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29] 새 언약 1 (히8:10-13)┃2025.3.30 주일예배 - YouTube
◈새언약 1 히8:10~13 2025.03.31.
◑도입
히브리서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새 언약> 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율법으로 대표되는 옛 언약 또는 첫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맺어진 새 언약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2~3회에 걸쳐서 <새언약>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히8장부터 시작되는 새언약에 대한 말씀은 10장 중반까지 쭉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에 대해서 10:9절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히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새언약의 내용은, 즉 8장~10장 중반까지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1) 첫 번째는 첫 언약을 패하신 것이고,
2) 두 번째는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셔야 했고,
땅에서의 제사장 직분과, *옛 언약을 폐하시고
하늘에서의 제사장 직분을 모두 행하셔야 했습니다. *새언약을 세우심
예수께서는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죠.
그렇게 하심으로 첫 언약 때 맺은 요구를 다 충족시키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건을 다 충족시키시는 것이죠.
그렇게 하심으로 첫 번째 언약을 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크게 두 가지 사역을 하신 것으로 묘사하는데,
첫 번째는 첫 언약을 패하신 것이고,
두 번째는 새언약을 세우신 것인데
첫언약을 폐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께서 오셔야 했다는 거예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충족시키셨죠.
이것이 '땅에서의 제사장 사역'이라고 했죠.
자 이것을 통해서 첫 언약을 폐기하시는 첫 번째 사역을 하셨다면, 그게 끝이 아니죠.
폐하신 것은, 새로운 것을 세우시기 위하심인데, 히10:9
이제 새 언약을 세우시는데, 그 내용은 뭐냐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두고, 우리 생각에 그 말씀을 새기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0:15~16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그러니까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시고, 법을 생각에 기록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어떻게 하신다고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은, 옛언약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이 땅에 보내심으로써, 하늘에서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셨다는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옛언약은, 인간이신 예수, 인성을 가진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땅에서의 제사장 직분을 다 감당하신 거예요.
그래서 (짐승보다) '더 좋은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이
첫 번째 하신 일이라면,
두 번째 하신 일은 <새언약>인데,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예수의 신성,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의 제사장 직분'을 다 감당하신 것인데,
그것은 더 좋은 언약을 통해서, 우리를 날마다 날마다 성화시키시는 것,
자 이것이 (예수님의, 또는 새언약의) 두 번째 행하신 일 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8장부터 ~ 10장까지, 이 두 가지 사역 또는 두 가지 언약을 대비합니다.
그래서 첫언약을 폐하신 첫 번째 사역과,
새 언약을 세우신 두 번째 사역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1. 첫 언약, 옛 언약을 폐하신 예수님
자 첫 언약에 대해서 먼저 좀 살펴보죠.
새 언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언약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요.
새 언약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옛언약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요.
첫 언약은 무엇입니까? 모세의 시내산 언약을 말하는데, 구약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렇기에 율법은 선한 것입니까? 악한 것입니까?
선한 거지요. 좋은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나쁜 것일리가 없죠. 그러니까 율법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좋은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히7: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함으로 폐하고'
율법은 다 좋은 거예요. 좋은 건데 문제는 '연약함으로 무익하다'는 거예요.
여기서 '연약하다'는 것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율법이 연약하다는게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될 인간이 연약하다는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연약해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키면... 구원에 이를 수 있어요.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말씀이고, 좋은 것이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연약하다는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예요? 무익한 거죠. 아무리 좋아봐야 뭐 합니까? 지킬 수 없는데!
아무리 좋아 봐야... 지킬 수 없으면, 그림의 떡이죠. 그래서 무익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폐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 로마서에 보면,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히7:1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맞아요.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긴 한데
문제는 인간이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무익하다'는 거예요. 7:18
그래서 율법으로는 아무것도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예수께서 이 무익한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7: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함으로 폐하고'
이게 나빠서, 악해서 폐한 것이 아니라... 다 좋은 건데...
사람이 지킬 능력이 없으니까 무익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게 그냥 폐한다고 폐해지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왜요?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거든요.
근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래요. 6:18
그래서 한 번 말씀하신 것을 '에휴, 그냥 없다고 하자' 이렇게 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언을 하지 않는 분이시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에이, 그 전에 그렇게 얘기했지만 어차피 안 되지 않냐? 그럼 그냥 무효로 하고, 다시 하자'
이게 안 되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눅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니라'
무슨 얘기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으신데, 그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죠.
그리고 그 동일한 권위의 말씀으로, 율법을 말씀하신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똑같은 권위로, 말씀으로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을 만약 폐할 수 있다면, 뭐 천지창조한 것도 '에이 그냥 없다고 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율법을 폐한다'고 하는 것은,
천지창조 하신 것을 취소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는 뜻이죠.
눅16:17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니라'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율법을 주셨으니까,
(창조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주신 (율법의) 말씀인데,
'이게 그냥 안 되니까 없던 걸로 하자' 그 얘기는,
'천지를 없어지게 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얘기' 라는 거예요.
그게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맘대로 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율법을 합법적으로 폐하시기 위해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십니다.
율법이 정한 대로,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셨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율법 언약을 깨는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뭡니까?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는 영생이니라'
그러니까 율법을 깨는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뭐냐면 '죽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이 정당한 대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만 가지고 안 되고,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이 율법으로 인해 치러야 될 대가를... 모두 치르셨어요.
죄 없으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이후로, 첫 언약인 율법은 어떻게 됐어요? 폐지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율법의 저주는 없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 부담을 여러분이 느끼신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이미 폐해진 거예요.
우리에게 돌이키고 회개해야 될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미안함이지,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감은 아닙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건 뭐냐면, 말 그대로 두려움이에요.
율법을 어겼으니까 '아이고 하나님이 벌하시면 어떡하지?
율법을 어겼으니까 내가 벌을 받으면 어떡하지?'
이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인데,
반면 미안함은 뭐냐면... 인격적인 미안함입니다.
'내 죄로 인해서 마음 아파하실 하나님에 대한 미안함'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개는 다른 거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뭐냐면, 죄를 짓게 되면 거기서 죄책감을 가지게 돼요.
그리고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데...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두려움과 죄책감은, 첫 언약에서부터 나오는 건데, 이 언약은 폐지됐다는 거예요.
모든 죄의 삯을 다 치르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죄 때문에
그 죄로 말미암아 오게 될 형벌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요.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어요.
(*형벌, 처벌 punishment 은 없는데, 징계 discipline는 있죠.)
죄를 지어 하나님께 매맞는 사람 입장에서는 형벌이나 징계가, 둘이 비슷하게 아픕니다.
그러나 결과가 다르죠. 형벌은 멸망으로, 징계는 성화로 결과가 달라집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공로로, 형벌은 없지만, 징계는 받습니다.
▲이 말을 조금 조심해야 되긴 하는데, 그래서 뻔뻔하게 '난 뭐 죄 지어도 아무 상관없어'
이렇게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근데 '죄책감'과 '미안함'은 미묘하지만 크게 다른 거예요.
죄책감은 뭐냐면, 그 중심이 '나'입니다.
내가 느낄 두려움, 내가 받을 어떤 피해, 또 내가 겪게 될 고통.. 그게 죄책감의 본질이라면,
반면에 미안함, 그 중심이 '상대방'에 대한 거죠.
그러니까 둘은 비슷한 감정 같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굉장히 다른 감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죄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되는 정당한 감정은 뭐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죄를 사해 주셨으니
죄를 짓고 나서도 '아무 감정이 없어야 된다...' 이건 아닙니다.
죄를 죄를 짓게 되면, 당연히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따라옵니다.
따라오는데, 거기서 죄책감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미안함이라는 것이
새언약에 기초한 감정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격적인 미안함이에요.
'아이고,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이게 올바른 반응이지,
막 두려움 때문에 '아이쿠, 이 죄 때문에 내가 큰일 나는 거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는 거 아니야? ... 이런 감정은 옛언약에 기초한,
이미 폐지된 잘못된 감정이라는 거예요. 이 차이가 인식이 되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면, 새언약아래서는,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세요.
물론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은 묘사되긴 하지만,
십자가에서 이미 그 진노를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적어도 새 언약의 백성, 신약 백성에게는... 진노가 아니십니다. 마음 아파하시는 거죠.
죄는, 하나님을 해코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어떤 해코지가 되고,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으시고...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과대망상증에 걸리신 겁니다.
우리는 그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존재감이라는게 없어요. 그냥 제로입니다.
먼지만도 못한 존재예요.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이 우주 안에서 우리의 존재감이라는 것은 먼지와 같죠.
우리가 뭐 죄를 짓고, 뭘 한다고 한들,
그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어떤 피해가 간다거나... 그건 과대망상증이에요.
우린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인데...
그 사랑으로 인해서 자녀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마음 아파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죄가, 하나님에게 어떤 피해를 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 죄를 지은 그 본인이 스스로 삶을 파괴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신다는 거예요.
▲이 차이를 여러분이 잘 인지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옛 언약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옛 언약의 삶은 뭐냐면, 두려움과 죄책감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이에요.
아니에요. 이거는 예수님이 원하시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이미 폐지됐어요.
단지 그 인격적인 미안함, 마음 아파하실 것에 대한 죄송함이 있는 것이죠.
자,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분들은
'죄로 말미암아 인생이 파괴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뭐 죄의 형벌이 없는게 아니네요...
이게 조금 다른 얘기입니다. 이것도 미묘한 얘기긴 한데요.
어떻게 다르냐면... 죄의 형벌 punishment 은 없어요.
죄의 형벌은 이미 예수께서 다 담당하셨어요.
근데 (죄의 징계 discipline 도 있지만) 죄의 결과 consequence 가 있어요.
새언약 아래에서는, punishment 는 없지만, 징계 discipline와, 결과 consequence 는 있어요.
이게 무슨 차이냐면, 그러니까 죄라는게 뭐냐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벗어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고 창조하신게 있어요.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그렇게 디자인 하셨어요.
그런데 이 디자인 하신 것을 자꾸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자꾸 벗어나면, 당연히 원래 디자인하신 것을 못 누리겠죠. 망가지겠죠.
물건도 그렇지 않습니까? 물건도 그 물건을 사용하도록 디자인한 방식이 있는데,
그 방식대로 사용하여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제 멋대로 쓰면... 망가지게 돼죠.
이건 시계죠. 시계는 시간을 보라고 만들었는데,
시간 보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이걸로 자꾸 못을 박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 시계가 망가지겠죠.
잘못 사용해서 망가지는 것, 이게 죄의 결과 consequence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디자인한 사람이 일부러 형벌을 주려는 목적으로 만든 건 아니지요.
사용자가 원래 디자인한 방식에서 벗어나니까, 결과적으로 망가지는 거죠.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는 받지만, 그 결과로 인해 삶은 망가질 수 있는 거죠.
물론 회복도 일어나겠지만...)
만약에 우리가 죄를 지어서, 형벌을 받는 거라면, 그건 진노의 하나님이에요. *구약
그리고 우리의 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두려움이어요. *옛언약
그런데 이제는 형벌이 아니라, '죄의 결과' 라는 건 뭐냐면
하나님은 형벌을 주시지 않지만, 그 죄의 결과로 내 인생이 망가지는 거죠.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시는 거죠. 이게 이제 새언약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의 백성의, 죄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인격적인 미안함이지, 두려움과 죄책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슬프게도
폐지되어진 율법의 망령 아래 살아갑니다.
미안함이 아니라,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서 살지요.
▲자, 첫 언약이 폐해졌다고 하지만, 첫 언약은 나름의 역할이 있습니다.
먼저는,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히10: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의 역할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죄를 깨닫는 거예요.
'아 이게 죄구나' 하고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해결하지는 못 해요.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대요.
그래서 그 결과, 율법은 우리에게 뭐를 주냐 하면... 죄책감을 줘요.
왜요? 죄를 자꾸 깨달으니까!
그 전까지는 죄가 죄인 줄 몰랐어요. 그러니까 죄책감이라는게 없었는데,
'아 이게 죄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죄책감이 생기죠.
그리고 죄책감이 있으면, 당연히 같이 따라오는 것이 두려움이죠.
그래서 이 율법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줍니다.
그리고 죄책감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피하게 해요. 지성소로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해서 실제로 보면, 호렙산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을 때,
죄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서 떨며 피하죠.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가지를 못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이제 율법의 한계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요.
그래서 죄가 죄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좋아요. 긍정적인 기능인데,
문제는 죄를 깨닫는데, 해결은 안 되니까, 거기서부터 죄책감과 두려움이 오고,
죄책감과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을 피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이게 율법의 한계입니다.
자 그래요. 여러분, 첫 언약은 두려움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않으면 오케이예요. 저주를 면하는게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첫언약은 내면적이기보단 외면적입니다.
마음의 동기보다는, 드러나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했어, 안 했어?'
'안식일에 일 했어, 안 했어?' 이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어떤 마음으로 안식일을 지켰느냐? ... 뭐 그런 내면적인 건 묻지 않습니다.
자, 그래서 첫 언약은, 두려움에 기초한 수동적이고 외면적인 언약입니다.
그래서 두려움, 수동적, 외면적이라고 하는 것이 첫 언약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첫언약에 기초하게 되면, 율법에 기초하게 되면,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성경에 술 마시는게 죄라고 어디 나와 있어요?
담배 피는게 죄라고 하는게 어디 나와 있어요?'
이 질문하는 분의 의도는 100% 뭐냐면,
'죄만 아니면 다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굉장히 수동적인 거죠.
그래서 이걸 전문용어로 뭐라 그러냐면, '면피 스피릿' 이라고 합니다.
'나는 면피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나는 하여간 죄만 아니면 다 하겠다...'
아니요, 여러분. 새 언약은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삶을 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요구되는 건 이상의 것을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거죠.
그게 새언약인데, 옛언약은 뭐냐면 굉장히 수동적입니다. 아주 소극적이에요.
그냥 하지 말라는 것만 미니멈으로 안 하겠다는 거예요.
옛언약은 소극적인, 외면적이에요.
그럼 도대체 그 술 담배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동기는 뭐냐?
이런 거를 별로 중요하게 따지지 않습니다. 했냐, 안 했냐를 중요하게 따지죠.
그래서 어느 순간에 기독교가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는 종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거는 여러분 참 모욕적인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술 담배'로 규정이 됩니까?
어떻게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규정하는게 돼버렸나요?
모욕적이지 않습니까? 이게 뭐예요? 옛언약 때문에 나오는 그런 면피 스피릿이죠.
두려움, 수동적, 외면적...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은 뭐냐면 이걸 폐하셨다는 거예요.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 수동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생활하는 걸, 청산하셨어요.
그래서 여러분 '첫 언약을 폐하셨다'는 것은
우리 안에 두려움, 수동적, 외형적인 것을 제거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모두 제거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 중에, 아직 첫 언약 속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깨어나십시오 첫 언약은 폐하여졌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죄책감, 두려움, 수동적, 소극적, 외형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종교의 모습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폐해진 옛언약의 망령 속에 계신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참 많아요. 아마 저와 여러분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두려움에 기초한... 율법의 기초한... 그래서 소극적인... 면피하려고 하는...
이게 뭐하고 비슷하냐면, 폐하여졌는데, 인식을 잘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우회전하는게 까다로운 법이 얼마 전에 만들어졌죠.
그래서 요즘 자동차로 우회전할 때마다 막 신경이 곤두서입니다.
'혹시 딱지 떼는 거 아니야?'
그런데 언제 어떨 때 서야 되는지 잘 몰라서, 섰다가 갔다가, 또 섰다가... 하면서 가요.
그게 이제 버릇이 됐죠.
그런데 미국에 가면 이 법이 없습니다. (다른 법이 있죠)
미국은 이 법이 없는 나라거든요.
근데 제가 미국에 가서도, 한국에서처럼 똑같이 운전하는 거예요.
우회전할 때, 불안하니까, 섰다가 갔다가 막 이러니까, 뒷차들이 막 뭐라고 하는 거죠.
왜요? 미국에서는 폐지됐는데(없는데), 그냥 제 습관 속에 남아 있는 거죠.
우리 신앙생활이 마치 이와 같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폐지하셨는데,
그래서 우리 안에 이런 건 다 폐지됐어야 되는데, 아직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치 그 법이 아직 남아 있는 것처럼,
전혀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두려움, 죄책감, 소극적인 신앙, 외형적인 신앙생활... 이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안에도 이런 것이 남아 있다면, 그거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전히 제거됐습니다. 그 법은 폐지됐습니다.
옛 언약은 우리 안에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늘 예수께서 초청하십니다.
'첫 언약을 벗어버리고 새언약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더 이상 우리가 죄책감과 두려움에 기초해서 신앙생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극적이고 외형적이에요. 그런 '종교인'의 모습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건 폐지됐다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사역입니다. 첫 언약을 폐하신 거예요.
혹시라도 여러분 안에,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인해서 뭔가에 묶여 있는 것이 있다면,
오늘 자유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만약 죄가 있다면, 그것을 회개해야 되고요.
죄가 있다면, 그것은 인격적인 미안함으로 연결돼야 정상적인 거지,
'나를 향해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구나' 이걸로 연결돼야지요.
그래서 여러분, 이 미안함으로 연결되면, 어떻게 되냐면
점점 하나님께로 다가가게 됩니다.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상대편 중심적이니까,
하나님께 미안하면,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실 거니까
'내가 앞으로는 하나님을 마음 아파하시지 않게 해야지, 기쁘시게 해야지'
이쪽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반대로 두려움은 뭐예요? '나' 중심적인 거거든요.
그러면 계속 하나님을 피하게 돼요.
그래서 옛 언약에 기초해 있으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새언약에 기초해 있으면, 점점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돼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은 근심 시켜 드리지 않을까?' 하면서, 점점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돼요.
그래서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실은 애매해 (비슷해) 보이긴 하는데,
죄책감이나 미안함이나 비슷한 감정 같아 보이죠.
그러나 천만에! 둘은 완전히 다른 감정이에요.
죄책감은.. 뭐예요? 나를 중심으로 한 거고요.
미안함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거예요.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새 언약으로 나오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예수께서 행하신 두 번째 사역은 <새 언약을 세우신> 거예요.
새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8:10~13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아멘
새 언약의 배경은, 우리가 첫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새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 그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하셨다는 것이고,
2) 두 번째는,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10장에 보면 이렇게 요약합니다.
10:16~17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새언약의 내용을 아주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고,
오늘은 첫 번째 것만 들여다 보겠습니다.
▲새언약은, 첫 번째로,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거예요.
첫 언약이 하나님의 법을 돌판에 새긴 것이었다면,
새 언약은 그것을 각 사람의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돌판에 새겼다'고 하는 건 이런 거죠.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있어요.
그러니까 뭔가 우리가 읽었어요. 들었어요.
예를 들면,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들었어요.
'도둑질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라고 들었어요.
그러면 그 정보가 이제 우리 안에 들어와서, 먼저는 이해가 됩니다.
'아 이렇게 하라는 거구나, 거짓말하지 말라는 거구나,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거구나'
그것이 우리의 지식에서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뭐가 따라오냐 하면, 거기에 대한 감정이 따라오죠.
그리고 그 감정에 의해서 뭔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 정, 의가 반응을 하게 되는데,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에 지, 정, 의가 반응을 합니다.
근데 문제는 '이해'까지는 오케이입니다. 이해를 했어요.
그런데 감정이 꼭 이것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발동될지는... 그건 잘 몰라요.
예를 들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그러면,
'아휴 지켜야지' 이렇게 감정이 따라와 주면 좋은데,
어떤 때는 '어휴, 바빠 죽겠는데 왜 일도 못 하게 하시지?'
이렇게 감정이 안 따라올 수도 있죠. 마음으로 동의가 안 되는 거죠.
또는 뭐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휴,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내 인생의 간섭이야?'
그러니까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꼭, 외부에서 들어온 그 돌판에 새겨진 말씀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발동될지 안 될지는 몰라요.
지지하는 방향으로 발동되면 감사하고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는 거예요.
그리고 감정이 따라오면, 내가 의지적으로 어떤 선택을 내릴지도 잘 모르죠.
안식일을 지키는 선택을 할지/ 아니면 '에이 모르겠다. 할 일도 많고 바빠 죽겠는데...
오늘까지 안 하면 큰일 나는데... 그냥 일이나 하자'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정보가 들어와서 이해를 했다고 해서,
꼭 감정이나 의지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과 의지는 '이해'(지)와는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어요. *지정의에서 '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율법에 순종했어요.
'안식일을 지키자' 그랬으면 그 동기는 뭐예요? 두려움 때문일 거예요.
100%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하기 싫은데...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안 하면 하나님께 벌 받을까 봐...
또는 공동체 내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눈총 줄까 봐...
그렇죠. 유대인 사회에서는 안식일 안 지키면 눈총 받죠.
또 뭐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예배 안 나오고 어디 놀러 가면, 그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뭐 이런게 이제 있잖아요. 자 이렇게 부담스럽고 두려움 때문에
그 율법의 순종하게 되죠. 이게 뭐예요? 첫 언약의 프로세스 예요.
첫 언약은 이런 프로세스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뭔가 정보가 들어와요. 돌판에 새겼으니까.
또는 성경책에 기록된 것.
이게 이제 눈이나 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면
감정과 의지가 따라와야 되는데, 이게 지지하는 방향이 아니면
그 다음에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거에 의해서... 억지로 순종을 하게 되죠.
자 이게 첫 언약의 프로세스입니다.
그런데 새언약은, 첫째로 정보가, 외부에서 주어지는게 아니라
내면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식이 있고,
그리고 그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나의 감정과 의지에까지 직접 역사하시는 거예요.
이 방식은, 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낯설어요.
그러니까 내 감정에 성령께서 직접 엑세스 하셔서,
내 마음에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지하는 감정을 일으켜 주신다는 거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이게 새언약이 옛언약과 차이인 거예요.
그래서 그것에 맞는 의지적인 결정을 하도록, 나를 도우신다는 거예요.
이건 전혀 율법과 다른 프로세스입니다.
그래서 이것(새언약)은,
예수 믿기 전까지는, 또는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전까지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이에요.
자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은 예는 아닌데, 귀신 들림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비슷한 방식이에요. 귀신들림 또는 뭐 무당 신내림 받는 거.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귀신 들림과 같다... 이런 뜻은 아닙니다.
근데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영의 프로세스' 라는 방법적인 면에서 비슷하다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비교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에 보면 이렇게 얘기하죠.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자 여기서 '세상의 영'이라고 하는게 귀신인데,
이 귀신의 영을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을 대비해서 이야기하죠.
이게 영의 세계서 일어나는 프로세스라는 면에서, 방법적인 면에서는 유사점이 있지요.
자 고런 측면에서 들여다보려고 하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귀신 들림하고 성령님하고 동급이다. 이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방법적인 면에서 이제 비슷한 면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겁니다.
▲자 귀신 들린 사람을 보면,
1) 첫째, 귀신들린 사람은 헛것을 봐요. 이게 뭐냐면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보가 아니라,
영을 통해서 주어지는 내적, 혹은 영적인 정보가 있다는 거지요.
2) 둘째, 귀신 들린 사람은, 실체 없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데, 두려워서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이러지요.
우리 내적인 곳에서 감정에 직접 액세스 하는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3) 셋째, 귀신 들린 사람은 객관적으로 보기에 얼토당토 않아 보이는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이게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반응이라는 거예요.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를 이해하고, 그것에 반응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라는 거죠.
'성령을 통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두시는 것' (새언약)도
방법적인 면에서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단지 방향이 반대일 뿐이지요.
귀신들림은 부정적이고, 두렵고, 이런 마음을 주는 반면,
성령께서는 기쁨과 감사함과 즐거움... 이런 걸 주십니다. 그게 다른 점이죠.
새언약의 특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1. 첫째, 새언약은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지식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 약속처럼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에 직접적인 지식을 주십니다.
외부에서 눈과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가 아니라,
내면에서 주어지는 지식이 있어요.
예를 들면, 성경에서 아나니와 삽비라를 앞에 두고, 베드로에게이 지식이 있었죠.
(이런 것을 '지식의 말씀' 은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와서 알려준게 아니잖아요.
그냥 성령께서 그 내면에서 알게 하시는 내적인 지식이 있었어요.
또 왕의 꿈을 해석한 다니엘에게도, 이런 지식이 있었습니다.
뭐 어디서 책을 읽고 연구하고 그러는게 아니죠.
그냥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또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에게도, 역시 이 지식이 있었고요.
오늘날도 요14:26절의 약속대로, 성령께서는 이 지식을 우리 내면에 주십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기록된 성경을 떠오르게 또 하시고,
말씀을 깨닫게도 하시고,
또는 기도할 때 감동을 주시기도 하시고,
또 어떨 땐 직관을 통해서, 어떨 땐 양심을 통해서
또 어떨 땐 평강을 통해서... 하여간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서
우리 안에 주시는 내적인 지식이 있다는 거예요.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지식입니다. *'지식의 말씀'
그러니까 이런 것은,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육체의 오감과는 다른 소스를 통해서 주어지는 정보이기 때문에
배우고 익숙해지는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걸 여러분 '영성'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래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10년, 20년, 30년 충성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주시는 하여간 뭔가가 있어요.
'아이고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아이고 이거 하나님께서 화나셨구나' 뭐 이런 거라든지, 하여간 그런 게 있어요.
이걸 '영적인 촉'이라고 해야 될까요? 주1)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우리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죠.
▲2. 둘째, 새 언약은 성령께서 내적인 감정을 움직이십니다.
사실은 '말씀을 마음에 둔다'(8:10)고 했을 때,
지식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감정입니다. 이게 새언약의 핵심이에요.
사실 지식이나 정보는, 굳이 마음에 두지 않고, 돌판에 두셔도 큰 상관없습니다.
읽어보고 알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더 명확하고 앗쌀합니다.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해도 되나, 안 되나?'
그러면서 막 내적인 음성을 구하고... 그럴 필요 없어요. 성경에 써 있어요.
그냥 읽으면 끝나요.
근데 이 돌판에 기록된 것을 무시하고, 그냥 우리 마음에 기록된 것만 찾는 사람은
실수하게 됩니다. 실수하게 되고, 잘못 분별하기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 걸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기도 하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해 또는 지식이란 면에 있어서는
돌판에 기록된게 훨씬 더 명백하고 앗쌀해요.
그냥 읽으면 그게 그건 거예요. 그리고 이해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게 내적인 정보든/ 아니면 돌판에서 얻는 정보이든지 간에
하여간 첫 번째 기능은 뭐냐면, 이해하는 거거든요.
'아 이거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 그러시는구나, 이거는 하나님이 하라 그러시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기능인데,
그래서 저는 첫 번째 '지식 또는 이해'에 대해서는
그걸 굳이 우리 마음에 기록하지 않으시고, 돌판에 기록하신 것만 가지고도
저는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그게 오히려 어떨 때는 훨씬 더 명백해요.
그런데 새 언약의 핵심은 뭐냐면 이 두 번째예요.
그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감정'이 따라오게 되는데,
이 감정은, 내 맘대로 되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셨다'고 했을 땐,
이 말씀이 이해되는 것에 대해서, 지지하는 감정을 일으켜 주신다는 거예요.
이게 사실은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기쁘고 즐겁고, 막 그렇게 살고 싶고,
더 그렇게 하고 하는 걸 (감정적으로) 올라오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또는 법을 우리 마음에 두는
새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감격이 되고, 말씀대로 살고 싶고,
막 열정이 올라오고, 하나님이 너무 좋고,
그냥 주를 위해 살고 싶고, 주를 위해 죽고 싶은 그 감정!
그 감정을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주신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고는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지는 거예요.
말씀만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은 몰랐고,
말씀만 보고 있으면 너무 재밌고, 너무 행복하고, 더 보고 싶고...
40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말씀을 보고 있으면,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이 되고, 그렇게 살고 싶어져요.
누군가, 무언가가 내 내면에서, 내 감정에 직접 역사하고 있는 거예요. 아멘!
그것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새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나의 감정에 직접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이게 이제 돌판에 기록된 것하고 다른 거죠.
돌반에 기록된 것은, 그 정보가 내 안에 들어와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 감정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런데 새 언약은 뭐냐면, 정보의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옛 언약과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러나 새언약은 감정이 다른 거예요.
그것을 지지하는 감정이 올라온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게 하고 싶고, 막 그렇게 섬기고 싶고...
그래서 더 이상 '술 마시고 담배 피는게 죄입니까?' 따위는 물어보지도 않아요.
그런 것 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주를 위해서 다 드리고 싶고, 더 하고 싶고, 드려도 더 드리고 싶고,
막 이게 속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그게 새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주시는 성령님! 할렐루야!
자 그래서 옛날 분들은 이걸 뭐라 그랬냐면 '불 받았다' 그러셨어요.
정확한 표현입니다. 뭐예요?
내 안에서 뜨거운 불이 확 올라온다는 거예요. 이건 감정이죠.
우리 안에 불 같은 감정이 올라오는데, 어떤 불 같은 감정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 그리고 더 하나님께 드리고 싶고,
더 말씀대로 살고 싶고, 이게 불같이 내 안에서 올라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 받았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거예요.
이렇게 '불 같은 감정'을 주시는 것이, 새 언약의 핵심이에요.
결정적인 새 언약의 차이는 뭐냐면, 두 번째예요. 감정을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지지하는 감정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씀이 너무 좋고, 막 그렇게 살고 싶고,
막 너무 그게 동의가 되고 하는... 이렇게 '불 받는 거'
이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고, 하나님을 추구하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지고, 주를 위해 살고 싶고, 주를 위해 죽고 싶고,
이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새언약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약간 아리까리하긴 해요. 힘은 들어요. 근데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옛언약과 새언약의 차이가 여러분 보이십니까?
옛언약은, 억지로 하는 거라면
새언약은, 기쁘게 하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똑같아요. 순종하긴 하는 건데, 억지로 하느냐, 기쁘게 하느냐?
그래서 여러분 새언약의 백성은, 부담감을 갖거나 억지로 신앙생활 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요.
더 못해서 안달이고, 뜯어 말려도 하고... 그게 새 언약의 백성이에요.
그런데 옛언약의 백성은, 어떻게 하면 안 할까를 찾아요.
그래서 맨날 물어보는게
'십일조는 세 전 십일조를 해야 됩니까, 세 후 십일조를 해야 됩니까?'
그건 새언약이 아니에요.
새언약의 백성은, 그런 거 안 물어봅니다.
더 드리고 싶어서, 더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워 하는 거죠.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 물질이 아니라, 그 마음이죠.
돈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무슨 돈이 없어서 우리에게 구걸하시겠습니까?
새 언약의 내용은 뭐냐면 기쁜 거예요.
헌신, 봉사하는게 막 기쁘고... 막 더 하고 싶고... 더 드리고 싶고... 더 섬기고 싶고...
이게 옛언약과의 차이예요.
만약 이곳(교회)에 마지 못해 끌려나오신 분이 있다면.. 아직 옛언약 아래 있는 겁니다.
이게 폐해졌다는 거예요. 이거 폐해야 돼요.
그게 아니라 주일이 기다려지고... '언제 주일이 오는 거야?' 하며 기다려지고...
더 봉사하고 싶고... 더 헌신하고 싶고... 이게 새언약의 축복인 거예요.
그걸 행하시는 분이 누구세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
그래서 여러분 성령을 받으셔야 돼요. 거기서부터 새 언약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새언약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신앙생활은 즐거움이에요.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가장 좋아하는 거고...
그런데 새언약의 백성이 아닌 옛언약의 백성에게는
이게 두려움이고, 부담감이고...
하기는 해야 되는데, 하자니 짜증나고... 이러는 거예요. 이게 옛 언약입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새언약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세 번째는 의지예요. 새 언약은 우리의 의지에도 직접 엑세스 하십니다.
(첫번째는 지식, 두번째는 감정, 세 번째는 의지)
그래서 새언약은, 우리로 믿어지게 하세요. 왜 그런지 몰라요. 그냥 믿어집니다.
제가 대학생 때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는데,
성령 받고 나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경이 100% 믿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믿는 게 아니에요. 믿어지는 거죠.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주체가 '나'이지요. 나의 의지적인 거잖아요.
'믿어진다'고 하는 건 뭐예요? 누군가 다른 어떤 존재가, 나를 이렇게 도우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믿는게 아니고, 믿어진다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게 믿어지고, 성경이 사실이라는게 믿어져요.
왜요? 내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니까!
이게 새언약 이라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의지적) 결정을 도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순종하고 싶어지게 하세요.
우리의 의지적인 결정을 도우세요.
이것도 사실은 감정이 따라오면, 의지적인 결정을 어떻게 보면 그냥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약자들이 연구해 놓은 걸 보니까,
우리의 이해와 감정을 놓고 비교하는데,
보니까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감정이 한 10배 정도 강력하대요.
그러니까 뭐냐면 '내가 이해를 했어, 이거 해야 되는 거구나' 그렇게 해서 하게 하는 힘과,
감정이 확 따라왔어요. '하고 싶어요' 그래서 하게 하는 힘이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면,
결정을 따라오는 거예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3:17
그래서 이 새 언약의 핵심은 뭐냐면 '불받는' 거예요. 불이 뭐예요? 감정!
우리 안에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은 감정을 일으키시는게 핵심이에요.
의지적인 결정은, 우리 안에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주시는 거,
그래서 내가 순종하도록 도우시는 거... 이게 핵심입니다.
이게 새 언약의 핵심이에요.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이 불을, 이 마음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치는 말
오늘 여러분은 어떤 언약의 기초하고 계십니까?
옛 언약입니까, 아니면 새 언약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새언약은, 새로운 법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것은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은, 하고 싶은 것이고 섬기고 싶은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 소원함이 새언약의 비밀이에요.
............................................
주1)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했던 존 번연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인인 존 번연 목사님이 '설교하지 말라'는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번연 목사님께 다가와 아무도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가셔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뵙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근데, 얼마쯤 가다가 목사님이 되돌아오셨습니다.
왜 오셨냐고 묻는 간수에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맙지만,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영국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 목사님이 감옥에 있는지 확인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간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셔서
목사님도 살고, 저도 살았습니다.
이제 저는 목사님께 아까와 같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