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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장 진화론, 둘로 쪼개진 진리

LNCK 2025. 3. 7. 11:5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기독교사상

시대의 도전자들10 : 진화론, 둘로 쪼개진 진리 ┃2025.2.16 - YouTube

 

진화론, 둘로 쪼개진 진리         창1:1      시대의 도전자들10,  히브리서 21강

 

◑2. 진화론의 미혹  ... 이 단락이 본론입니다!


◑도입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저희가 히브리서 말씀을 살펴보면서, 특별히 지난 몇 주 동안에 
'시대의 도전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진리에 도전하는 그런 사조들, 흐름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크게 다섯 가지를 저희가 뽑아서 살펴봤는데요.
황금 만능주의 / 인본주의 / 진화론 / 포스트모드니즘 / 문화 막시즘 이었습니다. 

요즘의 시대적인 차조들인데요. 
근데 어쩌다 보니까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는 깊게 다루지 못하고 넘어갔더라고요. 
인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막시즘에만 이제 주로 포커스를 맞췄고 
진화론에 대한 내용은 아주 가볍게 다루고 넘어갔던 거 같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했던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시대의 사조들을 다루면서, 어떤 사조 별로 짚고서 넘어갔다기보다는 
일어나는 '현상'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 뿌리에 무엇이 있는가? 
이렇게 역으로 파고 들어갔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문화 막시즘 같은 경우에는 
좀 충격적인 현상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남자 며느리를 얻는다' 이런 게 있잖아요. 
이런 사조들이 주로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많이 나타나죠. 
왜냐면 나이 드신 분들은, 아무래도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훨씬 더 옛날에 형성됐기 
때문에 훨씬 더 보수적인 것이라면, 

지금 청년 세대, MZ세대들은 훨씬 더 현대 사조의 세계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뭐 포스 모더니즘적인 현상이라든지, 문화 막시즘적 현상들이 
MZ세대들에게 주로 많이 나타나는데
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아니면 문화 막시즘이나 인본주의 같은 것은 
눈에 띄는 (쇼킹한) 현상들이 나타나요. 

예를 들면,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해서, 집안에 남자 며느리가 생긴다든지
막 이런 쇼킹한 것들이 드러나게 되니까, 이런 현상들이 딱 눈에 띄게 되죠.

그에 비해서 진화론은, 이렇게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현상을 
별로 많이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왜냐면 진화론은 이미 너무 깊게 우리 사고와 문화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다고 느껴요. 

근데 사실은, 이 진화론도 처음 나왔을 때는
'남자 며느리가 생긴다'고 하는 것 만큼이나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사람이 아메바에서부터 진화했다고?' 이게 얼마나 충격이었겠어요?
그런데 이미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속에 그런 생각들이 너무 깊게 자리 잡다 보니까,
'그냥 뭐 당연히 그렇지 뭐...' 이렇게 진화론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됐습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면, 그만큼 뿌리 깊게, 사람들 내면 아주 아주 깊은 곳에 
진화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풀어 설명하면, 현대의 많은 사조들의 가장 근간에 가보면, 
뿌리에 가보면... 진화론적인 사고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진화론 이라는 것은, 이렇게 딱 눈에 띄는 어떤 자극적인 현상들은 
좀 덜 할지 몰라도, 사실 다른 모든 사조들이 세워지는 어떤 판을 짜는...
즉 기초를 깔아주는 그런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 면에서 시대 사조들을 다루면서 
진화론을 깊게 안 다루고 넘어간 것이, 계속 찝찝하더라고요. 
뭔가 해야되는 일을 안 끝내고 그냥 넘어간 거 같은 찝찝함이 있어서 
늦었지만 다시 돌아가서 진화론을 다루기로 했습니다. 

이미 '시대에 도전자들' 시리즈를 끝내고, 시간이 뭐 좀 지났지만 
그래도 '이거 (진화론) 하나를 마저 해야지... 그래야 임무를 완수하겠다', 
그래야 제 마음에 평안이 있을 것 같아서... 오늘 진화론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진화론은 방금 말씀드렸지만, 
결국 다른 모든 사조들의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문화 막시즘은 유물사관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유물론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진화론으로부터 온 거죠. 

그 이전까지는 중세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를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었는데 

'아니야, 하나님이 창조하신게 아니고, 아메바라고 하는 물질로부터 
인간이 나온 거야' 하는 유물론 이제 나오기 시작하고, 
거기서 유물 사관이 나오게 되고... 

자 하여간 지금 일어나고 있는 많은 현상들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진화론이 우리의 사조와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함께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먼저 <생물학적인 진화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윈으로 대표되는 진화론의 내용은, 뭐 길게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인간은 단세포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점점 진화되어 왔다는 주장입니다. 

간략하게 살펴보죠. 진화에는 크게 소진화와 대진화가 있는데 
소진화는 같은 종 안에서의 변이를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시골에 있던 나방이 도시에 오니까 뭐 색깔이 짙은 색깔로 변했다든지 
아니면 환경에 따라서 새 부리의 길이가 달라진다든지... 이런 것이 소진화입니다. 

이런 소진화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같은 종 안에서 일어나는 변이 이기 때문에 
쉽게 관찰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소진화는 인정합니다)

근데 반면 대진화는 뭐냐면, 종을 뛰어넘어서 일어나는 변화를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물고기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니까 파충류가 되고, 
또 파충류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보니까 포유류가 되고... 
뭐 이런 진화를 대진화 라고 하죠. 

그런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대진화 입니다.
소진화는 과학적으로 관찰되고 입증되는 사실이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게 없습니다. 
같은 종 안에서 나비 색깔이 이렇게 되기도 하고, 저렇게도 되고... 
뭐 그런 거야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니까, 과학적 사실이니까, 문제가 될게 없어요. 

그런데 대진화가 이제 문제인데, 대진화는 워낙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아무도 관찰한 사람이 없고요. 실험으로 입증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대진화는, 
사실이 아니라 가설이라고 얘기해야 정확한 거고, 
과학이 아니라 종교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의 정의는 뭐냐면, '과학적 사실'의 데피니션은 뭐냐면 
-실험할 수 있어야 되고, 
-반복해서 실험했을 때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돼요. 
그게 '과학적 사실'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런데 진화는, 이런 정의에 의하면 과학적 사실이 될 수 없는 영역이예요. 
왜냐하면 실험하려고 해도 너무 오래 걸려요. 
그러니까 이 실험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이것은 실험이 불가능해요. 관찰도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진화론은, 과학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논할 수가 없는 영역인 거예요. 
뭐 실험을 해야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텐데, 
진화론은 실험을 해서 증명할 수가 없으니까, *너무 시간이 수백만 년 걸리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영역 자체가 다릅니다. 
그래서 이것 (진화론)을 '사실'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좀 잘못된 말이고요. 
'가설'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진화론은 과학의 영역도 아니에요. 왜요? 실험할 수가 없으니까!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 이데올로기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진화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의 기초한 것이지, 
증명하거나 입증할 수 없는 영역이예요.  

그러니까 진화론은, 과학의 영역에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거죠. 
과학의 카테고리에 집어넣으면 안 되고, 이것은 믿음의 카테고리에 집어넣든지, 
이데올로기의 카테고리에 집어넣어야 정확한 분류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화론을 반대한다고 했을 때, 그 정확한 내용은 
'대진화를 반대하는' 거예요. 
소진화는 사실입니다. 뭐 일어나고 관찰할 수 있는 거니까요. 

즉 종 간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포도가 있잖아요. 
그러면 포도가 자주색일 수도 있고, 파란색일 수도 있고, 
잘 하면 샤인머스킷이 될 수도 있어요. 이런게 소진화죠. 

그런데 아무리 별 짓을 다 해도, 포도가 사과가 되진 않아요. 
종이 바뀔 수는 없다는 거죠. 포도가 사과 비슷하게 되는 거 보셨어요? 
이건 안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 간의 변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진화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창1:11~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25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진화론에서 얘기하듯이, 하나의 기원에서, 단세포 아메바에서 시작해서 
점점 진화돼서 나온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각각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고기에서 진화해서 포유류가 나오고, 
포유류가 진화해서 어떻게 되고,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나오고...

요즘 진화론자들은 이제 그런 얘기하면 '무식하다' 그러죠. 
그들은 '원숭이가 진화된 게 아니라, 원숭이와 사람의 공통 조상이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사실 그 말이 그 말이죠. 
하여간 인간이 아닌 그 어떤 존재로부터 진화돼서 인간이 됐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존재는, 지금 인간보다는 훨씬 더 지능이 떨어지는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였고, 뭐 이렇다는 얘기인데... 
하여간 성경은 그 주장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원래부터 각각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되면서, 다양성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모든 종류대로 다 창조하셔서 
다양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아멘! 

근데 진화론은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죠. 
그래서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이 있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만약 창조하셨어도, 하나만 창조하신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부터 이제 분화돼가지고, 여기까지 왔다는 주장인데,
성경은 전혀 다르게 주장합니다. '종류대로' 

'풀과 씨 맺는 있는 채소를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를 종류대로' 
'바다 짐승들을 종류대로' 
'날개 있는 새를 종류대로' 
'땅의 생물을 종류대로'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각각의 종 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다윈이 주장했던 진화론의 핵심 이론을 보죠.
그 핵심 이론은 '변이' 와 자연의 '선택'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씩 조금씩 개체 안에서 변이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자연에서 선택 받기도 하고, 또 반대로 도태되기도 합니다. 

자연선택, 자연도태는 같은 말인데 
선택받는 쪽에서 보면 자연선택이고, 
선택 못 받은 쪽에서 보면 자연도태 되는 거죠. 

그리고 그 결과는 적자생존 이라는 거죠. 
적자생존은, 적응을 잘하는 것이 결국 생존하게 되고 
적응하는데 불리한 것은 도태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유리한 개체들이 살아남아서 
그 유전자가 되물림되면서, 진화가 일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실 때, 기린 얘기 기억하시죠? 
이렇게 목이 짧은 기린이 있고, 목이 긴 기린이 있었는데, 
기린은 높이 있는 나뭇잎을 먹는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목이 긴 기린이 유리하고, 목이 짧은 기린은 불리한 거죠. 

 

그러다 보니까 목이 짧은 기린은 도태가 되고, 
목이 긴 기린은 자연적으로 선택이 돼서, 
그들이 살아남아서 그 DNA를 계속 물려주다 보니까, 
목이 긴 DNA만 계속 전수되다 보니까, 나중에 기린이 목이 길어졌다... 
뭐 이런 것이 이제 진화론의 적자생존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자연 선택과 자연 도태는 적자생존의 개념이죠. 

자 현대 진화론은 물론 이거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그 근간이 이것인 것은 동일합니다. 근간은 자연선택이죠. 
변이가 일어나고, 자연선택과 도태가 일어나서 
그것을 통한 적자, 즉 잘 적응하는 것들만 살아남게 된다... 
그것을 통해서 진화가 일어난다...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진화론은 진리일까요. 당연히 아니죠.
진화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뭐냐면, 과학이 아닌데 과학인 척한다는 거예요. 

▲1. 진화론의 첫번째 문제는 
진화가 관찰되거나 실험을 통해 증명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라는 겁니다. 
아까 서두에 말씀드렸죠. 
진화론은 관찰할 수도 없고, 실험할 수도 없는 영역인 거예요. 

과학에서는 이걸 뭐라 그러냐면 '가설'이라고 부릅니다. 
즉 사실이 아니라 추측이라는 거죠.  

그래서 진화론을 주장하는 분들이, 이제 증거라고 내놓는 것 중에 화석이 있지만, 
화석은 진화의 증거가 아니고, 해석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화석을 보면 여러 화석들이 발견됩니다. 
그럼 그 화석들을 사람들이 임의로 이렇게 배열을 합니다. 

화석 A와 B를 보니까, A하고 B하고 비슷한데 B가 조금 더 복잡한 거 같아요. 
그다음에 C도 보니까 비슷하게 생겼는데, 조금 더 복잡해요. 

그래서 화석 A, B, C, D를 임의로 늘어놓고 뭐라 그러냐면 
A에서 B로 진화되고, B에서 C로 진화되고, C에서 D로 진화된 증거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것은 증거가 아닙니다. 증거가 아니고 (만들어 붙인) 해석이죠. 
그 그 화석들을 그렇게 (만들어 붙여) 해석한 거죠. 

그리고 이 해석은 어디서부터 온 거냐면, '진화가 되었다'라고 하는, 
'진화는 사실이다' 하는 믿음에 근거해서 나온 거예요.
그 믿음에서부터 해석이 나온 거예요. 

'진화가 되었다'라는 걸 일단 사실로 인정해 놓고서, 
그걸 해석하다 보니까, A에서 B로, B에서 C로, C에서 D로 진화된 거야
라고 지금 해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증거'가 아니고요. 
그러니까 이거를 증거라고 하는 건, 이제 수학에서 말하는 순환 논리입니다. 
이게 진화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일단 인정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나오는 건데,
이 해석을 가지고, 다시 진화가 사실이라는 증거를 삼습니다. 

이런 걸 '순환 논리'라고 하죠. 이건 전혀 '증거'하고는 상관없습니다. 
그냥 진화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인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대로 얘기하면, 똑같은 화석을 보고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어요. 

'하나님이 A B C D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이렇게 해석하면,
조금씩 다른 화석은, 창세기 1장에 대한 증거가 되는 거죠. (이게 옳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면, 창세기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것을 믿으면,
A B C D 라는 화석을 배열해 놔도 
전혀 다른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증거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는 거죠.

그 해석은 어디서부터 하냐면 믿음의 전제로부터 와요. 
진화론이 사실이라고 믿으면, 그 전제에서 그런 해석이 나오고, 
창조론이 사실이라고 믿으면, 그 믿음에서 올바른 해석이 나오는 거죠.

그러므로 화석은 아무 증거가 아닙니다. 이런 건 증거라고 하면 안 되는 거죠. 
미혹이에요. 화석은 사실 진화의 증거가 아니고 미혹이라는 거예요. 

하여간 진화론의 문제는 뭐냐면, 과학이 아닌데 과학으로 맹신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신앙의 영역, 이데올로기의 영역이에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긴 (진화의 과정) 세월을 누가 지켜보면서 관찰하겠어요? 
수억 년씩 걸릴 텐데... 여기가 당연히 관찰이 불가능하고, 실험도 못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과학의 영역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냥 가설이고, 과학보다는 믿음과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2. 진화론의 두 번째 문제점은 뭐냐면, 
엔트로피의 법칙, 즉 뉴턴의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된다는 거예요. 

열역학 제2법칙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화되지, 무질서가 저절로 질서로 변화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방향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쉬운 예가 여러분 자녀들 방을 가만히 놔두면 
더 정리가 잘 되어지는 게 아니라, 더 어질러 진다는 거죠.

과일, 채소, 고기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썩게 되지,
점점 더 신선하게 변하지는 않는 거죠.

그러니까 엑스트라 에너지가 투입되지 않으면,
당연히 가만히 놔두면, 질서 있던 것이 무질서하게 흘러가지, 
무질서하던 것들이, 저절로 질서가 잡힐 수는 없다... 이것이 이제 엔트로피의 법칙,
또는 뉴턴의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자 그런데 진화론이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봤더니, 그러면 어떻게 돼야 돼요? 

원래 질서 있던 것들도 점점 무너져서 질서가 없어져야 되는데, 
오히려 점점 질서가 잡혀 가지고서, 고등한 생명체가 나왔다는 거예요. 
이게 뭔가 납득하기 어렵죠. 

처음에 아무것도 없는 무질서한 상태였는데, 
태양이 비치고, 번개가 번쩍 치고 나니까 아메바가 생기고 
그것이 진화의 진화를 거쳤던 인간이 됐다는 것인데 
즉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겼다'는 주장인데 
이것은 뉴턴의 열역학 제2법칙에 비춰봤을 때, 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뭐 진화론자들이 설명하는 그 설명들이 있습니다. 
태양 에너지가 있고, 번개에 전기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엑스트라 에너지가 들어왔기 때문에, 무질서에서 → 질서로 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구에, 태양 에너지가 계속 들어오니까, 열역학제2법칙이 적용 안 된다는 거죠.
그것과는 조건이 다르다는 거죠. 엑스트라 (태양) 에너지가 들어오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한게 
태양 에너지와 전기 에너지만으로 '인간'이라는 고도의 질서체가 
저절로 만들어졌을까요? 

뭐냐면, 에너지만 있다고 해서, 질서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거예요. 
목적성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방이 잔뜩 어질러져 있는데, 태양 에너지가 잔뜩 들어온다고 하면, 
그렇다고 방에 질서가 잡힐까요? 물건이 정리정돈 될까요?
아니죠. 방만 뜨거워지겠죠.

그러니까 엑스트라 에너지가 들어가면,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건 맞는데, 
목적성을 가진 엑스트라 에너지가 들어가야 질서가 생기지, 
무조건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해서, 무질서에서 → 질서가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거죠.
방에 태양빛을 수 백 억년 비추면, 그냥 방만 뜨거워지는 거죠. 

또 예를 하나 더 들어볼게요. 바닷가에 수많은 모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흘렀어요. 한 1억 년쯤 흘렀나 봐요. 

그러니까 그 모래 속에 있던 규사들이 슬금슬금 자기들끼리 모여서 유리가 됩니다. 
또 시간이 한참 지나니까, 모래 속에 있던 철분들이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했더니 
철이 됩니다. 그러고 시간이 더 흘렀어요. 10억 년쯤 지났더니 
유리와 철이 정교하게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철이 정교한 톱니바퀴로 진화되고요. 
유리는 매끈한 시계의 유리로 진화됩니다. 

자 이제 시계 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더 많이 흘러요. 
뭐 10억 년인지, 100억년인지 모르겠어요. 
그랬더니 모래 속에서 고무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고무는 석유가 있어야 나타나는데,
마침 모래 밑에 석유가 있었나 봐요. 
이것들이 시간이 또 한 10억 년쯤 지나니까, 딱딱 맞아 떨어지더니, 
마침내 우리 손에 있는 손목시계가 됐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믿으시겠어요? 
이 미친 얘기를 여러분은 믿으시겠어요? 이게 진화론의 논리입니다. 

시간이 10억 년이 아니라, 100억 년이 아니라, 우주의 나이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른다고 한들, 모래에서 저절로 시계가 생겼다고 하면 믿으시겠냐고요? 

그런데 진화론자들은 뭐라 그러냐면, '생길 수 있다'는 거예요. 
왜냐면 태양 에너지와 번개 에너지가 있다는 거예요. 

아니, 모래에 태양에너지가 비취고, 번개가 친다고 해서 
손목시계가 저절로 생기겠냐고요? 모래만 뜨거워지는 것 뿐이죠...

그러니까 이게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된다는 거예요. 
시계는 가만히 놔두면, 한 1천년쯤 놔두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 녹슬고 흩어져서
그건 모래로 돌아가겠죠. 이건 가능해요. 이게 열역학 제2 법칙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거예요. 
모래가 시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이건 역방향인 거죠.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여러분, 사람은 시계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복잡한데 
사람이 그렇게 우연히 진화되어서 나온다고요? 설명이 전혀 안 되는 거예요. 
단순히 에너지가 투입됐기 때문에 생긴다? 
번개가 번쩍 쳤기 때문에 생명체가 생겼다? 

아니 뭐 번개가 번쩍 쳐 가지고서, 어떤 단백질의 재료가 만들어지고, 
혹시 몇 가지 단백질은 생성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주1)
그것이 계속 진화해 가지고, 고등의 질서를 갖게 됐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No

그 얘기는 뭐냐면 모래가 정말 오래 있다 보니까, 규사가 모여 가지고서, 
그냥 유리 조각이 몇 개는 나올 수는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시계가 됐다... 이거하고는 다른 얘기죠. 
근데 진화론은 '시계가 나왔다' 이거를 주장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상식적으로 동의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구라는 환경에, 태양 에너지와 번개라고 하는 전기 에너지가 
번쩍 쳤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열역학 제2 법칙을 위배하는
그런 고도의 질서체가 생겼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좀 이해하기 어렵죠. 

근데 이게 진화론이 존재하고 주장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과학자들도 진화론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 생물학적인 진화론은 여기까지 하죠. 

◑2. 진화론의 미혹

진화론이 사회, 문화에 끼친 악영향

 

그런데 매우 심각한 것은 뭐냐면, 오늘 진짜 다루려고 하는 건 뭐냐면,
이 진화론이 단순히 생물학, 과학 영역에서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 인간의 생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거예요.

그래서 진화론의 진짜 문제는, 단순히 과학 영역의 주장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인식과, 사상과, 문화와, 세계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주제  

 

그런 의미에서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것이 더 맞아요. 

진화론은 과학은 진짜 아니라고 했습니다.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 
그냥 가설 이죠. 믿음, 또는 이데올로기죠.

그런데 이 가설과 믿음, 또는 이데올로기가 
이것이 인간의 사조와 세계관에,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악영향을 미칩니다. 

다윗의 진화론은, 그의 당대에 벌써 인문학에 접목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진화 사회학' 이라는 것이,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내자마자, 
바로 그 책을 읽고, 그 당대의 학자가 '사회학'에 접목을 시키면서 
'진화 사회학'이란 영역을 만들고, '적자 생존'이란 말을 처음으로 쓰거든요. 

그러니까 '적자생존'이란 말은, 다윈이 제일 먼저 쓴 얘기가 아니에요. 
진화 사회학을 하면서, 거기서 나온 얘기인데,   *the survival of the fittest

하여간 진화론은, 진화심리학, 진화법학, 진화 윤리학, 진화 미학 등 
거의 대부분의 학문에 적용되는 주류 방법론이 됩니다. 
그 결과 진화론적 사고는, 인본주의 세계관의 기초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현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님은 없다' 하는 인본주의 세계관에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보면, 진화론이 있다는 거예요. 가장 기초 토대라는 거죠.

그도 그럴 것이 진화론은 기원을 설명해 주는 이론이거든요. 
인간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그러니까 당연히 기원을 설명해 주는 거니까, 가장 밑바닥, 기초에 진화론이 깔려 있습니다. 

자 그럼 진화론이 만들어낸 사조가 어떤 것이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진화론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조는 대략 3가지로 크게 요약되는데, 
이거 말고도 많아요. 그렇지만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의 이원화 현상이고 
-둘째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것이고, 
-세 번째는 나중 것이 더 좋다 라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1. 진화론의 첫 번째 미혹은 진리의 이원화 입니다. 
진화론에서 비롯된 첫 번째 미혹은, 사적 진리와 공적 사실의 괴리 현상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이런 말들을 한번 들어보셨을 거예요. 
'창조는 신앙이고, 진화는 과학이다' 많이 듣는 얘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학교나 직장에서 '세상은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되었어요' 라고 말하면,
분명히 반박 받는게 뭐냐면 '신앙으로 과학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하지 마'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미 많이 들으셨을 거예요. 
한 번이라도 논쟁을 해 보셨다면, 반드시 듣게 되는 반박입니다. 

창조론은 신앙의 영역이고, 
'신앙의 영역을 가지고 과학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돼!' 이런 논리인 거죠. 

'창조는 종교의 영역, 또는 믿음의 영역이고,
진화는 과학의 영역, 또는 사실의 영역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화론이 만들어낸 첫 번째 미혹이에요. 그전까진 그런게 없었어요. 
그냥 진리와 거짓 진리.. 그것 밖에 없었어요.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과학과 이성의 도전은 
창조를 사실의 영역에서 추방해서 
종교의 영역에 가둬버렸어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세상에서는 진화론을 진리로 믿으며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사적 진리와 공적 사실) 두 개로 쪼개진 진리를 어떻게 소화해야 될지도 모른 채 
분열된 인식의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내가 뭘 믿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교회 와서는 창조론,
세상이나 학교에서 배울 때는 진화론, 
이게 사실 우리의 인식이 분열되어 있는 거거든요. 
이걸 어떻게 합쳐야 될지 몰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정신적인 고통을 오는데, 어떤 고통인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언제부터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또는 세속적 진리가 분리되었습니까? 
과학적 사실이 아닌, 단지 신앙의 고백을 
과연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까요? 

자, 이게 사적 진리 VS 공적 사실이라고 하는게 뭐냐면, 
'사적 진리'란 철학자들이 쓰는 말장난인데, 이게 뭐냐면,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객관적인 사실은 아닌데 
그냥 네가 그렇게 믿으면, 네 안에서는 사실이라고 해' 그러니까 뇌피셜 이예요. 

다른 사람도 전부 다 관찰하고 동의할 수 있는 공적 사실이 아니고, 
그냥 너의 생각 안에서, 너의 사상 안에서 
네가 사실이라고 인식하는.. 그게 '사적 진리'라는 건데, 

이거는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게 무슨 진리예요? 망상이죠. 
뇌피셜은 망상이지 진리가 아니죠. 

그런데 '공적 사실'은 뭐냐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입증되고, 
역사적으로 사실이라고 인정되는,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 '공적 사실'이라는 거예요. 

이거 두 개를 분리해 버린게, 진화론의 가장 큰 미혹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진화론의 영향은 생각보다 광범위합니다. 
그 중 가장 큰 영향이 '진리의 이원화'예요. 

창조를 비롯한 성경적 세계관을 
'종교적 진리' 또는 '사적 진리'의 영역으로 제한하고,
창조론을,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치부합니다. 

이런 미혹 속에서 두 개로 쪼개진 진리 속에  *종교적(사적) 진리, 공적 진리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조차 헷갈리는 혼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창조는 종교적 진리이고, 진화는 과학적 진리다' 
이 말을 이해하고, 지금 살아가세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우리는 이런 말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이면 진리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사적 진리'가 따로 있다고 하는 거는 이상한 거죠. 말이 안 되는 논리죠.
그런 거는 망상이라고 불러야죠. 거기에다 왜 '진리'라는 표현을 써요?

'사적 진리'라는 것은, 그냥 논쟁을 피하려고 말장난한 거지, 
사적 진리가 어떻게 진리예요? 그냥 개인의 생각, 개인의 의견 내지는 망상인 거죠.
이렇게 불러야 정상인 거죠. 

세상은 이런 말장난(사적 진리)을 통해서 성도를 미혹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적 진리, 또는 종교적 진리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그냥 네가 기독교인이면 그렇다고 믿어! 
그건 '사적 진리'로 인정해 줄게!  ... 여기에 미혹되면 안 됩니다. 
'사적 진리'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창조가 사실이면, 진화는 거짓인 것이고 
진화가 사실이면, 창조는 거짓인 거지... 
뭔 사적 진리, 공적 사실을 나누어서 언급합니까?

여러분, 복잡하게 얘기하면 대부분 사기입니다. 
진실과 진리는 단순하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게 진화론의 미혹입니다. 
크리스천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 있는 거예요. 
사실이면 사실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뭐 애매하게 '창조는 종교적 진리, 사적 영역의 진리이고,
진화가 과학적 진리다, 공적 진리다' 이런 말에 미혹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렸어요. 
근데 이것이 공적 사실, 즉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사적 진리'로 믿으라는 거예요. 신화와 비슷하게 믿으라는 거죠.
그러면 그게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우리는 '공적 사실, 공적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만약 그게 사적 진리라면 천국은? 
천국도 그냥 그 사람이 그렇게 믿는 '사적 진리'라면 
그럼 우리는 뭐를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바울이 표현한 대로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천국이라는 걸 위해서 
지금 현재 삶을 희생하고 있는 거잖아요. 바보 같은 짓 하고 있는 거죠.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성경 속의 모든 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역사적 사실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도 역사적 사실이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모두 역사적 사실, 공적 진리 이라는 거예요. 

그래야 의미를 갖고, 그래야 힘을 갖는 거지... 
그렇지 않고 그게 그냥 '사적 진리야' 
우리가 창조론을 '사적 진리'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을 길게 한 것입니다.
창조론은 '공적 진리'입니다.

크리스찬에게 여러분 두 가지 선택이 있을뿐입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예를 들면,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과거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죠. 
만약 부활이 '사적 진리'라면, 그건 진리라고 말하면 안 돼요. 
이게 진화론의 미혹이라는 거예요. 

우리 신앙의 시작점은 뭐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망상도 아니고, '사적 진리'도 아니고, 
역사의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나머지는 다 밀리는 거예요. 왜요? 
성경의 시작을 부인했는데, 뒤에 따라 오는 걸 어떻게 믿겠어요? 

▲2. 진화론이 만들어낸 두 번째 미혹은, '쓸모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미혹입니다. 

여러분들, 이런 생각해 보신 적 있지 않으세요? 
특별히 청소년 때,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그래서 죽어야 돼!' 

아마 안 해본 사람 거의 없을 거예요. 
저도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그런 생각들을 많이는 아니지만 한두 번씩 했습니다. 

뭐 큰 실패를 경험했거나, 시험에서 떨어졌거나, 
또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했거나, 고백했는데 차였거나...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생각이 뭐냐면 
'난 쓸모없는 존재야.. 죽어야 돼...' 뭐 이런 생각들을 청소년들은 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반문해 봅시다. '쓸모없으면 왜 꼭 죽어야 되죠?' 
이 논리적인 흐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당연하다는 생각을 빼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쓸모 없을 수도 있어요. 그 용도에는 내가 잘 안 맞을 수도 있어요. 
내가 시험 치르는 용도로는, 별로 그렇게 잘 하는게 아니에요.
그 분야는 쓸모 없을 수도 있어요. 근데 그렇다고 왜 죽어야 돼요? 

이런 논리(쓸모 없는 존재는 죽어야 된다)적인 연결이 어떻게 되나 살펴보면, 
그 기저에 적자생존, 진화론이 깔려있는 거예요. 

'잘 적응 못 하는 건 죽어야 돼' 이건 적자생존, 자연도태, 진화론이죠.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개체가 자연의 선택을 받아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개체, 즉 쓸모없는 개체는 도태되어 사라진다...
이런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는 사람은, 진짜 자기는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여기는 거죠.

이런 선택과 도태 과정을 통해 세상이 진화해 간다고 하는 것이 
'진화 사회학'입니다. 무엇을 향해 진화됩니까? 

더 나은 세상을 향해서 진화해 가고, 
그런 진화의 방향이 곧 선이고, 진화의 방향이 곧 의미입니다. 
진화의 끝은 유토피아, 지금보다 훨씬 더 진화한 세상인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는 거예요. 
히틀러가 이런 사상을 가졌었죠. 그래서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입니다.

진화의 방향이 곧 선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진화는 방향이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창조에는 방향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창조하시고, 어떤 방향으로 가라는 걸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감을 통해, 그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진화는 정해진 방향이 없어요. 
그냥 진화가 만들어내는게 곧 방향이에요. (뒤에 자세한 설명 나옴)
근데 이게 어디로 진화될지도 몰라요. 
진화가 만들어내는게 곧 방향이고, 그 방향이고 선이고, 그 방향이 곧 의미예요.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위험한 겁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의미인지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냥 진화해서 가는 곳이 선이에요. 진화해서 가는 곳이 의미예요. 

그것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면, 이상한 방향이 선이고, 의미가 돼버리는 거예요. 
젠더 이슈가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사회가 그쪽으로 진화하고 있으니까, 그게 선이라는 거예요. 
이게 굉장한 미혹입니다. 

자 어쨌든간에 진화하고, 선택하는데 
나를 보니까 어때요? 선택이 아니라 도태예요. 별로 쓸모가 없어요. 

그러니 나는 사라지는 것이, 인류의 선을 위해서 유익해 보입니다.
이 쓸모없는 존재 DNA를 계속 후대에 전달하는 죄를 짓지 말고 
빨리 사라져 주는 것이 선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잔인하지만, 진화론이 우리 속에 심어 놓은 사고입니다. 
참 잔인하죠. 
그 특정한 용모의 특정한 용도에 쓸모가 없으면, 사라져 주는게 선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너 같이 무능한 DNA를 계속 물려주는 것은 
인류를 위해 죄짓는 거라는 거예요. 참 잔인합니다. 
근데 이게 어디서부터 온 거예요? 진화론에서부터 온 생각이라는 거예요. 적자생존!

자, 현대 사회의 치솟는 자살률은, 진화론적 세계관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적자생존에서 선택받은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 오늘날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삽니다. 
학교나 직장에서의 삶을, 생존경쟁처럼 느끼죠. 

진화론이 주장하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무시무시한 자연 생태계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비슷해 보여요. 
짐승처럼 이렇게 물어 죽이지만 않는다 뿐이지, 
실패하고 도태되면 죽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더욱이 SNS를 통해 경쟁과 비교는 일상화가 됩니다. 
나만 뒤쳐지는 것 같고, 나만 무능한 것 같은 느낌을 매일 매 순간 받는 거예요. 

이 무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환경 속에서 
우리는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의 쓸모를 계속 증명하는 거예요. 

'내가 왜 살아남아야 되지?' '나는 쓸모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이것을 계속 증명하게 되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쓸모를 증명해 보일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특정한 쓸모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쓸모'를 통해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는 사조 속을 우리는 살아가요. 
이건 뭐예요? 진화론이 심어놓은 미혹이에요. 

△자,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농경사회 때만 해도 
자살률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습니다. 
경쟁이라는 것이 오늘날 같이 심하지 않았거든요. 

굳이 경쟁을 통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공동체 속에서 함께하는 삶을 통해,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게 가능했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농경사회 때 '공부 1등 해야지..' 그런 생각이 있었겠어요?
다 농사 짓고 있는데, 공부 1등이라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냥 먹고 살면 되는 거였지요. 

물론 뭐 경쟁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죠. 
경쟁이라는 게 타락에서 나온 거기 때문에 당연히 있었겠지만 
오늘날처럼 경쟁이 극명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농경사회에서는 그냥 농사지으면서 살면 되었지,
누가 1등인지 2등인지 ... 뭐 굳이 가리지 않아도, 그냥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 되었죠. 
그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가 도와주고... 
또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고... 그런 여유가 있었는데, 

이게 이제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자본주의 시스템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여유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경쟁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런 경쟁을 정당화 시켜 준게 뭐냐면 진화론이에요.

사회가 진화하기 위해서, 뭐가 있어야 돼요. 선택이 있어야 되는데
이 선택을 위해서는 경쟁이 필요한 거죠. 
경쟁을 통해서 쓸모가 증명된 사람들은, 선택돼서 적자생존하고,
그 쓸모가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은, 경쟁을 통해서 도태되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가 진화해 간다는 거예요. 더 발전해 간다는 거예요.

이 진화론, 진화사회론이 결국 경쟁을 부추기게 됩니다. 
그래서 인류는 경쟁을 통해, 적자 생존을 통해, 
더 나은 곳을 향해 진화해간다고 믿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는 도태 돼서 사라지고, 쓸모 있는 존재만 생존하는 진화를 통해서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 계속 진보해 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진화론적인 사고입니다. 
이 '쓸모의 세계관' 배후에는, 경쟁과 적자생존이 곧 진리이고 선이라는 진화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쓸모'를 누가 결정하냐는 거예요. 
어떤 것이 쓸모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이 쓸모없는 것인 것을, 누가 결정하느냐는 거예요. 

창조주를 부인하는 사람, 그러니까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들은 '자연'이 결정한대요. 
그러니까 생물학적 진화론에서, 그 쓸모를 자연이 결정한다고 얘기하고, 
사회 진화론에서는 애매하게 얘기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 
뭐 이런게 결정한다는 거예요. 

자 그런데 이 '쓸모'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본질이. 여러분 뭔지 아십니까? 
그건 타락한 인간의 욕망의 총체예요. 

무엇이 쓸모있다고 하는가? '타락한 인간의 욕망'이 
사회적인 필요를 만들고, 그 필요를 잘 충족시키는 사람을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사회의 어떤 타락한 인간들의 욕망이 있어요. 
근데 그 욕망을 잘 충족시켜줄 수 있을 때...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쓸모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창조주를 배제하고 나면,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 
쓸모를 누가 결정하느냐? 
타락한 인간의 욕망의 총체가, 쓸모가 뭔지를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화론은.. 결국 인본주의입니다. 
결국 인본주의 세계관이에요. 

인간의 욕망이 무엇이 쓸모 있는지를 결정하고, 
그 기준에 의해서 선택하거나 도태시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대 사회에서 쓸모 있는 인간은 어떻게 결정됩니까? 
뭐 한국 사회만 봐도, 18살 19살이 될 때, 수능과 대입으로 1차적으로 결정하죠. 

그러니까 누가 쓸모있는 사람이냐면, 수학 문제 잘 풀고, 영어 시험 잘 보고... 
하는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이에요. 

좀 깊게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왜 모든 사회에서, 수학을 잘하고, 영어를 잘해야만 쓸모가 있을까? 
다른데 쓸모가 있는 사람도 많거든요. 

수학이나 영어 잘 못해도, 다른 쓸모가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 쓸모는 별로 쓸모가 아니에요. 왜요? 

타락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놓은 '쓸모' 라는 데피니션(정의)이 있거든요. 
그것에 의해서 선택되거나 도태되고 한단 말이에요. 잔인하죠? 
자 결국 이 쓸모를 결정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론은 결국 인본주의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진화론의 시작이 뭐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을 부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잖아요.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쓸모 있고/ 없는 것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쓸모는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겁니다. 창조주가 결정하시는 거예요. 왜요? 

내가 어떤 질그릇은, 이런 용도를 위해서 만들고, 
어떤 질그릇은 저런 용도를 위해서 만든대요. 
용도가 뭐예요? 쓸모죠.

그러니까 쓸모는 창조주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이 사람은, 이런 쓸모를 위해서 만들었어!' 
각 사람마다 쓸모를 창조하신다는 거예요. 

인간의 타락한 욕망이 만들어낸 획일적인 쓸모 말고, 
각 사람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만의 유니크(고유)한 쓸모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성경의 주장입니다. 

자 성경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들어봅시다. 
사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와 하나님이 뭐라 그러시냐면, 
너희들이 내 눈, 즉 하나님의 눈에는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각 사람이 쓸모가 있어요.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라는 거에요. 
경쟁에서 이겨서 자기 쓸모를 증명해야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게 아니에요.
이 미혹에 속지 마세요. 

우리는 존재 자체가 보배롭고 존귀해요. 왜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세요. 창조주가 계세요. 
그리고 창조주의 말씀이 진리인데,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뭐예요? 
너희는 존재 자체가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진화론은, 이 창조주가 말씀하신 쓸모를 뺏어 버려요. 
그래서 '너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자살이나 타살
여러분, 참 무섭고 잔인합니다. 

창조주께서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소중하고 존귀한 그 사람만의 쓸모를
짓밟고 빼앗아 버리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는,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쓸모가 있어요. 
일차적인 쓸모는 뭐냐면, '네가 '내 God 눈에는 보배롭고 존귀하다' 사43:4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쓸모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쓸모는 뭐냐면, 세상에서 수학 문제를 잘 풀고, 뭘 잘하고, 
돈 많이 벌고 하는 쓸모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본질적인 여러분의 쓸모는 뭐냐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부모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이 계신데, 첫째 따님이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셨어요. 
정말 중증이었어요. 병원에서는 몇 년 못 살 거라고 했는데, 50 넘어까지 사셨어요. 
제가 자매님을 처음 봤을 때가, 한 40~50대 정도 됐을 때인데, 
그때도 아직 말을 못 하죠. '어~' 밖에 못 하시고, 걷지도 못 하세요.

그러니까 하루 종일 방에서 (죄송합니다) 굴러다니셔야 되고요. 
말도 한마디도 못 해요.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쓸모없는 존재를 위해서
부모되신 장로님과 권사님이 평생 자기의 인생을 다 드리셨어요. 왜요? 
그가 부모에게는 보배롭고 소중하거든요! 

착각하지 마세요. 저와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생산하기 위한, 
생산적인 쓸모를 위해서 지음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이라는, 존재적인 쓸모를 위해서 창조된 거예요. 

모든 부모의 눈에는, 자녀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쓸모가 있든/ 없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자녀들이 있으시잖아요. 
자녀들이 소위 말하는 세상 기준으로 쓸모가 있어야만 여러분이 기쁘세요?
아니잖아요.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해도, 모든 시험에 다 실패해 가지고 집에서 놀고 있어도 
내 자녀라면...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와 소중한 거예요.
숨만 쉬고 있어도 너무 소중하고, 막 무엇하고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진짜 쓸모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받기 위한 쓸모'를 위해서 만드셨고요.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의 기쁨이 되고... 이게 우리의 진짜 쓸모인데, 

진화론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바꿨나 보세요. 
'존재적인 쓸모'를, '생산적인 쓸모'로 다 바꿔 버렸어요.   
그 결과, 잔인하고 잔인한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쓸모가 없으면 살 이유조차 없는...  

여러분, 이것이 진화론의 잔인한 미혹입니다. 기억하세요. 
우리의 쓸모는, 존재 자체에서 오는 쓸모이지, 유용성에서 오는 쓸모가 아닙니다. 

그래요. 여러분, 진화론은 존재적 가치를 생산적 가치로 바꿈으로써 
인간을 생산을 위한 부품으로 전락시켜 버렸어요. 
이게 진화론의 두 번째 미혹입니다. 

▲3. 진화론의 세 번째 미혹은, 나중 것이 항상 좋다는 미혹입니다.
나중에 나온 것이 진화된 것이기에 항상 좋은 것이라고 속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이 있어요. 말 그대로 전통적인 옛 생각입니다. 

그런데 남자가 남자와 가정을 이룰 수도 있고, 
여자가 여자와 가정을 이룰 수도 있고, 
남자들과 여자들이 집단으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이 생각이 전통적인 가정관에서 더 진화된, 더 발전된 개념이라는 거예요. 
이유가 뭡니까? 나중에 나왔으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룬다고 하는 이 생각과 
이런 급진적인 진보적인 가정관, 
즉 남자가 남자와 가정을 이룰 수도 있고, 
그러니까 남자 며느리가 생길 수도 있고... 
이게 왜 더 발전된 거죠? 발전이 아니라 타락의 극치이죠.

그런데 진화론에 빠지면, 이게 나중에 나온 가족 형태이니까,
이게 더 발전된 가정 형태라는 거죠.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더 진보된 것이고, 더 선한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아까 얘기했죠. 이 진화론적인 세계관은 결국 방향성이 없다고요. 

진화하는 방향이 곧 선이라고 믿는다고... 
나중에 나왔으니까 진화된 거고, 그러니까 그게 곧 선이라는 거예요. 
진화되는 방향이 곧 선이라고 우긴다는 거예요. 
그렇죠. 절대적인 방향성이 없으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젠더 이슈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나 젠더의 개념은 전통적인 성 개념으로부터 
더 진화된, 더 발달된 개념이라고 얘기하는데, 
왜 그러냐면 ... 나중에 나왔으니까, 신제품이니까!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성개념으로부터 도출된, 나중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한층 진화된 거라는 거예요. 이게 다 진화론의 거짓말입니다. 진화론의 미혹입니다.

뭐 그러면서 분명히 발달한 선진국들은, 다 그리로 가고 있고, 
반대하는 나라는 후진국 뿐이다... 이런 프레임을 씌우죠.
이게 다 진화론적 가치관, 진화론적 사고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젠더 이슈 같은 경우는, 
왜 더 좋은 것이고, 왜 더 선한 것인지 정말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나중에 나왔다는 거 빼고는! 

근데 이게 함정이에요. '나중에 나온 것이 더 진화된 것이다'라는 진화론적 생각!
이게 미혹인 것이죠. 

△자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얘기합니까? 정반대로 얘기해요. 
나중에 나온 것이 아니라, 최초 처음이 가장 완전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오리지날 창조가 가장 아름다웠다는 거예요. 

불행히도 죄가 들어오면서, 세상은 진화가 아니라, 퇴보와 타락을 거듭했다는 거예요. 
창6장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창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나중에 나온 것이 진화입니까, 아니면 퇴보입니까? 
퇴보, 타락이라는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이 선하고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죄가 들어오고 나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진화하는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퇴보, 퇴보해 가지고
하나님이 세상 지으신 것을 한탄했다는 거예요. 
'아이고 차라리 만들지 말 것을.. 이렇게까지 망가지냐?' 

성경은 뭐라 그러냐면, 시간이 흐른다고 진화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진보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퇴보하고, 

가장 완전한 것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던 오리지널 폼이라는 거예요. 
오리지널 플랜이라는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다' 그랬어요.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 진보적인 사고의 위험성입니다. 
전통적인 가치를 파괴하고 바꾸는 모든 것이.. 발전이고 진보라고 얘기하는 
진보적인 가치의 뿌리에는 진화론이 있습니다. 

물론 새로 바꾸는 것 자체가 다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잘못된 거는 바꿔야지요.
문제는 방향성이에요. 

변화가 다 나쁜 건 아닌데, 방향성이 문제라는 거예요. 
성경은 이 변화의 방향을 뭐라고 얘기하고 있냐면, 회복이라고 얘기합니다. 
뭐예요? 태초가 좋았다는 거잖아요. 맨 처음이!

그러니까 성경은 변화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얘기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계속 변화해 나가는 것이 좋아!' 이렇게 얘기한 적이 없어요. 

성경에서 변화는 항상 뭐예요? 회복이에요. 
하나님이 태초에 우리를 창조하신 대로의 회복! 
창조하신 완전한 질서로의 회복! 

그러니까 성경이 얘기하는 변화의 방향성은, 
명확하게 레스토레이션, 회복이라는 거예요. Restoration

반면에 진화는, 방향성이 없습니다. 앞으로 어디로 진화할지 모르는 거죠.
그냥 진화하는 것 자체가 방향성이고, 
그 방향성이 곧 선이고 의미인데, 

문제는 이 방향성이 어디서부터 나오냐면, 
특별히 진화 사회학에서는 인간의 욕망에서부터 나오는 거예요. 

타락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쓸모, 
타락한 인간의 욕망이 규정하는 쓸모가 있고요.
그 쓸모의 기준 앞에서, 사람들을 줄 세우는 거죠. 선택과 도태로! 

그러니까 어디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겠어요? 
죄로 발전해 나가는 거죠.

그래서 창세기 6장에 보면 뭐라 그러는 거예요? 죄로 완전히 망가지는 거죠.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신 걸 후회하십니다. 
이것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차이입니다. 

성경은 여러분, 처음 창조, 오리지널로 돌아가라고 얘기합니다. 
창1: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성경적 세계관과 진화론적 세계관은 
이렇게 추구하는 경향의 방향이 다릅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오리지널 플랜, 창조로 돌아가는 회복이.. 변화라면, 
진화론은,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거예요. 
그게 진행 방향이라는 거예요. 타락한 인간의 욕망! 
여러분, 미혹에 속지 마십시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진화론은 여러분, 존재에 대한 도전입니다. 
인간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그걸 건드리고 있어요. 
아메바로부터 진화되었는가? 아니면 창조주로부터 창조되었는가? 
유물론의 기초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에 기초할 것인가?

유물론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반기요, 싸움입니다. 
싸움에는 영역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팩트냐, 감정이냐? 하는 인식 영역에서 싸움입니다. 
문화 막시즘은, 그 동기가 사랑이냐, 아니면 분노냐? 하는 동기 영역의 싸움입니다. 
이에 비해서 진화론은, 그 싸움의 영역이 뭐냐면, 존재 영역이에요.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인가, 
아니면 개나 소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고깃덩어리인가?
하는 이 존재 영역에서의 싸움이에요. 

'존재에 대한 싸움'이라는 면에서 
진화론은 결국 모든 싸움의 기초이고, 근원이 됩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다른 모든 사조들이 세워진다는 거예요. 
그렇기에 이 싸움에서 밀리면, 결국 다른 모든 싸움, 
즉 포스트모더니즘, 인본주의, 문화 막시즘 등 모든 싸움에서 밀리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게 성경의 시작이며 기초예요. 

진화론은 이 말씀에 대한 도전이에요. 
진화론의 본질은, 이 성경의 첫 번째 말씀을 부인하는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가 아니에요!' 이것이 진화론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이 마귀의 교묘한 미혹에 속지 마십시오. 
진리를 (사적 진리와 절대 진리로) 이원화시킴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을 
'사적 진리' 라는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시대의 도전자들이 일으키는 싸움의 본질을 파고 파고 파다 보면, 
문화 막시즘이 왜 이런 얘기를 했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왜 이런 미혹을 하지? 
그 본질을 파고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근원지가 있어요. 
모든 문제의 근원지가 있는데, 그 근원지가 바로 진화론이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부정하는 거예요. 

이게 근원지인 거예요. 진화론은 여기를 깨는 거예요. 
'아니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야, 
태초에 번개가 번쩍 쳤고, 그 번개 에너지로 아메바가 생겼고,
그 단세포 생물이 진화해서 인간이 나온 거야' ... 이게 유물론이죠. 
그 유물사관 위에서 뭐가 세워져요? 막시즘이 세워져요. 

그러므로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다' 하는 
이 창조론 싸움에서 밀리면, 다 밀리게 돼요.

창조를 믿지 않거나, 아니면 창조를 애매하게 '사적 영역'으로 제한시키면,
여기서 밀리면 다 밀립니다. 왜요? 성경의 시작인데, 성경의 기초이니까! 

;아니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창조주가 안 계셔!'  
그러면 그다음 성경의 모든 나머지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다 밀리게 됩니다. 다 밀리게 돼요. 

참 불행하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기초를 별로 확인하지 않아요. 
애매하게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창조론은 종교의 영역에서 맞고,
과학적으로는 진화론이 맞고...
이렇게 애매하게 나아가면, 성경적인 가치관을 지키지 못합니다.

아니 성경에 가장 시작이고 기초가 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말씀을 믿지 않는데, 
무슨 성경적인 가치가 세워지겠어요? 다 뜬구름을 잡는 얘기가 돼죠. 

여러분, 진화론과의 싸움은 가장 근원적인 싸움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줄줄이, 줄줄이 밀리는 겁니다. 

이 창조론, 창1:1절을 믿지 않는다면, 뭐 나머지 성경의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고요. 
누구의 말처럼, 그저 종교적인 위안을 주는 인민의 아편일 뿐이에요. 

여러분, 우리에겐 창조주가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게 우리가 싸워야 될 싸움에 가장 기초예요.
이 싸움을 여러분이 싸우셔야 돼요. 창세기 1장 1절의 싸움을 싸우셔야 돼요. 아멘!

이 싸움에서 패배하면, 여러분 비참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면, 도태되는 고깃덩어리가 되고마는 거예요. 

아니요,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우리의 진짜 쓸모는, 여호와 하나님 눈에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라는 거예요. 

창세기 1장 1절의 이 말씀에 승리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되찾게 돼요. 우리의 쓸모를 되찾게 되고요. 
우리의 존귀함을 되찾게 되고, 우리의 생명을 되찾게 되는 거예요.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일어나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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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번개가 치면 단백질이 생기나요? 
번개가 치면 단백질이 바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번개가 발생하는 강력한 에너지와 환경에서 화학 반응이 일어나면서 
단백질을 포함한 다양한 유기 화합물이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번개가 지구 대기 중의 질소와 산소, 수소 등을 강하게 자극하면, 
이러한 원소들이 결합하여 다양한 화합물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 중 일부는 아미노산, 즉 단백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번개가 발생하는 조건에서 이러한 아미노산들이 결합하여 
단백질을 형성하는 과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연구로 유명한 실험은, 1950년대에 미국의 스탠리 밀러가 진행한 
밀러-유리 실험인데, 번개와 비슷한 조건을 재현하여 아미노산을 생성한 것입니다. 
이 실험은 생명체의 기원이 어떻게 시작되었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번개 그 자체가 바로 단백질을 만드는 것은 아니며, 
단백질 합성은 복잡한 생화학적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