돌봄이 온전치 못하다'는 자책감에 늘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깊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깊은 하나님의 경험과 체험 가운데,
깊은 신앙고백, 진실한 고백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서로의 아픔과, 그 깊이와, 삶의 무게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겸손이 있어야 됩니다. 특별히 타인의 아픔 앞에서 겸손해야 되고,
서로를 존중해야 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어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5:8
'나는 하나님이니까 다 알아!' 그러지 않으셨어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 라고 하셨습니다. 히4:15
우리와 똑같이, 우리를 정말 동정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이.. 우리보다 훨씬 더 큰 고난을 몸소 당하신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친히 당하신 그 고통, 십자가, 가시관, 배신, 소외, 절망,
거절 당한 기도... 들을 생각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을 살다간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 가본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다윗도 그랬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그런데 거기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내 통제를 벗어나고, 삶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특별히 내가 아플 때 그렇잖아요.
내 마음도 그렇잖아요. 누군가를 돌보려고 할 때...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통제하고 계시고,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일본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이분의 일대기를 읽으면, 그냥 인생이 '병상일기'입니다.
그냥 전부 아파서 고생했던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르러 뵙지 못할 얼굴이 있다.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없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아픔을 미화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이, 아픔을 통해서
나보다 멀리 가본 여행자이기 때문에,
그분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소설이 보여준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던 내용들이, 아마 이것(병, 고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크고 작은 고통,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누구에게도 남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이나, 우리 가족이나, 언제든지 지금 겪고 있고, 앞으로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모든 고통의 순간에, 눈물의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분 앞에서 겸손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 고개 숙일 때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뜻,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가 전해질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