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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장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라

LNCK 2025. 3. 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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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라          고전1:10~17    2025-03-16  고린도전서3강

 

오늘은 고린도전서 세 번째 시간인데, 강의안에 보시면  
1:1~3절까지는 인삿말, 
1:4~9절까지는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이지만,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1:4
또 감사하는 가운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미쁘신 (믿을만한, faithful) 분이시기 때문에,  1:9
그들을 끝까지 견고하게 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죠.

오늘부터 살피게 될 1:10절부터 ~ 4장 끝절까지는
고린도 교회 가장 큰 문제였던 교회 내 분쟁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보였던 반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10~17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 해결을 위한 가르침들이 계속 되게 됩니다.  1:18~

본문의 개요       주1)

◑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사도입니다. 
그는 사도로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서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편지는 바울 자기의 교훈이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편지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용하는 단어가 '너희를 권하노니' 
그는 '명령'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권하노니' 
얼마든지 사도로서 강압적인 명령을 할 수도 있지만, 그는 사랑으로  권면하게 됩니다.  

그 권면의 내용은 '온전히 합하라, 하나 되라'는 건데, 세 가지 표현을 사용을 합니다. 

1) 첫 번째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하라'  :10  
쉽게 말하면 '의견의 일치를 가지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모두가 같은 말을 하라'고 하니까, 
마치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해야 된다는 획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 학자들의 주석을 보면,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조금 전에 찬양대에서 은혜로운 찬양을 드렸는데, 
찬양대에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있는데,
각자 내는 소리는 다르지만, 하나의 곡을 아름답게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은, 획일주의가 아니고 합창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말이, 때로는 소리가 각자 다른 것 같지만, 
정말 합창과 같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듯이 '같은 말을 해라'는 권면이죠.  

2) 두 번째는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하라'  :10
'분쟁'은 헬라어로 '천이 찢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스키스마 a division

천이 찢어지고 갈라진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분쟁이 없이 하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를 찢어지거나 갈라지게 하지 말라는 교훈을 합니다.  

3) 세 번째는,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0
여기 '같은 마음'이라는게 영어 번역을 보면 마인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생각, 같은 마인드를 가져라'

또 '같은 뜻'은, 같은 판단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합하라'  same mind and same judgment

여기서 '온전히 합하라'는 말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느냐?   
어긋나 있습니다. 어긋난 뼈를 바르게 맞출 때 '온전히 합하다' 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perfectly joined together, 우리 말은 두 단어지만, 헬라어는 한 단어죠. 카타르티조

또 어떤 때인가 하면,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그 찢어진 그물을 보수하고 수리할 때 그때 이 동사(온전히 합하라)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여러 생각, 여러 뜻으로 지금 막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어긋난 뼈를 바로 맞추는 것처럼, 
또는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고 보수해서 한 그물로 만드는 것처럼, 
여러분은 같은 생각, 같은 판단으로 온전해져라 ... 라고 바울은 도전을 합니다. 
same mind and same judgment

그런데 이렇게 권면한 이유가 11~12절에 나옵니다. 

◑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지금 바울이들은 소식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 대해서 소식을 들었다는 거죠. 

'글로에의 집 편으로'
글로에(영어로 클로이 Chloe) 라는 사람은 여기에만 한 번 등장을 합니다. 
글로에는 여성 이름입니다.  *미국 여성 이름에 클로이가 종종 있죠.

'글로에의 집'
글로에 집의 모든 식구들, 종들까지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글로에는 고린도 교회 성도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고 있죠.

뒤에 고전16:8절에 보면, 바울은 '내가 오순절 전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 라고 하죠.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에 누가 찾아왔느냐? 
고린도의 글로에의 집에 속했던... 뭐 가족일 수도 있고, 노예일 수도 있고, 
이분이 지금 에베소를 방문했고, 
그가 바울에게 이 소식을 들려줬습니다. 그 소식의 내용이 뭔가 하면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1

▲똑같이 10절에도 분쟁이 나왔고, 11절에도 분쟁이 나왔습니다.  
한글 번역은 똑같은데, 헬라어는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10절의 '분쟁'은 헬라어로 '천이 찢어져 있는 모습', 스키스마 a division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1절에 나오는 '분쟁'은 에리스 입니다. 
이 단어는 '경쟁,  불화로 인한 갈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contentions, 복수
그러니 '분쟁'도 되고, '경쟁'도 됩니다. '너희 가운데 경쟁 contentions 이 있다는 것이라'

아마 여러분들이 사람들과 같이 논쟁해 보신 적이 있을 것 같아요. 
때로는 치열한 경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가면 어떻게 되죠? 뚜껑이 열리고 통제가 불가능해서 
상대방을 향해 거친 말로 공격을 하게 되죠.  그게 '에리스 - 분쟁' 입니다.

그래서 이 '에리스' 는, 신약성경에서 어떤 명사와 같이 사용이 되느냐 하면,
3:3절에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에리스)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위 구절에 '분쟁' (에리스)이, '시기' 와 같이 사용되었죠.  '시기와 분쟁'

갈5:20절에도 '분쟁과 시기'  *에리스

그래서 고전3:3절과 갈5:20절에 비추어 볼 때,
본문 고전1:11절에 '분쟁'만 나왔지만, 
'시기와 분쟁'이라고 이해해도 됩니다. 시기 가운데 분쟁이 일어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고린도 교회 가운데 있었던 이 분쟁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느냐? 
결국은 경쟁이 있었고, 경쟁을 자극하는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로 말하면 편가르기가 있었고, 경쟁이 있었고,  
서로를 향한 시기와 공격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편지합니다. 바울은 소식을 들었는데 
'그들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거죠. 시기와 경쟁이 중심이 된 분쟁이 있다'라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2절에는 '그 분쟁의 파당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1) 바울은 누굽니까?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신 분이십니다. 
2차선교여행 중에 18개월 동안 고린도의 머물면서,  (*2차선교여행은 총 2년으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18개월 동안 거기에서 헌신적으로 사역을 해서 
이 우상 숭배, 성적으로 문란했던 그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개척자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고, 
눈물과 수고로 그 교회를 아름답게 세운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선교사였기 때문에, 그곳에 계속 머물지 않고, 1년 6개월 후에 떠나게 됩니다. 
그 후에 누가 고린도 교회 지도자가 되었느냐?  아볼로입니다.

2)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영적 지도자가 됩니다. 그래서 '아볼로파'가 생긴 거죠.
그런데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요? 

아볼로는 출신이 알렉산드리아 입니다. 행18:24
고대에 가장 학문적인 도시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헬레니즘적인 유대교'가 꽃 피웠던 곳이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여기서 '70인역'이 헬라어로 번역되었죠. BC 300년경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행18:24
'언변'은 수사학입니다. 그래서 말이 탁월하고, 그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즉 아주 성경지식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거죠.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18:27
이로 보건데, 그는 아마 '순회 성경교사'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앞서 에베소로 왔고, 이어서 아가야(고린도)로 갔던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떠난 이후로, 자연히 리더십 공백기에 있었고,
더욱이 그는 에베소 교회에서 추천서를 써 주어서, 
행18:27 '(고린도의) 제자들에게 편지(추천서)를 써 (아볼로를) 영접하라 하였더니'
고린도교회가 그를 쉽게 리더십으로 인정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행18:27
'은혜로 말미암아'는 ... 그가 가진 (성경 지식) 은사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구약성경을 복음적으로 잘 가르쳤다는 거죠.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아가야의 고린도에서)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행18:28

앞서 그가 에베소에 왔을 때, 아직 영적으로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을 때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아볼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정확하게 풀어줍니다. 행18:26~27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누가 대들었느냐 하면,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반발을 했는데 (다른 도시들에서도 그랬죠)

 

아볼로가 고린도에 건너가서, 자기가 가진 성경의 그 탁월한 학식을 가지고, 
유대인들을 그냥 잠재워 버렸어요.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행18:28

이렇게 아볼로가  바울을 이어서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자 그러면  상상이 가시죠. 

그 아볼로가 두 번째 지도자로서 고린도 교회를 섬겼을 때, 
고린도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야, 아볼로는 정말 대단하다' 여기까지만 가면 좋은데, 꼭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볼로의 비하면 바울은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  이렇게 아볼로파가 생기게 되죠.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개척자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아볼로가 지금 성경을 잘 가르치지만, 
개척자 바울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교인들도 있었을 거예요.

'여러분, 아무리 아볼로가 말씀을 잘 가르쳐도, 저 사람은 온실 속에 꽃에 불과해요. 
바울은, 아무도 믿지 않던 이곳 고린도에 와서, 
담대하게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이 고린도 교회를 세운 분이 바울입니다.
그 바울에 비하면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울파의 말 상상)

그러면 시기와 경쟁으로 아볼로파가 이렇게 얘기했을 거예요.
'야 그래도 역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사람은 뭐라 달라도 달라요!' 
그러면서 아볼로를 막 세워 주게 되는 거죠.

3) 이때 세 번째 '게바파'가 등장합니다.
여러분, 고린도 교회의 주류는 이방인(헬라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도 소수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정착해서 살았기 때문이죠. 

그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야, 아무리 바울이 탁월하고, 아볼로가 뛰어나도 
그 분들은 그들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니야, 
예수님의 직계 제자요, 교회의 수장은 바로 베드로야. 우리는 베드로에게 속한 베드로파야'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파'라는 말을 쓰지 않고, '게바 파'라는 말을 쓴 것이 흥미롭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 이름입니다.   

(*아람어 : 당시 팔레스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통용어. 국제어.
바벨론 귀환민들이 바벨론에서 배워 온 말)

그런데 고린도는 헬라 도시입니다.
베드로는 헬라어 이름이죠. (히브리 이름은 시몬)

그럼 고린도 지역에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러면 당연히 '나는 베드로파다' 
이렇게 얘기해야 정상입니다.

   제가 과거에 우즈벡 등지에 단기선교 갔을 때, 
   러시아어로 목사님을 '빠스또르' 라고 부르거든요.

   그런데 현지인들이 선교사님을 부를 때, '빠스또르' 대신에 한국어로 '목사님' 그러더라고요.

   '빠스또르' 라는 호칭보다는, '목사님'이란 호칭이 더 존경스럽고 어울린다고 보는 거죠.

이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는데, 지금 고린도에 있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은 (헬라어 이름) '바울, 아볼로'와는 달리,
우리는 '유대 그리스도인이다'는 의미로
당시 유대인의 통용어였던 아람어로 '게바 파',

그래서 이분들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유대교와 율법, 그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이라는 뜻이 '게바 파'에 들어있다고 봅니다.
갈2:11절부터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 흔적들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4) 이렇게 교회가 어수선 할 때, 마지막에 꼭 끝판왕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 파!
'다 입 다물어! 예수님 한 분으로 끝나는 거야!'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 해!'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 파'를 형성했죠.
'그리스도 파' ... 좋은 말인 것 같은데, 근본주의자가 될 위험이 크죠.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네 파벌로 나눠져서 지금 싸우고 있는 거죠.
여러분,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파벌이 형성이 되었습니까?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 그 지도자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파벌이 형성되었어요.

근데 왜 그 파벌을 형성했을까요? '시기와 다툼'이죠.
'내가 제일 잘 믿는 사람이야'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방식이 무엇이냐? 

자기가 볼 때 가장 탁월한 지도자를 칭송하면서 
'나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야' 라는 걸 통해서 
사실은 자신의 탁월함, 자신이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나타내고 싶었던 거죠.

▲제가 원래 고린도전서 강해를 언제쯤 하려고 했는가 하면, 
14년 전인 2011년 경에, 고린도전서 강해설교를 하려고 했었는데, 
(그때는 아직 원로목사님이 계셔서) 혹시나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까봐, 그때 하지 못했어요.

이제는 저도 은퇴를 하고 나면, 이 자리를  다른 분에게 물려줘야 되는 때가 또 오겠죠.

여러분, 그림을 한번 그려 보시죠. 
이거는 한국 교회가 최소한 지난 70년 동안
6.25 전쟁 이후로 한국교회가 항상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문제 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해서 세우신 분입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피눈물로 헌신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그러니까 그분들의 수고와 공로를 결코 잊을 수가 없죠. 

근데 그분들은 대부분 개척을 하셨으니까, 척박한 환경에서 바울처럼 사역하신 분들입니다. 
근데 그 다음 세대에게 리더십들을 물려줄 때, 대부분 어떤 분들입니까? 
이제는 스펙도 훨씬 더 화려하고, 소위 언변과 성경에 능통한 사람들이  *아볼로에 비유
그 리더십을 맡게 돼요. 

그러면 교회에 어떤 일이 생깁니까? 
'야 정말  새로 오신 목사님은 좋아요. 훌륭해요. 하나님이 선물을 보내주셨어요.' 

여기까지만 가면 좋은데, 꼭 누가 나타나는가 하면,
'야 새로 오신 후임 목사님에 비교하니까, 먼저 개척하신 목사님은 별 것 아니었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꼭 나타나는 거죠. 

 

그러면  교회에서 파가 나눠지는 겁니다. 개척 목사님 지지파와, 후임 목사님 지지파!
그게 본문의 바울파, 아볼로파인 거죠.

개척 목사님 지지파는 '새로 오신 후임 목사님은
스펙은 화려하지만, 저 분이 고생을 해 봤어?
교회를 개척하실 때 온갖 욕을 얻어먹으가면서, 이 교회를 세우셨던 
그 모든 헌신과 수고를, 새로 오신 저분이 할 수 있었겠어? 저 분이 뭘 했는데?'

그러면서 개척자를 옹호하는 그룹들이 생깁니다.
이렇게 서로 말들이 오고 가면서, 엎치락 뒤치락 하는 거죠.

그러면 꼭 누가 등장하느냐? 
'야,  다 필요 없어, 우리 교회는 총회장, 노회장을 따라야 돼. 우리는 헌법으로 돌아가야 돼. 
교회 정치와 노회의 치리에 복종해야 돼' 또 이런 분이 생겨요. *게바 파에 비유

그러면 마지막 끝판왕은 누구입니까? 
'다 필요 없어,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해! 우리는 그리스도만 따를 거야!'    *그리스도 파

이런 분들이 나타나서, 교회가 혼란, 다툼, 분쟁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이거는 한국교회가 지금도 경험하고 있어요.  

1세대 개척 목사님과, 그 다음 세대로 리더십이 바뀔 때, 
이 갈등은 지금도 계속해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교회 내 여선교회, 장로회에서 리더십이 교체될 때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죠.
우리 자신도 이런 문제에 휘말릴 수 있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런 분열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 되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대신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본문 이후 1:18~4장까지 내용을 개관하면 이렇습니다.)

'능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에게 있습니다.  
또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냐? 하나님의 밭입니다. 건물입니다.  

그 어떤 사역자들의 섬김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를 올려 드려야 됩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누구냐? 
여러분들이 마음껏 활용해야 될 사람이지, 
(그렇게 하지 않고) 자랑하고, 그들에게 속했다며 분열하라고 주님이 주신게 아닙니다. 
남과 비교하고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러면서 바울은 정말 장엄하게도
이 하나됨에 근거에 대해서 우리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억하시면 좋겠는데 
교회에 이런 갈등과 다툼이 있을 때,   
13절의 이 질문을 꼭 기억하셔야 돼요. 바울이 던진 세 가지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이 질문은 해석이 둘 다 가능합니다. 
-Absolutely not! 절대 나뉘지 않는다 .. 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교회에 파당이 생기고 갈라지는 것은 공동체를 나눌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나누는... 그만큼 파괴적이고 무서운 행동이라는 거죠.
교회 내 파벌이 생겨서 갈라지는 것은, 공동체를 나누어지게 할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 파괴적이고 악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나누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두 가지 충격적인 질문을 합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절대 아니죠.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 많은 수고와 고난, 핍박을 
감당했지만... 바울이 질문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한마디로 표현하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가 없다는 거죠.

여러분, 어떤 탁월한 사역자도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탁월한 사역자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겪었던 많은 아픔, 혼란 속에는 
여러분, 자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우리 목사님은 능히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셔도 될 것 같아' 
그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지금  한국교회가 해결될 수 없는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꽤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영적 지도자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던지죠.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3
이것도 결코 아니죠.

그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례에 대한 이야기를 14절부터 ~ 16절까지 합니다. 

◑1: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그리스보는 행18:8절에 등장하는데, 고린도의 회당장으로서 예수를 믿은 인물이죠.

가이오는, 행18:7절에 나오는 디도 유스도와 같은 인물로 추정합니다.
롬16:23에 기록된 가이오와 동일인으로 봅니다.

◑1: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고린도전서 16:15절에 '스데바나의 집'이 등장합니다. 
바울이 '아가야 지방의 첫 열매'로 소개하죠.

'내가 이런 사람들한테 세례를 줬는데, 나머지 사람은 내가 모르겠다'
왜 세례에 대한 언급을 이렇게 여러 번 말하겠습니까? 

교인들이 바울파, 아볼로파로 갈라질 때, 그 기준 중에 하나가 뭐냐면 
'누구한테 세례를 받았느냐?' 

'나는 바울한테 세례 받았어'
'나는 아볼로한테 받았어' 
이게 파당의 한 가지 이유가 됐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질문하죠. '너희는 누구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제가 어렸을 때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어려서 다니던 교회는 뭐 그렇게 유명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명한 목사님한테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근데 밖에 나가니까 어르신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나는 대구제일교회 이상근 목사님한테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는 '나는 대구 서문교회 이성은 목사님한테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는 '저는 동북교회 김덕신 목사님한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서 제가 스스로 생각해 보았어요.
'난 누구한테 세례를 받았지?'
제가 세례 받았던 목사님은 그분들만큼 유명한 분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받은 세례는 이류인가?' 
세례는 사람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것인데 말이죠.

지금 바울이 던지는 질문이 이겁니다.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다' 라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누구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결국 이겁니다. 바울이 세례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은  
'세례를 통해 바울이 내 사람을 만드는 건가, 
아니면 세례를 통해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드는 건가?' 

이거는 종이 한 장 차이 같지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바울은 이야기하죠.  
'만약에 세례가, 세례를 베푸는 사람의 것으로 파벌을 만드는 것이라면, 
누가 세례를 베풀었는지가 중요할 수 있지만,  

 

세례는 사람 지도자의 팔로워가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게 하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중요합니까? 바로 그리스도만 중요하다는 거죠! 

▲제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사역을 시작하고 한 10년 정도 동안 
제가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게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세례를 베풀 수도 있고, 성도들에게 설교도 하고, 
열심히 말씀도 내가 가르칠 수 있는데... 지금 내가 원하는 목적이 뭔가? 

바로 이들을 (죄송한 표현이지만) 내 사람 follower 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인가? 
아니면 이분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인가?' 

저는 이 질문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린도후서 4: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여러분들이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되는게 바로 이겁니다. 
'사역자가 성도들을 섬길 때, 자기 사람을 만드는 건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드는 것인가?' 

과거에 한국 교회에 있었던 많은 혼란들... 다 그 중심에는 이 질문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생명을 걸고 사역했는데, 이유가 뭔가?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인가?' 

여기에 왜 세례가 중요했을까요?  지금도 똑같습니다. 
이 세례... '누구의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은 후원과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어요. 

당시에는 소위 순회철학자들이 득세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들을 후원하고 뒷받침하는 사람이 된다는 거죠. 이게 세례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죠. '나는 고린도 사람들한테, 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래서 사역자들의 모든 초점은 어디에 맞추어져야 되나요? 
성도들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게 아니라,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이 이야기를 바울은 13~16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존중해야 되지만,  
교회 지도자를 절대화, 우상화 시키면 정말 난리가 납니다.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겁니다.

때로는 정치적인 지도자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누구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의 소유인가요? 

여러분은 목회자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 바울은 고린도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줬는가요? 
위 17절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신 것은, 
최소한 사도 바울 자신에게는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지, 
세례를 많이 베풀라는 사명을 준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사역의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밝힙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지, 세례를 많이 베풀라고 하신 게 아니다'

여러분, 이 말은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거는 복음 전하는 것이, 세례를 베푸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말을 하는게 아닙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1) 하나는 고전3장에 가면 명확하게 등장하는데,
한 사람의 영적 지도자가 모든 것, 모든 분야를 다 잘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는 탁월하셨어요. 
그러나 성도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것은... 
어쩌면 아볼로가 더 탁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최소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은, 그 우선순위가 어디 있느냐?
'복음을 전하는 거였다'는 거죠

그런데 아볼로는 다를 수 있죠. 아볼로는 무엇이 우선적인 사명일 수 있느냐? 
'복음 전해서 믿게 된 사람을, 잘 양육하고, 세례 주고, 성숙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한 사역자가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사역자들은, 여러분들이 대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사역자들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사역자들은 서로 동역자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역자들을 대할 때 어떻게 하셔야 되느냐? 
번호 매기는게 아니고, 비교해서 등수를 매기는게 아니고,  

말씀을 잘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씀이 필요할 때는 그분의 도움을 받고,  
전도에 대해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또 다른 사역자에게 도움을 받고,

이렇게 사역자들을 여러분이 마음껏 활용해서 
우리들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 가장 귀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사역자들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마음껏 활용하고 사용해야 될 대상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런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분에게 도움을 받고, 
저런 도움이 필요하면, 저 분에게 도움을 받고,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사역자의 종이 되는 게 아니라
사역자들을 마음껏 활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귀한 삶의 열매를 맺어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게 중요하다는 거죠.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바울이  도전을 했습니다. 

1) 오늘 설교의 첫 번째 교훈은 무엇이냐? 하나됨을 잘 지켜야 됩니다. 
'같은 말을 해라' 1:10

제가 부탁드리겠는데, 성도님들은 비교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이런 거죠.  온유, 믿음, 소망, 사랑 교구로 다 나누었어요. 
이번에 담당 교구 사역자들도 다 바뀌었어요. 

그래서 얼마간 진행이 되고 나니까  
성도님들이 '우리 교구 목사님은 정말 좋으셔!' 여기까지는 오케이 입니다.

근데 선을 넘어가면 이런 말을 하시는 거죠.
'우리 교구 목사님이, 다른 교구보다 더 좋아'
'이번에 바뀐 교구 목사님이, 지난 번 목사님보다 더 좋아/ 더 부족해'
이렇게 비교하면 안 된다는 점을 부탁드립니다.

성경에 보면 '입을 치라'라는 말씀이 나와요. 행23:2
만약 여러분들이, 사역자들을 서로 비교하는 말을 한다면, 
정말 그 '입을 치라'고 말할 정도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성경에 사울 왕과 다윗이 있었습니다. 근데 두 사람을 철천지 원수로 만든게 뭐죠?  
제가  죄송한데 여인들이 노래를 불렀는데,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는 노래였어요.

'사울도 적군을 많이 죽였고, 다윗도 적군을 많이 죽였어'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그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는데 자기 모든 인생을 바칩니다.  
교회를 이런 곳으로 만드시면 안 돼요. 

▲여러분,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야, 우리 목사님이 제일이야' 
이런 말도 조심하셔야 됩니다.

이번에 대구시 부활절 연합예배를 제가 준비하는 중에 있잖아요. 
어느 작은 교회에서 한번 준비 모임을 했는데, 
작은 교회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자기들이 제일 비참하게 느껴질 때가 언제냐? 
연합예배에 참석했는데,
대회장이 개회선언을 하려고 나왔는데, 
그 교회 성도들이 '와~' 하고 큰 소리로 환호한다는 거예요.

연합예배 때, 은근히 교회끼리 서로 경쟁이 되는 거죠.
그래서 자기 목사님 순서가 되면, 그 교회 교인들이 큰 소리로 환호한다는 거예요.

큰 교회는 별로 문제 될 게 없는데, 작은 교회 목사님이 순서를 맡아서 단에 올라왔는데,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거죠. 환호 소리가 아예 없기도 합니다.
그러면 연합예배가... 연부년 계속 분위기가 수그러드는 거죠.

그래서 저보고 이야기하기를 '이번에 목사님이 대회장이면, 
거기에 나오는 순서 맡은 분이 등장할 때 
그 교회 성도들의 입을 막을 자신 있으면, 우리보고 오라고 하세요' 라는 거예요. 

거기에 갔다 오고 나면, 자기들이 좀 비참해진대요.
그러면 다음부터는, 연합 집회에 가기 싫은 거죠.

그래서 우리가 목사님들끼리 비교하는 것도, 앞으로 좀 조심해서 말해야 되겠습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을 칭송하는 것은 좋은데, 그게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성도님들께서 비교의 언어를 제거하셔야 돼요.  
모두가 다 귀한 분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역자들 대할 때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각자가 가지신 것들, 그거 하나님이 그분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서, 
잘 받아들여서 내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고,
사람의 종이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들로 살아가셔야 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

주1) 본문 고전1:10~17절의 개요

받으신 강의안에 보시면, 1:10절은  바울이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됨을 지키는 권면을 하고,  

1:11~12절은 바울이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듣게 되는데 

1:12~13절은 이런 분쟁이 왜 생겼나?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1:14~17절까지는 바울이 보여준 반응입니다. 
바울은 먼저 세 가지 질문을 그가 던지게 되고,  
자신 많은 사람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세례 주었던 것을 밝히고,  
그는 복음 전할 사명을 받았는데, 이것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십자가에 능력으로  전했던 내용들을 17절에서 말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