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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3장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LNCK 2025. 3. 18. 18:4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리더쉽, 목회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사무엘상13:13-23) 2025.03.16 - YouTube (정리)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삼상13:13~23          2025.03.16.   사무엘상21강

오늘 말씀을 나눌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정예정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던 그 사울왕에게 
사무엘이 하나님의 징계의 메시지를 던지고 떠나는 장면입니다. 

◑삼상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임박한 전쟁에 대한 압박감이 너무나 컸죠. 
그래서 사울은 두려움 가운데, 그것(제사 집전)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절박한 선택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사무엘은 당시 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 주1)
'어떻게든 하나님께 승리의 징표라도 받아야 되지 않나?'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왕인 자기가 주도해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에 설교 때 나눴는데 
여러분, '내가 정말 너무 죽을 것 같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그냥 죽어야 합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대처해 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근데 확실히 유튜브 설교 제목이 별로 은혜롭지 않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많이 안 봐요. 그거 들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사람이 죽을 것 같은 그 긴장감 때문에 지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그런 때는 그냥 내려놔야죠. 

'내가 긴박하다'고 두려움 가운데 판단하거나, 쫓겨서 결정을 하면 
반드시 낭패를 보게 돼 있어요.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고요. 

그래서 오늘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첫 마디가 무엇이냐면 
'왕이 망령되이 foolishly 행하였다' 여러분 '망령되다' 라는 뜻이 무엇인가요? 
'당신 제정신으로 한 게 아니다' 라는 뜻이죠. 
'망령되다'는 foolishness 라는 뜻입니다.  *사켈

성경에서 같은 표현이 나오는 구절을 찾아보면, 
삼상26:21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창31:28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한 사람은 굉장히 억울하겠지만 
우리가 그 사기당한 당사자가 힘들어하는데 이런저런 얘기하기 그렇지만, 
사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거죠.  
두려움과 압박감에 시달려서 잘못된 선택을 한 거예요. 

그런데 오늘 '망령되이' 라는 단어를 지금 계속 얘기하고 있는데, 
히브리 원어상의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다' 라는 뜻이 들어있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지혜를, 내가 스스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울이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은 맞지만, 하나님의 지혜까지 버렸다.고 말할 수 있나요? 
사무엘이 그래서 13절에 부가적으로 뭐라고 설명하냐면 
'당신이 망령되게 행하였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제사는, 제사장이 집례하기 되어 있는데, 왕이 법을 어기고 월권을 한 것입니다.
그게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거죠.

민16:40 '...아론 자손이 아닌 다른 사람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또 고라와 그의 무리와 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웃시야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유다에 황금기를 가져왔죠. 그러나 말년에 그는 
교만해져 제사장만이 수행할 수 있는 분향하는 일을 하려다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병에 걸려서, 그 길로 퇴위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

회사 다니시는 분들은 아실 것 같아요. 
상사의 명령도 어기고, 회사의 지침도 어기고, 단독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더 나은 판단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본인이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영적 관점에서 놓고 보면, 사무엘은 사울왕이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은, 
자기가 판단하겠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저버린 격이 된 것이다' 
이 얘기를 한 거예요. 

에덴 동산에서 두 개의 실과 나무가 있었죠. 선악과와 생명나무. 
여러분 선악과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것은 생명나무 실과인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보다 똑똑해서 '내가 스스로 판단하겠다' 
하나님의 명령조차 어기고 '선악은 내가 판단한다' 
그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사라지게 된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분, 약속의 땅이 들어가면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아야 됩니다' 누차 권면하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했어요. 

신4:5~6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여러분, 이걸 준법정신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지혜와 지식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임기응변에 능하고, 시류를 탈 줄 알고, 적당히 편법도 쓸 줄 아는 사람들을 
지혜롭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에서 영성이 무너지면, 도덕성이 무너지게 돼 있고, 
도덕성이 무너지게 되면, 여러분이 세상적인 표현으로 온 세상의 기운을 다 끌어서 
쓴다 할지라도, 당신이 원하는 행과 운, 행운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쉽게 얘기를 하자면, 저는 축구를 좋아하는데, 축구 경기를 하다 보면 
그날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날 운이 따라야 된다' 이런 얘기 많이 해요. 
그래서 실력적인 요소도 있지만, 플러스 알파(운)가 있죠.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선수나 어떤 팀이, 경기 규칙 자체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래서 심판에게 퇴장 명령을 당하거나, 몰수패를 당하게 되면, 
여러분 그날은, '행운이'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가 가진 실력, 그가 쏟아부었던 노력 아무런 의미가 없이 다 사라지게 된다고요. 
 
제가 아까 읽어드린 신명기 말씀을 보면, 한 달 내내 모세가 사랑의 잔소리를 한 내용이에요. 
제가 지금 잔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것은, 말씀을 생명처럼 지키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매학기 "보라통독" 심화과정, 또 기본과정을 하는 것이 참 좋다고 생각이 돼요. 
왜냐하면 성도님들이 성경 자체를 읽고 듣는 시간을 갖는 거잖아요. 

우리가 어떤 학문을 공부하든지, 어떤 언어를 배우든지, 
기본적으로 먼저 읽고 듣는 것이 있어야만, 그 세계가 깨우쳐지고 펼쳐지는 것이거든요. 

솔로몬이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왕상3:9~10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이 일천번째를 드리고서, 왕으로 집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역대기에는 '지혜를 구하였다'고 되어 있고, 
열왕기상에는 똑같은 기도문인데 '듣는 마음을 구했다' 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혜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을 먼저 듣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에게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 지혜의 세계가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러면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사울왕은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사울왕은 하나님께로부터 전혀 들을 마음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세 가지로 정리를 해보면 

 

1) 기도하고 수립한 계획이 처음부터 아니었다는 것 
2) 그리고 기도하고 실행한 작전도 아니었다는 것 
3)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 진정성 있게 기도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요구하고 원하는 건 많아요. 승리를 원합니다. 또 성공을 원합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원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명예를 원하기도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들을 마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오늘 새가족반을 인도하는데, 한 분이 그런 얘기 하시더라고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원하는 게 있는데, 하나님이 안 해줄까 봐 
이게 걱정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또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거예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성경에 이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몰라요. 

여러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많은데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매번 들어도 안 들린다는 거예요.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사람은, 이게 안 보인다는 거예요. 
우리와 사울이 많이 다를까요? 

사무엘상을 보면서, 여러분의 신앙과 인생이 성장하려면 
한 가지 인정하셔야 될 게 있는데, 
내 내면의 절반은 다윗이고, 절반은 사울이라는 거예요. 

대부분 '저 악한 사울에게 내가 당하는... 나는 불쌍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 이렇게 묵상하지,
'내 절반은 사울이다!' 이렇게 묵상들을 안 해요. 

그래서 내가 안 고쳐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게 변화가 안 일어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도 사울처럼 망령되이 행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네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절박한데,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안중이 없는... 
'하나님 나한테 뭘 원하시지?'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내 자식이 입시에 성공하는 것이,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야, 너 주일날 특강 있는데, 학원 가야지 무슨 교회를 가니?' 
자식이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해지면, 
사울과 우리가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예요. 

왜요? 내가 원하는 건 너무너무 절박해요. 너무나 중요한 내 삶의 우선순위예요. 
근데 하나님이 내 인생에 뭘 원하시는지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지혜는 떠나게 돼 있습니다. 

저를 따라해보세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를 제게 주옵소서!' 

일단 억지로라도 따라했으니까, 우선 말씀의 원리대로 규칙을 지키세요. 
그리고 나서 자유롭게 경기를 하시면 되는 거예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세요. 우선 예배의 자리를 지키세요. 
우선 하나님께 시간과 건강과 재능과 물질을 먼저 드리고,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사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자유를 많이 주셨는지 몰라요. 

가령 어떤 사장님이 매니저를 세웠어요. 여러분 우리가 청지기(매니저) 인생이잖아요. 
매니저가 열심히 일한다고... 사장님하고 미팅도 안 나와요. 사장님 전화도 안 받아요. 
그리고 자기 혼자 열심히 일해요. 그 매니저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나요? 오래 못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청재기들인 줄로 믿습니다. 

◑삼상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제가 14절을 딱 보면서 질문이 생겼어요.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 사울이 즉위 2년 차예요. '그러면 한 5년 하다 끝나나? 10년 하다 끝나나?' 

사울이 몇 년 했어요.? 무려 40년을 재위에 있었거든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1) 첫 번째 떠오른 인물은 가인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나서 '너는 땅에서 유리방황하는 인생이 될 거다' 
이렇게 얘기하셨는데, 가인은 성을 세우고, 성에 들어가 정착해서 살았거든요. 
그럼 유리방황 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는 신앙적인, 영적인 유리방황을 한 것이죠. 

이거를 사울의 인생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영적으로 그 날이 길지 못했죠)
사울이 계속해서 왕권을 내려놓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서 떠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얼마나 불안불안합니까? 

2) 사울이 여전히 왕자에 앉아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제 곧 등장할 다윗에게 실제적인 리더십이 넘어가게 돼요. 

이거는 제 해석이 아니고, 성경의 해석입니다. 
다윗이 최고의 장수가 되었다가, 도망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내용이 
삼상 21장 후반부에 나오는데, 블레셋 사람들 가드왕 아기스 앞에 딱 섰을 때, 
가드 왕의 신하들이 뭐라고 얘기하는 줄 아세요?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닙니까?' 이렇게 얘기해요. 삼상21:21
그는 장수였지, 왕이 아니었어요. 왕은 사울이었잖아요. 
그런데 이미 주변국에서는, 다윗이 실제적인 리더라고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에서, 지금 여러분이 익숙한 그 자리를 버티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아니에요. 여러분 '익숙한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부르심의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인가요? 

▲사울의 인생을 지금까지 우리가 쭉 봐왔잖아요. 
21강까지 오시면서 좀 정리를 해보면, 사울이 청년일 때 
제비를 뽑아서 '당신은 왕이 될 거다' 해서 기름부음을 받았어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제비 뽑힌 자는 사울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디에 숨어 있었어요? 
짐보다리(성경에 '행구') 뒤에 숨어 있었어요. 삼상10:22

그는, 자기의 익숙한 자리를 떠나서, 왕이라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두려웠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왕의 자리에 오르니까, 또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두려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이러나 저러나 이 사람 사울은 권력을 내려놓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은 몸이 가벼워야 합니다. 체중을 빼라는 얘기가 아니라, 
마음이 가볍고 몸이 가벼워서, 주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여기까지다' 그러면 과감하게 그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돼요. 

구름기둥이 일어나면, 따라가는 것이고 
구름기둥이 멈추면, 거기 머무는 것입니다. 굉장히 간단하잖아요. 

그런데 이 간단한 걸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광야를 돈 거잖아요. 
왜 그걸 못할까요? 내가 하나님보다 중요한 거예요. 
내 익숙한 안전지대를 떠나기가 두려운 거예요. 

사울의 인생을, 이 관점에서 보니까, 
그가 왕좌에 오를 때는, 그게 또 익숙하지 않아서 두려워 숨었고, 
이제 왕자에서 내려오는 것이 또 두려운 거예요. 
결국에 이 사람은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가기가 두려웠던 거예요.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 믿어요. 하나님께 예배도 드려요. 
근데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지, 하나님 주인 되시고 내가 따라가는 거,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게 두려운 거예요. 

여러분, 교회 사역에 대해서 콜링이 올 때, 몸을 가볍게 하세요. 
제가 어떤 분들에게 '새벽 싱어로 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어, 저는 노래를 못하는데요...' 

'괜찮습니다. 저희가 볼륨을 좀 줄여드리겠습니다' 
그럼 그 분이 저를 째려봐요. 

제가 어떤 분에게 '순장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순장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요...' 
제가 '원래 인생은 한 번도 안 해본 걸 하는 겁니다.'

여러분, 6세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할 때, 한 번도 안 해 본 걸 하는 거잖아요.
인생은 다 안 해본 거를 하는 겁니다. 

'저는 성경에 자신이 없는데요'
아니 순장을 하면서 내가 성경을 다 알고, 교리를 다 알아서 '난 자신있게 한다' 
이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주님이 부르시면 반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나를 불러주시는 것이, 복된 일인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 청소나 주차봉사나 이런 일을 부탁드리면 
'그런 사소한 걸 나한테 시키나?'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그런데 또 그런 분들에게 크고 중요한 일을 맡기면 
'이렇게 어려운 일을 나한테 맡기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여러분 그래서 너무 커서 부담스러워서 못하겠고, 
반대로 너무 작아서 사소해서 못하겠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겠어요? 
크든 작든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소중한 줄로 믿습니다. 

제가 1516교회를 시작하면서, 예배에 집중하기를 원해서, 문서를 없앴잖아요. 
그러니까 저희는 주보를 가져와서 주보를 접고, 주보를 나눠주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보들을 줍고... 이런 거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물컵도 없어요. 

여러분, 텀블러를 고정적으로 갖고 다니시는 분들이 많은데, 너무 감사하고요. 
그리고 저희가 종이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헌금계수실에 하루 종일 들어가 있을 필요도 없어요. 
그런 일을 다 없애버린 겁니다. 그리고 성가대도 없어요. 

그러니까 '도대체 이 교회에서는 무슨 봉사를 할 수 있나?' 
저는 여러분이 예배에 집중하기를 원하고, 서로 교제에 집중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교제 공간이 없었는데... 저희가 앞으로 두 달 정도 지나면 
한솔 1층에 150석 정도의 카페가 시작이 됩니다. 거기서 많이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즘 저희가 한솔 주차장을 쓰게 되면서, 주차봉사를 공동체에 부탁을 드렸더니 
이렇게 몇몇 분들이 새롭게 주차봉사하시는 분들이, 주차봉을 들고 하시는데,
발걸음이 너무 가벼운 거예요. 

한 남자분이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드디어 이제 제가 할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가볍게 반응할 수 있는가요? 
'아, 내가 저 왕좌에 올라야 돼? 내가 이 왕좌를 버려야 돼?' 
하여튼간에 올라가는 것도 힘들고, 내려오는 것도 힘들고... 
하나님이 시키는 게 다 뭔가가 못 미더워서 힘든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이미 구하셨고,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감독되신 하나님이, 선수교체를 준비하고 계신 거예요. 
선발 투수인 사울이 동의하지 않고, 마운드에서 내려오지 않아서 문제였던 거죠. 

▲그러면 오늘 설교의 제목인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는데 

 

1) 첫 번째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 보면 
사울은 사람들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어떻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맞출 수 있는, 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거예요. 
이것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행위가 완벽한 사람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의무는 다 행했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 
다윗이 그 마음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럼 예배자와 종교인의 차이는 뭘까요? 
종교인들은 의무는 다 하는데 하나님께 내가 기브앤테이크, 원하는 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그냥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뿐인 거예요. 
'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그렇게 헌신하며 
예배자로 살고 싶습니다' 이 마음 하나뿐인 거예요. 

2) 여기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히브리 원문 그대로 직역을 하자면, A man after His own heart
즉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이런 뜻이에요. 

사울은 나름 자기도 하나님 앞에 잘 한다고 했을 거예요. 
왜냐면 사무엘이 오기를, 하루 이틀 기다린 게 아니라, 7일이나 꼬박 기다렸잖아요. 

그리고 '제가 전쟁을 치르기 전에, 저 Saul 도 나름 예배 드리려고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울 입장에서는 '나도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안타깝게도 그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거예요. 

일단 내 승리, 내 안전, 내 성공이 중요했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따라와줘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따라와야 되는 부수적인 존재인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은, 자기의 마음을 따르는 인생이었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인생이었던 것이죠. 

이게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제일 힘들잖아요. 
인생이 잘 될 때는 모르겠는데... 사울도 어려울 때는 자기 인생이 힘들었겠죠. 

그런데 다윗이 제일 힘들었을 때, 광야에서 10년동안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그의 마음 가운데 두렵고,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감을 느꼈겠어요? 
날마다 생사를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살아야 됐다고요. 

그런데 '내가 이 광야에서,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야?' 
그러면 그걸 벗어나려면 사울을 죽여야 돼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찾아오는데, 안 죽이잖아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으면, 나는 안 하겠다'는 거예요. 

'아니, 그럼 당신은 생존할 마음이 없냐?' 
아니 그것조차도 다윗은 하나님께 그냥 맡기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 성공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생존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기 위해서 산다는 거예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보신 적이 없으신 거예요. 
와,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에 감동을 받으시니까 게임 오버! 
그냥 하나님이 다 도와주시는 거예요. 전면적으로! 

사울은 자기 마음대로 하니까 그것으로 끝이었죠. '너는 이제 끝!' 
하나님께서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리세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니까,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제 끝이에요.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어요. 하나님이 '얘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도와줘야지' 

다윗의 인생에 고난도 있었어요. 잘못도 했어요. 
근데 결국에는 하나님이 반전의 은혜와 승리로, 그 인생을 완성시켜 주십니다. 할렐루야! 

◑삼상13:15~17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
 
16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들과 함께 한 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진 쳤더니

17 노략꾼들이 세 대로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나와서 
한 대는 오브라 길을 따라서 수알 땅에 이르렀고'


지금 이스라엘 군대, 사울왕과, 사무엘이 길갈에서 만났어요. 
근데 사무엘이 이제 한 소리 하고, 길갈에서 떠나서 사무엘은 기브아로 갑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과 요나단이 군대를 이끌고 게바로 갑니다. 
게바는 블레셋의 전초기지가 있었던 곳 인데, 이스라엘이 최근 공격해서 탈환한 곳이죠. 

그 게바에 지금 사울과 요나단이 있고, 
바로 건너편 믹마스에 블레셋 군대가 주둔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블레셋 군대의 노략군들이 3대로 나뉘어서 
북쪽으로 오브라, 서쪽으로 벧호론, 동쪽으로 유대광야로 군대를 전개했습니다. 

여러분, 전쟁은 남쪽 게바 방향으로 해야 되는데,
블레셋이 북, 서, 동쪽으로 세 갈래의 노략군들이 나갔습니다. 

이게 오늘의 질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걸 염두에 두시고요. 

여러분, 이스라엘의 3천명의 상비군 중에서, 지금 몇 명이 남아있다고요? 600명.  :15
그럼 몇 명이 도망간 거예요? 2400명. 

여러분, 전쟁을 치르기 전에 80%의 군사가 무단 탈영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병력은 거의 와해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노략꾼들이, 세 갈래로 이스라엘 본토로 진입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인류 역사에서 전쟁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 계시면 알겠지만 
여러분 이렇게 전쟁에서 뭔가 노략을 한다? 
이 개념은 완전한 승리, 완승을 거두고 나서 전리품들을 취할 때 사용되는 개념이거나, 

아니면 전쟁이 너무 장기화되면서, 본국에서 물자 조달이 어려워져서, 
현지에 있는 마을들을 습격해서 노력할 때, 이때 사용되는 개념이에요. 

그런데 블레셋의 노략꾼들은 이도 저도 아닌 거예요.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노략꾼을 세 부대로 나누어 내보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전쟁은 '우리가 너희를 넉넉하게 이기기로 남는다' 
이런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고, 초반 기세를 잡기 위해서 
정말 물밀듯이 밀려들어와서, 그들을 초토화시키는 목적의 노략꾼들이었던 겁니다. 

◑삼상13:19~22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20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었는데
  
21 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22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온 이스라엘 땅에 철공이 하나도 없었대요'
철공은 대장장이를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 땅에 철이 나지 않았을까요? 
신명기에 보면 '너희가 들어갈 그 약속의 땅은 철광석이 나오는 땅이다'  신8:9
철 자원이 풍부했어요. 

그리고 재련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본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이 해변가에 거주하고 있는 5개 도시 중심의 
사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작은 민족이에요. 

그 블레셋이 전체 이스라엘을 다 장악하고, 이들이 철제기구를 만들 수 없도록 
통제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농기구조차 블레셋의 대장간에 가야만 벼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거죠. 

여러분, 이스라엘 군대가 3천 명의 상비군을 만든 게 처음이잖아요. 
나머지는 전부 다 예비군이라고요. 

이 예비군들은 평상시에 농사 짓고 살다가, 나팔을 불면서 소집령이 떨어지면,
무기를 들고 오는 게 아니라, 쓰던 농기구를 들고 오는 거예요. 
자기 농기구를 들고 와서 싸우는 농민군들이었다고요. 

그러니까 양쪽 진영을 보건대, 이거는 게임이 안 되는 거예요. 
불레셋은 탱크 같은 병거가 3만 대, 그리고 장갑차 같은 기마병이 6천 명,
또 해변의 모래알같이 많은 군대가 모였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고작 농기구 들고 있는 농민군이 지금 600명. 
그러니까 이건 전쟁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도주하지도 않고, 탈영하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보면서 너무나 감사한 것은 
'이게 내 능력의 마지노 선이구나' 
바로 그 마지노 선에서, 하나님의 역사심이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육상 트랙 출발선을 보면, 
항상 출발선이 엔드라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육상경기를 하다 보면, 출발선이 곧 피니시 라인이고, 
피니시 라인이 출발선인 경우들이 있죠. (끝장인 곳에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내 능력은 여기까지가 한계다. 막다른 골목이구나!' 그렇게 해서 내가 멈춰섰을 때, 
그때부터 하나님의 역사하시기 시작하는 거예요. 

홍해 앞에서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어요? 
빠져 죽든지, 뒤쫓아오는 바로의 군대의 칼에 죽든지... 둘 중에 하나잖아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내가 인간적인 방법, 인간적인 리소스, 인간적인 자원을 끌어다가 
내가 어떻게든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해결해보겠다... 
그러면 하나님이 개입하실 여지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제 능력의 한계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입니다. 
하나님 저의 인생에 역사해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절망의 끝자락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망을 노래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그 시대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절망적인 시대잖아요. 
농기구도 그걸 공격무기로 사용할까봐, (이스라엘에서 벼리지 못하게 하고)
무뎌지면 하나씩 블레셋에 갖고와서 벼리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시대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한 시대였는데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반전의 승리를 거둔 믿음의 용사들의 이야기가 
다음 주 이 시간 22강에서 나옵니다. 

그리고는 대표적인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왕자 요나단의 이야기, 
목동소년 다윗의 이야기가 나와요. 
성경 스토리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스토리들 중에 하나죠. 

저를 한번 따라해 보시겠어요? '하나님은 반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하나님 내 인생을 반전시켜 주시옵소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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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무엘이 제사장인 성경적 근거
제사를 집례하는 것은, 선지자의 자격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제사장의 신분이어야 했죠.
사무엘은 보통 '선지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를 집전할 합법적 권한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난 제사장인 성경적 근거는,
삼상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위 구절을 언뜻 보면, 사무엘이 에브라임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이 경우, 제사장이 아닌 거죠.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엘가나는 본문의 족보와 역대기의 족보(대상6:1, 27, 28)를 종합해 볼 때, 
레위 지파의 후예임이 분명합니다. 위 역대상 구절을 찾아보세요.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48개 성읍에 분산 배치되었는데,  민35:1~8
제사장 엘가나 가문은, 에브라임 지파에 분산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어릴 적에, 실로에 가서 성막 봉사를 한 것으로 볼 때, 
그가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 제사장 가문'인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만약 그가, 에브라임 지파 자격이었다면, 아예 성막 봉사가 원천 자격 미달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레위지파였기 때문에, 성막 봉사를 할 자격이 있었던 거죠.
어려서부터 제사장 수업을 받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