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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6장 환난 날의 피난처

LNCK 2025. 3. 29. 17:5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소망 >            히브리서

[히브리서28] 환난 날의 피난처 (히6:18-20)┃2025.3.23 주일예배 - YouTube

환난 날의 피난처        히6:18~20, 시71:1~24          2025.3.23        히브리서28강

히브리서는 소망에 대한 책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소망이 견인하는 인내"에 대한 책입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진 배경을 보면 네로 황제의 핍박이 아주 극심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아주 큰 환란과 핍박 가운데 있었는데 
이들을 향해서 히브리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거죠.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라!'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고, 그분이 구원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결국 구원하실테니까, 이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가라... 는 것을 격려합니다. 

오늘은이 소망과 인내에 대해서 세 번째 메시지입니다. 
지지난 주부터 이제 소망에 대한 걸 살펴봤는데 
소망에 대한 세 번째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소망의 능력'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소망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주는 피난처가 된다는 것이고 
둘째,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이며, 
셋째 소망은 우리를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특별히 오늘 본문이 얘기하고 있는 '소망의 세 가지 능력'입니다. 

자 오늘은이 소망의 세 가지 능력을 중심으로 
소망의 능력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특별히 소망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큰 은혜로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첫 번째 소망의 능력은, <소망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주는 피난처>가 됩니다. 

히6:18 '...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모두는 피난처를 찾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정말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게 들여다 보십시오.

사람들은 돈을 찾는 거 같고, 또 친구를 찾는 거 같고, 또 안정된 직장을 찾는 것 같지만 
이런 것을 찾는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를 깊게 들여다보면, 
사실은 피난처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찾는 것도 돈이 피난처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친구도, 안정된 직장을 찾는 것도... 그게 피난처일 것이라는 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위험과 수고에 지친 인간은 피난처를 찾아서 방황합니다. 
마치 죄로 인해서 쫓겨났던 가인이 거할 곳을 잃고 유리 방황하던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죠. 그 죄로 인해서 쫓겨나게 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라는 말은 뭐냐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렇다는 거예요. 

'땅에 사는 동안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
땅에 사는 동안, 즉 땅에서 숨쉬고 사는 평생 동안 
'피하여 유리하는 자' 유리한다는 건 방황한다는 건데 
여기저기 떠도는 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 운명이 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가인이 과연 무엇을 찾아서 유리하며 방황했을까요? 
그렇죠. 안전한 곳, 안전하게 머물 곳을 찾아서 유리 방황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안에는 '누가 나를 죽이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디서도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어디서도 불안을 내려놓지 못하고, 편히 잠도 못 자고, 편히 쉬지도 못하고... 
그게 가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평생토록 찾아다닌 것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했던 것은 뭐냐면 
피난처였어요.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곳, 안전할 수 있는 곳, 그 피난처를 찾아서 
이리저리 떠도는 자가 됐습니다. 

자, 피난처라고 하는 것은, 안식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쉼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유리하던 가인에게는 안식이 없었어요. 

창4:14절에도 보면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누군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

사실 이게 죄의 아이러니인데, 내가 누굴 죽이고 나니까, 
딴 사람도 나한테 그렇게 할 것처럼 생각이 되는 거예요. 

「그 현상에 대한 재밌는 예화가 있습니다. 
형제가 둘이 있었는데, 엄마가 똑같이 나눠 먹으라고 각각 캔디를 줬어요.
두 형제는, 자기만 캔디를 받은 줄 압니다.

그랬더니 동생은 형과 캔디를 똑같이 반씩 나눠 먹었고요. 
형은 '그래도 내가 조금 더 먹어야지' 하고 마음 먹고, 자기는 조금 더 가지고 
동생한테 조금만 줬어요. 

자 그럼 여러분! 누가 마음이 불편할까요? 형이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동생도 나한테 조금 줬을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한 대로, 상대방도 내게 똑같이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동생은 편해요. 형이 조금 줬어도, '형도 나처럼 똑같이 줬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데, 
형은 '자기가 속이고 조금 줬으니까, 동생도 자기가 더 갖고 나한테 조금 줬을거야'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가인도 똑같은 심리인 거예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니까, 
'내가 미워서 아벨을 죽였어. 그럼 다른 사람도 나를 죽일 수 있는 거 아냐?'
이 두려움과 불안함이 이제 그를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안함은 어디서부터 오냐면, 
우리의 죄로부터 오는 거예요. 

우리가 만약에 죄가 없었다면, 그래서 죄를 갖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불안하지 않았을 거예요. 거기에는 완벽한 평안과 쉼이 있었을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다 보니까 
그 죄로 인해서 우리가 쉬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누구한테 이렇게 했던 것처럼, 저 사람도 나한테 똑같이 할 거 아냐?'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불안했던 것은, 
'내가 아벨을 죽였듯이, 딴 사람도 나를 죽이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안식이 없어졌어요. 

자 그래서 가인은 깊게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는 피난처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이 땅에서의 운명입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 그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이
이 땅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안식이 없다는 거예요. 
쉼이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평안 가운데 쉼을 누리고,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곳,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 깊이 잠들어도 위험하지 않은 곳을 찾아
인간은 일평생 유리 방황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결국 피난처를 찾아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됐습니다. 
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가인의 길을 따라서, 피난처를 찾아 방황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피난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거예요. 아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방주가 되셨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예표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피난처죠. 
홍수의 때, 환란의 날에 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 놓은 것이, 노아의 방주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홍수는, 우리 인생을 상징합니다. 
홍수가 무엇 때문에 왔죠? 죄 때문에 온 거잖아요. 

죄가 관영한 걸 보시고, 하나님께서 홍수를 허락하시듯이,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고, 죄가 관영한 인생을 살아가죠. 

그래서 노아의 홍수는,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어떠냐면, 홍수 가운데 있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파괴하는 홍수가, 세상을 휩쓸듯이 
죄로 인해 우리 인생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파괴와 죽음이 넘실 때는, 불안의 바다를 항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한 것은,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주를 통해 
피난처를 예비하셨다는 거예요. 그 피난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 하냐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거예요. 

즉 누구든지 예수 안에 들어오는 자는 쉼을 얻게 될 것이고, 마11:28
누구든지 예수 안에 들어오는 자는 피함을 얻게 될 거라는 거예요. 아멘! 

그리고 그곳에는 큰 안위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6:18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안위' 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데요. 
'피난처 안에 큰 안위가 있다'고 말씀하는데 
'안위' 라는 말이, 요즘 많이 쓰는 단어는 아니지요. 

'안위'의 헬라어는 파라클레시스 입니다. 파라 + 클레오의 합성어인데,
파라(옆에, 곁에, 둘레에) + 클레오 (부르다 call) 입니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바로 옆으로 부르다. 바로 옆에 두다' 이런 뜻이예요. 
거기서 파생된 '위로, 도움, 권면' 이런 뜻입니다. 

내가 누구를 옆에 둔다는 건 뭐예요? 도와준다는 뜻이잖아요. 또 위로해준다는 뜻이고, 
또 권면해준다는 뜻도 되고, 
그래서 이 파라클레시스(안위)라는 단어는 '위로, 도움, 권면' 등의 뜻입니다. 

근데 이와 아주 비슷한 단어가 있습니다. 파라클레토스 라는 단어가 있죠. 
보혜사 성령님을 파라클레토스 라고 부르는데, 이게 같은 어원입니다. 

파라클레시스는 위로, 도움, 격려란 뜻이고, 
파라클레토스는 그걸 행하는 존재를 의미하는 거예요. 즉 보혜사 성령님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어떤 분이시냐면, 예수 안에는 파라클레시스가 있다는 거예요. 
왜요? 그것을 행하시는 분이 계시니까, 파라클레토스! 

성령께서 예수 안에 계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안에 들어오는 자는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고, 도움을 받고, 격려를 받고, 권면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난처'안에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뭐라 그랬어요? '큰 안위를 주는 피난처가 있다'는 거예요. 히6:19

성령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성령께서 그 옆에 계시면서 
때 맞는 도움과, 시의적절한 위로와, 권면과, 그런 말씀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것이 피난처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다 내 안으로 오라는 거예요. 왜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지정하셨어요. 
피난처로 만드셨으니까, 세상의 큰 홍수 가운데...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인생은, 사실은 노아의 홍수 가운데 있는 인생이라는 거죠.
거기에는 여러분 길이 없습니다. 피할 방법이 없어요. 
오로지 방주만이 피할 곳이지요!

물이 온 세상을 덮었기 때문에, 방주 말고는 피할 곳이 없었듯이, 
우리 인생이 그렇다는 거예요. 방주 되신, 피난처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이 파괴와 죽음이 넘실대는 인생에서 피할 곳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피난처를 만드셔서, 
그곳으로 다 피하라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다 내게로 오라'는 거예요. '거기는 피할 곳이 없어, 거기 있으면 다 죽어,
거기 있으면 파도에 다 휩쓸려 가, 그러니 다 내게로 와, 그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곳에 파라클레시스(안위)가 있어요. 
예수안에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도움을 주시고, 쉼을 주시고, 안식을 주시는 
큰 안위함이 있다는 거예요. 놀라운 안위가 예수 안으로 피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집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59: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사25:4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그는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 

환란을 당하셨습니까?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그가 환난 날에 우리 피난처이십니다. 
포악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같이 몰려옵니까?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그가 폭풍 중에 우리 피난처이십니다. 

보호가 필요하십니까?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그는 가난한 자의 요새이십니다. 
쉼이 필요하십니까?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그는 인자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십니다. 

지혜와 권면이 필요하십니까?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옆에 계시면서 나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치료가 필요하십니까?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치료자이십니다. 
회복이 필요하십니까?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그는 우리를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예수께로 피하십시오... 다른 피난처는 없어요. 
노아의 홍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홍수가 창일할 때, 뭐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다 물속에 잠겼습니다. 피할 곳이 없어요. 어디를 둘러봐도 피할 구석은 없습니다. 
산들도 다 잠겼어요. 피할 곳은 오로지 방주 하나였듯이, 

우리 삶 가운데 피난처는 오직 예수밖에 없어요. 
우리 삶 가운데 피난처는 예수 밖에 없어요. 아멘! 

여러분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든지, 어떤 고난 가운데 있든지,
어떤 절망 가운데 있든지, 이유와 원인이 무엇이든지간에... 피난처는 오직 하나예요. 
오직 예수, 예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다른 피난처는 없습니다. 
환난 날에 피할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2. 자 <소망>의 두 번째 능력은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과 같다>는 거예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소망은 마치 배에 닻과 같습니다. 닻 anchor이란,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무거운 추를 만들어서, 배가 정지할 때 닻을 바다 속에 던져 놓는 거죠. 
그럼 이게 무거운 추이기 때문에,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자 '소망의 닻'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파도치는 바다 위에 떠서 흔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거죠. 

육지에서는 닻을 쓸 일은 없잖아요. 바다 위에 있으니까 닻을 쓰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고요한 바다에서 굳이 닻을 내릴 필요는 없지요. 
닻을 내렸다고 하는 건 뭐냐면, 파도가 거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배가 출렁거리고 있고, 잘못하면 떠내려 갈 거 같다는 거죠.

그러므로 소망을 우리 영혼의 닻이라고 얘기했다는 것은,
우리 인생 자체가 흔들리는 파도 위에 있다는 거예요. 
수많은 어려움과 핍박, 유혹, 낙심, 절망, 근심 위에 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많은 파도가 우리 인생을 흔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이라는 배를 흘러 떠내려가게 하지 않습니까? 

이때 배가 흔들리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게 잡아주는 것이 닻, 즉 소망이라는 거예요.
소망이 우리 영혼의 닻이라는 거예요. 6:19 
우리 영혼이, 우리 마음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은... 바로 소망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구원의 소망을 붙잡고 
사자굴에 들어가기까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갈 때 보면, 두려워하거나 염려했거나 뭐 안절부절했거나 
그런 기록이 없어요. 다니엘의 영혼은 아주 평온했어요. 전혀 흔들림이 없었어요. 
왜요? '소망의 닻'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어떤 소망?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
이 소망이 다니엘의 영혼을 평온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어요.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마찬가지로, 동일한 소망을 붙잡고, 
풀무불에 들어가기까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전혀 요동치 않습니다. 
그 마음도, 그의 영혼도 요동하지 않았어요. 왜요? 소망이 있습니까!
이 소망이 이들의 영혼의 닻이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꿈이 이루어질 소망이 있었어요. 
꿈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노예로 팔려가도 흔들리지 않고,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갇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요? 소망이 있는데, 
'하나님이 꿈을 반드시 이루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셔!' 

요셉에게 주셨던, 꿈을 통해 주셨던 약속이 있잖아요. 
'하나님은 이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고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노예로 팔려가도
'아니야, 이것은 그저 뭔가 하나님이 계획이 있으셔서 나를 여기로 오게 하신 것이지, 
이게 마지막 챕터가 아니야... 마지막 챕터는 이미 하나님의 약속하셨어!'  *책에 비유하면

그러다가 또 억울한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면, 억울함의 연속이에요. 처음에는 형들한테 배신당에서 노예로 팔려가고,
노예로 팔려 갔을 때, 요셉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겠어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사랑받던 아들이잖아요. 
그렇게 잘하면서 아무 어려움과 아무 불편함 없이 살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가 됐습니다. 굉장히 암울하지 않았겠어요? 굉장히 낙심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뭐냐면, 이 노예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 집에 있을 때랑 거의 똑같아요.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지... 결국 보디발이 가정 총무를 맡기지요. 
아버지 집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만약에 요셉의 영혼이 크게 흔들렸으면, 낙심과 절망과 분노로... 그래서 흔들렸다면,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불안한 사람에게, 보디발이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맡겼을 리가 없지요.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배신당해서 노예로 팔려가서 
그러고 수십 년 지난 것도 아니에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텐데도 요셉은 요동이 없어요. 
왜요? 소망 때문이죠.

'지금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어도, 이게 마지막 챕터가 아니야 
분명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셔...' 

그 소망이 있으니까, 지금 상황이 이해할 수 없고 아무리 억울해도, 
그냥 그 영혼이 평온한 거예요. 

다윗도 비슷합니다. 사울 왕의 위협과 압살롬의 반역 가운데서도 
다윗을 흔들리지 않게 지켜준 것은 소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

시편 71편에서 다윗은, 소망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피난처'에 대한 소망이죠.
시71:1~5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여호와는 다윗의 피난처이셨어요. 숨을 바위가 되셨고, 든든한 요새가 되셨습니다. 
여기서 여러분 주목하여 봐야 될 단어는 '항상' 이라는 단어입니다. 

71:3절에 보면 항상 그러셨다는 거예요. 다윗은 언제나 항상 여호와께 피했고, 
그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항상 거기 계셨다는 거예요. 

다윗이 항상 피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항상 다윗의 바위가 되셨고, 
항상 다윗의 요새로 거기 계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항상 다윗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다윗은 노쇠하여 힘이 없어지자 원수들이 달려듭니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71:9~14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내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내 영혼을 엿보는 자들이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들이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들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인생의 위기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피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의 소망이요, 피난처였습니다. 항상 그러셨어요.
그가 피할 때마다 거기 계셨어요. 

여러분, '바위'라고 하는게 뭐예요? 항상 거기 있는 거거든요. 
바위가 옮겨 다니지 않잖아요. 바위는 항상 거기 있어요. 

요새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새의 특징은 뭐냐면, 항상 거기 있는 거예요.
요새가 옮겨 다니는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윗은 어디로 피해야 될 줄 알아요.
거기로 가면, 바위는 항상 거기 있는 거예요. 
어저께도, 1년 전에도, 오늘도, 내년에도 항상 거기 있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께 피할 때마다, 하나님은 한결같이 항상 거기 계시며, 
우리의 바위가 되시고, 우리의 피할 요새가 되시며,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이시오니'  시71:7 

다윗이 어렸을 때도, 젊어서도, 늙어 백발이 되어서도 
여호와는 항상 거기 계시며, 그곳으로 피하는 다윗의 건고한 피난처이셨습니다. 
항상 그러셨어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러세요. 
우리에게도 여호와는 견고한 피난처이세요. 항상 언제나 그러세요. 

내 영혼을 엿보는 자들이 따라잡으려 할지라도, 내가 해를 입지 않는 것은 
내게 한결같이 항상 그곳에 계시는 피난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피할 때마다,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시고, 바위와 요새가 되시는 우리의 피난처 되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소망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71:21~22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다시' 입니다.
다윗의 소망은 '나를 다시 살리시고, 나를 땅 깊은 곳 그 절망의 구덩이에서 
다시 이끌어올리시는' 하나님이셨어요. 

하나님에게는 끝이라는게 없어요. 우리는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끝났어, 더 이상 할 게 없어, 망했어!' 

왜 끝이라고 생각하냐면, 소망을 놓치니까 그런 거예요.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절대 '이젠 끝이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끝이라고 말하는 건, 소망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소망을 붙잡는 사람은 끝이 아니에요. 
항상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 소망의 내용이죠. 

소망의 내용은 뭐냐면... '다시' 입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키실 것이고, 
우리를 깊은 절망과 낙심의 웅덩이에서 '다시' 건져 올리실 것이고, 
'다시' 살리실 것이고, '다시' 창대케 하실 것이고, '다시' 부활시키실 것이고, 
'다시' 강건케 하실 것이고... 이게 소망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라는 거예요. 

그분께 피하는 자마다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 피하는 자마다 다시 창대케 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이게 다윗의 소망입니다. 
다윗의 소망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만방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시71:15~16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           

이 소망이, 다윗의 영혼의 닻이었어요. 
사울의 폭풍 속에서도, 압살롬의 파도 속에서도 
다윗을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었던 것은... 이 소망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로 피했고, 
그 피난처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셨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쓰러졌던 다윗을 다시 일으키시고,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던 다윗을 다시 끌어올리십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71:3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사오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이 소망이 파란만장했던 다윗의 영혼을, 든든히 견고하게 붙잡아주는 영혼의 닻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다윗의,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항상 그러세요.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그곳에는 항상 소망이 거기 있습니다. 

다시 우리를 살리시고, 다시 땅속 깊은 곳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소망이 항상 거기 있습니다. 
폭풍이 몰려옵니까? 여호와께 피하십시오. 
거센 파도가 삶을 뒤흔듭니까? 여호와께 피하십시오. 
우울과 낙심, 슬픔과 절망, 땅속 깊은 곳으로 여러분을 끌어내립니까? 여호와께 피하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모순이 여러분을 조롱합니까? 여호와께 피하십시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가 영혼을 짓누릅니까? 여호와께 피하십시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 영혼을 짓밟습니까? 여호와께 피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숨을 바위이시고, 견고한 요새이십니다.
그곳에는 항상 소망이 준비되어 있고, 그곳에는 항상 '다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시 우리를 살리시고, 다시 땅속 깊은 곳에서 우리를 이끌어 올리실 소망,
다시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를 찬양하게 될 소망,
다시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자랑하게 될 소망, 
그 소망이 항상 거기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멘! 

시71:23 '내가 주를 찬양할 때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다시 여러분을 기다릴 거예요. 
여호와께 피할 때 기쁨과 즐거움이 항상 다시 여러분을 기다릴 겁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던 조지 뮬러  (펀글)
조지 뮬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결국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을 믿고 체험했습니다.

외동딸 루디아가 장티푸스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조지 뮬러는 최악의 시련을 만났지만, 마음에 한없는 평안을 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딸이 죽음의 문턱에 이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도 뮬러는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자신이 주님께 잘못한 것이 있으면, 주님의 손이 무겁게 누르시는 것을 체험하는데,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뮬러의 기도를 들으시고 외동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뮬러의 아내가 39년간 결혼생활을 하다가 류머티스 열로 6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뮬러는 자신의 아내의 장례식 설교를 했습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라는
시편119:68절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뮬러는 세 대지 설교를 했습니다.

① 첫째 대지는 아내를 자신에게 주신 주님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② 둘째 대지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내와 함께 살게 해 주신
    주님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③ 셋째 대지는 아내를 데려가신 주님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내가 와병 중에 있을 때도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나의 아버지, 나의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은 주님의 손에 있나이다.
삶을 통해서나, 죽음을 통해서 주님은 아내와 저를 위해서
가장 좋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아내가 몹시 아픕니다.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저의 아내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떻게 하시든지,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완전히 흡족하게 계속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외동딸을 돌려주신 분도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가신 분도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
조지 뮬러는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안식처, 피난처, 거처입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이 소망으로 인해 우리는 <여호와께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넘어서, 여호와께 피합니다. 
이게 소망의 세 번째 능력이고, 가장 궁극적인 능력인데 
소망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끈다는 거예요. 이게 소망의 궁극적인 능력입니다. 

히6:19~20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그래요.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은 소망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깊이 낙심해 있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되던가요? 

아니에요. 낙심하고 절망하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심하게 낙심되고, 심하게 절망하게 되면 예배에도 나오기 싫어요. 
낙심과 절망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요. 

반대로 소망은... 내가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낙심되는 상황 가운데 있어도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찾고 계셔... 그래도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셔...'
이 소망을 붙잡고 있으면, 그래도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돼요. 
이게 여러분, 궁극적인 능력입니다. 

다윗이 고백했던 소망, 다시 살리시고, 다시 건지실 것에 대한 소망, 
젊어서나 늙어서나 항상 거기 계시며, 우리를 파라클레시스, 즉 안위하실 것에 대한 소망은
다윗을 하나님께로 나가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24시간 365일 하나님께 나아가요. 그게 '다윗의 장막' 이잖아요.
다윗은 1년에 한 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어요. 
다윗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었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반석이 되시고, 
나의 요새가 되시고, 나를 다시 일으키시고, 나를 다시 살리시고,
나를 다시 기쁨으로 찬양하게 하실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예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예요. 
이것이 소망의 진짜 능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소망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지성소예요. 최종 목적지는 지성소입니다. 
나를 다시 살리시고, 다시 건지실 것에 대한 소망이 있는 자는... 지성소로 들어가요. 
24시간 365일 끊임없이 지성소로 들어가요. 
이것이 소망의 진짜 능력인 줄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가운데, 이 소망이 역사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낙심과 절망과 어둠이 아니라, 소망의 역사하는 날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치는 말
소망이 있어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됩니다. 
소망의 최종 목적지는 지성소예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소망,
다시 살리실 것에 대한 소망,
다시 우리를 건져내실 것에 대한 소망!
이 소망으로 오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가는 날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 있던, 어떤 절망 가운데 있던, 어떤 환란 가운데 있던, 기억하세요. 
우리 인생은 홍수 가운데 떠내려가는 인생입니다. 피난처는 방주 밖에 없어요. 
피난처는 방주 밖에 없어요. 
방주로 피하는 자는 살 것이지만, 방주로 피하지 않는 자는.. 홍수 때 발 디딜 곳이 없을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감사한 것은 그분은 항상 거기 계세요. 
우리가 피할 때마다 항상 계시는.. 우리의 바위이시고, 우리의 피할 요새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세요. 그리고 그곳으로 피하는 모든 자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고, 다시 한번 창성케 하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소망으로 여러분의 영혼의 닻을 내리는 
놀라운 축복과 은총이 풍성하게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내가 곧 길이요..          Max Lucado 

아프리카 사파리, 깊은 정글을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다...  
그 사람은 현지인 가이드와 함께 깊은 정글 속을 체험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벌초용 칼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정글을 헤쳐 나가며 길을 만들었다.
키 큰 잡초들과 나뭇가지들이 가이드 앞에서 베어져 쓰러졌으며 

그 관광객은 그를 뒤따라 정글을 헤쳐 나가던 중이었다.

날씨는 무지 덥고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거의 탈진해버린 관광객은 앞장 선 가이드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지금 도대체 우리가 어디쯤 있는 거요?
당신은 길을 확실히 알고 있는 거요?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정말 맞소?”

그러자 그 노련한 가이드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 정글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그러니 잔말 말고 나를 따라오기나 하시오!)

우리는 오늘날 그 관광객과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드린다.
“주님, 지금 저를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지금 가는 이 길이 정말 맞습니까? 제 눈엔 길이 안 보이는데요...!”

그러면 주님은, 마치 그 가이드처럼, 시원한 대답을 안 주시고
내가 곧 길이라며, 무조건 따라오라고만 하신다.

물론 주님이 어렴풋한 힌트를 한두 가지는 주시기는 하신다.
그러나 확실한 표적은 안 주신다.

그래서 보통 우리들은,
지금 자기가 어느 길을 어디쯤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 어리둥절 한다.

마치 그 관광객이 정글 속에서 동서남북을 몰라 당황하는 것처럼,
우리가 꼭 그처럼,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당황하며 초조해 한다.

주님은 우리가 묻는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주시진 않지만,
그 대답보다 더 큰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 자신'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그 골치 아픈 정글을 없애 버리시는가?
아니다. 풀과 잡초는 변함없이 여전히 무성하게 우리 앞에 버티고 있다.

주님은 거기 정글 속에 있는 무서운 맹수들을 없애주시는가?
아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위험은 언제나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예수님은 정글(환경)을 변화시켜주시지는 않지만,
주님 당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강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그래서 결코 소망을 버리지 않게 하시고,
절망해서 중간에 주저앉도록 하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끝까지 인내해서 정글을 헤쳐 나가도록... 우리를 강화시키신다.

주님은 깊은 정글과 같은 곤경에 처한 우리에게
‘내가 끝까지, 네가 가는 길에 너와 함께 하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우리는 이 약속을 꼭 기억해야 한다.

정글을 헤쳐 나가는 인생길에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동행의 약속이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하는 ‘소망’이다.

그렇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기를 불사하시는 목자이시다.
이 얼마나 든든한 목자이신가!

크리스천은, 주님이 주시는 소망,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아니고는,
(물질, 지위, 권세, 인맥 등) 그 무엇으로도
결코 이 세상에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없음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