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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4장 요나 컴플렉스

LNCK 2025. 3. 28. 11:0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https://www.youtube.com/watch?v=jQ2kXnzuN1g
*35분20초경부터 녹취 시작

요나 컴플렉스                 욘4:1-3                      2025.01.14 

우리 3040 세대들이 신년 특별새벽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3040 세대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격려의 박수 한 번 치겠습니다. 짝짝짝

도입 / 열등감             주1)

◑우리는 오늘 요나의 내면 세계를 좀 들여다보게 됩니다. 
욘4장의 첫 장면의 요나를 보십시오.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갑자기 화면이 확 바뀌면서, 요나의 얼굴이 확 크로즈업 되는데,
'매우 싫어하며..' 여기서 싫어한다는 말은 '역겨워한다'는 거예요.

요나가 아주 역반응을 일으키는 겁니다. 성을 내는 거예요. 
그는 지금 잔뜩 뿔이 나 있는 선지자예요. 화가 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예상한 요나의 모습은 이게 아니죠. 
3장에서 그는 니느웨 성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 이상의 결과가 나왔어요.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고, 그 대언의 결과, 너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었죠.
요나는, 니느웨에서의 성공적인 사역을 끝내고, 지금 기쁨이 넘쳐흘러야 됩니다. 

근데 지금 4:1절의 이 장면은, 요나의 전혀 다른 얼굴이 소개되고 있는 거예요. 
'매우 싫어하며...' 요나의 얼굴에 확 하고 그게 드러나잖아요. 

문제는, 지금 니느웨에서 일어난 상황이, 요나가 원했던 게 아니에요. 
요나가 원했던 것은, 니느웨의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니느웨가 멸망을 했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요나는 잔뜩 심통이 나 있습니다. 

▲사실 요나서가 3장으로 끝났다면 해피엔딩입니다. 니느웨의 부홍으로 끝나는 거죠. 
그러면 니느웨의 회복과 부흥에 헌신한, 요나는 기념비적인 인물이 되겠죠. 

그런데 4장이 시작되면서 먹구름이 낍니다. 요나의 본성이 나오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요나가 다시 과거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여기서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되죠. 왜 이렇게 요나가 화가 나 있나요? 
누가 그로 하여금 화를 내게 만들었는가요? 
그 요나의 분노는 어디를 향해 있는가요? 
이런 질문들을 우리가 할 수가 있겠죠. 

여러분, 우리에게도 화가 날 때, 스스로 질문을 해야 돼요. 
'내 화가 어디로부터 온 거냐?'는 거예요. 
'이 화는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요나 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됩니다. 아주 신경 쓰게 하는 인물이죠. 
여러분, 성경은, 성경의 인물들에 대해서 누구도 미화하지 않습니다. 
이게 성경의 탁월함입니다. 모든 민낯을 다 드러냅니다. 

사실 욘4:1절 같은 경우에는, 요나 선지자의 민낯을 약간만 좀 감추어주었으면 좋았겠다...
라는 느낌이 들어요. '갑자기 왜 불쑥 이렇게 나오지?' 우리도 당황스러운 거예요. 

여러분, 어떤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내면 당황스럽잖아요. 
지금까지 잘 해 왔는데.. 문제가 없었는데.. 또 좋은 결과가 나왔는데.. 
갑자기 혼자 뾰루퉁해 있으면 당황스러운 거죠. 지금 그 장면이에요. 

요나는 니느웨를 향해 여호와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마 그는 어딘가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나 하고 
구경하려고 했을 거예요. '아마 당연히 무너져 내렸을 거야' 
그런데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죠.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 니느웨에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선지자라면, 니느웨의 부흥을 기쁘게 받아들였어야 마땅합니다. 할렐루야죠. 
감사의 예배를 드려도 몇 번 드려야 돼요. 
그런데 요나는 지금 매우 싫어하고 있어요. 매우 싫어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4:1
그 말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최악의 현실이 자기 앞에 닥쳤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무슨 심리입니까?  
이런 요나의 태도는 어떤 심리적 발작증세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내면이 붕괴된... 

이 정도의 선지자의 반응은, 그냥 이렇게 순간적으로 일어난 반응이기보다는, 
뭔가 깊은 곳에서부터 폭발해오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동 자체보다,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그 뿌리를 알아내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혹시 열등감 아닙니까?)

 

▲요나는 갑자기 돌변합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물고기 배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던 그 사람이 맞습니까? 
우리가 헷갈리는 거예요. '그 사람 맞아? 아닌 거 아니야?' 

'하나님께 그렇게 절규하고..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 빌던 그 사람 맞아?' 
아마도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의 그 회개는, 결코 거짓된 회개는 아니었을 거예요. 

그는 영적인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이런 체험을 어떻게 합니까? 
물고기 배 속에서 살아나온 체험! 그래서 명색이 '수중신학교' 출신입니다. 
명문 기도학교를 수료했습니다. 

그 정도의 영적 체험, 그 정도 영적 훈련을 받았다면, 좀 다른 차원이어야 하지 않는가요? 
이런 그에 대한 어떤 우리의 기대치가 있는데, 

그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갔던...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고 
사명을 가지고 헌신을 했던 그 선지자에 대한, 우리의 어떤 기대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왜 이렇게 요나는 유치한 반응을 드러냈을까?' 
우리가 의아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4:1절은 의아한 장면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생각을 해봐야 돼요. 
(열등감인 거죠)

2장에서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갔던 그 장면 이전의 요나를 우리는 알고 있어요. 
이 책을 계속 연결해서 살펴보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하기가 쉬워요. 
일찍이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그 사람....

▲여러분 우리는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은혜를 받고 나면, 완전히 새 사람이 될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도 않고,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고... 
영적 상승기류를 탈 때는, 붕 떠가지고 천상의 세계에 내가 있는 것 같아요, 
발이 땅에 타지도 않는 것 같아요... 
흥분이 되고, 영적 고조가 막 뜨겁게 올라오는 것 같아요. 

아마 욘2장에서는 요나가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요나를 통해 뭘 발견합니까? 
인간은 여전히 연약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분, 초신자들이 교회를 다니다가, 상처를 받는 경우가 꽤 많아요. 
누구에게 상처를 받느냐? 오래 믿어온 신앙인으로 인해 상처를 받습니다. 

이 초신자들은 어떤 기대치가 있는 거예요. 
'저분이 저 정도 오래 예수 믿었으면.. 천상의 존재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성숙됐을 거야...' 
틀림없이 어느 정도 수준의 이상일 거라는 기대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자기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모습을 하면,

이 초신자가 낙심이 되는 거예요. 
'아니 이제 막 믿기로 시작한 나와 별 차이가 없네!' 하고 환상이 깨지는 거예요. 
믿음의 세계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하는 거죠. '사람이 과연 변하느냐, 변하는 것이 맞냐?'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사람이 진짜 변하냐?' 

이건 목회자에게도 심각한 과제예요. 
'사람이 진짜 변하느냐?' 
'안 변하면... 뭐 어떻게 되는 거냐?' 

그러니까 사역도 하고, 열심도 있는데... 문제는 사람이 안 변하는 거예요. 
기도, 봉사, 섬김을 다 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안 변하는 거죠. 

여러분, 영적 체험을 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는 건 아닙니다. 
보니까 사람의 성질은 안 변하더라고요. 

특새 21일간 개근을 해도, 까칠까칠한 성격은 여전히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는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싸울 때는 우리말로 하더라고요. 신기해요. 
예수를 믿는데, 자기 기질대로 믿어요. 베드로를 보세요. 얼마나 뒤죽박죽입니까. 
그가 예수님의 수제자인가요?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에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자) 직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내내 사고칩니다.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우리의 모습이죠. 그게 요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무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와 싸워 이겨야 하고, 일상의 작은 승리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여전히 넘어집니다. 시험이 없는 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 줄로 여기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육체를 입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요나가 왜 이렇게 싫어하고, 화를 내는가를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왜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죠. 

'도대체 왜 요나는 이런 반응을 드러내는가? 선지자답지 않다. 
물고기 배 속을 갔다 온 사람답지 않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일어난 부흥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랬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고통스러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사람들이 가지는 기본적인 심리적 경향이 뭐냐면, 
이 현실에 직면하는 걸 두려워해요. 

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주는 현실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무시해 버리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 고통을 주는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떠올리면서 
고통을 주는 현실을 자꾸 떠밀어 버리는 거죠. 밀어내려고 하는 거죠. 

요나가 겪고 있는 현실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자신은 니느웨의 심판을 최선을 다해 외쳤습니다. 
선지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모든 걸 걸고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물고기 배 속에서 그가 경험했던 영적인 경험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일을 잘 했습니다. 사역을 잘 마쳤습니다. 깔끔하게 임무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요나 자신에게 찾아오는 심리가 뭐냐? 보상입니다. 
여기에 따른 하나님의 칭찬, 인정, 보상... 

요나가 바랐던 그 보상은 뭘까요? 니느웨가 불에 타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니느웨가 심판을 받는 모습을 요나가 봤다면, 
그에게는 한없는 위로가 됐을 거예요. 
'요나, 너 잘했어! 너는 사명을 잘 감당했어!
봐, 너가 말한 대로 다 이루어졌어!' 

요나는 하나님의 그 심판을 보면서, 자기를 보낸 이유를 찾았을 거예요. 
니느웨가 망한 모습은.. 요나의 사역에 대한 보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충 요나가 그런 그림을 머릿 속에 그리고 있었는데, 
그 니느웨가 무너지는 것을 통해, 요나는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얻고 싶었는데, 
그래서 자기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았는데... 현실이 전혀 달라요. 
요나의 기대와 상상을 뒤집어 엎는... 
니느웨는 너무 멀쩡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처음에 놀란 것은 니느웨의 상황입니다. 
'이거 뭐지? 망했어야 되는데 왜 이래? 왜 멀쩡해? 왜 더 회복이 돼?' 

그런데 그가 진짜 놀란 것은, 니느웨가 심판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요나가 놀란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가 실망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되죠...'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대놓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요나는 애써 자기 감정을 짓누릅니다. 자신의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압하죠. 
현실을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드러난 현실이 주는 고통이.. 그걸 힘겨워 할수록.. 그걸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면, 처음에는 억압을 하죠. 애써 누르고 누릅니다. 
보통 누르고 살아요. 
우리가 힘들면... 억누르고 산다고요. 회피하려고 하고, 생각 안 하려고 하죠...
 
그런데 여러분, 이게 누른다는 게, 억압하는 게... 눌러지지가 않아요. 
누르고 누르면 어떻게 되죠? 더 눌러지는 게 아니고, 어느 시점이 되면 그게 터져 버려요. 
우리의 삶에 그런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나죠. 누르고 눌렀던 게 터진 거예요. 

그동안에는 심리적으로 내면에 숨겨져 있었고, 지하에 매장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폭발을 해버립니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요나는 지금 자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실 하나님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일은 잘 하는데... '영혼 없는'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고,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사적으로 빠져버립니다. 

여러분, 우리 신자들이 입에 늘 붙어있는 게 뭐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데 여러분, 실제 현실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거리가 멀어요. 

'하나님의 영광'이 없어요. 내 명예가 더 중요해요. 
자기 개인의 자존심 지키기에 급급해요. 자기 기분이 소중한 거죠. 

하나님의 영광은 뭔 나라 얘기입니다. 자기 문제에 민감한 거죠. 
이 요나 선지자를 보세요. 지금 자기의 세계에 빠져 있어요. 
자기 감정에 지금 몰두하고 있어요. 

제가 이 요나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과 흡사하다고 그랬죠? 
큰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 일에 완전히 자기에게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화가 나는 거잖아요. 

여러분, 분노를 잘 내는 사람들은 이기적이에요. 자기중심적이에요. 
우주가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야 돼요. 근데 안 돌아가니까... 분노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던져야죠. 
근데 자기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내팽개쳐 버리는 거죠.

▲여러분,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하나님보다 나 자신에 몰두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시험드는 이유가 다 뭐예요? 나를 무시했다는 거예요. 
'내 이름을 왜 뺐냐고 그러고, 내 서열이 왜 그렇게 뒤에 있냐고 그러고...' 

요나는 하나님을 위한 선지자예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도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감정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서운해합니다. 

우리는, 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을 끌어들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내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경쟁적인 사역을 하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나보다 더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박수를 쳐야지요. 
우리보다 더 좋은 교회가 있으면 마땅히 박수를 쳐야지요. 할렐루야! 하고 기뻐해야죠. 

나보다 사역을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박수를 아낌없이 쳐야지요. 
그런데 현실은 어때요? '되게 나대네' 합니다. 

선교를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선교지에 가면 선교사님들끼리 서로 업적을 세우려고, 
우리 이름을 드러내려고, 우리 단체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내 사역을 강조하는 건 좋은데, 남의 사역까지 폄하해버리고, 과소평가해버리고... 

교인들끼리도, 교회들끼리도, 서로 경쟁하고... 
설교자들끼리도 마찬가지고... 

이런 현상들 아래는 뭐예요? 열등감이 다 깔려있는 거예요. 
상대를 깎아내려야 되고... 그 기저에는 열등감이 있다니까요.

고전3:5~7절에 보면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교회 안에 일어났던 일이에요.
서로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고... 
열등감과 질투는 같이 다니는 거예요. 
질투심이 막 일어나고... 이 공적 사역을 사유화하는 거죠. 

서로 격려해 줘야 될 상황인데,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의 동력자인데,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면 격려해 주고... 
같은 편인데 갈라놓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사람을 갈라치기를 해요. 

여러분 갈라치기 하는 게, 이게 아주 본성적으로 악한 거예요. 
바울은 초점이 분명하죠. 바울의 초점은 자기가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에요.   주2)

요나는, 계속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매우 이기적이에요. 
육신적인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는 현실을 계속 무시하고 싶어 합니다. 눈앞의 현실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니느웨가 부흥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지금 근데 여러분 누구나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정하면 할수록 고통은 더 커져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너무 큽니다. 그 은혜를 셀 수가 없어요. 
돌아보면 모든 게 기적이잖아요. 요나가 지금 기적 속에 존재합니다. 

그를 불러주셨고, 그를 사용해 주시고, 그를 기적 속에 살려주시는... 큰 은혜를 주셨어요. 
그런데 이 요나의 심리 안에는 뭐가 있냐? 이 컴플렉스 안에는 뭐가 있느냐? 

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로 다 할 수 없이 받고 누렸는데, 
그 은혜가 '나만의 하나님'으로 머물러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만의 은혜'에 도취되어 있는 거예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왠지 마음이 거북해요. 

하나님이 은혜를 나에게 베풀어 줄 때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은... 내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복을 나만 받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받는 게 불편해요. 내 마음에 들지가 않아요. 
나는 하나님이 좀 특별하게 대우해 주기를 원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아멘 할렐루야!' 

근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건 진짜 견디기 어려운 거예요. 
내가 너무너무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요즘 막 잘 돼요. 
그냥 하나님이 그를 팍팍 밀어주셔요... 그러면 우리가 요나처럼 되는 거죠.

여러분, 요나의 질투 안에는, 민족주의적인 배경이 깔려있는 거예요. 영적 우월주의예요. 
유대인 외에 다른 민족이 잘 되는 거를 못 보는 거예요. 

이 유대인들의 우월의식, 선민사상, '우리 만의 하나님' 여기서 베타주의가 만들어져요. 
오늘날 모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요인은 
'나와 너를 구분시켜버리는' 사고구조... 

여러분,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실 때 
예수님에게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너가 아니에요. 그냥 하나예요. 
이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웃은 내 몸이라는 거예요. 이웃과 나는 하나라는 거죠.
분리될 수 없다는 거잖아요. 여기에 배타주의가 들어갈 길이 없어요. 

'나만의 하나님, 나만의 은혜, 나만의 복'이라는 건 없다는 거예요. 
민족주의가,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건 좋지만 
민족주의가 강하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결국은 배타성을 갖게 되면서 
위험해지는 거예요. 

지금도 미국 우선주의를 하다 보면, 세계 질서가 깨지겠죠. 얼마나 위험한 거예요? 
우리 교회를 사랑해야죠. 그런데 우리 교회만 사랑한다? 
여러분 그러면 이단으로 가는 거예요. 

우리, 우리, 우리... 우리 교회, 우리 교단, 우리 민족... 이게 열등감입니다. 
그래서 이 열등감의 다른 쪽에 질투가 있는 거예요. 

니느웨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가 못마땅한 거예요. 질투심이 막 일어나는 거예요. 
열등감은, 내부로 향해 있다면 
질투는, 외부로 향해 있는 것이죠. 

요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자신이 미워하는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화가 날 대로 난 거예요. 분노가 폭발해 버린 거예요. 

'하나님, 이거는 아니잖아요.' 
이 질투에는 요나의 민족주의가 한몫을 합니다. 폐쇄적인 민족주의! 쇼비니즘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려고 하는 것, 
민족을 초월한 하나님의 은혜를 그는 몰랐어요. 

우리가 이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알게 돼요.
하나님은 한 민족만을 아끼고 챙기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All Nations 열방의 하나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자기 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려고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이 요나의 분노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분노 자체보다는 분노의 대상이에요.

겉으로는 잘 안 보입니다. 그런데 속 깊이 들여다보면,
그 분노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줏대가 없어 보이는 하나님, 오락가락하시는 하나님! 

자 4: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가 이제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요나는 자기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근데 뭐가 문제죠? 
'하나님, 이러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래서 안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원망과 시비조입니다. 

'그렇게 노하기를 더디하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니느웨를 향해 당신의 노를 발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처음 말씀하실 때 나는 감을 잡았습니다.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실거야... 하는 걸 제가 알았습니다.' 4:2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불순종한 이유가 있었다고 항변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네요. '

그는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애써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불순종하는 게 옳았다고 여깁니다. 

그는 물고기 배 속을 거쳐 두 번째 순종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진정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못해 순종을 한 거예요. '설마...' 하면서 순종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역시' 였습니다. 

우리는 순종을 하지만, 억지로 할 때가 있습니다. 순종은 하는데 마음 속으로는 아닙니다. 
겉으로는 순종이에요. 그런데 속은 달라요. 이중적이에요.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거절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요나서 내내, 그는 기꺼이 순종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요. 
할 건 해요. 그런데 한 번도 기분 좋게 순종한 적은 없어요. 
즐거움으로 하지 않아요. 억지의 순종을 하는 거예요. 
일을 하지만, 화가 나 있어요. 의무감으로, 그리고 대가를 바라는 봉사... 

'하나님의 말씀은 맞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렇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 말씀은 다 옳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기는 싫습니다.' 
요나 (또는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거부감... 이걸 하나님은 다루시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 있는 거부감이 있어요. 
목회자에게도 그런 게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평생 목회를 했는데, 속에는 '이게 아닌데...' 합니다.

요나의 결정적인 컴플렉스는 무엇입니까? 
알고는 있는데.. 그것이 자기 현실과 달랐다는 거죠.
알고 믿고 있는 내용과... 그의 삶이 따로 놀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고, 신앙과 삶이 일치되지 않고, 
말씀과 현실이 전혀 적응되지 않는 삶... 

요나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될 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전의 실수까지를 정당화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군요.' 
요나는 자신의 속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얼굴에 모든 걸 써놓았습니다. 
자기 감정에 아주 솔직한 사람 요나! 

◑적용

여러분, 요나라는 인물 속에서 누가 보입니까? 혹시 내 모습이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평소에 내 마음은 숨어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죠. 
그러나 우리 마음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처음에는 불순종이 노골적이었습니다.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탈 때, 누가 봐도 그건 불순종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요나의 불순종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외적으로 그는 완전한 순종이에요. 

그런데 자기 마음 속에 숨어있는 죄는 교묘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죄보다, 숨겨진 죄가 더 혐오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죄를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충격적인 장면 아닙니까? 
그 풍랑 속에서, 그 물고기 배 속에서, 그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 
그 하나님의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 

니느웨 성에서 일어난 그 놀라운 역사를 목격하고... 
여러분 이 정도면 진짜 기가 막힌 거잖아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요나는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우리가 받은 은혜의 망각 증세가 너무 심한 거죠.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그 은혜가 아스라한 과거가 되어버렸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셨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은혜가 다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구원받아 마땅한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이 요나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참 잘 안 변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선한 일을 한다고, 다 선한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옳은 일을 한다고, 다 옳은 사람도 아닙니다. 

옳은 일을 하는데, 옳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옳은 일을 한다는 것 때문에, 그게 자기 의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요나는 자기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정당하게 대우해 주지 않는다고 열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끝까지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변할 것 같은데 변하지 않는 모습... 요나의 모습이고, 나의 모습입니다. 
받은 은혜에 비해 겉으로 드러난 변화는 너무 미미합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어쩌면 요나는 진정한 은혜의 깊은 세계 안에 
진입을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은혜를 일시적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은혜의 사각지대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쳐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기뻐시키는 삶이 아니라, 자기의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질되어 있다는 거죠.

요나를 통하여 투영되는 우리의 각자의 모습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보게 되죠.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는 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속물 근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토로는 대단한 일을 한다 해도, 언제나 죄성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순간에 영적 추락을 할 수도 있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요나를 보면서 우리는, 나 자신을 늘 확인하고,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매 순간 새로운 결단, 또 새로운 은혜, 
또 우리를 끝까지 이끌고 가시는 그 추격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의 삶을 내어 맡김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끝내 승리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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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특새에 참석한 우리 어린 친구들 힘들었지? 이게 무슨 얘긴가 하고... 
눈이 그래도 말똥말똥하게 듣고 있습니다. 

어제는 어떤 아이가, 초등학교 한 3~4학년 되어 보이던데 
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가 보니까, 기도를 꽤 오래하고 있더라고요.

오! 초등학생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오래 기도를 하고 가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곁에 부모님이 없어요. 
너무 신통방통해서 제가 보고 있는데, 한참 기도하더니 나중에 딱 일어나서 가더라고요. 

제가 가서 칭찬해주려고 했는데, 제 가슴이 막 뛰더라고요.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 같아요. 자, 우리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한번 크게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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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열등감

몇 년 전에 심리학에 있어서 아들러 라는 사람이 부상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아들러 열풍이 불었어요. 아마 책을 좀 읽으시는 분들은 
이 아들러의 책을 한 번은 접했을 것입니다. 

아들러 라는 심리학자는 사실은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에요. 
우리에게는 프로이트가 많이 알려져 있고, 아들러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사실은 쌍벽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이 아들러의 심리 이론을 대중화시킨 사람이 일본의 기시미 이치로 입니다. 
그런데 그 기시미 이치로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미움 받을 용기> 책입니다. 
제목이 독특하잖아요. 

프로이트나 아들러 모두가 열등감을 다루었어요. 
열등감에 관해서 굉장한 집중력을 가지고, 학문적인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이트나 아들러는 둘 다 유대인입니다. 
그 유대인으로서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굉장히 열등감에 시달렸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거죠. 

여러분 이 열등감이라는 것은 우리 내면 세계에 굉장히 뿌리가 깊어요. 

이들은 시대적으로 일상에서 유대인으로서 인종차별을 겪으면서 살았는데, 
그들의 삶이나 심리학적인 접근도, 다 열등감을 해결하려고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하나는, 바로 유대계 독일인으로 살았던 프리츠 하버 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암모니아 합성 비료를 발명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버는, 자신의 발명품이 독가스로 사용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조를 합니다. 
이 독가스는 히틀러에 의해서 유대인들을 죽이는 데 사용이 됩니다. 

하버는 유대인이에요. 자기가 발명한 것이 자기의 동족을 죽이는 일에 쓰여지는 일에 
그는 적극적으로 동조를 해요. 

그러면서 그는 독일인 처럼 사는데, 유대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독일인보다 더 독일인으로 살고자 했죠. 
그게 뭐냐면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하는 그의 몸부림이었다는 거죠.

또 하나 유대인들의 그 열등감에서 나온 것 가운데 하나가 시오니즘이라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차별을 받고 살았던 유대인들이, 하나의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 시온니즘! 
지금도 유대-이스라엘에 어마어마한 시온니즘이 있는 거예요. 
이 모든 것들이 뿌리에는 유대인들이 가졌던 열등감이 있다는 거죠. 

유대인들이 이 지구상에서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민족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이 노벨상을 받는 그 이면에는, 유대인들의 열등감이 있다는 거예요. 

그 열등감을 성화시킨 거죠. 
열등감에 짓눌려 살지 않고, 열등감을 긍정적으로 성화시켜서, 노벨상을 받게 되었던 거죠. 

사람들은 열등감에 빠져 살기도 하고, 또 자존감을 누리며 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열등감과 우월의식!
열등감과 우월의식은 동전의 양면인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어떻게 보느냐?' 이게 참 중요한 겁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고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열등감이라는 것은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에요. 
내가 극복하고 이제는 열등감이 사라진 듯 하다가... 어느 날 불쑥 올라와요. 

그리고 열등감을 가지면 시각이 굉장히 좁아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굉장히 좁아져요. 
닫힌 세상을 사는 겁니다. 
여기 열등감에 심하게 빠지면, '자기'라는 세계 안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죠. 

사람들은 열등의식 혹은 우울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월감'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서 허약함을 발견하죠. 
'나는 괜찮은데, 저 사람은 문제가 많구나...' 하는 우월감! 

반대로 열등감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가 더 못하다고 여기는 거잖아요. 
여기에는 비교의식이라는 게 있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내가 우월감을 느끼는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내가 열등감에 빠져요. 이게 둘 다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우월감보다는,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나보다 크게 보이는 사람이 많다고 여기는' 거죠. 
다른 사람이 커 보일수록, 나는 점점 작아지는 것이죠.
 
근데 여러분, 이렇게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들이, 열등감을 가진단 말이에요.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보다 더 머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순간적으로 자기를 비하시키는 것이죠. 

문제는 무엇이냐면, 자기 자신을 보는 눈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죠.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는 투사 Projection 라고도 하죠. 

그래서 계속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인데,
즉 비교를 통하여 바라보는 것이죠.

건강한 사람의 특징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동일해요. 
건강한 자아상입니다. 그러니까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이 없어요. 
나도 괜찮고, 그 사람도 괜찮게 보는 거죠. 

그런데 다른 사람과 조화를 잘 못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한쪽이 고장이 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어떤 외적인 행동만으로는,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일으키는 내면 세계의 컴플렉스라고 하는 게 뭐냐?'는 거죠.

 

 

주2) 중략한 부분

 

고후4:7~10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무리 외적으로 공격을 받고, 사람들이 나를 버리든.. 놀리든.. 망가지지 않는 이유는 
내가 나를 붙들고 있지 않으니까!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보호하려고 하면 힘든 거예요. 언제 망가질지 모릅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아가는 거예요. 

누가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거예요. 
내가 욕을 좀 먹어도 그리스도가 사시면 되는 거고... 

그래서 바울의 이 고린도후서 6:9~10절의 말씀이 그런 삶을 사는 거예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여러분, 여기에서 무슨 열등감이 발견됩니까? 열등감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자기는 중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