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이 있는 삶 | 출 16:22-30 | | 25.2.14
◈향연(축제)이 있는 삶 출16:22-30 2025.02.14.
◑도입 / 향연이 아닌 탄식이 가득한 세상 *향연 : 饗宴, 연회, 잔치
여러분이 세상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세상에는 탄식 소리가 들려요.
이 세상은 전체로 온 잿빛처럼 보이고 우울하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한 일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늘 들려오는 소식이 어두운 소식들이 많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무슨 절기를 만들고, 축제를 만들고,
뭐 발렌타인데이도 만들고, 빼빼로데이도 만들죠. 삶이 재미가 없다는 얘기에요.
삶이 재미가 없으니까 그런 것들이라도 만들어서 조금 이렇게 기분 전환도 해보고
특별한 일들을 만들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거죠.
그래서 요즘 강조하는게 '축제'입니다. 축제가 많다는 것은 좋은 거죠.
그 말은 뒤집어 보면, 우리의 삶이 어둡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축제가 뭐죠? 축제에는 노래가 있고, 춤이 있고, 먹을 것들이 많고, 넉넉하죠.
풍성하고 마음이 막 들떠요. 축제에 간다면 마음이 막 들떠요.
축제를 하려고 하면, 일을 할 때와는 다르죠. 일을 멈추어야 축제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축제가 이 세상에 있는가요? No
여러분, 진정한 축제가 벌어지려고 하면, 기쁨이 있어야 되고, 환희가 있어야 되고,
감격이 있어야 되고, 즐거움이 있어야 되고, 희락이 있어야 되는 거죠.
여러분, 신약의 사도행전의 교회를 보면, 신약의 교회는 매우 밝아요.
분위기가 어둡지 않고, 우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혼인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 잔칫집이 어떻게 됐어요? 포도주가 떨어진 거잖아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잔칫집이 파장이라는 얘기에요.
손님들은 집으로 가라는 거고, 굉장히 혼주가 무례한 경우가 되죠.
손님들을 실망시킨 일이잖아요.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거든요. 근데 그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기쁨이 상실됐다는 거예요. 근데 사실은 유대 종교의 상황을 잘 표현한 것이
바로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겁니다.
그 당시에 유대종교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 했어요.
굉장히 무겁고, 율법적이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억압하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보면 백성들을 더 억압하는...
자유를 빼앗아가고, 기쁨을 제거해 버린 거예요.
그게 가나의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에요.
▲근데 그 잔칫집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물이 포도주 되게 하시는 사건,
그리고 항아리 아구까지 포도주가 가득 채워지게 된 사건,
그래서 연회장은 '이게 어디서 왔느냐?'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나온 거죠. 그것도 풍성한!
그래서 기쁨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포도주는 기쁨을 회복시킨 것이죠.
근데 그 기쁨은 거슬러 올라가면, 그 포도주는 누구예요?
포도주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
구원이 뭐죠? 우리의 절망과 탄식과 우울함이 기쁨으로 회복되는 걸 말하는 거예요.
축제가 끝이 나 버린, 더 이상 잔칫집도 잔칫집이 아닌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회복시키는 작업들...
▲그래서 여러분, 이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축복은
그 복음이 그 가정에 들어가면, 그 가정에 회복이 일어나고,
우울했던 가정에 기쁨이 넘쳐요.
여러분, 복음이 들어가면, 그 가정이 밝아져요.
그 어두웠던, 우울했던 것들이 떠나간다는 거죠.
생기가 돋고, 생동감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진짜 그 교회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교회는
막 그냥 기쁨이 넘쳐요. 즐거움이 있어요.
교회에 들어올 때부터 얼굴이 확 펴지고,
멀리서 교회만 바라봐도, 그 얼굴에 생기가 맴돌아요.
근데 저기 교회가 보이는데, 얼굴 표정이 굳어지면서 '아, 가야 되나?'
이러면 문제가 있는 거예요.
교회에 가고 싶어져야 되죠. 교회 오면 막 기쁨이 있어야 되는 거죠.
여러분 금요철야에도 얼마나 기쁨이 있어요, 그죠?
저는 전혀 웃길 줄 모르는데, 여러분들은 설교 시간에 잘 웃잖아요.
여러분 탕자의 귀향을 보세요. 누가복음 15장에 탕자가 귀향할 때,
아버지가 잔치를 열어요. 살찐 송아지를 잡아요.
온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고, 잔치를 벌이는 것!
이게 신약의 교회를 잘 보여주는 거예요.
교회는 결코 우울한 곳이 아니에요.
구원 안으로 들어왔다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단 말이죠.
방황하던 인생이 끝이 나고, 죄로 인하여 사단의 종노릇하면서...
그렇게 방황했던 내 인생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회복이 일어난단 말이죠.
불안하고, 두렵고, 결핍 속에 시달리고, 절망 속에 살았는데
이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는데, 심각할게 뭐 있겠어요?
그 아버지 집에서 아들의 지위를 누리는 거잖아요.
근데 여러분, 큰아들은 뭐예요? 큰아들은 인상을 팍 쓰고 있어요. 기분이 나빠요.
그리고 그 동생을 정죄해요.
그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를 막 그냥 욕을 하는 거예요. 대놓고 그냥 화를내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에게 주일은 어떤 시간이죠? 주일은 축제의 시간이에요.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는,
부활의 생명력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여러분, 이 세상을 사로잡고 있는게 뭔지 아세요? 죽음의 힘이에요.
죽음은 권세 중의 권세예요.
여러분, 세상에 축제들은 외형적으로는 즐거워 보여요. 멋있는 음악도 있고,
멋있는 춤도 있고, 현란하고 화려한 축제들이 벌어지지만, 모든게 풍족하지만...
그 안에 깊이 들어가면 뭐가 있어요? 죽음의 힘이 지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축제 마치면 보세요...
여러분 오늘날 소비주의 시대, 오늘날은 매일 축제처럼 풍족해 보여요.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무엇이 결핍한지 아십니까?
이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물질이 풍요하지만
그 안에 깊이 들어가면, 아무리 물질의 풍요가 있어도, 무슨 결핍이 있어요?
생명의 결핍이에요. 죽음의 권세가 짓누르고 있는 거죠.
즐거운 듯 하나 우울해요. 축제의 끝에는 애조가 있단 말이죠. 진정한 기쁨이 없어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마치고 나면 뭔가 허전하고, 허망하고, 절망이 찾아옵니다.
왜요? 그 배경에 죽음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주일은 축제의 기쁨이 넘치는 날
여러분, 우리는 다릅니다. 주일이 어떤 날이죠?
부활을 기뻐하고, 부활의 생명을 만끽하는 날이에요.
이건 엄청난 거예요.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 초유의 사건이에요. 이것보다 더 큰 사건은 없어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사망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보다
더 크고, 더 영광스럽고, 더 강력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여러분, 아무리 즐겁고 행복하고 모든 걸 다 누린다 해도,
죽음이 그의 목덜미를 틀어 쥐고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없어요.
결코 행복할 수 없어요. 이 죽음의 권세가 얼마나 강력한지요...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기뻐하는 주일, 사도행전은 전부 다 그거예요.
우리는 그 일(부활)에 증인이라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거예요.
죽음의, 무덤의 문을 열고 나오신 그리스도, 부활의 주!
그분은 영원히 우리의 왕이시고,
그러니까 여러분, 그 부활을 기뻐하는 거예요. 언제요? 주일날!
일주일 단위로 우리는 축제를 벌여요. 주일이 뭐예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생명의 풍성함,
'이젠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
이 부활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합니다. 찬양합니다. 주님은 완전한 왕이십니다...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부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는
이 부활을 기뻐하는 이 주일이야 말로,
우리의 감정이 가장 고조된 상태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기쁨이 넘치는 날이, 주일이어야 됩니다.
▲여러분 축제(향연)의 삶에서 중요한 건 뭐냐?
신앙생활과 종교 생활의 구분이에요.
종교 생활은 어두워요.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은, 의무감으로 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생명이 없어요. 자발적이지 않아요.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키긴 하지만,
내 안에 즐거운 마음이 없어요.
주일날에 그냥 교회에 나오는데, 안 가면 한대 맞을까봐 억지로 가는 거예요.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숙제하듯이 하는 거예요.
헌금도 숙제하듯이 의무적으로 하고...
여러분, 신앙생활은 그게 아니에요. 생명력이 넘치는 거예요.
자발적이에요. 생동감이 넘치는 겁니다.
여러분이 주일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를, 스스로 잘 살펴보세요.
여러분, 오늘 본문 출16:22-30절에,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만,
안식일, 즉 오늘날 신약의 주일을 어떻게 드리느냐?
기쁨과 찬양이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여러분, 찬양을 한다는 거는 엄청난 거예요.
찬양은 그냥 우리가 뭐 트로트를 부르거나, 발라드를 부르는 거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찬양은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거예요.
그분의 보좌 앞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송축하는 것!
여러분 안식일은, 신성한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날이에요.
그분을 환호하는 날이에요. 하나님을 감탄하고 탄성을 지르는 거예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우십니까?
당신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How great thou art!
이 기쁨은 그냥 주어진게 아니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진 기쁨이에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의 기쁨이란 말이죠.
그래서 세상의 축제와, 주일에 우리의 예배의 그 기쁨의 축제는.. 게임이 안 돼요.
여러분, 세상은 고통이 없는 기쁨을 원해요.
그리고 고통이나 슬픔을 인위적으로 잊어버리고, 즐거움을 얻어내려고 해요.
그리고 고통을 부정하죠. 없는 기쁨을 짜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쁨은 감각적이에요. 굉장히 감각적인데 타락한 감각이에요.
그래서 세상은 점점 자극적으로 변하죠. 왜요? 웬만한 자극으로는 만족이 안 되니까!
달달한 것도, 요즘은 그냥 달달한 걸로 안 돼요. 그냥 설탕을 폭탄을 투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혀가 거의 설탕 절임이 되는 거죠.
매운맛도, 그냥 매운 것으로는 만족이 안 돼요.
외국 고추까지 집어넣어서 더 맵게 만듭니다.
그러면 여러분 웬만한 자극으로 느낌이 안 오잖아요.
그럼 나중에 강도를 점점 더 높이게 되는 거죠.
여러분 이거 굉장히 위험합니다. 자꾸 소소한 것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거예요.
원래는 여러분, 우리가 생수, 그냥 그냥 맹물을 마셔도 맛이 있어야 돼요.
근데 이제는, 자극적인게 안 들어가면, 맛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자극이 점점 더 강해지잖아요. 계속 하니까 감각이 깨져요. 망가져 버렸어요.
그래서 어떤 것으로도 만족이 안 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감각에 타락이 일어난 거죠.
여러분 감각을 회복해야 돼요. 시각이 살아나면, 작은 사물에도 탄성이 터져요.
시각이 살아나면 지나가다가도, 아주 쌀알만큼 작은 꽃도 내 눈에 들어와요.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는 걸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해요.
시각이 살아나면, 그 작은 새가 하천이나 호숫가에 있는 물총새처럼
날개 치며 가는 그걸 보면서도 '와, 하나님이 이렇게 멋있게 만드셨구나...'
청각이 살아나면, 들려오는 바람소리, 시냇물 소리에도 감흥이 일어나요.
촉각이 살아나면 미풍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요.
미각이 살아남은 콩나물국 하나에도 콩나물의 향에 취해요.
오감이 살아나면, 경탄이 일어나요. 여러분, 찬양은 경탄하는 거예요.
무엇에 대해서? 그분에 대해서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여러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어야 돼요.
창조의 신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오늘 현대인들이 하늘의 별을 잃어버렸어요.
여러분 하늘의 별을 보면,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창조의 신비를 보면서, 오감을 통해서 오는 기쁨을, 우리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어요.
일상에서 감탄이 터져요. 찬양이 언제 어디서나 터져 올라와요.
육체적인, 지적인, 정서적인, 영적인 향연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돈이 없어도 돼요. 진짜 좋은 것은 공짜로 다 우리에게 주셨어요.
우리의 신앙과 삶을 추상적으로 만들지 말아야 돼요.
◑안식일은, 일을 안 해도 향연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안식일을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안식일을 왜 만드셨을까요?
1일 1일 3일 4일 5월 6일 7일 8일 9일 계속 가면 되는데, 왜 7일째 안식하라는 거죠?
시간의 매듭을 만들라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통하여 스페셜 데이로 만들어서 안식하라!
6일 동안은 일을 하고 일곱째 날은 안식을 하라, 축제의 향연을 즐기라는 거죠.
여러분 매일 축제가 될 수는 없어요. 매일 축제를 벌여보세요. 그러면 축제가 없어져요.
매일 좋은 걸 먹어보세요. 좋은게 없어져 버려요.
매일 생일잔치의 촛불을 불면, 나중에는 촛불이 귀찮아져요.
1년에 한 번 생일잔치를 하니까 귀한 거예요.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죠.
여러분 왜 요즘 명절이 이전과 같지 않아요?
이전에는 명절에만 먹는 것들이, 이제는 매일 일상에서 먹거든요.
옷도 과거에는 명절에만 비로소 새 옷을 한 번 샀어요.
그러니 일상과 전혀 다른 명절을 모두가 기대하는 거죠.
'아 설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추석이 빨리 와야 새 신을 신고, 새 옷을 입게 되겠지'
근데 지금은, 옛날 명절 때보다 먹던 음식을 평범한 날에 똑같이 먹어요.
고기 굽는 집, 횟집, 디저트 카페가 사방에 널려 있잖아요. 그러니 명절이 별로인 거죠...
과거에는 소고기가 너무너무 귀했어요.
제가 어릴 때는 생일에 딱 한번 소고기국 먹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가난한 집이 아니었어요. 일반 가정들보다 조금 더 잘 사는 집이었어요.
근데도 소고기국을 생일에 딱 한번 먹었어요.
그 소고기 국에, 소고기는 별로 안 들어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소고기가 장화를 신고 지나갔다' 그랬어요.
여러분 늘 좋은 것을 먹으면, 나중에 어떻게 되죠.? 좋은 것이 없어져요.
여러분 아무리 맛있는 것도, 사흘만 반복해서 먹어봐요. 질려요.
여러분 신나는 것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어요.
근데 이전보다 사람들이 더 지루해 해요. 빨리 식상해요.
더 새로운 것을 찾으러 다녀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일이라는 싸이클을 주셨어요.
늘 일만 하면 어떻게 되죠? 모든 게 식상해져요.
안식일은 일을 멈추라는 거죠. 이것은 삶의 리듬을 살리는 길이에요.
안식일은 시간의 리듬, 삶의 리듬을 되찾게 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일이라는 리듬을 따라 살라는 거예요.
리듬을 따라 살아야 활력이 있어요.
그래서 주일은, 이 안식일은, 일주일 중에 가장 감각적인 날이 되어야 돼요.
가장 풍요롭고 가장 큰 기쁨을 맛보는 날이고,
어느 날보다 탄성이 터지고, 어느 날보다 가장 많이 웃는 날이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 주일보다 더 신나고 즐겁고 행복한 날이 있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리듬을 찾아야지, 리듬을 잃어버리면 병이 찾아옵니다. 리듬을 되찾아야 돼요.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루를 쉬고...
이 7일째 되는 날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그랬어요.
모든 날이 주의 날이지만, 특별한 주의 날을 정하셨다는 거예요.
7일이라는 시간의 사이클이 너무도 중요하고,
이 특별한 날을 정하셨다는 거죠.
모든 날이 다 귀하지만, 특별한 날을 정하고,
그날을 기억하고 그 날을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쉬면 어떻게 되죠? 쉼이 쉼이 아니죠. 쉼이 고통이 돼요.
지금 매일 쉬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힘드시죠?
휴식의 시간이 꿀 같을 때가 언제죠?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을 했을 때예요.
그때 휴식이 진짜 휴식이잖아요.
진정한 기쁨은 언제오나요? 고통이 없이 주어지는게 아니에요.
고통을 통해 얻는 기쁨이에요.
운동이나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이걸 경험하죠.
그 힘든 운동이나 등산을 하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넘치는 기쁨이 있어요.
여러분 열심히 수고를 하고, 오랜만에 가지는 여행은 기쁨이 있어요.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여행을 다니면, 그런 사람을 우리는 떠돌이라고 그래요.
자기 자신도 그렇게 느껴요.
땀 흘려 일하고, 열심히 하루를 보내고 나면, 꿀잠을 자요.
그냥 눕는 순간 기절하듯이 가버려요. 불면증과 상관이 없는 거죠.
여러분, 미각도 마찬가지예요. 입맛이 없습니까? 억지로 먹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굶으면 돼요. 금식을 며칠 하고 나면, 맞이하는 밥상은 완전히 달라요.
그냥 흰쌀로 죽을 끓였는데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요.
오늘날의 문제는, 부족이 아니고, 너무 풍요해서 오는 후유증 들이 많아요.
▲여러분 우리는 특별한 날을 만들고, 그날을 기다립니다.
주일이 참 중요해요. 주일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죠.
세상은 우리를 얼마나 짓누릅니까? 삶의 중압감들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삭막하고 얼마나 척박합니까? 얼마나 많은 위기를 넘나듭니까?
경쟁이 치열하죠. 서로 죽이고 죽는 이 살벌한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7일마다 마디를 끊어서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누리며 그분을 예배하게 하시고
그분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경탄하는 날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기다리는 거예요. 매일의 삶 속에서 오늘이 힘들어도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거죠.
주님의 날, 스페셜 데이, 그것은 평일과 다른 의미를 가진 날, 그 날을 사모하는 거죠.
그 주일이 오면, 부활을 기뻐하고,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노래하며
그리고 주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고,
우리의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을 그분에게 맡겨 드리면서
이 주일은 축제다운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이 힘들고 치열할수록 주일은 더 복된 시간이에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지루하고 밋밋하게 보내다가도,
주일은 하늘 문이 열리고, 그분을 만나고...
평범하게 살아갔던 우리의 삶에 초월성을 경험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독대하는... 이 놀라운 기쁨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죠.
여러분에게는 이런 기쁨이 주중에 금요철야 때 또 하나 더 있어요.
기쁨이 넘치는 거잖아요.
모든 세상에 받았던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리잖아요.
이 구별된 날, 금철(금요철야) 축제의 시간, 명절보다 더 기쁜 날,
죽음이 지배하고 짓누르는 세상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는 이 시간이 바로 주일이에요.
그 안식의 절정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삶에 활력을 되찾고, 우리의 모든 감각이 다시 살아나고,
우리의 오감이 되살아나서 하나님 앞에 반응할 때,
우리는 기쁨이 극치로, 그 절정에 치닫는... 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안식일에 하나님의 특별한 공급을 체험해요.
잔치는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날입니다.
여러분 타락한 인간이 겪는 고통은 결핍이에요.
자가 공급이 어려워졌잖아요. 타락 이후에.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이 척박한 삶을 살아가야 한단 말이에요.
일상도 어려운데, 축제는 더 어려운 거죠.
그래서 내가 내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며 사는데, 이게 얼마나 힘들어요?
여러분,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면서 산다는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근데 여러분,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못해요.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면, 하나님을 의존해야 돼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겨 보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그들이 받아야 될 가장 중요한 레슨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는 훈련이에요.
광야에서는 노력한다고 딱히 뭐가 나는게 아니에요. 노력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죠.
광야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어야, 살 수 있는 곳이란 말이에요.
광야에서는 딴 길이 없어요. 맡기는 거 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책임지신다는 걸, 체험하고 경험하는 거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하늘에서 만나를 매일 내려주셨어요.
그러면 이걸 통해 뭘 가르쳐 주셨어요? 내가 내 백성을 책임진다는 거예요.
공급을 책임지신다는 거예요. 이건 기적이죠.
여러분, 광야에서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하루라도 살아있는게 기적이에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에요.
내가 살아낸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살려 주신 거예요.
하루라도 끊기면 죽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하늘을 바라본 거잖아요.
여러분, 애굽의 바로의 지배하여 있을 때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생산 독촉에 시달려서 고통을 받았어요.
그냥 먹을 걸 주는 법이 없어요. 바로가 그냥 주나요? 안 줘요.
뼈가 부스러지도록 일을 하고, 겨우 먹을 것을 얻어내는 환경이었어요.
여러분, 세상에서 사실 바로 왕 아래서 살아가는 그 폭정 아래,
그 생산의 독촉과 압력에 시달려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던
히브리 민족들의 그 모습이, 오늘 현대인의 우리의 모습이에요.
뼈가 바스러지도록 일을 하는데, 얻는 것은 조금이고,
거저 주어지는 건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신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쌓아두지 못하게 했어요. 쌓아둘 필요가 없었어요.
그날 먹을 걸 그날 주시는 거예요.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엔 그걸 못 믿었어요.
왜요? 애굽에서 살았던 그 잔재가 남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모아 두었더니, 썩어서 먹지 못하게 되었어요.
애굽에서 바로의 폭정해서 습득한 경험 때문에, 그들은 늘 불안했어요.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바로와 다른 분이에요.
하나님은 매일 틀림없이 만나를 내려주셨고,
그리고 금요일에는 이틀 치를 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할 것도 없다. 거두지도 마라'
금요일 날 이틀 치를 다 공급해 주시는 거예요.
애굽에서는 죽도록 일을 하고도, 먹을게 부족했어요. 쉴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도, 하루를 쉬게 하셨어요.
광야에서도 쉬게 하신 하나님! 뭘까요? 그분은 우리의 공급자 라는 거예요.
광야는 빈 공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곳을 채워 주셨어요.
누가 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걸 믿는 사람들!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을 책임져 주시는 분!
여러분, 이 경험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경험 중에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이 내 삶의 공급을 책임지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자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결핍을 채우신다...' 하는 경험입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까?
우리가 예배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만
하나님이 임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때가 언제냐 하면
'하나님이 내 삶의 필요를 채워 주실 때!' 입니다.
여러분, 광야 같은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은 뭘까요?
쉼 없는 노동 입니다. 지치잖아요. 피곤하다는 말이 입에 붙어 있어요.
아무리 해도 부족한 거예요.
결핍이 있으면 축제를 즐길 수가 없어요. 안식을 누릴 수가 없어요.
감사가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애굽에서의 익혀진 그 원망과 불평이 몸에 익숙해 있죠.
여러분, 광야의 훈련은 일상의 공급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 백성들에게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
여러분, 내가 나의 결핍을 채우는 삶의 방식은 힘들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공급을 채워 주시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 보세요.
매 순간 기대감이 생기는 거죠. 하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인도하십니다.
기대감이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해 보세요.
우리가 언제 일상에서 기쁨이 터지는 겁니까?
여러분 선물을 받을 때 기쁨이 터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 때,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하나님은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고 계세요.
우리의 필요를 순간순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 내가 노력해서 땀 흘려서 얻어낸 것에는, 내가 기쁨이 별로 없어요.
내가 그렇게 죽도록 고생했으니까.
근데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그거와 전혀 달라요.
내 수고가 상관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방식으로,
그 60만 장정들, 아이들과 부녀자까지 합치면 200만의 사람들에게 매일 만나를!
여러분 그걸 하늘에서 쏘아주셨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하늘이 그냥 새까만 거예요.
만나가 내릴 때는 하늘에서 새벽 이슬처럼 내린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부터 선물을 받을 때
내 삶의 기꺼이 개입하셔서 어느 때보다도 그분의 공급을 체험할 때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느끼는 거죠.
저는 그런 걸 너무 많이 경험해요.
주님은 우리의 삶에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 놓고 계세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축제의 기쁨
여러분 또 하나의 축제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혼자 축제는 불가능해요. 함께함에 기쁨이 크다는 거죠.
여러분 혼자 생일 축하를 어떻게 해요? 자기 생일 돌아왔어요.
그래서 혼자 방 안에 불 꺼 놓고, 이제 촛불을 켜놓고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그건 생일 축하가 안 돼요. 우울즐에 걸립니다.
기쁨은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배가 되는 거예요.
축하를 여러 사람이 해 주는 거죠. 그때 진정한 기쁨과 축하가 됩니다.
여러분 혼자서 맛있는 거 먹은 경험이 있으세요? 나 혼자 갈비를 뜯어요. 행복할까요?
현대인들이 폭식을 해요. 혼자 살면서 폭식을 해요. 왜 폭식을 하죠?
혼자 먹으니까 뭔가 허전한 거예요. 그래서 음식으로 뭔가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죠.
여러분, 맛있는 것은 나눌 때 기쁨이 커지는 거죠.
여러분 오늘날 이 세상에 우울증이 갈수록 늘어나요. 앞으로 더 가속화 될 거예요.
이게 개인주의화가 우울증을 가속화시켜요. '혼족'이 늘어나잖아요.
여러분, 축제(향연)는 함께 하는 거예요. 나눌 때 기쁨이 배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디자인하실 때, 홀로는 결코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공동체를 디자인 하셨어요. 그게 교회예요.
그래서 예배는, 주일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홀로 예배드리는게 아니에요.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어요.
주일날 함께 공동체가 부활의 기쁨, 성도의 교제의 기쁨을 나누는 거죠.
여러분 세상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를 많이 가지는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했어요.
그 소유의 개념으로 행복을 얘기하면, 다른 사람 것을 뺏어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해요. 그래서 복을,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그건 결국 탐욕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도, 남도 다 불행하게 만드는 거죠.
그리스도의 복은 달라요. 세상과 정반대예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고 했어요. 행20:35
▲여러분 성경에 매우 중요한 프린시플, 즉 원리를 얘기하는 구절들이 있어요.
원리를 이 구절이 말하는 거예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20:35
이게 principle 이예요.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
갈수록 풍성해지는 원리에요.
풍성한 삶에는 풍성한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주는게 복이 있다는 거예요.
받을 때 기쁨보다, 줄 때 기쁨이 훨씬 더 커죠.
받을 때도 기쁨이 있죠. 근데 줄 때 느끼는 기쁨은, 받을 때 느끼는 기쁨과는 달라요.
퀄리티가 달라요. 신기해요. 여러분 반대일 것 같잖아요. 아니라는 거예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겁니다.
현대인들이 잃어버린게 뭘까요? 쟁취하고 움켜쥐려고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 성경적 원리를 거부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공동체에서 서로 나누면서 기쁨을 누립니다...
후략
▲마치는 말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축제는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게 흘러넘치죠.
폭식을 하고... 먹는 것보다 버리는게 더 많아요.
나만의 행복을 생각하는 세상의 축제... 거기엔 진정한 기쁨이 없죠.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축제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지나친 투자를 하는 것,
그런데 행복하지가 않아요.
축제는 많이 벌이는데, 행복지수는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 축제가 사라져 버렸어요.
세계적인으로 알려진 축제들이 굉장히 많죠. 근데 그 안에 기쁨이 없어요.
오히려 축제 후에 후유증이 늘어나요. 급조된 기쁨은 오래가지 않아요.
더 쓸쓸해지고, 더 불만스러워지는 게 세상 사람들의 축제요, 기쁨이에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축제는,
1)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
2) 공동체로 함께 하는 즐거움의 축제의 향연
3) 주위에 배고픈 자들을 돌보는 것, 나눔의 기쁨의 축제까지 포함합니다.
소극적인 기쁨에서 적극적인 기쁨으로 전환하는 거죠.
나만의 행복을 찾지 않는 것, 축제는 함께 하는 것,
공동체에서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특별한 날,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축제의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채우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취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것을 유보하는 거죠. 그것이 주일 중심의 리듬이에요.
그래서 내가 좋은 걸 많이 먹고 싶어도, 주일 중심으로 간다면,
평일 동안에는 좀 밋밋한 일상의 식생활을 하는 거예요.
매일 좋은 것만 먹겠다고 하면, 주일은 스페셜 데이가 아니에요.
이 창조의 리듬을 찾으라는 거죠.
주님과 함께 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매일 쉬고 매일 축제를 즐기려고 하면 안 되죠.
우리는 6일동안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애를 써야 되죠.
그리고 주일을 기다리는 거죠.
주일날,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그날을 사모하는 것,
매일 주님과 동행해야죠. 근데 주일은 특별한 날로!
세상의 방식에 쫓기지 않고, 세상에 리듬에 우리가 휩쓸려 갖지 않고,
주일 중심의 창조의 리듬을 되찾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주일 중심으로 공동체에서 연약한 자들과 함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지 않고,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것들을 나누고 베풀고
그 나누어 주는 기쁨으로 기뻐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향연이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향연이, 우리는 터져나와야 돼요. 탄성이 터져야 돼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탄성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