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7 집 안의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 YouTube
◈집 안의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눅15:25~32 2024.03.17.
◑도입
오늘 본문은 탕자의 비유 후반부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탕자의 비유를 설명 드리면서
첫 번째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게 된 그 상황이
눅15:1~2절에 나와 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리게 됩니다.
'예수가 죄인들을 영접을 하고, 또 그들과 친밀하게 식사를 하는구나'
그래서 수군거리고 또 불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주셨고,
그 세 번째가 '탕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꼭 이 상황을 염두에 두셔야 되고,
또 한 가지는 "탕자는 두 사람 입니다."
-집을 뛰쳐나간 집을 나간 둘째 아들, 탕자가 있고 *지난 주 설교
-또 한 명의 탕자는, 첫째 아들 '집 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오늘 설교
또 탕자의 비유의 강조점은, 둘째 아들에게 있는게 아니고, 첫째 아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염두에 두었던 대상은, 첫째 아들입니다.
자 그러면, 둘째 아들, '집을 나갔던 탕자'는 누구겠습니까?
세리와 또 죄인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죠.
집안에 있는 탕자, 첫째 아들은 누가 여기에 해당하나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면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제가 생각할 때,
'둘째 아들'에 해당하시는 분은 별로 없으신 거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님들은
어쩌면 본문의 '첫째 아들'에 해당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결국 첫째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분노를 했는데,
왜 첫째 아들이 분노를 했나?
또 분노하고 있는 그 아들에게, 아버지가 들려준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면서,
첫째 아들의 문제가 무엇이고,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도와주고 계시나... 하는 것을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눅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디에 있었는가요?
그는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이렇게 25절은 시작합니다.
맏아들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둘째 아들은 어디에 있었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물려준 유산을 받아 가지고, 곧바로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가 물려준 그 유산을, 정말 허랑방탕하게 사용했죠.
그렇지만 맏아들은 정말 그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밭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아버지의 기업에서, 성실하게 그는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모범적인 아들이었고, 주위 사람들이 볼 때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집에 가까이 왔을 때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26절에 한 종을 불러서 질문을 하죠. '이거 도대체 무슨 일이냐?'
27절에 종이 답을 하는데, 이 답은 두 부분입니다.
1)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이게 첫 번째 내용이고,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지만, 아마 몇 년의 시간은 흘렀던 것 같아요.
2) 두 번째는 아버지의 반응입니다.
'당신 아버지는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27b
그 당시 최고의 잔치 음식이었던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왜냐하면,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종이 큰 아들에게 보고를 합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7
그러면 여러분이 만약에 큰형이었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뭐 동생이 왔다고?' 놀라고 반가워하면서
잔칫집을 향해 손살같이 달려가서, 그 동생을 품에안는 쪽에 서겠습니까?
아니면 '웬 잔치야? 저 놈이 잘한 게 뭐 있다고 잔치야?'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28절에 큰아들의 반응이 나오죠.
◑눅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그가 노하여'
큰아들은 한마디로 분노를 합니다.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그 잔치에 참여하는 것, 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을, 그는 거부를 합니다.
큰아들은 분노하고, 잔치 자리에 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대조적으로 아버지가 어떻게 했나요?
여러분, 잔치 자리를 한번 상상해 보시죠.
잔치가 펼쳐졌고, 거기에는 아버지가 있고, 또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막 같이 기뻐합니다. 살찐 소를 잡았잖아요.
그러면 동네 분들, 잔치 손님들이 누구를 기다리겠습니까? 큰아들을 기다리겠죠.
큰아들이 와야 이 잔치가 완성이 되잖아요.
그런데 큰아들이 밭에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잔치 자리에 들어오지를 않는 거죠.
그러면 얼마나 아버지가 당황스럽겠습니까?
아니 또 잔치 손님들한테 체면이 서지 않겠죠.
그래서 아버지는, 잠시 잔치 자리를 떠나서, 형을 찾으러 나왔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8b
'권하다' 이 단어가 가지는 문자적인 뜻은, '간청하다' 입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간청하는 거죠.
그런데 시제가 미완료 시제이기 때문에, '계속'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 큰아들을 꾸중을 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반복해서 아버지가 간청을 하는 거죠. '마음을 돌려서 잔치에 참여하자고'
그래서 표준새번역, 새번역에는 '달랬다, 타일었다'라고 번역합니다. *'권한대'
이 큰아들을 아버지가 타이르고 있습니다.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9절과 30절에 큰 아들의 답변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구절인데, 큰 아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눅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이 큰 아들의 말에는
-먼저는 큰아들의 자기 이해, '나는 누군인가?'
-또 '동생은 누구인가?' 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 '아버지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9~30
큰 아들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명을 어김이 없거늘'
지금 큰아들은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결코 명을 어김이 없습니다'
개역에 '결코 또는 단 한 번도 at any time' 라는 번역이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결코, 한 번도) 명을 명을 어김이 없거늘'
그런데 원문을 통해서 보면, 이런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29절에 '보소서' 이건 강조거든요. 개역에 이 말이 빠져 있죠. 영어로 Look, 헬. 이두
개역에는 '아버지를 섬겼다'고 되어 있는데,
큰아들의 입에서는 '아버지'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29절 시작에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이건 해설자가 말한 '아버지'죠.
대신 큰아들은 'You 당신'이란 2인칭으로 말합니다.
헬라어는 동사에 주어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죠. 이인칭 단수 you gave로 쓰고 있죠.
지금 큰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look. 바로 내가 여러 해 동안 당신을 섬겼습니다.
나는 결코 당신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이게 큰 형의 '자기 이해'였습니다.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어서 30절에는 큰아들의 '동생에 대한 이해'가 나옵니다.
동생은 누군가 하면 '아버지의 살림'
여기서 '살림'이라는 표현은, 생명같이 소중한 재산입니다.
그래서 동생은 '아버지의 생명같이 소중한 재산(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허비해 버린 나쁜 놈'입니다.
또 '이 아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을 보면 '당신의 이 아들'입니다. *this thy son
원래 '내 동생 my brother' 이라고 해야 맞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 환영하고 있는 당신의 이 아들이 누군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생명 같은 재산을 외국에 가서 창녀들하고 다 삼켜버린 놈인데,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벌이신 것입니까?'
자 그 다음 29절로 다시 돌아가시면 큰아들은 이런 사람이고
둘째 아들은 이런 사람이니까 아버지 대하시면 안 되죠.
29절 '나한테는 아버지가 결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준 적 없습니다'
'결코 염소 새끼 한 마리'가 무엇과 대조됩니까?
'살찐 송아지'와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살찐 송아지'와 비교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결코 나에게 주신 적 없습니다.
'나와 내 벗으로 즐기라고, 나한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준 적 없습니다.'
그런데 30절을 보시죠.
'그런데 당신의 이 아들이 돌아오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이렇게 큰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요즘 말로 하면 이런 말이겠죠.
'아버지, 이게 정의입니까? 이게 공평한 겁니까?'
그러면서 큰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분노하고, 사실은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31절의 아버지의 답변을 보면,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됩니다.
◑눅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여러분이 만약 아버지라면 큰아들에게 어떻게 했겠습니까?
제가 아버지라면 박살을 냈었겠는데...
근데 본문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보십시오!' '당신이'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무례한 언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자식이 어디서 아버지에게 대 드느냐?' 뭐 나와야 되지 않나요?
그런데 지금 아버지가 큰 아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얘야!'
이거는 헬라어로 '테크논' 입니다. 어린 아이를 부르는 애칭입니다.
큰 아들은 지금 어른이 됐잖아요.
그 장성한 큰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분노하고,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얘야'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내 것은 다 너의 것이다'
특별히 후반부 표현을 누가 사용하셨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대제사장 기도를 드리신게
요17장입니다. 요17:10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같은 표현을 했습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입니다.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의 그 친밀함,
뗄레야 뗄 수 없는 그 하나됨을 설명하시면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내 것입니다.
내가 그들 때문에 영광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이 표현을
바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에서 적용합니다. 결국 이 표현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아들과 아버지가 가지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 시간'
지리적으로만 같이 있었던게 아니라,
아버지와 큰아들이 가지는 그 깊은 사랑의 교제를 지금 표현하시는 거죠.
'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잖아.. 내 것은 다 너의 것이야' :31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너의 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은 자다'
여러분, 만약에 아버지와 아들이 이상적으로 정말 사랑의 관계였다면,
사랑하면 가장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부자간에 많은 시간을 같이 함께 보내죠.
그리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아들이 볼 겁니다.
또 아버지가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바로 사랑하는 아들은 알게 되는 거죠.
이상적인 관계였다면, 정말 이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고, 또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그 얼굴에는 어쩌면 항상 그늘이 있다는 걸 아마 발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누구에 대한 마음이겠습니까? 집을 뛰쳐나갔던 둘째 아들,
그 둘째에 대한 마음이, 아버지의 얼굴에 언제나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큰 아들은 아마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다면,
다른 사람들은 '아니 저런 놈한테, 저런 놈 돌아왔다고 무슨 잔치야?'
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큰아들은 그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래도 헤아리면서
'야 정말 아버지가 그렇게 기다리고 소원했던 일이 이제 이루어졌구나'
그러면서 함께, 정말 아버지, 동생, 형이 같이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것,
이것이 이상적인 상태였지 않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입을 빌어서,
바로 비난하고 있는 형, 그리고 그 형이 나타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거죠. '야, 네 동생(세리, 죄인들 :1)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얻었으니까, 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로 이 말씀을, 큰 아들은 바로 자신에게 주는 말씀으로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제 / 그러면 큰아들이 왜 분노를 했을까요?
큰아들의 잘못은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 큰 아들을 바로 잡으실 때, 그 강조점, 핵심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한번 2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큰아들이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여기에 '섬겨' 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보통 헬라어로는 종을 '둘로스' 라고 부르죠. *명사
여기서 '섬겨'는 '둘루오' 입니다. *동사
그러니까 종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시간에 아버지를 종처럼 섬겼습니다.'
그래서 NIV는, 이 어감을 살리기 위해서 slaving 으로 번역했죠.
'나는 그 오랜 시간 아버지를, 노예처럼 종처럼 섬겼습니다' 이렇게 그가 고백을 하죠.
여러분, 바로 이것이 큰아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였죠.
집 안에서 분명히 큰아들은, 착한 아들이었고, 모범생이었지만
그가 '집안에 있는 탕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버지를 어떻게 섬겼느냐 하면,
사랑받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섬긴 것이 아니라,
바로 종으로, 노예로 아버지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
▲여러분, 종으로 아버지를 섬기게 되면, 세 가지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아닌, 율법주의 신앙의 폐해를 잘 보여줍니다)
1) 그가 왜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했겠습니까? 종으로 섬겼다면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아버지에게 벌을 받는게 두려워서!
그 두려움 때문에, 그는 아버지를 섬기고, 그 명령에 순종했다는 거죠.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아마 다 느끼셨을 거예요.
저도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니면서, 제가 할머님과 함께 부흥회에 다닐 때,
제일 많이 들었던 설교가 뭐냐 하면,
주일 빼먹고 방탕하게 놀러다니다가 어떻게 벌 받고 쓰러졌나,
또 헌금 빼먹다가 어떻게 벌 받고 쓰러졌는가.
그래서 저는 어릴 적부터 항상 제 마음에 생각했던 것은
-주일을 꼭 지켜야 되는구나. 주일 빼먹고 놀러다니면 다쳐.
-또 헌금을 꼭 드려야 돼. 주일 헌금 빼먹으면 다쳐.
-또 술하고 담배 하면 다쳐.
이렇게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큰 아들처럼요.
저는 사실 중고등학교 때까지, 제가 하나님 명령 어기지 않고 살려고 했던
제일 큰 이유는 무엇이냐? 벌 받는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두려움이죠.
2) 또 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큰아들이 종으로 순종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받을 수입 때문이죠.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아버지께 순종한 이유는 무엇이냐?
이를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 (수입을) 얻기 위해서, *오늘날의 '축복'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았던 거죠.
그래서 사실은 그의 태도는 어땠느냐? 이기적이었죠.
결국 아버지께 순종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는 바로 종과 같이, 한 번도 불순종하지 않고, 그 아버지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3) 근데 여러분, 또 종으로서 섬길 때, 피할 수 없는게 무엇이냐?
비교의식이죠.
똑같이 수고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더 받게 되면, 견딜 수가 없죠.
그리고 비교의식에 빠져서 살면, 조금이라도 못한 사람을 보면 내가 우월감을 가지고,
또 나보다 더 탁월한 사람을 보면, 열등감에 빠집니다.
지금 이 큰아들은, 작은아들에 대해서 우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동생보다는, 더 좋은 대접을 받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죠?
동생이 아버지로부터 더 환대를 받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큰 아들은, 아버지를 종처럼 섬겼고,
결국 두려움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비교의식에 빠져서,
종처럼 아버지를 섬겼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 되었느냐?
아버지가 동생을 환대하고, 자기보다 더 잘해주는 것처럼 느꼈을 때,
그의 분노는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근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도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은 다 너의 것이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31
'너는 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아들로 항상 살아왔다.'
'그 아들의 영광, 그 아들의 특권,
그 아들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면서 너는 살아야 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바리새인, 서기관 :2) 에게 도전을 하시는 거죠.
◑적용
제가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두 편에 영화를 소개하겠는데
팀 켈러가 쓴 <탕부 하나님>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탕자를 영어로 '프로디걸 선 prodigal son' 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팀 켈러는 프로디걸 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해서
<탕부 하나님 Prodigal God>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결국 강조점은 무엇이냐?
모든 것을 허비한 이 탕자 Prodigal son 에게,
하나님은 그 사랑을 허비하시는 분 Prodigal God 이다,
허비한 인생한테, 하나님의 사랑을 허비할 정도로 베풀어 주시는 분이
바로 여기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다 ... 그 책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큰아들에 대한 분노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마데우스> 영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당시 모차르트는 천재 작곡가, 음악가였죠.
살리에르는 궁중음악 악장이었죠.
원래 살리에르는, 집안 배경이 도시가 아니고, 시골 쪽이었죠.
나중에 이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져서, 수도, 대도시로 오게 되죠.
그때 그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멸의 작곡가로 세워 주시면,
세 가지를 제가 서원하겠습니다.
-제가 정말 음악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죄 안 짓고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제가 남에게 베풀면서 살겠습니다.. 라고 그가 서원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의 응답하셔서, 그는 승승장구해서
그가 마침내 궁중음악가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근데 그때 동시대에 누가 등장하냐면, 이 까불이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가 등장합니다.
천재가 등장했는데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근데이 천재가 정말 음악으로는 소위 '넘사벽'
자기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그런 실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의 품행은 어땠느냐? 둘째 아들과 똑같았어요.
정말 막 소위 말해서 약혼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막 바람을 피우고
엉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살리에르가 너무 혼란스러운 거죠.
'하나님, 나같이 하나님 앞에 순결과 자선, 근면하고 정직으로
바로 살아가는 나한테는, 하나님이 이 정도의 재능을 주시고,
저 망나니처럼 (둘째 아들처럼) 살아가는 저 모차르트에게는
정말 자기가 흉내낼 수도 없는, 그런 엄청난 재능을 주시다니...'
그러면서 그 영화에 보면, 그가 십자가를 불태우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영화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바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당신과 나는 적입니다' 하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끊게 되고,
그의 남은 인생을, 모차르트를 무너뜨리는데 그의 인생을 사용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좀 섬뜻하지 않나요? 저는 사실은 이 살리에르의 이야기,
도 큰 아들의 이야기를 조금 이해할 수 있는게
저도 대학 졸업할 때쯤에 보니까,
제가 대학 시절에 정말 성경 열심히 공부하고, 후배들 섬기고 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제가 졸업할 때쯤 되니까, 성적이 뭐 별로여서 갈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고등학교 친구들은 어느새 사법고시 다 패스하고...
그러니까 정말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이게 뭔가?'
보니까 신앙생활에도 적당히 꾀를 부리면서 살았던 친구들은 다
사회적으로 지금 떵떵거리는데 '나는 도대체 이게 뭔가?'
그러면서 항상 내 마음에 '하나님 이게 정의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면서까지 몸부림쳤던 나한테는
이런 초라한 현실이 주어지고,
적당히 주님과 거리를 두면서 어쩌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한테는
저렇게 풍성한 삶의 결과를 주시는게... 이게 바로 정의입니까?'
아마 성도님들 가운데에도, 아마 그런 생각을 하신 분들이 많으실 걸요.
'아니 내가 볼 때는 인격도 그렇고, 그냥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그래서 교회에서도... 어떻게 보면 소위 잔머리 굴리는 게 다 보이잖아요.
근데 그런 사람이 항상 자기만 위해서 사는 데도, 하는 일이 다 잘 돼요...
그런데 저는 항상 남에게 베풀고, 남을 섬기고, 자신의 욕망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궂은 일을 다 감당하는데...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되고...
이때 마음에 질문이 생기지 않나요? '하나님, 이게 정의 맞습니까?'
바로 이게 큰아들의 분노죠!
저는 사실 다음 한 주간 동안 기도제목이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 저는 앞으로 (큰 아들처럼) 두려움, 이기심, 비교의식에 빠진 노예처럼
주님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주님을 섬기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것이 제 자신의 기도 제목이고,
또 성도님들에게,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도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그분을 섬기는 거죠. 종이 아니라요.
그러면 바로 이 큰아들이 이상적이었다면,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하나님과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 당신의 뜻을 보여 주셨겠죠.
그것을 우리가 배우게 될 때,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기적인 거 같고, 자기밖에 모르는 것 같고,
때로는 둘째 아들과 같이 저렇게 방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까지도,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아버지의 마음을, 내 마음속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때로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그런 사람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서
주님이 프로디걸한 그들에게 정말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비난과 정죄 대신에, 그 하나님을 향해 놀라게 되고 탄복하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그 기쁨에 참여하는 삶을 우리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3가지입니다.
1) 하나님을,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아들로서 주님을 섬기고
2) 두 번째는 그 풍성함, 하나님의 자녀됨의 풍성함을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맛보고,
3) 그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
잃어버린 자들, 둘째 아들과 같은 잃어버린 자들,
바로 그들에게도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잔치,
그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또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유학 갔을 때, 그때 학교에서 MT를 갔었는데
그때 이 영화를 보여 주셨어요. 그래서 보게 되었는데요.
나중에 필립 얀시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책에서
이 '바베트의 만찬' 영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팀 켈러도 이 영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 내용이 뭔가 하면, 덴마크 한 어촌 마을인데
목사님과 아주 경건한 두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촌 마을을 정말 신앙으로 잘 섬겼습니다.
그 중에 두 딸을 좋아했던 그런 남자들도 있었는데, 결국은 다 차입니다.
하늘을 사랑하는 여자들한테 다 차이죠.
세월이 지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이 두 딸도 이제는 다 노인이 됩니다.
근데 그 마을에 한 어떤 불청객이 찾아오는데, 바로 바베트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나중에 결국 밝혀지는데, 프랑스 대혁명의 희생자가 되어서
결국은 여기까지 도망온 여인이죠.
근데 그 여인은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거기에서 누가 한 사람 추천을 해줘서,
그 마을에 같이 삽니다. 이 마을 사람들을 식사로 섬깁니다.
꼭 가사도우미 같은 역할을 했죠. 또 10년에 세월이 지났어요.
그 오랜 세월 하나님을 함께 있었으니까, 사랑보다는 서로 상처가 더 많은...
서로에 대한 반목, 시기, 질투 이런게 막 가득해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 교회였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바베트가 희소식을 받습니다. 복권이 당첨되어서
1만 프랑 정도의 큰 돈이 갑자기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을 사람들이 '아 바베트가 우리 곁을 떠나는구나' 하고
다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바베트가 갑자기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이번에 마지막으로 여기 계시는 분들을 내가 한번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프랑스 코스 요리로 내가 대접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그냥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하죠.
그런데 평생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한 번도 제대로 된 요리를 먹어보지도 못하고,
항상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마을 교회 사람들이었으니까
바베트는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는 그런 고급 식사를 준비를 합니다.
그러니까 요리 과정에서, 그 풍성한 음식에서 흐르는 냄새를 맡고서,
금욕적 삶을 살던 교우들은, 마치 사악한 기운이 마을을 막 점령하는 것 같이 느낍니다.
그러면서 잔치에 초대되어 그 음식을 먹으면서
'절대 음식에 대해서 맛있다' 이런 이야기 안 하도록, 자기들끼리 약속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코스 요리를 쫙 배설한 이 여자가 결국 누구였느냐?
프랑스 대혁명 때 온 가족을 잃었던, 프랑스의 전설적인 요리사였어요.
그러니까 처음엔 사람들이 뭐 어떻게 막 당황을 하고, 먹을 줄도 모르고 막 이러다가
하나씩 하나씩 요리를 먹으면서 정말 그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그 풍성한 잔치에 참여하다가, 전에 옛날에 서로 상처 주었던 일을 서로 고백하며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지니까 '야, 그때 그 말은 농담이야'
그러니까 상대방도 '나도 그거 알아!' 그래서 서로간에 갈등들, 상처들이 치유되고...
그 풍성한 잔치 속에서, 갈등과 분열이 힘을 잃고 무너지면서
나중에는 그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됩니다.
과거에 믿음 안에서 살다가, 잠시 삐끗하였으나
이제 그 잔치를 통해서, 하늘의 소망을 두었던 그들이 하나가 되어서
이제는 정말 시편 85편에 나오는 '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그 은혜들을
그들이 경험을 합니다. 그러면서 잔치가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바베트가 우리 곁을 떠나는구나...'
그런데 바베트가 못 떠나는 것은, 1만 프랑을
그날 그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 다 사용해 버린 것입니다.
그가 가졌던 전 재산을 다 쏟아부어서 이분들을 섬긴 것입니다.
이렇게 영화가 마무리가 되는데, 결국 이 영화가 보여주는게 뭐겠습니까?
이 세상에 상처 나고, 아프고, 서로를 향한 섭섭함과, 다툼은
정의로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로 하늘의 풍성한 잔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그 풍성한 영광스러움,
그 아름다움을 우리가 누리게 될 때, 확인하게 될 때,
우리가 같이 그 풍성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그 잃어버린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둘째 아들을 향해서도 우리는 사랑의 손을 내밀 수 있고,
함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거죠.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아가는 그 풍성함을 다시 확인하고,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
그 풍성함과 영광스러움 때문에
때로 우리들에게 실망을 끼치고, 아픔도 주고, 상처 주었던
이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천국에 풍성함 때문에,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까지도
함께 품어서 이 땅에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며 맛보며 세워가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