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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2편 성령안에서 예배하기

LNCK 2025. 3. 2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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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예배하기 / 시편 42:1, 11 - YouTube

 

성령안에서 예배하기        시42:1, 11      2025.01.05.  '성령안에서' 1강  

오늘부터 여러분들은 자주 반복되는 단어를 몇 가지를 듣게 될 텐데, 
그 중에 하나가 '성령님의 임재하심' 그리고 '기름부으심' 
이런 단어들을 많이 듣게 될 겁니다. 

제가 이제 7주 동안 성령님에 관한 이야기를 할 텐데, 
성령님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두 가지로 이렇게 나눠집니다. 

-첫 번째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인격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또 하나는 성령님이 어떻게 행하시는가,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같은 경우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성령님의 인격'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설명하고 있고, 
(반면에) 사도행전은 그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 7주 동안에는 주로 성령님의 인격에 대해서,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그런 기대가 있어요. 
'하나님,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여기에서 나눌 때,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 성도들 가운데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성령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임할 때, 
하나님, 우리의 삶에 치유의 역사, 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들이 
고백되고 간증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계속해서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7주 동안 나누게 될 텐데, 
여러분들이 그런 기대를 가지고 함께 나누면 좋겠습니다. 

또 오늘 '성령님과 관계된 예배'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예배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에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거룩하게 바꾸어지는 것, 
그것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이 누리는 거죠.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런 질문, 도전을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로서, 여러분의 삶의 방식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중략    주1)

▲저는 이제 성령님에 대하여 우리들이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들에게 
'성령님의 인격, 거룩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우리들에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글을 하나 또 읽어드리려고 하는데, 어디서 읽는 건 아시겠죠? (출처는 제 책입니다)
좋아서 좀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려고 해요. 오늘 설교와 연관되기도 하고요.

「요즘 우리는 말씀의 능력도, 교회의 권위도, 크리스천의 영향력도 찾아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시 모이자 라는 시도도 하고, 
세상의 불이한 일들과 죄에 대하여 지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를 비난합니다. 
비난을 받는 것이 자랑스러울 때도 있고,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세상의 비난이 자랑스러울 때는, 
우리가 진리와 거룩함으로 무장되어 있을 때입니다. 

그 비난이 부끄러울 때는, 거룩하지 못한 우리가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 할 때입니다.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더는 우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있으나, 하나님이 쓰시지 않을 때, 우리는 용도 폐기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사용의 기준이 거룩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동일한 삶, 그리고 일정한 시간 속에서 
거룩함의 분량을 늘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혹시 우리는 지나치게 죄를 묵상하면서 살아가지는 않나요? 
죄에 대한 이유와 결과들을, 많이 묵상하면 할수록, 변명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죄를, 죄로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묵상하며 살아갑니까?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묵상하면, 능력이 늘어나지 않을까요?」 

저는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고 읽어드렸는데, 좋으시면 책을 사서 읽으세요. 

성령 안에서 예배하기,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거룩함의 분량을 늘려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제일 중요한 주제는 <우리들의 갈급함>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 그것이 우리의 거룩함의 분량을 늘려갈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령님의 임재를 기대하면서 예배해 드릴 때 
우리들에게는 이런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전에 우리가 기름 부음을 받고, 우리들이 성령을 체험한 과거의 사람으로 머무를 수 있고, 

또한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도 있고, 
앞으로 미래에도 우리들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는가? 

저는 오늘 우리들이 경계해야 될 것은, '내일의 기름부으심'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이 어떻게 기름부음 받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려고 해요. 

존 파이퍼 목사님이 썼던 글인데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가장 큰 걸림돌은, 독이 아니라 애플파이입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우리의 입맛을 버리는 것은, 
악인의 잔치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탁자에서 쉬지 않고 야금야금 집어먹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외설적인 비디오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밤 황금 시간대에 애청하는 
신변 잡기적인 프로그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잔치석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사탄이 제시하는 훼방요소는 
밭과, 소와, 아내 같은 것들입니다.  눅14:18~20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대적하는 가장 큰 적은, 
그분의 원수가 아니라, 그분의 선물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갈망함을 잃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로 인하여, 그 갈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들이 이 갈망함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데 
예배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과거의 사람으로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들에게 있을 때, 
우리가 미래에도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거죠.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불행한 것은,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용도 폐기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때, 우리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지만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 없을 때, 
신앙인은 참 비참한 인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도전을 드리는 거죠. 

▲저는 오늘 강단에 서서 이렇게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오늘도 쓰신다고, 나는 믿고 있는가?'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의 삶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쓰시고 있는가요? 
이것이 우리들에게 분명히 답이 되어야 될 것 같아요. 

예배는, 오늘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기대할 때, 예배가 됩니다. 
예배는, 오늘 우리들이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때, 예배가 되는 거죠. 

그런 생각 해보셨어요? 우리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사실 이 시간에 우상을 숭배할 수 있다는 것! 

오늘 예배하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우리들이 바라고 원하는 그 갈망은 
혹시 우리들의 성공과, 우리들이 원하는 물질과, 우리들이 원하는 어떤 인정받는 것들, 
그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오늘 우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우상을 끊어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무엇을 올바로 예배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때,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관계들이 제대로 만들어지는 거죠.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관계가 잘못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예배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오늘 우리는 이곳에 들어와서, 찬양으로 시작을 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하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찬양하지 않는다가 아니에요. 
'찬양하다'의 반대말은, 저는 교만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서, 두 손을 들고 입을 열어 노래하지만,
우리 속에 교만함이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게 됩니다. 

 

본문 시42편의 주인공, 이 시편기자 우리가 다윗이라고 추정하는데 
다윗은 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다윗이 이것(갈급함)을 구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어느 날 다윗의 인생에서 갈급함이 사라졌을 때, 그가 범죄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를 쓰실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어요. 

다윗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저에게 다시 이 목마름과 갈급함을 회복시켜주세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과 같은 갈급함!' 

옛날 '근동'지방에는  *the near east, far east(극동)의 반대
사막을 건너는 낙타를 타고 가는 대상들이, 사막을 건널 때에 사슴을 데리고 갔다 그러죠. 

 

여러분 사슴은, 가장 물 냄새를 잘 맡는 동물이랍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나갈 때, 물이 떨어지면, 이 목말라 있는 사슴을 딱 풀어준답니다. 
그러면 사슴이 물 냄새를 맡고 물을 찾아 뛰어간답니다.

다윗이 생각하는 이 사슴의 갈급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갈급함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그 갈급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의 인생의 문제가 뭐라고 느꼈다고요? 
'나에게 갈급함이 사라져 제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 

갈급함 속에는.. 교만함이 존재하지 않아요. 
갈급함 속에는.. 어떤 비교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 갈급함으로 나아가는 것, 
그래서 이 갈급함으로 나아갈 때에, 
시42:11절에서 기자는 이렇게 찬양하게 되는 거죠.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하는가?' 

갈급함으로 나아갔더니 어떤 고백을 해요? 
자기 영혼을 향하여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낙심하고 불안해하는가?' 

오늘 우리들이 갈급함으로 나왔을 때, 우리들에게 이 고백이 있어야 해요. 
우리의 영혼을 향하여 '내 영혼아, 낙심하지 말아라, 불안하지 말아라' 

우리는 종종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역할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찬양대는 찬양대의 역할, 또 안내하고 봉사하는 분들은 그런 봉사의 역할들, 
어쩌면 저는 설교자로서 여기에 설 때, 내 역할에 대해서 생각할지 몰라요. 

근데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역할을 잘 소화했느냐'가 아니라, 
'우리들이 맡은 역할 가운데 갈급함이 있는가?' 

저에게 제일 두려운 건 갈급함이 사라지는 거예요. 
제가 설교하러 나올 때, 매 시간마다 잠깐이지만 기도하고 나올 때, 
어떤 기도를 하는지 아세요? 
'하나님, 저에게 이 자리에 설 때 떨림(경외감)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나님 저에게 갈급함이 사라지지 않도록 저를 도와주세요'

제일 무서운 게, 어느 날 내 역할을 감당하며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신년 집회를 어느 교회에서 인도하게 되었어요. 
제가 소개를 받고 강단에 올라왔는데, 바로 그 소개 직전에 찬양을 했던 성가대가,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정말 너무 잘하더라고요. 

제가 설교를 하려고 이렇게 딱 서 있는데, 그 시간에 찬양을 했던 몇 사람, 
그리고 오케스트라 멤버 중에 몇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제가 사실 그 모습을 보면서, 설교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저 사람들은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찬양을 부르기 위한 기능인으로 있는가? 
아니면 예배자로 서 있는가?' 

저는 만나교회 사역을 하면서, 우리 교회가 꿈꾸는... 
'하나님, 우리 교회 모든 사람들이 예배할 때, 그 어떤 사람도 방관자나, 
어떤 사람도 기능인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예배자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제가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제가 참 감사하고, 또 우리가 잘했다 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우리 교회의 연주하고 찬양하는 우리 팀들을 볼 때마다 
제가 너무 감사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설교하다가 우리 오케스트라도 이렇게 봐요. 
그리고 찬양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봐요. 
저는 이들의 모습 가운데서 예배자의 모습을 보거든요. 
기능인의 모습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사람! 그게 얼마나 우리들에게 감사한 일인지요. 

오늘 내 역할이 어떠한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배에 대한 갈급함으로 서 있는가?'
 
저도 지금 이제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시니어가 됐어요. 
저는 뭔가 좀 잘하는 사람을 보면, 
제가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 잘 하는 사람을 자꾸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고, 
누구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근데 제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소개를 해주고 나서, 후회할 때가 종종 있어요. 
저렇게 귀한 사역을 하고, 저렇게 신실한 사람을, 제가 정말 이렇게 알려주고 싶어서 
소개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그 신실함이 사라지고, 간증꾼이 되어있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있는 걸 보면서 '내가 소개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신실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잘못한 것 아닌가?' 

오늘 우리들에게 제일 중요한 게, 우리들이 무엇을 얼마나 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 갈급함을 끝까지 가져갈 수 있는가? 
이게 오늘 2025년 첫 주일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교훈일 것 같아요.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 '갈급함'이라고 하는 것을, 저는 또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우리들이 얼마나 이 예배에 대한, 꾸준한 갈급함을 우리들의 마음에 유지할 수 있는가?'
 
오늘 여러분들이 가져야 될 숙제입니다. 올 한 해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 제가 매일 매일, 매주 매주 제가 이 갈급함이 사라지지 않도록, 
이 갈급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저를 붙잡아 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왜요? 우리들의 갈급함이 끝나면, 
우리는 얼마나 쉽게 거룩함을 잃어버리는 존재인지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죠. 

   세상을 떠난 하일성 씨가 (야구 해설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감독들이 제일 좋아하는 투수는, 매년 10승 정도를 올리는 투수를 제일 좋아합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20승 이상 올리는 투수를 참 좋아할 것 같은데, 
   20승 이상 연속으로 그렇게 성적을 내는 투수도 없고, 
   사실 한 번 20승을 올리는 것보다, 감독이 제일 선호하는 사람은 
   꾸준히 10승을 올리는 사람이라는 거죠.

   근데 10승을 올리는 투수의 성적을 보면, 대개 10승 12패 혹은 10승 9패나 8패 정도입니다.
   그런데 꾸준히 10승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의 장점은, 늘 준비되어서 그 자리를 지켜준다는 거예요. 
   꾸준하고 성실하다는 거죠. 

제가 10여 년 전 홍콩에 집회를 갔을 때, 제 인상에 남는 한 분이 있었어요. 
그분은 그 당시에 골드만삭스 라는 홍콩의 금융업계 임원으로 있는 분이었는데 
그분은 교회학교 교사를 하는 분이었어요. 

그분은 홍콩에 살고 있는데, 직장도 홍콩인데, 그분이 섬기는 교회학교 교사는 
한국에 있는 교회였어요. 
그분은 매주 홍콩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와서, 교회학교 교사를 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여러분들 생각에 '뭐 그렇게 유난을 떨어? 아니 홍콩에서 교사를 하면 되지'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에게 느껴지는 건, 그분이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가? 
그분은 그분의 신앙과 그분의 섬김을 지키기 위해서, 꾸준함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들이 외적으로 보이는 어떤 조건들, 
내가 경제력이 얼마나 있어서 이걸 할 수 있고/ 없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꾸준히 갈망함으로 
우리들이 지킬 수 있는 그 예배의 자리를 꾸준히 지키지 않는다면, 그 갈망함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 존재인지요.... 

▲<작은 예배자>라는 책에 굉장히 좋은 글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착각한다. 시계의 일은 시간을 맞추는 것이라고. 
그러나 정작 시간을 맞추는 것은 주인의 일이다. 
시계의 일은 멈추지 않는 (꾸준한) 것이다.」

굉장히 멋진 이야기예요. 시계는 계속 가면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틀리면, 주인이 시계를 맞춰주면 되는 겁니다. 

우리들이 그런 착각하지 않아요? 
우리들이 예배를 들으면서 여기에 엄청난 어떤 일들, 성령의 역사, 
무엇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기대하는 어떤 사건과 어떤 포인트, 
그런데 예배자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꾸준하게 하나님 앞에 갈망함으로 예배에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에 역사를 행하신다는 거예요. 

우리들이 예배 가운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들에게 임할 때 
그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들이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고, 담대함을 경험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해야 되는 일은 뭐라고요? 우리들이 어떻게 꾸준함으로, 갈망함으로 
이 예배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 

저는 오늘 새벽에도 일어나서 "하나님의 시선"을 묵상했어요. *유튜브 큐티 자료
제가, 제가 녹화해 놓은 그 묵상을 들으면서 너무 감사한 게 
'하나님, 제 삶의 루틴을 가질 수 있도록, 저를 붙잡아 주신 은혜가 정말 큽니다.'
 
제가 오늘도 "모든 날이 은혜스럽다" 라고 하는 글을 유튜브에서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렸는데 
제가 농담이 아니라, 제가 참 좋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진짜 좋아요. 

근데 좋은 이유가, 제가 매일 새벽마다 묵상글을 썼던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이 책을 제가 보면서, 이거 한 권으로 끝낼 게 아니라 
제가 썼던 글 중에, 책 제목도 이미 정했어요. "모든 날이 감사하다" 

그 다음은 "모든 날이 사랑스럽다" 아마 4편까지 나올 것 같아요. 

제가 진짜 감사한 게 뭔지 아세요? 
'그 (꾸준한) 루틴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셨다' 

오늘 여러분들을 붙잡아주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진정한 예배자가 될 때에, 이 시편 기자는 11절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는가?' 
새벽에 제가 원고를 보면서, 다시 이렇게 설교문을 묵상하는데 
저에게 떠오른 찬양이 하나 있었어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라♬ 

우리가 꾸준힌 갈급함을 가진 예배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하시는 음성을 들어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시42:11

오늘 이 시편 기자가 고백했던 이 고백,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처럼, 내 영혼이 갈급하기를 원합니다.' 

그 갈급함으로 섰을 때에,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거예요. 
'내 영혼아, 두려워 마라 놀라지 말아라' 

▲저도 한때 그런 꿈을 꿨어요. 
'이왕에 대한민국의 목사로 내가 태어났고, 목회를 하고 있으니 
나도 좀 유명한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꿈을 꿨어요. 

'이왕 책을 쓸 바에는 나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누군가 목회자들이 목회를 할 때 '이것은 김병삼 목사의 책입니다' 말하며,
그 책 속의 내용들을 인용할 수 있는... 그런 목회자가 되면 좋겠다.' 

여러분 아세요? 저희 아버지 때부터 저희 가정에는 명예욕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제 혈관에도 명예욕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근데 진짜 힘든 게, 제가 명예욕이 있는데, 명예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든 거예요. 나는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명예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마음,
그게 내 안에 있는 거예요. 제가 스스로 아는 거예요. 
'아, 내 속에 이 명예욕이 있구나'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제가 40대 중후반으로 넘어갈 때, 
기독교 언론사에서 매년 그런 조사들을 했던 것 같아요. 

'60세 전에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영향력 있는 목회자' 
그래서 뭐 목회자들한테, 평신도들한테 설문을 받아서 조사하고 발표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근데 제가 40대 아마 후반을 지나갈 때였던 것 같아요. 
제가 앞으로 다음 세대를 이어갈 목회자의 7위로 올라갔더라고요. 
그건 괜찮아요. 

근데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6위에 있는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저 사람이 왜 6위야? 내가 왜 7위야?' 그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제 속에는 아직도 저와의 싸움이 있어요. 
근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많이 바꿔주시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내가 동경했던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그렇게 닮고 싶었던 어떤 목사님들의 삶이 어느 날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아 아무리 명예와 아무리 큰 것을 꿈꿔도, 갈급함이 사라지면 
한순간에 저렇게 무너질 수 있는 거구나...'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우리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무엇을 이루어야 되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든, 어디에 있든 
'하나님, 내 삶에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사라지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 주옵소서!' 
2025년에 여러분들에게 이 갈급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낙심, 불안, 그리고 소망, 찬송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게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처럼 보여요. 조합이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근데 가만히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까 
'아 그렇구나.. 낙심해보지 않은 자에게, 소망이 있을까? 
불안을 경험해보지 않은 자가, 찬송의 의미를 알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낙심 가운데서 우리들이 소망을 이야기하고, 
불안 가운데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구나...' 

(시42편의 배경일 수도 있어요) 다윗은, 자기 아들에게 쫓겨서 도망을 가고, 
사랑했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하나님 앞에 갈급함이 사라졌던 그의 인생이 처했던 
그의 낙심과 불안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고 싶다고 하는 그 마음 가운데서 
자기 영혼에게 이야기하죠. '내 영혼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불안해 하지 말아라' 

꽤 오래 전이에요. 제가 DVD로 윌로우 크릭 교회에서 하는 <리더십 서밋>을 
제가 보게 되었고, 그때 뉴 호프 커뮤니티 처치 라는 하와이에 있는 목사님의 강의를 
제가 보게 되었어요. 웨인 코데이로 라는 목사님인데 
이 목사님은 하와이에서 목회를 하는데, 그 교회는 건물이 없어요. 

학교를 빌려서 예배드리는데, 토요일과 주일에 세 번 예배를 드렸대요. 
토요일에 한 번 예배에 한 4천명 정도, 주일에도 두 번 예배드리는데 4천명씩 모였대요.
굉장히 큰 규모의 교회였던 것 같아요. 

근데 어느 날 그 학교에서 '여기서 그만 예배를 드리라고, 그냥 나가라'고 했다는 거예요. 
다행히 하와이는 따뜻한 곳이니까, 공원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어요.

다 준비를 해놓고 공원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토요일날부터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대요. 
이 목사님은 하나님께 기도했대요. '하나님, 예배를 드려야 되니까 비를 멈추게 해주세요.' 
토요일날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이 목사님 마음엔 확신이 있었대요. 
'하나님이 비를 그치게 해주실 거야' 

그리고 주일 아침에 딱 일어났는데, 비가 계속 오고 있는 거예요. 
이 목사님이 또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비를 그치게 해주세요.' 

그리고 목사님의 마음가운데는 확신이 있었대요. 
'공원에 도착하면 비가 그칠 거야' 

그래서 그 DVD 강의에 보면, 이 목사님이 운전을 하는데, 
비가 그칠 거기 때문에 와이퍼를 켜지 않았대요. 운전을 하면서도. 

이러면서 예배장소인 공원에 도착했는데,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그 교회는 소위 말하는 현대 예배로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교회니까, 
전자악기를 사용하는데, 비가 와서 이렇게 막 전기가 펑펑 터지고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목사님이 너무 서글퍼더래요. 

그래서 속으로 울고 있는데, 교인들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목사님이 울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자신은 너무 서글퍼서 이렇게 울고,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웨인 코데이로 목사님에게 그런 음성을 주셨대요. 

'웨인, 너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나에게 비를 그치게 해달라고는 기도했지만 
나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는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다. 

만일 비가 그친다 할지라도, 오늘 이 예배 가운데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무슨 예배가 될 수 있겠니? 
아무리 비가 온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면, 이것이 예배가 될 수 있지 않겠니?' 

우리는 이 예배 가운데 무엇을 구하고 있나요? 
저는 이 부분에서 제 스스로 많이 반성이 되는 부분이에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예배의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까?' 

▲이번 송구영신을 지나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제가 많이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11시에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데,
벌써 9시도 전에 반 이상 성전이 찾고, 
9시가 넘어갔을 때는 성전에 들어올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저에게 그런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일찍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찬양팀이 미리 올라가서 찬양을 인도해야 되나?'

그때 하나님이 저에게 주셨던 마음이에요. 
'아, 저분들에게 어떻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는가가 아니라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는 그 마음이 귀하다. 그 마음이 이미 은혜다.' 
이걸 심어줘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들은 참 많이 '환경'들을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조금 더 좋은 환경이었으면 좋겠고... 

근데 진짜 필요한 것은, 우리들에게 이 갈급함이 남아 있는지... 
우리들의 예배에 대한 갈급함으로, 우리들의 예배자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지... 
이것이 우리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겠다 싶어요.  

▲제가 만25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군목으로 갔어요. 
그때는 제가 은혜도 받기 전인데, 제가 갔더니 소문이 쫙 나 있는 게, 
그 부대의 지휘관인 연대장과, 제 앞에 있었던 군목하고 사이가 너무 안 좋은 거예요. 

연대장은 믿음이 좋은 분인데, 
그런데 저희 부대에 사단장이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을 때, 
연대장이 저에게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 설교 원고를 제가 먼저 보면 좋겠습니다' 원고를 검열하겠다는 거예요. 
사단장 앞에서 젊은 목사가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르니까... 

근데 그게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내가 그렇게는 설교 못한다...' 

그리고 원고를 보여주지 않고 이렇게 설교를 하는데, 
설교 중간에 연대장 부인이 예베실을 일어나서 나가는 거예요. 
그 순간부터는 내가 설교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왜 나갔지? 무슨 일이지? 나 이제 큰일 났다.' 
예배를 마치고 나갔는데 그 연대장 사모님이 울면서 '목사님, 은혜 받았어요.' 
그리고 이후 제 군생활은 폈어요. 

그때는 사실 제가 은혜도 받기 전이거든요. 
근데 제가 설교자로서의 자존심이 있었어요. '그렇게는 못한다'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의 갈급함을 가지기 시작할 때, 
우리들이 예배자로서 가지는 신앙의 자존심이 있어요. 우리는 그걸 버릴 수 없는 거예요. 

저는 Radical 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급진적인, 본질적인'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본질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Radical worship,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본질적인 예배를 갈망함으로 드리기 시작할 때, 
저는 틀림없이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이 Radical 하게 바꾸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본질적인, 갈급한 예배를 드리고 이 세상으로 나아갈 때 
우리들의 삶이 예배자로서 다이나믹하게 변할 수 있는...
 
▲여러분, 갈급함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은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는 길이 아니라 
그 길은 약간 내리막 길이다」 

갈급함이 사라지면 쉬운 길을 찾습니다. 
내리막 길의 편안함 뒤에는 타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사실 오늘 제가 예배를 드리러 올라와서 깜짝 놀란 게 있어요. 
예배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사람들이 많이 없는 거예요. 보니까 눈이 많이 오고 있어요. 

물론 눈 길에 오지 못하는 그런 분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저는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그리고 온라인으로 예배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눈 오는 이런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면, 

저는 우리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든지,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든지 
그 예배를 하나님이 다 받으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편안함'으로 결정한 일이라면, 
우리는 어쩌면 갈급함이 사라진 내리막 길을 향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온라인/ 오프라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제 말의 뜻을 아시겠어요?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들이 편안함을 추구하기 시작할 때 
이 편안함의 뒤에는 거룩함이 사라지고, 타락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거를 잊지 않고 살아가야, 우리들이 예배자로서 갈급함으로 우리들의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요... 

갈급함이 뭘까요? 우리들이 왜 갈급해야 될까요? 
우리는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예배 드리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거예요. 

우리는 거룩해야 예배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도 일면 있지만)
아니죠.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면, 우리들이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이 순서가 우리들이 올바로 되어야, 
우리들의 갈급함으로, 우리들의 신앙을 만들어갈 수 있겠죠.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총리 다니엘의 이야기인데, 저도 어떤 책에서 본 거예요. 
다니엘의 이야기에서, 아주 클라이막스가 그런 거잖아요.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살리신 일, 
다니엘서에 총 153절이나 되는 구절들이 다니엘의 삶을 쭉 이야기하고 있고요. 

우리들이 생각하는 다니엘의 삶의 하이라이트, 
즉 사자굴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살리신 이야기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셨다는 두세 절 말고는 더 이상 없다는 거예요. 

 

왜 다니엘의 이야기를 153절이나 되도록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사자굴에서의 기적의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다니엘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이 성경이 쭉 보여주고 있고, 
그가 살아갔던 삶의 결과가 이랬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이 기적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이 기적이라는 결과를 나타낼 수 있었던 
다니엘의 삶에 대해서 성경은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분량으로 따지자면)

다니엘은, 그가 있었던 그 이방 땅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을 쉬지 않았고 
그는 믿음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가 이렇게 살았을 때에, 그에게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혹시 어떤 결과를 바라보며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갈급함으로 이렇게 예배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간증이 우리들에게 있을 때, 우리가 올바른 예배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시작하는 2025년을, 갈급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왠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예배를 드리다가, 왠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다가, 왠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담대하게 하시는 그 담대함이 
우리들 가운데 생기고, 

우리들이 예배하다가, 낙심했던 우리의 심령 가운데 소망이 생기고, 
두 손을 들고 찬양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는 예배! 
금년 2025년에는, 더욱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 주님 앞에 예배합니다. 
거룩함으로 예배하고 갈급함으로 예배하기 원합니다. 

2025년 아니, 우리가 일생을 다하는 동안 이 갈급함이 끊이지 않게 하여 주셔서 
우리들의 거룩함이 사라지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이 끝까지 쓰실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결단을 위한 공동기도문>
「성령님 우리는 오늘도 성령님을 구합니다. 갈급함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과거의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성령님, 우리 예배 가운데 임재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우상으로 섬기던 모든 것들로부터, 
사슴이 목이 말라 갈급함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주1)
지난 주에 분당 구청에서 구청 직원이 우리 교회 목회자들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유는, 분당에 있는 교회 중에 교통 민원이 제일 많이 들어오는 교회가 어딜까요? 
만나교회라고 하면서, 민원 들어왔던 내용들과 사진까지 가져와서 
'어떻게 시정이 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 저희 교회는, 지하주차장은 장애를 가진 분이나, 다둥이 가정이나, 
혹은 연세가 많은 분들 아니고는 완전히 클로즈가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차를 댈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오늘 오면서, 그냥 알아서 차를 대고 오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염려가 되는 것은, 예배자로서 우리들이 이 예배에 참석할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보니까, 제가 몇 개만 소개를 해드릴게요. 
'일요일만 되면 만나교회 때문에 미쳐버리겠습니다. 
장미아파트 동부 코오롱 출입구 쪽 주정차며, 불법 유턴이며, 
주변 도로도 말로 할 수 없이 막말로 개판입니다' 이렇게 쓴 분도 있고, 

또 '만나교회 주변 일대가 불법 주정차로 난리입니다. 
교회를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기초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불법 주정차 하려면 교회 나오지 말고, 
인터넷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런 내용부터 해서 정말 여러 가지 제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내용들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