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nKnfxLIIoRU
◈내 안에 숨은 요나 욘4:1~4 2025.01.15.
우리 어린이 친구들을 위해서 우리 한번 박수로 환영합니다. 짝짝짝짝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요. 설교가 쉽지 않은데,
설교하는 1시간 동안 여기 다 앉아 가지고, 안 떠들고 집중해서 메모하고,
전부 다 볼펜 들고 지금 메모하려고 이렇게 힘쓰는데, 여기서 인물이 안 나겠습니까?
뭐 역사의 인물이 나올 것입니다.
지금 중고등부 친구들도 많이 와 있어요. 얼마나 귀여워요. 얼마나 사랑스러워요?
◑자, 우리는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혹은 나쁜 사람이다'
이런 얘기를 하죠.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그러는데,
가만히 보면 이렇게 딱 구분하기가 어려워요.
다 누구에게나 한 사람 안에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들어 있어요. 공존하는 거죠.
내 안에 악이 있고, 또 내 안에 선이 있고...
또 선을 행할 마음도 있고, 악을 행할 마음도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가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딱 구분 짓기가 어려운 거에요.
어느 날에는 내가 착한 사람이 되어 있다가, 어느 날은 악한 사람이 되어 있는 거죠.
어느 날에는 내가 가룟 유다처럼 행하다가, 어느 날에는 내가 또 예수님 같이 살기도 하죠.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심리학에서도 '경계선 인격장애'라는게 있죠.
그는 극단적이에요. 사람을 좋고 싫어함을 너무 극단적으로 하는 사람,
그를 '경계선 인격장애자'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때는 막 우상으로 막 열렬히 막 추종하다가,
어느 순간 아주 사소한 이유로 극도로 안티가 되는 거예요.
한때는 광팬이었는데, 어느 사소한 문제로 인해서 마음이 획 바뀌면, 이제 돌변하는 거예요.
'막 그냥 이제 죽인다' 이렇게 나오기도 해요.
그러니까 사람을 바라볼 때 '신 아니면 악당' 이분법으로 너무 극단적인 감정이 오가는 거죠.
이걸 '경계선 인격장애'라고 말해요.
요나는 경계선 인격장애처럼은 보이지 않아요.
근데 굉장히 감정 감정적 기복이 심합니다. 업앤다운이 심합니다.
감정적 극단을 오고 간다는 거죠.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하다는 거죠.
요나는 처음에는 불순종합니다. 근데 물고기 뱃속 이후에 그런 하나님께 순종하죠.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불순종이 있는 거예요.
불순종을 감추고 순종하고 있는 거죠.
겉으로 순종하는 것은, 겉만 보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요나는, 처음에 불순종은 노골적이었죠. 겉으로 드러난 불순종이에요. *욘1장
누가 봐도 그건 불순종이죠. 요나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사람들도 알아요.
근데 두 번째는 순종을 했습니다. 문제는 불순종이 숨어 있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이 불순종은 요나만 아는 것입니다.
노골적인 불순종도 나쁜 것이지만, 사실은 순종처럼 보이는 불순종이 더 문제입니다.
이 죄는 어쩌면 요나도 모를 수 있습니다.
불순종을 숨기고서 순종하는데, 요나 자신도 자기를 모를 수 있습니다.
자신은 순종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불순종이에요.
이거는 어디에서 벌어지는 일이냐면, 무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여러분, 제일 무서운 것은, 나도 모르게 짓는 죄입니다.
그럼 뭐 대책이 없는 거잖아요.
내가 알고 짓는 죄면... 그것도 나쁜 거죠.
근데 모르고 짓는 죄는... 내가 죄를 지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요나는 지금 자기가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불순종이죠.
자기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어야 했는데,
'내가 괜히 순종하여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 거거든요.
그래서 요나는 계속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거죠.
이렇게 순종을 해 놓고도 마음으로는 순종이 아닙니다.
죽어도 내가 옳았다고 주장을 하고 싶은 거죠.
▲여러분, 요나는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 기회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실패합니다.
물고기 뱃속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 다시 시작할 때는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어요.
물고기 뱃속에서는 눈물로 울부짖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하나님이 못마땅한 거죠.
물고기 뱃속에서는 시편을 외우며 기도했습니다. *욘2장
그러나 그는 시편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요나는 본문 욘4장에서 매우 화가 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어요.
근데 지금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워요.
요나는 지금 매우 고통스러워합니다.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옵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는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지금 바뀌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여러분, '살려달라' 이렇게 절규하는 그 기도도 참 처절하지만,
더 처절한 것은 '죽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저를 살려 주세요' 그런 기도도 참 힘든 일이죠.
근데 지금은 죽여 달라는 거예요. 살고 싶은게 아니라 죽고 싶다는 거죠.
이것은 자기 연민 self-pity 에 심하게 빠진 모습이에요.
엘리야도 그랬잖아요. 자기 연민에 빠져서 '나만 홀로 남았사오니' 하면서 죽기를 구하죠.
선지자들이 많이 겪는, 어떤 힘든게 있는게 사실인 것 같아요.
자, 요나의 입에서 극단적인 말이 나옵니다.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게 낫겠다' 4:3
이게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러분, '죽고 싶다'는 말은 언제 하는 겁니까?
내가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할 때, 내가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무가치함을 느낄 때,
내 존재에 대한 극도의 그 무가치함을 느끼는 거예요. '난 존재할 가치가 없는 거야'
이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죠.
가끔 이런 생각이 우리도 들 때가 있어요.
'하나님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사는게 사는게 아닙니다. 죽는게 낫습니다.'
지금 이제 요나는 일종의 시위를 하는 거죠.
여러분 4:1절에서 요나가 분노하는 걸 보았습니다. 심히 싫어하고 성을 냈습니다.
여러분, 이 분노가 어디로 발전되고 있습니까? 자살충동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분노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분노의 감정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르는 거죠.
이 분노나 자살은, 모두 충동적인 감정의 극단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그래서 분노의 감정을 잘 다루지 않으면, 결국은 이게 부정적으로 흘러간다는 거예요.
'죽고 싶다.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 선지자가 이제 막 나가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낯으로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는가? 적국이 망한 것이 아니라 더 잘 됐다'
요나는 지금 독기가 바짝 올라 있습니다. 요나의 심리 상태는 극도의 불안정세입니다.
그런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선지자가 어떻게 이런 지경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나는 가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습니까?
자기 연민에 빠지는 때...
어던 분은 '내가 나이가 너무 들어서, 내가 뭘 살 가치가 있나? 자식들에게 방해만 되고,
부담만 주고... 내가 무슨 살 의미가 있나? 죽고 싶다....'
또 몸이 아픈 분들, 너무 오랫동안 몸이 아프면 '하나님,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하죠.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 놓으실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어요.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거기서 빠져나오세요.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 거죠.
여러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걸 찾아내야 돼요.
내가 모르니까 그렇지... 그걸 찾아내야 돼요. 반드시 있어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유명한 영화 <불의 전차>에서 에릭 리델은 올림픽 육상선수죠.
그는 명대사를 날립니다. '나는 달릴 때 너무 기쁘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달린다'
'하나님은 나를 달리도록 만드셨다. 그리고 나는 달릴 때 기쁨을 느낀다!'
그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달리면서 느끼는 거죠. 우리도 그걸 느껴야 사는 거잖아요.
저는 설교를 하면서 제 존재의 가치를 느낍니다. 저는 설교하는게 너무 행복해요.
저는 설교시간이 빨리 돌아오기를 늘 기다리고 있어요. 그게 너무 행복한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실 때,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요나의 문제는 뭘까요?
4:2절에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은혜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게 아니에요.
그런 선지자로서,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나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있겠나?' 이렇게 했었겠죠.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직접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근데 온전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한 집에 아버지와 부자지간으로 사는데도 아버지를 잘 몰랐어요.
아버지가 뭘 원하는지를 모르는 거죠.
큰 아들이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어요? 아버지에 대한 오해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어떤 분입니까?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분이에요.
아버지가 언제 가장 기뻐했습니까?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왔을 때,
왜요? 그것이 아버지의 전부였기 때문에!
눅15: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근데 큰 아들은 아버지의 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기뻐하는 아버지 때문에, 화를 냅니다.
'이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 맞나? 제 정신이신가?' 뭐 이랬겠죠.
'동생보다, 동생을 두둔하는 아버지가 더 나쁜 거 아니냐?
어떻게 이런 탕자 아들을 받아주고 잔치를 여냐? 미친 아버지 아냐?'
화가 날 대로 난 거예요.
그리고 이 요나의 모습과 얼마나 오버랩 돼요. (똑같아요)
자기는 아버지의 명의 순종을 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난 순종할 대로 다 했다는 거예요.
자기 의로 가득 차 있어요.
근데 아버지는 나에게 염소 새끼 하나도 안 잡아 주고...
여러분, 큰아들은 아버지 마음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예요.
뭘 순종했다는 건지 알 길이 없죠.
자기 방식으로 아버지께 순종한 거예요.
여러분, 여기에서 모든게 꼬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눅15장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참 잘 표현한 거예요.
근데 15:7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그러니까 여러분, 이거를 오늘 현대적 버전으로 바꾸면,
여기에서 수천~수만 명이 예배 드리고 있는 것도 기뻐하지만,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일날 한 사람이 주께 돌아오면
수천~수만 명이 예배 드리는 그것보다, 하나님은 그걸 더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일을,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시는 거죠.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그렇게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어디에 있느냐? 잃어버린 자를 찾는 거라는 거예요.
그것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니까요!
우리가 복음 전도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요?
여러분, 그러니까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 라고 했을 때,
니느웨의 그 수많은 백성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근데 요나는 화가 팍 나 있는 겁니다.
이렇게 화가 나 있는 큰아들은, 영락없이 그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죠.
종교적 열심은 있었으나, 정작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얘기예요?
심지어 하나님의 그 행하심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선지자!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이게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뭘 하고 있느냐?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했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순종처럼 보이는 불순종입니다.
여기 요나는 극도로 지금 그걸 (니느웨의 부흥, 회개) 싫어하죠.
니느웨 심판을 받지 않고 회개했다는 사실!
그는 순종해서나 실패했습니다. 순종했어나 실패했어요.
그건 참 순종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걸림돌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그저 무지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그것으로 인한 폐해가 너무 커요.
신앙생활이 자꾸 헷갈리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왜 실망했을까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요? No
여러분,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는 끝이 없습니다.
요나는 여러분,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여러분, 요나를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쉽게 요나를 비난하는데,
그는 믿음으로 살려고 사실 애를 썼어요.
니느웨까지 간 거예요. 나름 노력한 거예요. 애를 쓴 거예요.
신앙생활을 잘해 보려고 했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그래도 그냥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간 거란 말이에요. 근데 어느 순간에 한계의 부딪치는 겁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다는게, 결코 쉬운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거죠.
그는 하나님께 완전히 등을 돌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까지예요. 힘이 드는 거예요. 심히 마음이 어려워요.
신자들만이 겪는 고뇌가 있어 보여요. 하나님 따라가려고 하는데 힘이 드는 거예요.
근데 말은 못해요. 근데 자꾸 불만이 쌓여가요...
◑드디어 하나님과 요나의 논쟁이 시작이 됩니다.
4:4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게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요나가 성내는 걸 보셨어요. 화내는 걸 다 보셨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성 내는 것을 다 보십니다. 우리 안색을 다 살펴 보십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형 가인의 안색을 묻죠. 하나님이 '네 안색이 변함이 어찜이냐?'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세요. '요나야,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욘4:4
요나는 그냥 짜증이 아니죠. 근데 하나님은 참 젠틀 하세요. '화를 왜 내니?'
여러분, 하나님은 질문을 하세요. '왜 너가 성을 내느냐? 성을 내는 게 옳으냐?' 하고
질문을 던지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거는 장소를 묻는게 아니죠. '너가 왜 거기에 있느냐?'는 거죠.
가인에게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건 단순한 질문이 아니에요.
굉장히 존재론적인 질문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성경은 질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도 질문하는 거를 좋아하세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러분, 예수님은 질문의 대가이세요.
신약 복음서에 예수님이 하신 질문이 몇 개냐 하면 350여 개가 돼요.
여러분, 질문을 해야, 그들이 생각을 합니다. 또 생각이 있어야,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사람들의 생각에 불을 지릅니다.
모든 학문은 질문을 통해서 발전되죠. 깨달음도 질문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신앙의 질문을 가지고 오신 분은
이 집회를 통하여 많은 답을 얻어갈 수 있습니다. 질문이 없는 분은 그냥 가십니다.
설교를 들어도, 그냥 왔다가 가시는 분이 있고,
평소에 질문이 있는 분은, 이 설교를 통하여 답을 찾고 갈 수 있어요.
여러분, 철학이 뭡니까? '왜 존재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묻는 게 철학이잖아요. 그냥 막 흘러가는 대로 사는게 아니고,
'나는 왜 돈을 벌지?' 질문을 해야 되잖아요. '왜 내가 공부를 하지? 왜 학교를 다니지?'
여러분, 질문해야 돼요. '내가 왜 교회를 다니지? 내가 왜 예수를 믿지? 왜, 왜?'
질문을 해야 돼요.
여러분! 질문이 사유(사고)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거예요. 본질에 집중해 가는 거잖아요.
여러분, 마귀는 질문하지 못하게 해요. '그냥 살아!' 생각을 못하게 하는 거예요.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게 해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여러분?
무지 속에 사는 거예요. 마귀가 그걸 노리는 겁니다.
이단들은 생각을 많이 못하게 해요. 그냥 막 암기해 가지고 달달달 외우게 하고,
반복하게 하고, 무조건 따라오게 만들어요. 집단 무뇌아 정서가 일어나요.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을 두고,
스캇 펙의 박사는 '생각의 결여'라고 얘기했어요.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 보았더라면, 그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독일의 나치하의 600만 엄청난 유대인들 죽이는 일을 자행했던 아이히만을
전후에 재판을 받게 되죠. 근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너무도 평범한 동네 아저씨 처럼
보였다는 거예요. 이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의 실무자예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냥 우리 동네 에서만나는 아저씨 같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어떻게 저렇게 평범하게 그지 없는 사람이, 저토록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한나 아렌트 라는 작가는, 여기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어요.
뭐냐면 '아이히만의 악은, 그가 특별한 악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 생각이 없음, 무사유... 이게 6백만 대학살의 원인이었다는 게
한나 아렌트의 분석입니다.
생각 없으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한나 아렌트가 밝힌 것이죠.
여러분, 생각이 없으면 현실 감각이 떨어져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전혀 감정의 요동이 없는 거예요.
공감력이 전혀 없어요. 마치 외계인과 같아요.
아이히만은 나치의 끔찍한 명령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그는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현실과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한 거예요.
여러분 생각이 중요합니다. 사유하고 관조하는 삶이 중요해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 신앙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신앙은 이대로 좋은 건지?
내가 어디에서 빗나갔는지... 왜 내가 이렇게 계속 맴돌고 있는지...
왜 본래의 자리로 자꾸 돌아가는지...'
요나는 계속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퇴보
'왜 지금 이렇게 성을 내고 있는지... 왜 화가 이렇게 나는지...'
여러분, 우리 일상에서도 '왜 자꾸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지? 왜 이렇게 자꾸 부딪치는지?'
'왜 이런 갈등이 계속 일어나는지?'
'왜?'라고 하는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아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네가 성을 내는게 옳으냐?' 라는 질문은 4:4
지금 현실을 벗어나서 회피하고 있는 요나를, 끌고 와서 현실에 직면하게 하는 거죠.
▲요나는 지금 자기의 세계 안에 갇혀 있어요.
'요나야, 네가 성을 낼 이유가 뭐냐?' 참 하나님이 요나를 곱게 다루세요.
'너 선지자 맞냐? 은혜 받은 사람 맞냐? 너 물고기 뱃속에 갔다 온 거 맞냐?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너 맞냐? 너가 지금 행동하는게 지금 상황과 어울리냐?
너 때문에 내가 창피하다. 얼굴 좀 펴라!' 하나님은 이러셔야 마땅합니다.
근데 하나님은 참으시죠. 인내하시죠.
하나님은 분노의 원인을 다루십니다.
▲여러분, 분노는 누구나 합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세월이 흐르면, 분노를 안 하면 좋겠는데
일평생 우리의 감정이 분노를 하게 돼 있어요. 신분과 상관없이 분노가 일어나요.
특별히 한국은 이 분노가 집단 증세를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이 '일본인들의 집단적 심리는 두려움' 이라고 그래요.
두려움, 그게 가장 일본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이라는 거죠.
근데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 심리 증상은 '분노'예요.
심리학자들이 동의해요.
그래서 한글 '홧병'이라는 것도, 영어 사전에 'Hwabyung'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한국인에게는 홧병이 다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분노, 적개심, 그리고 한恨 이런게 다 어우러져 있는 거예요.
이게 폭발하면 무서운 거예요.
지금 우리 한국 사람들한테 지금 이게 많아요. 지금 분노가 막 응어리져 있어요.
이건 한국이 어려운 시대, 극난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이게 만들어진 거예요.
울분이나 이런 것들이 막 있는 거죠.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는 거죠.
이 분노의 근원이 뭡니까? 삶이 어떤 사건에 자극을 받을 때 일어나는 거죠.
근데 이 분노의 원인은 다양해요. 실망, 절망, 내 어떤 뜻이 거부 당할 때, 상처난 감정들,
그냥 분노가 단순한 분노도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분노,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노는 뿌리가 깊어요. 분노의 원인이 여러 가지 문제들과 복합적으로
얽혀 있을 때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몸을 떱니다. 갑자기 맥박이 빨리 뜁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화를 팍 냅니다. '아버지' 라는 단어 하나만 들어도. 그건 사연이 있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화를 폭발적으로 내는 것에 사람들이 놀래죠.
'왜 갑자기 저러지?' 그건 그의 분노의 뿌리가 깊은 거죠.
요나가 내는 화도 비슷합니다. 그냥 짜증이 아닙니다. 해묵은 분노입니다.
자기 내면 속에 쌓여져 있는 분노!
근데 이걸 가리켜 "숨겨진 분노"라고 그럽니다.
분노가 숨겨져 있는 거예요. 평소에는 표가 안나요.
그런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팍 터져 나오는 거죠.
요나 자신도 모르고 있는 이게 (화, 분노) 있어요. 자기도 모르게 폭발한 거죠.
주변에 놀랄 정도로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감정이 쌓여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니느웨는 자기가 갈 곳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냥 도망친게 아닙니다. 충분히 자신이 다시스로 가는 근거를 확보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막대한 돈을 들여서 (배를 전세 내서) 다시스 행 배를 탔어요.
그러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우여곡절 끝에, 요나는 돌이켜 니느웨로 오게 됩니다.
니느웨 성에서, 좌우지간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그대로 전했습니다.
니느웨가 사흘 만에 망한다는 메시지!
근데 반대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당황스럽게 만드십니까? 왜 나를 바보로 만드십니까?'
'내가 하나님께 순종했잖아요. 그럼 내가 뭐가 되나요?'
그게 자기 마음 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죠.
하나님은 요나의 화를 다루십니다. 요나의 분노는 절대적인 분노입니다.
이것을 원어적으로 보면 '요나에게는 큰 악이었더라'
그가 분노하고 성을 냈던 것이 하나님 요나에게는 큰 악이라는 거예요. 무슨 악이죠?
하나님께 대 드는 악이었죠.
그냥 분노한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드는 거예요.
그 니느웨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
그 분노는 하나님을 향해 표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요나에게 실수를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잘못 전달하셨습니까?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됐죠? 요나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고집이 엉켜져 있는 거죠.
요나가 하나님을 바로 알았다면, 니느웨에 일어난 일들로 인하여 함께 기뻐했어야 됩니다.
그런 일에 자기가 쓰임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습니다. 화낼 일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 가장 힘든 스타일이 누군가 하면,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고는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이에요. 아무도 그를 넘어지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넘어졌습니다.
여러분, 자기 혼자 오해하고, 자기 혼자 시험에 들고, 자기 혼자 상처를 받고 그러면,
대책이 없어요.
분노의 감정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스스로 고립되어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자기를 늘 정당화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원문을 보면, 4:2~3절에 '나'라는 단어가 아홉 번 나옵니다.
짧은 말 속에 '나, 나, 나, 나...'
여러분, 대화를 하는데 '나'라는 말이 강조될수록,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기 중심적이에요.
내가 옳다는 거죠.
그러면 그걸로 끝나지 않죠. 자기를 정당화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걸로 끝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틀렸다는 거예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거예요.
이런 억지 논리, 이 극단성... 이게 오늘 우리 한국을 뒤집고도 있는 거죠. *탄핵, 동서 갈등
▲요나는 이미 상당히 알고 있어요
4:2b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근데 무엇이 문제죠? 그가 지금 화가 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니느웨에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이 틀렸다는 거예요.
은혜로우신 하나님 때문에, 그는 화가 잔뜩 나 있어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에, 열을 받고 있어요.
'노하기를 드디 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신경질이 나 있어요.
니느웨를 확실하게 망하도록 해 주셨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하나님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요나를 화나게 한게 아닙니다.
화를 낸 요나에게 문제가 있어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문제가 있다면
요나가 성을 낸 것은 정당한 거겠죠.
하나님게 문제가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나를 포함한 모든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만약에 요나처럼 성을 내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요나도 이미 죽었습니다.
그는 고래밥이 아니라, 상어밥이 되었을 거예요.
결국 무엇을 발견합니까? 요나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었어요. 그건 다행이에요.
문제는 요나예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요나는 왜곡이 됐다는 거예요.
요나가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거죠.
요나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롭고 인애가 크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걸 알았어요.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신이 두 번째 순종한 이유는,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시지만, '전혀 노하지 않는 분은 아닐 것이다' 라고 믿은 거예요.
이거는 요나가 가지고 있는 자기 나름의 신학이에요. 정통신학이 아니에요.
요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의 간극!
그는 자신의 기준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어느 순간 변질되기 시작한 거예요.
'자기화'시킨 하나님!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다 같이 읽지만, 나중에 보면,
같은 본문을 같이 읽고 나서도, 나누면 각자 다 다른 얘기를 해요.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것을 아멘이라고 해요.
성경에 줄을 그어 놓고, 페이지를 접어 놓은 것이 따로 있어요.
성경 전체 속에서 그 구절을 보아야 되는데, 그 구절에 꽂혀서 다른 말씀이
잘 들어오지 않는 거죠,
▲요나의 분노는, 전적으로 자신의 오해와 착각해서 비롯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요나의 분노를 분석합니다. 이 분노는 결국은 뭐냐는 거예요.
이 분노는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분노를 추적하면, 분노가 강한 사람, 분노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강한 욕구가 있어요.
자기 욕구, 욕망하는게 있어요. 자기 신념이 강해요.
그게 안 이루어지면 화가 나는 거예요.
자기중심적으로 하는데 그게 막히고, 봉쇄되잖아요. 그럼 분노가 올라오는 거예요.
참을 수 없어 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야 돼요. 요나는 한 고집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뜻을 정하면,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스타일!
오죽하면 하나님이 물고기 배 속에 집어넣겠어요?
근데 거기에 갔다가 오고도 이게 안 죽는 거예요. 분노의 뿌리는 뭐예요?
자기 갈 길을 가겠다는 의미가 강해요.
그렇게 살면, 고생하는 거예요. 고생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르다를 보세요. 그런 잔뜩 화가 나 있어요.
겉으로는 주님을 대접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주님을 매우 불편하게 해 드리고 있어요.
여러분, 대접이라는게 그렇지 않아요. 대접하는 사람 중심이 아니고,
대접을 받는 사람 중심으로 대접을 해야 되죠.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리는게 아니라,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 모습도 보기 싫은 거예요. 매우 싫은 거죠.
모든 걸 자기가 주도해 가려고 합니다. 자기 열망이 너무 강하면,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이런 분노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왕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분노하지 않아요.
여러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요나는 겉으로는 하나님에게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통하여,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틀 안에서 활동하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니느웨에 대한 처신에 화가 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에게 할만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요나의 분노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결론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탓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동네북처럼, 원망하고 탓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있는게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에게 화를 내 본 적이 있습니까?
필립 얀시가 쓴 책 중에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 보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일상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하나님 그분을 고쳐야 합니까? 아니면 나를 고쳐야 합니까?
성경과 내 생각이 부딪치면, 성경을 고쳐야겠습니까? 내가 고쳐져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삶을 체휼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너무 잘 알고 계세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은 인간이 되어 보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자기 식으로, 자기 수준에서 재단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심판하기로 하셨으면 심판을 하시지, 왜 자비를 베푸시는지?'
그 하나님의 심적 변화가 매우 못마땅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이키심은, 하나님의 줏대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이 얼마나 크신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나는 단지 그 자비와 긍휼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드러났을 때,
심통이 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요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폭이 큰 것이 어떻게 문제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분노를 한다면, 요나가 분노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분노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분노를 가라앉히시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이 참으시는지 모릅니다. 실망을 한다면, 하나님이 하셔야 돼요.
배신감을 느끼면, 하나님이 느끼셔야 돼요. 지금 거꾸로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한 비유를 드시죠.
어떤 종이 임금에게 엄청난 빚을 졌어요.
그래서 어느 날 주인이,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한 없는 자비요 은혜였습니다.
근데 그 탕감받은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자신에게 아주 조금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납니다.
자기가 탕감 받은 거에 비해, 눈곱만큼 자기에게 빚을 진 사람을 만납니다.
근데 그 빚을 갚도록 막 압박을 가합니다.
조금만 참아 달라고 간청을 하는데도 허락하지 않고,
결국 그 사람을 그냥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 소식을, 큰 빚을 탕감해 준 주인이 넣고, 그를 불러 책망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그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은혜를 입은 자는, 은혜를 베풀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데
요나는 그걸 모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것과, 진짜 그렇게 살아가는 건 달라요.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입었는데도,
요나는 그 은혜를 주위에 풀어내는 삶을 사는게 아니에요.
은혜를 받았는데, 주위에 그 은혜를 풀어내지 못해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은혜를 베풀어야 되는데,
요나의 삶의 현실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보고 '왜 그들을 망하게 하지 않으셨나요?' 따지고 분을 냅니다.
여러분 내가 받은 은혜와, 내가 지금 따로 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또 받았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의 잣대를 대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은 화가 난 요나를 받아주십니다. 징징거리는 선지자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그래도 오늘 이 본문 속에서,
화가 난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거는 괜찮은 것 같아요. 여러분, 화가 나도 기도하세요.
울화통이 터져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세요.
고상한 얼굴로만 하나님을 찾지 마시고, 상한 감정을 가지고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그게 기도예요.
시편이 그렇잖아요. 시편의 시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조금 더 숨기지 않습니다.
죽고 싶다면 죽고 싶다고 하나님께 얘기하세요.
물론 화 안 내고 기도하면 더 좋죠.
그러나 화만 내고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 화늘 내어도 기도하는게 훨씬 더 좋죠.
요나는 살기 위해 기도하고, 죽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화가 난 상태로 나와도, 요나를 받아 주십니다.
우리의 입술의 말과 묵상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거죠.
화를 참지 못하는 요나에 비해, 하나님은 인내하십니다.
그분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4:2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뭘로 나타나죠? 인내로 나타납니다.
성질을 팍팍내는 요나와 다르게, 요나서의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인내하십니다.
여러분. 사랑이 뭐? 오래 참음, 곧 인내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특징들 가운데 첫 번째가 뭐죠?
'사랑은 오래 참고...'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분을 발하셨다면, 모든 게 끝이었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요나를 보면서 무엇을 봅니까?
혹시 나는 요나를 닮지는 않았는지?
닮았다면 어떤 부분인지?
'내 신앙은 앞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후퇴하고 있는가?'
'내 안에는 늘 다시스로 가려고 하는 의지가 숨어 있지는 않는가?'
무엇보다도 요나는 감정적 기복이 심합니다.
'나는 감정에 끌려다니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그 하나님의 마음은 뭐죠?
하나님은,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큰 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죠.
그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뻐하는 하늘의 그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는 아는가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에게 순순히 순종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순순히 겉으로는 순종하는데, 사실은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니라, 내면에 숨겨져 있는 나,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와,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나,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만, 사실은 불순종으로 일관하고 있는 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요나를 파트너로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문제는 나의 자아입니다.
자아가 강한 나, 결코 죽지 않는 이 에고,
여러분 우리가 자아가 죽어야 주님과 동행이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는 자격 없고 자주 실패합니다.
실패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끝내 데리고 가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
그 손길을 의지하고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이 요나가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그 한 사람을 통하여
그 위대한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여러분, 우리가 순순히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복된 길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내 안에 온전히 자원하는 심령을 주시고, 기쁨으로 주를 따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오해를 지워 주시고, 하나님을 더 알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