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부흥이 일어나다 | 요나 3:3-8 | 금특새 | 25.1.10 - YouTube
◈큰 부흥이 일어나다 욘3:3~8 2025.01.10.
요나서 2장은 물고기 배 속에서의 요나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어제 신년 특새 마치고 나가실 때 '고래밥 (과자)' 선물을 하나씩 드렸는데,
그거는 교구에서 드린 겁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의 독특한 체험을 요나가 했습니다. 요나가 완전히 달라졌죠.
이전과 다른 모습의 요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욘3:1~2절은 전환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그의 활동이 시작이 되죠.
◑욘3:3절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드디어 요나가 순종을 시작합니다.
'말씀대로 일어나서' 이게 중요합니다.
전에는 어땠습니까? 1장에는 '요나가 일어나서 말씀과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지금은 이제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요나는 지중해 어느 해안에 토해 졌다고 생각되는데,
그러면 니느웨 (오늘날의 이라크의 모술, 또는 그 근처)까지 걸어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거예요.
(*시리아 어느 해안에 내려서 모술까지 걸어가는데, 적어도 650km 걸었을 거예요)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3:3
아마 요나는 니느웨 성 안에서 사흘 길을 걷는 동안에, 그 성의 규모에 압도 당했겠죠.
(*니느웨 성읍은 그 둘레가 약 96Km(480스타디엄)에 달하였고, 1500개의 탑이 있었으며,
성벽은 100피트 높이에, 성벽 위로 3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인구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어린) 자들'만 12만 명이었다는 것을 보면, 4:11
그 성에는 적어도 60만의 인구가 있었고, 이 정도의 고대 도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죠.)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 성으로 들어가는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참 오래 걸렸습니다.
뭘 얘기해 주죠?
한 사람의 신실한 종이 만들어지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거죠.
하나님은 이 순간을 기다려 오셨습니다.
'이번에는 요나가 저 니느웨 성으로 들어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하나님의 생각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요나!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설득을 당하는 게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그것이 맞는 길입니다.
그래서 요나서는,
순종과 불순종의 이 주제를 우리에게 잘 선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특별히 '순종'이라는 주제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순종'이라는 단어의 거북함을 드러냅니다.
'나를 좀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나를 좀 놔 두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좀 내버려 두세요.
일단 나에게 맡겨라, 나에게 강요하지 마라, 내 생각이 있다.
나를 너무 아바타처럼 다루지 마라. 내가 무뇌아도 아니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런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런데 2천8백년 전에 요나도 마찬가지예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자기에게 직접 임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동 하면, 그는 서 했습니다.
여러분 이 순종의 단계까지 오는 게,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인간의 불순종은 뿌리가 깊습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불순종을 타고났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악습의 꼬리죠.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빨리 순종하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약간 우리 팔만 비트시면 됩니다. 속성으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한 우리의 팔을 비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간만 힘을 줘도, 우리는 굉장히 아픕니다.
가능하면 하나님은 물리적인 방법을 쓰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한 번씩 쓰실 때가 있습니다. 왜냐면 당사자에게 더 큰 위험이 올 경우에는,
하나님이 비상한 방법을 써서, 더 큰 위험과 위기를 맞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죠.
하나님 우리를 복잡하게 이끌고 가고 싶지 하지 않습니다.
항상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그 명령에 순종하는 길이 가장 쉬운 길입니다.
어려운 길은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인생을 자꾸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서에서 늘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인생)이다.
직선으로 가는 길을 거부하고, 돌고 도는 길을 선택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이론을 끼워 넣지 마라"
내 주장과 내 의견을 자꾸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세우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해묵은 잘못된 습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이기겠습니까?
지혜로 이기겠습니까? 능력으로 이기겠습니까? 재능으로 이기겠습니까?
경험으로 이기겠습니까? 전략으로 이기겠습니까?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죠.
그러나 우리는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이 미련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너무 구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방식을 자꾸 내세우려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굳이 요나를 니느웨로 가게 하십니다.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람의 입을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는 방식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요나 한 사람에게 공을 들이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순종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어떤 묘수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그 뜻을 세상에 펼쳐나가시는 방식이... 이 (사람을 통하는) 방식이라는 거예요.
굳이 요나를, 그 말 안 듣는 요나를, 다시스로 가는 요나를 붙잡아서
물고기 속에 집어넣어 훈련시키셔서, 다시 그 요나를 니느웨로 가게 하시는 이 방식!
우리 생각에는 미련해 보이잖아요.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 '전도의 미련한 방법' *여기서 전도는 preaching, 설교를 뜻함, 케리그마
이거는 하나님이 미련하시다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게 미련하게 보일 뿐이죠.
여러분, 요나의 순종에서 눈에 띄는 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두 번째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는 지체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곧바로 니느웨로 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순종에서 실패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순종을 미룰 때 일어납니다.
'제가 순종하지 않겠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순종할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게 불순종으로 가는 수순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속이면 안 됩니다.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의지는 매우 불완전합니다.
의지도, 심지어 양심까지도 타락했다고 하잖아요.
결단할 때는 절박한 마음으로 결단합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흔들립니다.
순종하지 못할 이유들과 상황이 셀 수 없이 벌어집니다.
처음 다시스 행을 선택할 때, 요나는 '나는 언젠가는 니느웨로 간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나 미루면...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물고기 배 속에, 요나를 넣으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순종의 발걸음은, 미루면 안 됩니다. 곧바로 내딛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연초에도 많이 여러분들이 결심을 할 겁니다.
또 말씀을 통하여, 집회를 통하여... 결심할 겁니다.
'내일 할 거다. 다음에 할 거다...' 그거는 물 건너 가는 겁니다.
깨닫게 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그걸 붙잡고,
오늘 즉시 순종하는 자에게만... 말씀이 역사할 줄로 믿습니다. 미루면 안 됩니다.
자 드디어 요나는 선지자로 복직합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욘3: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는 그 성읍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며 외칩니다. 하루 동안.
드디어 선지자다운 면모가 드러났습니다. 아주 오래간만이에요.
여러분, 누가 선지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을 전하는 사람이에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은 선지자 '직'이나 사도 '직'은 없어요.
그러나 누구나 말씀을 받고 전하면, 선지자와 사도의 '역할'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방 목자도 마찬가지죠. 그 일을 대행하고 있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선지자의 일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는 일은,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말씀을 받은 대로 전해야 돼요. 은혜를 받으면 나누어야 합니다.
그냥 '받은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쉬워요.
여러분, 그런데 전할 때 한 가지만 유의하면 됩니다.
내가 내 말을 섞지 말고, 받은 말씀을 그 말씀 그대로만 전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 전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나면, 그 말씀이 역사를 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을 전하면... 전하는 것까지만 우리가 하는 겁니다.
저도 오늘 설교를 하지만, 전하는 것까지만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것까지 내가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요.
말씀이 전하는 순간, 말씀은 저를 떠나는 거예요.
그러면 떠난 그 말씀이, 누구에게인가 꽂혀서 역사하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우리가 할 일은 뭘까요?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겁니다.
그 다음까지 책임을 지려고 할 필요가 없고,
말씀을 말씀대로만 전하면, 그 말씀이 역사할 것을 믿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이 있으면, 누구에게인가 전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게 선지자의 역할이요, 사도의 역할이요, 오늘도 복음 증거자들의 역할입니다.
▲자, 요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다른 걸 가미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심플합니다.
오늘 이 요나서가 '예언서'가 된 것은, 그 한 마디 때문입니다. 3:4
요나서가 다른 예언서와 다른 게, 요나에 대한 얘기가 쭉 많고, 예언은 별로 없어요.
그러나 바로 이 한마디 때문에, 요나서가 예언서가 되는 거예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3:4
'너희들은 망한다!' 이 말을 한 거예요. 다른 걸 가미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게 대단히 위험한 말이잖아요.
니느웨 사람들에게 다니면서 '40일 후에 망한다'고 하면
돌이 날아올지도 모르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고, 핍박이 올 수도 있는데
다른 것을 가미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전하는 겁니다.
말씀의 완급 조절을 하지 않고, 주신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망할 것이다... 40일 후에 망할 것이다'
여러분 이 40 이라는 숫자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40일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옵니다.
'40'은 타락과 죄와 사망을 나타내는 땅의 숫자 4의 확장이에요. 4 X 10
그래서 노아의 홍수는, 40일간의 물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40일은 노아의 방주가 정화되는데 필요한 시간이었고,
그래서 주로 40은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40일을 무시하면, 파멸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40은 소망을 말할 때, 성경 안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용어입니다.
이 말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40일은 파멸일까요, 소망일까요?
이 40일을 니느웨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심판이 될 수도 있고, 소망의 예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40일이 소망, 회개치 않으면 40일이 심판)
▲그러므로 요나의 이 선포는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40일 안에 망할 것이다!'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종말론을 적용하지 않고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말하죠.
성경을 해석할 때, 언제나 종말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신앙에 종말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것은 그 의미를 잃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게 종말론에 걸려 있습니다.
'그 종말이 올 것이다' 라고 하는 걸 믿는 것입니다.
만약 그게 빠져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뭘까요? 복음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심판하는 그날이 올 것이다' 라는 거죠.
그런 인류의 심판이 아니라도, 개인의 심판은
언제든지 죽음이 오니까...
그래서 복음 전파는 종말론적인 겁니다.
내가 오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분이 내일 어떻게 될지는, 우리는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을 받아들일 건가/ 말 건가?
그래서 구원을 얘기할 때는, 언제나 구원과 심판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수를 믿어라' 라고 전도할 때,
그 말 자체가 종말론적인 거예요.
그 사람이 그 말을 받을 건가/ 말 건가에 따라, 그의 인생의 영원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의 교회는, 이 종말론적인 시대 속에 교회가 서 있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이 복음의 시급성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면 안타까운 일들이 참 많죠.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살릴 수 있을까요? 여러분, 답이 있습니까?
아무리 팔을 걷어붙이고 나가서 뭘 해도 답이 없어요.
여러분, 교회는 어제나 오늘이나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외쳐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자꾸 이 복음의 소리가 작아지고, 다른 소리가 커져요.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왜 부끄러워하죠? 복음이 진짜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도리어 세상의 논리에 설득을 당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논리와 소리가 더 커요.
광장에서 누가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가요?
인간에게 소망이 있는가요? 진짜 소리를 쳐야 할 사람들이 소리를 치지 못하면,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 차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소명은,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복음을 외쳐야 되고,
혼란이 오면 올수록... 이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우리는 더 크게 복음을 외쳐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롬1: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이 로마 제국을 향하여 당당하게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두나미스가 된다' 하고 외쳤습니다.
▲자,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었습니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니느웨 성읍은 그 둘레가 약 96Km 에 달하고,
1500개의 탑이 있었으며, 성벽은 100피트 즉 33미터 높이에,
성벽 위로 3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큰 성읍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하죠.
아마 요나는 그 규모와 화려함에 압도를 당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니느웨는 이방의 신상들이 너무도 가득한 곳이었어요.
그들의 악독함은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니느웨의 악독함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는 말은 집단적 타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1:2
(*'전쟁의 역사' 책을 읽어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악독하고 잔인한 군대가
앗수르 군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행정 체제가 전부 '군대조직'이었다고 해요.
시장, 군수가 있는게 아니라, 직제상 사령관, 부사령관... 이렇게 행정조직이 되어있었고,
부조浮彫에 의하면, 포로들의 코에 철사줄을 꿰어서 줄줄이 붙잡아간 나라로 나오죠)
여러분, 악한 사람이 한 사람만 있는 거하고, 두 사람이 같이 의논하는 거하고
완전히 다른 겁니다. 악한 사람들이 백 명이 연합을 하면 무슨 결과가 나올까요?
'악의 군중심리, 악의 영웅심리' 비슷한게 표출되는 겁니다.
이 집단적 타락, 그게 니느네였습니다. 그들의 악독함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하나님까지 상달되었겠습니까! 1:2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아무리 대단한 큰 성읍이라도, 하나님이 한번 짓밟으면 한순간에 끝이 납니다.
'40일이 지나면 무너진다...' 요나가 전한 메시지,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신 말씀인데요, 근데 예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생각보다 너무 짧아요.
그래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라고 하는 이 메시지는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더 짧아요. 다섯 단어예요.
물론 요나의 실제 메시지는 이것보다는 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요나의 메시지의 핵심을 요약한 거죠.
근데 짧지만 명확해요. 모호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지가 길고/ 짧은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거죠.
어떤 책은 너무 두꺼운데, 다 읽고 나면 허무해요. 머리가 아파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 구절 말씀이, 한 도시를 흔들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18세기 미국의 대각성에 영향을 끼쳤전 조나단 에드워즈,
그 한편의 설교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어요.
그 설교는, 지금도 모든 설교자들이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설교입니다.
'진노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이라는 그 설교 한편이, 그 시대를 흔들어 놓았어요.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https://rfcdrfcd.tistory.com/12056145
여러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
심플하죠. '이 정도 가지고 될까?'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병원에 가서 임종 직전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무슨 말을 오래 하겠어요?
간단하게 한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이 한마디!
여러분, 듣지 않을 거라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련되고 멋진 말을 하려고 애를 쓰지 마세요.
그냥 하나님이 나에게 오늘 주신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흥분할 필요도 없어요. 카리스마 있게 하려고 할 필요도 없어요.
억지로 소리를 높일 이유도 없어요. 유식하게 말하려고 할 필요도 없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받은 대로 전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준비된 설교자들의 특징은 뭐냐?
메시지가 선명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알아들은 거예요.
그래서 그 도시 니느웨가 뒤집어진 거잖아요.
'40일 만에 니느웨는 무너진다!' 이 말 한마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들은 걸 전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관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대사들 ambassadors 이란 말이죠. 고후5:20
▲여러분,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무슨 말씀이죠?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망한다'는 얘기 아닙니까?
서슬퍼런 얘기죠.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40일 만의 심판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니느웨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40일 후에 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가 뭘까요? 빨리 돌아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마음은 뭐예요? 빨리 돌아오라는 거죠.
여러분, 이 40일은 유예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들어있고, 이 시간은 기회예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도 있고, 심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경고하십니다. 그 경고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보내신 것은 은혜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이 망하기를 원하셨다면,
요나를 그 땅에 한사코 보내실 이유가 없어요. 그냥 끝장을 내시면 되는 겁니다.
심판은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단 10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냥 무너지는 거예요.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를 보세요. 그냥 불에 타고 무너지는 거예요.
(지진으로 사해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 자료가 없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알리신 이유는, 그 땅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독이 가득한데도 하나님은
'기회가 있다. 아직도 내가 너희들을 심판하지 않는다.'
심판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애가3:22~23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화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나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요나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 것 같이
니느웨 백성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요나를 거기 보냄을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메시지는 분명히 전달되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여러분, 이 메시지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간단해 보이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여러분, 요나를 다루실 때는 하나님은 너무도 부드럽게 다루시고 계시잖아요. 젠틀하시잖아요.
그런데 죄에 대한 분노는... 하나님은 무섭게 다루세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여기에 너무 많이 도취되어 있어요.
맞아요.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만 알면 안 돼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강인한 사랑 stubborn love 입니다.
사랑에 거룩이 빠지면 안 됩니다. 진짜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거룩이 빠진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르면,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이 왜 중요한가요? 거룩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맹렬하게 대하시는 분이세요.
여러분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죄에 노를 발하시면 감당할 자가 없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망할 것이다!'
이 선포는, 진노 속에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요나서를 마칠 때쯤 되면,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이전보다 조금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이전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2025 신년 특새) 다음 주 끝까지 완주하셔야 돼요.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복잡한 과정을 허락하셨는가요?
얼마나 복잡해요?
그 하나님이신 분이 세상에 몸을 입고 오시는 그 과정,
그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서, 만삭이 되어 태어나시고,
그 말구유에 구차하게...
또 헤롯의 칼날을 피하며 피신을 다녀야 하셨고...
그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고, 가장으로서 그 목수의 일을 감당하는...
이 공생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쳤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내시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열심의 그 과정은
너무도 복잡해요.
(그와 마찬가지로) 왜 이 요나를 그렇게 끝내 니느웨로 데리고 가시는 그 과정!
'40일 후에 니느웨가 멸망한다'는 말과,
'예수를 믿으라'는 이 말씀,
간단한 것 같지만 이 안에는 어마어마한 게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이 복음은 위력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게 될지는... 우리는 아무도 몰라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굉장히 간단한 것 같지만,
그 복음이 정확하게 전달되었을 때, 그 복음의 위력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예의 기간입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유예의 기간이에요.
그래서 니느웨의 40일은 상징성을 안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심판의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거죠.
요나는 40일 후의 심판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는 그도 몰랐어요. 자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죠?
◑3:5절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은지라'
40일 만에 니느웨가 망할 것이라고 하면,
그냥 사람들이 귀를 막고, 듣지 않고 거부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요나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죄의 고백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문화를 뛰어넘고, 인종을 뛰어넘고, 민족의 경계선을 뛰어넘고,
모든 경계선을 뛰어넘어 밀고 들어가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소문이 궁궐까지 들어갑니다.
◑욘3:6~8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 왕까지 하나님 앞에 굴복합니다. 복음은 위로도 향하고, 아래로도 향합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이 그 땅의 모든 영역에 임했습니다.
죄는 평범한 백성에서부터 왕의 이르기까지 전반에 걸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요나서 끝절을 보면, 4:11절에 뭐라고 얘기하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여러분 백성이나 왕이나 고관들이나 모두 어떤 사람들이라고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이에요.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여러분, 판단 기준 자체가 무너진 사회였어요.
악을 행하고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악인 줄 알아야 책임을 지죠.
갈 때까지 간 겁니다. 얼마나 심각한 상태입니까?
니느웨의 모습은, 오늘 이 세상 가운데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들이 지금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고백합니다.
왕이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올라앉는 진정한 회개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 왕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거예요.
그들은 모든 육신의 자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온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돌이키는 백성을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의 구원에도 관심이 있으십니다.
모든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며, 그게 작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그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질투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니느웨에 부흥이 일어났어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나 한 사람의 선포로, 그 많은 이방 백성이 돌아옵니다.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믿기 어려워요.
하나님이 요나를 그토록 보내고자 하신 이유가 드러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놀라운 것이죠.
▲여러분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도 비슷합니다.
행2:36~3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여러분, 무엇이 부흥입니까?
죄인들이 그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예요.
여러분, 요나 같은 부실한 사람을 통하여,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믿어지십니까?
베드로와 같이 실수투성이었던 연약한 사람을 통하여,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이 일이... 여러분 믿어지는 일입니까?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들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대부흥이 일어났어요.
한 도시를 흔들어 놓았어요. 여러분,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지 않아도 돼요.
여러분 사람의 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면 충분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에,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의 순종이에요.
많은 사람의 수가 아닙니다.
세상은 수를 따집니다. 어디가 숫자가 많은가 늘 주목합니다. 그리고 세를 과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수의 싸움이 아닙니다.
기드온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싸울 군대의 숫자를 자꾸 줄여나가요.
세상은 늘여나가는데...
여러분, 요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충분합니다. 핵심은 요나가 아니에요. 왜요?
요나가 가진 말씀의 위력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 말씀이 가공할 만한 파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뭐 대단한 사람입니까? 대단하지 않은데 그 한 사람의 설교, 그 말씀, 그 복음이,
그 십자가의 능력이 하루에 3천 명을 회개로 인도해버리는 거예요.
베드로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이, 말씀이 위력이 있다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메신저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메시지를 가지고 가 딜리브리(전달) 할 메신저를 찾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말씀의 전달을 통해서예요.
말씀을 전달을 통하여!
왜요? 말씀에 능력이 있는 거니까.
▲근데 문제는, 그 말씀을 전달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니느웨로 가라면, 순종해서 가면 되는데,
외치라면, 외치면 되는데...
'고작 이겁니까? 이렇게 간단합니까?
그걸 전하라는 거예요.
내가 말을 붙일 필요도 없고, 가미할 필요도 없고, 각색할 필요도 없고, 편집할 필요도 없고,
말씀을 있는 대로만 전하면...
저도 지금 이런 특새 때는, 저는 어찌됐든 이 본문의 말씀을,
요나서의 이 말씀을, 그냥 있는 대로 여러분들에게 전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다른 걸 붙이지 않고...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돼요. 말씀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공을 들이시는 거예요.
이 요나 한 사람에게 공을 들이는 이유가
이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서, 하나님이 그 입에 말씀을 주셔서 선포하게 하셔야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게 전도의 미련한 방법인데,
하나님은 그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역사를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이 요나 한 사람에게 그렇게 공을 들이고, 그렇게 애를 쓰고,
배를 그냥 들었다 놨다 하고, 물고기를 동원시키고...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왜 광풍을 불게 하시고, 그 배 안에 있는 사람(요나)을 끝내 끄집어내시고,
제비 뽑게 하시고... 요나를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왜요?
말씀을 대언할 한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전하는 한 사람이 중요해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런지 가늠이 안 돼요.
오늘 니느웨 백성이 다 주께로 돌아오는 이 위대한 역사는
한 사람의 순종,
그 순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요나가 이걸 상상해나 했겠습니까? 한 도시가 뒤집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전령들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그 전령들은 너무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이 어마어마한 메시지를 가지고 계시는데,
이 복음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걸 전하는 메신저가 얼마나 중요해요?
그 하나님의 전령들, 그 전령을 핍박하거나 죽여버리면
하늘의 뜻은 감추어져 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구약시대 왕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을 행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 땅에 말씀의 기근이 시작이 돼요. 말씀의 기근은 재앙 중의 재앙이에요.
물질의 기근이 아니에요, 말씀의 기근이 오면, 그 시대는 암흑기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기근은, 말씀의 기근이에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주어지는 게 복이에요.
아무리 지금 환란과 신음 속에 있어도
하나님이 내 영혼에 말씀을 끊임없이 부어주시면... 나는 살아납니다. 안 죽습니다.
돈이 많아도, 모든 일이 잘 풀려도,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면... 그 인생은 끝난 겁니다.
말씀을 주시옵소서!
내 한 사람의 순종이 그렇게 중요해요.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봅니다.
그 사람의 기질과 성향을 알고 계시고... 그를 그 기질에 맞게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요나는 이미 고집이 세다는 걸 하나님이 모르셨겠어요?
도망칠 것도 다 알고 계세요. 그의 체질을 다 알고 계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어요.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 하나님,
'니느웨로 가라!'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이에요.
그동안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 충분히 레슨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요나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선명하게 해주시는 거예요.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길로 가라는 거예요.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야 돼요.
오늘 우리가 하고 싶은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사역부서로 가야 돼요.
요나는 다시는 자기의 생각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철저히 배웠을 거예요.
니느웨의 부흥은 하나님의 플랜 안에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요나의 순종이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순종하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날지는 알 수가 없어요.
▲여러분, 마르틴 루터가, 중세기의 그 어둠 속에서, 그 한 사람의 순종이... 생명을 걸었죠.
근데 중세기의 교회를 깨워버렸어요.
조나단 에드워즈 한 사람이, 18세기 미국의 부흥에 불을 질렀어요.
요나의 선포로 니느웨에 일어난 일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부흥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그 죄악이 악독했던, 그 타락했던, 우상이 가득했던 그 도시에
요나의 한 마디의 그 설교로... 그 도시가 와르르 복음 앞에 무너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도 가능합니다. 성공과 실패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순종입니다.
왜 순종이 역사를 일으킬까요? 상황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상황을 따라가면 길이 없어요. 언제나 그렇습니다. 상황은 돌변합니다.
상황은 우리의 편이 아닙니다. 상황은 늘 불리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따라가면,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대단한 이력을 갖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이면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그냥 어쩔 줄 모르고 순종하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에요.
외치라고 하니까 외쳤을 뿐이에요. 여러분 요나는, 뭐 위대한 설교자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에, 요나는 충격을 받습니다. 왜 충격을 받는지
다음 시간에 알려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그가 전한 메시지로 일어난 부흥까지만 다뤄요.
자, 복음서에 요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나서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요나를 언급하신 것을 보면, 요나서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의 내증'이라 그러죠)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세대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게 없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요나의 얘기를 가지고 와서 말씀하신 거예요.
눅11:29~32절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더 이상 표적을 구하지 말고, 미련한 방식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믿어라!
고린도전서 1:22~23절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한 것은, 무슨 표적을 보여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가 외친 말씀에 니느웨의 백성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말씀은 뭘까요?
오늘 우리가 선포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란 말이죠.
고전2: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노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러분 우리가 할 일은 너무도 분명해졌어요.
예수 크리스토의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미련해 보이는데... '이게 될까?' 단순해 보이고, 너무도 유식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러나 그 십자가의 복음에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오늘 이 아침에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가서 외치라!'
이 명령에 모두 순종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추구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행4:12
말씀에 반응하고 돌아오는 니느웨 백성들의 모습을, 여러분들이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무엇에 우리의 소망을 둘 것입니까? 정치에 소망을 둘 것입니까?
경제에 소망을 둘 것입니까? 사회에? 교육에? 여러분 이 세상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게 아닙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게 복음입니다.
왜 복음이 위로부터 내려온 거예요? 이 땅에서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요나가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는 메시지, 그것을 우리 각자가 붙들어야 돼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미련한 방식으로, 우리의 입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아니, 어느 시대보다 더 크게
'예수 소망, 예수 구원, 인류의 유일한 소망 우리의 삶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
이 복음을 크게 외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장황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을 잘 못 해도 됩니다. 아무런 다른 게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복음의 메시지를
단순하게 내 입을 통하여 전하려고만 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셔서 어떤 일을 행하실지...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순종할 한 사람!
아주 바보처럼, 미련하게, 꾸밈 없이, 단순하게 받은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 선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한 사람의 순종!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그 말씀을 맡기십니다.
꼭 목사가 아니어도 됩니다. 신학교를 꼭 가지 않아도 됩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나의 입술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주신 그 말씀을 누구에겐가 전하라고 나를 살게 하셨습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 소망이 있는 것은, 오늘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 복음을 전하는 삶에 힘쓸 때,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다루시고, 역사하시고,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여 한번 외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