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3) -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장) - YouTube
*3:50초~44:00까지 녹취
◈그리스도의 편지 P1 고후3:1~11 고린도후서 3강 P1
*지난 2강 복습 주1)
오늘 본문 고후 3장은 "그리스도의 편지" 이야기입니다.
이 편지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 내용이 1절부터 나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문제 삼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답을 제시합니까?
◑고후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자천이란, 스스로 자기를 추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천은 좀 민망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나를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하고 추천해 줘야 되는데,
내가 나를 자천하는 것은, 사실 좀 경우에 어긋나기도 하고, 민망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이 '어떤 사람'이 누굽니까? 3:1
개역에는 단수로 나와 있는데, 다른 모든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
바울이 고린도전서 그리고 후서에서 계속 말하는 '어떤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늘 했던 일이 있잖아요.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원래 사도라 함은,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과 함께 행했던 자들을 사도라고 하는데,
'어떻게 바울이 사도냐? 예수님과 함께 얼굴 본 적이 있느냐? 면식이 있느냐?'
오늘날로 치면 '바울은 정식 신학교를 나왔느냐?' 등등의 여러 가지 공격들을 하는 사람들,
'그래서 바울은 사도권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바울, 실라, 디모데)의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추천서를)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다른 도시로 갈 때 추천서를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자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읽어야 되는데,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자기 추천서를 들고 온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당시 순회 성경교사들은 면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선 거짓 교사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있다가 온 사람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에서도
순회성경교사들이 복음을 잘못 가르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지요)
그럼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디에서부터 온 사람들인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지를 입증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 '어떤 사람들'이 그걸 입증하기 위해서 어디선가 추천서를 가지고 왔다는 얘기입니다.
이 추천서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 출처가 어디입니까? 그건 뻔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대교회 시절에, 가장 권위있는 교회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가장 권위있는 모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예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당시 세 분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베드로, 야고보(예수님의 동생), 요한
혹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아니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써 준 추천서를 들고 와 가지고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에게 인정 받은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직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 말을 들어 주십시오!'
라고 추천장을 들이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추천서, 추천사'라고 하는게 참 이중적이지 않습니까?
진짜 사람을 추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사람을 정말 추천하려면, 직접 손잡고 데리고 가서, 그래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고
'이 사람은 이런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진심으로 소개해야 됩니다.
그런데 종이에 그냥 몇 줄 써서, 도장 찍고 직인 찍어 보내는 건, 형식에 불과한 겁니다.
근데 이런 사람들이, 이런 추천서를 받아 가지고, 고린도로 온 거예요.
그럼 '예루살렘 교회에서 도대체 누가 이런 추천서를 써서 줬느냐?'
뻔하죠. 상상 가능합니다.
'이 추천서 좀 써 주십시오. 제가 여기서 훈련 받았습니다. 저는 이 교회 성도입니다' 라고
하면, 사도들이 그거 안 써주고 배깁니까?
저한테도 뭐 1년에 몇십 통 추천서 써달라고 그러는데요.
굳이 이 사람과 아주 친하지 않아도, 뭐 추천서를 당연히 써주죠.
그 순회성경교사들이 (당시 그런 문화가 있었나 봐요. 돌아다니며 성경 가르치는 사람들)
그 추천장 들고 와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제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그럼 나도 한번 나를 추천해 볼까?' 이런 얘기죠.
바울이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자기가 추천서를 어디서 받아오겠습니까?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구약성경을 배웠습니다.
가말리엘 스승님이 살아계시다면, 가서 스승님 추천서를 받아 오면 됩니다.
또는 자기와 동문 수학했던 사람들의 추천서를 받아와도 됩니다.
그러면 유대교 율법의 정통한 추천서가 됩니다.
그리고 또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를 찾아가서, 자기가 또 받아와도 됩니다.
바울도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교제의 악수를 한 적이 있었죠.' 갈2:9
그런데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겁니다.
왜요? 2절을 보시면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추천서다)' 그랬습니다.
◑고후3: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새번역) '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적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읽습니다.'
'편지'라는 말은 추천서라는 뜻입니다.
'너희(고린도 교인들)가 곧 우리를 추천하는 추천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누가 추천서를 받아 와서,
이런 식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지 몰라도,
'그러나 고린도교의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나를 입증하는 추천서다.
너희가 나를 입증한다'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을 불신하고 배척한 교인들은 소수였습니다.
다수는 바울을 인정했습니다. 그 다수가 바로 '바울의 추천서'인 셈이죠.
이게 대단한 반전이고 놀라운 고백입니다.
고후2: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줄 확신함이로라'
바울이 겪는 모든 희로애락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1:6-12).
지금은 관계가 많이 악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 그들의 기쁨이 된다는 확신을 표하는 것이죠.
혹자는 위 구절에서 고린도에는 문제를 야기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2:5, 6, 11:13)
대부분의 교인들은 여전히 건전했다고 추론합니다. '너희 모두의 기쁨')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의 삶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삶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다. *바울, 실라, 디모데
너희들의 삶을 보면, 내가 가르침을 잘한 걸,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내가 굳이 다른 사도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와서, 내가 나를 입증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의 변화된 삶이 나의 사도 됨을 인정하고 있다' ... 이 얘기예요.
'뭇 사람이 알고 잃는 바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읽고 있는 거예요.
왜요? 교인들이 편지니까!
고린도 성도들의 삶이, 성도들의 삶의 모양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눈에 읽힌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뭇 사람이 다 알고 있고 읽고 있다'.
그러니 나는, (너희를 가르친) 나를 입증하기 위해서
종이 추천서는 의미가 없고, 필요도 없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어요.
▲바울은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 소망 사랑은, 바울의 시그니처 단어라 그랬습니다.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신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곧 그들도 그리스도의 편지예요.
그들의 삶이 바울의 사도권을 입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살전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본이 되었다'
이건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경험하고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살전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여러분, 이건 여기만 나오는 말씀이 아니에요. 성경 전체 흐르고 있는 정신입니다.
또 보디발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보았더라' 창39:2~3
보디발은 불신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근데 어디서 종 하나가 왔어요. 그 종을 샀습니다. 그 종은 히브리 노예 출신입니다.
근데 집에서 이 종이 하는 모습과 행동들을 보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이 보인다'는 뜻이에요.
범사에 그를 형통하게 하심도 보디발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삶이, 보디발에게는 하나님의 편지가 된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우리의 인생은,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처럼 다 읽혀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을 주시고, 내 삶을 주장하시고 알려 주셨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편지로서, 사람들에게 다 보여지는 삶인데, 잘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반듯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보여지니까, 편지니까!
이 편지는 은밀한 편지가 아닙니다.
개인간의 편지는 내밀하지 않습니까? 그걸 접어서 봉투에 넣어서 풀 붙여서 보내고,
누군가가 이 편지를 뜯어보면 정보통신법 위반이 됩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누구에게나 다 보여지는 편지입니다.
누구나 다 알려지고, 다 볼 수 있는 편지가 '나'라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좀 오래 살다 보면, 수십 년 살다 보면 '평판'이라는게 생깁니다.
근데 그 평판은, 사실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한 순간은 오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와 악연 때문에 얽혀서, 그 사람이 나를 '이상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평판은, 그 사람의 삶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근데 나의 평판이 내 귀에 잘 들립니까? 잘 안 들립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 간신들만 있어서, 좋은 얘기만 해주니까요.
우리가 그 평판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평판을 듣고서, 내가 잘못된 건 고치고, 수용하고, 수정하고... 그래야 올바른 인격이 됩니다.
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궁극적 정체성이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3절입니다.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너희는' 즉 고린도교의 성도들은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우리는 바울과 바울 일행들이죠.
즉 우리가 너희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기도로 돌보고, 가르치고, 복음 전하고...
그래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었으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좀 생각해 봐야 됩니다.
1) 첫째, '너희는 바울의 편지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어요.
이 성도들의 정체성을 딱 규정해 줬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다'
그럼 바울이 목회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사람'을 만든게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이 사람을 믿고 성장시켰다.는 뜻이죠.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따르는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죽고,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사람'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한 겁니다.
2) 두 번째 이 '고린도'라는 도시의 주변 정황을 우리가 한번 다시 살펴봐야 됩니다.
1강에서 공부했지 않습니까? 고린도는 음란한 도시입니다.
상업적으로 굉장히 활발하고 발달한 도시입니다. 항구를 두 개를 끼고 있습니다.
아시아로 가는 항구 겐그레아,
유럽으로 가는 항구 레케온,
그래서 교통의 요지라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상인들의 돈을 그 도시에 묶어두기 위해서,
아프로디테 신전을 아크로 고린도 언덕에 만들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아크로 고린도 아래에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아폴론 신전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신전이 많습니다. 아주 어마어마한 신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음란한 도시, 우상을 섬기는 도시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
그 고린도의 불신자들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로 기능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이나 상황을 탓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주변 환경이래서, 내가 잠깐 나를 숨겨야 됩니다. 내가 나를 좀 감춰야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고린도에 사는 성도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드러내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우리가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18~20
마태복음 28장이 끝장이거든요.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너희는 가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갑니다. 제자들이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려면
이 제자들의 삶이 무엇이어야 됩니까? '그리스도의 편지'여야 됩니다.
그 사람에게 세례를 받을만큼, 제자가 인격적이어야 됩니다.
그분에게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내가 자발적으로 배울만큼, 제자의 삶이 괜찮아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3년 동안 그렇게 훈련하셨습니다.
제대로 훈련시켜서 그리고 내보내신 겁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 넣으시고,
그들의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를 하나하나 써 넣으시고,
'너희가 이거 가리지 마, 이거 숨기지 마!
여기에 일점일획도 너희들이 다르게 행동하지 마!' 그리고 보내신 거예요.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이 제자들의 삶을 보면서 예수를 느끼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걸 '증인'이라 그러죠. 행1:8
그럼 우리는 예수님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가고 있는가요?
깊이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고후3: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무슨 확신일까요?
◑고후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여기 '만족'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조금 더 알기 쉽게 표현하면 '자격, 적합성' 이렇게 옮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면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어떤 자격입니까?
사도성의 자격, 우리의 사도로서의 적합성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고, 종이 추천서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리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도 똑같은 얘기를 하셨습니다.
엡3:7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된 거예요.
3년 동안 (신대원) 기간 채워서 일꾼이 된게 아니에요.
추천서 받아서 일꾼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서 바울은 일꾼이 된 것입니다.
즉 그러면 바울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편지 아닙니까.
바울 자기가 그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편지로 고린도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길러냈습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로 길러내고 있는가요?
그리고 우리는, 성도들을, 내가 말씀을 먹이고, 돌보고, 섬기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로 길러내고 있는가?
내 구미에 맞는 사람으로 기르는게 아니에요.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도록 길러내야 합니다.
바울이 또 이런 얘기를 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은 바울을 포함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고후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율법 조문 : letter (율법 글자)
'그가 또한 우리를'
하나님이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적합하게 하셨으니, 자격있게 하셨으니... 라는 뜻입니다.
자 '새 언약의 일꾼'이라 그랬습니다.
새 언약이 있다면, 옛 언약이 있단 얘기죠.
여기서 우리가 조금 헷갈리는 걸 정리해야 됩니다.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여러분 바울이 이런 이분법적인 용어를 자주 쓰거든요.
죽이고/ 살리고
옛언약/ 새언약
폐기해야 될 것/ 새롭게 해야 될 것
이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어떤 마음이 생깁니까?
'율법은 폐기돼야 되는 것이고, 복음은 좋은 것이고,
율법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무조건 수용해야 될 것이다'
이런 도식이 생긴다고요.
근데 그건, 바울이 전한 바울 신학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한번 볼게요.
'새언약'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이 렘31:31~32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1~32
이 새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옛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은'
옛언약은, 출애굽 때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백성사이에 맺었죠. 출19장
그걸 우리는 율법이라고 합니다.
시내산 언약(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이고,
그 십계명이 이렇게 펼쳐진게 모세 오경입니다.
이걸 우리는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새 언약은, 출애굽 당시에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은' 출31:32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
하나님이 남편이었대요. 그럼 우리는 신부잖아요.
신부가, 남편인 신랑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건, 딱 한 가지입니다.
무엇으로 깹니까? 음란(외도)으로 깨는 겁니다. 즉 우상숭배로!
우상숭배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 그래서 옛언약, 즉 모세오경으로부터 비롯되고, 십계명으로부터 비롯됐던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김으로 폐기된 겁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해버렸잖아요.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희망을 두시지 않고,
북이스라엘 멸망시키고, 남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그게 옛 언약입니다.
옛 언약을 가지고는 도무지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으니, 그들이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 언약에서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이스라엘이 옛 언약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받으려면
율법을 다 지켜야 되잖아요.
(물론 '율법의 정신'을 알면 되는데) 율법으로는 그들이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새언약이 누굽니까?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죠.
렘31:33절 '그러나 그 날 (유다가 망한)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새)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이게 중요해요. '나의 법'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거든요.
'말씀을 그들의 속에 둔다' 그들의 마음에 말씀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시내산 율법을 너희들에게 줬더니
너희들은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망해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그날이 오면, 새 언약을
너희들 마음속에 두겠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거하는 말씀' 누구입니까? 성령이에요.
이거는 '성령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언제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성령 받아요?
그냥 막 산에 가서 방방 뜨면 성령 받습니까? 성령은 회개해야 성령 받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친히 임재하십니다.
바울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공개적으로 임하는 유형이 있고,
혹은 디모데처럼 점진적으로, 성령이 씨앗처럼 임해서, 남들 눈에 잘 안 띄게
성장하고 자라는 식으로 임하시는 유형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디모데처럼
그렇게 성령이 내 마음속에 성장하고, 자라고, 성령이 나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신약시대에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이고, 성령이 중요하고,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이게 아니라,
율법을 지키려고 발버둥치고, 애쓰고, 노력하고, 수고하는데...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잖아요. 안 되니까 거기서 나의 무능을, 나의 연약함을 보는 것입니다.
'아, 나는 안 되는 자이구나'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힘쓰다가
결국은 우상숭배로 빠져서,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유다도 망해 버린 것처럼,
우리는 율법 지키려고 애쓰다가는, 망하는 거 밖에 남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얘기합니다. 본문 6절에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마지막은 죽는 겁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그 무능을 경험한 자들이, 결국 누구를 붙잡습니까? 그리스도를 붙잡는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들이,
예수 없이 한번 내가 구원받아 보겠다고, 율법 붙들고 살아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 없이 한번 버텨 보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 (의 영이) 아니면 안 되거든요.
이 율법에 다른 걸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돈으로 구원받아 보겠다고 했던 사람들..
권력으로 구원받아 보겠다고 했던 사람들..
돈과 권력과 나 자신의 성공으로 구원받아 보겠다고 한 사람들..
그들이 그게 안 되니까, 결국 그 끝은 멸망이니까,
거기에서 나의 철저한 무능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붙잡습니다.
예수님 붙잡고, 회개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때,
그때, 내 마음속에 성령이 임하시는 거예요. 그때 성령이 임하는 거예요.
그게 새언약 입니다. 나의 무능함과 죄악됨을 철저히 경험한 후에!
그러면 성령이 임하시면, 그 성령은 우리를 살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오잖아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6
그래서 여러분, 율법은 절대 무시될 수 없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의 무능을 철저하게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이 과정을 지금 성경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고전11:23~25은 성만찬 말씀인데요.
25절을 보시면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언약이니'
구약시대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피'를 의지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율법 잘 지키는 자야, 나는 율법 잘 지켜서 구원받을 거야' 라고 했던 사람들,
'나는 제사장 가문이니, 나는 유대인이니, 나는 할례받았으니, 구원받는 건 문제 없다'
라고 했던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철저하게 자기 무능을 깨닫고, 예수의 피 아래 무릎꿇어야 됩니다.
그게 새언약입니다.
히9:15절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된다'는 말은,
율법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 사이에 연결자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시대에서 성령의 시대로 넘어가는데, 예수를 폐기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의 시대에서, 그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예수님 아래에서 그 은혜를 깨달아야... 성령의 시대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됩니다.
여기서 '중보자'라는 뜻은 연결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고,
율법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를 연결하는 새 언약의 중보자..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통해, 죄의 권능을 깨달음과, 용서를 체험한 후에
성령의 은혜를 받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내가 찔림을 받고, 율법을 통해서 나의 무능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그게 우선 전제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깨달아집니다.
'아, 나는 율법으로는 안 되는구나.. 그럼 난 어떻게 구원받아?'
그런데 알고 봤더니 하나님이 나의 무능을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내어 주신 거예요.
'나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나는 이 많은 법조문을 지키지 못하고 망하는 인생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만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
그 십자가 아래로 내가 무릎꿇는 겁니다. 거기서 고개 빳빳이 쳐들지 않고
거기서 납작 엎드리고, 그 피의 공로를 내가 덧입는 겁니다.
그때 성령의 은혜를 내가 입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입니다. 율법은 폐기되어야 된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돼요.
근데 교회가 잘못 가르친 것이,
우리가 '복음 제시' 같은 거 하면
'자 따라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네, 하나님은 저를 사랑합니다'
'지금껏 모든 지은 죄는 다 용서 받으셨습니다'
'네, 나의 죄는 다 용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을 것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할렐루야!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부터 구원받은 기쁨으로 감격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게 뭐죠? 그리고 결신자라고 막 이름 쓰고 합니다.
여러분 그걸 우리는 '값싼 은혜, 값싼 복음'이라고 얘기합니다.
바울은 그런 복음을 얘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무능을 철저하게 깨닫고, 경험하고, 발버둥 치다가
도저히 안 된 사람이,
십자가 앞에 기어가는 거예요. 생명 얻어서 살려고요.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렸습니다. 독이 막 퍼져갑니다.
근데 끝까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자기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근데 마지막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이제 안 되겠구나...'
눈앞이 희미해지면서, 장대에 매달린 십자가를 봅니다. 그때 사는 거예요.
그게 은혜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이 율법을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죄를 깨닫고 좌절하게 하니까요)
근데 교회 안에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1) 첫 번째 유형은, 율법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은혜로만 살고자 하는 유형.
이런 사람들은 법도 없고, 기준도 없습니다. 무조건 좋은게 좋은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을 가지고 철저하게 투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무법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 lawlessness 마7:23 라는 말은 사실은 '법을 무시하는 무법자'라는 뜻
기준도 없어요. 법도 없어요. 그냥 다. 좋은게 좋은 거예요.
2) 근데 또 이런 유형도 있습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못하고, 은혜로 나아가지 못한 유형.
여전히 율법에 머물러 있는 이에요. 율법주의자들!
계속 법만 얘기하는 사람들, 계속 기준과 법만 얘기하는 사람... 둘 다 아직 부족합니다.
둘 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 자신의 무능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 주님께서 그걸 하실 겁니다. 언젠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 인생이 박살나게 될 날이 옵니다.
내 인생은 박살나지만, 그래서 내 자아는 깨어지지만, 은혜는 나에게 부어지는 날입니다.
'율법 조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
고후3:7~11절을 보시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 이것과
또 8절에 보면 '영의 직분' ... 이게 구별되죠.
율법 조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 ... 이게 구별됩니다.
1)'율법 조문의 직분'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
즉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가 했던 일,
2) '영의 직분'은 그리스도를 통과한 후에,회개후에, 성령 받은 후에 직분입니다.
1) 또 '정죄의 직분' 이건 율법을 가졌지만,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통과하기 전에 직분이에요.
율법으로 사람을 마구 난도질하는 직분입니다.
2) 의의 직분은 뭡니까?
그리스도를 통과한 후에 근데 여기 그리스도가 없으면 어떻게 돼요?
철저하게 이분법이 됩니다.
율법 조문의 직분, 정죄의 직분... 이건 나쁜 거고,
그 이후에 영의 직분과 의의 직분만 좋은 거고...
근데 이게 꼭 필요합니다.
율법 조문의 직분도 필요하고, 정죄의 직분도 필요한데,
그 과정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걸 통과해서 어디로?
영의 직분으로, 의의 직분으로 넘어와야 됩니다. 바울이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제가 이제까지 드린 말씀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롬7: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그렇죠.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율법을 통과해야만 내가 죽을 죄인 임을 깨닫습니다.
롬7: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언제 이렇게 한탄하는 겁니까?
'내가 율법을 그렇게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구나,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죄가 가득하구나..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정욕이 가득하고,
내 발은 죄의 길로 달려가는데 빠르구나.. 나로서는 그리스도 없이는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
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인생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롬8: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을 거쳐서,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는 성령으로 넘어갈 수 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를 통해서만!
롬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전에, 그리스도 이전에 율법은 차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차이가 있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차이가 있었고, 종과 자유인이 차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고 나니까, 차별이 없습니다. 막힌 담이 다 허물어졌습니다.
이제는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은 '살리는 영'이라 그랬습니다. 고후3:6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저는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그 공동체에서, 어떤 힘 있는 사람들이 자주
막 끝까지 가다가 하는 말이, '내가 되게는 못 해도, 너 안 되게는 할 수 있어!'
사실 무서운 말 아닙니까? 열 명이 있는데, 한 명이 죽을 각오로 주장하면 그 어떡합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공동체 평화를 위해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이 과정을 잘 통과한 사람은,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살리는 영이니까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율법으로 한번 살아 보려고,
그리스도 없이 한번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그게 안 됐잖아요.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고, 성령이 내 마음속에 임했으면,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이해하게 됩니다. 아직 '율법으로 사는 사람' 수준이니까요.
이게 다 통과된 사람들은 다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이런 얘기하죠. '나는 도대체 저 인간이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비방, 정죄하는 마음을 가지면,
아직까지 나는 그 과정을 다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비난 대신에 보듬어 주게 되잖아요.
내가 이해가 되면, 그를 기다려 주게 되고... 그게 '살리는 (:6)' 겁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임하면, 우리는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과정을 다 통과하고 나면, 품이 넓어지고 폭이 넓어져서
'살리는 영'이 우리 속에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판을 뒤집지 않습니다.
'살리는 영'으로 살아야 됩니다. 파괴하는 자가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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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조문의 직분 .. 없어질 영광'
바울의 논의의 주제가 언약에 관한 것에서, 직분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본절에 묘사되고 있는 장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을 수여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오는 출34:29~35의 장면입니다.
그 논점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율법을 선포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모세도,
그 직분으로 인한 영광 때문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는데, (수건으로 쌌죠)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파할 직분을 가진 바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크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돌에 새긴 것' 즉 '율법'이 본래는 선한 것이었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설명(롬 7:10-12)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조문(율법)은 곧 죽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런 정도의 전이해(前理解)는 되어 있었던 듯합니다.
한편 본절의 '없어질 영광'은, 바울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유대교의 전승에서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반박하면서, 그 광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후3: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율법 조문의 직분에 주어지는 영광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직분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거기에 비취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4:6)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빛이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 빛입니다.
◑고후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정죄의 직분 vs 의의 직분'
'조문의 직분'(7절)이 '정죄의 직분'으로
'영의 직분'(8절)이 '의의 직분'으로 대체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 앞에 인간을 세워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를 정죄합니다(롬 3:19, 20).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죄를 사면해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게 될 수 있게 합니다.
따라서 정죄의 직분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직분에 얼마만큼의 영광이 있느냐 하는 것은
더말할 필요가 없죠.
한편 본문에 나오는 '의'는, 윤리적인 무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계의 성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기인합니다.
의의 직분 속에는 그것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현존하는 것입니다
◑고후3: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더 큰 영광을 인하여'
본절에서는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이 극도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달의 밝기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모세의 영광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인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새언약 아래 있는 신약성도들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히 8:7-13).
◑고후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율법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지나간 시대에만 시한부적으로 존재 의의를 가질 뿐(롬 10:4)
천국에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에 반해 복음은 영원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代替)되지 않는 것입니다(막 13:31).
이미 지나가버린 것과 이제 시작되는 영원한 것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
주1) 지난 2강 복습
오늘은 고린도후서 3강으로, 고후3장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지난 시간 고린도후서 2장 말씀을 보면
바울이 거짓 교사들 거짓 선지자들에게 끊임없이 공격 받습니다.
그들이 공격하는 이유는, 애초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두 번이나 방문하려고 했는데,
그 방문 계획을 긴급하게 수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상황이라는 것은 하루에도 수십번 여러 번 바뀌는 것인데,
그 상황을 본질과 혼돈하고 착각한 사람들이 벌인 일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본질적 사역의 중요성,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를 지실 때 항상 '예' 라고만 하신 것처럼,
나도 본질적 사역에는 항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라갔다...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본질적 사역을 붙들고 사는 자에게 주시는, 가장 위대한 은혜는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다... 그랬습니다.
마치 장사하는 사람들이 보증금을 받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보증이 되면, 끝까지 지속적으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런 얘기를 하죠.
'거짓 선지자들, 즉 외부에서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흔드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뒤흔들었던 사람들 가만히 두면 안 된다. 그들을 반드시 징계해야 된다.'
근데이 징계는 징계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용서를 전제로 하는 징계입니다.
이렇게 징계를 받고 내가 징계를 수용하고 징계를 받고
그러면 공동체가 그 사람을 용서합니다. 용서한 후에는 성령으로 그를 위로해야 됩니다.
'성령으로 위로한다'는 말은 말씀을 계속해서 먹이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했고
그리고 바울이 그렇게 괴로웠을 때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으나
복음을 전할 수 없을만큼 괴로웠을 때, 어떻게 견디고 이겨내었느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위대한 개선 행진을 기대하며 그는 미리 감사했습니다.
로마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도
아주 탁월하고 특별한 개선행진을 열어주는데
그때 꽃잎을 뿌리는 향기, 사람들이 가면서 풍기는 아름다운 향기,
그거보다 비교할 수 없는 천상의 향기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그걸 기대하고이 땅에 어려운 일들을 잘 이겨내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2장 이야기입니다. 좀 복잡한 이야기인데
사실 가만히 보면 복잡할 것도 별로 없는, 충분히 잘 정리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