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25] 하늘 제사장 예수의 더 좋은 7가지 사역 2 ┃2025.3.7 - YouTube
*위 동영상 45분까지 녹취했음
◈하늘 제사장 예수의 더 좋은 7가지 사역 P1 히7:19~22 2025.03.17. 히브리서 25강
※성화론에 대한 매우 성경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성화론의 양 극단이 있는데,
-율법주의 적인 성화론... 자기 의지로 계명을 지켜서 성화에 이른다는 주장과
-은혜로, 믿음으로 성화론... 이신칭의처럼, 성화도 믿음으로,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믿죠.
그렇게 주장할만한 성경적 근거들이 또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전1:30
위 두 주장은, 일면 맞는 말이지만, 성화론에 대한 전체적 그림을 보여주진 못 합니다.
아래 설교문은, '성령충만 해서, 성령의 소욕을 가지는 가운데,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성화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설교의 중후반부)
......................................................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사장적 사역은 크게 2개로 분류됩니다.
-아론의 반차를 좇아서 행하신, 땅에서의 제사장적인 사역과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행하신 하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 있습니다.
'땅에서의 제사장 사역'은 대표적으로 십자가의 사역이죠.
그래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신...
그 제사장적인 사역을 '아론의 반차를 좇은 땅에서의 사역'이라고 부른다면,
이제 '하늘에서의 제사장 사역'은 초월적인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 제사장 사역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하늘에 오르셔서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서 행하시는 그 사역을 얘기하는데,
이것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즉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께서 강림하시죠.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게 하시는...
그것이 '하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언약에 힘입어서 지성소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즉 지성소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사역은,
-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약과
-성령으로 대표되는 신약의 삶을 ...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삶은 뭐냐 하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제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 구약에서의 성도의 삶이죠.
그리고 구약에서 목표로 한 것은 뭐냐 하면, 이 죄값을 다 치름으로써
율법의 저주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구약의 모든 포커스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아론의 반차를 좇아 행하셨던 사역'은 뭐냐 하면,
이 구약에서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에서 얘기했던 모든 언약, 그것을 완성하시는...
그런데 어떻게 완성하시냐면,
우리 죄값을 제사를 통해 치름으로써 죄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그것을 행하신 것이라면,
▲신약은 그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약은 전혀 다른 약속을 얘기하는데
신약의 전혀 다른 약속은 뭐냐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개인적이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누리면서 살아간다는 거예요.
이게 신약의 메시지인데, 그것을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대비되는 굉장히 다른 차원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이 '땅'에 대한 얘기고요. 신약은 '하늘'에 대한 얘기예요.
'하늘에 대한 얘기'라는 것은 '초월적인 삶'에 대한 얘기라는 거예요.
구약의 핵심은 '이 땅에서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그런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 것인가?' 라는 것이
구약의 포커스요, 메시지라면,
신약은 그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초월적이고 신비하고 영적인 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구약은 이 '땅'에 대한 얘기라면, 신약은 '하늘'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 차이가 이해가 되세요?
신약은 여러분, 하늘에 대한 얘기이지, 땅에 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물론 구약이 의미가 없고, 신약만 의미가 있다... 이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 창조하셨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이 다 의미가 있지만
하여간 대비되는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는 거예요.
신약에서 얘기하는 것은,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초월적인 삶을 실제적으로 살고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육과 영을 가진 존재를 창조하셨죠.
그래서 우리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즉 영을 불어넣으셔서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영과 육을 다 가지고 있는 존재인데,
구약이 이제 그 육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신약은 조금 더 영적인데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러면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이 영을 불어넣으셨고,
땅만 창조한 게 아니라 하늘을 창조하셨는데, 그럼 하늘에서의 삶은 뭐냐?
여기에 대한 것이 신약의 메시지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의 두 가지 제사장적인 사역은
-이 땅에서만 제사장적인 사역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역시 제사장적인 사역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의 우리의 삶도 온전하게 하신다는 거예요. *이중국적자
-'땅에서의 우리 삶을 온전하게 하신다'는 건 뭐냐면
구약의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다는 뜻이고
-'하늘에서의 삶을 온전하게 하신다'고 하는 건 뭐냐면
하나님과의 영적이고도 실질적인 교제를 누리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핵심이 뭐냐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뭐냐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에요. 그게 복음입니다.
복음을.. 십자가의 죄사함을 복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것은 복음의 기초이고 시작이죠. 그것으로 시작하는 건 맞아요.
죄사함이 없으면, 그 다음 단계로 갈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복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와 죄사함은 복음의 시작이고,
그 위에 뭐가 세워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사하신 이유가 뭐예요?
하나님과의 깨어졌던 관계를 다시 화목해하기 위해서 하신 거잖아요.
하나님과의 깨어졌던 관계를 화목해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거라면,
그러면 이제 뭐가 따라와야 되는 거예요? 화목해된 삶이 뒤따라와야 되는 거죠.
실제로 화목해된 삶을 누려야... 십자가가 의미가 있는 거지
이론적으로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죄를 회복했습니다. 내 죄값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실제 현실의 삶에) 아무것도 따라오는 게 없어요.
그러면 십자가라고 하는 게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예요.
그럼 뭐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하나님과 깨어졌던 관계를 다시 화목케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십자가의 결과 이어져야 될 것은
하나님과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화목한 관계죠. 그걸 누리는 거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누가 오신 거예요? 성령께서 오신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복음의 완성은 뭐냐 하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세요.
그래서 하나님과 실질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대제사장의 사역'입니다. *지금 하늘에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사역
(여기까지 히브리서 24강의 복습이었고요)
▲그래서 오늘은 이어서 예수께서 행하신 하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히7장부터 10장까지 얘기하는 것을 쭉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히7장부터 10장까지는 하늘 제사장으로서 행하신
예수 그리스의 초월적 사역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것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지성소에 들어가서 사는 삶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사는 삶'이 예표하는 건 뭐냐면
하나님과의 실질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예표하는 거죠.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실질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누림...
구약에서는 이런 게 아니었어요. 구약에서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고, 무서운 존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이런 건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이신데...
구약은 멀찌감치 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짐승을 죽여서 제사드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하는 것... 그것이 구약에서 생각하는 하나님과 관계였는데,
그게 아니라 신약에 지성소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실질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누린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히브리서 7장~10장에서 이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뭐냐 하면 '더 좋은' 입니다.
7장~10장사이에 '더 좋은' 이라고 하는 표현이 7번 사용됩니다.
-더 좋은 소망,
-더 좋은 언약,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온전한 장막,
-더 좋은 제물,
-더 낫고 영구한 소유,
이렇게 일곱 가지의 '더 좋은'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신약 복음들의 핵심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을 뛰어넘는 그런 신약의 축복이 있는데,
그것을 (구약보다) '더 좋은'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거죠. 더 좋은, 더 좋은...
더 좋은 소망이 있고, 더 좋은 언약이 있고,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온전한 장막, -더 좋은 제물,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게 구약보다 더 좋은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이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더 좋은 일곱 가지를 오늘과 다음 주에 걸쳐서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신 더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단순히 구약에서 얘기한 것을 성취하시는 그 차원을 뛰어넘어서,
더 좋은 것을 주시고, 더 좋은 것을 누리게 하신 그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하늘로 오르신 예수께서는, 우리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인도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지성소'로 대표되는 하늘에서의 삶이에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하고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제,
이것이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아멘!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즉 휘장 안으로, 지성소로... 그렇게 나아가는 새로운 살길을 여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따라서 이 새로운 살길로 들어갈 때,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더 좋은 거예요.
더 좋은 것을 누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자 일곱 가지 더 좋은 걸 차례로 살펴볼 텐데요. (오늘은 그 중 ◑1.만)
◑1. 더 좋은 소망
히7: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첫 번째로, 더 좋은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거예요.
'더 좋은 소망'은, 신약시대의 소망을, 구약시대의 소망과 대조해서 표현한 말입니다.
구약시대의 소망은 뭘까요? 구약에 살았던 사람의 소망은 뭐였냐면,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겁니다. 이게 구약시대 사람들의 소망이었어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은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성경은 '율법은 아무도 온전하게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소망은 율법을 완전히 이루는(만족시키는, 지키는) 거예요.
율법은 저주를 담고 있잖아요. 율법을 이루지 못하면 저주를 받게 되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서, 이루어서 저주를 피하는 거죠.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율법적으로 완전해지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그게
구약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인 본문은 뭐라고 그러냐면
'율법은 아무도 온전하게 하지 못한대요.'
즉 아무도 완전히 지키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도 온전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그것은 '연약하고 무익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7:18
그런데 이것은 여러분, 율법이 연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이 연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연약하다는 거예요.
율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당연히 좋은 거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건데, 악한 거를 주셨겠어요?
율법은 당연히 좋은 것이고, 당연히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따라야 될 인간이 연약해서,
그게 아무리 좋은 거라도, 온전히 다 지킬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율법이 좋다는 건 알겠어요. 그 율법대로 살면 너무 좋은 것도 알겠고,
그 율법대로 살면 하늘의 복이 부어지는 것도 다 알겠어요.
반대로 그 율법에서 벗어나면, 저주가 내려오는 것도 알겠는데,
문제는 아무리 좋은 거고, 아무리 완전한 거면 뭐합니까?
인간이 연약함으로 인해서, 율법을 온전히 지킬 힘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익하다는 거예요. 7:18
아무리 좋아 봐야 뭐 하는 거예요. 어차피 못 지키는데...
그렇기에 이 율법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완전해질 소망도 없고요. 저주를 피할 소망도 없어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소망도 없어요.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거든요.
죄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하나님 옆에 가까이 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때 하나님은, 두려움과 정죄의 대상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두려움이었고,
그 앞에 나가면 늘 정죄와 저주가 있습니다. 율법을 다 못 지켜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능력이 없는 인간은,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피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게 우리 현실이라는 거죠.
이게 구약의 현실입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죠.
율법을 이룰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겐 소망이 없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죄와 싸워보신 분들은 알 거예요.
이거는 죄와 싸워본 사람만 알아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6장, 7장에서 하는 얘기가, 죄와 싸웠던 얘기잖아요.
죄와 싸워본 사람들은, 우리가 율법에 의하면 얼마나 소망이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죄와 싸워서 이겨보신 적 있으세요? 솔직하게 한번 얘기해 봅시다.
죄와 싸워서 이겨보신 적 있으세요? (없어요)
죄를 안 지으려고 결심하고, 결단하고, 금식하고 다 해보지만... 100전 100패입니다.
우리가 죄와 싸워서,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함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죄와 싸워본 사람만 알아요.
성경에서는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거라고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한 거라고 하고...
이거 한번 싸워본 사람들은 알아요. 싸워본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요.
아무리 노력해도... 죄와 싸우면 백전백패입니다.
백전백패라서 결국 좌절만 남아요. '나는 안 되는구나... 나는 이길 수가 없구나'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현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더 좋은 소망'이라는 건 뭐냐면, 이 율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소망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게 더 좋은 소망이라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이 율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더 좋은 소망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더 좋은 소망'의 내용입니다.
1) 율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소망을 주셨고
2) 이게 해결되니까 자연이 따라오는 게 뭐냐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거죠.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두려움으로 말미암고, 저주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되는 이 소망이
'더 좋은 소망'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참 아이러니한 것은 뭐냐 하면, 이 더 좋은 소망을 누리기 위한 열쇠가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나에겐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아이러니 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롬8장에 오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 것을 선포합니다. 8:1~2
기쁨으로 선포하고 있죠. 그게 뭐냐면 더 좋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걸 본 거예요.
그런데 그 전까지는 뭐하냐면, 율법하고 육신의 싸움을 막 격하게 싸웁니다.
그런데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율법과 싸우려고 해봐도,
자기가 죄와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롬7:24
그러니까 바울도 절망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뭐냐 하면, 바울이 이렇게 절망했기 때문에
사실은 더 좋은 소망이 역사하기 시작한 거예요.
'내가 안 되는구나' 라는 걸 깨달으면서부터, '더 좋은 소망'이 역사하기 시작해요.
그전까지는 사람들이 왜 '더 좋은 소망'을 얻지 못하냐면,
그전까지는 육신으로 싸우는 거예요.
'나는 그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열심히 죄와 싸워서
죄를 안 지면 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든지 죄를 안 지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싸우는 거예요. 그러면 '더 좋은 소망'이 역사할 수 있는 룸이 없어요.
'더 좋은 소망'이란,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역사할 수 있는 룸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 나는 백전 백패구나. 이건 싸워봐야 한 번도 못 이기겠구나...
율법으로는 내가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이 아예 없구나. 나는 죄와 싸울 때마다 지는구나'
이것을 깨닫는 순간 '더 좋은 소망'이 역사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이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열쇠입니다.
여러분 '자기 의'가 남아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걸 경험하는 게 제한적이에요.
'성령의 역사가 아예 없다' 그러긴 뭐하지만... 제한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 의'가 없는 사람은 '아, 성령님밖에 없으시구나'
이게 됐을 때, 더 좋은 소망이 역사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여하튼 '더 좋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소망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소망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우리의 육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이건 백전백패예요. 그런데 성경은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보면 명확하게 얘기하잖아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거예요.
이거는 그냥 시작부터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거예요.
여기서 주체가 누굽니까? 내가 이루는 게 아니에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이게 더 좋은 소망입니다. 아멘 7:19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율법으로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죄의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영혼을 무겁게 짓누를 뿐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죄하고 싸워보려고 하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안 돼요. 계속 집니다.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더 많습니다'도 아니죠. 항상 집니다.
▲그런데 여기 '더 좋은 소망이 있다'는 거예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롬8:4
'목사님,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지금부터 제 얘기를 들으시면 '가능하구나' 하는 게 동의가 되실 거예요.
성령의 내주하심이, 어떻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되는가요?
원리는 이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에게 맨날 패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내 안에 죄를 짓고 싶은 원함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러니까 내 안에 죄에 대한 유혹이 없고, 죄를 짓고 싶은 소원과 원함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죄한테 넘어지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 죄를 짓고 싶지도 않은데, 내가 그 죄를 왜 짓겠습니까? 그건 싸울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와 싸운다고 하는 건 뭐냐면,
내 안에 죄에 대한 원함이 있어요. 죄에 대한 유혹이 있고, 원함이 있어요.
그런데 그 죄에 안 지려니까.. 이제 싸우는 거죠.
그런데 그 죄한테 안 넘어가려니까.. 이제 싸우는 건데,
내 안에 그런 죄에 대한 원함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포인트가 뭐냐 하면, 그 원함이 있는 한,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원함이 있는 한, 싸워서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원함의 본질이 뭐냐면,
사실 영이거든요. 영은 갈망이라고 했잖아요.
원함의 본질이 영인데,
육신은, 그 영의 원함을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 안에 죄와, 하나님이 금하신 것에 대한 원함이 있으면,
내 육신은 죄를. 그 원함을 거스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게 '육신의 소육을 따르는' 거죠.
롬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한다' 이게 뭐냐면
우리 안에 이런 세상의 영이 역사하고 있으면,
그걸 따라가게 돼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이길 수가 없는 거죠.
자,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성령 충만해지면 뭐가 변하냐면,
원하는 게 변해요. 소욕이 변하는 거예요, 거룩한 소욕으로!
예를 들면, 우리가 항상 그러면 좋겠지만, 항상 그렇진 않더라도, 가끔 그런 때 있지 않아요?
막 은혜를 엄청 받았어요. 막 성령을 엄청 충만하게 받았어요.
그러면 모든 원하는 것이 '조금만 더 예배했으면 좋겠는데...'
'조금만 더 기도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원함이 나올 때가 있잖아요.
그때 여러분, 다른 생각이 드세요? 죄의 소욕이 나를 지배합니까? No
물론 긴 시간은 아니더라도,
성령충만, 성령에 지배당하면... 내 소원이 (소욕이) 바뀌는 거예요.
세상 소욕, 세상 죄를 지을 생각이... 아예 없어지는 거예요.
그 때는 더 예배했으면 좋겠고, 더 기도했으면 좋겠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고,
그런 마음이 충만하죠.
그리고 그때는 죄와 싸워서 이기고/ 지고를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와 싸울 이유가 없어요.
왜요? 내 마음에 죄에 대한 마음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내가 싸워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이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에!
즉 죄에 대한 마음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냥 율법의 요구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내가 싸우고 노력하고 이렇게 안 해도!
그러니까 모든 포인트는 뭐예요? 성령 충만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성령 충만하면... 싸워서 이기지 않아도... 그냥 이루어지게 된다.는 거예요. 율법의 요구가!
그리고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더 좋은 소망'이라는 거예요.
▲자, 이것을 소망이라고 얘기한 것은,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는 뜻이에요.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 시점이잖아요. 아직 완전한 건 아니지만,
성령께서 내 속에 내주하심으로... 우리 안에 그 일이 시작됐다는 거예요. *율법의 요구 이룸
또 그러다 어느 순간에, 성령이 떠나시지는 않지만,
성령 충만을 잃어버리고, 성령이 피폐해지면 그럼 또 어떻게 됩니까?
또 죄에 대한 소욕이 스물스물 올라오죠. 그래서 넘어지고 하지만,
하여간 어찌되었든지 간에, 우리 안에 성령 충만한 순간만큼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정확히 이 이야기를 하잖아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건 성령 하나님이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분이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너희에게 소원을 주셔!'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은 소원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런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를 짓고 싶어 죽겠는데, 억지로 죄와 싸우는 것,
죄를 짓고 싶어 죽겠는데, 억지로 막 하나님을 섬기는... 이거는 신약의 법이 아닙니다.
새언약이 아닙니다.
구약은, 아직 우리 안에 성령께서 오시지 않으셨으니까,
내 안에 계속 죄를 짓고 싶은 소원과 소망이 있는데, '죄를 지으면 안 돼 !'
율법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 의지로 죄와 싸우는 건데...
신약은 그렇게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신약은 '너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밖에서 율법으로 옥죄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즉 성령께서 계신데, 이 성령이 뭐를 행하시냐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는 거예요.
즉 '네 마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은 소원이 생기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자체가, 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싶고,
막 더 기도했으면 좋겠고, 예배했으면 좋겠고,
선교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불타고...
막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만 하고 싶은 소원이 생기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 이거는 죄와 싸울 필요도 없는 거죠.
이런 식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더 좋은 소망'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해질 수 있다는 소망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전혀 안 짓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것을 우리가 24시간 365일 계속 끝까지 유지한다면... 전혀 죄를 안 지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데, 아직 그렇게 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아직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고, 타락한 마음과
성령께서 주신 새 마음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바울은 이걸 뭐라고 그러냐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내 안에서 두 법이 싸우고 있도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내 안에 두 법이 싸우고 있다는 거예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두 마음이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게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냐 하면
'아, 성령 충만하면 이길 수 있구나!' 하는 소망을 주는 거예요. 그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내가 죄와 싸워서는 이길 수 없지만, 성령 충만하면 완전해질 수 있구나!
하는 소망을 주시잖아요.
그래서 이 소망을 가지고,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만, 조금 더 성령 충만하게,
조금 더 성령님과 가깝게, 조금 더 성령님과 동행하고,
조금 더 성령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우리가 성령 충만했던 시간이, 지금은 10% 밖에 안 돼요.
90%는 이제 성령이 피폐(충만과 반대)하게 살고 있어요.
그런데 성령 충만한 시간이 점점 늘어나서 내 삶 속에 20% 되고, 30% 되고, 40% 되고...
이걸 뭐라고 그러는 거예요? 성화되어 간다고 그러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로를 닮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포인트는 뭐냐 하면, 율법적으로 죄하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지... 이거 하면 어떡하지? 이거 하면 안 되는데...' 이런 싸움이 아니에요.
이거는 필패예요. 이건 절대 이길 수 없어요. 성경도 그렇게 얘기하고요.
그 대단한 사도바울도 안 된다고 했고,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죄와 싸워왔던 과거 전적을 쭈욱 보니까 백전백패 예요.
죄와 싸워서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요.
이게 이길 수가 없어요. 그냥 버티고 버티고 해서 '얼마나 늦게 죄에게 굴복하느냐?' 하는 거지...
여러분 죄와 싸워보신 분들은 알아요.
조금 더 늦게 죄한테 굴복하느냐, 빨리 잽싸게 굴복하느냐? 하는 그 차이지,
결국 가보면 굴복하고 끝나요. 이게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또 굴복하면 뭐가 옵니까? 그럼 죄책감, 좌절감, '난 안 되나 봐!'
이런 생각들이 들죠. 천번 싸우면 천번 다 져요. 이겨본 기억이 없어요.
그러나 미뤄본 기억은 있을 거예요.
버티고 버티다가, 그냥 당장은 안 넘어가지만, 한 일주일 버티고, 한 달 버티고 하는데,
이겨 본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언제 완전해지냐면? 언제 이기냐면? 성령 충만할 때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는 이런 싸움 자체가 아예 안 일어나요.
왜요? 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어요. 죄에 대한 마음 자체가 없고요.
죄에 대한 유혹 자체가 없고...
그냥 내 안에 들어오는 생각은 뭐냐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지?'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지? 어떻게 하면 더 예배 하지?'
그냥 그 생각이 계속 제 안에서 올라오고 있지...
죄하고 싸우고 어쩌고 하는 그 마음 자체가 안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의 모든 싸움의 포커스는 뭐예요? 성령 충만이라는 거예요.
성령 충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놓쳐버리게 되면 '더 좋은 소망'을 잃어버리고요.
구약의 싸움을 싸워야 돼요.
그런데 구약의 싸움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싸움입니다.
계속 패하는 싸움을 싸우는 거예요. 계속 계속 패하는 싸움을 싸워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낙심, 절망, 어두움, 여기로 계속 몰려가는 거예요.
여러분, 그건 소망이 아닙니다. 절망이지!
우리의 진짜 더 좋은 소망은 뭐냐면, 우리에게는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충만할 때는, 결국 우리가 온전해진다는 거예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며 살게 된다는 뜻)
그리고 이 성령 충만한 시간들이, 100% 계속 지속되는 건 없어요.
우리 육신이 있는 한!
그래도 처음에는 한 10%밖에 안 되는데... 그러니까 24시간 중에 한 10%,
하루에 2시간 정도만 성령 충만하고, 나머지는 성령이 고갈되는데
이게 성숙될 수록, 이제 성령 충만이 계속해서 조금씩 길어지는 거죠.
그래서 이제는 하루에 한 20% 성령 충만한 시간을 유지할 수 있고,
하루에 한 30% 성령충만한 시간을 유지할 수 있고...
그러면서 점점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성화되어 간다고 하는 것은, 내 인격이 변하긴 변하겠지만,
그것이 하여간 도 닦는 것하고는 달라요. 도 닦는 것하고는 달라요.
내 안에 성령께서 충만해지는 것이 성화이지,
내가 더 좋은 성격의 사람이 되어가는 게 성화가 아니에요.
그거는 불교나 도교에서 얘기하는 도 닦는 개념이지,
성경이 얘기하는 성화는, 그거하고 달라요.
성경이 얘기하는 성화는, 우리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거예요.
그 시간이 점점 많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더 큰 은혜는 뭐냐면, 설령 우리가 성령 충만을 놓치고
성령 피폐에서 실수하고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이뤄놓으신 일이 있기 때문에, (이 단락은 칼빈주의 신학적 측면의 성화)
그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와 이건 부전승이예요. 성도는 기본적으로 부전승을 깔고 들어가는 거예요.
설령 우리가 죄 때문에 실수하고 넘어질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는 '의롭다' 하나님이 칭하신다는 거죠.
이게 칭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안 돼요. 성령충만, 주님과 교제까지 나아가야죠)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실수하고 넘어질 때조차도
문제가 되는 건 뭐냐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모두 믿는 자들에게는 죄를 질 때조차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질 때 유일한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에요. 죄책감과 좌절이에요.
이게 조금 조심해서 해야 될 얘기이긴 한데, 사실이에요.
왜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죄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는, 그냥 의롭게 보시는 거예요. (미래의 죄까지도)
그래서 설령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실수하고 넘어졌다 할지라도,
그냥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면 용서해 주세요.
그것으로 끝이에요.
거기에 그 어떠한 저주도, 어떠한 하나님의 진노도 없다는 거예요.
회개가 왜 중요하냐면, '회개해야만 용서에 준다'는 게 아닙니다.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어요.
그런데 '회개를 안 한다'는 건 뭐냐면, 똑같은 죄를 계속 짓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계속 좌절하고, 계속 절망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 영혼이 파괴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회개를 중요하게 말씀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칭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이미 그 안에 있는 자는 다 의롭다고 칭하셨지,
우리가 뭘 해야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설령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조차도, 좀 심하게 들리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는 의롭다'고 하신다는 거예요. 마치 부전승이에요.
그런데 이 죄의 문제는, 뭐라고 그랬어요? 죄책감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죄책감이 들어오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는 게 아니에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은 우리를 저주하지 않으시고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질책하지 않으세요. 십자가 공로 때문에!
질책하실 때가 있긴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버리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야, 계속 그러고 있으면 네 영혼은 죽어!'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
우리 이렇게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항상 축복하는 분이세요.
심지어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조차도, 우리를 축복하세요.
그때 조차도 우리를 사랑하세요. 아멘! 그게 복음이에요.
그래서 이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이길 수 있어요.
죄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이길 수 있어요.
십자가와 성령(충만)이 있을 때,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완승을 거두게 돼요. 아멘!
그러니까 우리가 실질적인 죄로부터의 승리는,
성령 충만함으로 계속해서 싸워나가서 이기는 거고,
욕신을 갖고 살 동안은, 살다보면 그 동안 넘어지죠.
하지만 넘어져도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고 있으면, 그때조차도 우린 이긴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래도 날 의롭다 하셔!' 그래서 좌절과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 이게 뭐예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거예요. 아멘!
이게 '더 좋은 소망'인 줄 믿습니다. 이게 더 좋은 소망이에요. 히7:19 ◑1. '더 좋은 소망'
그래서 우리가 아직 완전해진 건 아니지만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점점 더 새로워져 갈 거예요. 아멘. 할렐루야!
▲더 좋은 소망의 두 번째 내용은 뭐냐면
그래서 그 결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는 거예요. (첫 번째 내용은 죄와 싸워 승리)
히7:19절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성경의 내주하심을 인해 완전해지는 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인데요.
그 결과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거예요.
이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죠.
기쁘게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갑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 바로 옆에서,
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누립니다. 친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게 돼요.
그래서 이전에는 종이었지만, 이제는 자녀예요.
자녀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담대함이라고요.
성경의 표현을 빌면 담대함이고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를 빌리면 어리광이에요.
자녀의 특징은 뭐냐면 어리광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부모한테는 말도 안 되는 것도 해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지 않으세요? 물론 좀 나이가 들면 염치가 있어서 안 그러겠지만
어린 애들은, 말도 안 되는 거를, 담대하게 해달라고 그러잖아요.
당연히 그런 것처럼... 이 담대함, 어리광... 이게 뭐냐면 자녀거든요.
이게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라는 거예요.
'더 좋은 소망'이라는 건 뭐냐면,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를 누리게 된다는 거예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한테 돈 꿔드린 것도 아닌데, 마치 내 것처럼 내놓으라고 그런다는 거예요.
그러고도 아무런 부담을 안 느낀다는 거예요. 왜요? 자녀니까!
이게 예수께서 해놓으신 일이에요. '더 좋은 소망'이에요.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주인-종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더 좋은 소망'이란
-첫째,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이고
-둘째, 그 결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거예요.
소망이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소망이 요구되는 건 인내에요.
한꺼번에 되지는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돼요. 언젠가는 된다는 말도 좀 어폐가 있어요. 매일매일 더 발전해요.
성령 충만한 것도 매일매일 발전할 거고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도 매일매일 깊어질 거예요.
어제와 오늘이 다를 거고, 오늘과 내일이 다를 거고,
매일매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줄로 믿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더 회복되어 갈 것이고, 매일매일 더 치유되어 갈 것이고,
언젠가는 완전해집니다. 아멘!
그래서 여러분, 복음은 단순히 의인으로 칭함받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매일매일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
매일매일 더 완전한 곳(성숙, 온전)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더 기대되고 더 충만해지는 것이 복음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누가 주신다고요? 내주하시는 성령님!
이 소망을 붙잡고 끝까지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