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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38장 선택의 기회를 지날 때

LNCK 2025. 4. 11. 10:5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서  

https://www.youtube.com/watch?v=rCXm7oLodE8 정리

선택의 기회를 지날 때            렘38:14~28                 2018.11.12. 

렘37장부터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수난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배경 속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시드기야도, 예레미야도, 그리고 예루살렘도, 
마지막 최후의 순간 앞에 서 있고,  *함락 1년 전, 주전 588년 경
멸망이 코 앞에 있는 상황 속에서, 
본문 렘38장은 두 사람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공통적으로 드러납니다. 

한 사람 예레미야와, 또 한 사람 시드기야가 
멸망 앞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은 그 두 사람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어제 본문(렘37장)을 살피면서, 하나님은 이 마지막 순간을 걸어가고 있는 
예레미야에게 '은혜로 고난을 주셨다' 라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는 예레미야에게 고난으로 나타났고, 
그 고난 속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즉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자기도 걸으면서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될뿐만 아니라, 
순종을 넘어선 고난은,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은혜 가운데 있었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은혜로 고난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렘38장은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멸망 앞에서 있는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이 동일하게 은혜를 주셔서, 그에게는 또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38:17~18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멸망 앞에서 있는, 이 마지막 때를 지나고 있는 시드시야에게도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는 기회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네가 만일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할 것이요. 
네가 만일 저렇게 하면, 저렇게 할 것이라는'
이 '만약'이라는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결국 시드기야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리고, 결국은 다른 길로 가버려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가 열왕기하에서도 볼 수 있죠.

◑그러면 왜 그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했는가요?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올바른 선택의 기회를, 시드기야는 놓쳐버렸나요?


▲1. 믿음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 그는 그 기회를 지나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였는가요?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한번 살펴볼 때에, 
먼저는 믿음의 문제가 있었다...라는 것이죠

본문의 배경을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세워졌던 
남유다의 20번째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마지막에 바벨론 왕을 밀어내고, 친 애굽파와 함께 손을 잡고, 애굽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당시에 시드기야의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과, 또 (거짓)선지자들은 
'이집트를 믿으면 살 수 있다' 라고 조언하는 상황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시드기야가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낸 것이 아니고, 
사실 그에게는 두 가지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네가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망한다' 라는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있었고,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자기의 더 가까운 곳에서는, 더 큰 목소리로 
'네가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망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있었던 것이죠. 
이게 대세였죠.

그리고 그 중간에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말, 인간적인 생각을 더 믿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잘못된 선택을 할 때는, 
반드시 우리 마음속에서 '믿음'의 문제가 작용하게 되어 있고, 
본문의 시드기야는 잘못된 믿음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처음 인류였던 아담과 하와도 
비슷한 선택의 순간에 섰을 때에,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무엇입니까? 

'네가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러나 가깝게, 아주 부드럽게 들렸던 사단의 말이 있었는데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가운데 서서, 무슨 말을 믿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결국 중간에서 선택을 잘못했던 것이죠. 

그러니 본문의 시드기야도 잘못된 선택을 했고, 기회를 잡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2. 그리고 또 한 가지, 시드기야의 잘못된 선택의 큰 이유는, 바로 두려움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대신,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다...라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38:19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지금 그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들을 두려워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미 먼저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들이 있었거든요.

그들이 나중에 바벨론에 항복한 자신(시드기야)을, 헤코지할까봐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드기야는, 자기의 고관들 중에
앞서 항복한 친바벨론파도 두려워하였고, 
지금 실세를 잡고 있는 친애굽파도 두려워하였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모든 사람들을 다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에는, 나를 두렵게 하는 대상이 있는데 
그것이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 앞에, 시드기야가 서 있는 것이죠. 

38:5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예레미야)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시드기야 왕 주변에는 참으로 안타깝게, 친애굽파 고관들이 실세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38:1절에 나오는 그다랴, 바스훌, 유갈 등은 모두 친애굽파 고관들로 봅니다.

그러니까 시드기야는 이들과 함께 정치를 하고 있었고, 
내가 만약에 이들에게 거스르는 어떤 행동을 하거나 결정을 하면, 
이들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이 두려웠고, 그게 문제가 될 것이 두려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드기야는 사실 바른 말을 하고 있는 예레미야를 살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이 예레미야를 죽이자고 하는 친애굽파 백성들과 혹은 고관들이 두려웠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하나님보다, 
현실적으로 그들이 더 실제적으로 느껴지고 더 두려웠기 때문에 
사실은 이런 선택을 했다.. 라는 것입니다. 

이 불안에 떨고 있는 시드기야를 보면서, 지금 남유다의 패망이라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서 있는 시드기야를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본디오 빌라도 입니다. 참 그도 안타까운 사람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넘겨주는데, 그 일을 담당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그 이름이 사도신경에 회자되고 있는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근데 그에게도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그가 참 유명한 질문을 했죠.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진실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은,
예수에게는 죄가 없다.. 라는 것이고, 그를 죽이면 안 된다.. 라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올바른 재판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도 꿈을 꾸었는데 '이 사람을 괴롭게 하지 말라' 라는 이야기들을 들었고, 
결국 '이 사람은 십자가에 처형시킬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매를 치고 놓아주려고도 했었지만, 그때 어떻게 합니까? 
유대인들이 '만약에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가이샤에게 배반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그것보다 더한 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며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해서, 

총독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뭐냐면 민란, 소요사태 입니다. 
그래서 '혹시 식민지 국민들이 일어나서, 이 식민지 정부를 전복시키지는 않을까? 
내 이미지가 실추되지 않을까? 총독으로서 잘못된 정치를 했다고 로마로 소환되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역시 유대민족의 지도층들을 두려워하고, 유대 군중들을 두려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빌라도는, 그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서,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사람들의 말이 두려워서
또 '군중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그게 두려워서' 
결국은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넘겨 버리는 것이죠. 

본문의 시드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렸고 
지금 계속해서 자기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대한 두려움이 
결국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적용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선택을 강요 받습니다. 

뭘 알지도 못하는데, 돐잔치를 할 때부터 우리는, 거기에서 뭘 잡을 것인가를 계속해서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아기는 아무 생각 없이 잡았는데, 
마치 그것이 그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기뻐하기도 하고 또 좋아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것은, 사실 우리 인생에서 계속 이어질 선택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다가 보면 어떤 치명적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나 역시도 시드기야와 같이, 빌라도와 같이,
어떤 중차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갈림길의 선택 앞에 놓일 때가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대로 선택할 것이냐?
근데 이 선택은, 많은 위험과, 환난과, 막대한 손해와, 내 인생의 존폐가 걸린 
아주 위험한 선택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선택하는 순간, 내 모든 걸 다 잃을 것 같아 보이죠. 

-아니면, 현실에 굴복해서, 시드기야처럼, 빌라도처럼
쉽고 안전한 선택을 할 것이냐?
그러나 이런 '믿음 없는 선택'은, 시드기야에게, 빌라도에게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얼마 후에 성의 틈사이로 야반도주하다가
바벨론 군대에게 붙잡혀, 자기 두 눈이 뽑히고, 
자기 아들들이 자기 목전에서 죽는 것을 보게 되고, 
또한 자기 마저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처형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따르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너무 처절했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어느 순간에,
위험한 처지에 놓이거나, 혹은 징계 앞에 설 때면, 
하나님은 언제나 곧바로 우리를 치시지 않고, 피할 길을 주시거나 
오늘 본문의 시드기야에게 마지막으로도 기회를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는 언제나 '하나님의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 마지막으로 돌이킬 기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기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할 기회!
그러나 그것은 항상 위험과, 손해와, 망할 것같은 두려움으로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어떤 큰 유혹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이후로 내 삶은, 정말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천당과 지옥으로 갈리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은, 내 마음의 문제, 결국 '내 믿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있고, 은혜로 충만하며, 성령으로 푹 젖어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우선시하는 믿음의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거기에 따르는 어떤 큰 두려움을...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약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그 두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원리와 상반되는 선택을 했을 때는, 
본문의 시드기야처럼 되는 것이죠. 당장은 위기를 모면할지 모르나,
아담과 하와의 선택처럼, '실낙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1차포로 때 잡혀갔죠) 
느부갓네살 왕보다, 하나님이 더 두려웠고, 하나님을 더 경외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그는 믿음으로 승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선택이, 나 한 사람 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지막으로 23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8:23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려가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읍으로 불사름을 당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내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그 중간에 내가 있고,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이 예루살렘 성읍이 있습니다. 
물론 백성들도 있죠.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그냥 홀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 속에 있고, 책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 한 중간에 있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내 아들과, 내 아내와, 자녀들이, 
그리고 내가 책임지고 있는 이 성읍 사람들이 
평안하고, 불 사름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들은 시드기야와 함께 망했습니다)

아니면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는,
이 나의 믿음 없는 선택 때문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존재들에게, 똑같은 어려움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인간관계는 참으로 복잡합니다. 
어떤 집안에 자녀의 문제가 있거나, 부모의 문제가 있거나, 친족의 문제가 있으면, 
사실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나의 잘못, 부모의 잘못된 선택은... 주위에 영향을 미친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딤전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답정너’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이는 ‘답은 정해져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라는 의미입니다.

 

28절,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렀더라'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나 요즘 다이어트하는데 살 좀 빠져보이죠?”

라고 질문했을 때,

어떤 강심장의 남편도 여기서 “아니, 그대로인거 같은데”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방이 할 수 있는 답을 미리 정해놓고 하는 질문을 답정너라고 합니다.

 

시드기야는, 아니 시드기야를 포함한 유다의 모든 백성들은 예레미야에게

답정너의 태도로 질문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여호와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은 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평안을 약속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메시지, “유다는 멸망할 것이다. 살고 싶으면 항복하라”고 전했습니다.

이에 대해 고관들을 위시한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고,

시드기야는 자기 안위만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다의 사람들과는 달리 구스사람 즉 이방인 에벳멜렉의 헝겊과 낡은 옷이

위기 속에 있는 예레미야를 구해주었습니다.

마치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조롱받던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군사적 방법이 아니라, 저주의 형틀 십자가로부터 우리에게 구원이 미쳤던 것처럼,

기대하지 않는 곳을 통해 구원의 손길이 미쳤습니다.

 

최근 세상의 많은 이슈들은 기독교를 향하여 답정너의 태도로 질문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주지 않는다고 하면,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래서 최소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대답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이러한 타협적인 상황이 우리를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한치의 두려움이나 물러섬 없이 선포할 수 있는 담대함을 겸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가 결국 우리에게 경제적인 피해를 가져다주고,

직장과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악인의 장막에 거하며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전의 문지기로 사는 것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자기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할지라도

예레미야에게 구스 사람이자 내시였던 에벳멜렉의 헝겊과 낡은 옷이 구원의 도구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되시는 나사렛 사람이자 목수였던 예수님,

그분이 지셨던 최악의 형틀, 십자가의 은혜에 기대어 꿋꿋이 선다면,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의 강이 우리를 통로삼아 세상 가운데 흘러가

이 시대를 새롭게 하는 평화의 경작자로 든든히 세워져가게 될 것입니다.

 

....................................

 

◑절별 해석

 

38:1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마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본장은 예루살렘 함락이 가까와 옴에 따라 예레미야에 대한 핍박의 정도도

더욱 심해져 감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유치(留置)되어 있으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을 계속하였음에도 분명하다.

 

여기 언급되고 있는 그다랴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착고에 채운 바스훌(20:1-3)의 아들이며,

유갈은 여후갈(37:3)과 동일인이다.

그리고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시드기야의 특사로 예레미야를 찾아갔던 자이다(21:1, 2).

 

이들은 모두 시드기야의 심복으로 당시 유력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친애굽파를 대표하는 자들이었으리라 짐작된다.

 

38: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본절 내용은 12:9에 언급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은,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칼', '기근', '염병'과 같은 용어들은 예레미야가 빈번하게 사용하던 말이다.

'항복하는 자'(하이체)의 원래 의미는 '밖으로 나가는 자'란 뜻이다.

 

포위 공격이 감행되고 있던 이런 시점에서, 항복을 권유한다는 것은 반역으로 보였을 것이며,

예레미야를 체포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38: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이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일신상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이 예언을 선언하는 데에 있어서 주저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한편, 이 예언의 요지는 34:2, 22, 37:8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 말을 반복해서 선포했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런 선언은, 그 당시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반국가적 소요를 야기시키는 선동적 발언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38:4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방백들은 반역죄 내지는 선동죄를 적용하여 예레미야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이 약하여졌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이는 예레미야의 투항 권고로 인해 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는 말이다.

 

예레미야가 여기서 반역적 패배주의자로 몰리고 있음은 분명하나, 민족 지도자들 중에도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38:5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이는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자기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는 의미이다.

시드기야는 이를 통해서, 자기가 그들의 조언대로 시행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밝힌 셈이다.

 

시드기야는 참으로 나약한 군주였다. 그는 선지자를 존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관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무죄한 자를 희생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어떻게 보면 당시의 실세는 왕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백들에게 있었으며,

이들은 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25-27절 참조).

 

물론, 그의 등극 자체부터가 이미 정통성을 상실케 하였을 것이다.

즉 그는 여호야긴이 포로로 붙잡혀가고 난 다음,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위에 오른 꼭두각시 왕이었으며,

또한 국민 대다수에 의해서 진짜 왕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살아있었고, 시드기야는 그의 삼촌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여호야긴이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왕의 무능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이를 '왕은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런 힘도 없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38:6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맛소라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예레미야를 붙잡아 넣은 구덩이를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26절의 내용과 다소 일치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주석가 니콜슨은 왕의 아들 말기야란 말을 누락시키고 있으며,

NEB 성경도 이와 같이 하고 있다.

 

니콜슨은 이곳의 구덩이를 37:11-16에 언급되고 있는 구덩이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데,

그 근거로서 37장의 요나단의 집이 시위대 건물에 포함되어 있었던 복합 건물로 본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고대에는, 건조한 여름 날씨에 대비하기 위해

겨울비(우기)를 받아둘 물저장고(또는 우물)가 예루살렘에는 많았다.

 

그러므로 본문의 우물을, 37:16의 '뚜껑 씌운 웅덩이 (개역엔 토굴 옥 음실)'과

동일한 곳으로 본다. 물저장고가 ‘옥’도 되고, 또 뚜껑을 덮어놓으니 컴컴했으며,

만약 거기에 물이 남아 있었으면, 예레미야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예레미야를 깊은 우물속에 넣어 저절로 죽게 함으로써

피를 흘리게 하는 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 같다(창 37:18, 19 참조).

 

한편, 전형적인 구덩이는 석회암을 파내고 만들어졌는데, (방수가 됨)

이것은 직경 약 90cm 정도의 좁은 입구와

실제로 물을 담아 두고있는 곳은 상당히 깊었다.

이곳에서 예레미야를 밧줄을 이용해 집어 넣고 꺼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안으로 출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13절).

 

38:7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우리는 구약에서 흔히 성문에 앉았다는 기록을 보게되는데,

이 성문은 공개 재판이 열리던 곳이었다.

 

38:8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예레미야의 구출은 바로 이 친절한 구스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사람은 확실한 죽음의 운명에 처한 예레미야를 구출하기 위해 신속한 행동을 취하였다.

 

예레미야는 훗날 다가올 예루살렘 파멸 때, 그가 구원받게 될 것임을 약속한다(39:15-18).

에벳멜렉은 급히 왕에게 찾아가 호소하였는데,

왕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사건의 전말을 호소하기에 아주 적합했을 것이고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38:9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이는, 그가 죽은 자나 다름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그곳에 던졌을 때는 조만간 진흙에 빠져 질식해 죽지 않으면,

굶어서 죽을 것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따라서 에벳멜렉은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다급한 상황을 전달함으로써

갈등에 사로잡힌 왕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했다.

 

38:10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여기서 시드기야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설령 방백들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예레미야를 구출해 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38:11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헝겊과 낡은 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밧줄로 내리며

 

'헝겊과 낡은 옷을 취하고...내리우며'

왕궁에는 의복이나 전투복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으며,

사절에게나 또는 공신들에게 선물로 줄 의복을 보관기도 했다.

 

그러나 에벳멜렉이 바로 이러한 창고에서 이것들을 취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그는 왕궁의 광에서 낡아 버린, 그래서 다시 사용할 수 없는 그런 의복들을 취하여

그것들로 밧줄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선지자에게 내려보내, 그것을 타고 올라오도록 하였다.

 

38:12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38:13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에벳멜렉은 대단히 사려가 깊고 또 지략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밧줄이 예레미야의 겨드랑이를 상하게 할 까봐,

헝겊을 먼저 대고, 그 아래에 밧줄을 대라고 조언한다.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 올림으로써 기진 맥진해 있을 예레미야에게

힘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37:17-21에는 예레미야가 구출되어 시드기야 왕과 밀담을 나누는 거사가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에서 보는 것과 같은 구출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양쪽 모두에 그가 시위대 뜰에 머물게 되었다는 기록이 담겨 있다(13절, 37:21 참조).

 

38:14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물으리니 한 마디도 내게 숨기지 말라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구출된 후에 이어지는 왕과 예레미야 간의 비밀 회담이 기록되고 있다. 3

7:17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본문에서는 비밀 회담이 이루어진 장소가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분명하게 지적되어 있다.

 

이 문에 대해서는 다른 곳의 언급이 없어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추측컨대 왕궁과 성전을

직접 연결하는 것으로서, 왕이 개인적으로서 출입했던 그런 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8:15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결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예레미야는 왕의 성품이 나약하고

또 그의 신하들에게 끌려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에게 여호와로부터 온 말씀을 전해준다고 해 봐야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임을 알았다.

 

시드기야는 앞서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한 바 있으며,

또한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하였었다(32:1-5).

그러나 지금은 사태가 대단히 심각하였기 때문에

그는 예레미야를 죽이지도 않을 것이고 또 방백들의 손에 넘기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6절).

 

38:16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으며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도 아니하리라 하는지라

 

38:17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네(시드기야)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왕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이 성의 안전 여부가 달려 있었다.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바벨론 왕의 방백들은 애굽군의 진격을 차단하고

다시 예루살렘 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바벨론군 장군들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당시 느부갓네살은 수리아의 립나에 있었다(39:5, 6).

 

38:18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시드기야에 대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이전과 동일하였다

(2, 3절 , 21:8-10 참조). 왕과 백성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항복이었던 것이다.

항복을 권유하는 이 메시지로 인해서, 앞서 그는 방백들에게 붙잡혀 구덩이에 던져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다 방백들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였으나,

적국인 갈대인들의 방백들은 그의 생명을 구해주게 될 것이다.

 

38:19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여기서도 시드기야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다시 노출된다.

그는 예레미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드기야의 말에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갈대아인들에게 투항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의 충고에 의해 투항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말을 따를 용기가 없었다(5절 참조).

그는 방백들을 두려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바벨론에 투항한 자들의 적대감이나 푸대접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38:20 예레미야가 이르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아뢴 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이는 결국 시드기야의 모든 두려움의 원인이

여호와께 대한 불신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시드기야가 참으로 염려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게 하고

그래서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상할 수 있는

온갖 두려운 상황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거기에 기우(杞憂)를 더하고 있었다.

 

38:21 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38:22 보라 곧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 여자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

 

예레미야는 이어서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항복하기를 거부할 때 생겨날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이는 친구들에게 배반당했음을 나타내는, 익히 알려진 관용적인 표현이었던 것 같다(20:10 , 41:9 참조).

진흙에 빠짐을 보고도 물러갔다고 하는 내용은 시69:14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먼저 투항했던 자들의 조롱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자신의 후궁들로부터 이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더 수치스러울 것인가!

 

당시 정복국의 왕이 패전국의 궁녀들을 모조리 취해가는 것이 상례였다(삼하16:21, 22 참조).

한편 이 짧은 내용의 노래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게 될 때의 시드기야에게 적용될 것이긴

하지만, 이는 또한 예레미야가 최근에 겪었던 사건(진흙에 빠짐)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6).

 

38:23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려가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읍으로 불사름을 당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시드기야의 운명은

구덩이에 던져지게 된 예레미야의 운명과 평행을 이루며 기록되고 있다(6절 참조).

여호와께서는 에벳멜렉을 사용하여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어'(13절)

죽음을 면케하여 주셨으나,

여호와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시드기야는 그를 해할 갈대인에게로 '끌어냄을 입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여자들은 왕의 자식들을 낳은 왕비들이었을 것이고

앞절(:22)의 여자들은 젊은 궁녀들이었을 것이다.

 

38:24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말을 어느 사람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너는 이 말을...알게 하지 말라'

우리는 시드기야가 선지자의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선지자의 충고에 대한 시드기야의 말은 예레미야에게 침묵을 지키고 있어라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예레미야의 말이 진실됨을 깨닫게는 되었으나

여전히 신하들의 반발 등의 여러가지 걱정거리들 때문에

그 충고를 실행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바벨론의 포위 공격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를 논의한 것 자체를

방백들에게 말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시드기야의 바람이었다.

 

38:25 만일 고관들이 내가 너와 말하였다 함을 듣고 와서 네게 말하기를 네가 왕에게 말씀한 것을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에게 숨기지 말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또 왕이 네게 말씀한 것을 전하라 하거든

38:26 그들에게 대답하되 내가 왕 앞에 간구하기를 나를 요나단의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 마소서 그리하여 거기서 죽지 않게 하옵소서 하였다 하라 하니라

 

여기서도 신하들을 두려워하는 시드기야의 유약한 심성이 드러난다.

그는 한편으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언급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였지만,

그것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신하들의 입장에 굴복되어 있었다.

 

그는 항복하고 싶어도 신하들이 행여나 반역을 꾀하여 자신을 살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득세한 신하들은 대부분 친애굽 내지는 반바벨론 정책을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38:27 모든 고관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물으매 그가 왕이 명령한 모든 말대로 대답하였으므로 일이 탄로되지 아니하였고 그들은 그와 더불어 말하기를 그쳤더라

 

예레미야는 왕이 명령한 대로 말했으며,

방백들은 더 이상 예레미야를 구출해 내도록 왕이 명한 사실은

이미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던 듯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레미야의 대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도 당파적이면서도 강력한 권세를 형성하고 있던 방백들에게 불필요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나약한 왕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38:28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렀더라

 

예레미야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고

다만 자신의 구출 문제만을 그들에게 말함으로써 그 사건의 일말은 끝났다.

이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도록 허용이 되었던 것이며,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충고를 실행할 용기가 부족하긴 하여도

왕궁으로 돌아와서 과연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고심하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