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께 초점을 맞추라! / 에베소서 4:30-32 - YouTube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라 엡4:30~32 2025.01.26.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라' 이게 참 좋기는 한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썼던 글 중에 '성령님께 초점을 맞춘다' 라는 것이 뭔지를 이야기하는
글을 제가 읽어 드릴게요. 조금 길기는 하지만 차근차근 한번 들어보세요.
'하나님'보다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살기 쉬운 점을 지적한 글입니다.
「비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고 하지요.
비난도 관심이라는 말이 새삼 실감이 갑니다.
페이스북을 이용해 이런저런 글을 올리다 보면,
지지해주는 댓글만큼, 비판의 댓글도 많습니다.
논란이 되든 칭찬을 받든, 어쨌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에 의미를 둬야겠죠.
그러고 보면 요즘은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을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제 모습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왜 우리는 그리도 관심을 받고자 할까요? 무관심이 두려운 이유는 뭘까요?
어쩌면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요?
몇 달을 외부 행사나 모임에, 가능하면 참여하지 않고 지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제 입으로는 '요즘 참 편안하네' 라고 말했지만,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묘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 새벽에 책을 보는데 이런 글이 있더군요.
'하나님이 쓰시는 미래의 사람은, 현재를 조용히 준비하는 사람이다'
결국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요?
미래를 준비하는 잊혀짐은, 사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시간인데 말입니다.
진정 두려운 것은, 사람에게 유명해지는 일이,
하나님께는 잊혀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결국 우리의 신앙적 결단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께도 기억되고, 사람들에게도 기억된다면 좋겠지만,
이 둘 사이에, 결정해야 되는 순간이 우리에게 반드시 찾아옵니다.
이런 결정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년 스케줄을 확정하며,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좋으라고, 누구에게 기억되기 위해 이 일을 하는가?'
이렇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더라는 거죠. 성령님이 아니라요.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미래에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겠지만,
이 싸움에서 지면, 참 불쌍하게 '사역이 끝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더라도, 하나님에게 좋은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모두에게 기억될 수 없더라도, 미래의 하나님께 기억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제가 과거에 어느 새벽에 썼던 글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께 기억되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엡4:30
그러니까 우리들이 성령님과 함께 동행한다고 말은 하지만,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들이 성령님과 동행하기도 한다는 거죠.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엡4:31절에 보면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너희 안에 있는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과 비방을 버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주제
제가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어제부터 제가 이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목회자들, 우리 교인들에게
정말 성령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우리 안에 있는 악함과, 악독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진짜 그런 마음의 소원이 있거든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 그 모양과 성품들이,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는 우리의 모습들이 좀 나타났으면 좋겠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집중한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께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는데 방해가 되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죄입니다.
죄는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 하는 actual sin, 실제 행동으로 짓는 죄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문제도 포함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저도 가끔 이제 예배를 드리면서,
찬양 시간에 저기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제 여기 강단으로 올라와야 되는데, 갑자기 잠시 스치듯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오늘 예배를 마치고 누구를 만나야 되는데...
오늘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그런 순간이 잠깐 들어오면, 예배의 흐름을 탁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집중해야지...'
근데 우리들이 '성령님께 집중해야지... 초점을 맞춰야지...'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에 죄가 딱 들어오면, 그 초점을 가로막게 되는 거죠.
오늘은 그래서 '어떻게 우리들이 성령님께 초점을 맞출까?'에 대한
그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거거든요.
▲여러분, 요나는 선지자였어요.
그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였는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에게 가서 '회개하라'고 말씀을 전하라 명하셨어요.
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왜 요나는, 이 말씀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요?
요나의 사고방식의 문제인 거예요.
요나는 어떤 생각을 했냐면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이방 민족은 멸망을 받아야 돼!'
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하나님은 어떤 방식을 가지고 계세요?
그들이 나를 떠나 살고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회개하라' 말씀하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생각과 요나의 생각이 달랐던 거죠.
요나가 화가 났어요. 자, 여러분들 혹시 하나님께 화가 난 적 없으세요?
솔직하게 살피면, 때때로 우리도 하나님께 화가나요.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내 생각하고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 때죠. 요나에게도 바로 그런 순간이 온 거예요.
그런데 요나가,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갑니다.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어요.
욘1:3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 항구에 왔는데,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거예요. 요나는 이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일일 술술 잘 풀린다'
여러분들의 삶에 한번 딱 적용해 보세요. 우리들의 삶에 제일 위험한게 뭔지 아세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는데,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무서운게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성령께 초점을 맞춘다' 라는 것을 아주 진지하게
우리들이 물어봐야 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의 삶의 문제가 없고, 여러분들에게 모든 일이 잘 된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성령님께 올바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를
우리들이 살펴보아야 되는 거죠.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데... 일이 순조롭게 잘 되고 있어요...
그래서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는데, 우리가 또 잘 아는 이야기가 나오죠.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게 되고 모두가 죽게 되었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누구 때문일까?' 그래서 제비를 뽑죠.
그랬더니 요나가 뽑혔잖아요.
욘1:9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나는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이것이 요나의 자기 인식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뜻을 거스리고 도망가고 있는 상황에서
선원들이 '너 때문에 이런 풍랑을 만났다. 넌 누구냐?' 그러는데
요나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다!'
이 대목이 아주 흥미로운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뭐라고 얘기해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죠.
요나의 속마음을 보니,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즉 성령님의 사람이 아닌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어요.
▲오늘 본문 엡4:31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지금 요나의 마음속에 니누의 백성을 향한 분냄이 있어요.
그 백성들을 향한 비방이 있어요.
'그들은 죽어야 한다'고 하는 악한 생각 가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뭐라고 생각해요?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다'
요나는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까요?
저는 당당함은 착각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흔히 이런 말을 하죠. '무식함은 용감하다'
요나가 지금 무식한 겁니다. 그는 성령님의 뜻대로 살지 알면서도,
무식하게 당당하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죠.
다행스러운 것은 요나가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들어감으로 인해서
그 안에서 흑암의 시간들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알게 되는 거죠.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흑암의 시간들을 지나고 있는 분이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시간이 큰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그 암흑의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갈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큰 축복이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이 흑암의 시간을 지나가는 분이 있다면,
이 안에서 우리들이 발견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마14장에 보면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또 나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나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걸어와라' 그래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걷습니다.
막 베드로는 무리를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추측입니다.
'야, 내 믿음이 괜찮다'
잠시동안 물 위를 걸어가다가 베드로가 뭘 봤어요? 풍랑이 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무서워하면서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죠. '믿음이 적은 자여!'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의 삶에 굉장히 적용해야 될 부분인 거 같아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삶에 풍랑을 만나면, 우리 믿음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납니다.
베드로가 '주님, 나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라고 걷고 있는데,
사실 베드로는 그의 믿음으로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물결을, 풍랑을 보는 순간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베드로가 보아야 되는 것은, 자기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인 거죠.
'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들이 풍랑을 만날 때,
여지없이 무너지지만, *자기에게 초점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풍랑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들이 물결 위를 걷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일상 가운데서 갑자기 우리들에게 의심이 일어날까요?
여러분들은 그런 적 없나요? 솔직하게
'내가 신앙생활하는데 이거 아닌 거 같아. 내 믿음이 과연 옳은 거야?'
이런 의문들이 들 때가 가끔 있죠.
정직하게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볼 때 그 의문들이 들 때,
사실 그 한 가운데는 어떤게 있는지 아세요? 손익을 계산하고 있어요.
'아 이거 내가 신앙생활해서 손해 보는 거 아니야? 이거 내가 망하는 거 아니야?'
결국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그 가운데는 무엇이 있냐면,
믿음의 회의는... 우리들이 손익을 계산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악함과 분냄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여호와께로 우리들이 향하고 있지 않은,
초점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지 않고, 자신에게 향하는 내 모습을 보게 돼요.
우리가 자기 계획을 세우는 순간,
주님을 초점 맞추지 않고 내 믿음을 의지하는 순간,
화가 잘 납니다. 왜냐면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런 때 또 이런 기도를 해보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제 내 모든 것을 주께 맡깁니다'
야 이거 굉장히 좋은 믿음처럼 보여요.
근데 여기에도 오류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이제는 안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 뜻에 맡깁니다' 라고 말하지만,
정직하게 들여다 봤을 때,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뭘 꿈꾸는지 아세요?
'내가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이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인도해 주세요'
그래서 그게, 내가 하나님께 맡곁다고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또 화가 나요. 분냄이 일어나요.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성령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하나님께 나를 맡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세요'
하는 그 순간부터는,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나를 맡깁니다' 하고 믿음으로 맡겨야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뜻과 목적과 의도대로 해 주시도록' 맡기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일이 내 뜻과 목적대로 안 되면,
화가 나고, 분을 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죠. 요나처럼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맡길 때는
'하나님,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심이 내 삶의 베스트임을 믿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 것은
이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신다는 거예요.
▲제가 여러 번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인도하신다'는 확신과 믿음이 저에게 있는 거예요.
이전에는 저는 그런 기도를 많이 했어요.
'하나님 저는 이런 계획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제 계획과 뜻대로 되도록 도와주세요'
근데 제가 은혜를 받고, 제 마음은 뜨거운데,
보니까 하나님은 내 뜻대로 일하시지 않더라고요. 당황스럽죠.
참으로 놀랍게도, 내 뜻대로 일하시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가 많았어요.
'아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인도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의외네)
그때부터 저는 그렇게 기도해요.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그게 뭐든지
제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제게 주세요.'
이러면 노함과 분냄과 다툼이 일어날 일이 없고, 그저 놀라고 감사하게 되죠.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께 맡깁니다' 라고 기도하죠.
근데 그 맡기면 온전히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내 뜻대로 되게 도와주세요... 가 아니에요.
▲저는 만나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게 되어서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제가 오늘 여기에 서 있는 것도,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것도,
저에게는 참 복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무엇보다 이렇게 좋은 교인들과, 이렇게 좋은 장로님들과
이런 좋은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어요?
근데 저 혼자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이 갑자기 저를 다른 곳에 옮기신다면, 제가 순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저에게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그러면서도 겁나는게 있어요. 선교지로 가라고 하실까봐 겁나요.
진짜 제 속에 있는 두려움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시나요?
제가 왜 두려운지 아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인도하실 때
내가 순종해야 되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어요.
그런데 그 두려움보다 더 큰 축복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그것은 내 삶의 베스트임을 내가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축복이다...'
이게 뭐 제 경험이죠.
제가 목회를 하면서.. 내 뜻대로 안 됐는데
'야 기가 막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이런 고백이 제 안에 있는 거예요.
지난주에도 설교하면서 이런 찬송을 불렀죠.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내 삶을 맡겼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나사는 동안 주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인생을 맡긴 사람의 고백이 아니겠는가요!
▲출40:36~38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에요.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구름기둥이 떠올라요. (그 속에 불기둥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움직여야, 백성들이 따라서 움직이는 거예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훈련을 시키셨어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때때로 쉬고 싶을 때가 있었을 거예요.
'여기는 너무 좋아요. 여기 며칠 좀 더 머무르면 좋겠어'
그런데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여지없이 따라가야 되는 거예요.
이 출애굽의 여정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배우도록 하신 거예요.
그들과 원하는 방향이 다를 때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그것이 그들의 삶의 최선이고,
그 인도하심이 결국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요?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그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그들을 훈련시키셨다는 거예요.
초점을 맞추는 훈련을 하는데, 40년의 시간들이 걸린 거예요.
▲저는 지금도 제가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가 기억나는데
저는 (군목)장교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훈련받는 첫 4주 동안 제식훈련이라는 것만 했어요.
제식훈련이란 줄 맞춰서 걷고, 손 각도 높이고, 보폭 맞추고...
제가 훈련받는 몇 주를 지나면서 '정말 왜 이런 걸 해야 돼?'
'걷는 걸 이렇게 4주 동안이나 이렇게 (오래) 맞춰야 돼?' 그런 생각을 했어요.
걸으면서 노래를 하고, 구호에 맞춰서 뛰고, 군가를 부르고 하는 그 일들이
'이게 왜 이렇게 (오래도록 훈련하는) 미련한 일일까?'라고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군인들이 그렇게 오와 열을 맞춰서 가는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요. 그리고 제가 훈련받으면서 배웠던 것 중에 하나가
대한민국 육군 장교는 비가 와도, 우산을 안 쓰는 거예요. 우비를 입죠.
또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정해진 날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팔을 걷지 않습니다.
이건 장교의 품위에 대한 거죠.
군인이 되는 것도, 장교가 되는 것도.. 그냥 하루 아침에 되지 않고,
많은 반복과 훈련을 통해서, 점점 되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훈련이 필요했던 것처럼요. 그 어린 자손들이 훈련되었죠.
중략
▲때때로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시지 못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이 영적으로 민감해져서,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들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때는 우리의 계산과 이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순종이 필요한 것이고,
이 순종이 연습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아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거죠.
우리들이 주의할 게 있어요.
여러분들의 삶에 선한 의도가, 늘 하나님과 마음과 동일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들이 선한 의도로 뭔가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선하게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웬지 마음이 불편하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신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과연 뜻인지를' 돌아봐야 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공평함이, 늘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독했어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때 예수님의 마음가운데 '그래, 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드러내리라'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사람들을 다 멸하시지 않았다고요.
이유가 뭐예요?
하나님의 마음이, '네가 거기서 내려오면 안 돼. 너는 인류의 죄를 지고,
네가 거기서 죽어야 돼!'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신 거죠.
▲지난주에 제가 설교를 마치고 났는데
약간의 여러분 대부분은 모를 수 있는 작은 소동이 있었어요.
아마 제가 설교 중에 그런 표현을 좀 했던 거 같아요.
'우리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될 텐데
혹시 대통령을 뽑게 되면, 이렇게 막 핑계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니라
정말 확신이 있는 사람을 우리들이 뽑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랬는데 막 교회 홈페이지로도 그렇고, 막 연락이 오면서
제가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될 텐데' 라는 말이,
탄핵을 지지하는 그런 발언이었다.
헌금을 돌려달라... 막 이러면서 난리가 난 거 같아요.
근데 그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그렇게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대통령을 찍을 때 핑계 대지 않는 사람을 찍으라'고 그랬던 말을,
일부 사람들은 '그 사람 찍지 말라고 했다'고 알아 들었고,
또 반대로 '그 반대 진영 사람을 찍지 말라고 그랬다'고... 제각기 다르게 알아들은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해요.
제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님,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속이 이렇게 좁아 터졌을까요?'
저는 우리가 지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거든요.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 때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이념과, 우리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크신 분이세요.
우리들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이 나라와 민족을 맡기고,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들 각자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우리들이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간증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저도 제 생각들이 많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 가운데 늘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나님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일까요?'
▲요즘 곧 닥치는 설 명절을 사람들이 많이 걱정합니다.
지금 여론조사가 막 이렇게 팽팽하게 나오면서
'가족들이 모이면 많은 불화가 일어나겠다'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시고,
그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세요.
여러분들이 명절에 가족들을 만났을 때, 절대로 시기와 분냄과 악한 마음들이
여러분들에게 없어야 돼요.
우리들의 성령님께 초점을 맞췄을 때, 우리 성도가 어떤 사람인지를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보여줄뿐만 아니라
이 나라 대한민국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우리들이 보여줄 수 있어야 돼요.
그때 우리는 어떤 간증을 해요?
'야 하나님이 이렇게이 나라와의 민족을 인도해 주셨구나'
여러분, 시리즈를 마치면 다음 7번 설교 시리즈는
우리나라 조선 땅에 들어왔던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하게 됩니다.
7주 동안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를 합니다.
진짜 그 말씀을 준비하면서
'야 하나님이, 이 땅에 이렇게 역사하셨고
우리들의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준비해 놓으셨구나'
라는 지난 역사들을 우리들이 이제 7주 시리즈 동안 함께 보게 될 텐데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고
지금까지 이 나라 대한민국을,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지켜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이 나라 대한민국을 지켜 주실 줄, 우리들이 믿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그런 우리 성도들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공동 기도문 (다같이 소리내어 합독하며 기도합니다)
오늘도 말씀 가운데 저희를 가르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빗나간 우리 마음의 초점을 다시 성령님께 맞춥니다.
한 주간을 살아가며, 주님 뜻이 내 뜻과 달라도, 순종하기 원합니다.
주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손익을 따지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광야로 부르실지라도, 의심과 불안이 있을지라도,
초점을 주님께 두기로 결단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자가 되겠습니다.
죄를 떠나며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성령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내 뜻과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