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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3장 잃어버린 성령님을 찾으라

LNCK 2025. 3. 13. 11:3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성령론 

잃어버린 성령님을 찾아라! / 히브리서 13:5 - YouTube

 

잃어버린 성령님을 찾으라         히13:5           2025.01.19.    교정예정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음성 듣기' 또는 성령님에 대한 설교나 강의를 들을 때면 
정말 빠지지 않고 많이 등장하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인디언이 있었는데, 그 인디언의 친구가 뉴욕에 살고 있었습니다. 
뉴욕에 사는 이 친구가, 인디언을 초청해서 그를 데리고 
뉴욕의 맨하탄 거리를 걷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많은, 그 소음이 많은 곳을 걷는데, 갑자기 인디언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 어디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 

그러니까 뉴욕에 사는 친구가 '아니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 

그랬더니 인디언이 '나를 따라와 봐' 
그래서 맨하탄 거리의 보도블록이 있는 곳에 틈새로 풀들이 조금 자라나 있고, 
거기에 귀뚜라미가 있는 것을 보게 되죠. 

뉴욕의 친구가 이야기를 합니다. '자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 
그랬더니 인디언 친구가 이렇게 말해요. '아니 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니야' 
그러면서 뉴욕의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는 길거리에 
동전 몇 개를 딱 떨어뜨립니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다 뒤를 돌아보게 되죠... 

무슨 얘기인가요? 
누구든지 어떤 소리를 듣고자 하면, 그 소리(음성)를 들을 수 있다는 거예요. 

사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들에게 있는가? 

그 열망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듣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여러분, 우리가 왜 성령님을 잃어버렸을까요? 
미안해요. 여러분들 중에 '아니 나는 성령님과 동행하고 있어' 라는 분이 있다면, 
앞으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 말씀을 잘 들었으면 좋겠고,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내가 성령을 체험한 경험들이 이미 있으나 
성령님이 나에게서 떠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분이라면 
오늘 잃어버린 성령님을 우리들이 찾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히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돈을 사랑하지 말고' 그리고 뒷부분에 보면 이렇게 이어져 있어요.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과 돈이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요. 

'돈을 사랑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했다' 
여기서 돈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넓게 보면, 

우리들의 삶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망들, 우리들이 원하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욕망은, 늘 하나님과 대척점에 서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겠다'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욕망을 이기겠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우리들은 무언가를 의지하려고 하는.. 그런 욕망들에 시달릴 때가 많이 있는 거예요. 
사실 우리들의 삶에 분노, 화가 나는 경우들이 있죠. 
대개 그 분노, 화는 어느 때 일어나냐면,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 내가 바라고 있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들은 화가 나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건강의 문제들이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우리 자녀의 문제들이 내 맘대로 안 돼요. 
경제적인 문제들이 내 맘대로 안 돼요. 그때 우리는 화가 나요. 

▲근데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겠다.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들이 이것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이야기하냐면 '무소부재하신 분이다'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어요. 

무소부재 Omni-presence 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여기에도, 거기에도 어디나 계세요. 
문제는,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들이 잃어버리는 거죠.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들이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셔!' 라고 하는 
이 믿음의 고백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요? 

아니면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우리들이 잊고 살아가는가요? 
이거를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되는 거예요. 

살전5:19절에 보면 '성령을 소멸치 말며' 
그러고 보니까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데 
우리들이 성령님을 소멸할 수도 있고, 성령님과 동행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우리의 신앙 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이어서 20~22절에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너희들이 성령을 소멸치 않기 위해서, 너희들이 해야 되는 일이 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자, '소멸한다'고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불이 이렇게 쫙 타고 있는데, 불을 꺼뜨리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연료가 공급되지 않거나 
-또 하나는 그 불에다 물을 확 끼얹었을 때, 불은 꺼지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고 살아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소멸되었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이유가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 가운데 계속되지 않을 때, 
성령님은 소멸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배에 대한 갈망, 
성령 안에서 우리들의 갈망함이 살아 있을 때에, 
우리들이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다... 고 말씀드렸어요. 

오늘 여러분들이 드리는 이 예배가 왜 중요한가요? 
오늘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우리들이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갈급함이 살아 있을 때, 
우리들은 세상 한가운데서 성령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물을 확 뿌린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마치 성령님과 동행하던 우리들의 삶 가운데, 
죄를 짓고, 죄가 우리를 속에 들어오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소멸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는 두 가지 숙제가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지속적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이 세상 가운데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자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누가 죄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성경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던 것은 언제냐면,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지 않을 때! 

아니, 이런 표현도 가능할 것 같아요. 
내가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싫어!'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지 않을 때, 우리들은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들이 죄를 짓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시는 걸까? 뭐가 문제일까?' 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우리들이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 
죄를 짓게 되는 거구나' 

매일매일의 기름 부으심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말씀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시선> 묵상 잘 하고 계세요?  *유튜브로 제공되는 큐티자료
오늘 새벽에도 저는 일어나서 <하나님의 시선>을 묵상하고, 저도 이 자리에 섰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교우들에게 주신 큰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살아가도록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셨다.' 

여러분들 다 '알림 설정' 해놓으셨어요? 
여러분들이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딱 켰을 때, 
알림이 뜨면, 그걸 켜서 그 내용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오늘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할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제가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것이죠. 

오늘 여러분들이 스스로 물어야 될 질문이에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그 다스림을 거부하고, 나는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 없이 행동하는 일들은,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육신의 정욕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은 늘 이 대척점 가운데 있어요. 
'하나님을 따라갈 것이냐, 아니면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따라갈 것이냐?' 

우리들에게 제일 심각한 것은, 우리들의 삶에 어느 날 성령님이 떠나버리고 
성령님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거죠. 

▲제가 이번 '성령 안에서' 설교 시리즈(총 7강)를 준비하면서 
캔달 목사님의 책을 여러 권 보게 되었어요. 

<성령을 소멸치 않는 삶>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성령께서 교회에서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들이 하고 있는 일의 90%는 아무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성령님이 떠나가셔도,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 가운데 90%는 지장을 받지 않는다... 

무슨 얘기냐면, 어쩌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들의 90%가 
성령님과 관계 없이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사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에게 굉장히 강하게 찔림으로 다가왔고 
깊이 묵상하게 되었어요. '하나님,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예배하고 
우리들이 여기에서 하고 있는 많은 일들이... 성령님과 어떤 관계 속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우리들이 일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이 질문을 심각하게 묻지 않으면 
어느 날 우리는 성령님이 떠나가버린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몰라요. 

눅2:41절 이하에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어린 시절 명절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율법사들과 논쟁을 벌이고, 
예수님의 부모님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성경에 보면, 하루길쯤 지났을 때, 예수님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그래서 부모님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어린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버지가 예수님 없이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 한가운데서, 
우리들이 성령님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또 하나, 우리들은 신앙생활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령님 없이도,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들이 원하는 일들을 하고, 
또 얼마든지 우리의 열심이, 성령님의 열심을 앞질러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굉장히 두려움 가운데 저를 봐요. 
오늘 아침에도 제가 국장 목사님들하고 만나서 잠깐 그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 모든 목회자들이, 우리 만나교회 성도들이 
두려움 가운데 우리들의 모습을 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싸인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왜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만나교회가 요즘 너무 잘 돼요. 
어떤 사역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교인들이 잘 따라와 줘요. 
예배 시간마다 교인들이 넘쳐나요. 자리가 없어요. 두려운 거예요. 

'하나님, 우리들이 너무 잘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을 앞서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인생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 때문에, 
주님을 보지 않고 가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혹시 우리들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으로 인하여 
주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요?' 

진짜 무서운 것이 우리들의 열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과 우리들이 동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찾아오는 어떤 허무함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열정적으로, 우리들의 삶의 패션(열정)을 가지고 일할 때에는 
허무함이 없어요. 왜요?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라'고 말씀하셨으니까! 히13:5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들이 욕망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허무함이 찾아와요.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래서 성령의 사람들이 타락하는 많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그 허무함을, 세상적인 욕망으로 채우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교회 안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사역을 잘하던 사람들이 
물질의 문제에 넘어지고, 명예의 문제에 넘어지고, 이성의 문제에 넘어지는 이유가 
성령님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현상인 거예요

이건 미국의 통계 얘기는 한데요. 
미국의 소위 말하는 성공하는 사역자, 대개 교회가 부흥하고 기름부으심이 있었던 
미국의 성공하는 사역자들 중에 75%가 중간에 타락한다는 거예요. 
끝까지 사역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죠. 

성공하는 사역자들 중에 75%가 결국은 허무하게 유혹 가운데 넘어지고 만다... 왜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 가운데 계속되지 아니하고,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가면... 우리는 그렇게 허무함을, 
다른 세속적 욕망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거죠. 

▲여러분 주변에서도, 그렇게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어느 날 하나님을 떠나가고.. 아니 무섭게 타락해가는 모습들을 간혹 바라보게 돼요. 
그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성령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시는 거죠. 
우리가 오늘 불렀던 찬양 중에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 기다리니 
주님 나를 드립니다. 주님 앞에 우릴 드립니다. 사랑으로 인도하소서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 기다리니 
주님 손에 우릴 드립니다. 사랑으로 인도하소서' 

참 기가 막히지 않아요?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겸손하게..' 

어느 날 우리들에게 성령님이 떠나가시면 
우리들이 성령님을 앞서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잃어버린 성령님을 찾아라' *설교제목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 잃어버린 것을 알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시 주님과 함께 동행하여 고향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되죠.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성령님을 만났던.. 여러분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큰 축복이 뭐냐면 
제가 만나교회 부목사부터 사역한 것을 시작하면 
지금 27년째 제가 만나교회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동안 정말 많은 설교를 했고, 그 설교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제 가슴을 뛰게 하셨던.. 제 속에 있었던 패션, 

저의 욕망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던 꿈을 
우리 성도들과 함께 많이 나누었었던 겁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저에게 주셨던 마음이 
언제부터인가 식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래서 그때 20여 년 전에 제가 설교했던 그 설교를 다시 보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게 저에게 너무 큰 축복이었어요. 

'아, 20년 전에 하나님께서 그때 이 자리에서 나에게 이렇게 뛰는 가슴을 주셨구나. 
나에게 이런 패션을 주셨구나' 그 자리를 돌아보는 것이 저에게 너무나 큰 축복이었어요.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서 여러분들이 정말 심각하게 우리를 돌아봐야 될 것은 
하나님을 만났던, 성령님을 만났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뛰게 하셨던 그 자리를... 우리들이 다시 보기 시작할 때, 

우리들에게서 잃어버린 성령님을 감지할 수 있으면, 
우리들에게는 가능성이 있는 거죠. 
잃어버린 성령님을 우리들이 다시 찾을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인생이 때로는 너무 잘 돼서... 
때로는 반대로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버려서... 
(이래 저래) 잃어버린 성령님을 우리들이 감지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무슨 일 때문에 성령님을 놓치게 되었는가요? 
지금 우리들의 삶 한가운데서,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혹시 우리들이 이렇게 공적 예배에 참석해서 드리고, 
아침마다 큐티 묵상을 하고, 우리들의 성경을 읽는다고 하는 
그런 습관적 행위에 우리들이 집중하되 보니 
'나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고, 우리들의 습관 때문에 
성령님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아니, 주님과 함께 했던 그 (열정적인) 순간들을 우리들이 기억한다면, 
그때 내가 무엇을 했고, 그때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우리들이 기억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열심을 내고 있는 이 일들이 
정말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정직하게 우리들이 돌아볼 수 있다면... 

오늘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많은 일(사역)들 가운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쉽게 그냥 늘 입술에 달고 사는 것처럼, 
'주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라고 말하고 있는 그 일들 가운데 
그 진의가 정말 성령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욕망들을.. '주님을 위해' 라고 하는 말로 포장하고 있는지를 
한번 진지하게 돌아보기 원합니다.

▲오늘 제가 중요한 말씀을 하나 드리려고 해요. 
이렇게 우리들이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잘못하면 우리들의 신앙이 아주 깊은 오류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기 위해서 
성령님과 동행해야 되겠다. .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혹시 우리들이 자유함을 잃어버리고 율법 가운데 빠지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우리들이 은혜를 받았어요. 성령님과 동행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런 결심을 할 때도 있죠. 

'아 나는 모든 일을 성령님께 묻고 내가 살아갈 거야..' 
아침에 일어나서 '성령님, 제가 무슨 옷을 입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기에 '내가 참 성령님과 친근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점심에 나가서 밥을 먹는데 '성령님, 제가 무슨 밥을 먹을까요?' 
이런 것을 우리들이 성령님과 굉장히 친근하다고 생각하죠. 
모든 것들을 성령님께 물으니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얼마나 피곤한 인생일까?' 
여러분, 제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세요? 

근데요. 성령님은 굉장히 인격적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면, 성령님께 그걸 물을 필요가 없어요. 

아침에 무슨 옷을 입을지... 상식이 있잖아요. 
아니 점심에 무슨 밥을 먹을지..? 건강에 좋은 거 드세요. 
그게 성령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우리들이 무엇을 다 꼬치꼬치 물어야 되는 것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런 민감함이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게 너무 과하면 안 된다는 거죠)

또 우리들이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들이 이런 결심을 하는 거죠. 
'내가 매일 아침마다 한 시간씩은 기도할 거야. 그리고 두 시간씩은 성경을 볼 거야!' 
이렇게 내 나름대로 스케줄을 쫙 짜 놓고 '이게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동행이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율법을 우리들에게 만들어 놓고 있는 거죠. 
(이런 민감함이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게 너무 과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리고 놀라운 일은, 우리들이 만든 그 율법, 
성령님과 동행하고자 만들어놓은 그 율법에 우리들이 충분히 반응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유함도 잃어버리고, 내 스스로 화가 나요. 

성령님과 동행하려고 만든 그 율법들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규정들로 인하여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게 족쇄가 되는 거죠. 

정말 중요하고, 혹시 우리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려요. 

갈5:1절에 보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기쁘고 행복해야 되는 일이에요. 
제가 늘 그런 얘기하죠. 
'나는 우리 교인들이 예수 믿으면서, 예배 드리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 시간에 나와서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게, 기쁘고 행복해야 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를 다 감옥 속에 가둬놓고 있다면, 
그게 과연 성령님과 동행하는 일일까요? 

▲제가 요즘 나이가 들면서, 후배 목회자들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많이 해요. 
'목사님은 목사님의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설교 준비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 시간 분배를 하세요?' 

젊은 목회자들이 볼 때 똑같은 24시간인데, 
젊은 사람들이 볼 때는, 제가 이렇게 설교 준비를 하고, 
이렇게 사역을 하고 살아가는 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어떻게 시간을 쪼개서 살까? 
그게 궁금한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영성을 훈련하고, 단련하고, 
설교 준비를 하기 위해서 시간을 정해놓고 지키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그냥 시간 날 때 합니다.' *늘 한다는 뜻

제가 게으른 사람 아니에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언제부터인가 내가 살아가는 삶이 
'내가 목회자구나.. 내가 무엇을 하든 내가 목회자구나... 
내가 특별히 시간을 내서 해야 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내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시간들을 내가 어떻게 쓰고 활용해야 되는가?' 
그것이 내 삶에 자유함을 주기 시작했어요. *쉬지 않고 늘 한다는 뜻

제가 젊은 시절에 처음 목회를 하면서 
저는 굉장히 저 자신을 스트릭하게... 
저를 어떻게 표현할까요? 율법으로 저를 스스로 묶었던 사람인 것 같아요. 

'내가 이 시간을 꼭 지킬 거야.. 이것은 내가 꼭 해야 돼..' 
내가 잘못 살아가는 것은 아닌데, 당시 내 안에 자유함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정해놓는 시간들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내가 성령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중요합니다. 

▲제가 이렇게 정리를 해봤어요. 
성령님은 우리가 실수하지 않기를 원하시지만, 
실수를 통해서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에요.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들 중에 아무도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괜찮아요. 
우리가 실수하는 가운데서도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그 성령님이 실수를 통하여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켜주세요. 

성령님은 우리들이 완전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에요. 왜요? 
우리들은 누구도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들이 점점점 완전해지기를 원하세요. 
성령님은 근심과 절제로... 우리들이 웃음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성령님과 함께 기뻐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이에요. 

우리들이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만 분명하면, 실수하는 건 괜찮아요. 
왜요? 그것을 통하여 성장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노심초사하고 율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삶이 균형을 맞추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인 거예요. 
성령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 안에서 직업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돈을 벌고, 가정을 다 먹여살리고, 
가정에서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일들을 하며, 인간관계 속에 살아가요. 

그런데 매일 우리들이 시간을 정해놓고,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내 신앙의 균형을 맞추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겠어요? 

제가 생각하는 성령님은, 그런 성령님이 아니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직장에서 일을 할 때, 열심히 일해야 될 때가 있어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땀을 흘리고, 밤을 새워 일을 해야 될 때가 있어요. 
근데 그때 '내가 성경 1시간, 2시간 안 읽은 것 때문에 성령님 화내시면 어떡하지?' 
그리고 노심초사 한다면, 성령님이 그걸 기뻐하실까요? 
제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어느 날 성령님이 나에게 민감하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 그렇게 살아가다가 보면, 영적으로 큰일 난다.' 

그때 우리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면 
'그렇군요. 성령님, 제가 다.시 이렇게 돌아와야 되겠군요.' 
그리고 말씀을 다시 보고, 기도 생활로 들어가요. 

우리들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데 
성령에서 우리들에게 이런 음성을 주세요. 

'야, 네 믿음이 나와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네 가족과 네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좋은 관계를 가져야 되지 않겠니?' 

그러면 그때 우리들이, 우리의 가정으로 돌아와서, 
우리 친구들 간의 관계들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그래, 네가 참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고, 네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말씀하지 않을까요? 

우리들이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오늘 본문 말씀해 보니까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겠다.' 히13:5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문제는 뭐냐면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신 그 성령님을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산다는 거예요. 

우리들이 성령님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들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거죠. 

▲자,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예요. 
우리들이 때때로 성령님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고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어요.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퍼펙트하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왜요? 행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소아시아(터키) 지역으로 선교하려고 마음을 먹죠. 

왜냐면 사도바울이 생각할 때, 그는 이방인을 위해 선교하는데, 
사도바울이 생각할 때 복음을 전하기에 제일 효율적인 것이 소아시아였어요. 

사도바울의 생각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죠.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바울이 아시아라고 하려고 할 때 
성령께서 그의 길을 막으셨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이, 하나님이 거기로 (남쪽) 들어가지 못하게 딱 막으시니까, 거기로 안 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제는 비두니아로 (북쪽) 가려고 결심을 하고 준비를 하는데, 
성령께서 그 길을 또 막으십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그 막으심에 또 순정합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보았던 환상이 있죠. 
'마게도니아인이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 
사도바울이 방향을 틀어서 빌립보로 (유럽) 가게 됩니다.  행16:9

그때 사도바울은 '성령님이 나를 여기로 인도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죠.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사도 바울이, 
그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것을 경험하더라고요.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세요? 성령의 사람이, 성령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성령님이 막으시는 걸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저는 제가 20여 년 만나교회 사역을 하면서, 진짜 놀라운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제가 만나교회 목회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저는 24시간 자나깨나 목회 생각이에요. 

오늘 아침에 제 아내와 식사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삶의 우선순위는 늘 교회인 것 같아요.' 

왜요? 하나님이 나를 여기로 부르셨으니까! 
제가 여기서 어떤 나쁜 것을 생각하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2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제가 생각하고, 꿈꾸며 하던 일들 가운데서... 막으시는 때가 참 많았어요. 

그런데 제게 참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막으실 때 저는 (항상) 감사했거든요. 
'하나님이 막으시는군요.'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세요. 
'하나님이 이 길을 원하시는군요.' 

제 삶에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막으실 때도" 하나님은 동행하시고요. 
-내 길을 "인도하실 때도"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시는 거예요

성령님과 동행할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게 있어요. 
-성령님이 막으시는 걸 경험하게 되고 
-성령님과 동행할 때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들이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성령님과 동행할 때 
그때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가요? 우리들의 삶의 스토리가 만들어져요. 
그게 뭐예요? 간증이에요.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막으시는 일이.. 내 인생에 간증이 되고 
-(반대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것이 내 삶의 간증이 되는 일들! 흥미로운 일들이죠

 

▲성령님이 우리 곁에 계실 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이에요. 
'아, 성령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자주 쓰는 표현이 있죠. 제가 좋아하는 말 Just do it. right now! 
제가 나이키를 선전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막으시잖아요. 
막으시는 이 시간은, 우리들의 인생에 공백기처럼 느껴져요. 

제가 2026년 내년 변화산 기도회 때, 나눌 이 말씀 준비를 다 끝내놨거든요. 
우리의 인생의 기다림은 공백처럼 느껴지고, 고난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은 왜 이렇게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지...' 

그런데 우리들이 성령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막으시는 시간이... 공백이 아니더라고요. 
기다림이 우리들에게 고난이 아니더라고요. 

이 기다림의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것을 
우리들이 경험하기 시작할 때, 
이 공백의 시간은 우리들의 삶에 너무너무 필요한 시간, 유익의 시간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실패를 경험하고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찾았다'고 하는 증거는 무엇이냐면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뭘까요? 갈라디아서 5:22~23절을 같이 봅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들이 '성령님을 찾았다' 하는 명백한 증거는 
성령의 열매가 우리를 가운데 열리는 거예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 

▲저 스스로 제가 참 감사하는 게 있어요. 저에게 많은 단점들이 있어요. 
성격적인 결함도 있고... 

근데 제가 '나이 드는 것이 제 인생에 큰 축복이다' 라고 생각되는 게, 
나이가 들면서 저에게 조금은 '오래 참음의 열매'들이 저에게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게 '온유함의 열매'들이 맺혀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저 스스로 느껴지는 게 너무 감사하고요. 
하나님이 저를 만나교회 담임목사로서 오늘 여기서 설교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것이 
제가 온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도록 나를 인도하시는구나... 
그게 나이듦의 축복인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그 열매로 인도하시는구나'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런 도전을 주고 싶은 거예요. 
내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한다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살아왔는데... 

우리들에게 이 명백한 성령의 증거, 이 성령의 열매들이 
우리들의 삶에서 맺혀지고 있는가? 

우리들이 성령님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육신의 열매를 맺게 되죠. 
육체의 열매에 대해서 갈5:19~2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시기심이 일어나고, 
오늘 우리들에게 유혹이 떠나지 않고, 
우리가 있는 곳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면... 

한국 교회 안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런 육신의 열매들을 우리들이 맺고 있다고 하면, 이게 분명하다는 거예요. 
'그것은 너희들이 성령님과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라는 거예요. 성령의 열매가 명확하듯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육체의 열매도..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다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들에게 나타난다는 거예요. 

고전3: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니, 너희들이 성전으로서 해야 되는 일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을 하고, 
너희들이 하지 말아야 되는 일, 육신의 열매를 맺는 일들이 명확하지 아니하냐?' 

우리들이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이것이 명확해야 된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들이 비겁한 사람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목회자니까 저에게 있어서 늘 그런 유혹, 제 속에 그런 고민 같은 것이 있어요. 
저는 뭐 다른 거 별로 없어요. 저에게 제일 고민되는 것 중에 하나가 
저도 살아가는 데 제일 필요한 게.. 집, 차 이런 거잖아요. 

장로님들이 '어떤 차를 사주시려고 할까? 어떤 집에서 살려고 할까?' 
제가 올해 20년 넘게 살았던 이 9층 사택에서 나갑니다. 

우리 교인들한테 9층을 리모델링 해서, 우리 교인들이 쓸 수 있도록 하고,
저희는 사택에서 나갑니다. 
그래서 집을 새로 얻는데, 장로님들은 맨날 저한테 좋은 거 해주고 싶어하세요. 

근데 그 집을 선택하는 것은, 장로님들이 소개는 하지만 
결국은 제가 결정하는 거예요. 

제가 누군가에게 사람에게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제가 여러분들을 만족시키려고 하거나, 저의 만족을 위해서 선택한다면 
그것은 성령님과 멀어질 수 있어요. 

그런데 적어도 제가 성령님 안에서 어떤 결정을 할까요? 
그 결정의 의지는 저에게 달린 문제예요. 핑계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하든 여러분들이 성령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성령님 안에서 여러분들이 올바른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질려고 할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거예요. 

누구에게 미루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자 오늘 결론적으로 한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저는 성령님과 우리들이 동행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민감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Sensitivity, 민감성! 

민감성을 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본래 의미는, 다치기 쉬운 것이 민감성이고요.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필요를 잘 아는 능력이 민감성이에요. 

성령님과 우리들이 동행하는 데 있어서 '민감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을 우리들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성령님을 생각한다고 하는 거예요. 

저는 본질적으로 생각하고, 민감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격적인 것과 반대는 일방적인 겁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고, 성령님과 우리들이 동행하시는데 
이 민감성을 가지는 것은, 
성령님이 어떤 감정, 생각이신지를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중요한 비결이에요. 

저는 인간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교인들하고 관계는 좀 다르죠. 
제가 친구 관계나, 목회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저는 '약속을 여러 번 어기는 사람하고는, 내가 깊은 관계를 가지지 말아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그 사람이 약속을 여러 번 어긴다고 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저를 인격적으로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불가항력적인 일들로 인하여 약속을 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학력적인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습관이고 일방적인 겁니다. 

우리들이 성령님께 민감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들이 성령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결코 일방적으로 결정하거나 
일방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어떤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성품과 성령의 능력을 닮아가는 거예요.

▲제가 쓴 <모든 날이 은혜스럽다> 라는 책 속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제가 상당히 규모가 있는 교회로 집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식사를 하는데 목사님이 저에게 그런 고민을 얘기하는 거예요. 

'목사님, 장로교회는 당회라고 하는 조직이 있어서 
선임 장로님 힘이 굉장히 셉니다. 그 장로님 때문에 제가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그 장로님이 정말 너무 상식 밖의 사람이고, 정말 비인격적인 분이에요. 
그런데 진짜 힘든 건, 그분이 매일 새벽마다 
제일 끝까지 남아서 기도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저분은 무슨 기도를 할까?' 그런 고민이 든다는 거예요. 
자세한 얘기는 책에 있어요.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고 성령님과 민감하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성품과 깊이 관련있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것을 우리들에게 원하실까요? 

기도하는 시간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아니더라고요. 
성경을 읽는 시간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아니더라고요. 

성경을 읽을 때, 기도할 때 성령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령님께 묻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래서 실제로 순종할 때,
그때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게 되는 거예요. 

켄달 목사님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통해서 
성령님에 대한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지게 돼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이렇게 결심을 하죠. 
'내가 시간을 정해놓고, 그리고 내가 성령님에 대해서 알아가야 되겠다. 
그리고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야 되겠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성령님과 깊은 교제 속에 들어가려고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대요. 

그런데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이 시간을 빼앗는 사람들, 
방해하는 사람들이 자꾸 나타나는데... 화가 나더라는 거예요. 

어느 날 성령님이 깨닫게 하셨대요. 
화나는 그의 모습을,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자의적인 결단과, 우리들이 자의적인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생각하며,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비로소 우리들이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에게 도전합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이번 한 주간 잃어버린 성령님을 찾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들으신 말씀 생각하면서, 함께 <공동기도문>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며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세상의 소음과 욕망에 사로잡혀 세미한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때로는 성령님의 임재가 떠나심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내 모습을 회개합니다. 

오늘 우리는 잃어버린 성령님을 찾아 
성령님과 다시 동행하는 삶을 이루기 원합니다. 

이제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참된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케 하옵소서.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와 함께 하소서. 주여, 기름부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