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임하실 때 / 사도행전 2:1-4 - YouTube
◈성령이 임하실 때 행2:1~4 2025.02.16. *'성령 안에서' 7강, 전체보기
오늘은 '성령 안에서' 설교 시리즈 7강 마지막 시간입니다.
'성령님은 성령님의 방식대로 일하신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성령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우리가 맞추어야 됩니다.
그게 이제 성령님께 우리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우리들이 구해야 된다.
그래야 우리들이 과거의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 또 미래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 있다... 이런 말씀을 나누었죠.
오늘은 이제 "성령님이 임하실 때" 라는 제목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제가 어떤 과학적으로, 수리적으로 증명을 해서
'성령님이 임하실 때는 이런 것입니다' 라고 증명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이 임하셨을 때 나타났던 현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어떤 공식이 아닙니다.
성령의 방식을 우리들이 알 수 없지만,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아 우리가 왜 성령님의 임재를 구해야 되는가?'
그리고 2000년 전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그 성령의 역사,
그들의 경험을 우리들이 바라보면서
'성령님의 역사는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될 겁니다.
◑본문 행2:2절에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영어 성경에는 like(같은)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바람 같은'
왜냐면 그 당시에 성령의 역사를, 예전에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니까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이렇게 '같은'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요.
또 3절에 보면 '보여'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2:3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페이퍼를 쓸 때면 It seems to be 이런 표현을 종종 썼어요.
'뭐 같이... 뭐뭐처럼 보인다' 이런 표현을 참 많이 썼는데,
오순절에 성령님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이전에 성령님을 본 적이 없으니까 '마치 이렇게 보였습니다' 한 거죠.
그런데 어떻게 보였는가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그리고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there appeared unto them cloven tongues like as of fire
예를 들면, 우리가 어디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갔을 때,
우리들이 보지 못하던 새로운 것들을 보거나, 또 새로운 동물들을 보면
우리들이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그거 꼭 뭐 같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은 팩트이고,
'그 성령님이 임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거예요.
▲성령님이 임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각자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4
여러분, 방언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성령이 임할 때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방언인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처음 방언을 했던게 초등학교 2~3학년 때였던 거 같아요.
그때는 기도원에 많이 가던 그런 문화였잖아요.
조그만 우리 친구들이 같이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 때, 다 같이 방언을 받았어요.
참 신기한 건, 성경에 나타났던 역사들이 과거의 일이 아니더라고요.
120명의 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다같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던 것처럼
저희도, 같이 기도하던 그 조그만 어린아이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방언을 했던
그런 기억이 있어요.
초대교회에 역사하셨던 그 성령님이 그렇게 역사하셨지만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똑같은게 아니에요.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시겠습니까?
성령님의 역사를 우리들이 기대하는 거죠.
▲미국 뉴욕에 아주 유명한 타버너클 처치 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거기에 성령 운동을 하는 짐 심발라 목사님이 있는데
<성령으로 다시 시작하라> 라는 책에서, 그는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시는 성령님을 보는 것보다,
당신을 위해 일하시는 성령을 만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누구의 간증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 거 같아요.
기독교 프로그램 중에 제일 인기 있는게 CBS의 '새롭게 하소서'
그리고 CTS의 '내가 매일 기쁘게' ... 둘 다 간증 프로그램입니다.
'누구에게 그런 놀라운 일이 있었대...'
누구에게 (남에게) 있었던 일을 기뻐하는 것보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성령님의 역사를 간증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기대가 있어야 돼요.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예배하는 중에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실지?'
▲'성령님의 임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령님의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지난 6주 동안 계속해서 나누었던 얘기예요.
우리들이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면,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성령님의 방법으로 일하실 거예요.
목마른 심령 위에 하나님이 생명을 부어 주실 거고,
고단하고 두려움과 슬픔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소망을 허락하여 주실 것이고,
오늘 질병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몸에,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에
질병을 고쳐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오늘 어떤 방법으로 성령님이 일하실지 모르지만,
성령님은 성령님의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 시작할 때,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만나교회 목회를 하면서 '제가 참 복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늘 제가 목회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늘 새로운 성령님의 역사를 구하고 사역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만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의 신앙의 형태들이 아니라
'성령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라며 예배할 수 있는 것,
어쩌면 그게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큰 복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가로막는 가장 무서운 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과거의 경험, 우리의 상처, 실패에 대한 기억으로 인하여
성령님이 임재하실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혹시 아닐까요?
▲마이클 조던 이라는 유명한 농구선수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팀이
3년 연속 NBA 우승을 하던 그런 때였어요.
정말 신화적인 인물이고, 미국의 ESPN 에서 선정한 20세기 미국 최고의 운동선수 하나를
뽑으라면 마이클 조던을 꼽습니다. 2003년도에 그가 은퇴를 했고요.
그가 쓴 기록 중에 아직도 깨지지 않는게, 정규 시즌 평균 득점,
그리고 플레이오프 평균 득점... 이게 깨지지 않는 기록이라고 말하죠.
그런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9000번 이상 슛을 놓쳤고, 거의 300 게임에서 졌으며,
승부를 결정짓는 슛을 26번이나 놓쳤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건 뭐 세상적인 것도 마찬가지고,
저는 신앙의 원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실패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실패가 실패가 아닌 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실패한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들에게 역사하실 성령님을 우리들이 믿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실패의 기억들이, 우리를 절대로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성령 충만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성령 충만은 실패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 충만이 뭐라 그랬어요?
'성령님,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
어쩌면 우리들의 인생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 우리는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을 거예요.
성령님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실패한 인생이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꿈꾼다고 하는 것,
그것은 어떤 신앙인들의 모습을 카피하는게 아니에요.
'성령님, 오늘 우리들에게 역사하셔서, 우리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제가 간증케 하여 주옵소서'
그러니까 우리들이 예배를 드릴 때, 기도드릴 때,
열린 마음으로 성령님이 임재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어떤 교회에 저녁 집회를 가게 되었어요.
제가 요즘은 거의 외부 집회를 가지 않습니다. 제가 약속을 잡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초에 갑자기 이렇게 편지가 한통 딱 날라왔는데, 그 편지가 뭐냐면
저희 아버님(김우영 목사님)이 옛날 젊은 시절에 2년 동안 목회를 하셨던 그 교회인데,
'목사님의 아버지가 목회하셨던 교회이니, 한 번 와 주십시오!'
그래서 영등포에 제가 금요일에 갔다 왔어요.
제가 어릴 적에 어렴풋이 생각나는 기억으로는,
그 예배당을 딱 들어갈 때면, 초록색으로 아치처럼 만들어 놓고,
거기에 교회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 교회 이름이 되게 촌스러웠어요.
'새마을중앙교회'였어요.
근데 지금은 교회 이름이 '시온성교회'로 바뀌었고,
정말 감사한 건, 그 교회가 잘 성장해서, 옛날 있었던 교인들은 지금 몇 명 안 남았지만,
그 분들을 뵈면서 너무 반가운 시간들을 가졌어요.
근데 제가 그날 설교하면서, 제가 강대상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전 저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고 섰지만,
제 방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저는 목사로서 저에게 제일 큰 축복은, 설교하러 올라오기 전에
하나님의 방법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오늘도 저는 제가 이렇게 준비하고 강단에 섰지만
제 삶에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방법과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며
이 자리에서 서 있다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들이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다 같지 않을 거예요.
'성령님, 오늘 말씀 가운데, 찬양 가운데, 기도 가운데 임재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왠지 우리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경험을 우리들이 간증하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들 참 많이 불렀던 찬송이 있죠?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 하리로다"
이것이 나에게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 때
그때 우리들의 신앙에 역동성이 있고
우리들의 삶이 새롭게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는가요!
성령님의 역사는, 누구를 이렇게 꿈꾸는, 누구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간증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썼던 글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어요.
영국에 부흥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나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은 설교할 때, 손으로 앞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는 습관이 있었대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그 목사님을 따라서, 설교 할 때 자꾸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는 거예요.
그 중에는 심지어 대머리도 있었다고 해요. 그 얘기 기억나세요?
우리는 자꾸 누군가를 흉내 내려고 하지만, 성령님의 임재는 그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우리들이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의 지식을 아는 것과,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 교회에, 얼마나 많은 제자훈련과, 성경 공부 프로그램들이 있었나요?
어제도 제가 로비에 들어오는데, 우리 교회 M스쿨 간사들이,
저한테 흥분이 되어서 막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목사님, 광고한 지 한 주밖에 안 됐는데, 1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M스쿨에 등록을 했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말씀을 배운다고 하는 것, 지식을 얻는다고 하는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지식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하면,
지금 한국 교회가 이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경 지식, 신학 지식이 역사하지 못합니다.
전에 제가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비교한 카드를 나눠드렸죠?
말씀은.. 우리들의 삶에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진리를 말씀해 주지만,
진리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겁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말씀을 배우고, 지식을 더해가도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지식이 우리들에게 쌓이고 쌓이면, 그 지식이 우리 딱하게 율법적으로 만들어서
오히려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는데, 그들을 통하여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성령을 기다리라' 말씀하셨고,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돼요.
성령님의 역사가 끝나면, 지식이 쌓여진 교회는,
그 지식으로 인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다툼이 일어나고요.
지식이 쌓여져 가는 교회에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느 날에는 이 건물 밖에는 남지 않는 거예요.
2000년 교회 역사 가운데 유럽의 교회들과, 무너져 가는 교회들에게 신학이 없었나요?
아니에요. 신학의 논쟁은 여전히 있었고요. 신학의 연구는 여전히 있었고요.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어요.
저는 굉장히 이상주의자입니다. 저는 그게 좋아요.
왜요? 나는 꿈꾸는 사람으로 끝까지 살다가 갈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꿈이니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교회 성장학에서.
어떤 교회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큰 교회들 중에
50년 이상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없답니다.
처음에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이 됐는데, 그게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쇠퇴하기를 걷는다는 거예요.
▲근데 저는 이상주의자예요. 우리 교회도 이제 창립 50주년이 몇 년만 있으면 다가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도, 50년이 지나면 교회가 쇠퇴한다고 하는데
오늘도 새롭고, 내일도 새로운 역사가
우리 교회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 새롭게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예배드리는 건, 저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왜요?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를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에게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남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자 성령님이 임하실 때 어떻게 임하셨는가요?
몇 가지를 살펴볼게요.
본문에 보니까 2절에 '홀연히'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NIV에 보니까 'suddenly 갑자기' 이런 말이에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는 'without warning' 으로 번역했어요.
어떤 경고도 없이, 아무 예측할 수도 없는 때, 성령님의 역사가 홀연히 나타났다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님의 역사는 '의외성'에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계획대로 임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성령님의 방식대로 임하시는 거예요.
일례를 말씀드릴게요. 제가 언젠가 다른 교회에 집회를 갔더니
목사님이 광고를 하는데, 3일인가 4일인가 저녁 집회를 하는데
'여러분, 어느 날이 제일 은혜스러운 날인지 아십니까?'
교인들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담임목사님이 '여러분들이 안 오는 날이 은혜스럽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요.
'성도가 하루 빼 먹으면, 꼭 그 날이 제일 은혜스러운 날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절대 하루도 빼 먹지 말라'는 뜻이죠.
근데 제가 그 얘기를 듣고서 '목사님이 광고를 참 잘 하셨다' 생각했어요.
만약에 120명 문도가 지금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얼마 동안을 기도했는지 몰라요.
만일 예수님께서 '내가 몇날 몇 시에 성령을 너희들에게 부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제자들이 모여서 그렇게 기도했을까요?
그리고 딱 그 약속된 시간에 성령이 임한다고 예상했다면
그들에게 성령님의 역사가 그렇게 강력하게 그렇게 와 닿았을까요? 아니에요.
성령님이 언제 임하실지 모르지만, 서든리, 홀연히 오늘 우리들에게 임하실 텐데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는데, 강력하게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임하실 때,
그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예배하면서 기대하는 거예요.
'성령님, 홀연히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저에게 임하시겠습니까?'
홀연히 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없이,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지식은 우리를 딱딱하게 만들어서, 교만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의 임재가 끝나버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신앙인들이
나이를 먹고, 신앙의 연조가 올라가고, 집사 권사 장로 목사가 되면... 교만해지는 거예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지식의 오류, 자기 신앙의 방식 때문에
성령님이 역사하지 못하는 거예요. 무섭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몇십 년 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더 간구해야 되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지식을 깨뜨리시고,
홀연히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에,
그 성령님의 역사를 제가 간증케 하여 주옵소서...'
▲제가 요즘 제일 두려워하는게 그런 거잖아요.
제가 우리 부목사님들이 다 제 아들보다도 어린 나이의 부목사님들이 있어요.
제가 무언가 얘기를 하면, 뭐 반박을 하기보다는, 그냥 이렇게 저를 따라하려고 해요.
제가 그때마다 두려운 거예요.
내 경험에 의하면, 제가 지금까지 오는 동안, 별로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았어요.
뭐 소위 목회를 하면 ... 다 됐어요. 그게 무서운 거예요.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잘 되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혹시 저의 경험으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들이 왜 지금 좋은 교회에 있는지 아세요?
제가 그런 위험성을 아직까지 깨닫고 있어서 괜찮아요.
여러분들의 삶에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으면 괜찮아요.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1860년대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여러분들의 생각할 때, 남군이 옳은 것 같아요, 북군이 옳은 거 같아요?
노예 해방 전쟁이었잖아요. 북군이 노예를 해방시켰어요.
참 놀랍게도 그 당시 노예를 해방시키는 너무나 당연한 그 일에,
남부에 있는 교회들 중에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을 손에 들고
'노예제도가 축복입니다' 라고 설교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흑인들을 노예로 주셨고,
그 흑인들을 노예로 주셔서,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선교가 되도록
우리 백인들에게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다 아멘 그랬어요.
진짜 무서운게 뭔지 아세요?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성경 지식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무섭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왠지 아세요?
'아니 어떻게 메시아가 나사렛에서 날 수 있는가?'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많은 사역을 하실 때,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이 일어나는데
그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어요.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는 거의 이방 땅에 가까웠어요. 마4:15 '이방의 갈릴리여'
'어떻게 메시아가 이방 땅에서 그런 사역을 할 수 있느냐?'는 거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지식을 깨고
우리들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님, 그분이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기 시작할 때에
성경 말씀이 내 지식으로 인하여, 내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깨뜨리고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여 주옵소서!'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라는 거예요.
▲저는 지금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동서로 나눠져 있는데,
우리 대한민국만의 현상이 아니에요. 전 세계가 양극화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가 옳은 것을 주장하는데, 다 성경적 근거를 말해요.
미국의 예를 들면, 미국의 민주당원들에게 예수님은 민주당원이고,
미국의 공화당원들에게 성경의 예수님은 딱 공화당원이에요. 왜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지식들만 딱 뽑아내니까!
지난주에도 제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성령님은 우리의 지식보다 훨씬 더 크다 그랬어요.
저는,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가, 지금 여기 있는 예배드리는 분들 가운데도
여러분들이 굉장히 다른 이념과 옳음을 가지고
여기에서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주 안에서 예배하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공동체!
우리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저는 그래서 교회라고 봅니다.
교회에 소망이 있고, 말씀에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왜요?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에, 우리들의 생각을 깨고,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에,
성령님의 임재가 오늘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홀연히 성령님이 우리들 가운데 임하실 때에! (동서 분열도 합쳐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렇게 준비하다가, 어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어요.
옛날 우리 부흥회 때, 부흥강사 목사님은, 저희 아버님도 부흥 강사였는데
저희 아버님도 그런 옷이 있었어요. 흰 양복에 흰 구두.
옛날에 부흥 강사 목사님들은 흰 양복에 흰 구두 신고
또 이렇게 우리 아버님의 특유의 춤이 있었어요.
그래서 찬양할 때 막 이렇게 춤추면서 찬양하셨습니다.
왜 그분들은 그렇게 춤을 추며 찬양했을까요?
「빈 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옛날에 그때의 레트로 감성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때 왜 저렇게 춤추며 찬양했을까요?
그때 정말 힘든 시간을 지나가고 있었던 우리 믿음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그 부흥회에 와서 '하나님, 시들은 나의 영혼에 성령을 내려 주시지 않으면,
제가 이 시간을 지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요즘처럼 병원이 많았던 때도 아니고,
'하나님, 성령께서 나를 고쳐 주시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성령님을 구하던 그들의 마음 가운데,
'빈들에 마른 풀 같이' 라는 찬양이, 우리가 지금 부르는 그런 찬송이 아니었어요.
아주 갈급하고 절박한 찬송이었어요. 간절한 찬송이었어요...
그런 목마른 마음으로 찬송을 했고, 그런 마음으로 찬양할 때
성령님의 임하심을 간증할 수 있었고, 그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의 모습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에게 성령의 임재가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의 지식만 남은 것은 아닌가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성령께서 임하실 때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120명의 문도들이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 우리들에게, 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을
기대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들에게 주셨구나'
제가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제가 이렇게 치밀하게 이렇게 준비한 것은 아닌데,
이 말씀을 마치고 우리들이 변화산을 지나가는데, *연합기도회를 뜻하는 듯
우리들이 1년에 두 번 변화산을 지나가는데,
우리가 어디서 기도할 수 있고,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지만,
다 같이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120명의 문도에게 성령이 임했던 것처럼,
이번 '변화산'을 통하여
'하나님,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케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제가 오늘 우리 국장 목사님들한테
'교회에 모든 공간을 예배드릴 수 있도록 다 정리해 놓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다 들어오지 못하겠지만,
이 성전에 어느 곳에 있든지, 성령님은 시공을 뚫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니까
우리들의 함께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님의 임재, 이곳에 임하신 하나님을
우리들이 고백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공동체성'에 특징이 있어요. 다같이 모였을 때,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임하면, 우리 가운데 하나됨이 있어요.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는 것,
그것은 어떤 투쟁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에,
이 교회부터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
교회가 쇠퇴하는, 교회가 무너지는 가장 중요.한 표식 중에 하나가... 분열이에요.
교회 안에 싸움이 일어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지적하기 시작할 때,
그때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면... 하나가 되기 시작해요.
생각해 보세요. 120명의 문도들이 다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들은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각자 다른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근데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을 때, 그들이 함께 문을 박차고 나가서
초대 교회를 만들어 내기 시작해요. 그러므로 '다름, 차이'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또 중요한 게, 성령님의 역사가 이 공동체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데
2:3절에 보니까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성령은 이 공동체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데,
그 성령님의 임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으로 임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다...
▲ 저는 우리 교회 예배가 참 좋아요.
그리고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과 함께 찬양을 하면서,
찬양하는 중에 저는 오늘도 은혜를 받고 설교단에 나왔어요.
우리 여기 앞에서 있는 우리 찬양팀의 찬양 소리를 들으면서
'저 사람들이 노래를 기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들에게 믿음의 고백이 있구나'
그게 느껴지니까... 찬양을 부르면서 제가 너무 좋아요. 정말 좋아요.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많은 분들도 '아, 예배가 참 좋다. 찬양이 참 좋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이 '느낌이 좋다' 라는 많은 회중들 가운데 내가 속하여 있는 것으로,
나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거예요.
성령님의 역사는, 이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는데
'나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 그 성령님의 임재를 우리들이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나의 경험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제 카톡에, 어느 권사님이 이런 카톡 메시지를 제게 보내셨어요.
「목사님, 어제 예배를 드리는데, 사춘기 지금 신앙의 방황에 빠져 있는 우리 아들이
예배에 왔는데,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이 어떻게 설교하나 보자' 이러고 있었는데,
아들이 목사님 말씀에 설득이 되어서 '성령님이 내 가운데 역사하는 것 같아요'
아들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나에게 임하시는 성령님, 나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
그분의 아들이, 어제 엄마 권사 취임식 때 나오면서 결심을 하고 나왔대요.
'절대로 목사님 말에 설득되지 않으리라' 하고 결심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말했대요. '성령님이 나에게 역사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 고백을 했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지 모르지만
성령의 주권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2:4절에 보니까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들이 각자 방언을 했는데, 그들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의 주권을 따라,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아, 교회는 이런 것이구나.. 예배는 이런 것이구나..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님의 주권에 따라,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역사!'
▲여러분, 초대교회가 놀랍게 부흥했을 때, 사도들이 사역을 다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도자(집사)를 뽑아야 되겠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하여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 격려하는 일들을 집사들에게 시키기 위해서, 일곱 집사를 뽑게 되죠.
행6: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을 사람 일곱을 택하라'
일곱을 뽑는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어요.
우리가 종종 교회에서 실수하는게 있는 거 같아요.
우리들이 어떤 세상 자격으로 자꾸 일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요즘 저는 한국 교회가 어려워지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마다 담임목회자를 뽑을 때 자격 조건을 이렇게 내 거는 거예요.
나이에, 스펙에...
'예수님도 그 자격에 안 맞는다'는 말이 있어요.
세상에, 예수님도 목회할 수 없는 그런 교회를 만들고 있는 우리들...
제가 재작년인가 우리 장로님들하고 그룹으로 함께 식사하면서
저희 교회도 이제 언젠가는 후임 목사님이 와야 되니까,
'앞으로 오게 될 후임 목사님은 어떤 목사님이면 좋을까요?
한번 원하는 상을 얘기해 봅시다'
그래서 장로님들이 다 얘기하는데... 세상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만일 하나님이 자격으로 우리들에게 일하게 하신다면, 누가 일할 수 있는가요?
그런데 오늘 일곱 집사를 뽑는데 보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 였어요.
우리 교회가 오늘 생각해야 돼요. 우리 믿음이 생각해야 될 것이 있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
▲몇 년 전에 저희 교회에서 주관하는 설교대회에서
어떤 참가자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 중에 예화로 영상을 하나 보여줬어요.
어떤 어린애가 그림을 그리고, 아니 그림이 아니라 낙서를 하고,
그 낙서 위에 엄마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었는데... 한번 보세요.

마치 우리들의 인생이, 내 삶을 저렇게 낙서처럼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요?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요.
내 삶, 내 계획, 내 건강을 바라보며 '나는 낙서 같은 인생이야'
그런데 성령님이 우리의 인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성령님의 그림이,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닿기 시작할 때
어느 날 보니까, 멋진 나의 인생의 그림이 그려져요.
우리가 왜 성령의 임재를 구해야 될까요?
성령님이 우리를 쓰실 수 있도록, 성령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실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 드리는 거예요.
▲오래 전에 제가 <덕혜옹주>라는 영화를 봤어요.
뭐 그렇게 재밌는 영화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영화를 보고 그 다음날 신문에 보니까,
이 <덕혜옹주>라는 영화에, 고종 황제의 아들인 영친 왕과 덕혜옹주가 *고종의 딸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그런데 신문에 어떤 기사가 났냐면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일본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기록은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이렇게 표현을 했더라고요. 'Faction 영화다!' fact + fiction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일본에 있었다는 팩트에,
픽션, 즉 가상의 스토리를 만든 것이 팩션입니다.
근데 저는 그 말을 듣는데 이렇게 제 마음에 와 닿았어요.
'우리들의 생각하는 우리 인생의 팩트에,
성령님이 우리들의 삶에 스토리를 만들어 가시면, Faction 이 된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우리들이
이 세상과 다른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에요.
램18장에 예레미야가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이끌고,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는 녹로로 데려가세요.
토기장이가 녹로에서 질그릇을 빚는데, 그것이 터져 버렸는데,
토기장이가 그 진흙을 거두어 다시 그릇을 빚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그것을 보여 주시는 거예요.
'이스라엘아, 저 토기장이도 터져버린 그릇을 다시 만들진데,
내가 너희를 다시 빚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손으로 우리를 다시 빚으시겠다는 말씀이에요.
오늘 성령님의 임재,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실 때
우리들에게서 일어날 일, 우리들에게 일어날 삶의 간증,
그것이 우리들에게 살아 있을 때,
성령 안에서 우리들이 예배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성령 안에서 역사를 간증할 수 있지 않겠는가요!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그리고 한 주 여러분들이 흩어져서 살아갈 때
여러분들 속에 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간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 '성령님의 임재를 우리들이 구합니다. 우리의 방법,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오실 성령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빈들의 마른 풀 같은 우리의 심령에 봄비가 내리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와 함께 하실 성령님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결단의 고백> *공동기도
성령님이 임하실 때, 새로운 일이 시작됨을 믿습니다.
성령님의 주도적인 역사와 주권을 의지합니다.
성령님 오소서! 우리의 계획과 기대를 내려놓고
오직 성령님의 방법으로 역사하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소서!
과거에 실패와 상처를 뛰어넘고, 새로운 기대로 나아가게 하소서
성령의 의외성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굳어진 생각과 편견을 성령의 불로 태우시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소서
성령님이 임하실 때, 우리의 인생이 다시 쓰여질 것을 믿습니다.
전에는 우리의 능력과 경험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오직 성령님의 주권 아래 행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꺾으시고, 성령의 뜻을 온전히 이루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