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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1장 딱 한번 만의 위력

LNCK 2025. 3. 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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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번 만의 위력 | 단 1:8-17 |  금요철야 | 24.2.2 - YouTube

 

◈딱 한번 만의 위력             단1:8~17, 욥31:31            2024.02.02.      

오늘 설교 제목이 뭐죠? "딱 한 번 만의 위력"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사실 쉽지 않죠.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 많은 불완전한 환경, 또 유혹과 시험의 환경,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에는 부적합한 그런 환경들, 
유혹도 많고, 또 우리의 죄성을 건드리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우리가 선택을 해야 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 (상황에 맞추어서) 대처할 건가? 
우리가 결정을 할 때, 어떤 결단과 선택을 할 때 가장 중요한게 뭐냐면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어떤 결정을 할 때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큰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근데 많은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만드는 것을 좀 불편해 해요. 
왜냐면 거기에 내가 매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또 지키지 못할 때 찾아올 수 있는 마음의 가책도 있고...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어떤 기준, 규정, 규칙... 이런 것에 얽매이는 걸 싫어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규칙, 기준 이런 거를 원하지 않죠.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도,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거죠. 기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도 기준을 갖고 있으면, 
그 기준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이 질서를 잡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욥기 3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욥이 어떤 성적 유혹으로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눈과 약속을 했다는 거죠. 자기 기준을 세웠다는 거죠. 
'어떤 경우에도 처녀에게 주목하지 않겠다' 이 원칙을 세운 거예요. 

이건 뭘 의미하는 거죠? 유혹이 많은 그 시대에, 
돈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자들이, 쉽게 그 성적인 유혹에 넘어지는 그런 문화 안에서 
욥이 이런 자기 기준을 갖고 있었다는 걸,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거죠. 

여러분 유혹은 어디로부터 오느냐? 눈으로 오는 거죠. 안목의 정욕! 
특별히 남자들은 눈을 조심해야 됩니다. 
여자들도 물론이지만, 남자들은 눈을 조심해야 돼요.

시각적인 죄를 범하기가 남성들이 훨씬 더 쉬워요. 
특별히 여러분, 오늘날 영상 매체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무방비로 밀고 들어와요. 인터넷을 켜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밀고 들어와요. 

그러니까 내가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보라고 유혹을 하는 거죠.
미디어들과 상업주의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돈을 벌려고 발악을 하고 있죠.
그런 매체들이 꽉 차 있어요.

그러니까 눈을 빼앗아 가는 거죠. 우리의 시각을 빼앗아 가서, 죄를 짓게 만드는 거예요. 
그 출발이 어디냐? 눈인 거예요.
지금 욥은 '내가 내 눈과 약속했다. 난 처녀를 아예 안 쳐다보겠다' 이런 거죠. 

다윗의 눈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바라보는 순간 무너졌어요. 
만약에 욥에게, 다윗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쳐다보지 않았겠죠. 얼른 눈을 돌렸을 거예요. 
그게 왜냐면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안 보는 거예요. 

자, 이게 뭐냐면 욥의 '기준'이에요. 삶의 기준
나는 아예 그 유혹의 근원을 차단하겠다는 거죠. 
여성으로부터 올 수 있는 유혹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겠다... 대단한 결단이죠. 

자신의 삶의 기본적인 원칙, principle 이라는 거죠.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죠. 

욥은 자기 자신이 신앙인이지만, 연약한 죄인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늘 조심해야겠다.는 의도가, 자기 삶의 원칙에 담겨 있는 거죠.

'그런 것까지 약속해?' 우리가 무시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자신과의 약속을 한 사람과, 즉 자기 기준을 세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큰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자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방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유혹의 상황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어요. 

그래서 '나 자신과의 약속, 나의 기준 설정'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거죠.
돈의 문제가 내가 약하다 그러면, 
돈에 관련해서 '나는 뭐 예를 들면 공적인 돈은 난 일체 손에 대지 않는다' 
뭐 이런 것들을 스스로 약속하는 거죠. 

여러분, 근데 나 자신과의 약속은 쉽게 깨어져요.
내가 없던 걸로 해 버리면 끝나버리잖아요. 

근데 하나님과 약속이나 서원을 하면, 의미심장해지죠. 쉽게 깨뜨리지 못하죠.
그래서 우리는 그게 꼭 필요할 때, 하나님과 약속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근데 여러분, 이 성경은 사실은 약속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약속, 
그게 구약이고 신약이예요. 

▲자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죠. 
그래서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하죠. 
약속(=언약)을 맺으시고, 그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 

자 그런데 언약을 하실 때,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세요. 
'너희가 이것을 지키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주겠다' 이렇게 약속을 하셨어요. 
성경에 그런 약속들이 굉장히 많은 거죠. 

그것뿐만 아니고, 우리의 편에서도 하나님과 약속을 하는 거죠. 
약속이라는 건 뭘까요? 쌍방이예요.
우리도 하나님께 약속하는 거죠. 
'하나님,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순종하겠습니다. 
그 명령에 내가 따르겠습니다.' 우리도 약속을 하는 거죠. 

구약에 나실인에 대한 서원을 보면, 특별히 삼손의 예를 들어 보면,
삼손은 그의 부모들이 나실인으로 삼손을 서원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삿13:7
이 기준을 정한 거예요. 

삼손은 어려서부터 나실인으로서
포도주 독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은 먹으면 안 돼고, 
머리에 삭도를 대서 머리를 자르지마! ... 이런 선명한 기준들을 갖고 자랐어요. 

아마 그것이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삼손을 지켜주는 굉장히 중요한 울타리가 됐어요. 기준이 된 거예요. 

여러분, 우리 중에 모태신앙으로 자라난 자녀들 중에,
삼손처럼 부모들이 어릴 적부터 엄격한 기준을 정해주는 분이 있어요.
자녀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 기준(울타리)들이, 자녀들을 지켜주는 거죠.

그런데 삼손이 이제 장성해서, 그 나실인의 규례를 점점 어기게 돼요.
삼손의 그 스토리를 보면, 삼손도 눈에 보는 대로 따라가요. 
여러분 기준이 없으면 어떻게 되죠? 보이는 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예를 들면 마켓에 가서 무엇을 사겠다고 사는 분명한 목표, 기준을 가지고 가면, 
문제가 없어요. 
근데 그런 것 없이 어슬렁 어슬렁 시장에 거닐다 보면, 눈에 보이는 데로 사는 거죠. 
이것도 사고 이것도 사고... 나중에 보면 정작 살 건 안 사고 나온 거예요. 

결국 삼손이 기준, 원칙들을 무너뜨리니까 어떻게 해요? 보호막이 사라져 버려요. 
그리고 힘이 빠져 버리죠. 그리고 블레셋에 붙잡혀요. 포로가 돼요. 
눈이 뽑히고,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맷돌을 돌리면서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돼요. 
결국 뭐죠. 그 기준을 포기했을 때, 깨어 버렸을 때, 보호막이 사라지니까... 

그 기준이 나를 굉장히 불편하게 하고, 나를 붙잡아 매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나를 보호해준다는 걸, 삼손이 놓친 거죠. 
그러면서 어떻게 되죠? 진짜 매이는 포로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원칙과 기준이 없으면, 내가 제대로 살아갈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죄인이에요. 똑바로 가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죠.
죄인은 내가 똑바로 가고 싶은데, 바로 안 가지는 거예요. 마치 크랩, 게와 같아요. 
자기는 똑바로 걷는데, 옆으로 걷는 거예요. 

이사야 53:6절이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게 죄인의 모습이에요. 
각기 제 길로 가는데 그 길이 어디예요? 기준이 없는 거죠. 
자기가 원하는 길로, 자기가 끌리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이 이끌리는 데로 가는 거죠. 
본성적으로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느냐? 
당신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마땅한 기준을 주신 거죠. 

'너희가 나의 백성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된다' 여러분 그게 십계명이에요. 
하나님이 10가지의 이 기준을 선명하게... 삶의 원칙들을 제시해 주신 거예요. 

제가 몇 해 전에 주일 낮에, 십계명을 35강 정도 했어요. 
한 계명을 가지고 세 번씩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시면 다 들을 수 있어요.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오늘 이 시대에, 십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될 기준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안식일을 그냥 내가 뭐 한 번씩 마음에 끌려서 지키는게 아니라, 
이건 평소 삶에서 늘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반드시 지켜야 될 10가지를 알려줍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이 기준이 사람이 만든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기준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만든 기준이라면, 자기가 바꿔 버리면 되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만드신 기준은, 사람이 임의로 바꾸지 못하죠. 반드시 지켜야 됩니다.

▲요즘 기업들도 기업 윤리를 가지고 경영하죠. 그래서 경영철학, 윤리경영 이라는 게 있어요. 
그래서 일류 기업들은 경영철학이 있는데, 그 기업들은 윤리 의식이 높아요. 

어떤 경우에는 환경보호를 위해서도 많이 노력하죠. 
만약에 환경을 굉장히 훼손시키는 어떤 상품을 만들면,
이제 소비자들이 공격을 해요. 인터넷을 통해서 그런 걸 심판하는 거죠. 
불매운동도 합니다. 
그래서 윤리경영을 통해, 이제 기업의 가치를 자꾸 높이는 거죠. 

이렇게 우리 신앙생활에도, 기준과 원칙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여러분, 미국의 석유 왕으로 알려진 록펠러 가의 유명한 일화죠. 
그 어머니가 굉장히 대단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6살부터, 예를 들면, 십일조에 관한 부분을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감자를 받아도,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 
또 예배 시간에 앞에 앉게 한다던지... 
엄마가 그 록펠러에게 가르쳐 준 십계명이 있죠. 그게 유명한 거예요. 
이런 기준을 알려준 거죠. 
'너는 신앙생활 하려고 하면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이거를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명문 가문은 이 기준이 분명한 거예요.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율법주의를 버린다면서 방임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런 기준을 지키려고 하면, 굉장히 대가를 지불해야 되죠. 
그래서 '나는 주일날 10분 전에 예배 시간에 가서 반드시 앉아 있겠습니다.' 
'뭐 시간 되는대로 가서 앉는게 아니고, 나는 10분 전에 미리 앉겠습니다.' 
'매일 기도와 말씀 묵상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결단> 관련글
아침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반드시 큐티를 하겠습니다' 이런 자기 약속이 있어야 돼요!

'헌금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먼저 떼어놓고 사용하겠습니다.'
이런 원칙을 내가 정해놓고 사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회사 생활도 마찬가지죠. 
'회사 생활할 때는 어떤 경우에도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뒷거래 안 하겠습니다. 장사할 때 폭리를 취하지 않겠습니다. 
정확히 세금을 내겠습니다.' 이렇게 자기 기준을 정해 놓으라는 거죠. 
자 그래서 이 기준을 정하고, 나와 하나님과 약속을 하는게 중요한 거예요. 

▲다니엘을 우리가 좀 보면, 그가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 왕실로 들어갑니다. 

런데 바벨론의 왕실의 문화는 만만치 않은 거예요. 
그 당시에 바벨론이라는 곳은, 세속도시의 전형이죠. 

뭐 점성술, 마술, 그리고 굉장히 악한 문화들이 꽉 차 있는 그 바벨론입니다.
특히 당시에 바벨론은 유화 정책을 썼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바벨론 화 시켜 버리는 문화... 

그래서 다니엘의 이름까지 바꿔 버려요. 
'하나님은 내 심판관이시다'라는 다니엘의 이름을 벨드사살로 바꿔 버렸어요. 
벨의 왕이란 뜻이에요. 벨은 사악한 바벨론 신의 이름이에요. 
'악마의 왕'으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던 거죠.

그러니까 이런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 한가운데 이제 다니엘이 들어간 거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어떻게 하든지 바벨론 안으로 귀속시켜 버리려고 하는 거죠.

여러분 미국의 문화도 멜팅 포트 melting pot 라는 그런 말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미국 안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민자들이 
미국에 가면 아메리카나이즈 된다고... 아메리칸의 문화에 그냥 녹아져 버려서... 
완전히 아메리칸이 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문화의 강력한 힘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왕이 주는 포도주와 진미를 먹이는 거예요.
엄청난 거잖아요. 향응을 제공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대로 따라가면, 바벨론에 그냥 귀속되는 겁니다. 
바벨론의 문화, 법도... 그 종교적 제의 안에 들어가서 영향을 받는 높은 거죠. 

▲그래서 거대한 (문화)전쟁이 벌어졌는데, 중요한 것은 1:8절 본문이에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근데 우리가 오늘 설교에서 가져야 될 관점은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실의 출발 단계에서 기준을 가지고 시작했다는 거예요*주제
이게 중요해요.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거예요. 
내가 이 바벨론의 왕실 문화에 귀속되지 않고, 그 문화에 흡수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애당초 뜻을 정한 거예요.

'나는 어떤 유혹에도 내가 거절하고, 내가 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내겠다...' 
그러니까 바벨론의 왕실에 들어가서,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그러고 뜻을 정한게 아니에요. 아예 왕실에 들어간 출발 단계에서 
뜻을 정하고 들어간 거예요. 여러분 이게 선제적인 겁니다. 

먼저 뜻을 정하고, 왕실 생활을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먼저 뜻을 정하고 사는 것과, 
나중에 뜻을 정하는 것은... 전혀 달라요.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게 아니고, 먼저 뜻을 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소극적으로 반응하게 되죠.

 

그때그때 따라 내가 뜻을 정한 게 아니고, 
먼저 선제적으로, 적극적으로 뜻을 정하고, 그 이방 문화에 대응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세속에 적응한게 아니라, 세속에 저항 의식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다니엘은 원칙을 먼저 정하고 시작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자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시작할 때 뜻을 정하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작할 때부터! 
학교 입학할 때부터 시작을 해야 돼요.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이런 이런 부분에서 
나는 이렇게 기준을 가지고 살겠다' 이거예요. 

직장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어떤 조직체에 들어가든지, 먼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자기 기준,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거죠.
나중에 뜻을 정하려면 어려워져요.

한 번 직장 문화에 제압을 당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잘 하려고 하면, 아주 몇 배로 더 어려워져요.
아예 시작부터 기선 제압을 해야 되는데, 기선 제압을 당하면 안 된다는 거죠.

자 여러분, 다니엘에게 밀려드는 유혹이 많았죠. 얼마나 많았겠어요.
이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 이것밖에 없었겠어요? 끊임없이 밀려왔을 거예요. 

다니엘에게 나중에 가장 위협적인 순간이 오죠. 한참 시간이 지나고 
다니엘을 죽이려고 하는 법을 만들고, 그게 단6장에 나오죠. 

단6:8~9 '그런즉 왕이여 원하건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이거는 다니엘을 죽이려고 이런 법령을 제정한 거죠.
왕의 금령에 도장까지 찍어버렸어요. 이걸 어기면 사자굴이에요. 

자 다니엘이 어떻게 했을까요? '아, 이번에는 좀 다른 거 같아.
도무지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눈 딱 한번 감고 예루살렘을 향한 기도를 쉬어?'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그 후 다니엘의 역사는 달라졌겠죠. 흑역사였겠죠.
근데 다니엘은 자신이 정한 기준을 그대로 지켜요. 그게 유명한 6:10절이에요.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근데 이 변함없는, 흔들리지 않는 이 태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이 태도는, 언제부터 시작했느냐?
지금 이 상황에서 만들어진게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다니엘은 이미 그 왕실에 들어가서 출발 단계부터 
그가 정한 신앙 원칙과 기준을 무너뜨리지 않고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 속에서도 그는 변함없는 태도로 지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사자굴의 위협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그 왕실에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가 가졌던 그 기준과 뜻을 정하여... 
시작할 때 이미 그가 가졌던 확고한 태도! 

그게 6:10절에는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나타납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진게 아니고, 숱한 유혹이 옴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그 원리를 지켜낸 것입니다.

왕이 주는 포도주와 진미를 먹지 않기로 결단한 것의 연장선이에요. 
결국 하나님은 사자 굴에 들어갔으나,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봉하시고 다니엘을 살려내시죠. 

그리고 하나님이 그 왕의 마음까지 움직이시고, 
바벨론의 다리오 왕의 보호를 받고 다니엘이 승리하는 결과가 나오죠.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지켜낸 모습이죠. 

다니엘이 이 약속을 지켜낸 것에는 뭐가 있어요? 
단 한 번의 유혹을 이겨낸 거예요

여러분!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 세상 방식에 내가 따라줘? 
한번만 눈 감고 넘어가?' 그게 아니에요. 

얼마든지 자기를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유혹이 있었지만 
그 단 한 번의 유혹을 이겨낸 것이에요.

아까는 '맨 첫 번'
지금은 '단 한 번'

다니엘이 바벨론 왕실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단 한 번'의 유혹을 이겨낸 한 번은,
그저 한 번이 아니에요. 

우리의 대부분의 많은 유혹이 어디에서 오느냐면, '한번 쯤...'에서 와요. 
'한 번쯤..'하고 무너지면, 그 다음부터는 쉽게 무너져요. 

여러분 내가 한번 무너지고 나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요. 
피치 못할 상황은 계속 연속해서 벌어져요. 

직장에 입사해서 처음에 술잔 딱 한번 받았어요. 
오늘 처음 입사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한번 딱 받았어요. 
이제 그 순간부터, 이제는 빠져나갈 길이 없어요. 험난한 일이 벌어져요. 
나중에 '회식 자리에서 나 안 마십니다.' 그러면, 
'너 지난 번에 마셨잖아'하고 밀고 들어와요. 한번 허용한 것이 꼬리를 물고 들어와요. 

여러분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지켜냈던 사람과, 
'한번 쯤'하고 무너진 사람의 차이는 어마어마 해요. 

오늘 제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단 한 번을 무너뜨리면, 타협하면, 
그것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되어서... 패배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기도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변함없이 기도의 자리를 지켜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 지켜내면, 
단 한 번도도 빠지지 않고 그걸 지켜내면... 달라져요. 

살다 보면, '오늘 딱 한 번만 기도회에 빠질까?' 이런 유혹이 있어요.
빠질 만한 이유는 100가지도 찾아낼 수 있어요. 

몸의 상태가 안 좋을 수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딱 한 번만의 유혹이 와요. 

근데 딱 한 번을 허용하고 나면, 유혹이 계속해서 찾아오게 돼 있어요. 
두 번째 '딱 한 번' 타협은 더 쉬워져요. 
한 번 무너지고 나면 두 번째 '딱 한 번'은 쉬워요. 

그러면 어느 순간, '딱 한 번'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요. 그게 뭐예요?
기준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경계선이 허물어져 버려요. 기준이 없잖아요. 
기준을 허물어뜨렸으니까요. 

근데 여러분,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나면 
나중에는 쉬워져요. 자유로움이 와요. 

그리고 딱 한 번에 그 유혹을 이겨내고 이겨내다 보면 단단해져요. 
이건 비밀이에요. 

그리고 딱 한 번이라도 허용하지 않은 삶의 태도는
다른 영역에서도 발휘되어져요. 와우! 
여러분, 하나의 적용은 또 다른 적용으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딱 한 번의 무너진 틈을 타고 밀고 들어오는 합리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죄를 지을 때는 항상 합리화가 일어나요

인간은 변명과 합리화를 만들어 내는데 귀재에요. 
결코 우리는 죄를 지을 때도 그냥 죄를 짓지 않아요. 
기가 막힌 합리화, 그럴 듯한 이유를 찾아내요. 

마치 '하나님도 이것만은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미화를 시켜 버려요. 
그러면 기준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협 앞에,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가요? 
이건 하루아침 만들어진게 아니라는 거죠.

일상 속에 무수하게 타협의 유혹을 거절하고, 또 거절한 이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자 굴에 집어넣는데 어떻게 타협을 안 해요? 
처음부터 '뜻을 정하고' 살아간다는게, 이미 다니엘에게 있었던 거죠. 

자 다니엘은 뜻을 정했다는 것은, 
그가 정한 결심은 그냥 나온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 
바벨론의 왕실에 속한 자가 아니고,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걸 잊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왕실의 법도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법도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 한 번의 유혹'을 이겨내는... 
그 '한 번만'을 지켜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디까지 무너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죠. 분명한 것은 끝없는 추락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일어나는 교묘한 실패가 여기였어요. 어디나 보세요. 이거예요. 
이 원리에요. '한 번만'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은 어려워요. 근데 처음 한 번을 지켜내는게 어려워요. 
그러나 초기에 이것을 이겨내면, 나중에는 쉬워져요. 나중에는 쉬워져요. 
죽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근데 그걸 지켜내고 나면 나중에는 쉬워져요.

직장에서 내가 술을 안 먹는다는 그 한 번의 결단이 굉장히 힘들었지만 
그걸 지켜내고 나면, 내가 술을 안 먹는게 소문이 쫙 퍼져요. 

'쟤는 안 돼, 안 먹어.. 그날 봤잖아!' 나중에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다른 사람이 술을 권하면, 주변에 사람들이 막 도와줘요. 
'안 먹는 거 알면서 왜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 하고 주변 사람들이 도와줘요. 
대변해 주는 사람이 생겨요. 한번의 분명한 행동이 사람들에게 각인이 돼요. 

딱 한 번의 유혹을 거절할 때 두려움이 있죠. 
그러나 그 고비를 넘기면 상황은 달라져요. 
처음 딱 한 잔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상은 생각보다 커요. 

한번 확실하게 말씀을 지키고 나면, 신기하게도 방패막이 생겨요. 
하나님이 도우셔요. 그것을 계속 지킬 수 있는 문이 열려요. 
처음으로 어렵지만 나중에는 쉬워져요. 이게 비밀입니다. 

나중에 내가 유혹에 넘어가고 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요. 
내가 유혹에 넘어가려고 해도 불가능한 상황이 만들어져요. 
나중에는 자기가 먹고 싶어도 못 마셔요. 
죄를 지을 환경 자체가 사라져 버려요. 

세상은 우리를 편안하게 예수 믿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요. 
마귀는 우리를 허물어뜨리고 발악을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유혹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유혹이죠? 마귀가 하는 가장 잘 먹히는 전략이 이거예요. 
'딱 한 번만 하라'는 것입니다. 

딱 한 번만 마약 해보라는 거죠. 딱 한 번만 한잔하라는 거죠. 
딱 한 대만 피워보라는 거죠. 성적 순결도 마찬가지고... 
오늘 딱 하루만, 딱 한 번만의 유혹이 그렇게 오는 거예요. 

마귀는 계속 유혹하는 거예요. 오늘도 금요철야 나오려고 하면 
'오늘 딱 한 번 쉬어라. 다음 금요일에 가면 된다; 

'주일도 마찬가지예요. 딱 한 번만 빼 먹어라! 오늘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그래서 여러분 오늘날 딱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아요. 마귀의 전략은 놀라워요. 
한 번 두 번 되고, 세 번 되고, 결국 어떻게 되죠? 
현실은 내가 생각한 것과 한참 거리가 멀어지는 거죠.

그 한 번에 걸려들어 내 인생이 망쳐지는 거예요. 
우리가 짓는 죄들은 마약 성분하고 비슷해요. 마약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한번 딱 손을 댔는데 못 끊는 거예요. 

여러분 요즘 연예인들 같은 경우에도 프로포폴이라고 그러죠. 
너무 힘들고 늘 인기가 오락가락하고, 그러니까 얼마나 예민해져 있겠어요. 
그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데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그러니까 잠도 안 오고, 

 

뭐 이러니까 그거 한대 맞으면 잠을 팍 가니까... 막 그게 그냥 
'한 대만 맞으면' 푹 자고 막 상쾌하고 이러니까, 그게 한 번 맞는데 
그게 이제 자꾸 맞는 거예요. 그게 이제 질이 드는 거예요. 미끼를 물은 거예요. 

물고기가 그렇잖아요. 그 미끼를 딱 한번 물었는데, 
그 물고기 운명이 끝난 거예요. 다시 물로 돌아갈 수 없어요. 더 이상 자유가 없어요. 

여러분, 한국은 지나치게 도파민에 빠져 있어요. 굉장히 자극적인 문화예요. 
매운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매운데도... 계속 청양고추에 온갖 외국 고추를 다 집어넣어가지고 
막 고춧가루로 떡을 쳐가지고, 그냥 고춧가루 튀김해서 먹는 거예요. 
웬만한 걸로 만족하지 못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아니에요.

근데 그게 모든 우리의 삶의 문화에 베어져 있다는 거죠.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순결도 마찬가지예요. 
한번 허용하면,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한번 이거를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한 번 지키면, 계속해서 그걸 지켜내는 거예요. 하늘과 땅 차이예요. 딱 한 번의 실수가. 
그것 하나가, 모든 삶을 바꾸어 놓는 거예요.

어떤 죄든지 그래요. 지켜냈을 때와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졌을 때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예요. 

여러분, 우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힘을 이길 능력이 없어요. 
죄를 짓기 전과 이후는 다르다는 거예요. 잠시 죄의 달콤함이 있는 거죠. 

근데 여러분 죄를 짓고 나면, 딱 한 번만 했는데, 그 죄가 가속력이 붙어요.
절대 죄는 그냥 그대로 있지 않아요. 죄는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어요. 
권세를 갖고 있어요. 사로잡아 버려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내가 죄를 지었는데, 그 다음은 죄가 나를 끌고 가요. 
죄의 힘이 나를 끌고 가요. 그때는 컨트롤이 안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 신앙의 세계에서도, 승자와 패자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아요. 
들여다보면 '딱 한 번'의 유혹을 이겨내는가, 이겨내지 않았는가에 달려 있어요.

여러분 오늘의 문화는 강렬합니다. 후끈해요. 죄의 열기가 강해요. 
단 한 번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지... 
마귀가 쳐 놓은 그물망이 얼마나 강력한지 몰라요. 

여러분 딱 한 번만이라도 허용하지 않는 이 태도는 
간혹 사람들로부터 좀 답답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너는 너무 고지식하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어요. 
'너 너무 율법주의 아니야?' '넌 너무 융통성이 없는 것 같아' 하는
별별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좀 그런 소리를 들어도. 분명한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미국의 아미쉬 공동체가 있죠. 재세레파인데요. 
현대 문명과 거리를 좀 두고, 이 현대 문명, 또 문화가 주는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서 

또 이 문명, 문화가 굉장히 하나님적인 그런 문화들이 많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집단적으로 집단적인 공동체를 만들어서 살잖아요. 

주로 옷도 주로 단색을 입고, 까만 옷이나 흰색 종류로 있고 
여자들도 치마를 아주 긴 롱스커트를 입고, 굉장히 보수적인 모습들이에요. 

그러니까 거기는 전혀 다른 세상 같이 보여요. 
그들끼리만 결혼하고, 아미쉬 공동체 내에 사람들과만 결혼하고, 
외부 사람과 결혼하는 자체가, 굉장히 문화가 뒤섞이고, 
또 좋지 않은 문화가 들어올 수 있는 영향이 있다고 해서, 철저히 차단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좀 답답하죠. 좀 답답해 보이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고 
또 무엇보다도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향력, 이런 것들을 대해서는 
소극적인 것이니까... 그들에 대해서 우리가 전부 동의하기 어렵지만 
하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이 세상의 그 악한 문화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내려고 하는 적극적인 태도는 굉장히 필요한 거죠. 

어떻게 보면 좀 답답해 보일 정도로, 자신들을 세속에서 지켜내려고 하는 그 고집스러움,
뭐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도전이 되는 부분들이 있는 거예요. 엄격한 기준!

그러니까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허용하는 태도,
그 엄격한 기준이 자꾸 이제 자꾸 낮추어지는 거예요. 로우 레벨로 자꾸 가는 거예요.

'요즘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 그렇게 하면 뭐 아무것도 못하겠네!' 
이런 합리화가 자꾸 들어오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 사람들과 전혀 다른 클래스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 세상이 너무 죄로 오염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볍게 쉽게 접근을 하고 나면, 모든게 무너지고 만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가져야 될 매우 중요한 것은 
좋은 영적인 습관을 길러 가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분명한 약속을 하고, 
어떤 기준을 분명히 세워서, 그것을 지켜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막 되는대로.. 그냥 편한 대로.. 그냥 상황에 따라 내가 하는게 아니라, 
선명한 기준을 세우는 거예요. 

 

금요철야가 한국교회에서 사실 무너져 있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신다는게 놀라운 거잖아요. 

뭐 금요일 밤이면, 사실 편안하게 쉬고 싶은... 
뭐 세상은 금요일을 '불금'이라면서,  *불타는 금요일
뭐 야단하는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그 문화를 저항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철야로 밤을 뚫다'  *철徹 '통할 철, 뚫을 철'
이 시대가 술로, 유흥으로 그냥 막 밤을 지내는데 
여기서 우리는 전혀 다른 물결로 저항하는 문화잖아요. 

지금도 (금요일 밤도) 뭐 해운대나 광안리나 서면이나 이런 데 가면, 
죄의 밤이 막 깊어 있겠죠. 그죠. 

버스타고 오다 보면, 해운데 입구 수영로 교회 쪽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있고, 
또 좀 더 가는 분도 있고... (해운데 바다로 가서 노는) 막 그럴 거 아니에요. 
그 중에는 '여기서 내릴까, 더 가서 내릴까' 그러다가 여기 내린 분들 계실 거예요.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분들이 계실 거라고요. 
올까 말까 이렇게 하는 분이 계시고... 그런 분은 뭐예요? 기준이 안 잡혀 있는 거죠. 
순간순간 우리가 기준이 없으면 오락가락, 갈팡질팡 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신앙생활에 기준을 가지고 계셔야 돼요. 
예배에 대해서도, 여러분, 기준을 갖고 있어야 돼요. 

'나는 이런 예배자가 되겠다...' 
여러분 예배는... 우리가 그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예배에 생명을 걸어라' 그럼 예배에 어떻게 생명을 걸어요? 
그럴려면 자기 기준을 갖고 있어야 돼요. 

'예배를 위해서, 내가 이 정도 대가는 지불하겠고, 
어떤 경우에도 나는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자가 되겠다'
그에 따른 어떤 자기 기준을 갖고 있어야 돼요. 

경건 생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삶의 구체적인 원칙이 있어야 돼요.
큐티를 해도 기준을 갖고 하셔야 돼요. 
난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전화도 안 받아! 약속도 안 잡아!
그때는 하나님과 나와 만나는 시간이니까, 그 시간을 나는 철저히 지킨다는 거죠. 

새벽기도를... 상황에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하면, 결코 우리는 온전하게 지켜낼 수 없어요.
새벽기도는 '나는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 하는, 자기 절대 기준이 있어야 돼요.

그렇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하겠다는 말은, 
그게 우선순위 priority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결코 우리는 온전하게 지켜낼 수가 없어요. 

'기준이 없다'는 말은, 자기는 안 지키겠다는 말과 똑같아요. 
그러니까 '딱 한 번만'이 내게는 안 통한다.
내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타협하지 않겠다.
라고 하는이 태도는, 선명한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나는 앞으로 일평생 절대 남을 험담하지 않겠다' 하는 기준!
이런 기준들이 없으면, 나도 모르게 가십이나 디스가 나와요. 

근데 관계 속에서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축복만 하며 살겠다' 
이러면 기준을 가지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은.. 점점 성숙하는 거죠.
처음에는 그게 잘 안 되더라도, 점점점 되어져 가는 거죠.

산상수훈 속에서 나오는, 성경 속에 곳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아 이거는 내 인생에 이건 정말 타협할 수 없는 기준이 돼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이런 것들을 확실하게 붙잡으면, 그걸 기준으로 삼고, 내가 살아가는 거죠.
그냥 요한복음 3:16절 하나만 붙잡고 믿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걸 지켜내는 거예요. 약속을 하고, 그 기준을 정하고,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서... 기도하며 발버둥치는 거죠.

여러분 애매하게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힘들어요. 
누가 힘들게 사느냐면, 애매하게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다 이해하지 못 하더라도,
그런데 알아들으신 분은 알아들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에요. 

나에게 분명한 기준이 없으면, 끌리는 대로 사는 거예요. 보이는 대로 사는 거예요.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작정하는 거예요. 기준을 정하는 거예요. 

(*과거에 그런 말이 있었어요. 좋은 설교는 듣고 나면
작정과 결심을 하게 하는 설교다...
설교를 다 들었는데도, 아무런 작정, 결단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뭔가 부실한 거예요)

좋은 영적 습관과 기준을 가지고 있어 보세요. 
그것이 내 삶을 보호해주고, 울타리가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블레싱이 되는...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데, 
우리 편에서도 결단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거죠...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이 세상에 다르게 살아야 돼요. 

그리고 다르게 산다는 건, 딴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걸맞는 삶을 계속 훈련해 가는 거죠. 

여러분 다니엘의 그 결단, '뜻을 정하여' 라고 하는이 결단은  단1:8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난게 아니에요. 
처음에 '뜻을 정하여'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6장에, 사자굴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런 단단한 결단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거죠. 

뭐 '이번 한 번쯤이야'가 아니에요. 
그 '한 번쯤이야' 라고 하는 그 미묘하게 밀고 들어오고, 나를 무너지게 만드는 
그 마귀의 간교한 그 유혹을 여러분들이 이겨내시고, 
그 유혹을 이겨낼 때 승리가 있고, 연쇄적인 또 다른 승리를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딱 한 번쯤이야!' 하고 무너지면,
그 무너짐이 또 다른 영역에서 파급 효과를 불러 일으켜서
반복된 실수가 거듭되게 하면서, 결국 내 삶 전체를 무너지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각오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세운 그 약속을 
지켜내시기 바래요. 

여러분 힘들지만 한번 지켜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계속 지키도록 도우실 것이고 
지켜 내면 낼수록 우리를 더 강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시는 축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