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고후2장 그리스도의 향기

LNCK 2025. 3. 16. 06:0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특강(2) -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1:12-2:17) - YouTube

※분량이 많아서 2개로 나눠서 녹취, 정리했습니다. 약 30분 ~ 끝까지.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2:1~17               2025.03.12.

◑바울에게 큰 눌림과 걱정을 안겨준 사람들을  
(고린도 교인중에 바울을 배척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권면합니까? 

바울에게 큰 눌림과 걱정을 안겨준 사람들이 누굴까요? 
외부에서 온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세뇌당한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가짜다. 
봐, 그가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잖아? 그는 거짓말쟁이야!' 
그런 악의적 선동에 흔들려서, 바울을 배척한 교인들에 대해서, 바울이 이렇게 권면하죠. 

▲고후2: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위 구절은 바울이 본 서신 고린도후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두 번 고린도를 방문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왜냐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설립을 위해 첫번째로 그곳을 방문한 이후에(행18:1-8) 쓴 
고린도 전서에는, '슬픈 방문'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는 반면, 
본문에는 '가슴 아픈 방문'에 관한 암시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죠.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의해 야기된 
바울에 대한 오해와 교회에 발생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두번째로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발송한 이후에 있었던 이 두번째 방문은(13:1~2 참조)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더욱 큰 불신과 마음의 상처만 남긴 방문이었기에 
'가슴아픈 방문'이었죠. 

이 '가슴 아픈 방문'은, 고후1:15~16절의 여행 계획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변경시킬 때 
상당한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데, 
이는 그가 계획의 변경을 서술할 때 '결심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데서 드러납니다. 2:1

▲고후2: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본절에 대한 개역성경의 번역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내용은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공동번역)의 뜻이죠. 

이 말 속에는 바울이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가 암시되어 있죠. 
즉 원래의 계획대로 고린도 방문을 강행하여 
지금까지 저지른 성도들의 잘못을 엄단한다면, 
그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근심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지 않고, 계획을 변경하여, 그들에게 회개할 시간적 여유를 줌으로써 
훗날 기쁨으로 만나기를 원했던 바울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하고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는 세심한 목회적 배려로 행하였습니다.

▲고후2: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이같이 쓴 것은' 
과거에 썼던 것을 가리킵니다. '눈물의 편지 (3rd)'를 가리킵니다. 
이 편지는 현존하고 있지 않죠.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바울이 씨를 뿌려 거둔 열매인 고린도 교인들은, 당연히 바울에게 기쁨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관계가 매우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바울에게 기쁨을 주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도리어 근심을 끼치는 형편이 되었죠. 

바울이 진정으로 근심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단순히 오해에서 비롯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거짓 사도들에 현혹되어(11:1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죠.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해 직접 방문하여 책망하고 문책하는 것이 
피차에 마음만 상하게 할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는 고린도 방문 계획을(1:15, 16) 취소하고, 
대신 '눈물의 편지'를 디도를 통해 보냄으로써,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이죠.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줄 확신함이로라'
바울이 겪는 모든 희로애락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1:6-12). 
지금은 관계가 많이 악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 그들의 기쁨이 된다는 확신을 표하는 것이죠. 

혹자는 위 구절에서 고린도에는 문제를 야기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2:5, 6, 11:13) 
대부분의 교인들은 여전히 건전했다고 추론합니다

▲고후2: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큰 눌림과 걱정을 바울에게 준 사람들'은   2:4 
그 거짓 교사들의 부화뇌동에 놀아난 고린도 교인들이에요.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계속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내는데, 
거기에 같이 넘어가서,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런 사람들 얘기입니다.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바울의 '눈물의 편지 (3rd)'가 부분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슬프게 했음을 
말해줍니다(7:8). 

바울이 눈물로 써보낸 편지의 핵심은, 비록 그들이 바울을 슬픔 가운데 빠지게 했지만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었죠. 

바울은 이 사랑을 '넘치는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혹자는 이처럼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인들을 남달리 사랑하는 데에는 
문제아(問題兒)들을 더 사랑하는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전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회개하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고후2: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5~7절과 7:12에 근거할 때,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단수
그러나 말을 할 때 보면, 그 무리들 전체를 '단수'로 표현할 때가 종종 있죠. 

고린도 교회는 전적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에 근거해 세워졌죠. 
바울의 복음 사역과, 그의 인격과, 사도적 권위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바울에 대한 도전은, 그의 인격과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며 
고린도 교회 전체에 대한 적대 행위였던 것입니다.

▲고후2: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바울의 사도권을 도전한 자들에게 징계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많은 사람에게서'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이, 적대자를 반대하여 
바울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티미아'는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오고
법적인 의미에서의 '처벌'을 뜻하는지 
아니면 단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책망' 또는 '비난'을 뜻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에피티미아'와 어원을 같이하는 '에피티만'이 신약에서 30회 사용되는 중 
한 곳에서만(유 1:9) 징계의 의미로 사용되고, 
나머지에서는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볼 때,
'책망,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근데 이제 여기서 우리가 약간 멈칫하죠. 
왜냐면 '징계'가 나오니까, 교회에서 민감한 주제 아닙니까.
이제 그 다음 말씀을 보세요. 

▲고후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6절에서 7절로 넘어가는 걸 잘 읽으셔야 돼요. 
징계를 철회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징계를 하라는 얘기입니까? 

여러분, 여기서 접속사를 잘 보셔야 돼요. '그런즉'을 잘 보셔야 돼요. 
(원전에는 '그러면 so, 그렇지만 on the contrary ..  두 개가 나옵니다.)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러나 너희는' 
이렇게 가면 징계를 철회하라는 말인데요. 

'그런즉 너희는' 이 말은 징계를 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So) 징계하고 그 다음에 (on the contrary) 용서하고, 위로하라는 얘기입니다. 

즉 결론적으로 말하면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 대한, 바울은 세 가지 단계를 얘기했습니다. 
첫째, 징계 
두 번째, 용서 
세 번째, 위로 

징계 없는 용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가 징계를 하는데 징계의 목적이 뭡니까? 
용서가 목적이어야 돼요. 용서가! 
용서를 전제로 깔고, 징계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가 교회를 어지럽혔죠. 교회를 분열시켰죠. 
바울의 사도성을 문제 삼으면서, 교회를 한바탕 큰 회오리 가운데 들어가게 했죠. 
그러면 징계가 필요해요. 마땅한 징계가 필요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치리'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징계(치리)하고, 그 다음에 용서합니다. 
용서의 전제가 뭘까요? 징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에 대해서 용서하는 겁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요. 자기의 잘못을 그대로 수용하고, 공동체 앞에서 회개하고, 
그리고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의 징계의 기간을 성실하게 잘 수행한 자, 
그런 자를 용서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뛰쳐나가 버리면 용서가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징계 → 용서 → 위로의 순서입니다. 

위로는 뭡니까? 지난 1강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위로 사역은 진리의 성령이 하시는 사역이에요. 위로는 진리에요. 
위로는 진리를 가르치라는 얘기입니다. 

징계하고.. 징계를 잘 받은 자를 용서하고.. 그 다음에는   
앞에 일대일로 앉혀놓고, 복음의 진리부터 시작해서 
네가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다시 짚어주고, 복음 위에 세워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울이 지금 얘기하는 바, 사람을 회복시키는 단계예요. 

근데 여러분, 우리가 이거 합니까? 저도 못합니다. 
징계하면 다 떠나가버릴까 봐 무서워서 못 해요. 
근데 하고 싶어요. 근데 못해요. 그래서 자괴감을 느낍니다. 

근데 알고는 있어야 되잖아요. 이게 진리라는 사실을! 
징계가 필요하고, 이 징계를 수용하는 사람, 

그는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되고, 그가 회개하고 징계를 받아들이면, 
당연히 공동체는 따뜻하게 껴안고 용서해야죠.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해야죠. 
그 다음에 진리를 가르치며 위로하고... 바울이 그걸 얘기한 겁니다. 
근데 이게 참 잘 안 되잖아요. 

▲고후2: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바울은 적대자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 당위성을 
한 영혼이 지나친 낙심 가운데 좌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목회적 이유에서 찾습니다. 

이제 고린도 교인들은 그 적대자에게 사랑을 공개적으로 확인시켜 줌으로써 
그의 슬픔을 덜어주고 그를 용서하였음을 확증해 주어 
그로 하여금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만 했습니다.

▲고후2: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뭐에 대해서 순종하라는 말이에요? 
방금 지금 얘기한 거. 징계 → 용서 → 위로 
'이걸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너희에게 썼다' 
반드시 내 권면대로 하라는 얘기예요. 
  
▲고후2: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너희가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이것은 바울이 용서를 권면하면서도 결코 강요하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용서해 주기를 바랐고, 그들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은 이미 용서를 했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가정이 아니라, 
이미 용서한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더욱이 바울이 용서한 것은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기 위함이나 
순간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증인으로 보시고 인정하는 가운데 행한 진실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고후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사탄은 어떻게 우리를 속일까요? 

'야, 교회가 사랑이 없어. 그냥 덮어, 그냥 따지지 말고 무조건 덮어!' 
그런 거 징계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저 사람이 교회 나가버리면 어떡할래? 덮어!' 
사탄이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고요. 사탄이 그렇게 우리를 속인다고요.

근데 또 사탄은 또 반대로도 얘기합니다. '징계해야지, 세게 해야지! 
용서는 무슨 용서? 저런 인간은 절대 안 변해!' 
이렇게 '용서가 없는 징계'를 사탄이 우리에게 얘기할 수도 있고요. 
반대로 '징계가 없는 용서'를 계속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어떤 고리를 노리느냐? 그 교회 공동체의 제일 약한 고리를 노립니다. 
자 이 교회가 기가 센 사람들이 좀 없어요. 그러면 맨날 용서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 한두 사람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죠. 

그렇게 어지럽혀도, 누구 하나 제어를 못하는 거예요. 
교회법이 살아 있고, 교회가 질서가 있고, 공동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하는 거죠.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합니다. '아, 우리는 사랑이 많은 공동체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징계없는 사랑, 그게 무슨 사랑이에요?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고, 놀아나는 거예요. 

자 징계하고 용서했어요. 그 다음는 가르쳐야 돼요. 
다시는 사탄의 노리개로 전락하지 않도록 가르쳐야죠. 
그런 걸 못하도록 하는게 사탄의 계략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누구를 공격할까요? 
사탄이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감히 공격할 수 있습니까? 판판이 지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 아닙니까? 
그럼 사탄은 교회의 지체된 성도를 공격합니다. 
교회가 무너져야, 사탄이 자기 왕국을 건설하니까요. 

그래서 교회는 매순간 영적 전쟁입니다. 교회가 평안하고 아무 문제 없는 거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선택의 순간마다, 매 순간 영적 전쟁이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내가 교회니까' 
정말 좋은 교회는, 교회 된 지체된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셔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바른 성도들이 되고, 
그 성도들이 모퉁이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 가는 건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그 교회가 강한 교회죠. 

건물 크게 지어 가지고 뭐할 겁니까? 땅 많이 사서 뭐 할 거예요?
진짜 강하고 진짜 견고한 교회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견고하게 서고, 
어떤 사탄도 우리를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말씀 위에 서 있는 교회가, 견고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원하시는 겁니다. 
바울이 지금 '사탄에게 속지 마라' 그럽니다. :11

엡4:27절에 바울이 아주 단순하게 얘기했어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사탄은 우리의 약한 고리를 파고든다 그랬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많은 교회, 엄격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용서를 하지 말라고 계속 가르칩니다.
계속 그 교회는 '법'을 강조합니다. 법대로, 법대로! 

근데 좀 선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 공동체는 사탄이 계속 '용서하라'고만 계속 얘기해요. 
그게 틈이에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해야 됩니다.

▲고후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 이후, 에베소에 되돌아와 
'눈물의 편지'를 디도에게 주어 고린도를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도를 보내면서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듯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마게도냐에서 만나기로 한 듯합니다. 2:13

바울이 드로아를 방문한 것은, 이 약속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나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되어 발생한 은장색들의 소동 때문에 
다소 약속보다 일찍 드로아에 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행19:23~41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드로아 방문의 목적은, 디도와의 만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 했죠.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 후, 심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디도를 통해 '눈물의 편지'를 보내고는, 그 결과가 상당히 궁금하던 상황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드로아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죠. *3차선교여행중  
물론 디도를 만나지 못한 불안 때문에 끝내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지만, 

복음 전하는 일을 최우선적 과제로 여기는, 바울의 사도적 소명은 대단히 강했죠.

▲고후2: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근데 이때 아직까지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이었죠. 바울이 사정을 모르고 있었죠.
세 번째 편지를 가지고 간 디도가, 아직 답신을 가지고 오기 전이었습니다.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아마 드로아에서 몇일 동안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된 기일이 되도록 디도가 도착하지 않자, 바울의 심령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복음을 전할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떠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납니다. 

이토록 바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두 가지 일 것입니다. 
1) 첫째, 고린도 교회에 대한 불안입니다. 
바울의 고린도 방문은, 그에게 슬픔만을 안겨 주었고, 
그리하여 두번째 방문을 취소하고, 대신 디도편에 '눈물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의 결과에 대한 불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직접 방문을 피하고 편지로 대신하였는데 2:1~3
그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거나 
지난번 방문 때 있었던 가슴아픈 일들이 치유되지 않고 도리어 더욱 악화된다면 
그것은 피차간에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2) 둘째, 디도의 도착이 지연되는 것이, 혹시 디도의 신변에 불상사가 발생했기 때문인가?  
염려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디도는 '눈물의 편지'를 전하는 일 외에도 
당시 기근으로 빈핍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강도들의 위협에 처할수 있는 일이었죠. 

이런 일로 인해 바울은 더 이상 드로아에 머무를 수 없어, 마게도냐로 떠나간 것입니다.
(당시 여행 경로상, 디도가 고린도에서 올 때, 마게도냐가 더 가까웠죠. 드로아보다)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이 이걸 극복하려고 얼마나 노력했겠어요?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 아닙니까? 
'이방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나님이 그를 불렀지 않습니까?  행9:15

그럼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인데, 
자신이 이것 때문에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디도를 만나는 게 너무 급해서,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마게로냐로 갔어요.
(대구에서 서울로 오는데, 서울에서 기다리다가 천안으로 내려간 셈. 빨리 만나려고)
 
이게 (고린도 교회의 배척) 자기한테는 굉장한 실패거든요. 
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으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스러울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찌하든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거예요. 
언제까지 내가 이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발목 잡혀 가지고, 
언제까지 저 인간들 때문에... 본질과 비본질도 구별하지 못하는 인간들 때문에... 
그것 때문에 근심하고, 염려해서 

진짜 내가 해야 되는 본질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살 것인가? 
이걸 고민하다가... 이거 붙들고 기도하다가... 그가 찾은 정답입니다. 
두 가지를 얘기해요. 

1) 하나는 '항상 이기게 하시고'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이기게 하다. 이기다'는 드리암뷰오 인데, triumph 라는 영어가 여기서 나왔죠. 
'개선행진을 이끌다'라는 뜻이에요. 

바울이 이때 묵상하다가 그가 딱 떠올린 장면이 있습니다. 
로마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행진을 떠올린 거예요. 
로마 장군이 적진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로마 시내에서 개선행진을 열어 주거든요. 

근데 퍼레이드 자격이 조금 엄격해요. 내전 상황에서 이기는 건 안 됩니다. 
다른 나라를 복속시키고 와야 돼요. 적어도 5천명 이상은 죽이고 와야 돼요. 
전리품도 정해진 양이 있습니다. 많이 가지고 와야 돼요. 
그리고 영토도, 일정 영토 이상을 확보하고 와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령관을, 로마 시내에서 개선 행진 퍼레이드를 시켜줍니다. 

어디를 행진하느냐? 로마 포럼(로마 공화정)에서부터
캄피돌리오 광장까지 갑니다.  
로마에서 가장 핵심되는 시청 청사가 있는 그곳까지 행진시켜 줍니다. 
즉 로마 시내 한 가운데를 행진하게 해줍니다. 

행진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제일 앞에 로마의 관리들과 원로원이 섭니다. 
원로원 할아버지들이 먼저 행진합니다. 

그 다음 그 뒤를 나팔수들이 따릅니다. 승리의 나팔을 불죠.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자들은, 전리품을 들고 따르는 종들입니다. 
'이만큼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는 거죠. 

그리고 그 전쟁에서 쓰인 무기를 사람들이 들고 또 갑니다. 
만약에 해전에서 이겼다면, 그 배의 작은 모형을 만들어서 메고 갑니다. 

그리고 그 뒤를 로마의 제사장들이 따릅니다. 
제사장들과 함께 따르는 무리들 중에는, 화동도 있고 여자아이들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제사장과 함께 다니면서 꽃을 뿌립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향을 피웁니다. 

2)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2:14
그걸 비유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얘기한 거예요. 
바울이 그 냄새를 얘기한 거예요.

그럼 그 냄새가 로마시내 전역에 퍼져나갈 것 아닙니까? 
그럼 그 뒤에 제사장과 화동들 뒤에, 4마리 백마가 끄는 화려한 마차에 사령관이 않습니다.
승리를 가지고 온 사령관이.

그리고 그 사령관의 마차 뒤에, 사령관의 가족들이 따릅니다. 이게 개선행진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개선 행진을 바울이 생각한 거예요. 
자 인간들이 싸우는 전쟁에서, 그까짓 영토 좀 확보하고 왔다고,
이 땅에서 이 정도 퍼레이드를 해주는데... 

'나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 아닌가? 
나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사람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1차선교여행, 2차선교여행, 3차선교여행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수많은 악한 사탄 마귀를 땅에 떨어지게 하고, 
결국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 돌린 하나님의 전사 아닌가!'  

'그러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 정도 개선행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개선의 행진이 저 하늘에서 열리고 있을 것이다...' 바울이 이걸 생각한 거예요. 

이걸 깨닫게 되니까,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간에 이런 복잡한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느낌 아세요? 

우리가 삶의 자리가 힘겨울 때, 참 버티기 어려울 때, 
맨날 누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맨날 거기에 휘말려 가지고, 죽느냐 사느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막 그렇게 살 때 
이런 걸 상상해 보세요. 

'아, 내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나를 개선 장군처럼 
백마가 끄는 마차에 나를 태우시고 
하나님께서 천국 12 진주문을 통과하게 하시고, 유리 바다 같은 벽옥 같은 천국에서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시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거다...' 
이걸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복음 전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는... 이 쓸데없는 나... 이 자기 연민에 가득 함몰된 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 
그 승리 퍼레이드의 향기를 풍기며 나는 살겠다...

 

(나중에 디도가 와서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만납니다. 좋은 소식을 갖고 왔어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서 쓴 편지가, 본서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빌립보에서 썼죠.

이런 낙관적 미래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통해, 미리 감동해 주신 것이죠!) 

이제는 앞으로 내가 가는 곳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겠다... 
그러면 '이 문제가 해결되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본질적으로 자기가 해야 될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라본' 즉 성령이 나에게 보증이 되셔서, 
끝까지 나를 이끌고 가실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냄새. 향기'가 나오는 겁니다. 

▲고후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하나님의 향기! 그렇죠. 
이 땅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았습니다. 

근데 망하는 자들에게도, 구원받는 자들에게도.. 똑같은 향기였어요. 
복음을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죽을 때까지 안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사망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향기' 
'향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오디아'는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죠.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삶은 그가 롬 12:1에서 말한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희생 제사와 같은 것이었죠. 

그는 하나님의 종이자 예수의 삶을 연장하여 사는 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과 핍박을 당하였고 죽음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전해진 바울의 복음 전파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부분적으로는 거부되었습니다. (행 17:32)
이러한 받아들임과 거부의 차이는 종말론적 차이로 나아갑니다.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나, 거부하는 자들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고후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근데 그 향기가 그런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겁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겁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나 아니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것처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이제 나는 여기에 드러누워 있을 시간이 없다. 다시 일어나서 복음 전하는 자가 되겠다.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으나, :12
여기(고린도교회 문제)에 마음이 쓰여서 복음 전하지 못한 자기를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이 복음전하는 일을 다시 감당하겠다.' 
로마의 사령관이 그 빛나는 행진을 하는 것,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의 개선행진을 기대하고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희망을 본 것입니다. 

바울에 의해 선포된 하나의 설교가 두가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의 향기인 바울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악취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이것은 바울이 적대자를 염두에 두고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자신만만해 있었죠. 
그러나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름하는 중대한 사역을 
인간적인 자격이나 능력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고후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그래서 바울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혼잡하게 하다' 라는 말은 카펠로스, 구매자를 속여 모조품을 파는 잡상인, 
참 바울이 단어 선택도 기가 막히게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잡상인처럼 팔아치우지 않겠다' 
잡상인은 구매자를 속여서 모조품을 받은 사람인데,
복음을 가지고 자기 잇속을 취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복음을 가지고, 자기 돈놀이하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자기 권력을 더 키우려고 하는 사람들, 그걸 가지고 치부하려고 하는 사람들, 
그걸 가지고 권세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의 결단이에요. 여러분, 복음이 있죠. 복음이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통로입니다. 

그 아래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통로가 되어서 
복음이 바울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가는 거예요. 

그럼 바울은 순전한 복음을 전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리고 바울은 순전한 삶을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말씀으로도 순전한 말씀을 전해야 되고, 
혼잡지 않은 말씀을 전해야 되고, 
삶도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걸 결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될지를 깨닫고 다시 한번 살피시면 좋겠습니다. 

조금 복잡한 말씀이고 어려운 말씀인데, 한 번 더 읽어보시고 살펴보시면,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