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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주일예배 // 세상의 길, 제자의 길 - YouTube 정리
◈세상의 길, 제자의 길 눅14:25~35 2024.02.25. 누가복음58강
지난 시간 복습 (전략)
오늘 말씀은 조금 무거운 그런 내용이 될 수 있는데
세 가지 내용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가족, 자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 눅14:25~27
-망대를 짓기 전에, 전쟁하기 전에 계산해 보라 :28~33
-맛을 잃은 소금의 불쌍함 :34~35
※급하게 보실 분들은, 하단의 ◑적용부터 보시면 됩니다
◑눅14: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수많은 무리가 식사자리에서 나와서 함께 가고 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되는 것은,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이 말씀을
예수님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요? 지금 '수많은 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병행구절 마10장에는
이 말씀이 누구한테 주어졌는가 하면, 열두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오늘 본문은 '수많은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무리들 중에는, 헌신된 제자도 포함이 되어 있을 거고,
또 어떤 면에서는 처음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포함이 되어져 있었겠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를까 말까 지금 고민하고 주저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겁니다.
이 수많은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인상적인 것은, 26절 제일 마지막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같은 표현이 27절, 33절에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27절도 제일 마지막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절도 제일 마지막에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래서 이 구절들에 근거해서 오늘 설교 제목을 "제자의 길"로 붙였습니다.
즉 '가족, 자기 목숨, 모든 소유'를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오늘 교훈하고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예수님 제자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자기 부모, 아내와 자녀들, 형제 자매,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며
너희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교회 생활 하시면서 이 말씀 때문에 고민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러면 부모님을 버리라는 건가? 또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라는 건가?
형제 자매를 버리라는 건가? 이건 너무 심한 말씀이 아닌가?'
그래서 청년 시절에 말씀을 대하면서, 가장 마음이 불편하고 또 힘이 들었던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미워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히브리적 의미에서 '미워한다'는 것은
악한 감정과 증오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의미에서 '미워하다'는 이렇게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두 가지 중요.한 요구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때,
그때 거절된 것을 표현할 때 '미워하다' 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거는 일상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일상적일 때는 부모를 공경하고,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고,
또 가족 친지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 가족들의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가 한 번씩 충돌이 일어날 때가 있죠.
그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가장 귀한 보배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그냥 좋은 것, 즉 가족을
덜 사랑하고... 그런 의미에서 '미워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뭔가 하면
「두 가지 중에서 중요한 것을 선택할 때,
바로 가족이 아니라, 가장 최선인 예수님을 선택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게 명확하게 나와 있는 게, 마10:37절을 보면,
거의 같은 내용인데 표현이 다르게 되어 있죠.
'아버지나 어머니를 (미워한다고 되어 있지 않고)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과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미워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선택의 순간에 '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택의 순간에서 가족들의 요구와, 주님의 요구가 충돌이 될 때
바로 최선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그냥 좋은 것인 가족의 요구를 물리치는 것, 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교훈을 하셨습니다.
26절을 다시 한번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첫 번째는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강한 결속력을 가진 가족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요구와 주님의 요구가 충돌이 있을 때, 바로 예수님의 요구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 '가족들의 요구를 미워할 수 있어야 된다' 그래야 내 제자가 된다고 교훈을 하셨습니다.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이 나오는데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앞서 9:23절에서도 조금 더 상세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요구와 주님의 요구가 상충될 때, 자기 자신에게 죽음을 선언하는 것,
즉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죽음을 선언하고, 예수님의 요청에 자기를 맞추는 것,
이것이 뭔가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게 목적이 아니라. 목적은 무엇이죠?
왜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느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예수님의 제자의 자격은 무엇이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걸 어떻게 표현했느냐?
우리들이 너무 좋아하는 갈2:20절 한번 보시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면서 설명합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뭔가 하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욕구에 지배되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분이 나에게 원하시는 뜻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다...
라고 사도바울은 설명을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33절을 보시죠.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제자의 조건이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로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너희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버린다'는 것은, 결국 앞에서 말씀드렸던 '미워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재물을 잘 관리해야 되죠.
그렇지만 예수님의 요청이 우리가 소유를 늘리는 것과 한 번씩 충돌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나? 우리는 소유를 늘리고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요청에 따라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누가복음을 보면 뚜렷하게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1) 먼저 눅18:22~23절을 보시면 누가 나오느냐 부자 청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와서 '제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그에게 예수님께서 '너한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는데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나누어 주면 하늘에서 너에게 부족하라 보화가 있을 거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오늘 말씀의 예죠. '나를 따르려면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된다'
그랬을 때 이 사람의 반응입니다.
이 사람이 큰 부자였기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 따르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23
2) 그렇지만 이와 대조적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19:8절에 나오는 삭개오 입니다.
그는 세리장이고 어쩌면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했던 그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제가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었다면, 내가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이걸 행동으로 옮기면 삭개오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 그대로 모든 소유를 다 버리게 되는 거죠.
지금 예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소유까지도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된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가르침을 정리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가족보다
-자기 자신보다
-모든 소유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되고
그것이 예수님의 요청과 충돌할 때는,
이 세 가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된다... 바로 그들이 제자가 될 수 있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이어지는 14:28~32절까지 말씀은 두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이 세 가지 요청과 함께, 또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우리가 선택할 때 심사숙고해야 된다...
를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두 가지 비유를 드시는데
-망대를 세우는 사람과
-전쟁에 나서는 임금의 예입니다.
◑14: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희도 지금 여러 가지 건축들을 할 때,
먼저 그 건축에 소요되는 비용이 얼마인지...
그만한 비용을 우리가 충분히 갖고 있는지... 그거 계산하고 건축을 시작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거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29절을 보면,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14:29~30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시작했다가 지금 중단된 건물들이 여러 개 볼 수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는 거죠.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건축을 시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죠?
건축을 잘 마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심사숙고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31절을 한번 보시죠. 두 번째는 전쟁 이미지입니다.
◑14: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어떤 임금은 1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공격한 다른 임금이 있는데, 이 사람은 2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 공격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과 맞서 싸우려면,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군대가 1만인데, 저 사람은 2만 명 가지고 오니까
과연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는가?'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와 모든 전략이 2만 명을 이길 수 있는 충분한 자신이 있으면
바로 전쟁에 뛰어들어야 되죠.
그렇지만 지금 그런 능력을 갖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전쟁하게 되면
그냥 자신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거죠.
그러니까 32절에, '잘 생각해 보고 자신이 없으면 먼저 화친을 청해라'
이 두 가지 비유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건가, 안 될 건가?' 할 때 심사숙고해라!
왜 이게 중요합니까?
저는 모태신앙으로 자랐기 때문에, 교회에서 때로는 목회자 될 사람,
아니면 선교사 갈 사람들 이렇게 헌신초청을 하고,
아니면 또 교회가 건축헌금 작정하게 할 때, 주로 어떤 분위기죠?
심사숙고가 아니라, 몽롱한 분위기 만들어 놓잖아요.
사람들 막 눈물 짜내고, 막 이래가지고 정신없는 순간에 손들도록...
정신없는 순간에 작정하도록... 이런 일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죠?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가족들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내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내 모든 소유보다도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삶을 네가 살게 될 텐데.. 너 자신 있니?
너는 정말 그렇게 살 수 있겠어?'
'그것 때문에 치뤄야 될 대가가 있다 하더라도, 이 길이 가장 귀한 길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내가 가야 되겠다고 하면, 충분히 한번 심사숙고해 보고,
몽롱한 상태가 아니라, 정신 차려서 선택해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마치는 것입니다. '심사숙고해서 내가 마칠 각오와 자신이 있으면, 이 길을 선택해라'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먼저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말씀하셨고,
-다음은, 이 길을 심사숙고하도록 도전하셨습니다.
-마지막은 이미지를 사용을 하십니다.
34절에 소금 이야기를 하시죠. '소금은 좋은 것이다'
고대에는 소금 때문에 전쟁이 날 정도로, 소금은 귀한 것이었어요.
왜요? 음식물의 부패를 막을 수 있고, 또 무엇보다 맛을 낼 수가 있으니까
소금은 좋은 것인데, 그런데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35절을 보면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다 버리게 된다'
버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34~35절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바로 짓밟히고 쓸데없어서 버림받는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맛을 잃어서는 안 된다 라고 주님이 교훈하시는 거죠.
결국 여기에 소금은 누구를 뜻하겠습니까? 바로 제자들이죠.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은 선언하셨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마5:13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세상의 소금'인데,
그들의 맛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맛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족보다, 나 자신보다, 모든 소유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바로 이 (예수님과 가족) 사이에 충돌이 있을 때,
예수님을 사랑하고, 나머지 이 세 가지(가족, 자신, 소유)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맛을 내는 소금' 같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즉 제자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면,
결국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오늘 말씀은 결국 세 가지 내용이었습니다. 제자의 길은 무엇이죠?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1) 가족들보다
2) 나 자신의 욕구보다도
3) 모든 소유보다도 예수님을 더 첫 자리에 두는 것이고,
이 두 가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 *예수님 ↔ 가족, 나, 소유
최상의 것, 최선의 것인 예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
좋은 것인 가족과, 나 자신과, 내 소유까지 미워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제자의 길이다!
이 길을 선택하고, 이 길을 가기로 결정하고 발을 들였을 때,
심사숙고해서 '마칠 자신이 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 제자의 길을 선택하고,
제자의 맛은 무엇이냐?
바로 모든 것보다도, 예수님을 첫자리에 둘 수 있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금)맛'이고
바로 이것을 유지할 때, 성도들은 세상을 맛나게 하는 그런 귀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적용
여러분, 오늘 이 말씀 들으시니 어떠셨습니까?
저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1. 저도 지금까지 쭉 살아오면서, 예수님의 요청하고
가족/ 나 자신/ 내 소유의 집착하고 한 번씩 충돌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 겨울에 내수둥교회 수련회를 갔는데,
첫날 저녁에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그래서 마지막 찬송으로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찬양을 불렀습니다.
근데 이 찬양 부르는데 마음에, 사단이 역사해서였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이런 질문이 생겼어요. '부름받아 나선 이 몸 군대까지 가오리다?'
갑자기 '군대'가 생각이 났어요. '뭐 내가 군대까지 가야 된다고?'
저는 대학에서 전공이 물리학과입니다.
저희 동기들 중에 군대 간 친구는 거의 없습니다.
저희는 방위산업체라든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병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자연스럽게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저는 군대 간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제가 혹시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학대학원에 가야 된다...
그러면 방위산업체 근무를 못하게 되기 때문에, 군대를 가야 됩니다.
과거에는 방산업체에 수 년을 근무했거든요.
'그러면 내가 부름받아 나서게 되면, 군대를 가야 돼?' 이거는 미처 생각을 안 해봤는데,
그래서 제가 그날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 그래도 군대 가는 것은 힘들죠'
그렇게 반응을 보였어요. 신학교를 가는데, 군대까지 가면서 신학교 가는 것은 쉽지 않은 거죠.
그러니까 은혜받았던 마음이 갑자기 싸늘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수련회에 있는 2박 3일 동안 진짜 실험을 했어요.
'야, 나는 완전 사기꾼이다. 예수님 잘 믿는 것처럼 온갖 폼 다 잡으면서,
막상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부름 받아 나선 이몸, 군대는 빼고 가오리이다'
제 스스로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한 2박 3일 정도 씨름을 했어요.
'아, 나는 정말 믿음이 가짜고, 내 속에 믿음은 하나도 없구나'
그런데 한 2박 3일을 씨름하다 보니까, 제 속에 겨자씨만한 믿음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뭐라고 말씀드렸는가 하면
'하나님, 제가 군대 갈 자신도 없지만, 그러나 일단 말로만 간다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고 헌신은 하겠는데,
군대는... 일단 말로만 간다고 하는 겁니다. 실제 행동은 아직... 좀 더 고려해 보겠습니다...
했던 거죠. 그러면서 일단은 제가 시인은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입술로 고백을 하고, 시인을 하니까.. 제 마음에 평안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6년 지나고 나서, 결혼하고 나서, 비록 방위이지만
군대를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고비를 넘겼어요. 군대의 고비를 넘겼어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제가 어머니한테 신학교에 진학하는 걸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이거는 우리 어머니한테는 너무 잔인한 이야기 같더라고요.
또 제가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저희 집안에서 제가 처음 서울대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저희 집안 어르신들이, 저에 대해서 가졌던 기대가 정말 많았어요.
그런데 제가 신학교 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래서 집안의 어르신들이 전화가 왔어요. '너 신학교 간다며?'
그때 제가 베드로의 마음을 이해하겠더라고요. '무슨 말씀이에요? 저 안 갑니다'
속으로는 간다고 다 결정해놨는데 입술로는 '저 안 갑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길게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일단 고비를 넘기자는 거죠.
근데 사실 친척 어르신은 큰 문제가 안 되는데, 우리 어머니께 말씀드리기는 정말
큰 고비였습니다.
근데 어머니들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예감이 있는 것 같아요.
'얘가 지금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어머님 같이 병약하신 분이 한 달 동안 새벽 기도를 매일 가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어머니 마음을 다 준비를 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드리니까, 그 첫 마디가 '안 돼!' 하신 게 아니고,
'야, 신학교에 가려면 빨리 가지, 왜 이제 가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어머님이 흔쾌히, 제 신학교 진로를 승낙해 주셨어요.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뭔가 하면,
제가 가족 친지들의 기대, 또 내 자신이 생각했던 내 미래와
주님의 요청 사이에 한 번씩 긴장이 있을 때... 그거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심사숙고해서,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게, 때로는 가족과의 관계도 한 번씩 삐끗할 수도 있고,
또 내 자신이 원했던 것과는 다른 길일 수도 있고,
한 번씩은 나한테 큰 경제적인 손실이 있다 하더라도
"심사숙고해서"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 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19: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지금 나왔던 세 가지가 다 나와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가족/ 내 소유/ 나 자신!
이거를 버린 자마다... 없어지는 게 아니고, 뭐라고 했느냐? 여러 배를 받습니다.
어떤 성경에는 '백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할 것이다' 막10:30 역설이죠.
여러분, 우리가 버릴 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덜 사랑하고,
그래서 미워하는 표현을 하게 될 때 어떻게 되나?
사실은 모든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당뇨가 조금 있어가지고, 그래서 한 1년 반 전에
저는 과거에 마라톤을 뛰고 이랬으니까, 제가 이번에도 하프 마라톤을 뛰려고
지금 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근데 저는 뭐 마라톤 뛰니까 당뇨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죠.
그런데 한번 검사했는데, 공복 혈당이 150 정도 나오고, 당화색소도 검사하니까
7.6 정도가 나오고... 갑자기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저한테 '내가 열심히 운동하고 뛰는데, 왜 내가 지금 당이 많이 생겼고,
그냥 정상적으로 보면 좀 위험한 건데, 왜 이런 일이 생겼나?' 라고 제 자신에게 물어보니까
문제는 뭐겠습니까? 저는 밥을 너무 사랑했어요. 밥을 정말 사랑했어요.
저는 어릴 때 원래 밥을 잘 안 먹어서, 우리 할머니, 부모님들이 저를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랬는데 제가 고3 때, 어머니가 없는 살림에 보약을 한번 해 주셨는데
보약 부작용으로 그때부터 밥을 뜨겁게 사랑하게 됐어요. 고3 때 살이 막 쪘어요.
그리고 대학 가서 자취하면서 제가 조금 식사를 잘 못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자취하면서 약간 배를 고파 봤기 때문에, 또 밥에 대한 집착들이 많이 생기게 됐어요.
또 제가 청년들을 섬겼으니까, 허구한 날 같이 라면을 먹었잖아요.
제가 그래서 밥도 사랑했고,
결혼하기 전까지는 하루 한 끼는 정말 라면을 매일 먹었던...
정말 라면에 거의 중독됐던 그런 사람이었죠.
그래서 결혼해서 집사람이 저를 부를 때, 별명이 뭐였냐면 '밥'입니다.
'헤이 밥!' 하면, 그럼 제가 벌떡 일어나서, 밥상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집사람이 저를 보면서, 제일 신기한 게 뭐냐?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저는 밥 한 그릇을 맛있게 해치울 수 있었어요.
아무리 배가 불러도, 아무리 자다가 일어나도, 저는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어요.
이렇게 밥을 사랑하다가, 결국은 (당뇨) 병이 된 거죠.
그래서 제가 '야 이게 결국은... 꼭 필요한 게 밥인데...' 이걸 투마치 너무 사랑하니까
병이 된 거죠.
그래서 지금은 제가 뭐 하겠습니까? 1년 반 동안 씨름한 게 뭐냐?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흰쌀밥을 미워하려고 지금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흰쌀밥을 제가 미워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과거에 채소, 그다음에 잡곡... 이런 것들은 제가 벌레 쳐다보듯이 봤거든요.
정말 혐오식품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과거에 미워했던 것들을, 사랑하려고 의지적으로 굉장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어떤 형식으로라도 집에서 방바닥을 구르는 한이 있어도,
제가 운동 열심히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7KG 정도를 뺐어요.
그다음에 지금은 어쨌든 수치상으로는 거의 정상이 되었죠.
그러면서 제가 배운 게 뭔가 하면, 밥이라는 게 중요하잖아요. 좋은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그 건강한 그 삶의 방법이 있는데,
그거를 깨트리고 too much 너무 좋아하게 됐을 때... 바로 병이 드는 거죠.
그래서 치유받는 길이 뭐겠습니까?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거죠.
이제는 내 방법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몸을 지으셨을 때
건강할 수 있도록 지으신 그 방식대로 먹게 되면, 어떻게 되나?
우리 몸이 회복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족/ 소유/ 자기 자신이 다 귀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한계를 넘어서서 Too much 너무 사랑하게 되면
적절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는데, 여러분들에게 제가 예언할 수 있어요.
'영적 당뇨'에 걸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내 가족도/ 내 소유도/ 나 자신도
하나님의 정하신 방식대로 나 자신을 사랑하고 관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한편으로는 그 순간은 '미워하는' 거죠.
지금도 집에서 제일 싸우는 게 뭐겠어요? 밥 먹으려고 그러는데,
집사람이 또 잔소리하면 ... 제가 갑자기 팍 도는 거죠.
정말 나는 이 밥을 사랑하는데, 또 미워하도록 강요를 하면... 짜증이 확 나지만,
그 때에도 어떻게 해야 되나? 좋은 거라도 결국 미워해야 되는 거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뭔가 하면, 아무리 소중한 거라도 주님을 첫자리에 둘 때,
나머지를 주님의 통제 속에 들어오게 할 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건강하게 얻게 됩니다.
이 한 주간 살아갈 때, 모든 순간순간에 예수님을 첫자리에 두어서
한 번씩 물질/ 나 자신/ 가족들의 요구와,
주님의 요구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날 때,
주님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되셔서
영원히 살 수 있고, 소금처럼 우리 가정 일터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그 참된 맛을 낼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한번 찬양 드릴 때 '부름받아 나선 이몸'
여러분, 이 찬송을 냉정하게 잘 부르셔야 돼요.
혼수상태로 막 아무 생각 없이 부르지 말고, 정말 부름받아 가겠다는 각오와 자세로
불러보겠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