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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장 창조의 은총, 돌봄의 사명

LNCK 2025. 3. 12. 10:5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돌봄>      ▣크리스천 인격                          

창조의 은총, 돌봄의 사명 - YouTube

◈창조의 은총, 돌봄의 사명        창4:6~9, 40:18~14:1           2025.03.09.   

※창1장에서 '다스리라'고 명령한 것은 '돌보라, 케어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정한 돌봄으로, 자기 주위 사람들을 섬길 때,
어떤 의미에서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완성(성숙)되어져 갑니다.'

...........................................

'복음이란 무엇인가?' 설명할 때 
'당신은 죄인입니다' 에서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타락의 이야기, 
선악과와 그 의미를 설명하느라 힘을 쏟습니다. 

그런데 정말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면 
창세기 3장이 아니라, 1장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인간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복음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셨어요. 창1:27~28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돌보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참 좋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출발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이 아무리 많이 망가져 있어도, 
나 자신의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우리의 출발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로부터 출발한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도 주셨습니다. 어떤 사명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스리라,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다스린다' 무슨 말입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셨잖아요.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되는 거죠. 

세상 모든 만물들이 우리의 다스림을 받는데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피조물인데 
세상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구나'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도록 매개하는 다스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다스림은, 다시 말하면 '돌보라'라는 말이죠. 
'세상 만물을 잘 돌보라'는 것이 모든 인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그런 염원이 있는 것 같아요. 
'선한 왕, 선한 다스림에 대한 염원'
'좋은 왕을 기대하는 마음'이 인류 역사 속에 늘 있어 왔습니다. 

대통령 선거 할 때마다. 실망하고 실망해도요. 
또 선거하면 또 '누군가가 우리나라를 아주 멋지게 만들어 줄 거야' 
또 기대하고 선전하고 그럴 겁니다. 

이런 것을 '정치적인 판타지' 혹은 '메시아니즘' 이라고도 볼 수 있죠. 
누군가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즉 좋은 다스림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그거예요. '우리에게도 왕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왕을 세우잖아요. 하나님이 세워주셨는데, 그 왕이 더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 현실 권력자들의 대부분은 휘두릅니다. 타락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타락한 인간에게 힘이 주어지면, 
힘이 없을 때에 보이지 않던 숨어있던 단점이... 폭력성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왕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대신 보여주는 책임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가정을 이끌잖아요. 다스리잖아요. 

그래서 가정을 돌보면서, 자녀들을 이끌면서, 
부모를 통해서 아이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할 책임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 이 사명을 받았는데, 인간이 이 세상을 잘못 다스려서 
이 피조세계를 잘 돌보지 못해서, 이 땅에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작게는 우리 가정들에 고통이 있고요. 
이 나라에도 혼란과 고통이 있고, 
모든 피조세계가 고통받으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짧은 영상 하나 보시겠습니다. 지구온난화의 경종을 울리는 내용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우리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동영상이었습니다. 
엄마와 아이에서 시작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이 엄마는 아이가 잘 살기를 바라겠죠. 
그런데 우리가 피조세계(지구)를 돌보지 않으면, 이 아이들의 미래는 혹독할 것입니다. 

어쩌면 미래에 살아갈 기회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돌보라'는 책임을 저버린 인간의 결과입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거죠. 

▲그런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을, 우리는 가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과 동생 아벨은, 하나님께 함께 각각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벨 것만 받아주셨습니다. 가인의 재산은 거절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인은 불만을 갖습니다. 씩씩거리고 안색이 변하고 극도로 분노합니다. 
여러분, 고대 세계에서 장남과 차남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모든 삶의 기회와 특권을 장남이 다 가졌잖아요. 

저희 친구들 중에도 그런 집안들이 있었습니다. 
장남은 대학까지 보내고, 차남 이하는 그냥 중학교도 보낼까 말까 하는 집안들이 
과거에 꽤 많았습니다. 딸들은 더 공부 안 시켰죠. 대부분의 집안 들이 그랬습니다. 

아벨이 한번 어떻게 인정받았다고.. 늘 주목 못 받다가.. 
맞아 죽기까지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인이 어떻게 합니까?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러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라고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구절을
KJV 영어성경은 And unto thee shall be his desire, you shall rule over him
이렇게 it 이 아니라 him으로 번역합니다. 

왜냐면 히브리에서의 '죄'는 여성명사예요. 
it 이나 her로 번역해야 되는데, 남성명사 him 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그를 다스릴지니라, 즉 아벨을 다스릴지니라(돌볼지니라)'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성 대명사 him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다스린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1장에서 보았듯이 '돌봄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돌봄입니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네게 죄의 소원이 있으나, 너는 아벨을 돌볼지니라' 
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는 거죠.     *죄의 소원 his desire (f)

그런데 가인은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하나님이 다시 질문하십니다. 
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처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다시 질문하신다는 말은, 기회를 주신다는 겁니다. 
'너 이랬지? 죽였지?' 하고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가인에게 고백할 기회,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가인은 다시 반문하고 항변하죠.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말은, 이런 부모가 맏이에게 '동생 좀 챙겨라' 하는데 

'싫은데요? 내가 왜 그런 거 해요? 왜 부모님이 해야 될 일을 나한테 시켜요? 
왜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을 나한테 시켜요?' 하는 말인 것처럼 들립니다. 
형으로서의 특권은 갖고 싶고, 책임은 다하지 않는 거죠. 

여러분 그래서 '돌봄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돌보는) 자니이까?' 라는 항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대단히 현실적인 책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평등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아무리 평등하게 나누어져도 
불평등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정기적으로 시정하는 게 희년이잖아요.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이 사는 한 완벽하게 평등한 사회는 오기 힘들다는 거죠. 
이 세상 어디서나 어느 정도의 불평등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서 현실적으로, 할 수만 있으면 
많이 가진 이들이 자발적으로 적게 가진 이를 돌보고 배려해야 된다는 거죠. 

건강한 이들이 아픈 이들을 돌보고, 
정규직들이 비정규직들을 배려하는 마음. 

나라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세계 초강대국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그냥 세계를 막 몰아가는 이게, 너무너무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통일도 마찬가지예요. 통일이 된다면, 
많이 가진.. 그래도 좀 더 가진 남한 국민들이, 
불쌍한 북한 동포들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배려해 주지 않으면, 즉 돌보지 않으면 
여러분, 통일은 정치적으로 아무리 하나가 되어도, 실질적인 통일은 불가능할 겁니다. 

 

▲이게 (형의 돌봄) 가능할까요?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요? 
그 실마리가 창44장에 나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죠. 
얼마 후에 그 형들이 흉년 때문에 이집트까지 양식을 구하러 옵니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딱 첫눈에 요셉은 형들을 알아봅니다. 

형들은 알 리가 없죠. 상상도 못하죠. 
그런데 요셉이... 형들인 줄 알고 계속해서 형들을 괴롭힙니다. 

음식 사러 왔는데, 돌아가는 길에,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슬쩍 넣어둡니다. 
그것도 모르고 형제들은 그냥 막 길을 가는데, 
저기 멀리서 먼지를 날리면서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옵니다. 체포합니다. 
'너희들은 총리가 아끼는 물건을 왜 훔쳐갔느냐?' 

'절대 아닙니다. 수색해보세요. 만약 뭐가 나오면,
그 사람은 죽이시고, 우리는 전부 노예가 되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훔친 사람은 노예가 되고, 나머지는 가도 좋다.' 
그래서 짐을 차례로 수색하기 시작합니다. 

나이 순서로 내려가는데.. 안 나와요. 의기양양합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죠. 형제들이 파랗게 질립니다.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은 절대 안된다. 절대 데려가지 마라. 
날 죽여놓고 가라' 이랬거든요. 

그러자 형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저희들이 동생을 무사히 데려오겠습니다.' 
그리고 간곡하게 아버지께 부탁해서, 베냐민을 데리고 왔거든요. 

이 장면을,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 요셉이 어떤 사람 같습니까? 
요셉은 우리가 착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좀 형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 안에 선한 마음만 있었을까요? 
악한 마음도 좀 섞여 있지 않았을까요?' '형들도 고생 좀 해봐라..' 하는 마음!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그렇습니다.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극명히 나눠지죠. 
착한 사람은 늘 착하고, 악한 사람은 언제나 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도 이분법적으로 그렇게 보는데, 여러분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모든 면에서 선하기만 하고, 형들은 다 나쁘다? 아니에요. 

요셉도 사람인 이상, 그 안에 어떤 원한과 분노와 앙갚음 
이런 감정이 조금은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힘이 있잖아요. 힘, 권력, 파워! 

여러분, 파워는 자석과도 같습니다. 
어릴 때 학교 운동장에서 자석을 가지고 모래 흙을 이렇게 쓸면, 
그 모래 안에 있는 조그만 쇳가루가 자석에 달라붙잖아요.  

 

눈으로 보면 철가루가 하나도 없어요. 눈으로 보면 그냥 모래요, 흙입니다만... 
자색을 갖고 흙을 쓸면, 거기에 시커먼 쇳가루가 달라붙죠.

여러분, 파워라는 것은 자석과도 같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악한 티끌과 조각들을 다 끌어모읍니다. 

다윗은 선하다... 선한 편이죠. 다윗 안에도 악함이 있거든요. 
언제 그 악함이 드러나는가? 권력이 생길 때입니다. 핍박 받을 때가 아니고요. 
그때 무너지는 거예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가인이 특별히 나빠서 일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이 힘이 있으니까, 장남이니까!

▲그런데 그 힘을 가진 요셉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45:1절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냉정하게 형들을 몰아붙이던 요셉의 마음, 
그 돌같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대목이 45:1절이죠. 

앞서 44장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요? 
형제들이 잡혀와 가지고 총리 요셉 앞에서 납작 엎드려요. 
요셉이 매섭게 호통칩니다. 모두가 벌벌 뜨는 그 순간에 
열 명의 형들 중에, 유다가 앞으로 나와서 말합니다. 

길게 말하는데 결론 부분만 우리 함께 읽습니다. 
44:30~33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내(유다)가 노예가 되겠습니다. 이 동생은 보내주십시오!'
라는 아주 감동적인 긴 연설을 합니다. 
이 대목에서 요셉과 형들 사이의 긴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이 44장이 창세기 전체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이 말 때문에 형제간의 화해가 드디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전에 이런 일이 있었죠. 야곱과 에서가 얍복강가에서 함께 서로 끌어안죠. 
이때 야곱이 뭐라 그럽니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우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

이 화해, 형제끼리의 화해, 원수되었던 존재들끼리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장면이 
야곱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였고요

이 유다의 연설은 창세기 전체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한 개인이 말하는 말이 가장 길게 상세하게 나오는 게 
바로 이 유다의 연설입니다.  44:18~34

▲정리하면, 가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당연히 책임져야 될 책임을 거부하는 이것이 타락이라면, 

회복은 뭔가 하면 '나는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다' 라고 말한 유다! 
'내 책임이 아니지만, 내가 대신 노예가 되겠습니다' 라는 유다의 고백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왜 창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인가 하면,
창세기에서 가장 길게 기록된 개인의 말이기도 하고,  44:18~34

여러분, 이 열두 명의 아들들 중에서 
후에 이 가문을, 이 나라를 떠매고 나간 사람이 누군가 하면,
장남 르우벤 아닙니다. 일찍 탈락했어요. 

우리가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총리된 요셉이 아주 잘 나가요. 
'이 사람이 집안의 기둥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렇죠.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입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12명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49:8, 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규'는 임금의 지휘봉인데, 장차 올 다윗 왕권을 말하는 거죠.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은 예수님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언에 따라서 오셨습니다. 

▲롬8: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뭐가 되게 한다고요?)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놀랍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 맨 앞에서 동생들을 돌보는 그 맏아들의 역할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셨다는 말입니다. 그게 십자가라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의미를, 창세기의 표현대로 하면, 
'내가 내 아우들을 지키는 자니이다' 라고 예수님이 고백하신 거예요. *가인과 비교

그런 점에서 창44장에 나오는 유다의 이 모습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심의 예고편입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노예가 되겠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전조입니다. 즉 예고편이에요. 

그리고 그 전체 목적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라고 했습니다. 롬8:29 
여러분 이 말씀도 갑자기 그냥 튀어나온 말씀이 아니에요.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고 존귀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형상을 잃어버렸잖아요. 그 책임을 걷어 차 버렸잖아요. 
'우리는 돌아갈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에덴 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길을 잃어버린 인류가...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떤 장소로 가는 게 아니에요.
장소 자체는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형편없으면 지옥이 되는 거예요. 
진정한 우리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일입니다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거예요. 

여러분 가끔씩 그런 말을 하잖아요. '먼저 인간이 되라!' 
이게 농담삼아 하는 말인데, 이게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말입니다. 
인간이 되는 게 뭐예요? 어떤 인간이 좋은 인간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 아들이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그런데 다윗도 '인간'이 못 됐어요. 진짜 참 인간이 못 됐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신 줄 믿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그 인간의 존귀함과 아름다움, 
진정한 인간성을 찾아가는 길이..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에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아버지께로 가는 길, 그것은 단순한 공간이동이 아니라 
아버지 자녀답게, 하나님 자녀답게, 우리가 회복되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 회복의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돌보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고 (동생을, 약자를) 돌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져 가는 거예요. 

▲여러분 <케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 아스 클라인먼은
하버드 대학교 정신과 의사고, 의료 인류학 교수입니다. 


부부 사진인데, 아내 조엔이 굉장히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워싱턴 대학교에서 중국문학 연구에서 석사학위 받은 분인데 

그런데 이 지적인 아내가, 어느 날 신문기사를 제대로 못 읽는 거예요. 
'피곤해서 그런가? 시력에 문제가 있나?' 점점 이상해져요. 

계단도 잘 오르지 못하고요. 급기야는 조깅하러 나갔다가 
저기서 멀쩡히 트럭이 오는데 피하지 못하고, 
아차 하는 순간에 발목이 골절됐습니다. 

병원에 가서 MRI 를 찍습니다. '발이 아니고 뇌를 찍어보자' 
50대 후반인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남편 의사가, 보호자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거예요. 
'나는 훈련받은 정신과 의사다. 그러나 이 상황을 다룰 기술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저 충격으로 몸서리치는 비참한 남편일 뿐이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알츠하이머 환자 치료의 전문가예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츠하이머 환자를 돌보는가?' 강의도 많이 하고 다닌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막상 자기가 보호자가 되어서 아내를 돌보려고 하니까, 
완전히 자기는 바닥이라는 거예요. 빨래를 해야 되는데, 혼자 빨래도 못 하는 거예요.
여러분 남편들 중에, 세탁기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분 계시죠? 

오늘 집에 가서 배우세요. 근데 이분은, 자기 집에 세탁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뭐 아내가 그냥 뭐 침대에도, 그냥 방바닥에도 변을 보기도 하고 
그거 치우면서 막 엉엉 우는 이런 모습들이 수차례 나옵니다. 

「나는 돌봄이, 공포와 두려움의 순간들을 목격하게 하고 
자기 의심과 무력감을 수없이 마주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진정한 인간적 유대감을 나누게 하고, 서로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삶의 목적의식과 감사를 키운다는 사실을 배웠다.」 

의과대학에 다니면서 못 배운 것을, 돌보면서 배웠다는 거죠. 

돌봄의 영역이, 의학의 경계를 얼마나 멀리 넘을 수 있는지도 배웠다.」 
의학이 굉장히 소중하지만, 아픔의 경험, 인생의 경험에 비하면 
아주 일부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아주 1급 의사인데, 스스로 환자의 보호자가 되어보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지... 
'의사들이 이렇게 쌀쌀 맞은가?' 
병원 시스템이 얼마나 경직되고 불편하게 하는지... 

의사들이 컴퓨터 스크린 보면서 무심코 하는 말들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이 되어서 자기 (보호자) 마음을 찌르는지... 반성하고 성찰합니다. 
물론 마음을 다해서 잘 돌보는 의사들, 간호사들도 많이 만납니다. 
10년을 집에서 돌보다가, 마지막 9개월은 요양원에 맡깁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미국도 한국과 비슷해요. 돌봄과 간병은 주로 외국에서 온,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합니다.

과거에 한국 간호사들도 많이 했죠.

그런데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짜증낼 만도 한데... 대충 할 만도 한데... 
정말 마음을 담아서 돌보는 분들이 있더라는 거죠. 

자기 아내가 거의 의식이 없는데도, 휠체어에 태워서 밖으로 나가서 
바깥바람 쐬어주고, 햇볕 쬐도록 해주고, 
늘 우울하던 아내가 환하게 웃게 만들어준 간병인. 
아이티에서 온 여자 간병인의 돌봄은 얘기 잊을 수 없다... 이런 말을 쓰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니 자신의 하버드 대학교 친구들, 
그 화려한 인맥이 못해준 것을, 이분이 해주더라' 

돌봄 care 은, 모든 인류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행위이며 
그와 동시에 가장 무겁고 좌절을 안겨주는 행위다. 
우리 안의 인간애를 온전하게 깨닫게 하는 실존적 행위이기도 하다. 

(보호자가) 돌봄의 미천한 순간들, 즉 환자의 이마에 식은 땀을 닦아주고 
더러워진 시트를 갈고, 짜증을 달래주고,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볼에 키스할 때 
내 안의 가장 훌륭한 나의 모습이 구현된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에게도 일종의 뭐가 찾아온다고요? 
정말 놀라운 구원(성숙)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딸은, 엄마가 아파서 누워있어서 
내가 조금 돌보다 보니까, 
'이제야 내가 엄마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는 분도 있습니다. 

돌보는 사람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이 나약한 순간에, 정말 구원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큼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단계에 들어 설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 안에 이런저런 악이 있는데, 
'파워'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자석처럼 끌어낸다면,

그 반대로 구원 우리 안에 있는 숨어있는 아름다움, 그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 '돌봄'
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파워가 있다면, 경제적인 능력이든, 정치적인 능력이든, 
지적인 능력이든 있다면,
그것이 폭력이 안 되게 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파워를, 섬기고 돌보는 일에 쓰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게 예수님이 가신 길이잖아요. 

그래서 이 책에서 일종의 '구원'이라고 하는 말은,
물론 영혼의 구원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거지만, 

궁극적으로 이 '돌봄'이라는 것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더라...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하는 영적 성장 양육의 핵심은 '돌봄 care'이 되어야 됩니다. 
'아무도 혼자 외롭게 울지 않는 교회'가 되려면, 
모두가 돌봄을 받고, 
또 모두가 누군가를 돌보는 교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서로 돌보면서.. 우리는 함께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닮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돌보는 모습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모습으로
우리가 지금 점점 더 회복되어 가는 줄 믿습니다. 

'주의 심장 가지고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돌보고 섬기는 길에, 
교회가 교회되고, 우리 인간이 참 인간이 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돌봄 사역자'가 될 수 있도록 
도전하고, 격려하고, 양육하는 교회입니다. 서로 돕는 교회입니다. 

목사님들만 돌보는 게 아니라, 우리 서로가 함께 돌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돌봄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거예요. 

▲오늘도 '러빙 핸즈'의 한 예를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끼리만 아니라, 
이 운동은 어른이 청소년들 지속적으로 만나는 거거든요. 
3년, 5년, 10년 이렇게도 길게 만납니다. 

우리 지역에서 돌봄이 필요한 청소년들을  *결손 가정, 조손 가정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밥 한 번 같이 먹는 것, 
그게 꾸준히 하면 굉장한 능력이 아주 아름다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쁘니까 '나도 할 수 있을까?' 했던 분이, 두 사람을 돌보는 경우도 있고, 
아까 우리가 비디오 보셨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일입니다. 

꼭 이 일이 아니어도 '우리가 어떻게 돌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이걸 좀 더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실 수 있지만, 아마도 제 생각에는, 
지금 한참 어린 자녀들 돌보고 학교 데려다주고 해야 되는 분들보다는, 

자녀들이 웬만큼 자립하기 시작한 분들, 손을 뗀 분들이 좀 더 관심이 있으실 거예요. 
내가 내 자녀 키우는데 드린 에너지의 10분의 1, 혹은 그 이하만 기울여도
내가 내 손자, 손녀 보고 싶어하는 마음의 정말 그 조금만이라도 떼어서 주면,
이 청소년의 삶들이 많이 행복해질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돌봄의 기쁨을 아는' 예수 닮은 사람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정리하면, 돌봄의 세 영역은 
첫 번째, 자기 돌봄 
두 번째, 서로 돌봄 
세 번째, 창조 세계를 돌볼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인이 여기서 실패했죠. 거부했죠. 
따지고 보면 가인은 자기 돌봄에도 실패했어요. 

자기 마음에 분노, 안색이 변할 때... 그때 뭔가를 했었어야 됩니다.  
그는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동생도 물론 죽였고, 자신의 인생도 불행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다스림은 돌봄이다' 라는 말로 시작했잖아요. 
역으로 '돌봄은 다스림입니다.'  

돌봄이라는 게, 그냥 나 자신을 잘 돌본다.. 잘 먹고 쉬고 그냥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분노를 다스릴 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제는 잘 아실 거예요. 그냥 아무거나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는 거, 
그건 자기를 잘 돌보는 게 아니잖아요. 

뭡니까? 그걸 다스리는 거예요. 
다스림이 돌봄이고, 돌봄이 다스림이에요. 

아무거나 막 먹지 않고, 먹어야 될 것을 잘 가려 먹는 것, 
때로는 절제하는 것... 그게 진정한 자기 돌봄입니다. 

근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너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너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더 조심하라'  마15:11
그게 너를 만들어간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음식 조심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아무 말이나 막 하지 않는 것... 그게 자기 돌봄의 출발이에요. 
그게 여러분, 자기 다스림입니다. 

<사순절 묵상집> 여러분 많이들 묵상하고 계실 텐데 
이번 한 주 전체의 주제가 '말에 대한 훈련'입니다. 그게 자기 돌봄이에요. 

그게 되어야, 우리가 다른 사람도 돌볼 수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내가 나를 잘 돌볼 줄 알고 
때로 내가 나를 다스릴 줄 알고, 절제할 줄 알고... 
그래서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