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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3장 성전으로 들어간 앉은뱅이

LNCK 2025. 3. 26. 18:1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물질과 성공

사도행전 강해 (14) / 사도행전 3:1~10 / 성전으로 들어간 앉은뱅이 - YouTube

성전으로 들어간 앉은뱅이        행3:1~10           2022.01.23.  

◑본문의 배경

지난 시간 13강에서 우리는 오순절에 탄생한 처음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처음 교회는 네 가지에 힘 썼던 교회였죠. 기억나시나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 서로 교제하는 일, 떡을 떼는 일, 기도하는 일, 
이 네 가지의 모습이 초대교회에 힘 썼던 모습이었습니다. 2:42

그런데 또 하나 초대교회에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었는데요. 
누가는 그 특징을 2:43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처음 교회의 특징이 무엇이죠?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는 교회, 

실제로 교회는 사도행전에 보면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납니다. 
적어도 14개의 기적이 나오는데요. 
그 중에 첫 번째 기적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잘 아는 기적이죠.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기적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 인물을 만납니다. 

3:2절에 보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프로필이 본문에 자세히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두 가지 있는데요. 
-하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입니다. 중간에 사고로 못 걷게 된 자가 아니라는 거죠. 
이 말을 헬라어로 직역하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걷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거죠. 

-그리고 또 하나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그의 나이를 알려줍니다. 
'이 표적으로 병나은 사람은 40여 세나 되었더라' 4:22

그가 걷지 못했으니, 먹고 사는 일도 당연히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구걸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장애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라는 말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앉은뱅이가 구걸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 도와주었습니다. 
3:2절에 보니까, 주변 사람들이 그를 메고 와서 성전 문 앞에 두었습니다. 

여러분 성전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 아닙니까? 구걸하기 딱 좋은 장소이죠. 
스스로 걷지를 못하니, 사람들이 메고 와서 구걸하도록 성전 문(앞)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사람을 성전 어디에 두었다고 말합니까? 
2절에, '미문에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 문이 정확히 성전 어디에 있는 문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학자들마다 추정은 하는데,
정확히 성전에 어디에 위치한 문이다... 라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문의 높이가 23M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23M이면, 엄청난 높이의 문 아닙니까? 
거기다가 은과 금으로 도금되어 있어서, 굉장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문을, 본문은 '미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어로 Beautiful gate 죠. 
성전에 들어가는 문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이라면, 성전에 들어갈 때 어느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당연히 이왕이면 예쁜 문으로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었다면, 미문 앞에서 인증샷도 찍고요. SNS에 올리고도 했겠죠. 
아마 미문은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구걸을 한다면, 어느 문에서 구걸이 제일 잘 되겠습니까? 당연히 미문이겠죠. 
사람들이 많이 다니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를, 성전 미문에 두었습니다. 
아마 이 앉은뱅이는, 거의 40년 동안 날마다 이 미문 앞에서 구걸했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사람들이 자신을 메고 성전 미문 앞에 내려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미문 앞에서 구걸을 했을 것이고요. 
또 그러다가 시간이 다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업어서 집으로 데려다주는... 
그런 삶이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전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을 너무나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아마 예루살렘의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마 오늘 베드로와 요한도, 이전부터 이 사람을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 앉은뱅이는 미문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구걸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을 지나가는 거죠.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평소처럼 돈만 주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으로 충만했던 때입니다. 
아마 성령의 어떤 감동하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앉은뱅이를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순간 앉은뱅이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기대감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아니 대체 얼마를 주려고 하길래 자기들을 보라고 하는 거지?'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5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6

앉은뱅이는 '은과 금이 없으면 조용히 지나가면 될 것이지.. 
뭐야 이거... 사람 놀리는 거야?' 

아마 그래도 내심 속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나를 불렀으니 뭔가가 있겠지...' 

그런데 이어지는 베드로의 말은 더 황당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6

여러분, 앉은뱅이의 입장에서는, 이 말을 듣고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당장은 '참 어이없다... 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어요? 

지금 앉은뱅이는 단순히 절뚝거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걷지를 못했습니다. 

그것도 40년간 일어나 걸은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 명의 라고 소문난 의사들도, 일으켜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자신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이 '일어나 걸으라'고 말합니다. 
앉은뱅이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말이었겠죠. 

그런데 여러분, 어떤 일이 벌어지죠? 
7절을 보면, 베드로가 단순히 일어나 걸으라고 말만 한 게 아닙니다. 
동시에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40년 동안 한 번도 스스로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걸은 적은 더더욱 없었겠죠. 다리 근육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의학적으로는, 발목이나 다리에 근육이 다 빠져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깁스를 몇 달만 해도, 근육 손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술을 한 사람은, 재활 운동을 몇 달을 해야 제대로 걸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앉은뱅이는 40년을 걸은 적이 없습니다. 근육이 다 빠져있는 상태이죠. 

그러니까 누가 잡아서 일으켜 세운다고 해도, 스스로 걸을 수는 없습니다. 
다리에 힘이 없으니까 질질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목과 발에 힘이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7

40세에 첫 걸음마를 뗀 것이죠.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았던 사람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기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누가는, 7개의 동사로 이 기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8절을 한번 보십시오. 
첫 번째 뛰어, 두 번째 서서, 
세 번째 걸으며, 네 번째 들어가서, 
다섯 번째 걷기도, 여섯 번째 뛰기도, 
일곱 번째 찬송하니, 

헬라어 동사가 일곱 개가 쓰임니다. 
8절 한 구절 안에, 쉬지 않고 계속해서 동사로 누가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누가는, 이 기적을 지금 다이나믹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 스스로도, 이 기적을 다루면서 
굉장히 흥분하고, 신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누가의 직업이 의사이지 않습니까? 
의학적으로도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니 스스로도 흥분돼서 이 기적을 서술하면서, 다이나믹하게 7개의 동사를 적으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3개의 동사(서다, 걷다, 들어갔다)와 4개의 분사(뛰며, 걸으며, 뛰며, 찬양하며)

그러니 실제로 이 기적을 본 당시 주변 사람들은 얼마나 더 놀랐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8절에 보면 '그들이 심히 놀랍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첫 번째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어려운 내용이 아니죠. 다 아시는 내용인데요. 

◑그런데 누가는 이 스토리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메시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요. 

▲1. 첫 번째, 이 기적은 단순히 치유의 기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기적이 소개되는 것은 
'성령 충만하면 우리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이 원래 메시지가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 저는 이 기적이 정말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적을 좀 봤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아픈 분들이 계십니다. 의학적으로 완치가 불가능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의학적으로 병명이 아직 밝혀지지 않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이런 기적이 한 번이라도 일어나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냥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고침을 받는 기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더 이상 이제는 아프지 않고, 하루라도 우리 교회의 환우들이 
건강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단순히 그런 '치유'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오늘 이 기적은, 단순히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걸었다... 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해야 할 중요한 표현이 하나 있는데요.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걸었다'가 끝이 아닙니다. 

8절에 보면, 그 뒷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뒷이야기에 본문의 기적의 방점이 있습니다.

3:8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뛰어 서서 걸으며' 밖으로 나간 게 아니고, 집으로 돌아간 것도 아닙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하나님을 찬송하니'  :8

고침받은 사람이 걷기도 하고 또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어디에서요? 
성전에서! 

그러니까 지금 이 기적의 초점은, 단순히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기적의 초점은, 저자 누가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앉은뱅이 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다'는 부분에 초점이 있습니다.  
'성전'에 이 기적의 방점이 찍혀 있는 거죠.    

여러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먼저 쓴 성경이 누가복음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중요한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전'이라는 주제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의 스토리는요. 성전으로 시작됩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 사가랴의 이야기로 누가복음 1장이 열립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끝도 성전으로 닫힙니다. 

누가복음의 맨 마지막 절이 24:53절인데요. 
그 구절은 이렇게 마칩니다.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그러니까 누가복음은, 성전으로 시작해서 성전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누가의 관심이 그만큼 성전에 있었다는 거죠.

여러분, 성전은 어떠한 곳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르는 장소이고요.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는, 사도행전의 첫 번째 기적에서 또 성전을 얘기합니다. 
사도행전에 일어난 첫 번째 기적을, 단순히 치유의 사건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접근하죠?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기적으로 접근합니다. *주제

왜일까요? 그 이유가 구약에 있습니다. 

구약의 레위기에 보면,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명단이 나옵니다. 
그 명단이 레21:17~18절에 나오는데요.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레21:17

여기 보면,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자가 있습니다. 육체에 흠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면 이 흠은 대체 무엇이냐? 그 흠이 18절부터 나오는데요. 

레21:18~21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구약에 따르면, 오늘 본문에 앉은뱅이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자입니다. 
들어가고 싶어도,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레21:18

그런데 지금 신약교회의 첫 번째 기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죠?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고침을 받고 난 후에 즉시 성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으로 들어가는 데 있어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를 않습니다. 
누구 하나 그를 막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송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거절됐던 성전 출입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교회에 나타난 첫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전에 이 사람은, 구약의 옛 성전의 종교에선 배제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육체의 흠이 있는 모든 자는 배제가 되었습니다. 

구약 레위기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가고 싶어도,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죠.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구약의 레위기가 나쁜 책이 아닙니다. 레위기를 욕하면 안 됩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범죄한 죄인은, 누구 하나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가진 인간, 저주 받은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상징으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의 시청각 교육이었던 거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신과 부활로 세워진 교회에서는 
이런 배제가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구주의 죽으심과 부활로 세워진 신약의 교회에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구약의 모든 종류의 제한과 목록이 철폐된 것입니다. 

아무리 육체에 흠이 있다. 할지라도, 어떠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되고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회복되어서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는 교제의 자리에, 이제는 기꺼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거절되는 죄는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으로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요. 

전에는 성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자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리에 초대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세워진 신약의 교회에선 
누구든 그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리에 
마음껏 초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주석한 폴 힐은, 이렇게 이 기적을 설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이다
이스라엘의 옛 종교에서, 예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된, 거절된 사람들이 
이제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하게 받아들여진다. 

그가 앉은뱅이든, 거지이든, 여자이든, 에디오피아 내시이든,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하게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오늘 누가가, 이 기적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의 스토리는, 단순히 앉은뱅이가 고침받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디로 들어가죠?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성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복음입니다. 
왜냐면 우리 역시 앉은뱅이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우리는 하나같이 영적으로 앉은뱅이입니다. 
죄의 짐에 눌려서, 사망의 짐에 눌려서,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영적인 앉은뱅이와 같습니다. 
마치 앉은뱅이와 같아서, 제 발로 일어나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구원을 위해서, 일어날 수 없는 무능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거절된 자들이고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배제된 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는, 수많은 영적인 장애와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전히 우리 가운데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 
영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비록 이 예배시간에 앉아 있을지라도, 우리 중 누군가는 여전히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인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미문에 머문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성전 밖에 있는 분들도 우리 가운데는 계실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버리지 못하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는...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성전 안이 아니라, 여전히 미문 곁에 머무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아무리 흠이 있는 자라도,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죄인일지라도, 무슨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더 이상 성전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오늘 여러분이 아무리 걍팍한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여러분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거절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시고, 
부르고 계십니다. 

성소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니 오늘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시고, 악한 죄인들을 하나님께 돌이키고,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미문에 머물렀던 자들이, 성전에 들어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앉은뱅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일어나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복음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더 이상 미문 곁에 있는 앉은뱅이로 남아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들려지는 이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영적으로 죽은 앉은뱅이와 같은 우리에게, 
참된 영적인 생명, 영적인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단순히 죄의 짐에 눌려서, 앉은뱅이로 나와서, 
그리고 앉은뱅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더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앉은뱅이를 일으키사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던 이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여러분의 각 심령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 신령한 기쁨이 
죽은 우리의 심령을 일으키사, 우리 교회 안에 가득히 울려지기를 바랍니다. 
이 영적인 기쁨과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누가가 이 기적을 통해 전하고 싶은 두 번째 메시지는,
교회는, 세상이 원하는 걸 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돈입니다. 

여러분 이 부분도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 본문을 계속 이번 주에 묵상을 했는데요. 
이전에는 보지 못한 구도가 하나 보이더라고요. 

여러분 지난 번에 우리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그때 독특한 묘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물질의 나눔이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나누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 자신의 소유나 돈을 움켜쥐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던 거죠.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누가는 초대교회의 회심을, '물질의 회심'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누가는 또 돈 이야기를 꺼냅니다. 누가는 계속해서 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돈으로부터 돌이켜야, 참으로 회심한 성도들이 모인 참된 교회라는 얘기죠. 

여러분, 오늘 이 앉은뱅이가, 교회를 향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이 자기 인생의 가장 큰 답이고 힘이라 믿었던 거죠. 
자신의 비참한 인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돈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 사람의 관심은, 돈 한 푼 받는 것입니다. 
돈을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든, 불교든, 모술렘이든, 그들이 믿는 신이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원함, 자신의 소원을 채워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그런 세상 사람들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곳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을 보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원하는 음과 금을 주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듣는 앉은뱅이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대답일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상처받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오늘도 세상을 섬기는 첫 번째 중요한 방식은, 세상을 실망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답이라고 말하는 돈을, 답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다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만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그리고 세상이 진짜 필요로 하는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우리 인생에 진정한 해답입니다. 

여러분 오늘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이 사람의 문제는, 
자신이 구하는 돈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돈이 없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돈이 부족해서 불행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의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는, 일어나서 걷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돈으로는.. 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다 할지라도, 돈으로 이 사람이 걸을 수가 있습니까? 
돈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돈으로는.. 절대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두 번째 메시지인 것입니다.  

돈이 있어도..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어도.. 우리를 짓누르는 죄의 문제는 하나도 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돈을 다 가진다 할지라도, 
그 돈으로는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하나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 내가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 앞에 섰을 때는 
조금 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얘기죠.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은 절대로 인간의 근본적인 능력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만이 오늘도 이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복된 복음입니까!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뭐라고 얘기하죠?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3:6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만이 오늘도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나세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에 모든 인생의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을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자에게 
완전한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돈을 더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결핍이 채워진 걸로, 이 기적이 끝난 게 아닙니다. 

돈이 있어도 결코 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그 성전 안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제는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무언가를 소망하며, 갈망하며 교회에 나왔을 것입니다. 

마치 성전 미문 앞에 앉은 자처럼,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해결이 되면 
내 삶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나온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꼭 돈만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필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몸된 교회는, 여러분의 갈망과 소원을 빌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해결해 줌으로써, 여러분을 섬기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이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되도록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고,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되어서, 기쁘게 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는 말을 저도 해주고 싶고,
'기도만 하면 뭐든지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 그런 식으로 여러분들의 필요, 
여러분들의 삶을 긍정해주고, 인정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저라고 왜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과 최대한 부딪히지 않고,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축복만 해주고, 위로만 해주고, 
여러분의 삶의 소원과 욕심을 그냥 다 맞춰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가진 욕망을 계속 긍정해 주다 보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진리의 전당이 아니라 
만신당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은과 금을, 교회가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교회는 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줄 수가 없습니다. 
만신당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죠. 

어떤 분들은 금과 은도 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둘 다 모두 줄 수 없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지난 교회사 속에서, 그게 가능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예로, 중세 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 라는 신학자가 있었는데요. 
이 아퀴나스가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아퀴나스가 이제 교황을 만났는데요. 
교황과 아퀴나스 두 사람이, 화려하고 호화로운 베드로 성당을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다 완성되기 전인데요. 그래도 엄청나게 화려했었죠. 
요즘도 이탈리아에 가면, 로마의 바티칸 (베드로) 성당으로 관광을 꼭 가잖아요.

자 그때 교황이 교회의 부유함을 보면서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요.' 
은과 금은 다 가졌다는 것이죠. 

그러자 아퀴나스는 교황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없나 봅니다!' 

실제로 은과 금을 가졌던 중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진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모두 다 '교회의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한편으로 이토록 망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꾸 교회가 사람들이 원하고 가지고 싶어하는 것에 똑같이 교회가 호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자꾸 세상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주는 방식으로, 세상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첫 번째로 세상을 섬기는 방식은, 세상을 실망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다. 
너희들이 우리한테 구하는 그것은, 불교도들도 구하고 모슬렘들도 구하는 것들이다. 

세상의 모든 타종교인들이 종교를 통해 구하는 그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런 것을 주려고 이곳에 세워진 교회가 아니다.' 

여러분 이렇게 세상을 향해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너희들이 진짜 가져야 할, 너희들이 진짜 필요로 하는 그것을 
우리만이 가지고 있다. 그걸 주려고 우리가 이곳에 이렇게 교회로 서 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요, 그 이름의 권세와 능력이다!' 

이렇게 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담대히 증거하기를, 우리 교회가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세상을 실망시키는 일에, 세상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에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이름만이, 오늘도 우리의 인생의 모든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모든 비참의 근원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이 앉은뱅이가 
육신의 질병만 고침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돈만 얻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다리만 고침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 앉은뱅이는, 성한 두 다리를 가지고, 평생 죄를 지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도,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 돈으로 죄를 지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뻔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제야 그는 차라리 성전 문 밖에서 구걸할 때가 행복했다고 회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인생의 모든 비참의 근원이 되는 죄의 문제를 
예수를 만남으로 해결받지 못한다면, 여러분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인 영혼의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만이 
죄로 신음하는 영혼을 살리는, 우리의 인생을 회복하는 유일한 인생의 답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우리가 살아갈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자신을 정직히 돌아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교회에서 구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베드로의 증거보다, 앉은뱅이의 모습처럼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그분의 이름을 빌어 
앉은뱅이처럼 금과 은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오늘도 진짜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입니다. 
그분의 이름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의 모습에서 일어나서, 
베드로의 고백('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3:6) 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의 심령이 살아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으로 충만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남은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