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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1장 각자의 가는 길이 다르다

LNCK 2025. 4. 2. 06:29


◈각자의 가는 길이 다르다        요21:18~22                2025.05.07.녹취, 정리

◑본문의 정황

본문의 배경을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핍박하게 되었는데 
열두 제자 중에서 제일 먼저 야고보 사도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순교자는 스데반 집사님이고, 
12사도들 중에서 첫 순교자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를 죽이니까, 유대인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것을 보고,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 행26장의 아그립바 왕은 그의 아들) 
야고보보다 비중이 훨씬 더 큰 교회의 우두머리가 베드로 임을 보고 받았겠죠. 

그래서 '기왕이면 최고 우두머리를 죽이자' 해서 베드로를 감옥에 구금하게 됩니다. 
여러분 백성들이 좋아하면 뭐든지 하는 통치자. 그런 걸 포퓰리즘 정치라고 그러는데 
굉장히 위험한 거죠. 

'지도자'라고 한다면, 백성들이 싫어하더라도 옳은 걸 이야기해야 되고, 
바른 정책을 펼쳐야 되는 것인데, 백성이 좋아하는 대로 하면, 이건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차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의 처칠수상은 대단히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제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연설하지 않고, 
영국 국민들에게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내놓으라'고 얘기했죠. 

그래서 눈물만 가지고도 안 되고, 땀만 가지고도 안 되고, 피를 흘려서 이 나라를 지켜야 된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처칠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에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처칠의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옳은 길로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많이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든지 직장이든지 어디든지 지도자가 옳은 판단을 따라 백성들을 인도해야 되겠죠.

이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유대인들이 뭘 좋아하는가?' 이래가지고 야고보 사도를 죽인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런 인간의 권력 다툼, 이해 타산이 충돌하는 가운데서 
희생을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것인데, 야고보 사도가 첫 순교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마저 갇히게 되니까 성도들이 큰 충격을 받았고 
다 같이 모여서 베드로가 풀려나도록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구출해 내신 거죠.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내용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기적적으로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서 
성도들이 모여 있는 집에 가서 대문을 두드리니까,
로데라는 한 소녀가 나와서 이렇게 보니까, 베드로인 걸 보고 너무 놀라서, 
문을 열어 주지도 않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베드로 사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집안에서 베드로의 구명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들이 
'네가 미쳤다'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분 기도는 열심히 했는데 그게 현실이 될 걸 믿지는 않았어요. 

우리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와 관련된 우스갯소리들도 참 많이 있어요.  주1)

성도들이 '베드로는 죽지 않고 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베드로가 막상 문 밖에 왔는데도, 그 소녀 보고 오히려 '네가 미쳤다'고 그랬다는 거예요. 
'아니면, 그의 천사가 온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죠.  12:15

이제 베드로가 가서 성도들을 만나고, 어떻게 주께서 자신을 구출하셨나 하는 이야기를 
다 하는 거죠. 본문의 사건 전개는 이렇습니다.

◑각자의 사명의 길이 달랐던 세 분의 사도들

이걸 통해 우리가 좀 생각해 볼 아주 중요한 신앙적 이슈가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우리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 보려고 하는데, 

한 분은 여기 베드로, 
또 한 분은 베드로보다 먼저 순교하신 야고보, 
또 한 분은 야고보의 동생인 요한입니다. 

▲1. 야고보 사도  *요한의 형, 우레의 아들
베드로와 요한이 사도행전 앞부분에 많이 나오죠.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 장애인을 일으킬 때도 나오고, 행3장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갔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 나오고, 행4장 

야고보 사도의 순교 때에는  행12:1~2
야고보는 사도행전에 한 번도 나오지 않다가, 갑자기 등장했는데 
그때 한번 등장하시고 곧장 순교하셨으니, 그 다음에 더 나올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한 번 등장하고, 순교하신 것으로 끝나고 말아요. 

그럼 여러분 야고보의 심정을 생각해 보세요. 
야고보가 투옥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그분이 하셨을까요? 

'그래, 원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길은 이런 거지...'라고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자기 동생 요한하고 어머니까지 앞세워서 
예수님께 가서 했던 말이 생각나서,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러 올라가는 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이 두 형제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자기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청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예수님 오른쪽 왼쪽에 한 자리씩 앉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마20:20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시고 
또 질문하시기를 '내가 마시려는 자를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렇게 물으셨어요. 

여기서 '잔'이라고 표현된 것은 고난을 뜻하는 겁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하는 거죠. 
야고보 사도는 감옥에서, 그 때의 대화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너희도 나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신 거거든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질문의 깊은 뜻을 얼마나 이들이 깨달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대답하기를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대답했다면 어이가 없는 것이고, 
그 잔이 죽음을 의미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했다면... 굉장한 대답이죠. 

그런데 아마 그 '잔'의 의미를 잘 몰랐던 거 같아요. 
왜 그러냐 하면, 지금 그들이 요청한게 뭡니까? 
'예수님의 오른쪽 왼쪽에 한 자리씩 앉게 해달라' 이거는 출세, 성공 이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으러 가신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이죠.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자기들도 마신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는 생각은 아마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랬더니 예수님의 말씀이 그 다음에 이렇죠.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너희가 나처럼 죽는다 하자, 그건 그거고)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막10:40

여러분, 이 말씀 속에 대단히 심오한 어떤 진리가 들어 있잖아요. 
잔을 마시는 거와는 별개로, 이쪽 자리 저쪽 자리 높은 자리에 앉는 건, 
그건 또 하나님이 하시는 또 다른 일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고난의 잔을 마셨으니까, 반드시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거야' 
이걸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자녀들, 선교사의 자녀들

고난의 잔을 마시는 건 마시는 거고, 
예수님 옆에서 영광을 누리는 건, 그건 누리는 거고
이 두 가지가 상관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천국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지상에서는 별 관련 없다는 거예요. 그가 고난을 받는다고, 꼭 영광을 얻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그냥 '고난의 잔을 마시라' 그러면, 순종해서 마시면 되는 것이고,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의외로 오른쪽 왼쪽 자리에 앉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게 우리들의 판단을 넘어서서 결정된는 것이에요. 

'그건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거다' 

그러니 야고보가 투옥되어서 처형당할 날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그때 예수님과 그 대화가 생각이 나지 않았겠어요?

혹시 '아, 그때 우리 형제가 참 어리석었어.. 그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왕이라도 되시는 줄 알고 
보좌의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그랬지, 그때 예수님께서 그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러셨는데 
아이고 우리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할 수 있다 Yes we can! 라고 대답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주님의 말씀하신 그 잔이 바로 이거였구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찌 죽음을 피하겠는가?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야지,
그리고 예수님처럼 부활해야지... 
주님, 저에게 어떤 결과를 주신다 할지라도, 저는 생명까지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각오를 하고, 야고보 사도는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신 겁니다. 

그러면서 아마 이런 생각도 했을 거예요. 
'그때 우리 두 형제가 다 그렇게 대답했으니까, 
내가 먼저 순교하는 것이고, 내 동생 요한도 머지않아 순교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순교의 길을 걸어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의외로, 제일 먼저 순교의 길을 허락하시고, 
그 영광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셨던 분이 계셨습니다.

보통 순교자들에겐, 하나님이 꿈으로라든지 미리 알려주셔서, 대비할 수 있게 하신답니다.
그리고 또한 감당할 수 있는 영광과 은혜를 주셔서, 영광스럽게 순교하십니다.
막 겁을 내거나, 부들부들 떨지 않고요!    *여성들 출산할 때도 그렇다고 하죠.

▲2. 베드로 사도
이제 야고보 사도가 순교한 후에, 며칠이 안 되어 베드로 사도가 붙잡혀 투옥 되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마음은 어땠겠어요? 

베드로의 마음은 이미 야고보 사도가 먼저 순교하는 것을 다 지켜봤기 때문에, 
'아 이번에는 내 차례로구나' 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겠죠.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가는 길이라는게 바로 이런 길이라는 걸 생각했을 거예요. 
자기 생각 속에 떠오르는 말씀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하신 그 마16:24절 말씀이, 베드로의 마음에 계속 떠올랐을 거예요.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십자가지고 부활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할 때 
베드로가 '절대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그랬었거든요. 
그때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고까지 책망하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꾸지람을 하셨잖아요. 

그리고 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던 그때 그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을 거예요. 
'아 그렇구나.. 야고보가 먼저 그 길을 갔고, 이제는 내가 그 십자가를 질 때가 왔구나..' 

그렇다다면 '내가 마음을 담대하게 가지고, 나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이 길을 가야지' 
아마 그렇게 생각을 했을 거예요. 
야고보 사도가 그렇게 당당하게 그 길을 갔다는 소문을 들었을 거예요.

여러분, 행12:6~7절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죽음이 임박해 온 그 상황에서도, 그 전 날 밤에도
깊은 잠을 잤다고 그랬어요. 천사가 와서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될 만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세 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여러분 죽기 전날 밤에도, 이렇게 평온히 잠을 잘 수 있다면,
이 평안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이미 베드로는 삶과 죽음을 다 초월해 있고, 
주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너무도 태어나게 잠을 자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행12:7

여러분 보통 사람은 다 뜬 눈으로 밤을 세울 겁니다. 
내일이 그날일지도 모르니까 잠이 오겠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불안과 초조 속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울 것이고,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칠 필요도 없을 거예요. 눈 뜨고 기다렸으니까! 

근데 베드로는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될 정도로 곤하게 잠이 들어 계셨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런 기적적인 구출을 받아 나가면서, 그 성도들을 만나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겠어요?

'아니, 우리 동료 야고보는 순교의 제물이 됐는데 
주님은 어쩌자고 나는 이렇게 살려두시는 건가?'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고,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그러면서 또 다짐을 했을 거예요. 
'내가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서 남겨두시는가 보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내 생명을 다해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나에게 남은 시간을 송두리째 주님께 드리리라' 그런 다짐을 하면서 
기도중이던 성도들을 만나지 않았겠어요? 

△자 그런데 이제 우리가 상상력을 좀 동원해 봅시다. 
야고보가 먼저 순교하시고, 베드로가 그 다음에 이제 갇혔다가 풀려난 거잖아요. 
구출된 거잖아요. 

근데 우리가 순서를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가 먼저 투옥돼서 계시다가, 그 다음에 풀려났다고 해 보세요. 

그 다음에 야고보가 갇혔으면, 베드로는 또한 야고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지난번에는 나를 풀어 주셨으니까, 이번에는 야고보도 주의 사자가 구출하실 거야' 
아마 성도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겠죠.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주께서 건져주질 않으시고 그대로 순교하게 하셨다면, 
그걸 보면서 베드로가 얼마나 충격받을까요? 

'나는 그때 구출해 주셨는데, 왜 야고보는 주께서 순교하도록 놔두시지?' 
아마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야고보는 어땠을까요? 야고보는 베드로 사도가 먼저 갇혀 있었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구출해서 나왔을 때, 
야고보는 '아 지난번에 베드로도 그렇게 구출하셨으니까, 이번에 나도 구출하실 거야' 
라는 기대를 당연히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먼저 순교하신 것도, 다 주님의 섭리였다는 거죠.
만약에 그 순서가 바뀌었다면, 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해 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큰 주제는, 똑같은 사도이지만, 각자 갈 길은 따로 있었고, 각자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나이가, 보통 예수님과 비슷했거나 조금 작았다고 봐요.
그러니 그들도 약 30세 경에 이런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한 거죠.

오늘 우리 각자도,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고, 자신에게도 가장 좋습니다.

영국에서 어떤 유능한 사역자가 40대인가 비교적 일찍 죽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의문을 품었습니다. '왜 유능하신 목사님이 일찍 돌아가셨을까?

그때 스펄전 목사님은 '그 분은 자기 사명을 다 마치고 가셨다'고 해석했습니다.
본문의 야고보 사도처럼요.
하등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범죄해서, 일찍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하나님이 정하신 대략의 수명이 있다고 봅니다.
일찍 가시는 분도, 늦게 가시는 분도... '하나님의 때'에 가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거죠. 그건 인간적인 생각이고요,
한 사람은 이러하고, 한 사람은 저러합니다. 자신의 길을 잘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 하나님은 자신의 길을, 어느 정도는 미리 보여주셔서, 미래를 잘 준비하게 하십니다.

(한국에 훌륭하신 목사님들 중에도 70대초에 비교적 일찍 별세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이중표 목사님, 옥한흠 목사님, 하용조 목사님 등)

▲3. 요한 사도
자 그럼 이제 야고보의 동생 요한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은 형님이 순교하시는 거 보고 무슨 생각했을까요? 똑같은 생각을 했겠죠. 

그때 어머니까지 모시고 가서 '우리 형제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던 그날,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랬을 때 
우리 형제가 '할 수 있다고 Yes we can!' 그랬지. 

근데 이제 보니까, 그 잔이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이었어 
'형님이 먼저 그 잔을 마신 거야... 그럼 이제 나도 머지않아 그 잔을 마실 때가 오겠구나' 
아마 요한은, 형의 죽음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러다가 얼마 후에 베드로 사도가 갇히니까, 
'나보다 베드로 사도가 먼저 고난의 잔을 마시나 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구출돼서 나오거든요. 

그럼 요한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다. 
형 뒤를 따르도록 하실 건지, 베드로처럼 좀 더 살려 둘 것인지...'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봤겠죠. 
근데 여러분, 요한은 후에 어떻게 됐나요? 
요한은 순교하시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은? AD 90년 이후에 이후에, 100년 어간까지 굉장히 오래 살면서 
초대교회 믿음의 지주 노릇을 한 것이죠. 

터키 영토에 가까운 밧모 섬에 귀향가셔서, 계시를 받아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그리고 요한 1 2 3 서를 써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런 가르침을 많이 베풀고, 이단과 핍박으로 흔들리는 초대 교회를 
마지막까지 온몸을 다해서 버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했는데, 요한 사도만큼 백세 가까이 사시면서, 
귀한 자기 사명을 감당하셨죠.

제일 마지막에는, 밧모섬 유배에서 풀려나서,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서  *현재 명칭 셀주크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계속 모셨고, (셀주크 산 중턱에 '마리아 거주 기념 교회' 있음)
계2장의 에베소 교회에서 계속 목회하시다가, 거기서 별세하셨습니다.
거기 셀주크에 가면 '에베소 교회 잔해'를 볼 수 있습니다.

보통 그렇게 알려져 있지요.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던 제자가 요한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요한이 한 20세나 그 이하였다면 
요한은 나중에 세상 떠나실 때, 굉장히 고령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러면 두 형제가 다 그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는데, 그 잔에 담긴 내용이 다른 거예요. 
그 잔에 담겨 있었던게, 야고보가 마신 것은 순교의 잔이었고, 
요한이 마신 것은 '살아서 날마마 순교하시는 것'이었던 거죠.

▲주제
여러분 여기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을 생각해보면 
참 그들의 삶의 모습이 다양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요한복음 21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질문하시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대답한 이후에 
'내 양을 먹여라' 이렇게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네가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사람들이 너를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요. 네 팔을 벌릴 것이다' 하시면서
이 말씀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을 당할 것인가를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거라고 했어요.

다시 말하면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을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신 것으로 봅니다. 

요21: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러분, 팔을 벌리고 죽임을 당하는게 십자가인데, 예수님이 벌써 십자가를 지셨잖아요. 
부활하신 다음이잖아요. 베드로에게도 그 죽음을 당할 걸 말씀하시고 나서 
'너는 나를 따르라, 나처럼 십자가를 져라'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랬더니 그 다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해요. 
요한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요21:21

그랬더니 예수님의 대답이 이래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언뜻 들으면 '내가 재림해서 올 때까지 요한이 죽지 않고 살아 있게 놔둔다 할지라도' 
그런 뜻으로 금방 이해가 되잖아요.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너는 십자가를 져라'는 거죠. 
'요한은 요한의 인생이 있지 않느냐? 오래오래 살게 놔둘지라도 
요한이 오래 사는 거랑, 네가 십자가를지는 거랑, 그건 별개의 길이지. 아무 상관이 없다. 
너는 남의 인생에 관심 가지지 말고,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요한복음 21장에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베드로에게 두 번이나 주어지는 거예요.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주 부유하고 여유롭게 살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고,
지지리 고생하며 가난하게 살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도 있어요.

물론 근검절약 하고, 열심히 일해서 된 부자도 있고,
사치하고 허랑방탕해서 가난하게 된 노인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건 '작은 그림'이고, 우리 인생의 큰 그림은 주님이 그려주십니다.
베드로는 '팔 벌리고 죽는 그림', 
요한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하는 그림' ... 각자의 그림(예정, 작정)이 달라요.

존 뉴턴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존 뉴턴의 종의 도리  John Newton

존 뉴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을 변화시켜 주기 전까지는
노예 상인으로서 인간의 육체를 상품처럼 무덤덤하게 다루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변화된 후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쓴 작가로 유명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외에도 많은 영감 있는 찬송과 글을 남겼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종의 도’에 관한 것이다.
그의 통찰력에 의하면...

하늘에 있는 두 천사가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 받았다.
한 천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에 가서 통치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천사는, 가장 더러운 마을에 가서 그 거리를 청소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임무만 알뿐, 상대가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는 전혀 몰랐다.
사실 그 문제 즉, 두 천사의 임지가 하늘과 땅처럼 완전히 다른 그 차이는, 
두 천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 그런가?

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나라에 가서 통치하는 것이 꼭 위대한 명령이라 할 수 없고,
가장 더러운 마을에 가서 청소하는 것이 덜 중요한 명령이 아니다.

둘은 하나님의 명령, 사명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가?’ 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을 순종, 수행하고 있는가?’ 이다.
(이상 리 스트로벨의『하나님의 파격적인 주장』에서 옮겨온 글)

오늘 우리가 맡은 각자의 사명을, 또한 타인의 사명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지 말고,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자.

내 사명의 크기, 처우, 지리적 위치 이런 것을 남과 비교하지 말고,
그래서 자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열등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내 인생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내가 온전히 순종할 때,
성령님은 마치 천사가 우리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하는 것과 같은
고요한 확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나에게 주어진 그 길이 무엇이든지 '너는 나를 따르라'는 이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 마음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요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우리도 각자에게 인생이 다 있잖아요. 우리 각자의 인생이 다 모양새도 다르고 
길이도 다르고, 상황도 환경도 다 다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주님을 따르라 이렇게 하시는 것이에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돼야 된다는 그런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거죠. 

이 베드로를 오늘 본문에서는 천사를 보내 구출하신 주님이신데 
나중에 시간이 더 많이 지난 다음에,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그때는 구출하시지 않으셨어요. AD 67년 경 
그때는 베드로를 순교하게 놔두셨어요. 

그래서 네로 황제 때 베드로가 순교했다 하는 걸 우리가 알고 있고, 
그와 관련된 유명한 소설 작품이 있잖아요. <쿼바디스> 라고 하는 소설을 통해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면서 베드로가 로마로 돌아가서 순교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럼 뭐 작가가 이제 상상력을 동원한 거지만, 워낙 유명한 소설이고, 
그 소설이 또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져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어쨌든 베드로, 그 무렵에 사도 바울까지 비슷한 시기에 순교하신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어요. 

자 그럼 이제 보세요. 그렇게 이제 세 사람의 삶이 진행이 서로 다르게 되는데, 
그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야고보의 죽음 하나만 해도 가슴이 터질 지경으로 
아픈 판에, 베드로까지 투옥 됐기 때문에, 간절히 베드로의 생명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죠. 

근데 정작 주님께서 베드로를 구출하셨는데, 그들은 믿지는 못했다고 그랬어요. 
그 로데 라는 여자아이를 보고 '네가 미쳤다' 이렇게 말했을 정도니까요. 

여러분 우리들도 살면서 여기 성도들처럼 ,무언가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뭐 여러 가지 다양한 거겠죠. 

우리 인생에 관한 거 일 수도 있고, 교회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나라의 미래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뭐 여러 가지 기대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다 이루어 나가시는가? 
우리 인생을 우리 소원대로 인도하시는가? ... 이제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12명 중에 특별히 구분한 세 사람이었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당신께 더 가까이 오게 해서 기도하게 하셨어요.
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늘 특별한 대접을 받았는데 
그러나 마지막에 그들이 가는 인생의 모습은, 제각기 다르다. 하는 걸 알 수 있어요.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자가 되셨고 건져주지 않으시고 순교하도록 그냥 두셨어요. 
베드로는 천사를 통해 구출하셨는데 좀 더 있다가 나중에 로마에서 순교하셨어요. 
반면에 요한은 오랫동안 살면서, 그 어려운 시대는 사는게 죽는 거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요한은 오래 생존하시면서 초대 교회를 다 돌보고 교회를 세워 나가는 
그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시고, 그다음 교부시대로 넘겨준 그런 지대한 공로를 가지신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고독한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서야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형제가 있어도 
형이 가는 길과, 동생이 가는 길은 다르잖아요.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도 그 인생의 모습은 다르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인생은 어떤 공식으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했다고 자타가 공인해요. 
그래 가지고 아주 잘 되는 사람이 있어요. 인간적으로 볼 때 뭐 하는 것마다 다 잘 되고 
그의 명성이 사방에 널리 퍼지면... '야 충성하니까 정말 복을 받는구나. 
너도 저분처럼 저렇게 돼라'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분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 헌신 봉사 했는데 
그의 삶이 고통이 계속되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율법적인 권선징악적인 기준을 가지고 말하면 
그 되어지는 결과를 보면, 고생을 많이 하고 사는 사람은 '숨겨진 죄가 있을지 몰라, 
겉으로는 충성한 것 같지만, 속에는 뭔가 하나님만 아시는 죄가 있을 거야' 
욥의 친구들이 욥을 두고 했던 말이 그런 말이에요. 

근데 여러분, 겉으로 보는 그거하고 결과하고는 다를 때가 많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이 말씀을 오래전부터 생각을 하면서 
늘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에 대한 어떤 신비를 생각하게 돼요. 

어떤 집안에 병력도 집안 내력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어떤 집안 식구들은 뭐 다 고혈압이 계셔서, 그걸로 인해서 다 일찍 돌아가셨다 해요. 
그러는데 그 가정에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또 오래 장수하시는 분도 있어요.
집안 병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또 예외가 있다니까요.
그것도 우리가 일률적으로 말할 수가 없죠. 

저희 신대원 3년 같이 공부하고 졸업한 동기들이 아직도 제법 많이 살아 계시는데 
이제 동기들이 모여 보면 다 달라요. 
하나님이 부르신 길, 정하신 길, 주권적 사명의 길이 각자 다 달랐던 거죠.

신학교에서는 일단 출발선에 같이 쭉 서 있었는데 
어떤 분은 참 일찍 하나님 데려가기도 했고, 어떤 분은 고생 많이 한 분도 있고, 
병에 걸린 분도 있고요, 또 세간에 존경을 많이 받는 분도 있어요.

다 다르거든요. 저는 이제 그런 분들 이렇게 만나 보면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 방식에 대해서 어떤 신비를 많이 느낄 때가 있어요. 


여러분 오늘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시고 어떻게 인도하시든지 
즉 내가 야고보가 되든지, 베드로가 되든지, 요한이 되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따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럴 수도 없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시든지 아멘으로 따라가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상황이 그래서 결과도 이를 거라고 하는 공식이 인생에는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래서 다 획일적으로 할 순 없어요. 
여러분 모세가 다르고, 아론이 다르고, 각자 다 다른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에 가지신 뜻이 있을 텐데 
그 뜻에 대해서 좀 뭐라고 표현할까요? 
엄숙한 마음으로 또 때로는 비장하기도 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아멘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어떤 성도가 오셔서 '목사님 제가 좀 이렇게 몸이 아파요.'
그래서 제가 기도해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분주해 가지고 까먹고 사는데, 몇 달 아니면 한 1, 2년 후에 
'그때 목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저 지금 건강해졌어요.' 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고쳐주셨겠죠.
그럼 제가 기도하면 다 낫는가요? 그것도 아니거든요. 

어떤 분은 기도했는데, 안 낫는 사람도 많아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각자 다 다른 거죠.

그러니 '지금 뭐 내가 이렇게 건강하니까 오래오래 살 거야' 그런 교만한 마음도 버려야 되고 
'지금 내 형편이 골골하니까 난 희망이 없어' 그런 말도 틀린 것이에요. 

여러분,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걸 믿어야 됩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그게 첫 번째 주제이고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믿음으로 주님의 결정과 인도에 따르기만 한다면 
그 내용과 형태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다 승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일찍 순교의 제물로 승리자가 되셨고, 
베드로 사도는 더 교회를 위해 봉사하다가 나중에 약 30년 후에 승리하셨고,  
요한 사도는 오래 살면서 교회를 위해서 온갖 눈물의 헌신을 늙을 때까지 감당하면서
또 베드로보다 약 30년 후에 승리하신 거예요. 모두가 승리하신 거예요.

저는 그래서 같이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님들을 가만히 보면서 
일찍 하나님의 부름 받은 분도 승리하셨고,
농촌교회에서 고생 많이 하다 은퇴한 목사님도 아름다운 승리를 하셨고,
그리고 아직 현역으로 오래도록 지금 목회하는 분들도 승리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다 주님이 각자에게 자기 사명을 다르게 맡겨주신 거죠.
모두가 승리자 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가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더 큰 그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 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을 따른 삶이었다면 
모두가 다 어떤 형태, 어떤 결론이든지간에 
다 주 안에서 승리한 사람이고, 다 주님 나라에서 면류관 쓰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내 눈앞에 펼쳐지는 어떤 인생의 상황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저 사람은 저런데 왜 나는 이럴까?' 할 필요가 없어요.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고, 베드로는 베드로의 길을 가는 것이고, 
야고보는 야고보의 길을 가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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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하도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서 비가 오지 않아서, 사람들이 교회 모여 가지고 
비가 쏟아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정말 기도가 끝나고 나니까 
비가 경상도 말로 억수로 쏟아지는데, 모두들 '어휴 비온다. 큰일났다.' 이러더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산을 안 가져왔으니까요. 
그런데 어떤 어린아이 하나만 우산을 태어니 쓰고 집에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우산을 가져왔냐?' 그러니까, 
'엄마한테 물어보니까 오늘 교회에서 비 오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그래서 
나도 나왔는데, 비 올 때를 대비해서 제가 우산을 가져왔어요.' 그렇게 말을 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