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에 대한 심판 예언 렘47:1~7 출처, 정리
▲도입
본 장은 열방에 관한 예언(46-51장) 중 두번째 부분으로서
블레셋이 북방 민족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내용입니다.
블레셋은 유다의 해안 쪽 광야를 점유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나라였습니다 (삿3:1-4).
그들은 힘이 조금이라도 강해질 때마다 해변 광야에서 유다의 산에 있는 성까지
세력을 확장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노력은 유다의 삼갈, 삼손, 사울 등에 의해 좌절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다윗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었고 솔로몬 때에는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분단된 이후 힘의 균형이 흔들렸습니다.
유다는 여호사밧과 웃시야의 통치기간에는 블레셋을 눌러둘 수 있었으나
여호람과 아하스가 통치하던 때에는 오히려 열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블레셋은 역사적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다를 공격해서 유다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본 장은 하나님이 우상을 숭배할 뿐 아니라 유다를 괴롭힌 블레셋을
바벨론을 통해 반드시 멸망시킬 것이라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가는 기록되어 있지만
왜 심판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통해 그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블레셋 민족의 뿌리를 살펴보면, 그들은 함의 후손으로 하나님께서 갑돌 섬
(그레데, 크레타 섬)에서 이주해 와서, 가나안땅에 살게 된 백성들이었습니다.
암9:7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크레타(갑돌) 섬의 원주민들이, 블레셋으로 이주해 온 시기는
출애굽 백성들이 가나안에 진입하던 시기와 동시대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이신 것처럼,
같은 시기에 블레셋 사람을 가나안으로 이주시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미워하시거나
처음부터 심판의 대상으로 확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주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훈련교관으로, 시험하는 가시로 데려오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빼앗겼을 때, 언약궤의 이동 경로를 따라
그들의 교만함과 완악함을 벌주셨고,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 깨닫게 징표까지 주셨지만,
블레셋 민족이 뉘우쳐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법궤는 블레셋의 도시들(앗도르, 갓, 아스글론)을 순회하며
블레셋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했었죠.
또한 그들은 공의로운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아모스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블레셋의 중심 도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6절에, 블레셋은 자신들의 힘을 바탕으로 주위 약한 민족, 부락민을 사로잡아
에돔에 종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이는 경제적인 유익을 위해 사람을 도구화한 전형적인 악행이었습니다.
이것은 블레셋의 민족성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도구화하고 물질이 사람보다 앞선 블레셋의 문화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못하였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렇게 우상숭배와 인신매매를 통하여 불순종의 길을 걸어간 블레셋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이제 어떤 심판이 임하게 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블레셋에 심판의 메시지가 임한 시기
47:1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먼저 예레미야에게 이 심판의 예언이 임한 시기는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이라고 합니다.
이 침공은 46장에 언급된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Battle of Carchemish)
이전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애굽이 블레셋을 침공한 적은 여러 번이지만.
갈그미스 전투 때에 많은 전력과 블레셋에 대한 영향력을 애굽이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바벨론의 영향력과 지배가 시작되었지요. 팔레스틴 땅에 대한.
이렇게 각 국의 전쟁은 미묘하게 서로 얽히고 얽혀서
서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심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심판의 엄중함과 두려움(2-3)
블레셋에 임한 (바벨론을 도구로 한 하나님의) 심판은,
마치 범람하는 강과 같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블레셋의 북쪽에서 공격해 들어온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공격은 마치 강한 물줄기가 사람을 휩쓸어 가듯이
블레셋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공격이 될 것을 알려줍니다.
아모스는 그 심판을 ‘불을 붙이신’ 것으로 묘사했는데
본문에는 ‘물처럼 공격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물과 불 두 가지 심판의 모습이 알려주는 것은 ‘태워버림, 휩쓸어감’
곧 이 심판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그 심판은 크고 두려울 것입니다.
3절 ‘군마의 발굽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가 진동하는 소리 때문에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의 자녀를 돌보지 못하리니’
부모는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 자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그날의 심판이 얼마나 두렵게 임하는지
그 공격의 소리 곧 말발굽 소리와 병거 바퀴 소리로 인해서
아버지의 손맥이 (손에 힘이) 풀려서 자기 자녀조차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임을 알려줍니다.
실제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되는데
그 증상은 ‘정서적 마비, 악몽, 환청’ 등입니다.
전쟁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공포감을 줌과 동시에
우리 마음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반대로 블레셋이 약한 민족들에게 주었을 공포를 생각해 봅니다.
강한 힘으로 마을을 공격해서 그들을 노예로 팔아넘긴 블레셋은 자신들이 했던 그대로,
바벨론의 힘에 짓눌려 약자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뿌린대로 거두도록 심판을 행하십니다.
▲블레셋의 고립과 뿌리뽑힘
4절 ‘이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며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버리시는 날이 올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
블레셋은 지중해 해변에 거주하며 무역의 거점이 되었던 나라이기에
동일하게 해변에 위치하였던 두로와 시돈과 친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해상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강대국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바벨론의 공격은, 두로와 시돈도 도와줄 수 없을 만큼 강력하여
블레셋은 고립 속에 패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두로와 시돈의 부요한 재물도 블레셋을 구원해 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인생 고난의 때에 내가 믿고 있던 사람, 물질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날에 하나님의 심판은 뿌리까지 뽑아낼 만큼 엄중하여
블레셋 현재 거주지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이주하기 전 살고 있던 갑돌 섬에까지
그 심판이 임하여 그 백성들이 유린당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 포로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에돔에 노예로 팔아버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블레셋 족속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심판하실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블레셋의 통곡
5절 ‘가사는 대머리가 되었고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잠잠하게 되었나니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가사는 블레셋을 대표하는 성읍입니다. 그 성읍에 초상이 나서 그들의 장례예법대로
사람들이 슬피 울며 머리를 삭발하고 몸에 상처를 내면서 애곡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또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뽑혀 버린 블레셋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렸던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이 무너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6절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이 멈추고, 자신들 위에 안식이 임하길 간절히 바라는 그들의 탄식입니다.
블레셋은 철기문화가 발달하여 사울 왕 때에 철로 만든 칼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 칼을 가지고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게 하고 팔아 넘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칼은 도리어 하나님의 심판의 칼을 부르는 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들을 탄식하게 했던 블레셋은 이제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에 탄식하고 있습니다.
‘제발 좀 심판의 칼이 칼집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구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7절입니다.
7절 ‘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정하셨느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은 ‘오래 참으심’이라는 사랑의 칼집에 담겨
쉽게 아무 때나 빼서 휘둘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 나온 심판의 칼날은 그 뜻하신 심판을 완전히 행하시기 전까지
절대 그 칼집에 도로 꽂히지 않습니다.
블레셋을 향해 뽑혀진 칼날도 잠잠히 쉬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의 명령을 따라
블레셋 본토부터 갑돌 섬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심판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블레셋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면서
역사에서 사라진 민족이 되었고,
현재 팔레스타인은 그 이름이 블레셋에서 왔지만
실제 이 당시 블레셋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결국 땅 이름으로만 기억되는 민족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말 그대로 ‘유명무실’ 이름만 남고 실재하지 않는 민족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본문 렘47장을 보며,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때 철기문화를 앞서가며 이스라엘을 두렵게 했던 블레셋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유적으로만 그 발자취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겸손을 배우게 합니다.
지금도 한 나라, 공동체, 개인이 블레셋처럼 교만에 취해서 칼을 휘두르며
나의 유익을 위해 상대적 약자들을 괴롭히고 피를 짜내고
하나님의 공의를 굽게 하고 있다면
그 칼은 ‘여호와의 심판의 칼’(:6)을 부르는 전주곡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힘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를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기준삼아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아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사라질 권력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을 재촉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 볼 때입니다.
지금 나의 칼날이 약자를 향하고 있다면
그 칼날을 바꾸어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을 향하여 겨누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센 권력과 힘을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 (:6)이 있음을 기억하며
겸손히 그 힘과 권력으로 약자를 섬기는 삶을 살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적용
전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내셨던 장리욱 박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지금 그대가 있는 방은 그대가 그 방에 들어가기 전보다 좀 더 깨끗해지고
좀 더 정돈되어 있는가?
또 지금 그대가 참석한 좌석은 그대가 들어가기 전보다 좀 더 화기가 돌고
웃음으로 꽃이 피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발을 들여 놓은 곳마다 휴지가 널려 있고 말썽이 생기고
투쟁이 일어나는가? 중요한 것은 그대의 존재가 크냐 적으냐가 아니라
그대의 존재가 주위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하는 그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람 인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높고 낮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소유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며
유식하고 무식한 것, 유명한 것이나 무명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주위 환경에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도움을 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7:16)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블레셋은 주전 1500년 경에, 가나안(팔레스타인) 땅에 진입했다가,
주전 605년 경, 바벨론이 블레셋을 심판의 도구로 멸망시켰을 때,
그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와서 살았던 약 900년 동안 세월에,
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인류 역사에... 어떤 공헌을 했고, 어떤 유산을 남겼던 것인가요?
그들이 그저 역사에 남긴 흔적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힌 역사'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공헌, 어떤 기여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하고 거슬리는 못된 역사를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그외에도 그들이 행한 잘못은, 그래서 심판 받은 이유는, 암1:6절에 기록되어 있음을
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블레셋은, 지중해의 앞선 철기 문화를, 팔레스타인에 소개해 준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는데, 블레셋은 철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앞선 문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기구를 벼리려면, 블레셋에 내려가야 했던 것입니다. 삼상13:19~21
그런데 그 당시 철기란.. 주로 '전쟁 무기', '살상용 무기'를 제작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거는 뭐 '기여'라고 할 수 없죠. 더 대량 살상을 하는 길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900년간 존재하다가 사라져버린 블레셋의 운명을 보면서
'나는 또는 우리 공동체는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지금 남기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근데 혹자는 일평생 ‘하나님의 백성들’ 옆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시키고, 훈련시키고, 가시와 엉겅퀴 역할을 하면서
그 주변에서 늘 괴롭히는 ‘블레셋 인생’으로 살다가, 자기 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 블레셋이, 자기 수명이 900년 이후에 끝날 줄을 알았더라면,
그것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줄 예상했더라면,
평소에 뭔가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힘의 논리를 따라 세속적 가치관의 틀을 가지고
칼을 휘두르며 약자를 괴롭히고 억압하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 온 우주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임하사
섬김의 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섬김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힘의 논리의 강물이 흐르는 세상 속에
역류의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속적 가치관의 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 시간 우리의 틀을 깨뜨리시고 진리와 생명의 틀을 세워 주옵소서.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고 살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하시고
세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다 사라지는 유명무실한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잊혀 지더라도 생명책에 기록되어 영생에 동참하는
’무명유실‘의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절별 해석
47:1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본 구절은 뒤에 이어지는 47:2~7절의 신탁이 언제의 것이었느냐
하는 연대기적 내용을 암시한다.
70인역은 본절의 대부분을 빠뜨리고 그냥 '블레셋에 대하여'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본절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바로가 가사를 공격한 때가 언제인지 하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B.C. 609년의 바로느고의 원정과 연계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그 원정에서 바로느고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므깃도에서 유다 군대를 패배시키고
또 요시야를 전사시킨 후에(왕하 23:29, 30), 앗수르를 응원하기 위해 하란으로 출병하였다.
이 사건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서술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등장한다.
즉 헤로도투스는 느고가 B.C. 609년 요시야 군대를 패배시킨 후
카디티스 성(이곳은 가사로 밝혀져 있다)을 정복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교되는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러한 것 중 몇 개를 참조 삼아 살펴보면,
1) 애굽의 가사에 대한 공격이 바로느고와 느부갓네살 사이의 전쟁,
곧 B.C. 605년 전투와 연계되어 있다는 견해.
2) 블레셋에 대한 공격이 시드기야 제 4년 (B.C. 593년)경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견해
3) 이 예언이 요시야 통치 그 어느 때에 주어졌을 것이라는 견해.
47: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
'물이 북방에서 일어나 창일하는 시내를 이루어'
본 구절은 바벨론 군대의 등장을 묘사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사야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앗수르 군대에 적용하였다(사8:7, 8).
어쩌면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멜로'는 '가득함', '충만함'이란 뜻으로서
풍요로운 수확이나 부(富)를 가리킨다.
47:3 군마의 발굽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가 진동하는 소리 때문에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의 자녀를 돌보지 못하리니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의 돌아보지 못하리니'
문자적인 번역은 '아비들이 손에 힘이 빠져서 자식들을 위해 되돌아가지 못하리라'이다.
이는 어린 자식들이 뒤에 처져도 되돌아가서 데려올 경황도 힘도 없는 상황을 시사한다.
또한 본절에는 '굽 치는 소리'와 '병거 바퀴의 울리는 소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말 발굽소리 그리고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를 말하며
원문은 아마도 이 같은 소리를 의성어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굽 치는 소리'의 '치는'에 해당하는 '솨아타'는 덜거덕 덜거덕하는 말발굽 소리를 나타낸다.
한편 이 구절의 어감은 대단히 생생하고 또 짧은 스타카토로 이어지고 있다.
적군의 진군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47:4 이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며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버리시는 날이 올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 자를'
블레셋과 함께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함께 연계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는 모든 조력자마저 끊겨버렸음을 나타내는데,
아마도 블레셋과 페니키아의 도시들 간에는 어떤 동맹이 맺어져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느부갓네살이 블레셋을 점령한 것은
어쩌면 페니키아를 공격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을 수도 있다.
B.C. 605년경에 블레셋과 페니키아 도시들 간에 그런 동맹이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충분히 가능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페니키아의 주요 두 도시인 두로와 시돈은 B.C. 594년과 B.C. 587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바벨론에 저항했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두로를 포위 공격하였다.
'갑돌 섬' 이 지명에 대해서는
1) 지중해 해변을 따라 뻗어 있는 블레셋에 속한 지역,
2) 갑바도기아,
3) 크레타 섬 등으로 보는 견해들 등 분분하지만,
크레타 혹은 그 주변의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곳은 블레셋의 원 고향에 해당하는 곳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와
팔레스틴 연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보면,
블레셋의 멸망 이후 두로와 시돈도 최종적으로 항거하다가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47:5 가사는 대머리가 되었고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잠잠하게 되었나니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가사가 대머리가 (삭발) 되었고'
가사에 거하는 주민들이 깊은 슬픔과 곤경에 처해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그들이 그러한 슬픔과 곤경 속에서 머리털을 깎았다는 뜻이다.
또한 자기 몸에다 깊은 상처를 내는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으며,
한편으로는 우상 숭배 행위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겠다(왕상 18:28).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멸망되었나니'
아스글론은 가사,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과 더불어 블레셋 다섯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에리트 임캄'은 다양하게 번역되는데,
니콜슨(Nicholson)은 '그들 힘의 빈약한 남은 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영역본 KJV는 이를 '그들 골짜기의 남은 자'(the remnant of their valley)라고 번역하였고
RSV는 70인역의 독본을 채택하여서 '오 아나킴의 남은 자여'(O remnant of the Anakim)라고 번역하였다.
'평지'로 번역된 '임캄'은 '평지' 혹은 '계곡'이란 뜻도 있지만,
우가릿어의 '힘'을 뜻하는 말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우가릿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족에 속하는 언어로서 한때는 고대 수리아에서 사용되었다.
1928년에 우가릿어로 기록된 토판이 최초로 발견된 바 있는데, 오래지 않아 곧 해독되었다.
거기에는 히브리어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즉 이 두 블레셋 마을들이 남은 힘과 병력을 다 소진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70인역의 '아나킴'이란 표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살았다고 하는
거인들을 가리킨다(민13:22, 23, 신1:28).
47:6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여호와의 칼이여' 이것은 여호와의 칼과 선지자 간의 대화를 나타내고 있는
장엄한 의인법적 표현이며 돈호법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숭고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클라크는 이를 '오, 너 여호와의 칼이여'라고 번역하였다.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이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분노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만큼 블레셋의 재난이 끔찍할 것임과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한 것이라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47:7 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명령하셨느니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를 명하셨은즉'
그러나 여호와의 칼의 심판을 억제시키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실제로 이 예언은 B.C. 604년경에 성취되었는데,
그 해에 느부갓네살이 해안 평원에 나타나 아스글론을 포위 공격하고
그 성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현재의 사카라(멤피스)에서 고대 서신이 한 통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아스글론의 왕 아돈이 바로 왕에게 보내는 서신으로서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편지는 바벨론 군대가 아벡으로 진격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아돈은 바로느고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또 바벨론에서 발견된 영수증과 같은 문서에는
아스글론에서 잡혀온 왕의 아들들과 어부들, 그리고 그외의 다른 사람들의 아들들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같은 묶음 내의 다른 영수증들에는 유다의 여호야긴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이런 점들로 보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어간의 어느 시기에
아스글론에서 포로들이 붙잡혀 왔던 것이 분명하다.
아스글론에서 멀지 않은 아스돗 지역에서 유적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여기서도 B.C. 7세기말 경의 파괴상을 보여주는 어떤 층이 발견되었다.
이것 역시 느부갓네살의 아스글론 원정지에 아스돗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