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돌봄, 간병> <접촉>
◈경계에 있는 돌봄 마9:18~22 2025.03.30. 교정예정
오늘 본문에는 두 치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관리'라고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 라고 이름이 나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와서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어떤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은 '여인이 끼어들었다' 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이름이 안 나옵니다. 직급도 안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인을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은 없고 병명으로만 기억되는 존재, (얼마나 가련합니까?)
사람이 살다가 이름으로 불리다가 기억되다가, 그 이름이 없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에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감옥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1923번' 이렇게 번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도, 자기 이름은 있지만, 병명으로만 기억되고 인식되는 경우... 존재의 단절입니다.
그게 고립이라고 하는 겁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아팠고 죽었지만, 그래도 둘러서서 슬퍼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 예수님께 나와서 간청하는... 살리려고 노력하는 아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혈루증 여인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앞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뒤로 몰래 다가와야 했습니다.
혈루증은 계속 피를 흘리는 병이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그리고 당시 문화에 의하면, 누군가에게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폐가 되는 존재인 거예요.
부정 unclean 한 사람이었습니다.
의학적으로 격리되었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종교적으로 낙인찍혀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하기 싫어하는 존재...
'내가 여기 끼어들어도 될까?' 굉장한 부담이죠.
그래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데, 앞에 못 나서고, 예수님 뒤로 갑니다.
예수님께는, 많은 사람들이 다가왔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 스스럼 없이 와서 안겼습니다.
길가에 걸인들도, 소경들도 '예수님, 저 좀 도와주세요!'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말도 못하고, 뒤로 와서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집니다.
병을 놓고 생각하면, 여러분 소경이 심각해요, 혈루증이 심각해요?
여러분, 평생 앞을 못 보는 소경의 병은 가볍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소경은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나 힘들어요. 좀 도와주세요' 라고 소리도 지를 수 있어요.
누군가가 그의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기도 합니다.
제가 이 여인이었다면, 소경이 누구의 손을 잡고 가는 그 장면을 볼 때,
소경이 그렇게 부러웠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혈루병 여인은, 부정하니까, 누가 그를 만지면 큰일납니다.
자기가 누구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합니다. 12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긴 기간 동안에, 한 번도 다정한 말, 따스한 눈길을, 인간적인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어서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지는데요. 그러니 제대로 만진게 아닙니다.
당시에 유대인이 입고다니던 옷은, 그냥 큰 직사각형 보자기 같은 겁니다.
그 옷자락 끝에 술이 달려 있어요. 그걸 만진 겁니다.
사실은 정확히 말하면 옷을 만졌다 라기보다는, 옷 끝에 달려있는 무엇을 살짝 손댄 겁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랬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아갔고, 예수님 옷자락을 만졌다는 것은,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렇겠습니까?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옛날에는,
신적인 사람의 몸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의 몸에 손대려는 문화가 있었죠.
기독교의 안수도 일종의 그런 개념입니다. 접촉을 통해, 능력이 전이된다고 믿는 거죠.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거에는 그런 믿음이 아주 컸습니다) ☞ <접촉>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는데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 두려움, 불안 하나 없이,
어색함, 위축됨 하나도 없이 당당하게 나서서,
확신으로 꽉 차 있는 상태가 '믿음'이라 그런다면,
이 여인은 아닌 것 같아요.
그는 두려웠어요. 위축되었어요.
'나 같은 것이 끼어들어도 될까?' 했습니다.
믿음이 그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 가서 와이파이 잡는데
이게 됐다, 안 됐다 그러잖아요. 그런 믿음!
그래서 몰래 만진 거죠. 두려움이 있는 거죠. 옷 술을 만진 거죠.
여러분, 바른 지식과 교리, 빈틈없는 확신으로 무장한 믿음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 여인의 경우에는, 믿음이란.. 사실은 그냥 간절함이에요.
내가 너무 두렵고 자신 없지만, '믿습니다!' 하기도 힘들지만... 너무 간절하는 거예요.
여러분 아십니까? 때로는 간절함이 믿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그냥 간절함이, 제대로 믿지 못해도, 그 간절함이 하나님을 향한다면,
그게 믿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3~4
간절한 자를...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이 천국을 주실 줄 믿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거죠.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죠.
이 가난한 마음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인정해 주신다는 거죠.
▲마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이 말이 먼저예요. 먼저는 환대죠.
그 다음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치유와 구원은 그 다음에 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돌이켜 그를 보셨을 때, 이 여인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어쩌면 살짝 만진 걸로 볼 때 '그냥 안 들키고 그냥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 분의 능력만 가져갔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을 거예요.
근데 예수님의 관심이 자기에게 오잖아요. 여인은 그 관심이 부담스럽습니다.
너무 위축되게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아마 고개를 푹 숙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따라, 그 눈이 너무 자애로워요.
제가 영화를 만든다면,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눈이 클로즈업 해서
여인의 눈에 다가오는.... 또는 관람객의 눈에 다가오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분의 눈에 스려 있는 그 인자한... 나를 향한 사랑...
살짝 눈물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불쌍한 처지 때문에 우시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막 이런 마음이 여인에게 오락가락 했을 거예요.
아마도 이런 음성을 들었을 것 같습니다.
'딸아,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본다. 내가 너를 부른다.
세상 누구도 너를 딸이라 부르지 않을 때, 나는 너를 딸이라 부른다.
어느 누구도 너를 바라보지 않을 때, 나는 너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러니 기억하렴, 내가 너를 딸이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거야.. 어디를 가도 두렵지 않을 거야...'
▲여러분, 이 이야기의 시작은 그렇습니다.
한 명의 딸(야이로의 딸), 그리고 한 명의 병자(혈루증 여인),
근데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이에 '두 딸의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딸'이라고 불러 주셨으니까요.
야이로의 딸은 12살 되었다 했습니다. 여러분 12살 된 아이가 부모 곁을 떠났다면,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아프게 쌓여 있겠습니까? 정말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겠죠.
그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 방긋 웃을 때에, 처음으로 '엄마 아빠'라고 말했을 때,
이제 조금 철을 알아서 아빠가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아빠!'하고 달려와서 안기던,
그때의 기쁨...
여러분, 어린 딸이 죽는다는 것은, 그 12년의 세월의 모든 장면들이
시리고 아픈 기억으로 돌아오는 경험일 거예요.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름다운 기억들....
근데 이 여인은,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그냥 통째로 어둠 속에 잠겨 버립니다.
아름다운... 슬픔... 그런 기억은 조각조차도 없어요.
어느 날 어느 구석에서 잠들었다가 일어나지 못한다 해도,
누구도 알아채 주는 사람이 없을...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딸'이라 불러 주십니다.
그래서 '두 딸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귀한 집에서 고이 자란 딸,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예뻐해 주고,
그가 어려운 일을 생각하면, 걱정해 주고 다가와서 위로해 주는... 그 (야이로의) 딸과
반대로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던 이 여인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이 소중한 생명, 똑같이 소중한 딸이라는 말씀입니다.
♬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연약한 사람은, 그 사랑을 더욱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새벽 3시의 하나님!'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내가 가장 외로운 순간, 가장 아픈 순간 새벽 3시!
여러분, 그 소외된 시간에 하나님은 더 깊이 나를 만나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 시간에 잠 못 자고 깨어있는 나!
그것이 여러분 '돌봄의 자리'입니다.
돌보면... 그와 함께 하는 거예요.
아픈 이들은 소외되어 있고,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 세계에 가까이 가서 있는 것이... 바로 돌봄입니다.
몸으로 함께 하는 것!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계신 공간 자체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이에요.
▲이 땅에서도 수많은 분단들이 있습니다. 그런 시가 있죠.
「삼팔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안에도 계층 간의, 지역 간의 수많은 갈등이 있죠. 분단의 38선이 있죠.
여러분, 장애인의 세상과 비장애인의 세상이 떨어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과, 외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 오신 분들이 세계가 많이 다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경계들, 삼팔선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늘 그 근처에 계셨습니다. 경계선 근처에! 양쪽을 다 돌보시는 거죠.
코로나가 19 코로나19가 한참 일 때, 우리는 이 경계가 얼마나 심각한지 경험했습니다.
누군가가 병에 걸리면 격리되잖아요. 멀리 하잖아요.
그런데 격리를 하는데, 그냥 둘 수 없잖아요. 돌보는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때 의사, 간호사들의 수고를 우리가 잘 기억합니다.
방호복을 입고, 위험한 병실에 들어갑니다.
얼마나 여러분, 날카로운 경계입니까?
그런데 당시에 기사들을 보면, 그런게 있었습니다.
의사의 자녀들, 간호사의 가족들은, 학교에 가도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너희 엄마 간호사지? 혹시 감염된 거 아니야?'
얼마나 세상이 냉혹한지요.
그래서 당시에 간호사, 의사가, 집에 퇴근하지도 않고
병원에서만 지냈던 기간도 있었습니다. 혹시나 감염시킬까봐 스스로 조심했던 거죠.
여러분, 그래도 누군가는 환자를 돌봐야 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 경계에서 돌보는 사람은, 지금 아픈 사람들만 위한 것이 아니죠.
그 반대편,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이 경계에서 돌보는 사람이 없으면, 이걸 막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해지겠어요?
그래서 경계에 있는 사람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일뿐 아니라,
지금 내가 안전하다, 깨끗하다고 착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늘 이 경계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을 보면,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의 육체의 병에 치유되기 전에,
여인이 먼저 예수님의 옷을 만졌죠. 이게 경계를 넘어서는 거죠. 접촉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그 얼굴을 보시고, '딸아' 라고 불러 주시면서, 관계가 시작되는 겁니다.
환대해 주신 겁니다. 늘 이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 하나님께는 훨씬 더 중요한 가치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늘 그러셨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죠. 그래서 경계선입니다.
이 땅에서도 비교적 안전하고, 비교적 깨끗하고, 점잖은 사람들 주위가 아니라,
더럽혀지기 쉬운 자리,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
그 집에 들어가서 식사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여인이 다가와서,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을 때, 그걸 허용하셨어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 짓입니까? '저 사람 예수는 이상한 사람이다'
여러분 오해받기 쉬운 자리잖아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하는 나병 환자에게 가까이 가셨고요.
손으로 그를 만지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면 안 되는 일이에요.
오늘 이 말씀에도 야이로의 딸, 그 시체를 손을 잡고 만지셨어요.
우리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지만, 유대인들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예요. 죽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어서...
여러분 코로나 때 경험해 보셨잖아요. 그런 사람은 격리돼야 됩니다.
이 모든 인간과 인간의 벽을 허무시는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경계에 서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의 경험은, 이러한 경계들이 일거의 허물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상황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나 아직 아니' 하는 중간 시대를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몇 주 전에 '평등'에 대한 말씀 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성경은 평등한 사회를 지향해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살 거예요.
그러나 이 땅에서는 끊임없는 불평등과 박탈과 차별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혐오와 배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
아주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읽으셨을 거예요.
이 책을 보면, 사람이 차별을 계속 받아 오면, 그 설움과 스트레스가 몸에 새겨진다는 거예요.
질병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삶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차별의 역사가 있는 거예요. 배제의 역사가 있는 거예요.
이 책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해법을 말하는데, 물론 모두에 동의할 수는 없는 부분이 있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고민의 자세'는 우리가 배울만 합니다.
혐오와 배제의 비가 막 쏟아지는데,
그 폭우를 고스란히 다 맞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힘을 합해서 '그러지 마세요. 이분 들을 소외시키지 마세요' 라고 말해야 되는데,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내 힘은 부족하고, 이 사회는 너무 완고하고,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아요.
혐오의 비는 계속해서 쏟아져요. 어떻게 해요?
우리가 당장 그 비를 멈추게 할 능력이 없다면, 나에게 조그만 우산에도 있다면,
들고 나가서 함께 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다보면, 비가 많이 내리면, 내 옷도 젖잖아요. 나도 비를 맞아요.
어쩌면 폭우가 심하게 쳐서 우산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비를 맞아 주어야 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그 혐오의 비를 함께 맞으신 거예요.
'왜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냐?' 그런 오해와 비난을 기꺼이 들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만져주고, 시체까지 만지면서 살리셨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예수님이 살다 보니까, 그 혐오가, 그 오해가 쌓이고 쌓여서,
그 의심들이 모여 가지고, 예수님을 향해서 혐오의 화살이 막 날아옵니다.
그때 제자들 중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다 도망갔습니다.
모두 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하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게 십자가 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요구하신 사랑이 뭡니까? 뭐 특별한 걸 해달라는게 아니에요.
내 옆에 있어 달라는 겁니다. 나와 함께 해 달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그 위험한 경계에 서셔서,
우리더러 그 경계에 함께 있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하지 못한 믿음이라도, 받아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9:21~22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여러분, 환대가 먼저입니다.
이 경계에서, 즉 옷이 만져지는... 부정한 세계와 깨끗한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먼저 환대가 일어나요. 예수님이 여인을 딸로 받아 주시는 거죠.
그 다음에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해서 치유와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경계에서, 환대와 치유와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뭡니까? 여러분, 이 여자가 구원 받겠다 라고 했을 때는,
'육체의 회복, 병의 고침'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만 구원이 아니에요.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구원은 '창조의 회복'이에요.
길을 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 구원받는 것,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그 복음과 확신이
구원에 굉장히 중요한 핵심입니다.
근데 그게 전부 다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렇죠. 구원이란, 건강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 회복되는 겁니다.
육체의 병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 우리가 갖는 위축감, 열등감...
이런 것들이 다 회복 restoration 되는게 구원이에요.
그리고 이 사회가 바로 되는 것, 사회적 소외가 이제 줄어드는 것,
그리고 그 구원을 위해서 '만물을 다스리라' 즉 만물을 잘 돌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회복은 거기까지 함께 가는 거예요. 창1:27~28
우리가 돌봄(다스림)의 사명을 받는 것까지가, 전부 다 하나님의 구원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랬는데, 사실은 대단한 믿음이 아니에요.
사실은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도 못했죠.
그냥 자기 병 고치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 뿐인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오늘날 사람들이 기준으로 보면, 약간 미신적인 면마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앞에 나와서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것도 아니고
그냥 예수님도 모르게 살짝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그 옷에 뭐가 있지 않을까?
라고 하는 상당히 미신적인 믿음이에요.
근데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아이들이 좋아 가지고 '호산나 호산나' 찬양했습니다.
당시에 많이 배운 종교 지도자들은, 그걸 보고 못마땅해 했어요.
'저것 좀 스탑 시키세요. 무슨 짓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마21: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
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어린 아기나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찬양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어린아기나 젖먹이의 찬양은... 너무도 부족한 찬양이에요.
정말 허술하기 짝이 없는 찬양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찬양을 받으시는 거예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뭐라고 찬양하겠습니까? 그냥 옹알옹알하는 거죠.
그것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다소 우리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다소 우리 성경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다소 우리의 믿음이 어리석더라도,
심지어 약간 미신적인 데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 마음이 가난한 거예요. 마5:3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나는 가난하고,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아픕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래서 '아픔이 길이 된다'라는 말을 풀어 쓰면 *위에 나온 책 제목
'아픔이 내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예수님 만나는 길이 되는 줄 믿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능력을 구하다가, 나중에는 주님의 사랑을 만난다
이 여인의 믿음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능력,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낫겠지'
하는 그 능력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게 대부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에 우리가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저는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전능한 줄 알았어요.
뭐 그냥 큰 물건도 막 들고 옮기고, 사업도 그때 잘하셨고,
뭐 라디오든 TV든 고장 나면 아버지가 만지면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아, 정말 신기하다...'
근데 자라면서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전능하지는 않은 거 같아요.
못하시는 것도 많은 거예요. 같아 한참 자라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어요.
제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님이 거의 매일 일기를 쓰셨는데, 일기를 한 번 보여 주셨어요.
제가 아이 때는 그냥 우리 집안이 잘 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 커튼 뒤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하셨을까? 얼마나 외롭게 기도하셨을까?
아주 절절히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어릴 때는 부모가 전능한 줄 아는데, 부모의 능력에 관심이 많은데
우리가 자랄수록 '나를 향한 부모의 사랑 때문에' 부모를 귀하게 여기는 거예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근데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전능함을 믿으라. 나의 근육이 불뚝 불뚝한 팔을 봐라'
그렇게 힘으로 다가오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에 있잖아요.
'하나님의 약하심'에 있잖아요.
고난 가운데, 그 고난을 통해서...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줄 믿습니다.
'능력의 하나님'도 물론 소중하지만, 여러분 복음의 핵심은 언제나
전능하신 능력의 팔뚝 굵은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하나님, 그 십자가의 복음! 그 십자가의 사랑!
◑적용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13:12~13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브리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희생 제사,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제사 중에서 가장 소중한 십자가의 그 제사가
어디서 일어났는가 하면,
성전 안 지성소, 사람들이 거룩하다.. 깨끗하다.. 안전하다.. 여기는 성전이 아니라,
성문 밖에서.. 버려진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장애인들, 외국인들, 나그네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그 거룩한 희생 제사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바로 그 예수와 내가 하나가 되어서,
우리도 영문 (진 밖, 성 밖) 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경계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 경계에 설 때에야, 여러분, 돌봄이 제대로 일어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역사하시는지,
안전하다고 우리가 착각하고 이 자리가 아니라,
정말 아프고 힘든 자리, 깨어진 자리, 거기에 가까이만 가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게 우리를 여기시든지... 사랑하시는지...
역동적으로 일하시는지 알게 될 줄 믿습니다.
'거기 가서 뭐 하느냐?'
'나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지고 내 모든 걸 희생할 수 자격이 준비가 안 돼 있습니다.'
좋습니다. 마5:47절에 보면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자기들끼리 안전한 곳에서, 깨끗한 곳에서,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곳에서
그냥 잘 사는 거는... 누구나 다 하는 일이라는 거죠.
'너희 형제가 아닌 이방인,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않는 어떤 사람들에게도 인사하고 지내라'
여러분, 자기를 희생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 이 말씀은 혹시 순종 못 하더라도
'문안하라' 인사하고 지내라는 건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게 돌봄이에요. 아는 척 해 주고, 인사하는 거!
'잘 지냈어요?' 한마디 해주는 것,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 한번 불러주는 것, 그게 여러분 돌봄의 출발입니다.
그와 함께 밥 먹는 것... 그게 돌봅 입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싶어도,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어색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10년, 20년 함께 교회 다닌 사람들이라서 만나면 막 재미있죠.
여러분, 그것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게 아니에요.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아름다운 교제.... 아니에요.
경계로 나아가야 됩니다.
우리가 우는 사람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못 해 주어도...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비를 스탑은 못 시켜도, 함께 비를 맞아 주어라... 그거예요.
(*여러분, 가끔 외국에서 초등학생들이, 암에 걸린 급우를 위해서
다같이 삭발하는 뉴스가 보도되잖아요...)
여러분, 우리 교회 사역이 어떻게 가야 됩니까?
우리 교회가 감사한 것은, 외국인 성도들이 많이 있고,
그 분들이 일반 공동체에 들어와서 함께 잘 어울리고,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도 할 수 있으면 함께 하는게 좋습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열심히들 장애인부서를 섬기시는지 모릅니다.
몇 해 전부터 마가 공동체가, 해마다 장애인 주일이 되면,
함께 시간 보내고, 함께 야유회도 가고, 장애인 부모들을 함께 돕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 뭐 엄청난 도움을 못 주어도, 함께 하는 것 자체,
예수님처럼 경계에 가 있는 그 자체가 소중합니다. 거기서 뭔가가 일어나는 거예요.
▲여러분, 청소년들 돕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가끔씩 신문에 평생 어렵게 돈 모아서, 장학금으로 쾌척하셨다는 감동적인 기사를 듣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건 못지않게 귀한 일이 있어요.
조손가정 청소년들과 자주 만나 주는 거예요. 얼굴 보여주는 거예요.
그냥 이름 불러 주는 거예요. 함께 밥 먹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교회 지금 '러빙 핸즈' 시작한다 그랬잖아요. 바로 그런 겁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장학 사업 열심히 하고, 앞으로도 계속 하겠지만,
여러분 점점 시대는 그렇게 갈 겁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보다... 사랑을 나누는 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돈은... 국가 장학금도 요즘 많잖아요. 만나 주는 거예요. 기억해 주는 거예요.
얼굴 보여주는 거예요. 이름 불러주는 거예요.
그것이 여러분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한빛 울타리 선교회' 여러분 오늘 광고 보셨죠?
교도소에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가는 겁니다. 이런게 바로 경계에 서는 거잖아요.
여러분, 이 사회가 앞으로 굉장히 많이 변해갈 겁니다.
지금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지금 당장 다음 주에 한국 사회가 어떻게 될지?
너무너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두 해 전에 아카데미 상을 7개나 받은 영화가 있습니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굉장히 많은 일들이, 많은 곳에서, 한 몫에 일어나는 거예요.
이 영화를 보면, 아마 여러분 중 90%는 '굉장히 재미없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는
영화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너무 이상한 영화예요.
근데 여러분, 이 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7개 받았고요.
세계 영화 역사상 주요 시상식에서 가장 많이 받은 영화입니다. 160개의 상을 받았어요.
이전에 기록이 <반지의 제왕>이 101개의 상을 받았어요.
그러니 정말 뭐 하여튼 영화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영화인 것 같아요.
별로 재미는 없는데 말입니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영화에요. 보면 뭐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영화입니다.
근데 이 영화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혼란스럽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때 일수록
서로에게 다정해야 된다"
우리는 혼란스러우면, 그때부터 막 '뭐가 잘 됐니, 뭐가 잘못됐니?'
지금 우리나라도 막 혼란스러우니까 '누가 잘못했니?' 너무 신경이 곤두 서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뭔가 잘 모를 때는, 따지기 이전에,
상황 파악도 잘 안 될 때... 이런 그럴 때가 있잖아요. 앞으로 세상이 그렇게 될 겁니다.
AI가 한 주 단위로 얼마나 기술이 빨리 바뀌는지요.
지난 한 주간에도 막 여러분, 난리가 났었습니다. AI로 그림 그리고, 세계가 난리가 났었어요.
한국의 정치와 경제가 얼마나 불안하고 혼란스럽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뭐 해야 된다고요? 서로에게 다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나라는 사람 남을 거예요.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지?' 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잖아요.
막막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어떻게 하라고요? 서로 다정해야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가정에 어려움이 닥칠수록 구성원이 다 힘들거든요. 다 불안하거든요. 다 죽고 싶거든요.
그럴 때일수록 서로 다정할 수 있는 그 힘을, 예수님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하시는 그 음성,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마음 깊이 들려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사랑 의지하여 서로에게 다정할 수 있는...
기꺼이 경계로 나아가 머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