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행2장 교회다운 교회

LNCK 2025. 3. 18. 10:2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교회론

사도행전 강해 (13) / 사도행전 2:42~47 / 교회다운 교회 - YouTube

 

교회다운 교회            행2:42~47              2022.01.16.   사도행전 13강

◑도입

지난 시간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봤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찔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회개는, 단순히 입술의 회개가 아니었죠. 마음과 삶을 돌이키는 참된 회개였습니다. 
죄를 향해 걸었던 사람이, 하나님께 마음과 삶을 돌이키는 회개였습니다. 

이 회개를 거쳐서 신약의 첫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신약의 첫 교회는, 모두가 회개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12강 보기

그리고 이 회개로부터 시작된 처음 교회의 모습을, 성경은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습니다. 

이 당시에 이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반응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반응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를 아낌없이 욕하고 있습니다. 
욕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하는 다소 비아냥거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처음 교회를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한 오늘날 세상의 반응과는 너무나도 다.른데요. 

43절에 보시면 교회의 모습을 본 '사람들마다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요, 이들이 교회의 안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자기들과 다른 뭔가가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뭔가가 뭘까요? 바로 거룩함이었습니다. 
교회를 보니 그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거룩함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 거룩함(다름, 구별됨)에 세상이 압도되었던 거죠. 

'저들이 믿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저들이 우리와 다르게 사는 걸 보니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는 게 맞는가 보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또 다른 두려움을 느꼈는데요. 
'나 같은 사람이 저렇게 거룩한 모임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 경애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누구를 보고요? 오순절에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를 보고요.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을 보고요. 이런 경건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47절을 한번 보십시오. '온 백성이 교회를 칭송했다'고 말합니다. 
여기 온 백성도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온 백성이 교회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칭송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향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47절 하반절을 한번 보십시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워딩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단순히 사람이 날마다 더해진 게 아닙니다. 
단순히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진 게 아닙니다. 
단순히 예배를 참석하는 숫자가 많아진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를 다녔다가 옮기는, 수평 이동하는 사람이 많아진 게 아닙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불신자가 전도가 되었다는 말이고요. 
그 전도된 불신자가, 하나같이 회심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 날마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날마다 회심의 역사가 있는, 새 생명으로 낳아진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모습입니까? 모두가 꿈꾸고 소망하는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겠죠. 
'대체 처음 교회는 어떠했길래, 이런 결과가 있을 수 있었을까?' 

처음 교회와 오늘날 교회의 다른 차이점이 대체 무엇인가? 
그 차이점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 모습은,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습입니다. 

특별히 누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한 절로 요약합니다. 그 요약된 구절이 42절인데요. 
행2:42절을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2:42

누가는 오순절에 탄생한 처음 교회를 한 절로 요약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은, 그 날 하루만 이렇게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들은 매일 그렇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요약된 42절의 내용을, 43~47절까지 이제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42절에서 조심해야 할 번역이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힘쓰니라'는 동사가 어디에만 붙어 있죠? 기도에만 붙어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래서 언뜻 읽으면, 
'초대교회는 무엇보다 기도에 힘썼구나' 아니면 '기도에만 힘썼구나' 
이렇게 읽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을 보면 다릅니다. 헬라어로 보면 
'힘쓰니라' 라는 이 동사가, 문장 제일 첫 머리에 나옵니다. 
'힘쓰니라'는 이 동사가, 다른 모든 표현들을 지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힘쓰니라'는 동사에, 다른 모든 표현들이 다 걸립니다. 
'힘쓰니라'가 문장의 본동사이고, 나머지 4개는 명사구인 거죠.     주1)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힘쓰니라 서로 교제하는 일에,    
-힘쓰니라 떡을 떼는 일에,        
-힘쓰니라 기도하는 일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힘을 쓴 것은 기도만이 아니라는 거죠. 
총 네 가지가 되는 거죠. 
가르침을 받는 일, 교제하는 일, 떡을 떼는 일, 기도하는 일에 힘쓴 것입니다. 
이 네 가지가 초대교회가 붙잡았던 교회의 본질입니다
하나씩 간략하게 한번 살펴볼게요. 

▲1. 첫 번째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데> 힘썼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말씀을 배우는 것에 가장 힘썼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교회에 나가면,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거지... 
설교를 듣는 거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분위기를 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 이들은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뜨겁게 체험한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로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학습하지 않은 외국어 방언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성령의 체험입니까? 

그리고 외국어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했습니다. 
외국어 방언으로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했던 거죠. 
그리고 이때 세계 각처에서 온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걸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상상도 못할 일들을 경험하고 목격한 거죠.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기적과 표적을 보았구요. 수많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았습니다. 

 

자 그러면 당연히 이들의 관심이, 성령의 외적 은사에 꽂힐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들처럼, '우리도 방언을 주옵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불로불로' 
막 그렇게 하면서 성령 운동에 매달려야 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분들이 
성령 운동 쪽으로 가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지금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죠?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 들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요한복음을 보면서 계속해서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이적을 봐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고침을 받고 기적을 봐도요, 사람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풀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제일 우선되는 핵심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도행전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사도행전... 그러면 주로 기적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수많은 기적이 나오긴 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나오고요.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도 나오고요. 
심지어 유두고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도 나옵니다. 
이런 기적과 이적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도행전에 가장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설교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사도들의 설교뿐만이 아니라, 빌립과 스데반 같은 그런 분들의 설교가 나옵니다. 

특별히 스데반의 설교는요. 굉장히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설교하다 죽었는데, 죽은 이유가 '설교가 길어서 돌에 맞아 죽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그만큼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우선적인 핵심은,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였습니다. 

특별히 여기 '가르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다케 라는 단어인데요. 
번역하면 교훈 혹은 교리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특별히 교리를 배우는데 힘썼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리교육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교리를 굉장히 열심히 배웠습니다. 

특별히 초대교회 가운데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당시 이방인들은,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론의 문화에 속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교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설교는, 하나같이 사도적인 가르침, 교리에 근거한 설교였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묵상 위주의 주관적인 설교나, 예화 중심적인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에 기초한, 건강한 신학이 담긴 설교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들의 심령에는 성경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생명을 주었던 거죠. 
이 사도적 가르침이 초대교회의 첫 번째 생명의 원동력이었습니다. 

▲2. 두 번째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힘 썼던 것은 <서로 교제하는> 일에 힘썼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뿔뿔이 헤어진 게 아닙니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요. 
서로 나누는 교제와 사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로 치면, 다락 모임을 열심히 했던 거죠. 

이 사귐과 교제가 바로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두 번째 본질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절대로 혼자 산속에 들어가서 불교처럼 득도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깨달으면 자라고, 득도하지 못하면 자라지 못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반드시 내 옆에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자라가는 종교입니다. 

여러분 혼자 신앙에 자라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공동체 안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사귐이 없으면 
기독교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자람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여러분들보다 연약한 지체들을 받아주고 
때로는 기다려주고, 그들의 연약함과 허물들을 때로는 못 본 척 가려주고 
때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으로 권면해 주면서 
언제나 같이 자라나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산으로 가서, 하늘이 두 쪽이 나는 엄청난 체험을 한다 해도
그게 여러분의 영적인 수준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수준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가(사랑하는가)가, 여러분의 영적인 수준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그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죠. 
여러분이 신비한 자리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 아닙니다. 

성경은,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말하는 영성의 표지는, 경건의 표지는 ...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특별히 내 옆의 지체를 대할 때,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갈라디아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다 관계적인 열매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귐과 교통이 없는 성도는, 절대로 건강한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락 모임에 힘써 참여하셔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너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46절에 보면,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말합니다. 
'또 집에서도 모이기를 힘썼다'고 말합니다. 
성전이든 집이든 그들은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더불어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자라야, 그게 진짜 건강한 자람입니다. 
여러분의 자람(성장, 성숙)은 언제나 공동체와 함께 아니면, 절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 성도의 교제와 나눔이, 초대교회의 두 번째 원동력이었습니다. 

▲3. 이어서 세 번째 초대교회 성도들이 힘쓴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떡을 떼는> 데 힘썼다고 말합니다. 

여기 '떡을 떼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찬이고요. 하나는 애찬입니다. 

애찬은 같이 밥을 먹는 거죠. 
이 두 가지가 다 떡을 떼는 일입니다. 

그런데 46절을 보면, 이들이 떡을 뗀 장소가 교회만이 아닙니다. 
이들은 집에 가서도 떡을 뗐다고 말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성도들끼리 식탁의 교제(애찬)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예배당과 가정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배당의 신앙이 그대로 가정의 신앙의 모습이었고요. 
가정에서의 신앙이 그대로 예배당 안에서의 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예배당과 가정이 일관성이 있던 거죠.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신앙의 현장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의 일터도 신앙의 현장이지만, 가정이 반드시 신앙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당만이 여러분의 신앙의 현장이고, 가정은 세상의 원리로 살아가면 
그게 신앙의 외식인 거죠. 여러분의 가정도 신앙의 현장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 교회가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정 예배를, 꼭 한 주에 한 번은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만일 가정 예배를 함께 드릴 사람이 없다면, 꼭 혼자라도 시간을 정하십시오. 
시간을 정해서 매주에 한번은 가정에서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가정이 되도록, 
이 가정이 신앙의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 여러분의 가정에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대통합예배를 드리고 있는데요. 
꼭 가정에 돌아가셔서 설교 말씀을 자녀들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설교 노트를 나누어 드렸는데요. 
여러분 냄비 받침으로 쓰지 마시고, 꼭 말씀을 기록하고 가정에서도 자녀들과 
함께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없으면 남편이나 아내와 나누시고, 안되시면 혼자라도 그 말씀을 가정에서 
다시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가정이 꼭 신앙의 현장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가정들이 모인 교회가, 함께 건강하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4. 네번째 초대교회 성도들이 힘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열심으로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지혜와 경험으로 교회를 세운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열심이 있었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열심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지혜가 있었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지혜뿐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이 순서를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 42절을 다시 보시면 '사도들의 가르침'이 제일 먼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교제'가, '떡을 떼는' 일이 쭉 나오고요. 
그런데 맨 마지막에 '기도'가 나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기도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뒷받침이 없으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순서가, 우리가 살펴봤던 에베소서에서도 그대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요. 전신갑주가 나옵니다. 
영적 전투를 치르는 성도가 승리하기 위해 입어야 할 전신갑주가 쭉 나옵니다. 엡6:14~17

거기 보면 제일 마지막에 무엇이 나옵니까? 기도가 나옵니다.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모든 영적 전투의 장비를 갖추어도... 기도가 없으면 허사라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기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레이븐힐 목사님은 <기도하든지 죽든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여러 부분에서 가난에 시달린다. 하지만 가장 빈곤한 분야는 기도 분야이다. 
주변에 수많은 교회들을 보라. 조직하고 관리하는 사람은 많지만 
처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을 내는 사람은 많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찬양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러분 이 지적은, 가슴 아프지만 우리 교회도 피해갈 수가 없겠죠. 
그래서 제 바람으로는, 여러분 모두가 되도록이면, 기도의 자리에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아시다시피 기도를 공로주의나 율법주의로 절대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한 만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그렇게 기도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세상 종교의 기도의 가르침이죠.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이 누구보다 기도의 자리에 힘쓰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사귐의 자리가 기도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모든 성도가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정리하면 

이 네 가지가 초대교회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본문을 읽다 보면, 오늘날 교회와 큰 차이가 있습니까? 

사실 겉으로만 보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보다 훨씬 더 단순합니다. 
특이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들이 없습니다. 

성도들을 사로잡을 만한 뭔가 색다른 프로그램이나 
동기를 부여할 만한 눈에 띄는 이벤트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 보면, 처음 교회를 '단순한 교회'라고 부르더라고요. 
우리가 보기에도 너무나도 '단순한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실 도입할, 어떤 새로운 모델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실 오늘날 이 교회가 다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이 네 가지를 온전히 힘 썼던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리를 배우되, 다 같이 배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도적 가르침을 배우는데, 한 마음으로 온 교회가 따랐습니다. 

우리는 모이되, 힘써 다 같이 모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교제하는 일에 한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썼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지만, 온 교회가 힘써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 교인이 기도하는 자리에 함께 참여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만으로도, 사실 우리에겐 너무나도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죠. 
우리 또한 이런 교회의 모습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늘날 교회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도 이런 요소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요.소들을 지금도 열심히 추구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런 반응을 오늘날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를 두려워 하더라.. 교회를 칭송 하더라..'   2:43, 47
여러분 이런 반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자 그렇다면, 대체 무슨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요? 
자, 그 결정적인 차이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특이한 것이 하나 있는데요.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 묘사에서 특이한 묘사, 특별한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본문 2:44~45절 말씀인데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여러분, 첫 교회의 특징을 어떻게 묘사하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첫 교회의 특징을, 누가는 뭘로 묘사하죠? 물질의 나눔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잡아야 될 게 있는데요. 

이 구절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그런 정치체제의 색깔을 드러내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유재산의 보유를 보호하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8th

이 구절도 한번 보십시오. 누구도 이들에게 강제로 재산을 내라고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집문서 갖고 와서 우리도 다 나눠갔자... 누가 명령한 게 아닙니다. 
전부 다 하나같이 자발적인 나눔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 두 채 가진 사람들이, 남는 한 채를 팔았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중요한 동사의 시제가 있는데요. 
45절에 보면 '팔았다'라는 동사가 나오고요. '나눴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요. 이 동사들의 시제가 둘 다 미완료 시제입니다. 
완료되지 않은 거죠. 한 번에 다 판 게 아니라는 것이죠. 
한 번에 다 나눈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마다 필요한 만큼 팔고,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어떤 사람이 나서서,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서 도와줬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밑에 46절을 한번 보십시오. 이들 모두가 다 집을 판 게 또 아닙니다. 
46절에 보면 '집에서 떡을 뗐다'고 말합니다. 
여기 집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각 집마다' 라는 뜻입니다. from house to house
그러니까 집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모두가 다 집을 판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초대교인들이 물질을 공유한 것은, 공산주의와 다릅니다. 
모든 성도들이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하고, 
또 교회는 받은 재산을 모든 성도들에게 일률적으로 다시 배분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강제로 모든 재산을 공유한 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재산을 팔고 물건을 나누었는가요? 

지금 이 당시는 여러 나라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들어온 시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을 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거죠.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계속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상태입니다. 

여기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진짜로 믿고, 신앙생활을 함께 했었던 거죠. 
그러니 그들이 가지고 온 여비나 경비가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장 외국에서 직업도 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먹고 살 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과 소유를 팔아 그들을 도와줬던 것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구약에 보면, 어떤 말씀들이 있죠. 
'나그네와 고아와 가난한 자와 이방인을 대접하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들은 최대로 지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들은, 회심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2:37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정말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제대로 지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와 재산을 팔아서, 그 말씀을 순종하는 의미로 이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처음 교회가 공동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구절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구절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도 재산을 다 팔아 서로 나눠 가져야 한다는 그런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분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들은, 물질의 노예에서 벗어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 이상 이들은, 이전처럼 물질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영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더 이상 이들의 주인은, 물질이 아니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언제나 세상의 사람들에게, 돈이 신입니다. 그들에겐 돈이 하나님입니다. 
돈이 가장 큰 힘입니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래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라고 하지 않습니까? 딤전6:10
실제로 주님도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위 구절에서 '재물'은, 그저 물질이나 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헬라어 원전에는 '맘몬'으로 나옵니다. '물질의 신'인 거죠.

성경은 물질을, 그저 물질로만 보지 않고, '물질의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이라는 거죠.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사실 모든 인생이 추구하는 가치는 돈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이유가 무엇이죠?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때문이고, 그래야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죠.

결국에는 돈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결국에는 돈이 자기들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는 거죠.

◑적용
 
돈이 모든 사람의 인생의 주인입니다. 돈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올라가 있는 거죠. 
실제로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돈으로 직분을 살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장로가 되는 시대이고요. 
심지어 교회에서 하는 수많은 재정 세미나를 보십시오. 

어떤 '재정 세미나'의 내용도 잘 보면, 결국 돈의 탐욕을 죽이는 게 아니라
결국 돈의 축복을 받기 위한 재정을 가르치고 있더라고요.  
모든 세상의 사람이 하나같이, 결국 돈이라는 신에 붙잡혀, 그 신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들은 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한 이들이 있을 때, 언제든지 자신의 물질을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특별히 '팔다'라는 시제가 미완료 시제잖아요. 한 번에 싹 다 판 게 아닙니다.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팔았다는 것입니다. 

돈을 누구 하나 움켜쥐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돈이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참된 회개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2:37

내 삶을 다스리는 주인이 하나님의 한 분이라는 그 돌이킴의 고백을 
실제로 거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물과 소유를 팔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죠. 

자신들의 피로를 채워주시는 분이, 돈이 아니라 맘몬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진짜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물질의 나눔으로 지금 고백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회개를 거친 첫 교회의 모습을, 물질의 문제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들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셨다는, 그 회개의 열매를, 물질의 회심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신이 섬기는 (물질의) 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켰다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섬겼던 우상이 깨어지는 정점이 
바로 돈이라는 만몬이라는 신,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했던 여러분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갑이 회개하지 않고는 누구도 회개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교회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요소였던 것입니다. 2:43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만큼은, 세상의 어느 공동체도 감히 흉내를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그 거룩한 모습이,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신에 지배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신이라고 믿는 물질에 있어서 만큼은, 교회가 노예가 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의 필요를 따라 재산을 나눠주고, 물건을 아낌없이 나눕니다. 
소유의 탐욕과 이기적인 마음이,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사로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몇몇의 사람만 그런 게 아닙니다. 목사나 장로만 그런 게 아니라요. 
회개를 거친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죠. 희한한 모습이고요. 놀라운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의 종자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본 세상은 경건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저들을 보니, 하나님이라는 신이 정말 살아계신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 거룩한 무리에는 자신들이 낄 수 없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세상은, 돈이라는 맘몬의 신을 도저히 버릴 수 없으니까요. 
그들의 이기적인 부패한 본성으로는 그게 불가능하죠.

그리고 한편으로 동시에 그런 교회를 칭송하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2:47
이것이 바로 처음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에 반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는 초대교회 같은 네 가지의 요소가 겉으로는 다 보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교회는, 세상이 보는 앞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모입니다. 
한국교회처럼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

리고 떡을 떼는 성찬을 나누고요. 그리고 뜨겁게 기도합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처럼 '주여 삼창'하는 교회들이 세상에 또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처럼 열심인 성도들이 없습니다. 너무나 귀한 모습들이죠. 

여러분 얼마나 예배가 많습니까? 외국에선 없는 새벽기도가 날마다 있고요. 
수요예배도 있고요. 금요철야예배도 있고요. 
요즘에는 또 무슨 토요일에 직장인들을 위한 예배가 있고요. 예배가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보다 훨씬 더 예배가 많습니다. 모이기에 더 힘쓰고 있는 거죠. 
그러나 세상은, 이것들로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이것들로 교회를 칭송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들어보셨나요?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관점으로 그 대답을 보면, 그들 세상과 다름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거쳐야 참된 회개의 돌이킴이 우리 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전히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 눈에 '하나님이 없다'고 보이는 거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거죠. 
'저들도 우리와 같이 똑같이 맘몬에 붙잡혀 있구나' 하는 거죠.

이 점에서 우리는,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물질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좇고, 무엇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물질의 소유 자체를 정죄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번다고, 절대로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의 축복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전적인 축복을 즐거워하는 것에 대해서도,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여러분 물질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러면, 불교처럼 다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아야 하는 거죠. 

그러나 물질이 우리의 주인은 아닌지 여러분 정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필요가 아닌 욕심에 붙들린 삶은 아닌지 돌아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똑같은 물질이라는 신을 동시에 섬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지키는 안전의 원천이, 돈에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이 상황이 될 때, 노후를 적절히 준비하는 것을 저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 때문에, 교회 안에 누군가를 도울 일이 외면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47절 하반절인데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은 자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2:47b

단순히 수적인 성장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더해졌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회심의 역사가 날마다 있었다는 것이죠. 
교회가 교회다웠을 때, 하나님이 그 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영혼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회가 교회다웠을 때, 그 교회를 보고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돌아가자 외치던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우리 안에 이런 교회의 모습들 하나씩 회복되고 구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가르침을 받기에 힘쓰는 교회, 그리고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
그리고 떡을 떼며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가정이 여러분의 신앙의 현장이 되는 교회고요. 
그리고 기도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참된 회심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회개의 열매가, 물질의 회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증거를 나눔을 통해서, 세상 앞에, 맘몬신을 섬기는 세상 앞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교회를 보면서, 경건한 두려움을 느낌과 동시에 칭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때 
우리를 통해 구원받은 자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은혜가 우리 교회 위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주1) 행2:42절의 '힘쓰니라'
'힘쓰니라' 헬라어 '엔'은 '계속했다'는 뜻입니다. continue   *미완료 3인칭 복수
어어지는 단어 proskartereo 는 '꾸준히'죠.
그러니 '꾸준히 계속했다'는 말을, 개역에는 '힘쓰니라'로 번역했습니다.
they continued stedfastly : KJV
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 NA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