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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6장 성령님은 누구신가?

LNCK 2025. 3. 19. 12:1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성령론

성령님은 누구신가? /  요한복음 16:13-15 - YouTube

 

◈성령님은 누구신가?                  요16:13~15                 2025.01.12.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는 부흥의 역사가 끝났다. 위기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때 역사하셨던 성령님의 역사의 방법이 끝났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임하실 성령님을 기대할 때,
성령님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통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하실 것을 
우리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 아래 설교문 중에서

 

.......................................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불편해졌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도 좀 불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이야기하는구나..' 

우리들에게 찔림이 있었으면 좋겠고, 또 이번 성령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총7회
여러분들이 많이 듣게 되는 단어들이 있어요. 
'성령의 임재,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이런 단어들을 많이 듣게 될 거예요. 

성령님에 대한 말씀은 두 가지로 가능합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령님의 인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
 특히 요한복음이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록하고 있고, 

-또 하나는, 성령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부분은 사도행전을 통하여 역사가 나와 있습니다. 

이번 7주 동안은 주로 '성령님의 인격'에 대해서 말씀을 나눕니다.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이 7주를 지나는 동안, 말씀을 듣는 중에, 찬양을 하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여러분들이 왠지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성령님의 역사로 여러분들의 치유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에 일어난 성령님의 역사를 간증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성령의 은사, 혹은 기름 부음.. 이런 것들을 좀 연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도 있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도 있고, 
신유의 은사를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은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이 예배는 성령의 역사가 어제의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지속될 수 있도록, 이 예배 가운데 성령님의 임재를 우리들이 경험해야 된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시죠? 

◑예수님을 드러내고 조명하시는 성령님

J. D. Greear가 쓴 <Jesus Continued> 책에 보면 그런 예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밤중에 워싱턴을 가로지르는 395번 도로가 있는데 
가다 보면 조명이 워싱턴의 어떤 상징적인 탑을 비추고 있고, 
또 그 조명이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을 비추고 있는데, 

아주 비싸고 아름다운 조명이 그 건물을 비추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에 주목하는가?」 

만일 조명에 우리들이 주목하고 있다면, 우리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 조명이 비추는 건 뭐예요? 
그 상징물을 잘 보여줄 때, 조명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란 무엇일까요?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실 때, 명확하게 나타나야 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 아버지가 드러나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되는 거예요. 
근데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받고, 성령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내가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올바른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게 되죠. 

▲J. I. Packer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성령 사역은 모든 사람의 관심이 구주에게만 쏠리게 만드는 투광, 조명등이다.

우리들이 받았던 방언이, 내 자랑의 도구가 되거나, 
우리의 예언 은사가, 내 자랑의 도구가 되거나, 
신유의 역사가 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주님이 드러나야 된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성령의 경험과, 자기 체험만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실제로 성령 충만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성령이 누군가를 통해 말씀하시면, 
사람들은 그 말하는 화자(또는 청중)가 눈앞에 있다는 것조차 잃어버리게 되고, 

심지어 성령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 관한 생각만 가득하게 된다」 

예를 들어볼게요. 우리 새 가족 중에 한 분이 저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저희 교회에 처음 왔는데,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데, 
와! 막 설교하는 저에게서 후광이 막 이렇게 비취는 걸 봤다는 거예요. 

제가 그분에게 '잘 보시라고.. 그게 후광이 아니라고.. 잘 봐야 된다고...' 

제가 만일 설교를 하는데, 제게서 후광이 나온다면, 그건 진정한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죠. 
제가 오늘 여기에서 설교할 때 나타내 보여져야 되는 것은 
하나님이 드러나야 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런 유혹에 시달리는 거죠. 
성령님이 우리들 가운데 역사하실 때, 그 충만함이, 
사람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중요한 관점이에요. 우리가 말씀을 떠나서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나 성령이 떠나가면, 말씀 가운데 우리들이 순종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들이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하고,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우리들이 말씀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거죠

요16: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눅24:49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복음을 전하는 거 다 좋아. 
그런데 성령님이 너희들에게 임하지 않으면... 그거 하지 마!'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지 않고 하는 일들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 없이, 복음 전파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역사를 통하여, 오늘날 이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거죠. 

◑말씀과 성령

나눠드린 간지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한 이야기가 있는데 
여러분들은 이번 한 주 동안 소그룹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서로 나눔을 가지고 
묵상을 해보세요. '말씀과 성령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간지를 성경책에 꽂고 다니면서 묵상해 보세요.
이 구별이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되어야 될 것 같아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내 시간의 절반은, 성도들에게 교리를 공부하라고 말하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교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데 사용한다.」 

우리들이 성경의 지식과 교리에 대한 공부를 하는데, 
그게 지식으로만 채워지면.. 그건 역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말씀은 영원하고 불변한다. 
성령의 지시는 일시적이며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게 구분이 돼야 돼요. 말씀은 영원하고, 우리들에게 불변의 지침을 주는데,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일시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그때 그때마다 다르게 역사하실 수 있죠.  

 

말씀은 약속을 준다. 
성령은 때에 따라 모험을 하게 한다. 

우리들이 말씀을 믿지만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역사하실 때 
그게 마치 이그나이트, 불을 점화시키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 역사할 때, 
우리들의 삶을 모험적으로 이끈다. 

말씀은 전체적인 사명을 말해준다. 
성령은 하나의 비전을 심어준다.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들이 성령을 받을 때에 
우리들에게 주어진 비전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말씀은 기준을 정하고, 성령은 행동을 지시한다. 
말씀은 결말을 보여준다. 성령은 출발점을 알려주신다. 

말씀은 기대치를 정한다. 성령은 꿈을 불어 넣으신다.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기술한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도록 하신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죠.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알 수 있어요. 

근데 그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가운데 확 느껴져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는구나' 
그걸 느끼게 하시는 이는 누구라고요? 성령님의 역사라고요.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 여러분들의 마음을 오픈하고, 
'성령님, 나에게 기름 부어주세요' 라고 간구하는 마음으로 이 예배를 드릴 때 
성령님이 여러분들 속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이야기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으신다. 

말씀은 계시를 준다. 
성령은 계시를 이해할 수 있게 도우신다. 

말씀은 믿음의 선진들을 보여준다. 
성령은 확신을 주신다. 

말씀은 깨닫게 도와준다. 
성령은 체득하게 하신다. 

말씀은 들으라고 명령한다. 
성령은 들을 수 있게 해주신다. 

성경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이가 성령님이시다.」 

제가 27살 때 은혜 체험을 했어요. 저는 그때까지 설교 준비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목사가 안 되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죄송해요. 못 해먹겠더라고요. 너무 힘들었어요. 

옛날에 예언자들은 성령이 임했을 때만 예언을 하면 됐는데 
목회자는 매주 설교를 해야 돼요. 

그것처럼 힘든 게 없어요.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설교 준비를 할 때면, 제가 이렇게 막 주석책을 쌓아놓고 설교 준비를 했었어요. 

근데 제가 은혜를 받고 나서, 제게 나타난 변화가 뭐였냐면 
말씀이 제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때 '꿀송이보다 단 말씀'이라는 걸, 그때 처음 경험해 봤어요. 

말씀이 제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는 제 서재에 있었던 모든 주석책을 다 옆으로 치워놓았어요. 

'나는 누가 해석해 놓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말씀을 보겠다.'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세요. 

오늘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데, 
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들에게 임한다고 하는 말씀을 이해하게 해주십니다.

「말씀은 순종하라고 명령하지만 
성령은 따라오라고 손짓하신다」 

이번 주간에 여러분들 꼭 소그룹 공동체에서, 아니면 혼자 여러분들 서재에서라도 
말씀과 성령의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꼭 묵상하고 나눠보세요. 
여러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를 구별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상상으로 제 이야기 속에 한번 들어와 보세요. 

「어떤 목사님이 집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교인들에게 이렇게 요청을 했대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분이 있다면, 제 왼쪽으로 서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성령의 열매를 구한다면, 제 오른쪽에 서세요. 
자 다 앞으로 나오세요.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서 있겠습니까?」 
(그냥 상상해 보세요. 그 왼쪽, 은사 쪽에 서신 분들이 많았다는 거죠) 

이 목사님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구하고 있지만, 
성령의 열매를 그렇게 많이 구하지 않고 있었다는 거예요.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은사는, 성령의 능력인데 
이 성령의 은사가 지속되는 기름 부으심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에 
우리들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성령의 은사가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굉장히 위험하기도 합니다. 
구약에 요셉이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은사가 있던 사람이었어요. 

꿈을 꾸고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은사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요셉이 은사를 가지고 꿈 이야기를 하는데, 
왠지 듣는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요. 

그래서 그 형들이, 꿈이 틀린 건 아닌데,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리잖아요.
그래서 요셉이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고, 또 옥에 갇히게 됩니다. 

성경을 유심히 보세요. 종으로 있을 때에도, 그리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요셉의 은사는 그대로 살아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을 아직 쓰시지 않습니다. 

또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겠죠. 
만일 요셉이 그의 은사만을 가지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더라면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을 만났을 때에, 요셉은 그 형들을 죽였을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요셉이 고통과 고난의 시간들을 지나가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시고, 그의 삶이 성숙해졌을 때에, 
그의 은사는 그냥 막무가내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성숙한 열매로 나타났던 것을 보게 되죠. 

여러분, 성령의 은사가 풍부했던 크리스천들이 추락하는 모습들을 참 많이 봅니다.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죠. 
신유의 은사를 가졌던 사람들과,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던 교회의 목회자들과 그 교회들이 
이단 혹은 여러 타락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은사가 가짜였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뜨겁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은사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것이 가짜가 아니라, 
그 은사가 지속되는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숙되지 못할 때, 
그 은사들은 (교만에 이어지는) 타락으로 갈 수 있는 거예요. 무서운 이야기죠.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들을 불편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나 여러분들에게나! 
오늘 이 예배 시간에, 우리들의 삶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들 가운데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락하고 추락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인정하십시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우리들이 당장 완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오늘 이 은사가...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성숙해져 갈 때, 그것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이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은사를 (습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봐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이, 그 은사가 어떻게 되는가?' 

기름 부으심이 없는 은사는, 어느 날 그 은사로 인하여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 은사가, 기름 부음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인하여 
늘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사람들의 칭찬에 굶주리게 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지속되지 않으면 
그 은사가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들이 깨닫고,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 있는지를...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되겠죠. 

▲진정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은사가 우리들에게 있을 때 
우리들은 나의 나 됨을 찾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은사는 불완전합니다. 분명히 능력이기는 한데, 
내 은사로 인하여 누군가와 비교하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기름 부음으로 성숙되지 않으면.. 그것은 불안전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들 가운데 임할 때에,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자유함을 주세요. 
고후3:17절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제가 이런 문장으로 정리를 해봤는데, 제가 썼지만 잘 정리를 한 것 같아요. 
「우리가 성령님의 은사를 경험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만큼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들 가운데 임하면, 우리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것까지, 내가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됨, 그리고 내 안에 자유가 찾아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오늘 성령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임하실 때에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능력, 
'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여기까지 쓰시는구나!' 라고 하는 자유함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다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누구를 흉내 내거나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자유함이 우리들에게 있는가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웨일즈의 존경받는 한 사역자는, 앞머리가 눈을 가리지 않도록 
머리를 이렇게 손으로 뒤로 젖히는 버릇이 있었다. 

그로 인해 웨일즈 전역에는 앞머리를 뒤로 젖히는 젊은 목사가 많이 생겼다고 한다. 
심지어 그 중에 대머리도 있었다.」 

누구를 흉내 내거나, 누구에게 주어진 그것이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님은 나에게,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자유, 만족하고
그래서 누군가를 흉내내거나, 부러워하거나, 누구처럼 되지 못함에 대하여 
부담감을 버리라는 거죠. 성령의 은사를 모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의 위대한 영웅들을 닮아가는 마음은 좋지만, 
과거의 방식을 기대하지 말아라는 거죠.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한국교회의 큰 오류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영광을 자꾸 생각하면서 
그 과거의 영광을 자꾸 연출(재현)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을 똑같이 재현하려고 하는 그 시도들!

(성령은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그 재현하려는 마음도 좋지만, 지금 현재 성령의 역사에 더 주목하고, 따라가야 된다는 것) 

지금으로부터 30, 40년 전, 저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엑스폴로 74' 때 저도 거기에 있었지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는 여의도 5.16 광장에 이르렀어요. 
여의도 5.16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했던 그 놀라운 경험!   

또 제가 중학교 때, 지금도 기억이 나요. 그때 왕십리에 살았는데, 
우리 학생들이 부활절 예배를 드리려고, 왕십리에서부터 새벽에 여의도까지 걸어갔었어요. 
그 당시에는 여의도에 꽉 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던 일! 

분명히 한국교회는 그 당시에, 그런 대형 집회를 통하여, 그런 부흥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해 주셨어요. 

그런데 지금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와 많은 사람들이, 
그때를 생각하며, 그때의 방식으로, 자꾸 성령의 역사를 재현해 내려고 하는 일들... 
이거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성령님께서는 '오늘 이곳에' 우리들에게 역사하시려고 하는 성령님의 방향이 있는데, 
우리들이 그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고, 

(성령은 자유롭게, 자유자재로,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과거의 경험들에 자꾸 매달리려고 한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실 수 있겠는가요?  

저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사역의 주권이 성령님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가려면 
우리들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다.'

오늘 우리들이 왜 예배하는 거예요? 
'오늘 이 자리에' 임하실 성령님을 기대하며, 
'성령님 우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그게 오늘 우리들이 여기에서 예배하는 이유죠.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생각난 찬양이 있어요. 
♪오늘 이곳에 계신 성령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릴 가르치시소서 
닫힌 우리 맘 열어주시고 주의 빛으로 밝혀 우릴 인도하소서 
주님보다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 기다리니 
주님 손에 우릴 드립니다. 사랑으로 인도하소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갔다면
우리들이 성령님을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동의하지 않으시면 
어제의 기름 부음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버릴 수 있는 거예요. 

제일 비참한 게, 제가 오늘 하나님 앞에 목회자로, 설교자로 서 있는데 
'하나님이 저를 더 이상 쓰시지 않는다면' 그거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어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쓰실 수 없다고 하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어요? 

그래서 오늘의 기름 부음, 성령님이 역사하실 것을 우리들이 기대할 때 
성령님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쓰실 수 있는 거예요. 

◑성령님은 과거와 달리, <오늘의 새로운 방식>으로 여전히 역사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는 부흥의 역사가 끝났다. 위기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때 역사하셨던 성령님의 역사의 방법이 끝났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임하실 성령님을 기대할 때,
성령님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통하여 (과거와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것을 우리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그게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18세기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가 활동하던 시기에 놀랍게 부흥운동이 일어났어요.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유명한 부흥사는, 설교를 할 때 어떤 현상들이 나타났냐면 

사람들이 막 이렇게 예배 중에 몸에 기운이 빠지고 쓰러지는 역사들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1903년 웨일즈에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는 어떤 역사가 일어났냐면 
찬양과 간증과 말씀 가운데 놀랍게 성령님이 역사하셨어요. 

여자들이 교회에 가면 돌아오지를 않아서, 남편들이 아내를 교회를 찾으러 가서
화가 나서 예배당에서 문을 딱 열고 들어서는 순간, 
찬양하는 소리와 기도 소리에, 그 자리에 확 꼬꾸러지는 역사들이 일어났어요. 
그게 유명한 웨일즈 부흥의 역사입니다. 

근데 더 이상 웨일즈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성경 중에 킹 제임스 버전만 이렇게 주장하는 분이 있어요. 
난 그게 이해가 되질 않아요. 2000년 역사 가운데 
그러면 킹 제임스 버전 나오기 전에는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역사하셨을까?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성경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실 수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우리들이 주권을 가지는 게 아니에요.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드릴 때, 
성령님의 역사를 우리들이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인정하는 것... 이게 성령님을 존중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13절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13 

성령님의 방식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은,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기대하라'는 거예요

성령님은 오늘도 늘 새롭게 역사하실 수 있음을, 우리들이 믿는 거예요. 
문제는 우리들이 여러 가지로, 바쁘다는 이유로, 아니면 우리들이 귀를 닫아 놓는 것으로 
신선한 기름 부음을 우리들이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선하다'는 것은 뭘까요? 어제의 것이 아니라, 
오늘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우리들이 기대한다는 거죠. 

▲제가 지금 너무 과격한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저는 지금 한국교회, 아니 전 세계 기독교회에 
저는 교단주의가 다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요, 교단들이 일어났던 이유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 때 
그것을 돕기 위해서 교단들이 생겨났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교단과 교리라고 하는 것들이,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한국교회에 수년 내에 이 교단의 벽이 다 허물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저는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만나교회는 감리교회인데 
우리를 구원시키는 것은 감리교회가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들이 서 있는 것이지, 
오늘 우리들이 왜 이렇게... 우리들이 마치 무슨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 (교회, 교단) 가운데 역사하는 것이 아니면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편협함 가운데서 성령님이 어떻게 역사하실 수 있겠는가요? 

▲19세기 미국 켄터키에, 케인 릿지 라는 곳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대요. 
역사의 기록입니다. 그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놀랍게 부흥하기 시작했고 
그 부흥이 일어나면서 신학적인 논쟁들이 다 끝이 났답니다. 

오직 교회들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났고요. 
그 부흥의 역사가 너무 놀라워서, 그 부흥하는 교회들이 모여가지고 
'크리스천 교회'라고 하는 (독점하는) 교단을 만들었답니다. 
근데 그 순간부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들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누구에게 라이센스가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요16:14절 말씀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고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
그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역사입니다. 자 우리가 같이 꿈꿔야 되는 일이죠. 

여러분들께서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게 분명하다면, 
우리들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기대하고 있다면, 거기에서 뭐가 나타나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야 되는 거예요. 

오늘 이 예배 가운데서 다른 어떤 것도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우리들에게 고백되기 시작할 때 
기름부음의 역사가 여기에 나타나는 거예요. 

◑어제, 오늘, 내일의 기름부음

캔달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제가 성령님에 대한 시리즈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분의 책을 제가 다 봤어요. 
그 중에 굉장히 제게 인상적인 게, 세 부류의 사람으로 분류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과 관련해서 과거의 사람, 현재의 사람, 미래의 사람! 

어제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사울왕, 
오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사무엘, 
내일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다윗이예요.

셋 다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1. 어제의 기름부음 받은 사울 
우리의 이미지 가운데는, 사울왕이 다윗과 이렇게 맞서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만 인식이 되어 있지만, 
사올왕은 하나님 앞에 어제의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어요. 더 이상 하나님이 그를 쓰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울은 왕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신다고 하는 건.. 다른 얘기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성령의 은사를 받고, 우리들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사올도 여전히 왕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능력이 없었어요. 왜요?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으시니까! 

우리가 여전히 뭔가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지 않는다면, 
우리들 가운데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기름 부음 받았던 사람들의 삶이 비참해지는 겁니다

사울왕은 끝까지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지막까지 버림을 받았어요. 이유가 있어요. 회복되지 않았거든요. 

저나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완전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기름 부음을 받았던 그 과거 경험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쓰시지 않는다고 하는 그 절망감이, 우리들에게 있을지 몰라요. 

절망하지 마세요. '오늘의 기름 부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니까요! 

▲2. 사무엘은 '오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 인데,
그는 사울에게도 기름을 부었고, 다윗에게도 기름을 부었습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을까요? 
사울 왕이 지금 살아 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거예요. 
그거 반역입니다. 잡히면 죽는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사무엘은 순종했습니다. 

'오늘의 기름 부음'은, 누구에게 부어지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 있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건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쓰신다는 거예요. 

저도 평생 목사로 살면서 몸부림치는 거죠. 
'하나님 저를 써주세요. 제가 버림받으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하나님 저를 써주세요!'

여러분들이 다 하나님의 사람인데, 
오늘 이 시간에 '현재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써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3. 다윗, 그는 미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었어요. 
왜요? 
그는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이 바로 쓰시지 않았어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다윗은 많은 고통, 고난의 시간들을 지나갔어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가 고난의 시간을 지날 때, 그 견딤의 시간들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 인생에 준비되는 시간이었다는 거죠. 

하나님이 자기를 왕으로 세우실 때까지, 기다렸다고 하는 것, 
제가 어제 설교하면서 우리 부목사님들, 목회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하나님 앞에 숨겨진 시간을 지나가는 것, 하나님께 부름을 받기까지의 기다림,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축복이다. 
왜? 그 기다림의 시간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준비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데, 우리들이 (사울처럼) 드러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어요. 
우리들의 인생의 기다림의 시간은, 복된 시간입니다. 

켄달 목사님이 아주 멋진 문장을 하나 썼더라고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죽일 듯이 미워하는 적을 만남으로써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나가는 것이다.' 

굉장히 멋진 문장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들 가운데 있을 때, 우리들이 준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요. 

다윗에게 있어서 최악의 시간이, 미래의 사람 다윗에게 최상의 시간이었어요. 
준비되는 시간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다면, 
오늘 여기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 최악의 시간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최악의 시간을 최상의 시간으로 하나님께서 바꾸신다는 거죠.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않는 한, 
성령님의 임재를, 기름 부으심을 우리들이 경험하며 살아가는 한 
우리는 미래의 사람으로 쓰임받을 수 있는 거예요. 

'미래의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건, 나이에 대한 문제가 아니죠. 
오늘 우리들이 기름 부음을 받고, 성령님이 쓰실 수 있도록 
준비된 인생을 내가 살아가는 것... 

제가 서두에도 이야기했어요. 이번 7주 성령 시리즈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왠지 뜨겁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소망을 주시는지... 왜 이런 가슴 띔을 주시는지... 
왜 저에게 이런 힘과 능력을 주시는지... 주님, 성령의 임재 가운데 제가 쓰임받기 원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으니, 
성령님 앞에 성령님을 존중하며, 나를 내어놓는... 
기름 부음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을 존중하며 우리를 내어드릴 수 있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간절히 구합니다. 
주여 우리를 '미래의 기름부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