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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눅15:8~10
◑도입
누가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가 예수님에 의해서 말씀되고 있습니다.
1)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양 일백 마리 비유(1-7절)
2)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열 드라크마 비유(8- 10절)
3) 잃었던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 또는 두 아들 비유(11-32절)입니다.
여기서는 이 세 비유 중에서 두 번째 비유인‘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열 드라크마 비유’(8- 10절)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의 드라크마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가까이는 앞서 1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1) 길어서 각주에 배치
(도입 일화) 오래 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고아원에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아이가 있습니까?"
그 물음에 원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네, 있어요. 열살짜리 여자아이인데 매우 흉한 꼽추예요.
단지 이름만은 좋아서 머시 굿페이스(Merch Goodfaith: 훌륭한 믿음의 은혜라는 뜻)이지요."
"바로 그런 아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고서 그 아이와 함께 떠났습니다.
35년이 지난 후, 아이오와 주 청사 사회복지 감사실의 실장은
어느 한 고아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고아원은 매우 특별한 곳인데 깨끗하고, 음식도 훌륭하며
특히 그곳 원장은 사랑이 넘쳐흐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곳에 수용된 어린이는 모두 잘 보살펴지고 있으며, 원장은 풍부한 사랑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저녁식사 후에 피아노 앞에 모여 섰을 때 나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결코 그 원장의 눈과 같은 아름다운 눈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내가 그 원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고 꼽추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데 놀라워했다.
그 원장의 이름은 머시 굿페이스이다."
어떤,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추하고 보기 흉한 고아를 보살펴 줄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머시 굿페이스는 사랑의 방법을 배우고 또 그 사랑을 백 배로 증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해석
어떤 여자가 은으로 만든 화폐인 열 개의 드라크마 동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 열 드라크마 중에서 그만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는 매우 기뻐하면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서는
“여러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내가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이와 같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에 있는 여자’ 비유를 드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온 세리들과 소문난 죄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10
우리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 무엇을 알게 해 주고자 하셨는지 그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한 여자가 열 드라크마를 지니고 있는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을 이 여자는 하고 있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그러니까 은으로 만든 동전 한 개를 찾기 위해서
밤새 온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져 찾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전기가 없던 시대이니까 등불을 들고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찾자 크게 기뻐하며 벗이며 이웃들이랑
모두 불러 놓고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며 함께 기뻐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여인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았을까요?
여기에는 당시 유대인의 결혼 풍속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드라크마란 은으로 만든 동전은 헬라[그리스]의 은전으로서 가치는 시대마다 달랐지만,
이 동전 한 개가 지닌 가치는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데나리온에 해당하여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드라크마는 3.9그램에 해당하는 은으로 만든 아주 작은 주화입니다만,
동전의 한 면에는 왕의 형상과 이름 그리고 다른 면에는 글들이 새겨져 있어서
이 돈이 유통되는 곳에서는 왕의 권위를 증명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은으로 만든 동전인 드라크마 하나가 이렇게 화폐로 유통되고 있으며
대략 10만원 안팎의 가치를 지닌 드라크마 동전 한 개를 찾으려고 온 집안을 뒤지는
소동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 그래서 하루는 살아갈 양의 돈의 가치를 지닌 것이니까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의 여인에게서는 열 드라크마는 매우 특별한 것으로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여인이 결혼할 때 남편이 될 사람에게서 받은 소중한 예물로서
결혼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드라크마는 화폐 이외에도 약혼식이나 결혼식에서 귀하게 사용되었는데
유대 사회에서는 남자가 장가갈 때에 여자에게 사랑의 징표로
이 드라크마를 열 개씩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드라크마를 팔찌나 목걸이 또는 머리띠로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이것을 ‘세메디’(Semedi)라고 불렀습니다. 드라크마가 세메디 장식으로 사용되면
이것은 화폐단위 이상의 크고 귀한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도둑이나 강도들까지도 이 세메디를 훔치거나 빼앗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채가 있어서 모든 재산을 차압한다고 해도 이 세메디만은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메디는 자기가 잃어버리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열 드라크마를 만일 여인이 한 개라도 잃어버린다면,
곧 열 드라크마를 다 채우지 않고 이 중에서 한 개라도 빠져있거나 빼버린다면,
이것은 결혼을 앞둔 신랑과의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파혼 선언이 됩니다.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개라도 없다는 것은 신랑과의 결혼 언약을 깨뜨리겠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중한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으니,
그 여인은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으며,
등불을 켜고 밤을 새서라도 온 집안을 뒤져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찾는데도 찾지 못하면, 그래서 열 드라크마 채워져 있지 않으면
여인은 결혼이 깨지는 불행을 맞게 됩니다.
그러니 한 드라크마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는 것에서
여인이 이 드라크마를 밤새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중요하고 큰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랑으로부터 받은 결혼예물이었고, 신랑을 맞이하는 결혼증표였습니다.
▲여인이 드라크마를 찾는 광경이 소개되고 있는데,
팔레스타인 농가는 직경 18인치(약45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원형창문 하나로만
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안은 대단히 어둡습니다.
그리고 마루는 다듬은 흙바닥에 마른 갈대와 풀을 깔았습니다.
이와 같은 곳에 열 드라크마 중 한 개를 잃어버렸기에 눈에 잘 띄지 않아
이 동전을 찾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의 여인은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뒤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여인은 마침내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곧 신랑에게서 잃어버려진 자신이 찾아진 것을 뜻해서,
그래서 신랑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으며,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마침내 찾았을 때 찾은 여인의 기쁨은
이 동전이 지닌 돈의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찾음으로써 여인은 비로소 벗과 온 이웃을 불러 혼인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한 드라크마를 찾자 크게 기뻐하며 벗과 이웃을 불러
“내가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다 같이 저의 혼인을 기뻐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
▲예수님은 이러한 결혼 풍속을 비유로 사용하여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사람들이 비난하고 멸시하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며 식사하고 하는데요.
예수님은 이들을 비유로 들고 있는 열 드라크마에서 잃어버려졌다가 찾아진
한 드라크마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 잔치 떡을 먹게 하십니다.
이 떡을 먹을 수 있는 자는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으며,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는 채움에 있게 됩니다.
이들 중에는 사람들이 비난하고 멸시하는 세리들과 죄인들도 있습니다.
즉, 세리들과 죄인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 중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세리가 당시 로마의 관리 노릇을 하는 하수인이 되어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부당한 행동을 한다고 여겨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저런 소문에 있는 죄인들을 멀리하였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은
곧 이들의 부정에 자신들도 오염되어 부패하는 것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리에 있지 않으며,
이런 저런 소문이 나도는 죄인들에 있지 않은, 그 모두와는 상관이 없는 자들의 나라,
그래서 세리에게서 보는 부정함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보는 불결함이 없는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로...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적용
▲1.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다 이 드라크마에 속합니다.
그 가치는, 하루 품삯(오늘날로 치면 10만원)이 아니라, 대단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돈 가치로 보면, 어쩌면 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양으로 계산할 문제가 아니고 질 적인 문제입니다.
질적으로 보면 드라크마 하나는 매우 소중합니다. 귀중합니다.
보배스러운 드라크마입니다.
잃은 드라크마 속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서약이 담겨져 있습니다.
잃지 않겠다는 서약이요, 영원히 사랑이 변치 않겠다는 사랑의 서약이기도 합니다.
▲2. 잃은 드라크마는.. 가까운데 있는 사람인데, 잃어버려 졌습니다.
눅15장의 다른 두 비유, 들판에서 잃어버린 양이나
먼 나라에 가서 잃어버려진 탕자 아들에 비하여
드라크마를 잃었던 집은 우리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잃어 버렸던 잃은 드라크마와 같이
주님을 떠난 사람들이 있고,
먼데서보다도 가까운 데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 잃어버린바 된 경우도 있습니다
여인이 드라크마를 어떻게 찾았습니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① '등불을 켜고' ... 방법입니다. 예수님 당시 집의 구조가 창문이 많지 못한지라
낮에도 컴컴합니다. 그러니까 작은 드라크마를 찾으려면 등불을 켜야 됩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현주소가 어둠의 마을이라는 말입니다. *집이 어두웠음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어디에 쳐박혀 있느냐? 그 장소가 어두운 곳이요,
상징적으로 ‘죄악된 곳’이라는 말입니다. 불신자의 생활 구조는 다 어둠의 집입니다.
때문에 전도자의 손에 등불이 들려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성도들이 빛이 되어져야 전도의 자격이 있습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으려면 내가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빛노릇 하는 것이 전도의 최선의 방법이요,
어둠의 노릇하면 전도가 하고 싶어도 되지 않습니다.
여기 등불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렵습니다.
전도하는 자는 발걸음이 앞장서지 않고 성령이 앞장서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먼저 내가 감동을 받아야
전도함을 받는 그 사람의 마음이 감동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전해야 사랑이 전달되어 집니다.
우리의 말에 진실이 있어야 그 말이 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령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집을 쓸며' ... 방법입니다. 빗자루를 들고 쓸며 샅샅이 뒤진다는 것입니다.
마당도 쓸고, 부엌도 쓸고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은 쓸면서
열심히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전도자들이 이렇게 해야 됩니다.
아파트, 시장통, 동네 구석구석을 쓸어야 합니다.
가족 가운데 누구인가를 찾기 위하여 쓸어야 합니다.
친족가운데 쓸어서 찾아내야 합니다.
③ '부지런히' 방법입니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제가 종종하는 속담입니다.
'부지런히 돌아가는 물방아는 얼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부지런한 농부가 추수 때 많이 거둘 수 있습니다.
게으름을 피우면 헛농사 됩니다. 바울이 롬12:11에서 말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게으른 자는 부지런한 개미에게서 배우라고 했습니다. 믿음생활은 부지런해야 됩니다.
우리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데 인내심이 있어야 됩니다. 굉장한 결단력이 있어야 됩니다.
아마 여자는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너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여자에게서 이 결단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드라크마를 찾아야 합니다.
▲3. 주님은 구원의 만수 full number 를 채우십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해 주시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요인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것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만수(滿數)에 채우시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열 드라크마
세리와 죄인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하나님이 정하신 자기 백성의 만수滿數, full number 에 있을 때
그 수에서 영영 잃어버린 자로 있지 않게 하십니다.
그래서 찾아 그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채우십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계6:11
이를 하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으로 있는 그들을
자기 부정에 있게 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리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같지 않은 자들은 말이죠.
이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달리 버릴 것이 없는 자들인가요. 아닙니다.
밭과 소, 그리고 자기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그들 ‘의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자기 가족, 자기 목숨, 밭과 소들을 여전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눅15장 본문은, 눅14장의 배경가운데서 읽고 해석하면,
더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1)
...........................................
주1) 눅15장의 배경이 되는 눅14장
여기에서 예수님은 어느 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수종병을 앓아 고생하는 자를 고치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안식일에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 생명을 구원하며
그 생명을 보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이야기 해주시면서,
또한 그 자리에 식사 초대를 받아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잔치의 윗자리에 앉지 말고 아랫자리에 앉을 것과
주인에게는 식사 초대를 할 때는, 아무런 갚을 힘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할 것을 통하여
각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도리를 가르치시는 말씀을 주셨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큰 잔칫집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의 청함을 받음에 있으나
이보다 자기들이 소유한 밭과 소와 가정이 더 큰 기쁨으로 있어
하나님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것이 거부에 있는 자들은
한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 잔치 떡을 먹는 기쁨에 있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 잔치에로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것보다 더 우선하여 내세울 기쁨이 되는 것이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따름으로써
오직 이 기쁨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을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름에서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자기 목숨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소유한 그 모두를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상위 개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밭과 소, 그리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 가치는
그 모두를 아무리 소중히 여기며 존귀히 여겨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부인[부정]에 있어야 할 것에 있습니다.
‘망대 비유’와‘한 임금이 치르는 전쟁 비유’에서 말씀되고 있듯이
모든 비용을 들여서라도 성읍을 건축하고 이를 지키는 망대를 완성하듯이,
그리고 한 나라의 왕은 1만의 군사로 2만의 적군을 상대하는 전쟁을 치르듯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부인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밭이나 소, 그리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가 지니지 못한,
이것으로서는 비교할 수 없는 더욱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밭이나 소, 그리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가 지니지 못한
더 큰 가치인 영원함과 그 영원함에 있는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당시 멸시를 받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 식사를 하시곤 하셨는데,
이러한 예수님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비난하며 빈정거렸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친숙한 것인 세 가지를
비유로 들어서 잃었던 것을 찾은 기쁨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그 첫 번째 비유인‘일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에 이어서
본문에서 두 번째 비유인‘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