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잔치의 주인공 눅14:12~24 2024.02.18. 설교스크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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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배경
눅14: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또 바리새인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려고 할 때,
그때 한 그 수종병, 즉 비정상적으로 몸이 붓는 수종병자 한 사람이 있었고, *부종
예수님께서는 많은 바리새인들이 엿보는 가운데서도, 그 사람을 고쳐 주시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예배의 날이고, 또 사랑과 섬김을 베푸는 날이지만
안식일은 구원의 날이 되어야 된다... 라는 것을 저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어지는 눅14:7~11절까지는, 잔치에 왔던 손님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잔치에 초대를 받아 상석, 또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마라
그러면 더 높은 사람, 더 중요한 사람이 왔을 때
오히려 그 자리에서 밀려나는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끝자리에 앉아 있으면,
주인이 보고 윗자리로 안내할 것이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게 되고,
또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게 된다'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주인은 바리새인의 지도자로 있는 한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초대한 것은
예수님을 존귀히 여기며 잘 섬기고자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남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며,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해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시험할 의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자리에는 수종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며,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를 고쳐 주시는지, 동료 바리새인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던 거죠. :2
이에 예수님은 바리새인 지도자가,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으며,
정작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자히심과 선하심이 공급되는 자비에는 외면하고 있는
외식[위선]을 끄집어내며 그를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4:12~14절까지는, 잔치를 초대한 주인한테 주신 교훈입니다.
14:15~24절까지는, 그 와중에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주셨던 비유적인 교훈입니다.
자 그러면, 12절부터는 잔치를 배설했던 주인한테,
'잔치를 배설하게 되면, 이런 손님들은 웬만하면 초대하지 말고 이런 손님들을 초대해라'
그래서 초대해야 될 대상에 대해서 예수님이 교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눅14: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위 12절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은 집주인 host 에게 '이런 사람들은 초대하지 마라'
그런데 4부류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친구들, 형제들, 친척들, 잘 사는 이웃들의 네 부류죠.
'웬만하면 이런 사람들은 초대하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4부류의 사람들은,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우리가 만약에 잔치를 배설하게 된다면, 꼭 초대해야 되고,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초대 하지 마라' 하는 이유를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12절 마지막에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그러니 '너한테 갚을 수 있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초대하지 마라'하고 교훈을 하셨습니다.
반대로 13절은 초대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14: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여기에도 똑같이 4부류가 등장을 합니다.
가난한 자들, 몸이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13절에 등장하는 4부류의 사람들이
21절에도 똑같이 이 4부류의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을 초대해야 할 이유를 14절에 이렇게 설명하죠.
'왜냐하면 그들은 갚을 것이 없기 때문에'
◑14: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왜냐하면 그들은 갚을 것이 없기 때문에... 대접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먹는 음식을 대접하면, 사람들이 기뻐합니다만,
당시에는 음식이 매우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은, 더욱이 하루에 두끼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은, 정말 큰 은혜를 베푸는 일이요, 생명을 공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이 큰 복이 되는 이유는,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4
우리가 신앙고백할 때도, 우리는 심판을 믿습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의인과 악인의 심판을 믿습니다.
그 심판의 날에 '너희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이 말씀은 우리들의 평소 생각이나 관념과는 다른 말씀이죠.
우리 한국 사회는 결혼식, 장례식, 칠순잔치, 또는 명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잔치를 베풀기도 하고, 또 잔치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잔치에 참여할 때, 우리들 마음에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상호성입니다.
내가 거기에 가서 참석을 하면, 나중에 그도 우리 잔치에 참석할 것이고,
또 내가 거기에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드리면, 그들도 내 경조사에 봉투를 줄 것이다...
이런 상호성(호혜성)에 근거해서, 잔치를 베풀기도 하고, 또 참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이 상호성을 기반으로 하는 대접 문화를 뒤집어 버리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눅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6: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6: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우리가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할 때, 이런 마음으로 하죠.
언젠가는 받기를 바라면서, 지금은 좀 부담스럽지만
꾸어 주는듯한 마음으로,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칭찬받을게 무엇이냐 죄인들도 다 그렇게 한다'
그러면서 35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똑같이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신 분이시다'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결국 도전하신 것은 '너희들의 환대, 너희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주고받는 교환이 되어서 안 되고, 너희가 베푸는 사랑은 무엇이 되어야 되느냐?
상호 교환이 아니라, 그저 주는 선물이 되어야 된다' 이거는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일반인들은 자기를 사랑해 주니까, 자기도 그를 사랑하고
또 상대방이 나를 선대해 주니까, 나를 그를 선대하는 겁니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내게 돌려줄 거니까, 내가 그에게 사랑, 인정, 선물을 줄 수 있죠.
그런데 예수님처럼, 우리들의 삶이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보상'이 되려면
근거가 있어야 되잖아요. 우리가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행동을 해야 되는가요?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위 구절은, 기독교 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부채도 지지 마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 빚진 사람들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아가페 사랑을, 하나님께 부채로 빚진 사람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 아가페 사랑, 아가페 사랑의 환대를 받은, 즉 빚을 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갚느냐?
바로 (하나님께 갚는 대신에) 사람들에게,
어떤 보상도 없이, 조건도 없이, 되갚음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가난하고, 또 장애가 있고, 저는 자들, 맹인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진 빚을, 그 부채를 이들에게 갚아라!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가 없이 남들에게 은혜와 선물을 베푸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
그래서 마25:40절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나중에 마지막 심판대, 양 편에 선 사람, 반대쪽 염소 편에 선 사람으로 나뉘는데,
그 양 편에 쓴 사람들한테 결국 예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야 너는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나를 환대하고 잘해줬다'
그러니까 양편에 선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그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겠습니까? 보상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환대의 베풂을 되갚아 줄 수 없는 사람, 보상해 줄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작은 사람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잔치를 벌였던 주인에게 교훈을 하고 계십니다.
'네가 앞으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할 때는, 사랑과 환대를 베풀 때는,
상호 교환, 주고받는 거래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그 부채를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에게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베풀어주는 선물과 베풂이 되어야 된다'... 라고 교훈하셨죠.
바로 그 사람들이 되갚아 주지 않기 때문에, 되갚아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심판 때에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은혜를... 네가 누리는 복된 자가 될 것이다...말씀하셨죠.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섬기고 대접할 때,
상호 거래, 상호 호혜가 아니라,
그저 대가 없는 선물로, 그들을 사랑하고 환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 갚음을 받을 것이고,
지금 이 세상도 좀 더 평안해지고 또 밝아질 것입니다.
▲근데 제가 한 주간 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동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제가 얼마 전에 '기아대책'에 모임이 있어서, 제가 저희 교회를 대표해서 참석했을 때,
그분들이 정말 저희 교회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해 주셨습니다.
지금 저희 교회가 (아마 '기아대책'을 통해) 470명이 넘는 미얀마 아이들을 입양을 해서,
지금 매월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미얀마 아이들이 커 가지고, 우리한테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나중에 그 아이들에게 덕을 볼 수 있을까요? No
그런데도 우리가 그 아이들을 돕는 일을, 아무런 보상을 별로 기대하지 않고 돕는 일을
지금 계속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마음인 것입니다.
또 얼마 전에 한국에 와서, 의수(인공 팔)를 제작해서,
지금 캄보디아로 돌아갔던 그 현지인 형제한테, 우리가 득 볼 날이 있겠습니까? No
또 저희가 그 코로나 3년 동안 우리가 하지 못했던 행사 중에 하나가
한 달에 한 번씩 어려운 형편에 계신 어르신들을, 저희 교회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합니다.
그런데 2024년 2월 달에, 3년만에 재개했습니다.
그 분들께 말씀도 전하고, 또 식사도 대접하고 할 때,
뭐 당연히 그분들한테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그런다고 우리가 그분들한테 큰 득을 보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기뻐하시고,
또 교회에 있는 많은 이주민들, 여러 가지로 그분들을 섬길 때,
어떤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우리 이주민들을 섬기는 거는 꼭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다'
근데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이분들한테는 보답을 기대하기가 어려우니까
'바로 의인의 부활 때 하나님께 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거죠.' :14
또 저희 교회 인근에 소재한 계명대학교에, 지금 외국 유학생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요즘 한국 K-드라마, K-Culture 가 뜨면서, 지금 정말 한국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사님이 계명대에서 외국인 유학생들 서클 동아리를 하나 만들었는데,
거기에 가입을 하겠다 라고 뜻을 표시한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희 교회가, 이번에 기숙사 오픈을 하면
그때 선물 꾸러미를 하나씩 갖다. 놓을 겁니다.
그들이 그래서 조금이라도 우리의 도움을 받고,
그런 일을 계기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관계가 형성이 되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우리가 서로 함께 만나서
한국어도 서로 주고받는 (한국어 강습?) 이런 기회도 만들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보면 우리한테 직접적으로 큰 혜택이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선행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겁니다.
◑14: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위 말씀의 배경 중에 하나가 사25:6절입니다.
사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앞으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짓밟힐 이스라엘에게도
새로운 구원의 날이 올거다... 라고 말씀하실 때, 그 구원의 날을 무엇으로 묘사했느냐?
신학적으로는 '메시아 연회'라고 합니다. '메시아 잔치'죠.
하나님 나라를 바로 '잔치'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산에서 연회를 베풀 것이다.
거기에는 온갖 풍성한 음식과, 오래된 포도주와 기름진 것들로,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껏 누리게 되는... 그 메시아 잔치에 그들이 참여할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미지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람이 뭐라고 하죠?
'바로 이 메시아가 배설하는 잔치에서, 그 하나님 나라에서 떡 먹는 사람은 참 좋겠습니다' :15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16~24절까지 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요.
이 비유는, 마22장에 기록된 비유와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4: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근데 우리들이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거는,
한국에서 결혼 잔치 벌이는 것과, 그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잔치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뭔가 하면, 유대인들은 다분히 오늘날 '예약 문화'와 같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벌이기 전에, '정말 꼭 왔으면 좋겠다' 라는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냅니다.
그래서 그 초대장을 받고, 참석하겠다고 반응한 사람의 숫자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 숫자의 근거해서 잔치 준비를 다 하고,
그때가 딱 되면 다시금 종을 보내서, 손님을 모셔옵니다.
◑14:18~20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3명 나오는데, 이들은 누구냐?
분명히 잔치 초대를 받고서, 처음엔 오겠다고 반응한 사람들입니다.
그 응답에 근거해서 잔치 준비가 다 되었는데,
오늘날로 하면 노쇼죠. No show 잔치자리에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19절에 '소 다섯 겨리'는, 소 10마리입니다.
이 세 사람은 하나같이 참석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을 그 당시 유대인 문화의 비추어서 살폈던 학자들은
'야 이거는 정말 어설픈 변명이다' 라고 논평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잔치 베푸는 시간'이 오후 늦게 한 거죠.
거기는 낮에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결혼잔치를 저녁에서 밤늦게까지 합니다.
해가 지고 시원해지는 시간에 잔치를 하는 거죠. 그게 중동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이 거절한 사람들은, 주인을 모독하거나, 주인이 배설한 잔치를
그냥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서 꼭 작심한 사람처럼 행동을 했다는 겁니다.
결국 이들은 누구를 뜻하겠습니까?
유대인들, 유대인 지도자들이 여기에 들어갈 수 있겠죠.
분명히 주인의 잔치에 오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막상 예수님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가 펼쳐졌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가족 핑계 대고, 비즈니스 핑계 대고, 재산 핑계 대면서
거절하고 사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주인의 선택은 무엇이냐? 21절을 보시죠.
◑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여기 네 부류의 사람은, 앞에 13절에서
예수님이 잔치에 초대하라고 했던 그 네 부류의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원래 이 4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사람들이죠. 그런데 주인은 '이 사람들 빨리 데려와라' 명령을 하게 되고,
이 명령에 종들이 순종을 합니다.
◑14: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종들이 주인의 명령대로 했는데, 아직도 잔치에 빈 자리가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23절에 주인이 한 번 더 종에게 명령합니다.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근데 여기서 '강권 compel' 이라는 말은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아낙카조
소위 물리적 힘을 사용해서 개종시키는게, 강권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푸시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팔을 비트는 식으로 강압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강권'과 같은 단어(아낙카조)가 쓰인 다른 구절의 용례를 보면,
마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막6: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
행26: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행28: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어쩔 수 없이)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고후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내게) 시킨 것이니'
주인은 잔치에 빈자리가 없이 가득차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강권해서 이 잔치의 빈 자리를 다 채워라' 하고 주인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4절에 주인(하나님)은 경고를 하십니다.
결국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도전하신 것은,
지금 바리새인,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은 정말 복되겠습니다' 말은 번지르하게 하는데, :15
실제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실제로 초대하니까... 초대받은 사람들은 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말은 '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초대를 거절하더라'는 것입니다. 먼저 초대받았던 사람들이!
결국 그 비어 있는 자리에, 지금 사람들이 볼 때는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했던
가난하고, 몸이 불편하고, 앞을 보지 못하고, 다리 저는 사람들이
그 잔치 자리에 참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비유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시는 결론적인 교훈은 명확하죠.
먼저는 우리가 바로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지만,
'가겠다'라고 긍정적으로 반응은 했지만,
막상 때가 되었을 때는 바로 거절하게 되는...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되지 않아야 된다는 거죠.
우리가 말로만, 생각으로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는 이미 시작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지금 재산, 가족, 비즈니스 핑계 대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가장 첫 자리에 두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라는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렇지만 또 하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사느냐?
한마디로 잔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거죠.
하나님 나라의 잔치하는 삶을, 그들은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잔치하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분은, 저하고 신학교에서 친했던 친구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님은 정말 자수성가하신 분이셨어요.
입지전 적으로 성공을 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자식들도 얼마나 그냥 닥달하면서 키워서,
둘째, 셋째는 다 서울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죠. 제 친구였던 큰 아들,
당연히 그 큰 아들도 서울대에 들어갈 것으로 아버지는 기대를 했었는데,
아버지가 한이 생겼어요. 왜냐면, 그 첫째 아들이 그렇게 공부도 잘 했는데
그 아버님 표현대로 하면 '예수에 미쳐가지고, 교회에 빠져 가지고'
고등학교 때 공부해야 되는데,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그냥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섬긴다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 아버지의 기대를 못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큰아들을, 얼마나 아버지가 구박했는지 몰라요.
'예수에 미쳐서 교회에 빠져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래서 제 친구는 평생 정말 구박을 받았는데,
근데 그 아버님이 그렇게 성실히 최선을 다해서 살다가,
대기업의 임원이셨는데, 결국은 50대 중반에 암을 갖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얼마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됐는데,
그런데 그때 누워 계실 때, 큰 아들이 가서 예수님을 전하면
아버님은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루는, 그 아버지가 꿈을 꾸었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을 불러서 묻더랍니다.
'야,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다...'
그 분이 대기업 임원으로서, 전 세계를 다니면서 많은 파티와 리셉션에 참여했는데,
꿈에, 자기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잔치,
그런 잔치가 펼쳐져 있더라는 겁니다. 그 잔치에 주인 호스트가 계시고,
자기를 초대를 하시더라는 거예요.
자기 평생에 이런 잔치는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무슨 꿈이냐?'고 큰 아들(제 친구)에게 묻더라는 겁니다.
큰 아들은 '그 잔치의 주인은 예수님 같아요!'
그러자 그 아버지의 마지막 질문이 뭔가 하면
'아들아, 나도 그 잔치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큰 아들은, 그 일을 계기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아버지, 천국의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바로 예수님을 믿으면 갑니다!'
감사하게도 그 아버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 <잔치>
근데 이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만 경험하는게 아닙니다.
지금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와 있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이미 참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을 더욱 더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제 친구 하나가, 과거에 청년들 때는 이런 거 많이 하잖아요.
뭐 방학이라든가 이런 때가 되면, 아이들이 착한 마음으로 막 작정 기도 하잖아요.
20일, 30일 작정해서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이런 친구들이 많았어요.
제 친구 하나가, 20일 정도 '작정 새벽기도'를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이니까,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죠. 늘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만 하루를 빼먹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빼먹고 잠을 자는데, 그날 아침에 꿈을 꿨는데,
한 어르신이 나타났는데 엄청난 선물꾸러미를 어깨에 메고 나타나셨어요.
그 어르신이 계속해서 누구를 기다리고 계시더라는 거예요.
계속해서 누구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분이 기다렸던 사람이 안 오니까,
그 엄청난 선물을 주시려던 분이, 그냥 너무 슬프게 그 자리를 떠나가버리더라는 겁니다.
깨보니까 꿈이었어요. 이 친구가 일어나서, 속된 말로 통곡을 했어요.
'나는 나만 작정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하나님은 내가 작정했던 그 시간에,
바로 그 엄청난 선물을 주시려고 주님이 기다리고 계셨는데,
내가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구나...' 하고 통곡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꿈을 잘 안 꾸고, 또 못 꾸는 사람인데,
그렇게 꿈을 잘 꾸는 사람들도 있나 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주일 예배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풍성한 잔치에 참여하는 날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의 선물을 받는 시간입니다.
저는 그런 뜻에서, 제가 지난 주간에 기도했던게
'하나님, 주일 날이 우리 성도들에게 구원의 날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바로 이 주일 날,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한량없는 귀한 선물을 받는
잔칫날이 되게 해 주십시오!'
주일은 무엇이냐? 바로 천국을 이 땅에서 먼저 맛보는 날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장치 우리가 가게 될 그 천국을 먼저 맛보고 경험하는
그 잔치를 먼저 지상에서 맛 보는 날이죠.
우리 앞선 세대들은, 정말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신앙생활 하면서도,
늘 천국을 사모하면서 이런 찬양을 자주 부르셨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들의 삶이 아무리 정말 높은 산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에 있다 할지라도
내 주 예수를 모시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바로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후렴 가사대로 '할렐루야 찬양하세 ...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렇게 천국 잔치의 삶이, 우리 삶에, 가정에, 교회 공동체에
늘 풍성하게 임하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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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움에 대하여
아주 가끔씩 무슨 협의회나 위원회 등에서
간담회니 시상식이니 하는 명목으로 제가 초대 받을 때가 있습니다.
관공서 체질이 아닌 저는 행사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런 행사 특유의 "왕썰렁"한 분위기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지독하게도 경직된 분위기, 틀에 박힌 가식적인 의례들, 그 뻣뻣함,
그 어색함이 너무도 싫어 가능하면 그런 장소를 피하곤 하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제게 가장 긍정적인 모습은 철저하게도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은 지극히 인간적인 삶이었습니다.
가장 인간다운 인간, 너무도 소박하고 정겨운 인간중의 인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이게 진정한 영성이요, 능력의 종이 아닐까요?
복음서에서도 강조하듯이
예수님은 먹음직스런 음식을 눈앞에 두고 절대로 체면 차리지 않으셨습니다.
잔치 집에 가시면 포도주도 한잔 드시고 흥얼거리시면서
잔치분위기에 어울릴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어 축제를 즐기셨습니다.
반대로 초상집에 가서는 복받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펑펑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너무도 잘 어울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예수님을 확인한 어린아이들은 멀리서부터 달려와 예수님을 껴안았습니다.
병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 고통 중에 죽어 가는 사람들마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을 향해 몰려들었기에
결국 "군중들을 해산시키는 일"이 제자들의 주된 임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잔치에 오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답다는 말은, 예수님을 닮아 자연스럽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다 자연스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따뜻한 인간미를 풍기는 사람, 정겨운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볼 줄 아는 포근한 사람,
그가 바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한없는 자연스러움, 끝없는 부드러움 그 자체이신 분이기에
"완고함", "경직성", "형식주의", "겉치레", "자기 과시" 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십니다.
한 공동체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면, 딱딱하다면, 썰렁하다면,
서로 눈치를 살핀다면, 서로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잔머리만 굴린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그리스도교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굶어도 떳떳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중시하는 가치관
<오늘날 노숙자/행려인들 중에.. 많은 분들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1919년 3월 22일, <삼일 만세운동>이 터진 직후, 조선총독부 거물급 관리들은
한국 주재 선교사 대표 9명을 초청하여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이 좌담회의 목적은, 삼일운동의 근본적 원인을 분석하여
재발을 막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나온 선교사들은, 모두 20년 이상 조선에 살았던 고참들이었고
게일과 마팻은 30년 이상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선교사들이 의견을 모은 것은.. 한국인의 마음세계(정신세계)는
물질세계를 압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이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조선인은 육신이 편해도 마음이 편치 않으면,
육신의 위안을 큰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고대문화로부터 이어졌고, 그 작용이 복잡합니다.
나는 그 정신세계를 존경합니다.”
평양에서 30년 간 전도한 마팻 선교사는, 이 회의에서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조선인에게 물질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것’, 곧 ‘의’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굶어도 사람답게 대접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른 대접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 회의에서 선교사들이 분석한 것은
조선인은 굶어도 떳떳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미년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은, 물질적으로 보다 나은 생활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굶어도 정의가 강 같이 흐르고
사람답게 대접받는 성경적인 인간 해방을 외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노숙인/행려인들 가운데도,
그 정신세계가 올곧고 꿋꿋하신 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노숙인이라고 혹시 무시했다가는.. 큰 실수 하는 것입니다.