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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1장 말씀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

LNCK 2025. 4. 2. 08:31

https://blog.naver.com/karamos/80209000682

 

◈말씀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        애1:1-11               2012.07

 

안젤름 그륀이 쓴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라는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기뻐하라.

오늘을 사는 기쁨은 언제 허락될까?

하루가 끝난 뒤에?

아니면 보다 먼 미래에?

 

당신의 기쁨과 접촉하라.

기쁨으로 당신을 가득 채워라.

기쁨을 바닥까지 실컷 맛본 사람은 신을 만지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항상 기뻐합니다(살전 5:16).

그런데 아주 특별하게 ‘슬프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 성경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예레미야애가>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애가>의 저자인 예레미야 선지자가 왜 이렇게 ‘슬프다’라는 말로

<예레미야애가>를 시작하고 있는 것일까요?

 

유다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사건’에 대한 비통함 때문입니다.

포악한 이방인의 발아래 처참하게 짓밟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로 하여금 ‘비탄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비통해 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가 된 상황을 크게 부각시시고,

슬픔을 극대화하고 있음도 봅니다.

 

그러면 그가 왜 그렇게 하였던 것일까요? 유다로 하여금 ‘죄의 심각성’을 느끼고,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큰 슬픔

 

1:1절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하나님 신앙의 구심점’이었습니다.

또한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황폐한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은 과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

 

유다가 한 때는 에돔이나 모압 등과 같은 주변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포로’가 되었고, ‘버림받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1:2~4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유다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먼저, 잠자는 것도 잊어버린 채 밤새껏 통곡하는 선지자의 모습이 말씀 가운데 보여집니다.

그러면서 유다가 ‘사랑하던 자’, 곧 ‘친구’로부터 배신당했음을,

곧 믿고 의지하던 대상(애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호 8:9-10).

 

그러지 말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하나님’이 아니라,

‘강해 보이는 나라들’을 의지했습니다(왕상 15:16-20).

 

그들이 ‘꺾어진 갈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나라가 망한 뒤에야,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뒤에야 깨닫게 되었으니
선지자가 어찌 ‘슬프다’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겔 29:6-7).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데도 ‘이방의 땅’에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하는

유다 백성들을 보면서 애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하나님으로 살 때’,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인데,

혹시 우리 중에 그런 유다를 따라가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죄’ 가운데 빠지게 되고, ‘소망’을 상실케 되는데도

그런 모습의 ‘이름뿐인 하나님의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없는지….

 

◑2. 사라진 영광과 축복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확인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일을 하셨음을 선지자가 보았습니다.

‘영광과 축복’을 모두 거두어 가심입니다. 열방들이 맘껏 유다를 유린하고, 지배하게 하심입니다.

5절 말씀을 봅니다.

 

1: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그런데 열방들이 유다를 유린하고 지배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웃기까지 하고 있음을 봅니다.

 

1: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던 유다가 ‘정복자들의 먹이’가 되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자 대적들이 이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있는 것인데,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임재’가 유다를 떠난 것입니다

 

1: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이 말씀 가운데 보여지는 ‘사슴 예화’는 시편 23편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그들을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유다는 ‘죄’로 인해 ‘영원한 목자’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을 뿐 아니라,

‘세상적인 지도자들’마저도 그들을 버린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1: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분명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교제’를 방해하며,

더 나아가 ‘대인관계’, ‘자연과의 관계’까지도 파괴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3. 회복을 위한 간구

 

그렇다면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당시 유다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것을,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죽임당하고, 상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있는 모습이었습니다.

 

1:9a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라는 말씀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사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도 말입니다.

 

어떤 아이가 사과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가 물었습니다.

“얘야, 어디서 그 사과를 얻었니?”

아이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습니다.

“과일 가게에서요.”

 

그러자 엄마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과일 가게 아저씨가 주시던?”

엄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니, 안주셨어요,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갖고 왔어요.”

 

놀란 엄마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셔!!”

 

그러자 그 아이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괜찮아요, 가게에는 지붕이 있어 하나님도 못 보셔요.”

 

이런 철없는 꼬마아이처럼, ‘죄’를 범하면서도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큰일인데,

앞에 소개해 드린 어린아이만 그렇겠습니까?

 

아닙니다. 자신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큰소리치던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슬픔’을 자기 가슴에 안고, 또 외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했던 것입니다.

 

유다가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새롭게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말입니다(9-11).

 

그런데 유다 백성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러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더 예레미야 보다 큰 슬픔을 안으시고,

외치듯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눅 8:19-21).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11:27-28).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말씀들인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정말 ‘복 있는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오늘 말씀 속에 보여지는 유다 백성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어 ‘죄’되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리 떠나 있는 모습입니까?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오늘과 내일, 영원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그 옛날 유다 백성들같이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곧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이름뿐인 하나님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곧 ‘하나님’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꼭 필요한데,

나와 여러분 모두가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절별 해석

 

1: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예레미야애가, 이 책의 주제는 유다 왕국과 그 수도 예루살렘의 재앙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인데, 본장 전반부, 곧 1-11절까지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파멸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간략하게 언급된다.

'슬프다' 라고 번역된 감탄사 '에카'는 비극적 상황을 묘사할 때 흔히 등장한다. 사1:21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평상시에는 민족 종교의 구심점이었으며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혹하게 황폐화되어 버린 폐허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파멸의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남편과 자식을 잃은 과부가 옛날의 영광을 회상함과 동시에

현재의 한탄스러운 상황을 돌아보면서 애도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과부 예화는 인간의 깊은 외로움과 절망을 묘사할 때 종종 사용되었다.

한때 예루살렘은 에돔이나 모압 등과 같은 주변 나라의 지배자였으나,

이제는 포로가 되었고 버림받았다.

 

1: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곡하니...친구도 다 배반하여'

잠자는 것도 잊어버린 채 밤새껏 통곡하는 저자의 모습은

극에 달한 슬픔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한편 본절에서는 유다가 '사랑하던 자' 혹은 '친구'로 부터 배신당한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당시 유다가 의지하던 대표적인 맹방은 애굽이었는데,

성경 기록상에는 애굽이 유다에 대해 배신하였다고 하는 특별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B.C. 588년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애굽은 비록 패주하긴 했으나

유다를 돕기 위해 원군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렘 37:5.

 

그렇다면 본절 내용은 맹방의 특별한 배신 행위보다는

의존하던 대상으로부터 실질상으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사실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겔 23장, 호8:9, 10.

 

유다는 외세에 의존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의존하여 그들의 안전을 유지하여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이었다. 왕상15:16-20.

 

유다는 이러한 친구들이 ‘꺾어진 갈대’라는 사실을 패망 후에야 비로소 배웠을 것이다.

겔 29:6, 7.

 

1: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유다는...사로잡혀 갔도다' 여기서 시인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로 눈을 돌린다.

'사로잡혀 갔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레타'는 삼하15:19과 겔12:3에서도 쓰이고 있는데,

이는 전혀 자발적인 포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은 언약 백성이 이방 땅에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하는 현실을 애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유다 백성이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실에 대해서는

왕하 24:1-5, 25:8-12, 대하 36:6, 10, 20을 참조하라.

 

1: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예전에는 성전에 올라가 절기를 지키려고 하는 순례자들로

북적대었으나 이제는 황량하고 인적이 끊겼다. 41:5에 의하면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드물게나마 순례 행렬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바,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그것조차 끊어졌던 것 같다.

 

1: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그의 원수가 형통함은...곤고케 하셨음이라'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이미 언약에 규정되어 있던 것이다. 신28:44 참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이 '그(남유다)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솔직한 고백이었다.

 

여기서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솨'는 원래 '위반', 혹은 '반역'을 뜻하는 말이다.

문맥을 살펴보면 이런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 역시, 언약 파기에 따른 처벌로서

이미 예언되었던 것 중에 하나였다. 신28:36, 63-68 참조.

 

신28: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신28:63~6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그 여러 민족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이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네 마음을 떨게 하고 눈을 쇠하게 하고 정신을 산란하게 하시리니

네 생명이 위험에 처하고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1: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모든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지도자’ .. 과거에는 '목백'으로 번역했는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는 영역 성경에서 주로 '군주' princes로 번역했는데,

예루살렘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혀 온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왕하25:4, 렘39:4

 

그리고 목초지를 찾지 못하는 '사슴'은, 시23편에 묘사되고 있는 상황과 극명한 대조이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목자가 되사 그들을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가 된 신세이다.

 

시인은 여기서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비참한 지경을 대조시킴으로써

포로로 잡혀 가는 비애와 슬픔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키고 있다.

 

1: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예루살렘이 정복자의 먹이가 되어 아무런 도움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과거의 영광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비참하였다.

아마 이 시는, 이 성이 함락된 이후 오래지 않은 그 어느 시기에 구성되었던 것 같다.

 

설상 가상으로 그 대적들을 이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성경에서 대부분 비웃음은 조롱이나 비난과 연결되어 쓰였다.

 

1: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릭 되었으니'

이곳에서 5절에서 언급되었던 예루살렘의 범죄에 대한 주제가 보다 더 상세하게 지적된다.

그리고 이 주제는 본서의 주요 신학적 문제들 중에 하나가 된다.

시인은 여기서도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여인을 예화로 사용하여서 설명하고 있다.

 

1: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여호와여...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선지자는 여호와께 호소하며 환난을 감찰해 줄 것을 간구하는데,

이 간구는 스스로 큰 체하는 적들의 무례에 근거해 있다.

 

아마 유다 백성은 그들의 운명을 다시 역전시켜 달라고 간청할 수도 없었고

간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것을 목격하고서도

그 근본적 원인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들의 오만불손한 승리의 자부심을 징벌할 것을 요구하며,

백성들의 고난을 제거해줄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종종 등장하고 있는데 그 두드러진 예로서

앗수르가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사10:12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사10:12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한편 '스스로 큰 체하오니'란 말을 영역 성경 NIV, RSV 등은

'적이 승리했사오니'the enemy has triumphed라고 번역하였는데,

문자적으로 틀린 번역은 아니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면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적들의 승리로 인한 보응이 아니라,

승리 후에 보여준 오만 불손한 교만으로 인해서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1:10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보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하마데하'는 여기서 복수형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드문 용례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그녀의 가치 있는 것들'로서,

B.C. 586년 바벨론인들의 공격으로 성전에 있는 값비싼 장식품들이 모조리 강탈당하여

바벨론으로 옮겨진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렘52:17-23.

 

이스라엘 자손들조차도 제사장 신분이 아닌 이상 성소에 입실하는 것에 금지된 상황인데,

이교도들이 그 거룩한 성전을 마구 짓밟았다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스라엘 회중에 들 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았던 것이다.

 

1: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보물로 먹을 것들로 바꾸었더니'

여기서 '보물'은 양식을 사기 위해 내주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보물을 말한다.

아마 이것은 B.C.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값비싼 보물이라해도 양식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본 절은 '그가 불을 내려보내시고 그것으로 내 뼈를 관통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읽을 수 있다.

 

시인은 '그물'과 '피곤', '불'이란 개념을 사용하여서, 예루살렘을 뒤흔들었던

그 공포와 혼란상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은 예루살렘 성 깊숙이 번져들어갔으며, 또한 그물이 쳐쳐 있어서

아무도 거기서 달아나지 못하게 되었었다. 한편, '이기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다'는 '짓밟다, 정복하다'는 뜻으로 바벨론 군대의 침탈을 암시한다.

 

1: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예루살렘의 죄악이 복합적이므로 마치 동물 목에 걸린 무거운 멍에처럼 그들을 짓누른다는

의미이다.

 

1: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성회' 모에드는 일반적으로 즐겁고 재미있는 모임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적군이

여호와의 호출을 받아 유다 용사들을 쳐부수는 축하 행사를 위해 모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술틀'은 예루살렘의 저항이 분쇄되고 그 방어자들의 피가 마치 술틀에서 포도즙이

으깨져 나오는 것과 같다는 회화적 표현 수법이다. .

 

1: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

본절에는 예루살렘 함락에 따른 쓰라린 심정이 표현되고 있는데,

이들 침략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 그 고통을 더욱 쓰라리게 한 것이다.

원문에는 '내 눈에' 에니란 말이 반복되고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은 초기의 역본들을 따라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

 

1: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본절은 시인이 파괴된 이 도시 대신에 애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손을 펴는 것'은 슬픔과 탄원의 몸짓을 나타낸다. .

 

1: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거역하였도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을 이런 참혹한 심판으로 몰아넣었던 죄악에 대한 한탄의 노래가 나타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한다거나 또는 그 공의로우신 처사에 반발하는 듯한

내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오랜 반역을 꾀하던 이들 하나님의 백성은 마침내 처벌당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가나안 종교의 퇴폐적인 제사 의식에 빠져들음으로써,

이미 오염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심판에 대한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었던 것이다.

 

1: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사랑하는 자' 란 동맹국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바벨론 군대가 이 땅을 파괴시키고

있었을 때 유다를 도우러 오지 못했다. 특히 기대를 걸고 있었던 애굽도

갈대아 군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그럴듯한 거짓말에 현혹되어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했던 바로 그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포위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긴 하였으나 결국 양식을 찾지 못해서 죽어갔다.

 

1: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예루살렘의 유일한 희망은 여호와께서 그 대적들을 심판해 주시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한편 예레미야는 70년이 지난 다음에야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고

그 반면에 갈대아인들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언했었다. 25:12-14.

 

그러나 예루살렘 함락은 이 예언을 믿는 경건한 자들에게까지도

엄청난 충격이 될 정도로 처절했음이 분명하다.

 

'마음이 괴롭고' 이의 히브리어 '메아 하마르'는 문자적으로 '창자가 뒤틀린다'는 뜻으로서

극도로 괴로운 심경을 나타낸다.

 

1:21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여기서는 전날 선택된 백성을 위해 대적을 무찔러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자기 백성에게 진노하셨다는 사실이 언급되면서,

대적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대단히 즐거워한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본절 끝부분의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라는 표현은 난해한 구문이다.

어떤 학자는 '선포하신 날'을 유다의 재앙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하나,

거만한 이스라엘 대적들이 처벌을 받아 낮아지는 때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NIV 영역본은 미래의 소망을 나타내는 희구적 가정법optative suvjunctive으로 이해하고서

이를 '그 날이 이르도록 하시기를 'May you brin g the day이라 번역하였다.

 

KJV, ASV 는 이를 예언적 완료형으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대적들의 악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처벌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이 처벌되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공의의 실현이 바로 심판이었다는 내용은, 뒤에 이어지는 몇 장의 주제로 등장한다.

 

본절은 이런 의미에서 본서의 기본적인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 민족이 바라보고 기대를 걸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1:22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본절은 본장의 결론에 해당되는데,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즉 온 세계의 심판주 되신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처벌하였던 것과 같이

악하고 죄많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그와 같은 심판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이런 탄원은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거한 것으로서,

사도바울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주의 약속을

상기 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롬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